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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44)백제시대 최고(最古)의 석각 무녕왕릉지석

1972년 6월 29일, 충남 공주읍 금성동 송산리에 소재한 고분군 6기중 제5·6호분의 발굴이 시작되었다. 발굴 7일째 되는 7월 8일, 고분에서 순금왕관과 지석 2편이 발견되었는데 이로써 그 고분이 무녕왕릉이라는 것이 처음 밝혀졌다. 비록 간단하게 기술된 묘지이지만 고분의 주인공과 축조연대를 확인한 삼국시대 유일의 왕릉이 되었다.「삼국사기」에 의하면, 무녕왕의 이름은 사마(斯摩)이며 모대왕(牟大王 : 東城王)의 둘째아들이다. 신장은 8척이요,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 백성들의 마음이 그에게로 쏠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녕왕은 백제 25대 왕으로서 501년부터 523년까지 재위하였으며, 재위시절 남조 양(梁)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웅진시대를 이끈 임금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집권 말기인 21년 11월에 강성해진 고구려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사신을 통해 양나라에 도움을 청하는 장문의 표문을 올렸으나 양 고조가 이를 묵살하자 후에 조공을 단절하였다. 조공을 받은 양 고조는 그 해 12월 무녕왕을 '使持節, 都督 百濟 諸軍事, 寧東大將軍'으로 봉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그리고 재위 23년 여름 5월에 왕이 죽었으며, 시호를 무녕(武寧)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이와 관련하여 발견된 두 개의 묘지명은 무녕왕과 왕후의 것으로서 백제시대 최고의 석각문이다. 묘지명의 기록을 살펴보면,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이 나이 62세 계묘년(523) 5월 7일에 붕어하시어 을사년(525) 8월 12일에 대묘에 모셨다. 묘지명의 세운 것도 좌와 같다."라고 하였다. 묘지에 보이는 '영동대장군'은 앞서 양 고조에게 받은 명호이며, 삼국사기와 달리 무녕왕의 이름이 斯摩가 아닌 斯麻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아울러 무녕왕의 출생연도를 따져볼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데, 「삼국사기」 보다 묘지의 기록이 우선한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는 매우 크다.한편 지석 위에서 오수전(五銖錢) 꾸러미가 함께 발견되었는데, 묘지명의 뒷면에 토지신에게 묘지로 사용할 땅을 매입한다는 문장이 새겨져 있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일명 매지권(買地券)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최근(2007.9) 일본 히로시마대학의 시라스 죠신(白須淨眞) 교수는 묘지에 뚫려 있는 작은 구멍이 이 돈꾸러미를 끼웠던 흔적이라는 것과 또 묘지명 뒷면에 새겨진 십이간지 방위표에서 서쪽에 해당하는 간지가 없는 것은 묘지부지로 서쪽 땅을 샀기 때문이라는 설을 제기하여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동안 의문시되었던 백제 묘지명의 형식을 해소하는 연구성과로 인정되었다. 이러한 추론은 불교에서 사후 세계를 서방정토로 인식하는 것으로 비추어 볼 때 타당성이 높다. 왕과 왕비가 사망한 후 빈전에서 3년 정도 장사를 치른 후 다시 천장(遷葬)한 관례로 보아 당시 장사에서 불교의 논리보다는 도교적인 관습이 내재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특수성으로 인하여 발견된 묘지명이 과연 묘지인가 아니면 매지권인가 하는 논란이 일었다. 이것은 천장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묘지명이라는 역사적 사실 이면에 매지권을 기입함으로써 묘지의 신성함을 아울러 표시한 것이 아닌가 한다.발굴된 묘지명을 최초로 탁본을 한 금석연구가 황수영 씨는 그 감회를 상세히 밝혔는데 서체와 관련된 부분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자체는 사택비보다도 중국 육조체다운 웅건한 풍운이 풍기는 필치로 되어 있었다. 안정된 자체와 신중한 운필 등은 백제미술의 공통적 기질인 온화한 작풍이 느껴졌다. (중략) 이 돌에 새겨진 6행 52자의 글씨(서예)야말로 그대로 최고의 국보요, 큰 자랑이기 때문이다." /이은혁(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 문화재·학술
  • 전북일보
  • 2010.07.28 23:02

도난당한 문화재 1천200여점 되찾았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4∼5년 전 도난당한 고서(古書)와 서화 등을 장물업자를 통해 산 혐의(문화재관리법 위반)로 구모(65)씨 등 골동품 업자 3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26일 밝혔다. 또, 같은 장물 업자한테서 '연구 목적'으로 도난 서적을 다량 구매한 혐의로 모 대학 교양학부 교수 김모(47)씨도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전국의 향교와 재실, 고택 30곳에서 도둑맞은 어정주서백선(御定朱書百選ㆍ유학자 주희의 서간을 조선 정조가 간추려 펴낸 책) 등 고서와 고문서, 서화 등 1천200여점을 2005∼2006년 장물업자 김모(47. 2007년 당시 구속)씨를 통해 사들인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 조사 결과 구씨 등 골동품 업자 3명은 김씨에게서 '껌껌한 물건(도난품)이니 일정기간(공소시효 10년) 숨겨놔야 한다'는 말을 듣고도 고서와 그림 병풍 등 300여점(2천800여만원 어치)을 사들여 대부분을 3∼12배 이윤을 남기고 처분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 교수는 '중국학을 연구한다'며 영규율수(瀛奎律髓ㆍ중국 당송시대 시선집)와 주역전의대전(周易傳義大典ㆍ유교 경전의 일종) 등 고서 900여점을 1천200여만원에 사들여 대학 연구실과 자신의 오피스텔에 보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산 작품은 국보나 보물이 아닌 비(非)지정 문화재이지만, 조선 전기에 발간된 희귀 금속활자본 서적 등이 포함돼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경찰이 전했다. 이 문화재는 전북 고창 향교와 전남 영광 해주오씨 재실, 경북 영천 옥간정(玉磵亭), 인촌 김성수 생가 등 지방 주요 사적지에 보관돼오다 2005∼2006년 도둑맞았다. 경찰은 2007년 7월 붙잡은 절도단 16명 중 일부가 진술을 거부해 해당 작품의 처분 경로를 밝히지 못했으나, 이번 수사로 뒤늦게나마 문화재를 되찾았다. 경찰 관계자는 "이번에 적발된 골동품업자들은 작품의 낙관을 오려내거나 가짜 낙관을 찍는 수법 등으로 출처를 감추려고 했다. 압수한 문화재는 도난 피해를 봤던 향교 등에 반환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경찰은 구씨 등이 작품을 처분하는 데 이용한 A 문화재 경매 사이트가 무허가 서비스라는 점을 적발해 이 사이트의 대표 김모(55)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구씨 등 업자들이 다른 도난 문화재도 사들여 유통했을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추가 수사를 벌이고 있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0.07.27 23:02

