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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전쟁 기억해야 할 미래 - 에필로그

'총력전(總力戰).' 군대를 넘어 국가가 가용 가능한 모든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하여 싸우는 전쟁을 뜻한다. 말 그대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전 국민이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양상을 일컫는다. 총력전은 군대끼리 맡붙어 만나 누가 더 많이 살아남았는가 등의 결과로 승패를 갈랐던 역사속의 전쟁과 달리 전쟁의 참상과 고통을 군인뿐만 아닌 참여하지 않는 민간인에게까지 과거를 지나 현재까지 겪게 하기도 한다. 70여년 전 한반도에서 벌어진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은 이 같은 총력전의 참상을 여실없이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해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중단된 한국전쟁은 1129일동안 남북한을 통틀어 약 300만 명의 사망 또는 실종자를 냈다. 당시 한반도의 인구가 3000만 명 수준인 점을 고려하면 10명 중 1명이 전사한 것으로 사실상 모든 한국인이 이 전쟁으로 가족, 이웃, 친척을 잃는 참담한 경험을 한 셈이다. 한국전쟁은 전선의 전후방을 따지지 않았다. 국군과 인민군 모두 자신의 점령지역에 있는 민간인에게 '반동분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적법한 절차 학살을 자행했다. 이로인해 적법한 절차 없이 희생되거나 행방불명된 민간인만 약 99만 명에 이르고 있다. 이는 비슷한 시기 같은 총력전이었던 베트남전쟁이나 제 2차 세계대전에 비해서도 월등히 높은 수치로 여전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차가운 땅 속 산하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이 셀 수 없이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처럼 총성이 멈춘지 70년이 지났지만 승자도 패자도 없었던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고통, 그리고 수많은 과제를 남겼다. 이에 전국의 지역 대표 언론 9개사가 소속돼 있는 한국지방신문협회는 한국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은 올해 1월부터 '끝나지 않은 전쟁, 기억해야 할 미래'를 주제로 350일간 24차례 각 지역에 담겨있는 한국전쟁의 상흔을 돌아보고 이를 치유하는 동시에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기억의 여정을 독자들과 함께 걸어왔다. △수많은 희생이 지킨 자유 각 신문사 취재팀은 먼저 1950년 6월 25일 첫 총성이 울린 이후 1953년 7월27일 총성이 완전히 멈출때까지 한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이름없는 젊은이들의 발자취를 찾았다. 평생 농사만 짓던 이들에게 전장에서 빗발치는 총성과 박격포의 굉음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공포를 안겨줬다. 그러나 한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포화속으로 뛰어 들었다. 한국전쟁 첫 승전인 '춘천대첩', 결사항전으로 임시수도 부산을 지켜낸 '낙동강 전투', 앞서 낙동강 방어선 구축에 시간을 벌어준 '대전전투', 한국전쟁의 전황을 뒤바꾼 '인천상륙작전', 마지막으로 가장 처절했던 '백마고지 전투' 등 후손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진 무명 영웅들이 지역에 남긴 이야기를 돌아보고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남아있는 상처, 드러나지 않은 상흔 이어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국가의 폭력에 희생된 죄 없는 민간인들의 이야기와 남아 있는 이들에게 담긴 상처를 수면 위로 끄집어냈다. 전쟁에서 희생되는 건 전투에 참여한 군인들만이 아니다. 국군과 인민군이 다녀간 지역에 살던 수많은 민간인이 자신의 죄명도 모른 채 형무소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거나 행방불명 됐다. 전북과 전남, 경남. 그리고 제주에서는 정부와 경찰이 죄 없는 민간인들에게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어 무참하게 살해한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자행됐다. 1950년 5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대전 동구 산내 골령골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의 경우 어림잡아도 2000∼70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현재 진실과화해위원회와 유족회 등이 조직돼 이들에 대한 조사가 진행 중이지만 정확한 희생자 수와 진실 규명 등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전쟁의 참상에 희생된 이들의 억울한 '한'은 대를 이어 전달돼 7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도 일부 유족들은 '빨갱이 자식'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진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 차원의 적극적인 노력과 관심이 필요한 상황이다. △기억하라, 미래를 위하여 마지막으로 취재팀은 전쟁의 상흔을 기억하고 앞으로의 미래를 그렸다. 현재 각 지자체마다 각종 기념관과 기념사업회가 설립됐고 자유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들을 잊지 않기 위해 학술적 노력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같은 민족이 이념이 다르단 이유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눈 한국전쟁과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이 땅에 남아 있는 우리가 각 지역에 담긴 당시의 기억을 담아내고 후세에 전하는 길을 걸어야 한다. 전쟁 초기 서울 함락 이후 정전 협정까지 1023일 동안 대한민국의 임시수도로서 기능했던 부산에서는 당시 정부청사 등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현재 임시수도 정부청사는 국가등록 문화재로 지정돼 관리 중이다. 마찬가지로 1950년 6월 28일 대한민국 임시수도로서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던 옛 충남도청은 2013년 대전근현대사전시관으로 개관했다. 한국전쟁 당시 모습 등 100년간의 대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뼈 아픈 비극을 기록으로 남기고 자유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영웅들의 이야기를 생생히 기록하기 위한 움직임도 진행되고 있다. 현재 전황을 뒤바꾼 인천상륙작전과 한국을 지켜낸 낙동강 전투 등을 반추하기 위한 기록 사업과 마산만 전투, 춘천대첩의 기념관을 세우기 위한 계획이 추진 중이다. 국립현충원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호국선열들을 기리는 선양 사업도 함께 진행 중이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인해 점차 한국전쟁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당사자만 기억하는 잊혀진 역사가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정부와 지자체를 넘어 민간 차원에서도 기념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하는 이유다. △피로 지켜낸 공간을 물려받은 우리…함께 전해야 기억 지난해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한국전쟁과도 같은 전쟁의 참상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일어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일깨웠다. 여전히 한국전쟁은 진행 중인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북한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서명한 이후 여전히 우리의 빈틈을 엿보며 총구를 겨누고 있고 국제 사회도 제 3차 세계대전의 유력 후보지로 한반도를 꼽곤 한다. 이 땅에 종전의 마침표가 언제 찍힐 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이와 동시에 '기억해야 할 미래'이기도 한것이 바로 한국전쟁이다. 어쩌면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지도 모른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이 있듯 73년 전 선열들이 피로 지켜낸 공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잊혀져 가는 한국전쟁의 기억을 다음 세대에 고스란히 연결하는 것을 준비해야한다.

  • 기획
  • 이준서
  • 2023.12.20 10:45

[한국전쟁 정전 70년] 춘천대첩, 전승기념관 시급하다

6·25 전쟁 발발 초기 벌어진 춘천지구 전투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들이다. 1950년 6월 25일부터 6월 27일까지 국군 제6사단이 북한군 제2군단에 맞서 전개한 방어 전투는 ‘춘천대첩’으로 불린다. 하지만 춘천대첩을 기념하는 공간은 춘천에 초라하게 남아있다. 의암호 인근에 1978년 조성된 ‘춘천지구 전적기념관’이다. 기념관 입구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년도순시 시 국가안보의식, 향토방위의식 고취를 위해 설립을 지시했고 친필로 ‘춘천지구 전적기념관’의 명판으로 써 주심으로 동년 11월 28일 설립되었다”고 쓰여있다. 강원특별자치도(이하 강원자치도)가 1981년 교통부로부터 이 건물을 무상 양여 받았고, 한국자유총연맹이 위탁 운영 중이다. 강원자치도가 지원하는 연간 예산은 관리인 인건비, 공과금, 소규모 수리비로 1억여원 정도. 이 곳에서 열리는 춘천대첩 기념 행사도 없어 ‘하드웨어’ 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열악하다. 2019년 연간 방문객은 13만 3,805명 이었지만, 코로나19가 유행했던 시기에 급감해 지난해에는 6만 9,369명이었고 올 상반기에는 1만 7,260명에 그쳤다. 춘천대첩에 학도병으로 참전했거나, 춘천대첩의 역사적 의미를 후대에 알리길 열망하는 지역 원로들은 ‘춘천대첩 평화문화 기념관’ 건립을 주장하고 나섰다. 올해 정전 70주년을 맞아 시작된 일이다. ■‘민·관·군 합심의 역사’ 후대에 전해야=지난 달 28일, 춘천지구 전적기념관에서 만난 진성균(90) 6·25참전유공자회 강원도지부장. 춘천대첩에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그는 제1·2전시실의 전시물을 하나씩 볼 때 마다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먼지가 쌓인 옥산포 전투 조형물, 당시 썼던 녹슨 무기들, 색이 바랜 춘천지구 전투 설명판 등이 전부였지만 기억은 생생했다. 열정적으로 전쟁 상황을 말하던 그는 “그런데 이것 만으로 누가 춘천대첩을 보고 느끼겠는가”라며 안타까워 했다. 병력면에서 4배, 화력면에서 10배 우세했던 북한군에 맞선 국군의 치열함, 주먹밥을 만들고 포탄을 날랐던 제사공장 여공들과 학도병들의 절박함을 느끼기에는 ‘빛 바랜 설명판 몇 점’은 역부족이었다. 진성균 지부장과 함께 방문한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육사 35기 출신인 김일환 무공수훈자회 강원도지부장은 “춘천대첩의 핵심은 군인 뿐만 아니라 경찰, 민간이 합심해 대한민국을 지켰다는 사실”이라며 “전적기념관으로는 이 정신을 담기에 부족하다”고 말했다. 30대인 강대규 변호사는 “3차원을 넘어 4차원 시공간을 만드는 기술이 발달한 시대에 전혀 맞지 않는 2차원 전시물 위주의 기념관”이라며 “청소년들도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중요성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체험 콘텐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들은 올해 구성된 춘천대첩 평화문화기념관 건립 추진위원회의 위원들로 활동 중이다. 진성균 지부장은 추진위원장을 맡았다. 진 위원장은 “마음의 숙제로 남은 숙원 사업”이라고 말했다. ■관(官)은 소극적일 때 민(民)이 먼저 나서=춘천대첩 평화문화기념관 건립 추진 사업은 올해 철저하게 민간 중심으로 시작됐다. 지난 6월 29일 춘천대첩평화문화기념관 건립 범시민대회가 춘천시청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날 기조 강연을 맡은 한광석 강원대 평화학과 교수는 “21세기는 생태계가 붕괴되고, 기술혁신으로 인간성이 위협 받으며, 핵 전쟁 가능성으로 국제 평화가 흔들리는 시대”라며 “춘천대첩 평화문화 기념관은 이런 시대에 메시지를 주는 공간으로 새롭게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범시민대회에는 춘천대첩에 학도병으로 참전한 언론계 원로인 박기병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이사장, 김선배 전 춘천교대 총장, 김미영 전 강원도경제부지사 등 170여명이 참석했다. 김미영 전 부지사는 “시민들이 춘천대첩의 의미를 알고, 자긍심을 느끼게 하는 것이 중요한데 민방위 교육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건립비로 수 백억원의 예산이 드는 사업에 지자체는 선뜻 나서지 않고 있다. 박철호 강원대 명예교수는 “춘천대첩 기념관 건립 추진 운동은 민간에서 시작됐지만, 동력을 얻기 위해서는 지자체가 나서야 한다”며 “민·관·군이 다시 한번 합심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강원일보=신하림기자 “춘천대첩 지휘소 있던 ‘봉의산’ 국가 평화의 중심지였다” △허준구 춘천학연구소장 허준구(사진) 춘천학연구소장은 춘천대첩의 지휘소가 있던 봉의산(鳳儀山)을 “강원도를 넘어 국가 위기와 평화의 역사가 담긴 공간”으로 평가했다. 상서로운 봉황(鳳凰)이 나래를 펴고 위의(威儀)를 갖춘 모습이란 의미의 봉의산은 고려시대부터 춘천의 진산이었다. 1888년 고종 부부의 피난처로 춘천 이궁이 건립됐던 곳이고, 일제 시대 때는 신사(神社)가 있었으며 현재는 강원도청이 있다. 허 소장은 “봉의산 중턱에는 ‘봉의산 순의비’가 있는데, 1253년 몽골이 침입 했을 때 도망가지 않고 ‘봉의산성’에 모여 한 명도 살아 남지 않을 정도로 결사항전했던 2,000여명의 주민들을 기리는 공간”이라며 “이를 계기로 몽골은 침략 수위를 낮췄는데, 결과적으로 이들의 희생으로 나라의 평화를 되찾았다 ”고 말했다. 봉의산 바로 아래에 있는 ‘근화동’은 춘천대첩의 방어선이 구축됐던 소양강이 흐르는 곳이다. 이곳에는 옛 캠프페이지 부지가 있다. 근화동의 캠프페이지는 한·중 수교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중국 민항기 춘천 불시착 사건’이 발생했던 공간이다. 1983년 5월 5일 어린이날, 중국민항 소속 B-296 트라이던트 여객기는 승객 96명, 승무원 9명을 태우고 중국 선양을 떠나 상하이로 가다 공중 납치됐고, 연료가 모자라 춘천 캠프페이지에 불시착했다. 중국은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대표단을 파견해 한국과 협상을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양국 간 비공식 교섭 채널이 개설됐고 교류를 하나씩 넓혀 나가 1992년 수교를 맺었다. 불시착 직후 중국 승객들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밤을 보낸 공간이 봉의산 자락의 춘천 세종호텔이다. 당시 강원일보 보도를 보면, 춘천시는 음식 등을 챙기며 세심하게 챙겼다. 허 소장은 “봉의산을 중심으로 한 소양강 주변은 춘천대첩의 격전지이자, 국가 평화의 오랜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공간”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춘천에 왜 평화문화 기념관이 조성돼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역사적 사실들로 보았다. 허준구 춘천학연구소장은 “춘천이나 강원도 뿐만 아니라 국가의 평화를 좌우했던 공간인 만큼, 기념관 조성 사업이 추진된다면 국가적인 과제로 추진돼야 한다”며 “지자체 뿐만 아니라 정부가 나서야 하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강원일보=신하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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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2.04 15:16

