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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문화유산

서울 성북동의 한갓진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면 조금 높게 올라앉은 한옥을 만난다. 한국미술사에 큰 자취를 남긴 미술사학자 해곡 최순우 선생(1916~1984)의 옛집이다. 1930년대 서울 지역에서 유행했던 도시형 한옥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고 있는 이 집은 결코 화려하지 않으나 단아하고 정갈한 아름다움이 빼어나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들여놓은 자연과 한옥의 조화가 주는 감동은 그만큼 크다. ‘한국미의 발견에 평생을 바친’ 해곡은 1976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한국미술의 군더더기 없는 아름다움을 정리한 명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 도 이 곳 사랑방에서 집필됐다.

 

‘최순우 옛집’은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으로 지켜낸 ‘시민문화유산 1호’다. 2002년, 성북동 일대에 재개발 바람이 불어 닥치면서 이 집도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이 때 뜻있는 전문가와 시민들이 나섰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시민성금으로 가옥을 사들여 보수하고 복원해냈다. 덕분에 이곳은 시민에게 개방되어 지금은 수백 명이 찾아오는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 되었다. 보존가치가 높은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확보해 시민의 소유로 영구히 보전하고 관리하는 ‘내셔널트러스트’의 힘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셔널트러스트는 시민들의 자발적 모금과 기부 증여를 통해 보존가치가 있는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을 시민 주도로 영구히 보전·관리하는 시민운동이다. 운동의 뿌리는 1895년 내셔널트러스트를 처음 시작한 영국이다. 이 운동은 곧 세계 각국으로 확산돼 많은 나라들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수많은 자연 문화유산을 보전할 수 있게 됐다.

 

우리나라는 1990년대 후반부터 활동을 시작해 2000년 1월에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발족됐다. 길지 않은 역사지만 자료를 보니 강화 매화마름 군락지, 동강 제장마을, 최순우 옛집, 권진규 아틀리에 등 시민들의 힘으로 되찾은 시민문화유산이 꽤 많다. 내셔널트러스트의 가장 큰 과제는 역시 기금마련일터다. 사실 시민들의 성금으로 자산을 마련하는 일은 쉽지 않다. 다행히 이 운동을 주목해 동참하고 나서는 자치단체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정책과 제도를 만들어 내셔널트러스트를 지원하는 일은 반갑다.

 

우리 지역에도 자본과 개발의 목전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유산이 적지 않다. 그런데 대부분이 역사적 가치와 의미만을 내세워 지켜질 수 있는 유산이 아니다. 시민의 성금으로 만드는 시민문화유산, 내셔널트러스트를 주목하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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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kime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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