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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장날 풍경

시골길을 지나다 우연히 장날 풍경을 만났다. 물론 오늘의 장날 풍경이다. 장날의 다른 이름은 ‘오일장’이다. 2000년대 초반 전통시장을 현대화한다하여 오래된 건물을 부수고 새로운 건물들을 들여놓는 사업이 유행처럼 번졌었다. 이름 하여 ‘재래시장의 현대화’라 했다. 재래시장의 현대화는 대부분의 5일장이 서는 곳이면 통과의례처럼 겪었던 과정이었다. 자치단체마다 엄청난 예산을 들여 현대식 시장을 들여놓기에 앞장섰지만 재래시장을 살리는 본질적인 방향을 고민하지 않은 채 겉모습에만 집중했던 그 사업은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오히려 줄어들면서 시장을 살리는 데는 아무런 효과를 못 보았던 탓이다. 수십 년 장터를 지켜온 장꾼들조차 현대화란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재래시장 살리기를 물색모르고 덤벼드는 철없는 ‘짓거리’라고 강하게 비난했을 정도니 그 후유증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돌아보면 1일과 6일, 2일과 7일, 3일과 8일, 4일과 9일, 이렇게 짝이 맞추어진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전국을 떠돌던 장꾼들은 어김없이 모여들었다. 색색이 곱디고운 꽃무늬 옷에, 반짝 반짝 윤나는 흰 구두, 모양도 다양한 시계며 아롱다롱 이부자리까지, 장꾼들은 신나게 판을 열고 손님을 기다렸다. 그곳은 소통의 공간, 인간다움이 회복되는 생생히 살아 있는 공간이었다.

 

사실 오일장의 시련은 그 이전에도 있었다. 1970년대쯤에는 새마을 운동으로 정부가 나서 5일장을 없애거나 축소시키겠다고 나섰었다. 지나친 소비를 조장하고 불공정 거래가 성행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농민들이 관습적으로 시장을 이용해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니 그로 인해 농업 생산성이 저하된다는 이유도 덧붙였다. 농촌의 퇴폐풍조를 조장하고 있다는 혐의(?)까지 받았던 오일장은 그러나 끝내 살아남았다.

 

위기에 처해있던 오일장에 도시사람들이 찾아왔던 시절이 있었다. 그들에게 5일장은 아련하고 그리운 추억의 풍경이었다. 그 풍경의 대부분이 사라진 뒤였지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지친 현대인들에게 위안과 즐거움을 주는 그 공간의 의미는 유효했다. 그러나 현대화란 이름으로 옛것을 모조리 부수어 대형 마켓의 아류를 만들어내는 일이 지속되면서 그 아득한 그리움의 장날 풍경을 찾아나서는 사람들은 줄기 시작했다.

 

오래된 시간을 담은 풍경이 사라지고 있다. 장날 풍경도 그 중 하나다. 소중한 것들을 기억으로만 만나게 되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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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kime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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