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광왕(백제 무왕)이 ‘지모밀지(枳慕蜜地)’라는 곳에 천도해 새로운 건축물들을 많이 지었는데 제석사에 벼락이 떨어져 석탑이 무너졌다. 초석부분은 남아 사리함을 열어보니 그 안 유리병에 있던 사리가 없었다. 무왕은 스님에게 일러 참회법회를 보게 했다. 이후 다시 보니 사리가 놓여있었다. 무왕은 이에 감격해 사찰을 건립토록하고 그곳에 사리함을 모셨다.’
이 내용에 학계가 특별히 주목하는 이유가 있었다. 기록이 발견되기 6년 전인 1965년, 왕궁리 오층석탑 해체 수리작업이 이뤄졌다. 그 과정에서 푸른 유리병을 담고 있는 사리함과 ‘금강반야경’이 발굴됐는데 여기에 기록된 무왕 관련 내용과 관세음응험기의 내용이 일치했던 것이다.
무왕이 건립했다고 전해진 제석사와 왕궁리 오층석탑이 있는 유적은 불과 1.3Km의 거리. 이 사료는 왕궁 터의 비밀을 밝혀내는 또 하나의 단서였다.
2004년 말, 부여문화재연구소의 왕궁리 유적 발굴조사 결과가 공개됐다. 왕궁리 유적은 계획적인 설계에 의해 축조되었던 궁성의 터였다. 고대 궁성 관련 시설의 대지조성과 공간구획이 온전히 드러난 왕궁리 유적은 완전한 형태의 궁성구조로 학계를 놀라게 했다. 새롭게 드러난 건물지에서는 중요한 유물들이 쏟아지고 궁성 안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공방지에서는 아름답고 정교한 금세공 유물들이 출토됐다.
궁성의 존재는 오래전에 확인됐지만, 궁성의 내부 구조와 생활공간 등의 흔적이 대대적으로 확인된 것은 왕궁리 유적의 실체를 드러내는 중요한 성과였다.
올해는 왕궁리 오층석탑이 해체 복원된 지 50년 되는 해다. 때맞추어 익산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이 포함된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원형을 회복하고 보존하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해진 셈이다. 그래서 더 궁금해지는 일이 있다. 65년 왕궁리 오층석탑 해체 수리 때 사리함에서 나왔다고 전해지는 16개 사리의 행방이다. 그중 다섯 개를 부석사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으니 나머지는 국보로 지정된 사리함과 사리병, 금강경첩을 보관하고 있는 국립전주박물관에 함께 있어야 옳다. 그러나 그곳 사리병에 사리는 없다. 그 사리들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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