[전시] 장인들의 열정이 녹아 명품으로 빚어지다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장도장의 맥을 이어온 박용기씨와 그의 외아들 박종군(장도장 전수교육조교)씨는 장도(粧刀 만들기를 대물림하고 있다. 장도는 칼집에 정교한 장식을 넣은 주머니칼. 칼날을 섭씨 800도에 달궜다가 식히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야 하기 때문에 꼼꼼함과 섬세함, 끈기가 요구된다. 이들 부자는 강함과 부드러움의 조화를 이룬 칼날의 장도를 내놓았다. 칼이라기 보다는 보석에 가까웠다.수천 년 불교 역사에서 부처가 입을 연 적은 없다. 목조각장인 박찬수씨가 선보인 '부처가 입을 열다'는 입을 다물고 자비로운 미소만 띄고 있던 불상이 입을 열어 말하는 작품으로 다가온다. 그는 1990년 자신의 호를 딴 목아박물관을 경기도 여주에 세웠으며, 1996년 최초로 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으로 지정됐다. 50여 년간 목조각 외길을 달려온 그의 손끝에선 사람을 닮은 각양각색 나무의 심성이 표현됐다.전북무형문화재 탱화장인 도원 스님은 '김제 하소백련 축제'를 만들어 더욱 유명해졌다. 도원 스님은 작은 붓끝에 정성을 담아야 하는 탱화는 수행의 한 방법이라며 무서워 보여도 자세히 자주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설명했다. 결국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붓놀림이 달라지는 것. 도원 스님은 그간 쉴새없이 그려온 탱화들을 내놓았다.전북도립미술관(관장 이흥재)이 열고 있는 '전통의 손이 빚은 공예의 숨결'전은 명인들의 손끝에서 빚어진 명품(名品)들이 전시되고 있다.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6명, 전수교육조교 1명, 전북무형문화재 14명 등 장인들의 작품 140여 점이 선보이는 자리로 공공미술관으로서는 이례적인 전시다.전시엔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는 장도장 박용기, 소목장 설석철, 목조각장 박찬수, 나전장 이형만, 한지장 홍춘수, 석장 이재순 선생씨가 함께 했다. 장도장 전수교육조교인 박종군, 전북무형문화재 악기장(가야금) 고수환, 악기장(거문고) 최동식, 소목장(가구) 조석진, 소목장(전통창호) 김재중, 선자장(합죽선) 김동식·이기동, 선자장(태극선) 조충익, 선자장(단선) 방화선, 옻칠장 이의식, 침선장 최온순, 한지발장 유배근, 사기장 이은규, 탱화장 유삼영, 석장 김옥수씨도 전통 공예의 자부심을 담은 작품들을 내놓았다.이흥재 관장은 "조선 후기 전주를 중심으로 한 전북은 조선 공예의 중심지로 널리 알려졌고, 최근엔 아시아·태평양 문화유산전공이 기공 돼 우리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조명할 계기가 필요했다"며 "전통공예에 대한 이해를 돕고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8월 29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전시는 주말엔 가족 관람객들을 위한 부채 만들기 체험과 애니메이션 영화 상영이 무료로 진행된다.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10.07.27 23:02

하회·양동마을 31일 세계유산 등재 결론

경북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의 세계유산 등재여부가 오는 31일 결정된다. 25일 경주시에 따르면 오는 26일부터 8월 3일까지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열리는 제34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역사마을-하회와 양동' 세계유산 등재 여부를 심사한다. 하회마을과 양등마을의 심사는 현지 시간으로 30일 오전 10시부터 열리는 회의의 마지막 의제로 채택돼 이르면 우리나라 시간으로 31일 새벽에 등재 여부가 발표될 것으로 보인다. 경주시는 이번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두 마을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가 '한국의 역사마을-하회와 양동'의 세계유산 등재를 '보류(refer)'해야 한다는 의견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제출했지만 사안이 경미해 등재에는 별다른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경주시와 안동시는 ICOMOS가 세계유산으로 가치는 충분하지만 두 마을의 통합적 관리체계가 필요하다는 권고사항을 내놓자 통합보존관리 이행 협약체결, 통합관리 보존협의회 발족 등을 통해 두 마을의 통합관리시스템인 '역사마을 보존회'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음을 설명했다. 이들 자치단체는 두 마을이 세계유산에 등재될 수 있도록 외교통상부, 문화재청, 경북도 관계자 등과 함께 이번 세계유산위원회에 참석해 마을을 홍보하고 21개 회원국을 상대로 ICOMOS 권고사항에 대한 조치결과를 설명할 계획이다. 경주시와 안동시, 경북도는 2008년 3월 이들 마을의 세계문화유산 공동 등재 방침을 확정했으며 작년 1월에는 문화재청을 통해 세계유산위원회에 등재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어 2월과 5월에는 국내외 전문가가 참여하는 예비실사가 2차례 진행됐고 같은해 9월에 세계유산위원회의 현지실사가 이뤄졌다. 두 마을은 전체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됐고 양동마을은 15-16세기 이후 월성 손씨ㆍ여강 이씨 등 두 가문이 대대로 살아온 조선시대 양반마을로 크고 작은 옛 집과 23점의 지정문화재가 있고 하회마을은 국보 등 19점의 지정문화재가 있는 전통 문화유산이 잘 보존된 마을이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0.07.26 23:02

