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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갑오년

누군가는 이 역사를 혁명이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혁명이 아니라고 했다. 누군가는 ‘동학’이 앞세워져야 한다고 했고, 누군가는 ‘농민’이 앞세워져야 한다고 했다. 한 시대, ‘난(亂)’으로 폄훼되어 ‘동학난’이란 대중적인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또 한 시대에는 입에 올리는 것조차 거의 금기시되기도 했다. 1894년 연대기를 온통 차지하고 있는 갑오년의 역사 ‘동학농민혁명’ 이야기다.

 

1984년 1월, 고부 농민들은 고부관아를 점령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포학하고 가혹한 정치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봉기해 관아로 쳐들어간 결과였다. 정치기강은 문란하고 매관매직과 관리들의 부패가 만연해있던 조선 사회. 1860년 이후 끊임없이 이어진 민란은 이즈음 절정에 이르러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민란의 화약고가 되어 뇌관만 건드리면 폭발할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부봉기도 조선말기의 이 같은 구조적 모순이 원인이었던 셈이다.

 

봉건적 사회질서를 타파하고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세운 우리 역사상 가장 최대이자 최초의 민중항쟁이었던 동학농민혁명은 한국 근·현대사를 결정짓는 사건이었다. 비록 미완의 혁명으로 끝이 났지만, 청일전쟁을 이끌어내 이전까지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청나라의 쇠진을 가져왔으며 일제가 후발 제국주의국가로 약진하는데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국제적 사건이기도 했다.

 

돌아보면 동학농민혁명은 한국사의 분기점마다 그 역사의 정통성을 확인시켜주었다. 의병항쟁과 3·1독립운동과 4·19혁명, 그리고 광주민중항쟁의 함성에도 동학농민혁명의 숨결은 살아 있었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은 100년이 넘는 동안 역사의 그늘에 있었다. 지배층과 기득세력에 저항했으나 완전한 승리를 이끌지 못하고 물리적으로 패배했다는 물리적 결과가 갑오년 역사를 핍박하고 왜곡하고 뒤틀린 시각으로 재단하게 하는 요인이 됐기 때문이다.

 

다시 갑오년이다. 1894년으로부터 두 갑자(甲子) 뛰어 넘는 해의 의미가 각별하다. 올 한해 갑오년을 휩쓴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와 정신을 일깨우는 기념사업과 재조명 작업이 준비되고 있다.

 

다시 짚어보면 동학농민혁명을 잉태한 것은 동학의 인본주의 사상이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새해 아침, 그 울림이 크다. 갑오년의 역사가 세상을 다시 깨우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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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kime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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