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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9일

소설가 김원일에게 만해문학상을 안긴 <푸른혼> 은 인혁당 사건을 다룬 책이다. 이 소설집을 발표한 것은 2005년. 정부가 조작한 사건으로 여덟 명의 귀한 생명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지 30주기를 맞은 해였다.

 

인혁당 사건은 시기에 따라 1차와 2차로 나뉜다. 1차 인혁당 사건은 1964년 8월14일 한일회담과 대일굴욕외교를 반대하는 시위가 거셌던 시기, 중앙정보부가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 <인민혁명당> 을 적발했다’며 관련자 57명 중 41명을 구속한 사건이고 10년 뒤인 1974년, 유신반대 투쟁에 나선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을 수사하던 중앙정보부가 그 배후세력으로 <인혁당재건위> 를 조작해 발표하면서 21명을 구속, 이들 중 여덟 명에 대해 사형을 선고한지 18시간 만에 형을 집행한 사건이 2차 인혁당 사건이다. 사형 확정 후 하룻밤 사이에 형이 집행된 상황은 전례가 없는 일이어서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들이 사형 당한 1975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하기도 했다.

 

야만의 시대, 인혁당 사건으로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여덟 명 중 여정남이 있다. 서른한 살의 나이, 불꽃처럼 짧은 생애를 살다간 그는 경북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반독재 반유신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경북고등학교 2학년 때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해 일어난 ‘마산 3·15의거’와 ‘대구 2·28 학생의거’참여를 시작으로 투쟁가의 길에 들어선 그는 민청학련사건과 그 배후로 지목된 인혁당재건위의 주도자로 몰렸다. 모진 고문과 협박에 못 이겨 검찰관이 시키는 대로 주모자가 되어야했던 그는 피고인 진술과 변호인의 반대 신문, 증거신청이나 이의신청 과정이 모두 묵살당하는 재판 현장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다른 일곱 명 피고인과 함께 죽음을 맞았다.

 

당시 그의 변호를 맡았던 한승헌 변호사가 최근 펴낸 <재판으로 본 한국현대사> 기자 간담회에서 가슴 아파 잊을 수 없는 이름으로 ‘여정남’을 불렀다. 그의 사형이 집행될 때 한 변호사 역시 반공법 위반으로 같은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변호인이 의뢰인 죽음도 모르고 있었던 기막힌 상황”을 술회하며 한 변호사는 “진실은 끝내 드러나지만 법의 이름으로 죽임 당한 이들은 돌아올 수 없다”고 말했다.

 

인혁당 사건은 2007년과 2008년 사법부 재심에서 관련자 전원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41년 전 암흑의 그 날이 4월 9일이다. 기억해야 할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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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kime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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