"문화재는 고리타분? 편견을 버리세요"

재단법인 전북문화재연구원(원장 김종문)이 문화재 발굴에 관한 시민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전주시 효자동에 황방문화센터를 마련했다. 우리 지역의 문화재 발굴·복원은 그간 폐쇄된 상태로 진행돼왔다. 더욱이 시민들은 문화재 때문에 개발이 안된다며 불편을 호소하기도 했다.김종문 원장은 "황방문화센터는 문화재 발굴과 개발에 관한 절충안을 마련하고, 발굴에 관한 이해를 돕는 교육 프로그램 진행을 위해 마련된 것"이라며 "전북문화재연구원이 임실에 위치하다 보니, 접근성이 떨어져 전주에 또 다른 공간을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다.황방문화센터는 원로 초청 간담회, 시민 문화 강좌, 발굴체험 학교 등을 추진한다. 7월부터 진행되는 원로 초청 간담회는 전북 고고문화에 헌신한 원로학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자리. 첫 만남(23일 오후 5시)은 전영백 일본 규슈대학 문학박사가 초대됐다. 전주 출생인 전 박사는 처음으로 지방박물관을 설립했으며, 전라북도 고고학·산성학·한국청동기문화 등을 연구하며 다양한 발굴조사보고서와 학술논문, 단행본 등을 발간해왔다. 김삼룡 전 원광대 총장, 윤무병 전 충남대박물관장 등도 함께 할 계획이다.시민 문화 강좌는 8월말부터 발굴 현장에 대한 이해를 돕는 쉽고 재밌는 강의로 이어진다. 전북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현장 전문가로 활동해온 최완규 이사장, 김종문 원장, 박현수 이사, 김규정 실장 등이 생생한 발굴 현장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발굴체험학교는 9월부터 이론 수업과 현장 탐방으로 이뤄진다. 최완규 이사장은 "그간 문화재 발굴 현장이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아 불필요한 일로 인식되거나 무관심하게 바라봐왔다"며 "발굴과 관련해 꼭 알아야 할 지식을 교육한 뒤 현장을 직접 방문해 봄으로써 문화재 발굴에 대해 인식을 전환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김종문 원장은 "전국적으로 문화재 발굴 관련해 시민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부설 센터가 전북에만 없었다"며 "문화재 발굴이 지역 문화 발전에 기여한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젠 시민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문의 063) 272-5897.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10.07.22 23:02

"임실 하가유적은 구석기 사냥도구 제작터"

임실 하가유적에서 구석기시대 사냥용 도구인 슴베찌르개 11점이 발굴됐다.조선대박물관(관장 이기길)은 임실군 신평면 가덕리 687번지 일대 구석기시대 유적인 하가유적 125㎡(약 38평)를 학교 자체 예산 1000만원을 들여 발굴 조사한 결과, 슴베찌르개 11개와 함께 지금까지 보고되지 않은 새로운 종류의 구석기 시대 찌르개 1점을 수습했다고 20일 밝혔다.구석기 전공인 이기길 관장은 "지금까지 보고된 유적 가운데 이번 발굴 조사에서 슴베찌르개의 밀집도가 가장 높았다"며 "이로써 하가유적이 구석기시대에 사냥 도구를 대량으로 제작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대형과 소형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 슴베찌르개 중 대형으로 분류되는 5점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길이 130㎜, 너비 30㎜, 두께 15㎜이며 나머지 소형 6점은 길이 55~70㎜, 너비 15~20㎜, 두께 5~7㎜였다.이번에 새롭게 보고된 찌르개(112×17×13㎜)는 긴 자루에 날은 톱니처럼 만들고 칼등에도 자루에서 가까운 부분에 돌기를 만들었다.이 관장은 "이 찌르개는 일본열도에서 보고된 구석기인 산료센토키(三稜尖頭器)와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면서 "이전 하가유적 조사에서는 일본열도의 고유한 석기로 알려진 모뿔석기(각추상석기), 나이프형 석기가 나온 바 있다"고 말했다.이 관장은 "올해까지 4차 발굴을 벌인 결과 하가유적에서 크고 작은 석기제작터를 확인하고 많은 구석기 유물을 수습함으로써 한반도 구석기문화는 물론, 동북아 구석기문화의 교류 양상을 규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귀중한 자료를 확보했다"고 평가했다.하가유적 출토 구석기는 암석 재료로 보면 산성화산암이 90%를 웃돌고, 최종 구석기 생산품으로 가는 전단계나 그 과정에서 나온 석기가 많다는 점이 특징이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0.07.21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43)고구려 평양성 석각