[한국전쟁 정전 70년] 대전전투의 영웅들 그리고 기억해야 할 미래

철도 경부선과 호남선이 지나던 대전은 교통과 물류 중심 도시로 성장했다. 6·25 전쟁 시 대전은 국토의 중심이면서 교통·물류 중심이었던 만큼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6·25 전쟁 발발 후 북한군에 속수무책으로 밀리던 이승만 정권은 수도 서울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라 대전에 도착, 임시수도로 공표하기도 했다. 옛 충남도청(등록문화재18호)을 임시정부로 사용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마치 서울에 있는 것처럼 '동요하지 말고 생업에 충실하라'는 취지의 방송 녹음을 대전에서 했다는 사실은 이미 역사적으로 검증된 일이다. 이 방송을 믿고 피난을 주저한 서울시민들이 북한군의 점령 아래 희생이 컸던 역사적 아픔도 있다. 피해는 컸지만 국군과 미군이 결사항전으로 막은 '대전전투'는 북한군의 남하 진격을 일정 시간 저지, 낙동강 전선에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할 소중한 시간이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여기에 당시 미군 24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을 구출하기 위한 철도기관사들의 활약 등 대전은 6·25 전쟁의 많은 사연을 간직한 도시로 기억된다. ◇대한민국 임시수도 대전과 임시정부 충남도청 1932년 지어진 옛 충남도청. 6·25 전쟁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다.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 각료들은 27일 새벽 2시 서울 경무대를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 이 대통령을 태운 열차가 대전역에 도착한 시간은 이날 오후 4시 무렵, 이렇게 늦어진 데는 열차가 대구에 내려갔다가 다시 대전으로 돌아왔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이 대통령은 이영진 당시 충남도지사가 머물던 대흥동 관사에 짐을 풀었다. 그렇게 충남도지사 관사는 '대전경무대(大田景武臺)'로 불리며 대통령의 임시 관저가 됐고, 충남도청은 정부청사가 된 것이다. 대전은 28일 임시수도로 공표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했으며, 일선에서도 충용 무쌍한 우리 국군이 한결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 중입니다. 국민 여러분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기를 바라는 바입니다"는 내용으로 육성녹음을 했다. 이 녹음은 27일부터 서울중앙방송국에서 방송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방송만 믿고 이 대통령이 서울에 머무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28일 새벽 2시 30분, 인민군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한강인도교를 폭파했다. 이 대통령의 녹음 방송 말만 믿다가 뒤늦게 피난길에 올라 다리 위에 있던 무고한 피난민 수백 명이 희생을 당했다. 북한군을 저지하다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지 못한 국군 수만 명도 발이 묶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래도 유의미하게 7월 12일 관저에서 한국과 주한미국대사가 '대전협정'을 맺었는데, 이 협정으로 국군과 미군이 '대전전투' 등을 통해 일주일 동안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고군분투를 했다. 16일 금강방어선까지 무너지자, 윌리엄 딘 소장은 대전 갑천 동쪽 천변에 새로운 진지를 구축하고, 북한군의 남하를 필사적으로 막았다. 비록 북한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는 훗날 낙동강 전선에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버는 값진 전투로 평가됐다. 현재 옛 충남도청은 2013년 대전근현대사전시관으로 개관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던 6·25 전쟁 당시 모습 등 100년간의 대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기관사, 미카 3-129호, 그리고 호국철도기념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영면을 하고 있는 보훈의 성지 국립대전현충원 한쪽에는 멈춰선 철마가 있다. 이 철마는 6·25 전쟁과 무슨 사연이 있을까?. 북한군에 대전이 위협을 받자 이승만 대통령과 내각이 또다시 대구로 피난길에 오른다. 이후 군인과 미국군은 1950년 7월 19-20일 이른바 '대전전투'를 벌인다. 당시 미군 24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은 오산-평택-천안-조치원 등 앞선 전투에서 패전을 거듭하자, 계획에 없던 대전을 방어선으로 구축했다. 딘 소장은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의 지시에 따라 3일의 시간을 벌기 위해 대전 외곽의 갑천을 중심으로 진지를 구축, 북한군과 격전을 벌였지만 결국 대전을 내주며 후퇴하고 말았다. 미 제24사단은 1950년 7월 20일까지 대전을 방어해 미 제1기병사단의 옥천, 영동 일대 투입에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는 임무를 완수했지만, 이 과정에서 부대가 제각기 철수하며 투입 병력 3933명 중 1/4에 달하는 1150명의 전사자와 다수의 전투 장비 손실 등 많은 희생을 감수했다. 특히 딘 소장은 북한군의 포로가 되고 만다. 충남 논산 출신인 김재현 기관사(1923-1950)는 7월 16일 북한군이 대전까지 내려오자 수송지원을 위해 약 1만 9300명의 철도원과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 포로가 된 딘 소장을 구하기 위해 김재현 기관사는 미군 특공대원 30여 명과 함께 증기기관차 미카 3-129호를 몰고 딘 소장 구출 작전을 벌였다. 그러나 적탄을 뚫고 대전역까지 갔으나 작전에 실패하고 귀환하던 중 매복하던 적으로부터 8발의 총상을 입고 순직했다. 김재현 기관사가 쓰러지자 곧이어 현재영 부기관사가 운전대를 잡았지만, 그도 왼팔에 총상을 입었으며 마지막에는 황남호 부기관사가 운전대를 잡고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탈출 과정에서 김재현 기관사를 포함, 모두 33명이 순직했다. 딘 소장은 1953년 포로교환으로 귀환했으며, 세 기관사는 미 국방장관 특별민간공로훈장이 수여됐다. 특히 김재현 기관사는 철도인 최초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이 됐고, 대전 판암기지 인근에 그를 기리는 순직비가 있다. 증기기관차 미카 3-129호는 부산-신의주 등 주요 간선에서 운행되다가 1967년 디젤 기관차가 등장함에 따라 운행이 중단됐다. 이후 1981년부터 2년간 동해 남부선 부산-경주 구간서 관광 열차로 활용되다가 2008년 10월 17일 제415호 문화재로 등록됐다. 전국의 미카형 증기기관차 중 2량만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415호로 지정됐으며, 그중 하나가 국립대전현충원에 전시된 것이다. 대전현충원은 미카 3-129호와 함께 6·26 에 참전한 철도인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3년 '호국철도기념관'을 건립했다. 6·25 당시 군사 수송작전에 투입됐다 순직한 기관사 287명을 기리고 있다. 김재현 기관사를 비롯, 전쟁에서 활약한 철도기관사 등도 소개한다. 나아가 한국철도의 시작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철도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기억하라, 호국보훈메모리얼파크 이렇듯 대전시는 6·25 전쟁의 역사적 아픔이 있는 곳이다. 여기에 보훈의 성지인 국립대전현충원까지 있지만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이들을 위해 필요한 제대로 된 보훈인프라는 부족한 실정이다. 국립대전현충원의 경우 국가유공자, 유족뿐만 시민들까지 1년에 약 331만 명이 방문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일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나 후대를 위해 교육 등의 시설은 열악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대전에 '호국보훈메모리얼파크(호국보훈파크)'가 조성되는 이유다. 호국보훈메모리얼파크 조성사업은 윤석열 대통령의 지역 7대 공약이다. 대전시가 제안한 후 윤 대통령이 지역공약사업으로 채택하며 본격화됐다. 유성구 구암동 현충원역 일원 약 70만 5000㎡ 부지에 8995억 원을 들여 전국 최대 규모의 추모를 위한 보훈테마파크 조성이 골자다. 지난 9월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호국보훈메모리얼파크' 조성 사업에 대해 "국가유공자 유가족과 참배객들이 불편함이 없도록 안전하고, 편안한 환경에서 고인을 기릴 수 있도록 국가가 노력할 것"이라며 "관계부처 간 협의와 함께 예비타당성조사 등의 조사를 거쳐, 장기적으로 추진해 나가게 될 것"이라며 긍정적 입장을 보임에 따라 청신호가 켜졌다. 최근 대전시는 메모리얼파크 조성을 위해 '호국보훈파크 조성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수립 용역'을 발주했다. 용역은 보훈복합커뮤니티센터와 보훈휴양원 등 국가보훈시설 건립의 타당성 조사와 함께 사업계획 수립 추진, 각 사업 개발의 시행자 선정과 방식·규모·콘텐츠 구상, 행정절차 대응 등 사업추진에 필요한 기술·학술적 검토를 목적으로 한다. 시는 용역을 통해 자체적 사업계획 마련 후 국가보훈부 등 관계기관과의 협의를 통해 2029년까지 준공할 계획이다. 시 관계자는 "국가보훈파크 조성으로 잊혀져 가는 보훈문화를 확산하는 것이 목표"라며 "의미를 갖는 만큼 모두가 한목소리로 조성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전일보=이다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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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20 15:40

[한국전쟁 정전 70년] 피란수도 부산, 무엇을 기억할까

참혹했던 한국전쟁을 극복하고, 국제 지원의 수혜를 입던 국가에서 원조국으로 거듭난 대한민국. 그 중심에서 수십만 명의 피란민을 포용하고, 경제 성장의 기틀을 다졌던 부산이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20세기 냉전시대의 피란수도에서 21세기 평화도시로 변신을 꿈꾸는 부산이 지켜야 할 유산은 무엇일까. ‘2030 세계박람회(월드엑스포)’ 부산 유치를 추진 중인 지금, 되새겨 봐야 할 정전 70년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 짚어본다. ■세계유산 등재 어디까지 왔나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은 지난 5월 16일 국내 최초로 근대유산 분야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공식 등재된 바 있다. 지난달 17일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공식 홈페이지의 잠정목록에 게재되기도 했다. 2015년부터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해 온 부산시는 최종 등재 목표 시기를 2028년으로 잡고 있다.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은 20세기 냉전기 최초 전쟁인 한국전쟁기의 급박한 상황 속에 1023일 동안 임시수도 기능을 유지했던 모습을 보여주는 특출한 증거물이다. 피란수도의 정부 유지, 피란 생활, 국제협력의 기능을 하는 9개 연속 유산으로 구성된다. 먼저 서구에 △경무대(임시수도대통령관저) △임시중앙청(부산임시수도정부청사) △아미동 비석 피란주거지 3곳이 있다. 중구에도 △국립중앙관상대(옛 부산측후소) △미국대사관 겸 미국공보원(부산근현대역사관) △부산항 제1부두 3곳이 있다. 남구에 유엔묘지와 우암동 소막 피란 주거지 2곳이 있고, 부산진구에 하야리아기지(부산시민공원)가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최종 등재를 위해서는 거쳐야 할 절차가 남아 있다. 앞으로 문화재청의 우선등재목록 선정, 예비심사, 등재신청후보·등재신청대상 선정, 유네스코 현지실사 등을 거쳐야 한다. 등재 요건에 필요한 보완 연구와 개별 유산의 보존 노력, 시민과 관계 기관의 지속적인 관심도 필요하다. 일부 지자체와 주민 반대는 극복해야 할 과제다. 중구 곽해웅 광복동 주민자치위원회장은 “중구가 명색이 관광특구인데, 문화재로 인해 고도 제한 등 각종 개발에 제약이 많다”며 “중구의 실질적 발전을 위해 1부두 세계유산 등재에 강력히 반대한다”고 말했다. 중구의회 강희은 의원은 “원도심 내 문화유산이 가치 있다는 데에는 동의한다”면서도 “1부두 부지 등은 결국 주민이 활용해야 할 시설인데, 주민 의견을 듣는 과정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부산시 김기환 문화체육국장은 “시간을 갖고 중구청, 중구 의회와 지속적으로 협의해 나가겠다. 주민 의견도 수렴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세계유산 등재에 앞서 시민들에게 피란수도 유산의 가치를 알리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동아대 김기수 건축학과 교수는 “문화유산이 시민에게 혐오 대상이 되지 않도록 먼저 시민 공감대를 이뤄야 한다”며 “또 국제 심포지엄 개최 등을 통해 부산시가 세계유산 등재와 관련한 좌표를 확인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행정력을 낭비하는 불상사가 없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위기 극복 역사를 콘텐츠로 피란수도와 관련한 유형의 자산을 남기는 것과 함께 무형의 가치를 이어나갈 필요도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전쟁 시기는 물론, 전후 경제 성장과 위기 극복의 중심에 부산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삼성과 LG 등 국내 대기업들은 부산에서 그룹의 뿌리가 된 기업을 일궜다. 삼성그룹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제일제당과 LG그룹의 모체가 된 락희화학공업사가 대표적이다. 경성대 강동진 도시공학과 교수는 “1950년대와 1960년대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 대표 기업들의 뿌리가 부산 서면에 있었다”며 “고려제강이 옛 공장을 ‘F1963’이라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바꿔 부산 시민에게 환원한 것처럼, 대기업들도 창업 당시 기업의 흔적을 연결하고 부산의 역할을 후대에 알리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쟁 시기 피란수도였던 부산이 2030 월드엑스포 유치 도시로 나서기까지의 발전상은 그 자체로도 이야깃거리가 된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은 “피란민들에게 기꺼이 방 비워주기를 했던 부산 시민의 이야기와 참전국 용사들의 안식처가 된 세계 최초의 유엔묘지 등은 다크 투어리즘(전쟁·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재난·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기 위해 떠나는 여행)의 소재가 된다”며 “피란수도 관련 프로그램과 콘텐츠 개발에 적극적으로 예산을 투입해 미래 먹거리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피란민들이 전쟁의 역경과 고난을 극복해 나간 삶의 과정이 현재를 사는 우리나 미래 세대에 시사하는 인문학적 가치도 크다.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차철욱 소장은 “아미동 비석마을의 경우 묘지를 삶터로 바꾸어낸 피란민들의 이야기에서 내게 주어진 환경 속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나간 극복의 과정을 배울 수 있다”며 “산복도로의 독특한 경관, 피란민의 음식 같은 특이성에 주목해 이를 관광 상품화만 할 것이 아니라 인류 보편적 가치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수십만 명의 피란민을 품어준 부산 시민의 포용력, 역사적 아픔을 딛고 일어선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향후 콘텐츠 산업의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 부산연구원 오재환 부원장은 “부산 영도에서 시작하는 선자의 이야기로 전 세계를 감동시킨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콘텐츠 ‘파친코’의 사례처럼 피란수도 부산의 이야기가 가진 산업적 가치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문화예술 관련 콘텐츠 발굴, 개발 노력도 필요하다. 피란수도 당시 전국에서 모여든 예술인들은 광복동 일대 다방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전쟁의 포화 속에도 예술혼을 불태웠다. 이 시기에 대한 연구 지원과 문화예술사적 가치에 대한 대중 홍보 필요성이 제기된다. 더마루아트 박진희 대표(미술평론가)는 “시민들은 물론 다른 지역 관계자들도 피란수도 문화예술 중심지로서의 부산에 대해 너무 몰라 안타깝다”며 “근대 미술 작가들의 삶과 작품, 다방 관련 이야기 등을 다룬 책 <살롱 드 경성>과 같은 베스트셀러가 부산에서도 나오면 좋겠다”고 말했다. 부산일보=이자영·손희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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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06 14:27

