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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과 송강 정철

주변 사람들에게 이순신 장군의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의외로 많은 이들이 ‘충남 아산 현충사’라고 답하는데 실은 아산이 아니고 서울시 중구 건천동이다.

‘충무로’라는 도로 명칭은 장군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대부분 보낸 생가에서 비롯됐다.

서울의 퇴계로와 명동 사이에 동서 방향으로 나란히 뚫린 대로가 충무로인데 일인들이 활보하던 혼마찌(本町通)였던 곳을 광복이후 장군의 시호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

충무로는 오랫동안 영화의 거리를 의미했다. 단성사, 대한극장, 국도극장, 명보극장, 스카라극장 등 굴지의 개봉관들이 이곳에 몰려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충무로, 세종로, 퇴계로 등이 있다면, 전주에는 요즘 태조로, 견훤로, 정여립로 등이 눈길을 끈다. 태조로, 견훤로 등은 이해할 수 있겠는데 왜 ‘정여립로’가 등장할까. 정여립로는 만성지구 외곽을 감싸고 있는데 전북혁신도시와 팔복동 일반산업단지를 연결하는 도로다.

‘정여립로’는 조선시대 사상가이자, 혁명가로서 전주에 살았던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했던 김제시 금산면 제비산 자락으로 가던 길목에 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꿈꾼 조선시대 혁명가 정여립을 기리기 위해 대동사상기념사업회는 정여립로에 정여립 동상까지 세운다고 한다.

전주가 민주주의의 효시임을 널리 알리고 대동사상을 널리 전파하겠다는 의미다.

진안 죽도와 전주시 일대에서 군사를 조련하고 대동사상을 펴던 정여립은 송강 정철로 대표되는 서인에 의해 “전라도 지역의 민중들을 모아 모반을 꾀했다” 는 모함을 받아 궤멸된다.

정여립하면 누구나 기축옥사(1589년)를 떠올린다. 임진왜란 3년전 송강 정철에 의해 수천명의 동인들이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당한 이 사건은 전라도 선비의 씨가 말라버리는 계기가 된다.

정권을 잡은 것도 아니고, 시대를 바꾼것도 아니지만 정여립이 오늘날 도로명에 등장한 이유는 뭘까. 봉건 기존질서속에서 핍박받던 백성들과 함께 들고 일어난 것은 당시엔 반역이었으나 오늘날엔 달리 해석된다는 것이다.

역적이 공신이 되고 공신이 역적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기축옥사때 칼자루를 쥐고 정여립을 비롯한 호남 선비들을 도륙했던 송강 정철 또한 버젓이 도로명에 등장한다.

‘송강길’ 은 서울 자하문에 있는 청운초교 교차로 ~ 청운실버센터 315m구간이다.

송강 정철이 누구던가.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의 고위 관직을 두루 거친 정치가이자 관동별곡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가사와 훈민가 등 많은 시조를 남긴 그는 자하문 근처에서 태어났다.

청운초등학교 담장에는 송강의 대표작을 담은 시비와 생가임을 알리는 생가 터 비석이 세워져 있다. 고관현직을 지낸 대문호 송강 정철과, 실패했으나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정여립은 4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 사람들에게 묻는다. ‘과연 무엇이 옳은가’ <위병기 문화사업국장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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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병기 bkweegh@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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