고구려가 처음 환인에 뿌리를 내렸다가 집안(輯安·集安)으로 수도를 옮겨 중국동북부를 지배하는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며 위세를 떨쳤다. 벽화 등에서 자주 나타나는 기사도(騎射圖)는 고구려의 강력한 군사력을 대변하는 하나의 역사적 증거일 뿐만 아니라 역동성을 표현한 회화로서도 가치가 높다. 그러나 고구려의 위상에 비하여 그의 기록들은 매우 미비하다. 앞서 광개토호태왕비 이외에 중원고구려비와 호우를 소개하였지만 여기에 그친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또 묵서묘지에서 역사의 한 면을 볼 수 있음이 그나마 다행이다.이와 더불어 귀중한 자료로서 평양성석각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고구려는 정복활동이 가장 왕성하였던 광개토대왕 때에 영토을 확장함과 동시에 이를 보전하기 위하여 여러 곳에 축성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평양에 아홉 불사(佛寺)를 창건하였고, 나라 남쪽에 일곱 성을 쌓아 백제의 침구에 방비하였으며, 나라 동쪽의 독산(禿山) 등 여섯 성을 쌓고 평양의 민가를 옮겼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들은 모두 평양과 관련이 깊은 기록이다. 평양은 정복활동에 성공한 광개토대왕이 차기 도읍지로 염두에 두었던 것이 분명하다. 평양천도는 장수왕 15년(427)에 단행되었다. 장수왕은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대규모의 안학궁을 건설하고 주위에 대성산성을 쌓아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평시에는 안학궁에서 거처하고 비상시에는 대성산성을 이용하였을 것이다.당시 국제관계로 보면, 북방의 강력한 위(魏)를 중심으로 연(燕)과 거란이 대립하고 있었고, 한반도에는 신라와 백제가 점차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고구려는 대륙의 위와 연을 견제하는 한편 신라와 백제에 대해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평지는 항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두 개의 강으로 둘러 쌓인 평양성은 그러한 결점을 보완할 수 있는 최적의 요충지였다. 평양성은 내성, 북성, 중성, 외성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 총 길이가 무려 23km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중국의 유명한 장안성이 16km라는 점과 비교된다. 기록에 의하면 평양성은 양원왕 8년인 552년에 지어지기 시작하였는데, 평양속지의 '本城四十二年畢役'라는 기록으로 보아 42년 만에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구려의 영화를 보여주는 성이 발굴되면서 그에 관한 기록들이 발견되었다. 평양성은 특이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축조 당시 부분별로 지역을 분담하고 그 책임을 분담하였다. 각 성벽에서 발견된 각자(刻字)된 섬돌에는 시기와 해당지역 그리고 책임자의 이름 등이 기록되어 있다. 모두 여섯 개가 발견되었으나 현재는 세 개만 전하고 나머지 세 개는 기록으로만 전한다. 「삼한금석록」과 「해동금석원」에서 각자의 내용을 살펴 볼 수 있다. 특히 「해동금석원」의 기록에는 추사 김정희의 보서(補書)가 기록되어 있어 이에 대한 역사적 중요성과 서예적 가치를 반증한다. 추사가 여러 경로를 통하여 금석문을 탐문조사하고, 이를 연구하며 중국에 전파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이번 사례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추사는 평양성 석각문자를 수습하여 고구려시대의 것으로 고증하고 이를 중국의 유연정에게 전해주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역관 오경석은 평양석각 편을 수습하여 소장하였는데 이후 그의 아들 오세창에게 전해졌고, 후에 이화여대 박물관에 소장되었다.(보물642호) 이것이 남한에 있는 유일한 평양성석각이며, 현재 북한의 중앙역사박물관에 나머지 두 편이 소장되어 있다. 한편 청말 민국초의 강유위는 그의 저서 「광예주쌍즙」 구비(購碑) 조에서 오경석이 소장하고 있던 평양성석각을 꼽은 뒤, 비품(碑品) 조에서 고품하(高品下)로 품평하기도 하였다. 역사적 가치와 서예사적 가치를 반증하는 기록이다. / 이은혁 (전주대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 문화재·학술
  • 전북일보
  • 2010.07.21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42)덕흥리고분 묵서묘지

2002년 12월 6일부터 2003년 3월 2일까지 서울 삼성동 코엑스 특별전시장에서 '특별기획전 고구려! 평양에서 온 고분 벽화와 유물'이 개최되었다. 중앙일보와 민족화해협력국민협의회(민화협), (주)SBS가 공동 주최하고 조선중앙력사박물관과 재일본조선력사고고학협회가 특별 후원한 이 전시는 50년 남북 단절의 역사를 잇는 민족화해의 자리로 주최측이 4년여만에 성사시킨 값진 행사였다.고대사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대규모의 발굴유물들이 전시되어 우리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느끼기에 충분했지만, 그에 대한 역사적 해석은 아직도 분분하여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즉 고구려에 대한 기원설조차 남북한이 다른 주장을 제기하고 있는 형편이니, 고대사 연구의 문제점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전시였다. 전시의 유물 가운데 필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기록이 담긴 역사물이다. 청동불상의 광배에 새겨진 명문도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고분에서 발견된 묘지묵서이다. 묵서는 비명과 달리 새김의 단계를 거치지 않은 1차 자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더한다. 안악3호분과 덕흥리 고분에서 발견된 묵서는 역사적 의미는 물론이고 서예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1976년 관개수로 공사 중 발견된 평안남도 남포시 소재 덕흥리 벽화에는 풍부한 벽화 속에 설명이 가미되어 있고, 묵서묘지까지 남아 있어 고구려사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에는 벽화의 주인공인 유주자사 진(鎭)이 위엄 있는 자세로 앉아서 13인의 각 지역 태수로부터 공손히 보고를 받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를 통하여 당시 고구려의 치세영역을 산정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20세기의 역사적 발견이라 할 만하다. 묘지의 주인인 진은 광개토왕대의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지만,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여전히 설이 분분하다. 다만 그가 고유한 고구려인이 아니라 고구려에 망명한 북방민족 출신이라는 점은 대체로 일치하고 있는 듯하다.임창순은 묵서묘지와 관련하여, "덕흥리 고분 벽서는 모두루묘지와 같이 전실북벽에 먹으로 쓰여 있는 것인데 그 체재는 서로 다르다. 모두루묘지는 모두루의 경력과 업적을 서술한 것이나 이것은 공주 무녕왕릉의 매지권과 비슷한 도교적인 주송(呪誦)을 쓴 것이다. 이런 예는 중국의 한진시대의 유적 가운데서도 발견된다. 자체는 모두루묘지와 같이 예의(隸意)를 지닌 해서인데 다만 모두루묘지는 행필이 표일(飄逸)하여 가볍게 춤추는 듯한 필세인데 비하여 이 글씨는 중후한 맛이 있다. 전자를 동적이라 한다면 이것은 정적인 필의가 짙게 보인다."고 평하였다.앞서 소개한 모두루묘지가 그 내용과 필치면에서 고구려인의 활달한 감성을 담고 있는데 반하여 덕흥리고분 묘지는 다소 권위적인 모습을 연상시키는 평정한 위엄을 담고 있는 것이다. 또 모두루묘지가 계선을 긋어 정해진 공간에 글자를 배열하는 치밀함을 추구하고 있는데 비하여 덕흥리 고분은 각 행의 윗 선만을 가지런하게 맞추어 자유롭게 묵사했다는 점도 대비된다. 예술적 입장에서 보면 모두루묘지가 완성도가 높은 것이 분명하지만 덕흥리고분 묘지는 그보다 시대가 앞선다는 점에서 또 다른 가치를 지닌다. 16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깜깜한 현실(玄室)에서 오롯이 묵흔을 간직한 채 역사의 일면을 전하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참으로 신비하고 감개할 따름이다. /이은혁(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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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0.07.14 23:02