[한국전쟁 정전 70년] 낙동강 방어선전투의 의미와 기념사업

6·25전쟁 당시 가장 격전지로 꼽히는 낙동강 방어선전투는 전쟁의 전세를 뒤집고 오늘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굳건하게 지킨 전투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낙동강 방어선전투 가운데 가장 핵심은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투다. 다부동전투는 1차 세계대전 때 파리를 위기에서 구했던 베르덩(Verdun)전투에 비유된다. 경상북도와 칠곡군은 정전 70주년을 맞아 6·25전쟁 당시 마지막 보루였던 다부동전투의 승전을 기념하고, 이를 계승하기 위한 기념사업들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낙동강 방어선전투의 의미 "한 발짝이라도 더 밀리면 끝장이다.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6·25 전쟁 당시 최후의 저지선인 낙동강 방어선전투에서 북한군을 막아낸 영웅 고(故) 백선엽(1920~2020) 장군의 말이다. 북한의 공세에 밀리던 당시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대한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낙동강과 그 상류 동북부의 산악지대를 잇는 천연장애물을 이용한 방어선을 구축해 사수하기로 했다. 이 방어선을 '워커라인' 즉 '낙동강 방어선'이라고 부른다. 낙동강 방어선전투는 전쟁을 조기에 종결해 남한 점령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의도에서 전병력을 집중했던 북한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키고 아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지원,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한 전투로 평가된다. 또한 전투 중 곳곳에서 전개된 국군과 미군의 협조적 전투수행은 한미연합작전 능력 향상의 초석이 됐다. 낙동강 방어선전투는 대구방어전투·영천(永川)전투·동해안지구전투 등 많은 공방전이 전개됐지만, 이 가운데 경북 칠곡 다부동전투가 가장 핵심이다. 6·25전쟁의 '명운(命運)'을 건 결전 칠곡군 다부동(多富洞)에서 벌어진 다부동전투(戰鬪)는 전쟁의 판도를 바꾼 분기점이었다는데 의미가 깊다. 다부동전투는 국군 1사단과 미군 일부 병력이 1950년 8월 초부터 약 한 달 동안 대구 북방 약 20㎞의 경북 칠곡군 다부동에서 남침한 북한군 3·13·15사단을 상대로 벌인 전투다. 국군이 지키지 못할 경우 대구와 부산까지 내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가 다부동이다. 국군과 유엔군은 물론, 경찰을 비롯해 학도의용군, 소년병, 노무자들도 전투의 주역이 되어 함께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수없이 흘린 피의 대가로 다부동전투에서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래서 인천상륙작전이 가능했고, 압록강까지의 북진도 가능했다. 그리고 오늘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도 있게 했다. ◆다부동 전적기념관 일대 프리덤 벨트 성역화 칠곡군 다부동 전적기념관 일대에 6·25 전쟁 영웅들의 동상과 위령비가 잇따라 들어서면서 '워커라인'으로도 불리는 낙동강 방어선이 대한민국의 '호국벨트'를 넘어 전 세계 자유민주주의 진영 '프리덤 벨트'로 성역화되고 있다. 특히, 이곳에 호국 메모리얼파크 등 전쟁의 교훈을 일깨우고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나갈 수 있는 차별화된 호국보훈 인프라가 구축될 예정이다. 올해 다부동전적기념관에는 전쟁 영웅들의 동상이 잇따라 들어섰다. 지난 7월 5일 6·25 전쟁 당시 최후의 저지선인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을 막아낸 영웅 백선엽 장군 동상이 가장 먼저 세워졌다. 백 장군의 동상은 높이 4.2m, 너비 1.5m로 2분 정도 주기로 한 바퀴(360도)를 도는 회전형으로 제작됐다. '백 장군이 동서남북 사방으로 대한민국을 지키고 수호한다'는 의미를 담았다는 게 제작자의 설명이다. 동상 건립에는 성금을 포함해 5억원이 들었다. 이와 함께 높이 160㎝의 '다부동전투 지게부대원 위령비'도 세워졌다. 다부동전투 당시 총탄을 뚫고 병사들에게 탄약과 연료, 식량 등 보급품 40㎏를 지게로 져나르고 전사자와 부상병을 호송해 준 지게 부대원들을 기리는 위령비이다. 당시 군인들의 '생명줄' 역할을 했던 그들을 국군은 '지게부대'로, 미군들은 'A-frame Army'라 불렀다. 다부동전투에서만 지게부대원 2천800명가량이 희생됐다. 백남희(백선엽 장군 장녀) 여사는 "아버님은 국군 1사단을 도운 주민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계셨기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 칠곡군과 함께 위령비를 마련했다"며 "아버님이 못다한 뜻을 이루고 다부동전투에서 희생된 주민에게 작은 위로와 위안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같은 달 28일에는 6·25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한 월턴 해리스 워커(1889~1950) 장군 흉상도 칠곡호국평화기념관에 세워졌다. 워커 장군은 6·25 당시 전 국토의 90%가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절체절명 위기에서 '워커 라인(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해 북한군을 막아내고 인천상륙 작전을 가능하게 했다. 경북도는 다부동전적기념관과 일대에 호국 메모리얼 파크(가칭 UN전승기념관)를 조성할 계획이다. UN전승기념관은 현재 16개 6·25 참전국들을 모두 포함하는 전몰자 합동추모공간을 두고, 국제적인 안보 '앵커 시설'로 밑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참전 16개국의 국가별도 독립적 공간이 마련, 참전국 인사들의 필수 방문 코스 역할을 병행하도록 조성된다. ▷낙동강방어선 승전 기념 시설 ▷전몰희생자 추모를 위한 국립현충시설 ▷후세들을 위한 역사교육의 현장시설도 갖춰질 예정이다. 또 경북도는 내년부터 백선엽 장군 기념관 증축과 다부동전투 스포츠센터, 피란 땅굴, 휴게 광장 등도 조성한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칠곡군 다부동은 대한민국을 지켜낸 구국의 성지"라며 "국민들이 다부동에 와서 자유대한민국의 소중함을 느끼도록 호국 메모리얼 파크를 조성하겠다"고 말했다. 김재욱 칠곡군수는 "백선엽 장군, 워커 장군, 위령비 등의 건립으로 칠곡군이 명실상부한 호국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됐다"면서 "앞으로도 호국 관련 인프라와 스토리를 모아 칠곡을 대한민국 호국의 성지로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동상 보러가자" 부쩍 늘어난 관람객 칠곡 다부동전적기념관에 백선엽 장군, 이승만·트루먼 전 대통령 동상, 지게부대원 위령비 등이 건립되면서 관람객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칠곡군에 따르면 다부동전적기념관 관람객은 4월(2만4천명), 6월(3만7천명), 7월(4만6천명), 8월(5만3천명) 등 지속적인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동상 건립 이후 관람객들이 대구와 경북을 비롯해 서울, 경기도, 전라도, 제주도 등 전국에서 몰려들고 있다. 또한 그동안 단체 관람객 위주로 다부동전적기념관을 방문했지만, 요즘은 가족 단위로 많이 찾고 있다. 한편, 다부동전적기념관은 6·25 전쟁 최대 격전지이자 반격이 시작된 다부동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1981년 건립됐다. 부지면적 1만8천744㎡에 기념관 1동, 구국관 1동, 전적비, 백선엽 장군 호국구민비 등이 있는 현충 시설이다.. 김한주 영남이공대 여행·항공마스터과 교수는 "다부동전적기념관 일대가 미래 세대 안보 교육의 장이자 호국 관광 명소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국가보훈부 등의 국가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매일신문=전병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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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23 16:01

[한국전쟁 정전 70년] 인천상륙작전

인천시와 해군이 지난달 15일 인천 앞바다에서 개최한 제73주년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는 해마다 열린 역대 행사 가운데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다. 우선 윤석열 대통령이 인천상륙작전 전승 기념식에 참석하고, 상륙작전 재연 행사를 주관했다. 1960년부터 열린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에 처음으로 대통령이 참석했다. 윤 대통령은 전승 기념식에서 "인천상륙작전은 한반도 공산화를 막은 역사적 작전이자 세계 전사(戰史)에 빛나는 위대한 승리였다"며 "굳건한 한미 연합방위태세를 기반으로 한미일 안보 협력을 더욱 강화하면서 북한의 위협에 대한 압도적 대응 역량을 확보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의 기념사는 인천상륙작전을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승전 역사로 격상시킨 것이다. 인천시는 2억원 내외였던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 예산을 올해 국비·시비 포함 27억3천만원으로 확대했다. 올해 인천시는 대대적인 인천상륙작전 재연 행사를 포함해 지역 곳곳에서 승전을 기념하는 문화 행사와 국제학술대회 등을 열었다. 인천시는 내년부터 행사를 더욱 확대해 2025년 제75주년 행사부터는 한국전쟁 참전 8개국(한국·미국·영국·캐나다·프랑스·호주·뉴질랜드·네덜란드) 정상급 인사가 참석하는 국제행사로 키운다는 구상이다. 인천시는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의 주제를 '세계평화도시'로 설정했다. 인천상륙작전이 국내외에서 더욱더 조명받을 여건이 조성됐다. 인천상륙작전을 조명하는 빛의 세기가 강할수록 그 뒤로 드리우는 그림자는 더 짙어진다. 올해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가 '전승 기념 강화' '대통령 중심'으로 흐르면서 '인천 지역·민간인 피해'처럼 전쟁의 비극을 상기하는 주제들은 과거 행사보다 더 소외됐다. 정전 70년을 맞아 몸집을 키운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가 끝난 후 '인천상륙작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화두가 던져졌다. 인천상륙작전을 둘러싼 상반된 기억은 여전히 화해하기 어렵다. ■"대첩으로 격상해야" 승전의 기억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은 1953년 7월27일 정전 협정까지 '한국전쟁 3년'을 기준으로 초반에 일어난 전투지만, 전선이 38도선 주변으로 고착화한 1951년 3월을 기준으로 따지면 딱 중간 지점이다. 인천상륙작전 전후로 전쟁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린 한국군과 유엔군이 전세를 뒤집고 북진하는 계기였다. 이후 중공군 참전으로 한국전쟁이 본격적으로 국제전 성격을 띠게 됐다. 인천상륙작전 전후, 북진, 1·4후퇴 사이 민간인 학살이 집중됐다. 한국전쟁의 분수령이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한국군과 유엔군이 공세로 전환했으며, 공산화를 막았다는 군사적 의미가 주류의 시선이다. 작전을 수립해 진두지휘한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유엔군 총사령관은 한국전쟁의 영웅이다. 인천 중구 자유공원에 세워진 맥아더 장군 동상이 군사적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기억하는 주류의 시선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인천시가 지난달 8일 제73주년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 주간에 개최한 '국제평화콘퍼런스-인천상륙작전과 글로벌 인천의 미래'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을 '대첩'의 반열에 올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장순휘 한국문화안보연구원 부원장은 "적에게 결정적 위협이 된 인천상륙작전은 낙동강 전선의 적군을 급속히 와해시켰고, 서울을 탈환해 적의 병참선이 차단됐다"며 "성공적으로 완수된 이 작전에 의해 인천항 시설, 서울에 이르는 김포공항, 병참시설 전반을 북진 작전을 위해 이용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이어 "특히 수세의 전세를 공세로 일거에 역전시킨 위대한 작전이었다"며 "고구려 살수대첩, 고려 귀주대첩, 조선 한산도대첩과 명량대첩, 독립군 청산리대첩과 함께 '인천상륙대첩'으로 명칭을 바꾸는 것을 검토할 단계"라고 주장했다. 육군대학 한국전쟁사과 이광수 중령은 "인천상륙작전은 20세기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무력 투쟁에서 공산군에게 괴멸적 타격을 준 유일한 승리"라며 "최소한의 희생으로 완벽하게 전세를 역전한 전투"라고 했다. ■여전히 아물지 않은 지역의 상처 인천 지역적 시선에서 승리의 대가는 큰 희생이었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닷새 전부터 상륙지 월미도 등지에 퍼부은 폭격으로 최소 100명 이상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100명의 희생은 정부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8년 공식적으로 규명한 피해 규모이고, 실제론 더 많을 가능성이 있다. 월미도뿐 아니라 인천 시내 곳곳이 폭격으로 파괴됐고, 인천 섬과 시내 등지에서 민간인 학살 사건도 일어났다. 지난달 15일 인천 지역 시민단체가 주최한 '인천과 한국사회, 인천상륙작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학술 심포지엄에서 토론자로 나선 최태육 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장은 지역 피해를 정리했다. 최 소장은 "1950년 8월18일 이후 덕적도와 영흥도에 이르는 섬의 거주민 학살, 월미도 네이팜탄 투하, 월미도·송현동·송림동 등 인천 일대 무차별 포격 등 적어도 인천상륙작전은 인천 인근 섬과 시내 주민들에게는 공포와 상처였다"고 말했다. 살아남은 월미도 주민들은 터전을 잃고 현재까지도 고향으로 보내달라고 투쟁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 직후부터 미군 부대가 월미도에 주둔하면서 원래 살던 섬 주민들은 쫓겨났다. 1971년 미군 부대가 월미도에서 철수했으나, 다시 한국 해군이 주둔했다. 2011년 해군이 떠난 후 인천시가 월미도 군부대 부지를 매입해 월미공원을 조성했다. 월미도 원주민들은 1950년대부터 지속으로 귀향 대책을 정부와 인천시에 요구했으나, 여전히 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월미도 실향민 대다수는 80대 이상 고령이다. 이른바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에 대한 진실화해위원회 권고 내용은 '위령 사업 지원' '원주민의 귀향 지원' '미국과의 협상(한미 공동 조사와 공동 책임)'이다. 월미도 희생자 위령비는 인천시가 2021년 월미공원에 건립했다. 인천시는 올해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를 진행하며 처음으로 '위령비 헌화 행사'를 별도로 마련했다. 한인덕 월미도 원주민 귀향대책위원장은 "지금도 주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며 "고향 땅을 찾아 달라는 당연한 요구를 이제는 받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호철 인천대 명예교수는 시민단체 주최 학술 심포지엄에서 "인천상륙작전의 군사학적·전쟁사적 의의보다는 이를 통해 인천과 대한민국, 세계가 공유하게 된 보편적 가치를 찾아내야 한다"며 "인천상륙작전의 결과는 자유와 평화라는 세계적 보편 가치를 미래로 가져가야 한다"고 말했다. 경인일보=박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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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09 15:56

