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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 세계관

정조 이후의 혼란 쇠퇴기를 연상시키는 요즘의 상황, 루시안 골드만의 ‘비극적 세계관’을 곱씹는다. 세월호에 갇힌 민초들은 불안과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있는데 위정자들은 엉뚱한 ‘민생’ 챙긴다며 파쟁만 일삼고 있다. 진실이 빤한데 허위의 말장난으로 혹세무민 민심을 어지럽히고 있다.

 

자아의 진실과 세상의 허위 틈에서 고뇌하는 인간이 택하는 태도가 ‘비극적 세계관’이다. 세상이 온통 거짓과 부패 속에 빠져있을 때, 그런 현실에 굽히고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다. 거짓 세상을 버리고 초월적 진실 속으로 은퇴해버리는 것이 하나요, 세상을 진실된 것으로 뜯어고치기 위해 현실 속에서 투쟁하는 것이 둘이다. 그러나 두 번째의 경우 진실과 허위의 간극이 건너뛸 수 없도록 아득하다면 어찌해야 할까? 그 때 취하게 되는 길이 바로 비극적 세계관이다.

 

북유럽으로 서둘러 이민 가방을 챙기는 것이 첫 번째 길이라면 광화문 광장에 모여 기꺼이 동조 단식을 감행하는 것이 두 번째 길이요, 떠나지도 뛰어들지도 못하며 고뇌의 술잔만 기울이며 탄식으로 울분을 삭이는 것이 세 번째 길이리라.

 

그러나 자포자기는 아니다. 진실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을 완전히 거부하지만 현실의 관점에서는 그것을 완전히 받아들인다. 현실이 싫지만 이 현실을 통하지 않고는 진실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없다는 비극적 역설 앞에 고뇌하는 것이다. 그것은 운이 좋으면 밀턴의 〈실낙원〉이나 베토벤의 〈영웅교향곡〉과 같은 위대한 예술로 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포장마차에서의 혁명이나 허한 담배연기로 사라지곤 한다.

 

부재로만 존재하는 진실, 골드만은 이를 ‘숨은 신’(Hidden God)이라 부른다. 한용운 선사는 이를 논개에 빗대어 “죽지 않은 그대가/ 이 세상에는 없고나” 탄식한 바 있다. 다시 신동엽 시인은 이를 먹구름에 갇혀 하늘을 보지 못하는 상황으로 비유했다. 푸른 하늘이 엄존하는데 구름 껍데기에 가려 볼 수가 없다. 그래서 “껍데기는 가라” 외친 것이다.

 

물론 외친다고 사라질 구름이 아니다. 잠시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를 덮을 또 다른 구름이 밀려온다. 정조 이후의 세도정치, 동학농민혁명 후의 일제강점, 4·19의 5·16, ‘서울의 봄’과 신군부, 그리고 오늘 유신의 부활까지!

 

다시 담배를 피워야 하나? 아니면 ‘군도’의 민란 보며 극장에서라도 혁명을 꿈꾸어야 하나?

 

이종민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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