가람 생가 '무너지고 깨지고'

한국 현대시조의 중흥을 이룩한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인 가람 이병기 선생(1891∼1968).그러나 가람 선생이 태어나고 말년을 보낸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생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6호로 지정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어 폐가나 다름 없었다. 특히 가람 선생의 문학관이 없는 현실에서 생가에서 조차 선생의 문학적 업적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큰 문제로 지적됐다.지난 10일 방문한 가람 이병기 생가는 사람의 손길이 끊긴 지 오래였다. 한 쪽 담장은 무너지기 시작해 장마철 붕괴를 걱정케 했으며, 흙벽에 발라놓은 백회는 일부가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마루와 모정 바닥은 뜯어져 있었고, 건물 곳곳에는 거미줄과 곤충 사체가 흉물스럽게 방치되고 있었다. 장독이 깨져있는 등 생가 내 물품 관리도 소홀했고, 목조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소화기 점검 및 정비일자는 2006년 7월에 머물러 있었다.마당의 풀들은 말라죽고, 가람 생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뒷뜰 대나무숲은 지저분하게 자라 손질이 필요했다. 생가 앞 벤치에서는 등산객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으며, 주차장에는 썩은 양파들이 나뒹굴고 있어 선비의 정결함을 느낄 수 없었다.방명록으로 내놓은 학생용 연습장은 낙서장이 된 지 오래. 어린 아이들이 장난스롭게 써놓은 욕설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방명록에는 생가의 보수와 관리에 신경 써달라는 방문객들의 목소리가 이어졌지만,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었다.익산시 관계자는 "도 예산 지원이 줄어들어 올해는 지붕 개량 사업도 예년보다 적은 예산으로 할 수 밖에 없었다"며 "내년에 반드시 예산을 확보해 전반적으로 생가를 보수하겠다"고 말했다.가람 선생 생가에 대한 관리 소홀 문제는 이미 몇 차례 언론을 통해 지적된 바 있다. 특히 지난 5월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방문단이 가람 선생 생가를 방문하려고 했지만, 생가가 초라하다는 이유로 방문 계획을 취소한 것으로 알려졌다.이택회 익산문인협회 회장은 "가람 선생 생가는 관리인이 따로 없어 가람기념사업회 회원들이 애정을 가지고 보살피고 있는 정도"라며 "관리가 소홀한 정도가 아니라 엉망이라고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또한 생가에서 가람 선생의 문학성을 알 수 있는 자료라고는 '비2'가 인쇄된 현수막과 동상 옆에 세워진 '고향으로 돌아가자' 시비 뿐이었다. 이회장은 "해설사도 배치돼 있지 않아 누가 찾아와도 설명해 줄 사람이 없다"며 "고창 서정주나 군산 채만식 등 친일 논란이 일고 있는 문인들까지 문학관이 세워진 마당에 현대시조의 횃불을 밝히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까지 치른 가람 선생의 문학관이 없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비판했다.이동희 전북문인협회장은 "가람 선생은 시조 문학의 중흥을 이뤄낸 현격한 공로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조명이 소홀했다"며 "지역사회의 문화적 자산이자 자랑으로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문학관 건립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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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휘정
  • 2010.07.13 23:02

인간문화재 35명 공개시연…'天工을 만나다'

인간문화재 35명이 자신들이 보유한 기능과 예능을 일반에 선보이는 시연 행사가 열린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사장 김홍렬)은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35명의 기능ㆍ예능 합동공개행사인 '2010 여름, 천공(天工)을 만나다'를 문화재청(청장 이건무) 후원으로 14~26일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개최한다고 12일 밝혔다. 합동공개행사란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들과 제자들이 1년에 한 번 자신들의 기능과 예능을 일반에 선보이는 일종의 의무 행사로, 2008년부터 진행돼온 것이지만 이번에는 소수 보유자가 모여 시연했던 그간의 행사와 달리 35명이 참여해 대규모로 열린다.매듭장, 소목장, 옹기장, 악기장, 불화장(佛畵匠), 나전장, 단청장 등 공예분야 26개 종목 보유자들의 시연과 이들이 만든 공예품 전시도 함께 이뤄진다. 특히 올해 새로 기능 보유자로 인정된 박명배(소목장), 김일만ㆍ정윤석(옹기장)의 시연도 볼 수 있다. 김홍렬 재단 이사장은 이날 서울 필동 한국의집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26개 종목이 총망라돼 35명의 인간문화재가 한꺼번에 모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이번 행사는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전통문화 중에서 무형문화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징후"라고 말했다.김 이사장은 "일제강점기와 여러 동란을 거친 가운데서도 우리 전통문화가 사라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온 것은 인간문화재 선생님들의 정열과 땀, 예지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이번 행사를 통해 무형문화재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커지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시연은 매일 오전 10~12시와 오후 2~4시에 6~7개 종목이 순서대로 펼쳐지며 휴일 없이 진행된다. 자세한 시연 일정은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홈페이지(www.chf.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입장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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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10.07.13 23:02