[한국전쟁 정전 70년] 마산방어전투

기념(記念). 뜻깊은 일이나 사건을 잊지 않고 마음에 되새김. 전쟁기념관은 ‘잊지 말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마산방어전투기념관을 통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들과 자유민주주의이다. 만약 이 두 가지를 잊는다면 아픈 역사는 반복될 수 있다. 마산방어전투는 지난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 45일간 마산 일대에서 한미 동맹군과 인민군 간 벌인 전투다. 이 기간 핵심 격전지였던 서북산은 고지의 주인이 19번이나 뒤바뀌었고 인민군 4000여명과 미군 1000여명이 희생됐을 정도로 큰 규모의 전투였다. 하지만, 미군 주도 전투라는 이유 등으로 기념관 하나 없이 잊혀 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 기념사업회가 발족하고, 여러 선양 사업이 진행되면서 점차 시민들과 지역사회에서 마산방어전투가 알려졌다. 미래세대를 위한 교육의 장이 될 기념관 설립의 필요성 또한 커지고 있어 주목을 모으고 있다. ◇최초 한미연합 작전= 1950년 8월 1일 북한군은 남침 36일 만에 진주를 점령한 데 이어 마산 현동 검문소에 집결했다. 중국 국공내전에 참전해 전쟁 경험이 풍부한 조선족들로 구성된 북한군 6사단 7000여명은 함안·진동 고산지대를 확보 후 마산 점령을 노리고 있었다. 당시 이 일대를 주둔하고 있던 국군은 1000여명에 불과했다. 미 8군 사령관인 워커 중장은 급히 경북 상주에 주둔 중인 미 25보병사단을 250㎞ 넘는 마산으로 단 2일 만에 이동시켰다. 이에 맞춰 진주에서 후퇴한 미 24사단도 창녕에 낙동강 방어선 진지를 구축했다. 마산을 점령하려는 북한과 사수하려는 국군과 미군은 8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 45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결국 마산방어전투에서 아군의 승리로 북한군의 부산 점령을 막을 수 있었고, 국군과 UN군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또한 9월 16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반전의 기회를 가져왔다. 마산방어전투가 최초 한미 연합 작전이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하순복 경남대 군사학과 교수는 "최초 한미연합 작전으로 알려진 다부동 전투는 8월 13일 시작됐지만, 마산방어전투는 그보다 5일 앞선 7일부터 연합 작전을 전개했다"며 "또한 연합 작전은 한명이 지휘체계를 잡고 전투를 지휘해야 하는데 다부동 전투의 경우 그런 성격은 아니었다. 마산방어전투는 국군이 미군에 배속되어 하나의 지휘체계가 형성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 교수는 "마산방어전투는 최초의 한미연합작전임과 동시에 한미동맹 출발점이다"며 "연합작전을 통해 피를 나누며 싸웠기에 동맹이 강해졌기에 그 의미가 크다"고 강조했다. ◇기념관 설립해 선양활동 진행해야= 나라의 운명이 달린 전투였지만, 마산방어전투를 기억할 전쟁기념관 하나 없을 뿐만 아니라 육군사관학교에서 발간한 ‘6·25전쟁 60대 전투’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관련 시설은 해병대진동리지구 전첩비, 서북산 전적비뿐이다. 달성에서 진해까지 낙동강 방어선은 미군 부대가 주력이었기에 그동안 관련 전투들은 관심이 떨어졌다. 잊힌 전투를 기억하고자 지난 2021년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가 창립이 됐고, 다양한 선양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회장은 2016년 진해 미 해군 사령관의 추천서를 받아 미국 정부 서류저장처에 보관된 마산방어전투 당시 미 25사단의 전투일지를 확보했다. 이후 3년간 A4용지 500매 분량의 일지를 직접 번역해 책 ‘마산방어전투’를 출간했다. 그는 금속탐지기를 미국에서 직접 사 와 전투일지에 나타난 전적지를 100차례 이상 답사해 탄환, 포탄 파편, 군복 단추 등을 발굴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 전적지를 답사하며 마산방어전투를 알리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처음으로 학술대회를 개최해 전쟁사 전문가들이 마산방어전투의 중요성에 대해 논하는 자리도 마련됐다. 향후 기념사업회는 기념관 건립 운동과 더불어 토론회, 사진전 등을 개최할 계획이다. ◇기념관 건립 용역 조사 곧 시작= 창원시는 오는 10월 중 '(가칭) 마산방어전투 재조명 및 기념관 건립 기획 용역' 입찰 공고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용역에는 전사 연구와 더불어 부지 선정 등에 대해 논의될 예정이다. 창원시 관계자는 "마산방어전투라는 명칭 자체가 전쟁사에 없다 보니 객관적인 자료를 조사할 예정이다"며 "미군 측에는 자료가 있지만, 한국에는 자료가 부족한 게 현실이다. 용역 자료를 기반으로 기념관 부지와 이름을 정할 계획이다. 용역 기관은 최소 5개월 정도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홍남표 창원시장 또한 당선인 시절 본지와 인터뷰에서 기념관 건립에 관해 관심을 표했다. 홍 시장은 과거 "낙동강방어선 주요 전투 중 포항·영천·다부동·박진 전투는 많이 알려진 반면, 마산방어전투는 별로 조명을 받지 못 했다. 그런 가운데 지난해 마산의 뜻있는 분들이 민간 차원에서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를 결성해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며 “마산방어전투 전적기념비와 기념관 건립도 국가보훈처 차원의 선양사업과 연계해 추진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민간 차원의 기념사업회의 활동과 지자체 차원의 공론화 과정 등을 거치면서 마산방어전투 의미를 지역은 물론 전국에 널리 알리고, 이를 토대로 기념사업의 방향을 정립해 나가야 할 것으로 본다”고 밝힌 바 있다. ◇인터뷰(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회장) "나라를 살린 마산방어전투, 기념관 통해 잊지 말아야 됩니다." 올해 93세인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회장은 뚜렷이 이렇게 말했다. 배 회장은 90세가 넘는 고령이지만, 직접 마산방어전투 관련 자료를 모으고, 전적지를 답사하고 있다. 만약 그가 미25 사단 전투 일지를 번역해 책을 출판하지 않았더라면, 영영 이 전투는 잊혀 왔을 것이다. 그는 "기념관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지역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있어야 할 시설"이라며 "6·25전쟁 초기에 마산을 방어해 부산을 지켰기에 나라와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배 회장은 "아직 기념관이 없어 잊혀 가고 있는 현실이 답답하지만, 창원시에서 용역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하니 상당히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배 회장은 앞으로도 기념사업회를 통해 시민들에게 마산방어전투를 꾸준히 알릴 계획이다. 방어전투 참전자 유해와 유품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등산로 하나 없는 고지를 올라 직접 발굴을 나선 것도 그였다. "다양한 선양 활동과 언론 등을 통해 점차 시민들이 마산방어전투를 알아가고 있어 뿌듯합니다. 전투를 직접 겪은 마산 지역 주민들도 기념관 건립을 염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지어질 기념관에 전시될 자료와 증언을 모으고, 유품을 발굴할 생각입니다." 경남신문=박준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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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25 16:25

[한국전쟁 정전 70년] 전쟁 후 남은 사람들의 비극, ‘빨치산’

