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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출신 영화 ‘국제시장’ 실제 주인공 권이종 교수 별세

현대사와 맞물려 파란만장했던 삶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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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권이종 명예교수. 연합뉴스.

장수 산서면 오산리 출신 권이종 한국교원대 명예교수가 지난 1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파독(派獨) 광부 출신으로 지난 2014년 개봉한 영화 '국제시장'에서 황정민 배우가 연기한 윤덕수의 실제 모델이다. 그의 실제 삶은 영화 '국제시장'과 똑 닮았다. 1세대 산업일꾼으로, 그 시대 누군가의 형이자 동생,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생사의 갈림길에 고뇌하던 20대 파독 광부에서 '꿈과 희망'을 강조한 교육자이자 봉사자로 살아온 그의 파란만장했던 삶이 다시금 조명받고 있다.

1940년 장수군 산골 오지마을에서 빈농(貧農)의 아들로 태어난 권 교수는 지독히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배는 주렸지만, 책 읽고 쓰는 것이 좋았고, 초등학생 시절 ‘선생님이 되면 좋겠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평생 가슴에 남았다.

군 제대 후 시골 마을을 떠나 서울에서 막노동에 나갔던 권 교수는 파독 광부로 가면 1964년 10월 당시 5급 공무원 월급(3600원)의 10배를 준다는 말을 듣고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4주간의 독일어 교육과 3개월간의 현장 실습을 받은 뒤 메르크슈타인(Merkstein) 지역 아돌프 광산에서 ‘1622’(광부 번호 )로 3년간 일했다. 지하 1000여m까지 파 내려가 석탄을 캐다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기도 했고, 자신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3년간의 파독 계약 기간을 마치고, 인생에 변화가 찾아왔다. 탄광 마을에서 자신을 보살피던 로즈마리 부인이 '공부를 하고 가라'고 설득했고, 독일 아헨교원대에 입학하면서 교육자로서의 길에 올랐다. 독일 생활 16년째가 되던 1979년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인으로서는 독일 순수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은 첫 인물이다. 독일 유학 생활 중이던 1971년에는 독일에서 만난 전주여고 출신 간호사 백정신 씨와 결혼도 했다. 20대의 나이로 독일행을 택했던 그의 선택은 인생의 방향 전부를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귀국 후에는 1979년부터 1985년까지 전북대 교수로, 1985년부터 2006년까지는 한국교원대에서 교육학과 교수로 일했다. 교수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 이사장으로 봉사했다. 

권 교수는 생전 “어려웠던 시절 나라 경제에 기여했다는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예우를 해줬으면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파독 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연합회를 조직하고, 그동안 모았던 자료와 사진, 유물 등을 기증해 서울 양재동에 번듯한 파독근로자기념관도 세우는 등 파독 광부·간호사 명예를 위해 힘썼다.

생전 60여 권이 넘는 저서를 남긴 권 교수는 지난해 출간한 '파독 광부, 꿈을 캐는 교수로'를 집필한 이유로 "가난을 극복한 우리 세대뿐만 아니라 절망 속에 사는 젊은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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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권이종 교수가 장수 산서초등학교를 방문해 후배들에게 강연을 진행하는 모습. 전북일보 자료사진.

실제 지난 2008년에는 모교인 장수 산서초등학교를 방문해 후배들과 지역주민, 학부모 등에게 '꿈, 그리고 희망'이란 주제로 강연도 진행했다. 어린 날 권이종 교수에게 꿈을 심어줬던 한 선생님이 그랬듯, 누군가에게도 권 교수의 마음이 전해졌을지도 모른다.

"글뤽 아우프(Gluck Auf)" 1000m 지하에 있는 탄광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기 전, 독일 광부들이 주고받는 인사. 

1일 권이종 교수는 세상에 마지막 인사를 전했는지도 모른다. 꿈과 희망을 남기고자 했던 그의 영향력은 영화로, 책으로, 그리고 그의 삶의 궤적을 통해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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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권이종 명예교수. 연합뉴스.

