당시 보천교는 교농일치를 주장해 산업을 일으키고 교육에 힘썼다. 덕분에 이곳에는 기계농업과 잠업, 제직(製織) 등 각종 산업이 발달했다. 보천교가 번창할 때는 1000여 가구가 교당을 중심으로 살고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로 일대가 성시를 이뤘다. 특히 행사가 있는 날은 경상도 강원도 할 것없이 전국에서 신도들이 몰려와 하얗게 길을 메웠다.
보천교는 강증산의 수제자였던 차경석(車京石 1880-1936)이 세운 신흥종교다. 고창출신인 차경석은 1909년 강증산 사후 교단을 세우고 세력을 넓혀갔다. 1920년부터는 전국의 신도를 60방주(方主)로 조직하고 단순한 종교지도자를 넘어 새로운 국가 건립을 천명했다. 자신을 조선과 중국 일본의 천자(天子)로 내세웠다. 당시 나라가 망하고 의지할데 없는 민중들은 강한 민족적 색깔과 메시아적 구원에 희망을 걸었다. 날로 교세가 확산돼 한때 간부급만 50만 명, 신도가 600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처럼 보천교가 민중 속에 자리잡자 일제가 가만 둘리 없었다. 탄압과 내부분열을 꾀하는 한편 회유책을 썼다. 이후 친일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차경석은 1925년부터 4년에 걸쳐 대흥마을 2만평 부지에 대규모 성전(聖殿)을 지었다. 건축물이 45채, 부속건물이 10여 채였다. 그 중 중심교당이 십일전(十一殿)이었다. 십일전은 건평 350평에 높이 30m, 가로 30m, 세로 16.8m에 이르는 당시 조선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목재는 백두산 근처의 침엽수를 베었고 조선팔도의 석재를 모아왔다.
하지만 일제는 1936년 차경석이 세상을 떠나자 교단을 강제 해산시키고 재산을 공매처분했다. 당시 건축비 50만 원이 들었던 십일전은 500원에 팔려 조선불교 중앙종무원에 넘어갔다. 지금의 조계사 대웅전이 그것이다.
그리고 정문이었던 2층 누각 보화문은 내장사 대웅전으로 재건축되었다. 내장사는 6·25 전쟁 때 건축물이 모두 불타버렸다. 석재로 된 대웅전 배흘림 기둥 3개만 살아 남았다. 지난 31일 화재로 내장사 대웅전이 다시 소실되었다. 이번에도 보화문에서 옮겨온 기둥만 남았다. 불타버린 내장사 대웅전을 보며 보천교의 운명이 떠올랐다. 조상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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