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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의 고향

시인에게 고향은 시의 샘이다. 고창 출신의 미당 서정주는 시 ‘자화상’에서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고 했다. ‘바람’은 곧 고향으로 환치할 수 있어 고향 고창이 시의 샘물이었음을 고백한 셈이다. 어린 시절의 정서가 감수성을 풍부하게 만들어 작품으로 투영되는 것은 비단 미당에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이름을 떨친 시인이 고향의 자긍심이 되고, 문화적 자산으로 활발하게 기려지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을 것 같다.

 

영화 ‘동주’로 새롭게 대중적 관심을 높이고 있는 윤동주 시인(1917-1945)의 고향은 중국 연변주에 있는 용정시 명동이다. 암울한 식민지 상황에서 일본 유학 중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돼 후쿠오카 감옥에서 스물 여덟으로 짧은 생애를 마친 윤동주 시인에게도 고향은 각별했다. 윤동주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명동촌은 일찍부터 신학문과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민족교육의 거점이 됐던 곳이다. 특히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목사가 설립한 명동학교는 영화 ‘동주’에서도 비중 있게 그려진 절친의 청년 문사 송몽규, 평생을 통일운동에 바친 문익환 목사, 한국영화의 개척자 나운규 등을 배출한 곳으로, 북간도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윤동주의 삶과 시가 이런 고향의 환경에서 나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연변 조선족자치주에서도 요즘 윤동주 시인을 민족문화의 큰 자산으로 크게 기억하고 있다. 사실상 방치되다시피 했던 시인의 생가를 20여년 전 용정시에서 복원하고, 생가 옆에 별도 기념관까지 마련했다. 생가 정문에서부터 곳곳에 100여편의 시를 크고작은 돌과 기둥에 새기고, 시인의 삶을 형상화한 돌그림을 생가에서 만날 수 있게 했다. 어린시절 유학을 떠난 데다 요절한 삶, 불에 탄 후 뒤늦게 복원한 관계로 재봉틀과 솥, 맷돌 등 몇몇 생활도구들만 덩그러니 놓인 생가에서 시인의 채취를 찾을 수 없었던 게 안타까웠다. 시 ‘자화상’의 배경이 됐을 법한 우물이 시적 상상력을 갖게 해줘 그나마 위안이 됐다. 전북일보와 연변일보간 교류협약차 지난 연말 찾았던 윤동주 시인의 생가를 본 소회다.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 윤동주의 하숙집 등 영화 ‘동주’에 등장하는 영화 속 풍경의 상당 부분이 전주·남원·익산 등지에서 촬영됐다고 한다. 먼 이국땅에서 고향을 그리며 제대로 눈이나 감을 수 있었을까 싶은 시인이 더 애틋하면서 가깝게 느껴진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던 시대를 산 시인의 삶은 현 젊은 세대의 자화상인 것 같아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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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용 kimwy@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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