이념으로 갈라선 시대의 아픔…민족의 비극은 계속되었다. ‘빨치산’은 한국전쟁의 부산물이자 분단된 남북 민족분열의 비극을 표출하는 상징이다. 빨치산은 프랑스어 ‘파르티잔(partisan)’에서 유래했으며 노동자나 농민 등 비정규 군인들로 무장된 유격대를 뜻한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빨치산은 한국전쟁 전후로 좌익 계열과 인민군 패잔병들에 의해 전국의 산지에서 조직된 유격대를 일컫는다. 특히 호남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북한으로 되돌아 가지 못한 인민군들이 지리산의 험준한 사악지형을 이용해 끝까지 저항했고 한국군은 이를 토벌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렀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1년 1월부터 4월까지 전남에서 한국군의 게릴라 대규모 토벌작전(3기)에 사살된 빨치산은 6921명에 달하고 603명이 생포됐다. 지리산에서 빨치산을 진압하다가 목숨을 잃은 군인, 경찰, 민간인은 7287명에 달한다. ◇ 한국전쟁은 끝났지만 귀순하지 못한 빨치산=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호남 지역에 남아있던 북한군은 퇴각하지 못한 채 지리산 인근에 입산해 빨치산이 됐다. 북한군이 후퇴하자 호남·영남·충청 지역에 있던 인민군 및 당 요원들은 퇴로가 차단된 채 남한에 남겨진 이들이었다. 빨치산은 남한의 공산주의자와 북한군 패잔병, 유격대원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후방에서 교란작전을 펼쳤다. 패잔병들은 중앙당으로부터 ‘인민군이 다시 남하할 때를 대비해 후방에서 유격활동을 벌이라’는 지시를 받고 군·경의 눈을 피해 지리산 등 산악지대에서 끝까지 저항을 한 것이다. 특히 관공서를 습격하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민가를 약탈하기도 했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1950년 10월 이후 군경합동작전이 전개됐고 백야전 전투사령부가 창설돼 빨치산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군병력 이외에도 경찰병력도 많이 동원됐다. 1950년 12월 16일에는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를 설치했다. 이들은 빨치산 진압작전을 위해 지리산 중심의 주요 고지를 포위·수색하고 근거지를 공격했다. 군경의 주요 시설을 경계·방어하면서 첩보활동을 펼쳤다. 군경은 빨치산 진압과 더불어 귀순 유도를 적극적으로 시행했다. 군인과 경찰은 지리산 인근에 ‘삐라’(전단지)를 대량으로 배포해 빨치산의 귀순 유도를 했지만 빨치산들은 귀순보다는 저항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빨치산은 인민유격대 전남총사령부와 그 산하 6개 지구대를 창설해 끝까지 저항했다. 6개 지구는 무등산 광주지구, 담양 추월산 가마골 노령지구, 구례·광양 백운지구, 화순 모후산 지구, 장흥 유치지구, 영광·함평 불갑산 지구 등이었다. ◇ 빨치산의 근거지, 화순 백아산 전투=빨치산 세가 가장 강했던 곳은 전남도당 본부가 있던 화순 일대로, 이곳에서는 1950년 10월부터 1952년 4월까지 1년 6개월동안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조선노동당 전남도당은 인민군 점령기에 광주에 설치됐던 당 본부를 화순군 백아산 기슭에 있는 북면 용곡리 용촌마을로 옮겼다.  백아산은 해발 810m로 산비탈이 가파른데다 고지가 여러 곳이라 한 곳을 점령당해도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쉽고, 화순 모후산, 곡성 통명산 등으로 이동하기에도 용이했다.  또한 화순은 화순 탄광 노동자들로 조직된 좌익 세력이 강했으며, 1946년 화순 탄광 노동자 봉기 이후 미 군정의 검거를 피해 많은 좌익 인사들이 산으로 숨어들어 빨치산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빨치산은 지리산 곳곳에 거점을 두고 군·경 보급로 차단, 식량 약탈, 경찰서·지서 습격, 통신망 절단, 무기약탈 등을 일삼았다.  이에 한국 정부는 1950년 10월부터 국군 11사단을 내려보내 이른바 ‘백아산 소탕전’을 벌였다.  이 때 국군은 ‘성벽을 굳게 하고, 들에 있는 것을 말끔히 치운다’는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을 폈다. 백아산 주변의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소개(疏開·폭격 등에 대비해 대피시키는 것)하는 ‘초토화 작전’이었다. 이로 인해 화순군 이서면 21개 마을, 북면 24개 마을, 담양군 남면 대덕면 5개 마을 등 모두 50개 마을이 소각됐다.  4월이 되자 11사단을 대신해 8사단이 호남으로 내려왔고, 예하 부대와 전투 경찰대, 청년 방위대 병력을 지휘하여 백아산 지구, 장흥군 유치면 구사봉 지구에서 준동하는 잔류 세력 소탕 작전에 나섰다.  전투가 길어지자 1951년 11월에서 1952년 2월 사이에는 미군 폭격기를 동원해 국제적으로 사용이 금지된 네이팜탄(소이탄)을 투하해 백아산 일대를 불태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빨치산은 폭격기 1대를 추락시킬 정도로 강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많은 병력을 잃고 약화됐다.  백아산 일대에는 1953년 7월에 휴전이 성립된 이후에도 잔존 빨치산의 활동이 이어졌으나, 1954년 2~3월 백야전 사령부의 토벌 작전으로 부대장·위원장 등 남은 지휘관마저 대거 잃은 끝에 1955년 3월 섬멸된다. ◇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빨치산과 교전이 치열했던 화순에서는 민간인 피해도 많았다.  낮에는 국군이 마을을 불태우거나 주민들을 ‘빨치산에게 부역했다’며 살해하고, 밤에는 빨치산에게 우익 인사의 가족이라거나 ‘협조하지 않는다’는 등 이유로 살해당했다. 당시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 정도였다.  이와 관련한 진실 규명은 지난 2005년 1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가 출범한 뒤에야 윤곽이 드러났다.  제1기 진화위 조사에 따르면 1950년 8월부터 1952년 4월까지 화순군 9개 읍·면에서 빨치산에 의해 111명이 희생된 사실이 확인됐다. 진화위는 화순에서 추가로 31명의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자행됐다. 제1기 진화위는 1950년 10월부터 1951년 3월까지 화순·담양·장성·영광·함평 등지에서 291명의 주민이 국군 제11사단 20연대 1·2·3대대, 9연대 2대대에 의해 ‘빨치산’ 혹은 ‘부역자’라는 혐의로 사살되거나 연행된 후 행방불명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희생자 수는 화순이 사살 56명, 행방불명 5명으로 가장 많았다.  특히 진화위는 ‘견벽청야’ 작전을 수행하던 중 빨치산에게 협력했다고 의심되는 주민들을 무차별 사살해 작전 상의 위험을 제거하고 빨치산 토벌의 전과를 극대화하려는 전략을 구사해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됐다고 분석했다.  최근 화순 백아산에서는 6·25 전사자 유해 발굴도 이어지고 있다.  육군 제31보병사단은 지난 3~4월 화순군 백아산 일대 2000㎡에서 6·25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을 실시했다.  앞서 31사단은 지난해 4월 화순군 백아산 일대 총 3600㎡에서 유해 발굴 작전을 벌인 끝에 6·25 전사자 유해 한 구와 탄피 등 군용품을 발굴했다. /유연재 기자 yjyou@kwangju.co.kr 박동기 남녘현대사연구소장 인터뷰 “이념 관계없이 빨치산 학술적 연구 필요…국가차원 피해자 진상규명 이뤄져야”  “늦게 오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고 하지요. 아직까지 한국전쟁 당시 피해자들의 5%밖에 밝혀지지 않았어요. 국군, 빨치산을 막론하고 국가 차원에서 피해자 진상 규명이 이뤄져야 합니다.”  박동기 남녘현대사연구소장은 한국전쟁 전후 빨치산과 군·경의 충돌이 격했던 당시 피해에 대한 조사를 서둘러야 한다고 밝혔다. 박 소장은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지리산 빨치산 등을 연구해 온 역사연구가다.  박 소장은 빨치산은 결국 남·북의 정치적인 이득에 따라 파생된 단체라고 설명했다. 1948년 이승만과 한민당 등이 남한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 노선을 추진하자 이에 반발해 제주4·3사건이 발생했고, 이것이 10·19 여순사건으로 이어지면서 빨치산 활동까지 연결된다는 것이다.  박 소장은 특히 호남 지역에서 국군과 빨치산의 전투로 인한 피해자가 많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지정학적으로 호남은 평야 지대라 농경지가 많고, 그만큼 소작농이 많아 토지개혁을 통해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자는 공산당의 주장에 동조할 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국군으로부터 가족이 살해당한 피해자, 빨치산의 요구에 못 이겨 입산한 사람들까지 합치면 피해자는 지금까지 밝혀진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빨치산의 구체적인 전투과정과 피해 상황 등을 밝힐 연구는 유독 미진했다고 설명했다. 사회에 만연한 ‘레드 트라우마’ 때문에 공산당과 관련된 역사적 연구를 하려는 사람도 없고, 그와 관련된 논문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증언을 해 줄 피해자들은 마을 이웃들이 이유 없이 죽어가는 장면을 목도해 트라우마가 심하다는 점, 가족이 모조리 죽임을 당한 탓에 당시 상황을 설명할 이가 남아있지 않은 점 등을 꼽았다.  그 날의 진상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을 몰라서 못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특히 ‘견벽청야’ 작전에 휘말려 하루아침에 고향을 떠나 먼 곳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고립된 삶을 산 탓에 피해 사실을 알릴 방법을 알 방도가 더욱 없다고 밝혔다.  박 소장에 따르면 당시 민간인 학살의 주축은 아이러니하게도 ‘국군’이었다. 대략 국군이 20명을 살해하면 빨치산에 의해서는 1명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국군이 수적으로 압도적일뿐 아니라 작전지역 일대 마을을 모조리 불태우는 작전을 썼고, 좌익 부역자 색출 등을 명분으로 적법한 절차 없이 비무장·무저항 상태의 민간인을 집단살해했다는 진술이 잇따르고 있기도 하다.  박 소장은 “빨치산과의 전투는 그 자체로 이념으로 갈라선 시대의 아픔을 오롯이 보여주는 아픔이다”며 “대한민국에서 빨치산을 연구한다고 하면 좋지 않은 시선을 받게 마련이지만, 이념에 관계없이 까칠한 역사를 정리하려는 학술적 시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광주일보=유연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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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11 15:35

[한국전쟁 정전 70년] 제주 포로수용소

2만 중공군 포로는 제주도에 왜 왔을까? 3년1개월(1129일) 동안 벌어진 6·25전쟁에서 중공군 포로는 약 2만1700명으로, 미군 4439명보다 5배나 많았다. 전쟁이 한창일 당시 포로수용소는 육지와 떨어진 섬인 제주도가 후보지였다. 1950년 말 중공군의 공세로 서울을 다시 빼앗기자, 제주도의 포로수용소 설치는 유력해졌다. 다만, 리지웨이 미8군사령관은 제주도가 피난민으로 초만원이 된 점, 이 섬은 임시정부가 들어설 최후의 보루로 여기면서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결국, 육지와 비교적 거리가 가깝고 물 공급이 가능한 거제도가 포로수용소로 낙점됐다. 휴전 협상이 진행되고 전쟁이 끝날 조짐이 보이자 생포되거나 항복한 포로 송환은 쟁점이 됐다. 포로수용소는 냉전과 이념 대결의 축소판으로 또 다른 전쟁터였다. 2만명에 달했던 중공군 포로들은 반공(反共)과 친공(親共)으로 대립했고, 서로를 죽이고 학대하는 유혈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폭동과 유혈 사태가 끊이지 않자, 유엔군사령부는 1952년 2월 ‘분리 작전’에 돌입했다. 그해 7월까지 약 2만 명에 이르는 중공군 포로를 거제도에서 제주도로 보냈다. 당시 중화민국(대만)으로 가길 원했던 반공포로 1만4000여 명은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지역에, 중화인민공화국(중국)으로 송환을 원했던 친공포로 5900여 명은 제주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 부지에 수용됐다. 친공포로들은 1952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3주년을 맞아 시위를 벌였다. 미군 2개 소대가 진입하는 과정에서 포로 45명이 사망하고, 120명은 부상을 당했다. 유엔군사령부는 “폭동(시위)은 집단 탈주를 위해 시작됐으며, 포로들은 탈옥 후 한라산 빨치산과 합류할 계획을 세웠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 이후 경비를 맡은 미군과 친공포로의 갈등은 심화됐으며, 포로수용소 주변에 살았던 주민들은 불안감에 떨어야했다. 반공포로가 수용된 모슬포지역에서는 유혈 사태가 일어났다는 기록은 없지만, 주민들은 ‘사제 수류탄 폭발 ’, ‘포로끼리 패싸움 후 시체 유기 사건’ 등을 언급, 추가 조사가 필요한 상황이다. 당시 모슬포에는 육군 제1훈련소(1951~1956년)가 설치됐고, 한국군도 포로수용소 경비 업무를 맡았다. 지붕으로 얹은 양철판 밑에 기름을 먹인 종이(루핑)를 바른 수용소 환경은 열악했다. “포로수용소 건물은 나지막하고 검은 루핑 지붕이어서 여름철에는 실내 열기가 대단했다. 나무판자로 물방아와 비슷한 선풍기를 만들어 포로들이 줄을 교대로 당기며 바람을 만들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미군부대를 출입했던 이발사 서병수씨가 당시 수용소의 열악한 사정을 증언한 내용이다. 중공군 포로들은 채소밭을 일궜고, 미군의 감시 아래 수용소 인근 송악산에 오르거나 바닷가에서 미역을 채취하기도 했다. 설리반(sullivan) 군종신부는 이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포로들은 늪지를 매립하고 돌을 나르며 모슬포성당 건립 공사에 투입됐다. 성당이 완공되자 ‘통회의 집’으로 불렸다. 포로들이 한국에 많은 피해를 입힌 죄를 뉘우치며 지은 집이라는 뜻을 담았다. 나중에는 사랑으로 포로들을 용서하자는 의미로 ‘사랑의 집’으로 변경됐다. 1953년 6월 8일 전쟁포로 송환 협의가 이뤄졌고,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됐다.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에 패해 대만으로 쫓겨 간 장제스 국민당 정부는 정전 협정 체결 전인 1953년 초부터 반공포로와 교섭하며 이들의 대만 송환을 준비했다. 1953년 7월 29일 대만 정부는 제주에 있는 반공포로들에게 출판물과 영상물 제공과 함께 위문단 파견을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 중공군 포로의 대만 행은 국민당 정부가 내전에는 졌지만, 이데올로기에서는 승리했다고 선전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한 달 후인 8월 28일 대만 정부가 파견한 위문단이 제주도에 도착했다. 대만 공군은 수송기 8대를 동원, 37t의 위문품을 전달했다. 당시 대만 언론에 소개된 위문품은 1인 당 설탕 1홉, 소고기·채소 통조림 1개, 파인애플, 바나나 2개, 러닝셔츠 1벌이었다. 1년 남짓 제주도에 수용된 1만4000여 명의 반공포로들은 대륙 행을 거부하며 팔뚝에 ‘반공(反共)’이나 ‘살주발모(殺朱拔毛)’ 같은 문신을 새겼다. 홍군 총사령관 주더(朱德)를 죽여 버리고 마오쩌둥(毛澤東)을 없애겠다는 뜻이다. 반공포로 1만4000여 명은 제주도를 떠나 1954년 1월 20일 인천항에서 미군 수송선에 올랐다. 1월 23일 대만 지룽항에 도착한 이들은 반공의사(反共義士)로 대접받았다. 제주비행장에 수용됐던 친공포로 5000여 명도 선박과 육로를 통해 1953년 8월부터 9월까지 본국으로 돌아갔다. 제주일보=좌동철 기자 ■ 김웅철 향토사학자 인터뷰 “70년 전 중공군 포로 2만명이 1년 넘게 제주도에 수용된 것은 전쟁사나 외교사에 중대한 사건이다. 제주 섬에서 벌어진 반공포로와 친공포로의 갈등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이자, 이념 갈등이었다.” 역사사진 자료집 ‘강병대(육군 제1훈련소) 그리고 모슬포’를 발간한 김웅철 향토사학자(73)는 반공포로들이 도열, 이국땅에서 숨진 동료의 시신에 청천백일기를 덮고 장례를 치르는 장면이 담긴 귀중한 사진을 갖고 있다. 김씨는 “중공군들은 모슬포~사계리 도로 개설과 모슬포성당 기초 공사에 동원됐고, 일부는 아일랜드 출신 설리반 군종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며 “채소를 즐겨먹으면서 농장대를 조직, 수용소 인근 밭에서 채소를 직접 재배했다”며 당시 생활상을 소개했다. 이어 “포로들은 또 ‘자치대’를 조직,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군대식 열병을 했고, 양철 조각으로 만든 피리를 불며 애환을 달랬다”며 밝혔다. 김씨는 “반공포로는 모슬포지역 3곳에, 친공포로는 현 제주공항 화물청사 인근 1곳에 설치됐는데 수용소 건립으로 민가가 철거되고 토지가 강제 징발되면서 마을주민들이 적잖은 피해를 봤다”고 했다. 대정읍 상모리에는 중공군 포로수용소 건물 외벽이 남아 있다. 길이 20m, 높이 2m의 석축 벽에는 창틀 모양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김씨는 “냉전시대, 제주에 수용된 중공군 포로 70%가 대만 행을 선택한 것은 국제사회에 큰 이슈였지만, 지금은 수용소 터와 건물이 마늘밭(사유지)에 남아있고, 70년 넘게 방치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며 “수용소 터를 매입하고 복원해 전쟁의 참상과 역사의 교훈을 후대에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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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28 15:43