전북대 '분청사기인문화대접' 등 4점

전북대학교(총장 서거석)가 '분청사기인화문대접' 등 기증받은 조선시대 유물 4점을 9일 공개했다.유물 기증자는 전북대 도서관에 근무하고 있는 조수경씨로,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져 오던 것을 가족회의를 통해 대학 박물관에 기증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씨는 "8월 초 준공을 앞두고 있는 신축 전북대박물관에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증을 결정했다"고 말했다.분청사기는 15세기 초에 발전하기 시작해 16세기 중반경에 소멸한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도자기로, 조선의 소박한 이미지를 잘 간직하고 있다. 조씨가 기증한 분청사기는 인화문(印花文)이 그릇 전체에 시문돼 있는 대접으로, 일부가 파손돼 결실된 부분이 있다. 인화분청은 왕실용(王室用)이나 관청용(官廳用)으로 많이 제작됐는데, 굽 안쪽이나 그릇 안 바닥에 관청, 생산지, 장인 등의 글씨를 새기는 예가 많았다. 그러나 기증된 유물에는 글씨가 없어 다른 용도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또다른 기증유물은 문양 없이 내외면에 백토가 입혀진 대접이다.전북대 박물관은 기증받은 유물을 체계적으로 보존처리해 전시와 학술연구에 적극 활용할 예정이다. 특히 신축박물관에 기증유물실을 마련, 기증자의 뜻과 유물 기증의 의미를 널리 알릴 계획이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10.07.12 23:02

"매장문화재 보존·관리 국립박물관 일원화 안된다"

매장문화재 보관 및 관리청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일원화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전북문화원연합회(회장 이복웅)가 반발하고 나섰다.전북문화원연합회는 6일 열린 도내 문화원장 회의에서 "정부가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정(안)'을 입법예고하고, 국가 귀속 문화재 보호·관리청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하려는 시대착오적인 시도를 하고 있다"며 이에 대한 우려를 담은 결의문을 채택, 정부 관련부처에 전달했다고 밝혔다.도내 문화원장들은 "매장문화재는 그 성격상 출토된 지역에서 보관·관리·전시되는 것이 원칙이며, 또한 유물이 출토된 현지의 박물관 및 전시관이 시설 및 인력 등 모든 제반여건을 갖추고 있다"며 "특히 전라북도는 도·시·군마다 공립박물관이 적재적소에 소재하고 있어 보관·관리 능력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다는 평가를 박도 있다"고 강조했다.이들은 "발견매장문화재의 보관·관리청을 국립박물관으로 일원화하려는 것은 문화재의 관리권을 독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문화의 지방분권화에 역행하는 처사로, 궁극적으로는 지역문화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현재 입법예고된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정(안)'을 즉각 폐기하라고 촉구했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10.07.08 23:02

조배숙·이춘석 의원 공동주최 '문화재 보존관리 올바른 입법방향' 간담회

민주당 조배숙 의원과 이춘석 의원은 6일 국회의원회관 간담회의실에서 '문화재 보존·관리를 위한 올바른 입법 방향'을 주제로 간담회를 공동주최했다. 이날 간담회는 지난달 문화재청이 입법예고한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정안에 담긴 '매장문화재의 보관·관리청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일원화한다'는 조항을 둘러싼 논란의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마련됐다.이날 간담회에는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인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황평우 소장, 문화재청 최재혁 사무관, 중앙박물관 윤성용 연구관, 전라북도문화재위원장인 원광대 나종우 교수 등이 시행령 개정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특히 최재혁 사무관과 윤성용 연구관은 "국가귀속문화재의 체계적인 관리와 책임성의 명확화를 위해 일원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반면 황평우 소장과 나종우 교수는 "문화연대 등 시민단체와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출토유물의 현지성을 살리고 문화자원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맞서 이목을 끌었다.조배숙 의원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관리 일원화가 지방분권화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 아닌지 우려감이 크다"면서 "이번 간담회를 계기로 매장문화재 보관·관리의 국립중앙박물관 일원화 시도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 의원은 또 "문화재청 항의방문, 공청회 개최 등 올바른 입법을 위해 다양한 경로를 통한 후속조치를 취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 문화재·학술
  • 정진우
  • 2010.07.07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41)고대사 비밀을 간직한 광개토대왕호우

