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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남의 귀향과 이별

전주한옥마을에 남천 송수남 선생(1938~2013)이 자리를 잡은 것은 3년 전 이다. 선생은 제자나 지인들과 한옥마을의 이곳저곳을 부지런히(?) 찾아다니셨다. 한옥마을 골목길과 카페에서 선생을 뵙게 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거동이 불편해보였지만 언제나 만나는 사람에 대한 따뜻한 인사를 건네고 공간과 사물에 대한 관심을 전했다. 그 즈음 선생의 기운이 한옥마을에 담아지기 시작했었던 것 같다. 노작가의 귀향은 그것만으로도 반가웠다.

 

전주한옥마을은 선생과 인연이 깊다. 한옥마을이 있는 교동은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봄이면 봄대로 꽃이 있었고, 가을이면 낙엽이 세상을 뒤덮었던'한옥마을에서 선생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림을 그리게 된 것도, 그림의 바탕에 한국적 정신이 숨 쉬고 있는 것도 어린 시절과 그 공간이 자리 잡고 있는 덕분이라고 선생은 늘 말했었다.

 

선생의 원래 호는 '완산(完山)'이다. 물론 '완산칠봉'에서 따온 것이다. 후에 바꾸어 사용한 '남천(南天)-남쪽 하늘' 역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으니 고향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의 50여년 화력은 한국화의 지평을 넓혀놓은 수묵화운동에 놓여있다. 선생은 전통수묵의 장점을 일깨워 한국적 수묵의 현대화를 이어낸 1970~80년대 수묵화운동을 이끌었다. 한국적 정신을 표출하는 형식적 기반으로 수묵을 주목한 선생의 열정은 한국 화단은 물론 세계 화단에까지 가 닿았다. 그들은 수묵의 가능성에 환호했으며 '한국적 표현'의 의미에 감동했다. 수묵의 가능성에 눈을 뜨고 한국화의 현대화 작업이 힘을 얻은 바탕에도 선생이 주도한 수묵운동이 있었다.

 

대학교수를 정념퇴임하고 나서는 화폭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통산수로부터 수묵운동의 세계를 열었던 실험정신의 새로운 도발이었다. 간결하고 절제된 수묵의 아름다움이 놓였던 자리에 화려한 채색의 꽃그림이 놓여졌다. 추상 기법에 원색의 온갖 꽃들로 가득찬 그 꽃밭에서 선생은 다시 10여년을 보냈다.

 

귀향 이듬해, 선생은 그 꽃밭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다. 작업실에 후배 제자들을 불러들였으며 근처에 살고 있는 후배예술인들과의 교유를 즐겼다. 한옥마을 안 미술관 건립도 초석을 놓았다.

 

지난 8일 선생이 영면하셨다. 급성 폐렴이 원인이라 한다. 그래서 더 죄스럽다. 갑작스러운 부음 뒤에 황망한 흔적이 너무 많다. 노작가의 열정을 미처 받들지 못한 자책의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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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kime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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