[한국전쟁 정전 70년] 피란수도 부산, 1023일의 기록 (하)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은 명실상부한 정치, 외교,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전국에서 모여든 예술인들은 광복동 일대 다방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전쟁의 포화 속에도 문화예술의 꽃을 피웠다. △격동기 정치 중심에… 한국전쟁기 부산이 처음 임시수도가 된 시기는 1950년 8월 18일부터 10월 26일까지다. 서울 수복 후엔 부산에 있던 정부 기관도 환도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1년 1월 3일 정부는 모든 정부 기관을 부산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한다. 부산 서구 부민동에 있는 경남도청사(현재 동아대 석당박물관)가 임시 중앙청이 된다. 경남도지사 관사(현재 임시수도기념관)는 대통령 관저로 활용된다. 국회는 중구 부산극장에 있다가 이후 경남도청 체육관인 상무관을 사용한다. 1940년대에 지어진 남포동 소화장아파트는 국회의원 관사가 됐다. 미국대사관은 부산 미문화원에 자리를 잡는 등 각국 외교 기관도 부산으로 옮겨온다. 체신부는 부산우체국을 사용하고, 부산시청사는 사회부와 문교부 등이 사용한다. 특이한 점은 대체로 중구에 자리를 잡은 다른 정부 부처와 달리 교통부는 부산진구 범천동에 청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아직도 부산시민들이 범곡교차로 일대를 ‘교통부’라 부르는 이유다.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장기 집권을 위한 첫 번째 개헌이 이뤄진 곳도 부산이었다. 부산일보사가 1980년대에 발간한 책 <비화 임시수도 천일>에 따르면, 1952년 5월 26일 0시를 기해 이승만 대통령은 계엄령을 발동한다. 바로 ‘부산정치파동’의 시작이다. 이날 오전 동래구 온천장을 출발한 국회 통근버스는 중구 광복동 동아극장 앞에서 국회의원 30명을 더 태워 모두 47명을 싣고 임시 의사당이 있는 경남도청 정문을 들어서려다 총 든 헌병의 검문을 받는다. 이에 맞서 1시간을 버티던 국회 버스는 결국 군용 크레인에 의해 사람이 탄 채로 헌병대로 끌려갔다. 몇몇은 국제공산당 음모 사건 피의자로 구속 당했고, 야당 의원 30명은 경찰의 지명수배를 받아 여름 내내 숨어 지내야 했다. 이로부터 39일 만인 7월 4일 야당 의원이 제의한 내각책임제 개헌안과 정부 제안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교묘히 절충한 이른바 ‘발췌개헌안’이 온갖 위협과 탄압 속에 통과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했고, 1960년 4·19로 하야할 때까지 12년 장기 집권의 기틀을 다지게 됐다. 이에 앞서 부정부패의 시발점으로 꼽히는 중석불(弗) 사건도 있었다. 중석불이란 중석(텅스텐)을 수출해서 번 달러라는 의미다. 우리나라의 거의 유일한 수출 품목인 중석을 수출해서 벌어 들인 달러로는 원래 양곡과 비료를 수입할 수 없게 돼 있었다. 그런데 정부가 긴급을 요한다는 구실로, 15개 상사에 총 25건 483만 5300달러에 달하는 중석불을 불하한다. 업자들은 이 돈으로 소맥분 같은 양곡, 비료를 도입해 무려 500억 원의 폭리를 봤다. 이 돈이 격동기 정치자금으로 쓰이면서 건국 후 첫 정경유착 사건으로 남게 된다. △부산항과 국제시장 부산항은 전 세계의 원조 물자가 들어오는 창구였다. 동아대 사학과 전성현 교수는 “한국전쟁 시기 구호물자의 3분의 2 이상이 부산항을 통해서 들어왔다”며 “부산항을 중심으로 물자가 유통되면서 이때부터 서비스업 중심의 부산 경제 구조가 형성됐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전국이 전쟁터가 되면서 생필품 공장조차 제대로 가동되지 못한다. 부산항을 통해 들어와 국제시장에서 유통되는 각종 물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유엔 원조물자나 미군용품이 부정 유출된 경우도 많았다. 남의 물건을 조금씩 슬쩍슬쩍 훔쳐 내는 짓을 속되게 이르는 ‘얌생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2021년 부산시가 펴낸 구술 채록·자료집 <피란, 그때 그 사람들>에도 ‘얌생이꾼’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운송물자 중에 값이 나갈 만한 것을 무조건 트럭 밖으로 집어 던지는 거야. 던지면 운반책이 주웠어. 그때 서면 일대가 판잣집으로 되어 있는데, 익숙하지 못한 사람은 들어가면 나오지를 못하는 거야. 그러니까 미군이 추격해도 찾지를 못해. 그래서 그걸 ‘얌생이 몬다’라고 했어.”(1934년생 박형숙 씨 구술) 대기업들은 부산에서 그룹의 뿌리가 된 기업을 일궜다. 삼성그룹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제일제당은 현재 부산진구 부전동에 터를 잡았다. LG그룹(옛 럭키그룹)의 모체가 된 락희화학공업사도 이 시기 설립된다. 부산일보사가 발간한 <비화 임시수도 천일>에 따르면, LG그룹의 창업주인 구인회·정회 형제는 서구 서대신동 판잣집 비슷한 가내 공장에서 소위 ‘동동구리무’라고 불리던 여성용 크림을 만들었다. 제대로 된 화장품 용기가 없어 고물상에서 외제 통을 수집해 썼는데, 뚜껑이 없어 말썽이었다. 고심 끝에 일본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플라스틱 뚜껑을 만들기로 하고, 원료와 전열기·금형기계를 들여온다. 플라스틱 뚜껑 제조는 대성공을 거둬 300만 원으로 시작한 자산이 3억 원으로 늘어났다. 자신감을 얻은 구 씨 형제는 부산진구 부전동에 약 165㎡(50평) 규모 공장을 새로 짓고, 미국에서 플라스틱 제조 기계를 도입했다. 처음 생산한 상품은 ‘오리엔탈’이라는 상표의 빗이었다. 이 빗이 우리나라 최초의 플라스틱 제품이다. △문화공간이 된 다방 전쟁기 부산에서 문화도 꽃을 피운다. 화가 이중섭과 김환기, 작가 김동리, 황순원을 비롯한 문인과 음악가, 영화인도 피란을 왔다. 갈 곳 잃은 예술가들을 품은 것은 다방이었다. 다방은 전화 연락이 가능한 곳으로, 타지와의 교신을 위해 주소를 제공하거나 일자리를 알선해주는 역할까지 했다. 더마루아트 박진희 대표(미술평론가)는 “폭격에서 안전한 부산으로 예술가가 몰리면서 다방도 우후죽순 생겨났다”며 “중구 광복동의 다방은 미술가에게는 전시장으로, 문인에게는 작품 발표 장소 등으로 문화센터이자 살롱의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당시 다방으로는 △밀다원 △금강 △뉴서울 △루네쌍스 △금강 △휘가로 △늘봄 △파도 △망향 △비원 △스타 다방 등이 있었다. 특히 광복동 일대는 국제시장이 인접해 있어 소비와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생계를 위해 작품을 팔아야 했던 화가들에게는 전시를 열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가 됐다. 피란 생활 중 이중섭이 오랜 시간 머무르며 담뱃갑 속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던 곳도 다방이다. 그의 예술혼을 상징하는 '은지화'의 요람은 금강다방으로 알려져 있다. 밀다원다방은 김동리의 단편소설 ‘밀다원 시대’에도 등장한다. 경남 통영 출신의 화가 전혁림이 피란 중 1952년 첫 개인전을 열었던 곳도 밀다원다방이었다. 전혁림미술관 전영근 관장은 “당시 시인 유치환이 써준 전시회 초대 글(발문)이 현재 통영 전혁림미술관에 남아 있다”고 밝혔다. 부산일보=이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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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13 14:27

[한국전쟁 정전 70년] 피란수도 부산, 1023일의 기록 (상)

1023일. 부산이 한국전쟁 중 피란수도로서 역할을 한 기간이다. 첫 번째는 1950년 8월 18일~10월 27일, 두 번째는 1951년 1월 3일~1953년 8월 15일이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던 부산은 피란민 수십만 명을 품는 포용력을 보여줬다.   △80만 피란민 품은 부산 부산일보사가 1980년대에 발간한 책 <비화 임시수도 천일>에 따르면, 한국전쟁 직전 부산 인구는 47만여 명이었다. 1945년 8·15 광복 직후만 해도 28만 명 수준이던 부산 인구는 일본과 중국 만주 등지에서 돌아온 동포 19만 명까지 더해 급증한다. 이어 전쟁이 발발하자 전국 각지에서 피란민이 몰려들어 100만 명을 넘는 사람이 치열한 생존 경쟁에 맞닥뜨리게 된다. 1·4후퇴 이후 부산의 최대 인구는 120만~130만 명 수준으로 추산된다. 당장 살 곳을 마련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일부 시민이 남는 방을 빌려주며 도움을 베풀었지만, 피란민 수십만 명을 수용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정부가 마련한 천막이나 수용소도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창고와 교회 예배당, 공장, 극장 등 빈 공간이 있는 곳은 모두 피란민에게 개방됐다. ‘동아일보’ 1950년 12월 28일 자 기사에 따르면, ‘부산시 당국에서는 시내에 들어온 피란민 6만여 명을 각 가정에 분산 수용키로 결정했다. 요정, 여관 등을 일체 개방해 피란민을 수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부산연구원 오재환 부원장은 “부산은 한국전쟁 시기에 직접적인 전투가 없었던 평화 도시, 밀려오는 피란민을 품은 포용의 도시였다”며 “유엔 등으로부터 국제적 지원을 받던 곳에서 이제는 이를 되돌려주는 도시로 성장해 월드엑스포 유치에까지 나서게 됐다”고 설명했다. 2020년 3월 25일 <부산일보>에는 특별한 광고가 실렸다. 제목은 ‘부산 시민들께 드리는 감사의 말씀’. “저의 함경도 출신 선친과 서울 출신 어머니가 몇 번이나 하셨던 말씀은 ‘그때 부산 사람들 아니었으면 피란민들 다 얼어 죽고 굶어 죽었다. 자신들도 어려운 형편에서 대한민국 어디 사람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이었습니다.”(어느 6·25 부산 피란민과 그분들의 자식 올림) △소 막사·묘지도 집터로 전쟁 시기 부산에는 불어난 인구를 감당할 주택이 부족했다. 피란민이 지은 판잣집이 줄줄이 산자락은 물론 산등성이를 타고 오르며 늘어났다. 마구간이나 소 막사 같은 축사까지 피란민의 거처가 된다. 대표적인 곳이 남구 우암동 소막마을이다. 소막마을은 일본이 일제강점기에 수탈한 소를 일본으로 보낼 배에 싣기 전 검역하던 곳이다. 검역 전 소를 대기시키던 막사까지 전쟁 때 피란민 수용시설로 활용된다. 당시 이곳은 ‘적기(赤崎) 피란민수용소’라고 불렸다. 우암동이 바다에서 보면 붉은 언덕처럼 보인다고 해서 일본인이 ‘아카사키’라고 불렀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2021년 부산시가 펴낸 구술 채록·자료집 '피란, 그때 그 사람들'에서 우암동 출신 장두익 씨는 피란민 친구의 집과 의사소통 문제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방인지 부엌인지. 뭐 그릇 몇 개 놔두고 부엌이고. 원시생활하고 똑같지. 우암2동은 거의 다 소 막사였고. 그리고 어릴 때 들어보면 이북 말투가 좀 다르잖아요. 무슨 말인지는 잘 못 알아듣고.’ 소 막사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꺼리는 공동묘지까지 피란민 주거지가 된다. 서구 아미동 비석마을은 죽은 자의 공간이었던 묘지까지 삶의 공간으로 바뀐 곳이다. 피란민의 강인한 생존 의지를 확인시켜 주는 사례다. 피란민은 평지에 살 곳이 부족해지자 산복도로 곳곳에 판자촌을 형성한다. 공동묘지와 화장장이 있어 사람들이 살기 꺼리던 아미동도 마다할 처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건축 자재가 부족하던 전쟁기에 단단한 묘비와 상석은 집을 지을 요긴한 재료가 돼줬다. 지금도 비석마을에 가면 담장 아래에 남은 묘비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화재·식수·오물과의 전쟁 1953년 정전 직후를 기준으로 부산 시내 전체의 판잣집은 4만여 채에 달했다. 대청동과 보수동, 용두산 산비탈 등 중구 일대에만 최소 1만 5000여 채의 판잣집이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깡통을 펴서 만든 양철판과 상자 등으로 대충 지은 판잣집은 화재에 취약했다. 불이 어찌나 자주 났던지 하루 평균 3~4건이 발생한 것으로 전해진다. ‘섰다 하면 교회요, 났다 하면 불이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1953년 1월에는 국제시장 대화재로 상가 4200여 채가 불탔고, 이재민 3만여 명이 발생했다. 위생 문제도 심각했다. 상하수도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공동 수도와 공동 변소를 줄 서서 사용했다. 이마저도 없는 곳에서는 다들 오물을 밟고 다니기 일쑤였다. ‘터질 듯한 부산은 주택난·식수난·식량난의 소동 속에 먼지와 쓰레기에 싸여있다.’ 1951년 2월 1일 자 <부산일보> 사회면 기사의 일부다. 일제강점기에 부산의 기반시설은 인구 30만 명에 맞춰져 있었다. 시내 4개 정수장에서 생산되는 수돗물은 하루 3만 3000t에 불과했다. 식수 부족으로 인한 ‘물 전쟁’이 특히 피란민을 힘들게 했다. 인심 좋은 부산 사람도 물을 나눠주는 데에는 인색했다. 오죽하면 ‘밥 한 그릇은 줘도 물 한 사발은 줄 수 없다’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우물과 수도에 자물쇠를 채우는가 하면 드럼통에 물을 넣고 다니며 파는 물장사도 등장했다. 1951년과 1952년에는 흉년이 들어 전국 각지 유랑민까지 부산으로 몰려왔다. 당시 부산YWCA 부녀회원들은 굶기를 밥 먹듯 하는 피란민을 그냥 볼 수 없어 중앙동에서 ‘우유죽’ 배급을 시작한다. 우유죽은 분유에다 푹 삶은 보리쌀을 섞어 만든 죽이다. 전쟁 시기에 생겨난 또 다른 음식은 꿀꿀이죽, 일명 ‘유엔탕’이다. 미군 부대에서 버린 음식 찌꺼기를 수거해 끓인 음식이다. 피란민들은 꿀꿀이죽 장사, 미제 깡통을 펴서 판잣집 지붕 따위를 만드는 ‘깡깡이업’ 등 각종 밥벌이 수단을 찾아 생계를 이어갔다.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차철욱 소장은 “당시 부산은 절체절명의 생존 경쟁에 내몰린 피란민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로 가득했다”며 “이북에서 내려온 부유층, 고학력자도 체면을 떨쳐내고 낯선 생활에 적응해야 했다. 이런 유연한 대처 역시 피란 시기 부산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부산일보=이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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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31 15:32