1946년 경북 경주시 노서동 신라고분 140호에서 각종 철기와 토기, 용과 봉황의 무늬가 있는 대도(大刀)와 함께 작은 청동합 하나가 출토되었다. 청동합의 동그란 밑면에는 4자씩 4행으로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이라는 글귀가 양각되어 있다. 비록 16자에 불과하지만 그 의미는 자못 크다. 첫째, 을묘년은 서기 415년으로 광개토대왕비가 제작된 이듬해에 해당한다. 그런데 고구려에서 제조된 것으로 보이는 청동합이 어떻게 신라지역의 고분에 묻혔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둘째, 왕의 시호를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이라 하였는데 이는 비문에서는 '國岡上廣開土平安好太王'이라 하고, 모두루묘지에서는 '國岡上大開土地好太聖王'이라 한 것과 비교된다. 의미상 큰 차이는 없지만 눈여겨볼 대목이다. 셋째, 마지막의 '十'이라는 숫자는 호우가 여러 개임을 추측하게 하는데 아직까지 추가로 발견된 것이 없다는 점이 이상하다. 넷째, 글자의 상단 여백에 '井'자 모양의 표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최근 도교와 관련된 벽사(僻邪)의 상징이라는 연구가설이 제시되었으나 확실하지 않다. 이처럼 청동호우는 짧은 명문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의문을 내포하고 있다.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명문의 윗 부분은 거의 나란히 맞추고 그로 인해 생기는 공간에 '井'자 모양을 표시하였으며, 아래 부분은 원형의 형태에 따라 높이를 달리하였다. 호우에 양각된 명문은 비문의 서체와 매우 흡사하며, 특이하게 쓰여진 '岡'자와 '開'자도 핍진하다. 이처럼 같은 시기의 석비와 청동에 새겨진 명문의 자형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당시 고구려의 공식적인 서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비문과 호우가 만들어진 시기는 중국의 동진시대에 해당하며 정교한 소해(小楷)와 유려한 행초서가 유행할 때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중국 문화에 동화되지 않은 독자적인 서풍이 이미 고구려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상징으로 지칭되는 호태왕비나 신라에 전해진 청동호우는 고구려의 대외적 위상과 문화적 독자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이다.호태왕비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사실상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고구려는 당시 군사적으로 신라를 돕고 있었다. 고구려의 청동호우가 신라의 고분에 부장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며, 거기에는 무슨 사연을 담겨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김용준이 제기한 흥미로운 설이 있어 요약 소개한다. 명문의 을묘년은 장수왕 즉위 3년으로 신라 실성이사금(實聖泥師今) 즉위 14년에 해당한다. 이전에 대외견제의 일환으로 고구려가 신라에게 볼모를 요구하자 내물왕은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에 보냈다. 실성은 10년 만에 환국하여 왕위에 오른 뒤, 마치 보복하듯 10세 밖에 되지 않은 내물왕의 셋째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왜에 볼모로 보내고, 11년 뒤 다시 내물왕의 둘째 아들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보냈다. 이 해에 광개토대왕이 승하하였다. 고구려는 장수왕 2년(갑인)에 태왕의 능을 통구로 천장(遷葬)하고 광개토호태왕비를 세웠으며, 이듬해(을묘) 청동호우를 주조하였다. 실성은 또다시 내물왕의 첫째 왕자인 눌지를 고구려에 보내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도리어 그에게 시해되었다. 왕권을 잡은 눌지는 먼저 볼모로 간 두 동생을 구하고자 하였는데, 이를 자원한 박제상(朴堤上)의 도움으로 418년(장수왕 6년) 마침내 복호가 환국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 호우를 신라로 가져온 인물은 복호일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호우가 발견된 무덤의 주인 역시 복호로 추정하고 있다.당시의 대외적 관계로 볼 때 고구려는 대국이었으므로 7년 간 볼모로 잡혀있다 환국하는 복호에게 고구려를 각인시킬 수 있는 하나의 상징물로 하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호우는 고구려왕의 시호가 새겨진 청동제기라는 점에서 다분히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호우는 비록 작지만 그 역사적 의미와 서예사적 가치는 이처럼 심대하다. /이은혁(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 문화재·학술
  • 전북일보
  • 2010.07.07 23:02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 보물 승격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5일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가야산에 있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86호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을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 1656호로 승격지정 고시했다고 밝혔다. 이 석탑은 신라 애장왕(재위 800~806) 때 창건된 법수사지 내에 있으며, 가야산 계곡에 돌을 쌓아 만든 단에 자리 잡고 있다. 높이는 5.8m이며, 상ㆍ하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노반(路盤. 사리탑의 맨 꼭대기 지붕 위에 놓여 상륜부를 받치는 부재) 이상의 상륜부는 남아있지 않으나 보존 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다.탑의 규모가 작고 하층 기단이 높으며 안상(眼象. 둥근 모양의 무늬)이 음각된 점 등 9세기 후반 석탑의 특징을 일부 갖추고 있지만, 옥개석(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는 돌)의 받침이 5단인 점 등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사찰 창건 시기인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또,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안동 옥동 삼층석탑과 인제 한계사지 남삼층석탑 등의 하층 기단에서도 3개의 안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지역적인 특성도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은 이 석탑이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우수한 조형미를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주변 경관과도 잘 어울리는 위치에 있다는 점 등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를 고려해 보물로 지정했다고 설명했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0.07.06 23:02

공룡발자국 화석 세계유산 물건너가나

정부가 한 차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하려다 다음 기회를 노리며 신청 자체를 자진 철회한 '남해안 지역 백악기 공룡 해안'의 세계유산 등재에 '적신호'가 켜졌다. 오는 25일 개막해 다음달 3일까지 브라질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열리는 올해 제3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토의 안건 보고서에 '남해안 백악기 공룡 해안'과 유사한 성격인 다른 지역에 대해 '등재불가'(Not Recommended for Inscription) 의견이 나온 것. 5일 현재 유네스코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공개 중인 이번 세계유산위원회 보고서를 보면 유네스코 자문기구로 세계자연유산 실사를 담당한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공동 신청한 이베리아 반도 공룡 발자국 화석지에 대해 '등재불가' 의견을 냈다.이러한 IUCN 의견은 권고에 지나지 않지만, 세계유산위원회가 이에서 벗어나는 결정을 내린 적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이 공룡 발자국 화석지가 세계유산에 등재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관측된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이베리아반도 공룡발자국 화석지는 이전에 이미 한 차례 등재를 시도했다는 점과 화석 성격 또한 (우리와)비슷해 그 결과를 우리로서도 주시하고 있었는데 안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고 말했다. 한국은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작년 스페인 세비야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전남과 경남 일대 백악기 공룡발자국 화석지를 세계자연유산에 등재하려 했지만 IUCN이 등재불가 판정을 하는 바람에 회의 개막 직전에 등재 신청을 철회한 바 있다.유네스코는 같은 유산에 대한 두 번 이상의 등재신청을 불허한다. 하지만, 이베리아반도의 공룡발자국 화석에 대한 등재불가 판정을 반드시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반론도 나온다. 한국백악기공룡해안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추진단 소장인 허민 전남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는 "IUCN에서 여전히 공룡발자국 화석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면서 "오히려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과 스페인ㆍ포르투갈이 공동으로 공룡화석 발자국에 대한 공동 등재신청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0.07.06 23:02

