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 명창은 올해 우리 나이로 여든이다. 세월로 보자면 소리공력이 아무리 깊다 해도 온전히 판소리로만 만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개막 무대에서 힘을 다해 부르는 선생의 흥보가 한 대목에 마음이 울컥해진 것은.
돌아보면 선생의 삶은 특별하다. 그는 어쩌면 전주소리의 맥을 가장 정통으로 이을 수도 있었던 명창이다. 늦은 나이에 소리공부를 시작한 선생은 한때 이 지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리꾼이었다. 좀더 ‘큰소리’를 배우기 위해 서울의 김여란 명창을 찾아 나서지 않았었더라면 전주소리의 맥은 선생에게로 이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선생은 전주소리 대신 정정렬-김여란으로 이어지는 정정렬제 소리의 적자가 됐다. 선생이 당시 화려했던 전주 무대를 뒤로 하고 올라간 서울에서 만난 것이 바로 정정렬제 소리다. 이 소리는 오늘의 소리판에서 좀체 만나기 어렵다. 워낙 고도의 음악적 기교를 구사해 까다롭기로 소문난데다 배우기에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제 치하에서 활동했던 명창들은 대부분 판소리의 형성과 발전에 기여했지만 그중에서도 정정렬은 전통 판소리의 전승과 발전, 변모 뿐 아니라 창극 발전을 주도했다. ‘30년 앞을 내다보고 소리를 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한 평생 자기 나름의 독특한 소리를 꾸준히 개발하고 실험했던 정정렬의 소리는 거친 수리성의 아름다움으로 귀명창들을 사로잡았다.
이 소리를 잇고 있는 사람이 최승희 선생이다. 정정렬-김여란으로 이어지는 ‘춘향가’를 그대로 받은 그는 전주대사습놀이를 통해 명창의 반열에 오른 이후에도 꾸준히 공부하면서 정정렬제를 살려냈다. 그 뿐 아니다. 선생은 판소리를 공부하는 젊은 세대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데 오랜 시간을 보냈다. 지난 95년에 펴낸 정정렬제 판소리 사설집과 2001년 판소리를 오선지에 옮겨낸 악보집 발간이 그 결실이다.
판소리 한바탕을 온전하게 오선보로 옮겨낸 명창은 선생이 처음이었다. 제자와 4년에 걸쳐 이루어낸 판소리 악보집에 대한 평가에 선생은 당시 이렇게 말했다.
“그저 제자들이 조금은 쉽게 판소리를 익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이 판소리 대중화니 뭐니하여 너무 거창하게 평가받는 것이 부담스럽다.”
그의 소리 길은 그래서 더 빛나보인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