[한국전쟁 정전 70년] 국민보도연맹 민간인 학살

"왜 조사도 안 하고 억울하게 잡아가서 민간인을 학살합니까? 시체를 바다에 빠뜨리니 찾지도 못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게 너무너무 억울하지요. 74살 들어 살면서 아버지 한번 불러보고 싶어도 못 불렀습니다." (김점선씨· 통영시 거주)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창원유족회 증언집 일부 발췌- "6살 때 아버지가 마산 괭이바다에서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돌아가신 뒤 정말 힘들게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주변에서 ‘빨갱이 자식’ 소리 들으며 컸죠. 그때 상처와 서러움은 말도 못 할 정도입니다." (권택근씨·부산 거주)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 건 군인들만이 아니다. 수많은 민간인이 본인이 무슨 죄가 있는지도 모른 채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진실화해위 조사가 시작되고, 유족회가 생겨 정부를 상대로 소송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70여년이 흘러도 유족들은 '빨갱이 자식'이라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국가 폭력에 희생된 이들의 억울함이 자식들에게도 향해지고 있어 정부 관심이 필요한 상황이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 이승만 정부는 1949년 6월 5일 좌익 계열 전향자들을 대상으로 반공단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실제 취지는 공산주의 정당 남로당을 약화하고 좌익 성향 사람들을 전향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각 경찰서 별로 할당된 수를 채우기 위해 공무원들과 경찰은 아무 관계없는 민간인까지 무분별하게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이후 전쟁이 터지자, 내무부 치안국은 각 도 경찰국에 '요시찰인 전원을 경찰에 구금하고 형무소 경비를 강화하라'는 내용의 비상 통첩을 보냈다. 이후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이들은 예비검속돼 경찰서나 형무소 등에 구금됐다. 이 중 본인이 왜 구금됐는지도 모르는 민간인이 다수였다. 북한군 점령지역에서 국민보도연맹 가입된 이들이 부역 행위에 협조하거나 의용군으로 입대했다는 보고가 정부에 들어갔다. 그러자 정부는 보도연맹을 잡아 처형하도록 명령했고, 6월 하순부터 비극적인 학살은 시작된다. ◇평범한 가장들, 이유도 모른 채 죽어야 했다=경남 지역은 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 안쪽으로 정부가 행정권 유지했기에, 보도연맹 학살 피해가 컸다. 진실화해위원회 1기 조사 결과에 따르면, 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 사건의 희생자로 밝혀졌거나 추정한 수는 전국적으로 총 5129명이다. 이 중 경남 지역이 1551명으로 가장 많다. 2기 진실화해위가 지난해 말 발표한 자료에서는 경남지역에 관련 진실규명 신청이 819건이 접수됐다. 유족회 등에 따르면, 한국전쟁 전후 당시 창원지역에서만 민간인 2300여명이 재판 없이 불법으로 학살당했다. 이 가운데 마산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국민보도연맹원, 정치사범 등 1681명이 희생됐고 그중 4차례에 걸쳐 717명 이상이 마산 괭이 바다에 수장됐다. 이런 사실은 1960년 6월 열린 ‘국회 양민학살사건 조사특별위원회’에 출석한 희생자 유족이 당시 마산지역 보도연맹 사건희생자가 1681명이라고 증언하면서 확인됐다. 또 2010년 발표된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문에서도 1950년 7월 국민보도연맹 혹은 인민군에게 동조한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적법한 절차 없이 예비검속 한 민간인이 살해된 사실이 언급됐다. 진주 지역 또한 피해가 컸다. 진주형무소는 서부 경남 일대에서 검속된 수많은 국민보도연맹원과 기수용된 수감자들로 포화상태였다. 1950년 7월 29일 진주 방어선까지 북한군이 진격해 30일 밤부터는 진주 서쪽 4km 지점까지 들어와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다. 하지만, 진주는 북한군에 점령당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정부는 진주가 점령되기 전까지 국민보도연맹원을 집단 학살했다. 또한 북한군이 진격해 오던 인근 하동과 산청에서도 학살이 일어났다. 당시 진주경찰서에서 근무한 김병두씨는 "한국전쟁 발발 후 후퇴하면서 시작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의 처형은 입수된 명단을 지서장에서 면 단위로 국민보도연맹 원들을 지서에 소집시킨 뒤 특무대가 내려가서 처형했다"고 진실화해위에 진술했다. 당시 학살 현장에서 살아 돌아온 정모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보도연맹원 소집 통보를 받고 경찰서로 나갔다가 구금된 후, 감옥에 500명 넘게 갇혀 있었고, 감옥 방이 10여 개가 있었는데, 방이 꽉 차 우리는 감옥 유도실에 가뒀다. 그곳에서 10여일을 굶고 지내면서 몸에 힘이 없어졌다. 이후 한 차에 100여명을 2명씩 포승줄로 묶어 차에다 밀어 넣고 버스가 꽉 차면 한 차에 순사(경찰관) 7명이 탔다. 산골짜기로 끌고 가서는 눕혀놓고 총을 쐈다." ◇여러 차례 발굴 이어졌지만, 신원 확인은 안 돼= 늦었지만, 진실화해위 주도 유해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진주 지역에서는 2010년부터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발굴은 지방자치단체와 민간 단체의 주도로 진행된 바 있다. 2014년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에서 유해 39구, 2017년에는 38구를 발굴했고 2021년에는 관지리 화령골에서 유해 16구를 수습했다. 지난해 집현면 봉강리에서는 유해 35구가 발굴됐다. 올해 진행된 발굴에서 29구가 확인됐다. 하지만 하지만 발굴된 유해 중 유족과 신원이 확인된 사례는 없다. 예산 부족 이유로 DNA 시료 채취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희생자들에 대한 유해 안구 시설이 없어 현재 컨테이너 시설에 보관 중인 상황이다. 정연조 한국전쟁전후진주지역민간인피학살자유족회 회장은 "유해를 모셔야 할 납골당이나 추모관이 없어 컨테이너에 보관하고 있다"라며 "정부에서는 세종시에 있는 추모 공원에 보내라고 하는데 유족들은 반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아직 예산 문제 이유로 진주 지역 희생자들에 대한 DNA 채취는 아직 계획이 없다고 해 안타깝다"며 한숨을 쉬었다. 경남지역 잠재적 발굴 가능지는 총 8곳으로 △진주시 명석면 우수리 산 134-6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산 241-1(용산고개2)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산 425-1(용산고개4) △진주시 명석면 우수리 산 84 △진주시 호탄동 산 93-2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 산 285-5 △밀양시 단장면 태룡리 372-2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산 154-2·154-3·157 등이며, 모두 국민보도연맹사건 관련이다. 아울러 마산 국민보도연맹사건의 희생자들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심리 산 24 일대는 토지 소유주가 거부해 발굴이 진행이 힘든 상황이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이곳은 유해 발굴 가능지이지만, 토지 소유주가 거부해 진행이 힘든 상황이다. 강제할 근거가 없다”라며 “만약 소유주와 협의가 된다면 빠르게 발굴을 진행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경남신문=박준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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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17 15:15

[한국전쟁 정전 70년] 예비검속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제주에 또다시 비극이 찾아왔다.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돼 학살당했다. 당시 정부는 ‘좌익분자’를 색출한다는 미명하에 예비검속을 실시했다. 또 전국 형무소에 수감된 4·3 관련자들도 즉결처분 됐다. 예비검속은 범죄 방지 명목으로 범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에 구금하는 것으로 일제의 악습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불어닥친‘예비검속’ 광풍 경찰 문서에 따르면 1950년 8월 도내 4개 경찰서(제주·모슬포·성산포·서귀포)에서 예비검속 된 도민은 1120명이다. 경찰은 검속된 자들을 A·B·C·D 네 등급으로 분류했는데, C·D급은 예비검속자 등급별 조사 과정에서 군 송치 대상자로 분류돼 계엄군에 넘겨져서 총살됐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적행위를 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마구잡이로 사람들은 잡아들이고 학살한 것이다. 이 중 제주북부(제주읍·조천면·애월면) 예비검속자는 500여 명에 달했다. 극적으로 목숨을 부지한 생존자와 목격자들은 1950년 8월 19~20일 이틀간 제주국제공항(당시 정뜨르비행장)에 끌려간 예비검속자들이 집단 학살된 후 암매장됐다고 증언했다. 4·3당시 최대 학살터였던 제주공항 활주로 밑에는 억울하기 희생된 수많은 4·3영혼이 잠들어 있다. 활주로에서는 매일 많은 수의 비행기가 쉼 없이 오르내린다. 당시 제주공항은 넓고 비어있는 곳으로 외부의 눈에 띄지 않아 총살을 집행하기 최적의 장소였다는 증언이 있다. 제주4·3평화재단은 제주공항에서 2007~2009년 3년간 유해발굴을 실시했다. 2018년에도 유해발굴 작업이 진행됐다. 4·3당시 암매장된 388구의 유해를 발굴했고 유전자 감식으로 90구의 신원을 확인했다. 신원이 확인된 90명은 △1949년 군사재판 사형수 47명 △서귀포 예비검속 13명 △모슬포 예비검속 7명 △일반인 23명이다. 서귀포 예비검속자들은 정방폭포 앞 바다에 수장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제주공항에서 집단 학살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희생자가 가장 많은 199명이 암매장 된 제주북부 예비검속자들의 유골은 단 한구도 나오지 않았다. 1973년 길이 2000m·너비 45m의 제주공항 남북활주로 개설공사 당시 유골이 무더기로 나오면서 근로자는 물론 장비까지 모두 교체됐고 일부 유골은 제주시 어승생무연고묘지에 안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도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으로 희생된 많은 이들의 유해가 발견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백조일손지묘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공동묘지 한편에는 한 울타리 안에 조그만 봉분 132기와 함께 백조일손지지라는 묘비가 있다. 여기에 잠든 이들은 일제가 남긴 송악산 서쪽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집단학살 된 지역주민들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부터 학살이 있던 그해 8월 20일(음력 7월 7일)까지 4·3과 관련해 구속됐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벌어진 섯알오름학살사건은 이른바 예비검속을 명분으로 대정과 안덕, 한림지역 주민들을 무차별 연행하면서 시작됐다. 연행된 사람들은 형식적인 재판 절차 없이 대정읍의 고구마 창고에 유치된 뒤 칠월칠석날인 1950년 8월 20일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집단학살됐다. 유족들은 현장을 찾아 유해를 수습하려고 했지만 군·경 당국의 출입통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6년 여가 지나서야 시체들을 수습할 수 있었지만 하지만 시체가 썩고 유골이 뒤엉켜 있었기 때문에 시신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유족들은 132구의 유골을 한 곳에 이장하며 서로 다른 132분의 조상들이 한 날, 한 시, 한 곳에서 죽어 뼈가 엉기어 하나가 됐으니 이제 모두 한 자손이라는 뜻으로 묘지를 백조일손지지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어렵게 백조일손지지 묘비를 만들었지만 5ㆍ16 군사정변으로 들어선 군사정권 때 묘비가 파괴되기도 했다. ▲만벵디 묘역 만벵디(듸) 묘역에 묻혀있는 이들은 한국전쟁 직후 한림지서 관할 한림항 어업조합 창고, 무릉지서 창고에 갇혔다가 1950년 8월 20일(음력 7월 7일)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예비검속이라는 명목으로 ‘사상이 의심스럽다’, ‘4·3 당시 가족 중 누군가 희생됐다’, ‘군·경·관에 비협조적이다’ 등의 이유로 재판 절차도 없이 목숨을 잃었다. 우익인사, 농민, 여성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희생됐다. 이 사건의 희생자는 62명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만벵디 묘역에는 현재 46위가 안장돼 있다. 시신 수습은 1956년 3월 30일에야 이뤄졌다. 경찰과 군인들 몰래 일부 유족들이 몰래 모여 칠성판, 광목, 가마니를 준비하고 새벽 2~3시께에 섯알오름으로 트럭을 몰고 가 희생자의 시신을 수습했다. 만벵디 묘역의 터는 유족 중 한 명이 무상으로 내놓았다. 당시 유족들은 머리 모양이나 치아, 썩지 않고 남은 옷, 소지품 등으로 일부의 시신을 구별했다. 한편 제주4·3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이후 제주도민들은 국가보안법의 연좌제, 고문 피해, 레드 콤플렉스 등에 시달려야 했다. 또 빨갱이, 폭도의 가족이라는 낙인과 당국의 감시가 두려워 억울하게 희생당한 부모형제의 제사도 조용히 지내야 됐다. 제주일보=홍의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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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03 14:30