경복궁 복원 20년 계획 9월 종료

꼭 20년이다. 공사판이 아닌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요즘도 공사가 한창이다. 경술국치 100년을 기념해 오는 8월15일 모습을 드러낼 광화문 복원 공사가 마무리되면 경복궁은 1990년 이후 헐떡이며 달린 지난 20년을 뒤로 하고 긴 휴식에 들어간다.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 시대 그 법궁(法宮)으로 건립된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 내려앉아 푸성귀 무성한 황무지로 변했다가 대원군 집권 시대인 고종시대에 이르러서야 중건됐다. 하지만, 조선을 계승한 대한제국이 패망하면서 경복궁은 다시금 위엄을 잃어버리고 황폐일로를 걷게 됐다. 이런 경복궁이 마침내 광화문 복원을 정점으로 새 단장을 하고 늦어도 9월이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문화재청 박영근 문화재활용국장은 1일 "(경복궁 경내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 이전 문제가 남아 있지만,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므로 경복궁 복원은 광화문 완공과 더불어 사실상 마무리된다고 보아도 좋다"고 말했다. 경복궁 복원 20개년 계획은 공식적으로 1990년에 시작했다. 애초 2009년 마무리될 예정이던 이 사업은 총예산 1천789억원을 투입해 강녕전을 비롯한 93개동 3천250평을 복원한다는 것이다. 순차적 사업진행을 위해 정부는 복원 권역을 구분했다. 이에 따라 1990-1995년에는 왕과 왕비의 일상 생활공간인 침전(寢殿) 권역 사업을 마무리했고, 1994-1999년에는 세자를 위한 공간인 동궁(東宮) 권역 복원사업을 끝냈다. 1996-2001년에는 근정전 전면인 흥례문(興禮門) 권역을 복원했으며 1997-2005년에는 궁내 북서쪽에 있는 제례 공간인 태원전(泰元殿) 권역을 마쳤고, 2001년 이후에는 광화문 및 기타 권역에 대한 복원사업을 벌였다.이런 복원사업을 통해 경복궁은 1990년 당시 건물 기준 36개동 2천957평이었지만 이제 129개동 6천207평을 갖추게 됨으로써 고종시대 중건 당시 330여개동, 약 1만5천600평의 40%가량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이 기간에 근정전은 새 옷을 갈아입었고, 명성황후가 시해된 공간으로 유명한 건청궁(乾淸宮)도 복원됐다. 따라서 올해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경복궁 20년 복원 계획은 고종시대 제1차 중건을 잇는 제2차 중건에 비견할 만하다. 이런 작업을 토대로 문화재청은 서울을 유네스코 역사문화도시로 등재하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설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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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10.07.02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40)고구려인의 감성이 담긴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는 1935년 광개토호태왕비와 태왕릉이 있는 중국 길림성 집안현 동북쪽의 언덕 하양어두(下羊魚頭)의 고분 내에서 발견되었다. 고분은 석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실(前室)과 주실(主室)로 나뉘어져 있는데, 모두루묘지는 전실의 정면 위쪽에 길게 회벽을 바른 위에 쓰여져 있다. 가로와 세로로 계선을 긋고 80행 800여자에 달하는 내용을 묵서하였으나 결락된 부분이 많아 현재 판독할 수 있는 글자는 250여 자에 불과하다.묘지의 일반적인 구성원칙에 따라 '大使者牟頭婁'라는 제하에 "하백의 손자이시요 해와 달의 아들이신 추모성왕께서는 본디 북부여로부터 나오셨다."는 내용으로 시작하는데, 고구려의 건국 신화가 실려 있는 광개토호태왕비의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이후로 결락된 틈으로 보이는 비문의 내용은 모두루의 선조가 북부여에서부터 (추모)성왕을 따르며 반역사건을 진압한 것을 계기로 그의 노객(奴客)이 되었고, 고국원왕으로 추정되는 국강상성태왕 때에는 북부여를 침입한 북방의 선비족을 물리치는 등 전공을 세워 대대로 관은을 입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묘지의 당사자인 모두루는 광개토대왕 때에 선조의 공에 힘입어 북부여 수사(守事)로 파견되었으며, 이 곳에서 광개토대왕의 부음소식을 듣고 애통해 하였음을 적고 있다. 이로써 모두루는 광개토대왕 시절 즉, 5세기 전반에 생존하며 북부여의 지방관으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또 묘지에서 왕의 호칭을 '鄒牟聖王' '國岡上大開土地好太聖王' 등 공통적으로 성왕(聖王)이라 칭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이 묘지를 통해 4~5세기 고구려 왕권과 그에 대한 도전의 양상, 그리고 지방통치와 씨족 계승의식 등을 살필 수 있다.또 하나 주목을 끄는 것은 묘지가 묵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5세기 전반기의 묵흔을 오늘날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지만, 일견 그 서체면에서 볼 때에도 광개토호태왕비와는 전혀 다른 필치를 보이고 있어 더욱 신비하게 느껴진다. 서체에 대한 일반적인 평을 살펴보면, 당시 고구려에서 상용되었던 것으로 예서의 필법이 잔존해 있는 해서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비문과 같은 금석문이 아니고 실제로 쓰여진 묵서라는 점에서 엄격한 형식적 규율보다는 자유롭게 서사된 느낌이 강하며 개성적인 필치가 많이 가미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고구려의 비에서 나타나는 질박함과는 달리 날렵하고 생동감 넘치는 거침없는 운필은 전혀 망설임이 없다. 이미 그 글씨에 일정한 체의 격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체격은 해서라기보다는 예서에 가까우며 예서 중에서도 행기를 많이 띠고 있는 간백(簡帛) 문자를 연상케 한다. 필속의 느낌이나 파책에서 급격하게 평포(平鋪)를 이루는 것, 생략된 필획을 사용하고 있는 것들이 그렇다.여기에서 고대사료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있다. 고대사를 연구할 때 현재 남아있는 비문 중심으로 연구할 경우 자칫 편견에 빠질 염려가 있다는 점이다. 고대사료의 발굴은 그 역사적인 가치를 떠나 문화사적인 면에서도 충분히 검토되어야 한다. 모두루묘지와 같은 묵서 묘지는 그가 일개 지방관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초월하여 강한 민족적 자긍심을 전제하고, 자신의 씨족에 대해서도 큰 자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씨족적 자부심이 민족적 자긍심을 전제로 한 것임을 염두에 둔다면, 모두루묘지는 고구려인들의 민족적 의식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며, 또 그 기상을 여과 없는 생동감 넘치는 필치로 담아내고 있다. 모두루묘지 묵서는 고구려인의 예술적 기질을 유감 없이 드러낸 귀중한 1차 자료인 것이다./이은혁(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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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6.3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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