장수 산서면 오산리 출신 권이종 한국교원대 명예교수가 지난 1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파독(派獨) 광부 출신으로 지난 2014년 개봉한 영화 '국제시장'에서 황정민 배우가 연기한 윤덕수의 실제 모델이다. 그의 실제 삶은 영화 '국제시장'과 똑 닮았다. 1세대 산업일꾼으로, 그 시대 누군가의 형이자 동생,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생사의 갈림길에 고뇌하던 20대 파독 광부에서 '꿈과 희망'을 강조한 교육자이자 봉사자로 살아온 그의 파란만장했던 삶이 다시금 조명받고 있다.

1940년 장수군 산골 오지마을에서 빈농(貧農)의 아들로 태어난 권 교수는 지독히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배는 주렸지만, 책 읽고 쓰는 것이 좋았고, 초등학생 시절 ‘선생님이 되면 좋겠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평생 가슴에 남았다.

군 제대 후 시골 마을을 떠나 서울에서 막노동에 나갔던 권 교수는 파독 광부로 가면 1964년 10월 당시 5급 공무원 월급(3600원)의 10배를 준다는 말을 듣고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4주간의 독일어 교육과 3개월간의 현장 실습을 받은 뒤 메르크슈타인(Merkstein) 지역 아돌프 광산에서 ‘1622’(광부 번호 )로 3년간 일했다. 지하 1000여m까지 파 내려가 석탄을 캐다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기도 했고, 자신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3년간의 파독 계약 기간을 마치고, 인생에 변화가 찾아왔다. 탄광 마을에서 자신을 보살피던 로즈마리 부인이 '공부를 하고 가라'고 설득했고, 독일 아헨교원대에 입학하면서 교육자로서의 길에 올랐다. 독일 생활 16년째가 되던 1979년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인으로서는 독일 순수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은 첫 인물이다. 독일 유학 생활 중이던 1971년에는 독일에서 만난 전주여고 출신 간호사 백정신 씨와 결혼도 했다. 20대의 나이로 독일행을 택했던 그의 선택은 인생의 방향 전부를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귀국 후에는 1979년부터 1985년까지 전북대 교수로, 1985년부터 2006년까지는 한국교원대에서 교육학과 교수로 일했다. 교수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 이사장으로 봉사했다. 

권 교수는 생전 “어려웠던 시절 나라 경제에 기여했다는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예우를 해줬으면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파독 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연합회를 조직하고, 그동안 모았던 자료와 사진, 유물 등을 기증해 서울 양재동에 번듯한 파독근로자기념관도 세우는 등 파독 광부·간호사 명예를 위해 힘썼다.

생전 60여 권이 넘는 저서를 남긴 권 교수는 지난해 출간한 '파독 광부, 꿈을 캐는 교수로'를 집필한 이유로 "가난을 극복한 우리 세대뿐만 아니라 절망 속에 사는 젊은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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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권이종 교수가 장수 산서초등학교를 방문해 후배들에게 강연을 진행하는 모습. 전북일보 자료사진.

실제 지난 2008년에는 모교인 장수 산서초등학교를 방문해 후배들과 지역주민, 학부모 등에게 '꿈, 그리고 희망'이란 주제로 강연도 진행했다. 어린 날 권이종 교수에게 꿈을 심어줬던 한 선생님이 그랬듯, 누군가에게도 권 교수의 마음이 전해졌을지도 모른다.

"글뤽 아우프(Gluck Auf)" 1000m 지하에 있는 탄광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기 전, 독일 광부들이 주고받는 인사. 

1일 권이종 교수는 세상에 마지막 인사를 전했는지도 모른다. 꿈과 희망을 남기고자 했던 그의 영향력은 영화로, 책으로, 그리고 그의 삶의 궤적을 통해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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