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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주보기] 질문의 시대, 역설로 망하는 중

이흥재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초빙교수

고대 아테네에서는 질문을 많이 하면 사회를 망친다고 믿었다. 사회가 그 정도로 단순했다. 그래서 이것저것 질문을 많이 해대는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고 법정에 끌려갔다. 그의 질문 때문에 젊은이들이 본질을 생각하기 시작한 거라 본 것이다. 젊은이들이 주로 기존 권위를 의심하고, 당연한 것을 물었다. 툭하면 ‘왜?’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 그러니, 기득권은 불편해졌고 위험하다고까지 여겼다. 해결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바로 질문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소크라테스에게 독약을 먹였다. 아주 간단하고 효율적인 통제 방식이었다.

그로부터 수천 년이 흘렀다. 이제 이 시대에 이르러서는 질문을 억압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권장한다. AI가 생겨난 뒤 질문이 제일 중요하다고 까지 말한다. 기계에게 끊임 없이 질문을 던지며 지식을 과소비한다. 검색창에 넣고 버튼을 살짝 누르면, 3초 안에 답을 토해낸다. 이 얼마나 편리한 문명인가. 질문 차단용 재판이나 독약은 어느 시대 무슨 이야기인지 더 이상 궁금하지도 않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질문은 줄지 않았는데, 질문하는 인간이 사라졌다. 예전 소크라테스 시대에는 어쩌다 묻는 질문이 위험해서 제거했지만, 지금은 질문과 대답이 쉽고 편해져서 별 충격이나 의미가 없게 된 때문이다. 질문은 넘치는데, 질문하는 이가 없는 이유는 정말로 답이 널리 널려있기 때문인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정확히는 답처럼 보이는 것이 많기 널려있기 때문이다. 깊이 없는 답, 맥락 없는 정보, 생각 없는 문장들. 우리는 그것을 ‘지식’이라 부르며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복사해 붙여놓은 명품 글(?) 들이 클릭해주기를 줄서서 기다린다. 소크라테스가 이 질문과 답들을 마구마구 퍼나른다면 어떤 죄명으로 재판을 받을까.

그런데 생각해보자. 시대는 바뀌었지만 본질은 결국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에는 여전히 제대로 된 질문이 필요한데, 질문에 해당되는 이들은 질문을 두려워한다. 다만 AI 등장으로 그 방식이 편리해졌을 뿐이다. 예전에는 질문자를 간단히 제거했고, 지금은 질문 자체를 가볍게 여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평화’가 넘치니 꽤 달콤씁쓸하다.

오늘도 우리는 묻는다. 하지만 정말 질문을 하는 걸까. 아니면 그저 정해진 답을 불러내는 걸까. 아니면 ‘좋아요 어쩌고 하는 3형제’를 애태우며 기다리는 걸까. 이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죽은 소크라테스를 다시 죽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훨씬 조용하고, 더 깔끔한 방식으로. 

선거가 끝났다. 이번 선거에서는 질문다운 질문, 질문에 대답하는 기회조차 보기 어려웠다. 질문의 시대 가치를 모독하고, 질문 없이 흠집 내기에만 눈을 휘번덕거리는 정상배들이 날뛰었다. 콩잎이나 먹고 사는 유권자들은 모처럼 목에 힘 좀 줄 이벤트가 많은 기회였지만, 속만 뒤집힌 채 끝났다. 이제, 우리 앞에는 곽식자가 육식자를 걱정하는 일들이 줄줄이 등장할 것이다. 그러면서 세상은 더 어지럽게 바뀌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 해도 될까모르겠다. 누구 말마따나,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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