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진(1861~1898). 서른일곱 살에 죽음을 맞이한 그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된 항일운동가다. 그는 1895년을 즈음해 만주로 건너갔다. 나라를 되찾기 위한 위험하고 고단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일본군의 삼엄한 경계를 벗어나기 위해 참빗장수로 변장하고 찾아간 곳은 황해도 신천, 안중근 아버지 안태훈의 집이었다. 그곳에서 김구를 만났다. 목숨을 내놓는 항일운동이 그때부터 시작됐다. 조선과 만주를 오가며 항일운동을 했던 그는 가족이 살고 있던 김제 금구로 돌아와 동학 조직에 몸담았다. 1897년 최시형은 그를 금구 대접주로 임명했지만, 일본군에 잡혀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던 그는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떴다. 김구와 김형진의 관계는 각별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수십 년이지나 해방을 맞은 직후, 김구는 전주에 살고 있던 김형진의 가족을 찾아 위로하고 자신이 살고 있던 서울의 경교장으로 초대해 자신의 서명이 담긴 <백범일지> 를 전했다. 백범일지>
김형진의 애국애족, 빛나는 족적은 또 있다. 1894년 타오른 동학농민혁명 참여다. 그는 남원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으나 동학농민혁명이 끝이 나자 항일운동의 길에 다시 들어섰다.
김형진처럼 항일운동가중에는 그 이전, 제폭구민과 척양척왜를 내세우며 떨쳐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갑오년 혁명의 역사가 그랬듯이 농민혁명의 바친 시간은 철저히 잊혀지거나 감추어졌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가 세상에 나온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2004년 3월,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들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출범하고 나서야 참여자와 유족등록이 시작됐다. 위원회의 활동이 종료된 것은 지난 2009년 12월 31일. 3,644명의 참여자와 10,563명의 유족이 등록됐다. 놀라운 성과이긴 하나 발굴되어야 할 참여자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2010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나섰다. 5년동안 318명의 참여자가 확인됐다. 항일운동가 김형진이나 전봉준과 함께 재판을 받고 같은 날 교수형을 당한 성두환이 부친과 아들까지 3대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것도 이 조사로 밝혀진 사실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특별법에 따라 시행됐던 명예회복심의위원회 활동이 종료된 이후 새롭게 발굴된 318명과 유족은 법적 명예회복을 얻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 할아버지의 삶을 증언해줄 후손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동학특별법 개정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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