[한국전쟁 정전 70년] 천안-금강 지연전투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한반도에 가장 먼저 투입된 미군이 24사단이다. 전쟁 발발 직후 UN은 '한국 군사원조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트루먼 미 대통령은 극동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를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고, 맥아더는 곧바로 일본에 주둔한 미 8군 제24사단을 한국에 투입했다. 윌리엄 딘 24사단장은 제21연대 1대대, 일명 스미스 부대를 한반도로 급파했다. 부산에서 대전을 거쳐 경기도 오산에 투입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1950년 7월 5일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최초 전투를 벌였으나 T-34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제4사단과 제105전차사단에 참패했다. 스미스 부대는 60명이 전사하고, 82명이 포로로 잡혔다. 곧 이어 벌어진 전투가 천안전투이다. 앞서 딘 사단장은 스미스 부대 후방으로 제34연대를 보내 안성과 평택에서 북한군을 막도록 했다. 그런데 러브리스 연대장은 전투도 벌이지 않고 남쪽으로 철수하여 천안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북한군과 접촉하면서 시간을 끌라는 사단장의 뜻을 어긴 것이다. 북한군은 7월 6일 평택을 점령한 뒤 계속 남하했다. 천안의 34연대는 사단장의 지시에 따라 7월 7일 1개 중대를 경부국도로 북상시켜 북한군의 움직임을 탐지하고 접촉을 유지했다. 이 부대는 북쪽으로 전진하다가 부대리 인근에서 북한군의 기습을 받고 철수하였다. 이날 34연대는 연대장이 바뀌었다. 딘 사단장이 안성, 평택의 무단 후퇴 책임을 물어 러브리스 연대장을 해임하고, 로버트 마틴 대령에게 지휘권을 넘긴 것이다. 마틴은 지략과 용맹함을 갖춘 장교로 2차 세계대전 때 딘 사단장과 함께 싸웠으며, 딘 사단장이 극동사령부에 전입을 요청, 하루 전날 일본에서 대전에 도착했다. 천안전투에서 직접 2.36인치 바주카포로 북한군의 T-34 전차를 공격하다가 피격 사망한 로버트 마틴 대령(제34연대장). 7월 8일 미 24사단 34연대와 북한 3사단, 105전차사단이 천안 시내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미군이 2000여명인데 비해 북한군은 1만 2000여 명에 전차로 중무장한 터였다. 아침 6시부터 북한군은 성환 쪽 국도를 타고 천안의 서북쪽과 동북쪽의 도로 진입했다. 전날 미군이 800여 발의 대전차 지뢰를 매설했지만 한 발도 터지지 않았다. 북한군이 밤 사이 제거했거나 불량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시가전은 북한군의 일방적 우세였다. 시내에 진입한 북한군 전차는 천안역사 등 건물과 교회, 차량들을 포격했다. 미군이 잠복했을 만한 엄폐물을 제거한 것이다. 미군 장병들이 수류탄과 2.36인치 로켓포로 2대의 전차를 부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이날 오전 8시 마틴 연대장은 직접 로켓포로 전차를 공격하다가 적 전차의 포격으로 사망했다. 연대장으로 부임한 지 이틀 만에 전사한 것이다. 딘 사단장은 연대장이 전사하자 부연대장 와들링턴 중령으로 하여금 병력을 수습하여 남쪽으로 철수하도록 했다. 뒤 이어 벌어진 전투가 전의전투이다. 천안 바로 남쪽 전의에서 미 24사단 제21연대는 7월 9일부터 12일까지 북한군 4사단과 3사단, 105전차사단과 싸웠다. 34연대가 천안전투에 전력 손실을 입어 뒤로 빠지고, 21연대가 전면방어전을 펼친 것이다. 연대장 스티븐스 대령은 개미고개 일원에 병력을 집중 배치했다. 이곳은 경부선 철도와 국도가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개미고개 동쪽 미곡리에 제1대대, 남서쪽 송성리에 제3대대, 개미고개 남서쪽 5km 보덕리에는 11포병대대, 그 아래 조치원에 연대본부를 뒀다. 7월 9일 북한군이 전차 11대를 앞세우고 전의 방면으로 공격해오자 포병대대의 155m 곡사포와 4.2인치 박격포를 집중하고, 미 제5공군 전폭기가 폭격을 퍼부었다. 이 공격으로 적 전차 10여 대와 차량 30여 대를 파괴했다. 10일에는 북한군이 우회하여 박격포 진지를 함락시켰고, 미 공군의 폭격이 뜸해지자 사력을 다해 미 제1대대의 미곡리 방어진지를 공격했다. 미 제1대대는 제3대대로 철수하여 합류했고, 오후 2시에 3대대가 반격하여 1대대 진지를 회복했으나 북한군의 야간공격에 대비해 다시 3대대 진지로 철수했다. 이날 미 공군의 전폭기가 대량의 화력을 퍼부어 전차 38대, 자주포 7대, 트럭 117대를 파괴했다. 미군 또 처음으로 M-24 전차 8대를 투입하여, 북한의 T-34 전차와 대전차전을 벌였는데 아군 전차가 7대, 적 전차는 1대가 파괴되는 등 화력의 열세를 절감했다. 11일 새벽 21연대 제3대대가 미곡리 진지를 다시 점령했으나 북한군에 의해 빼앗겼고, 12일에는 북한군이 새벽부터 지휘소를 집중포격하여 통신소와 탄약저장소를 파괴했다. 이때 북한군은 4사단을 대체하여 3사단이 한층 증강된 전력을 바탕으로 미군을 맹공했다. 미 제3대대는 통신이 두절된 데다가 북한군 전차 4대가 진지를 돌파해오자 대혼란이 빚어져 병사들 각자 진지를 벗어나 조치원으로 철수했다. 미 24사단 21연대는 조치원에서도 전투를 벌였다. 스미스 중령이 이끄는 제1대대가 조치원 북쪽에서 진지를 구축했는데 북한군 2000여명이 동,북,서쪽 3개 방향에서 공격해왔다. 스미스 대대장은 혼란을 무릅쓰고 1개 중대씩 축차적으로 차량으로 이동시켜, 금강을 건너 남쪽으로 안착시켰다. 34연대도 천안 남서쪽으로 철수하여 가벼운 전투를 치르고 수촌리를 거쳐 공주 금강 남쪽에 진지를 구축했다. 미군은 7월 12일부터 16일까지 금강 남쪽 세종시 대평리에서 금강 방어전을 펼쳤다. 딘 24사단장은 금강에서 적을 최대한 저지시키기 위해 제19연대를 투입, 공주-대평리-신탄진 강안 30km을 차단하게 했다. 제19연대는 북한군의 주공격로인 대평리에 화력을 집중하여 진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북한군 4사단이 14일 미 34연대가 방어하는 금강하류 공주쪽을 건넘으로써 서쪽이 뚫렸다. 북한군 3사단은 15일부터 대대적으로 대평리 일대 도하에 나섰다. 전차와 포병이 포를 쏘고 야크기까지 동원하며 도하를 거들었다. 미 19연대는 기관총과 포병, 공군기의 폭격까지 동원하여 격퇴시켰다. 그러나 북한군이 이날 밤 미군의 조명탄이 20여분 간 중단된 틈을 타 남쪽으로 강을 건넜고, 상류쪽 합강리로도 도하를 시도했다. 16일 오전에는 북한군이 중앙 정면을 건넜고, 전차의 엄호 아래 대대 진지까지 습격했다. 북한군은 후방으로 깊숙하게 침투하여 제19연대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퇴로를 차단당한 미군은 16일 밤부터 뿔뿔이 흩어져 24사단 본부가 있는 대전으로 철수했다. 뒤 이어 대전에서는 7월 19일부터 20일까지 미 24사단과 북한 3,4사단, 105전차사단 사이에 한국전쟁의 운명을 건 '대전전투'가 벌어졌다. 24사단은 오산-평택·안성-천안-전의-조치원·공주-대평리-대전에 이르는 경부 축에서 싸웠고 대부분 패했다. 북한군의 전력을 오판했고, 준비도 미흡했다. 딘 사단장은 금강(대평리)전투 직후 대전전투에서 패하고 그 자신이 북한군 포로가 됐다. 그러나 요즘 한국전쟁 초기 미 24사단의 전투를 새롭게 평가하고 있다. 이 전투를 통해 아군은 T-34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전력을 확인하고 화력 증강에 나섰다. 북한군은 24사단의 강력한 저항과 미 공군의 폭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공포감을 느꼈으며, 남진을 머뭇거렸다. 천안과 전의전투에서 북한 4사단은 병력의 절반 정도가 희생됐다. 24사단이 죽음을 무릅쓰고 15일이나 시간을 끌어줬기 때문에 아군이 영동과 김천을 거쳐 낙동강에 이르기까지 전열을 정비할 기회를 얻었다. 전투는 패했지만 전략적 목표는 훌륭하게 달성한 것이다. 대전일보=김재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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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6.19 14:34

[한국전쟁 정전 70년] 남아있는 상처 드러나지 않은 상흔

“6.25때 내가 16~17살이었는데, 밤에 금상동 마을 주민들을 동원해서 구덩이를 팠어. 구덩이를 판 자리가 구세군 교회(소리개재, 전주 동부지역) 뒤편이야. 밤에 횃불을 붙이고 했지.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죽였는데, 죽인후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어⋯”(백모씨∙88, 전주시 덕진구 산정동) 박모씨(86·전주시 완산구 효자동)는 한국전쟁 당시 작은아버지가 전주경찰서에 수감돼 있었지만 전쟁 발발후 어딘가 끌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신을 찾기 위해 아버지와 누이가 효자동 황방산 일대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 이후 황방산 일대로 소풍을 오면 고구마 두둑 형태를 이루는 것이 많았는데, 그것이 유해를 매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증언했다. -'전주지역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 보고서 발췌(2021, 전주시, 전주대학교박물관)' 6.25전쟁 발발 전후를 즈음해 한강이남 형무소들에서는 대규모 수용자 학살사건이 벌어졌다. 비교적 후방으로 평가받는 호남지역에서도 그 아픔은 존재했다. 그리고 정전 70년을 맞이했지만 상흔들은 여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전쟁 당시 이념 충돌의 희생양은 바로 민간인들이었다. 전북지역에서는 당시 형무소에 수용중인 민간인들의 학살이 군경에 의해 자행됐는데, 대표적인 곳이 바로 전주형무소와 군산형무소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10년 조사보고서에서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7월 경 전주형무소 재소자들이 7사단 3연대 군인들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밝혔다. 희생규모를 추정할 수는 없지만 70여명의 희생자 신원을 확인했다. 이들이 끌려가 학살당한 장소가 당시 전주시 진북동에 있던 전주형무소(현재 평화동으로 이전)에서 약 6㎞ 떨어진 황방산이다. 전주형무소 재소자 중에는 여순사건 관련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전주형무소에는 민간인들이 많이 수감됐었다는 것이 피해가족들의 증언이었다. 이념차이로 우익인사가 희생되기도 했다. 앞서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보고서에서 "1950. 9. 26~9. 27 양일간 전주형무소에서 인민군 102경비연대, 전주형무소장 이하 간수, 내무서원, 지방좌익에 의해 ‘반동분자’로 규정된 우익인사가 1000여 명 이상 희생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전주시 3차에 걸쳐 희생자 유해발굴, 44개체 확인 2020년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앞둔 2019년 전주시 주도로 전주지역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전주시와 전주대학교의 유해발굴이 시작됐고, 희생자 44개체(치아기준)가 발굴돼 안치됐다. 먼저 2019년 전주시 효자동 황방산 및 산정동 소리개재에 대해 사전 조사가 진행됐다. 두 지역에 대한 시굴조사 결과 전주시 효자동 황방산(효자동 3가 산 195-1번지)에서 유해 매장 추정지가 확인돼 발굴조사로 전환됐다. 산정동 소리개재에 대해서는 두 차례 조사가 이뤄졌지만 현재까지 유해 매장 추정지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다. 현재 황방산 일대 위주로 3차 조사가 진행중이다. 황방산 발굴조사 결과 유해 매장지는 3열의 구덩이 형태로 확인됐다. 구덩이는 모두 남-북 방향을 하고 있으며, 등고선이 나란하게 조성되어 있고 기다란 구덩이를 파서 학살 후 매장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것이 조사단의 설명이다. 조사단은 전주지역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조사보고서(2021년)에서 "이러한 것은 전쟁 전후에 계획적으로 학살을 진행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학살의 주체가 탄약류에 의해서 구분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탄약류는 칼빈소총 탄피, M1소총 탄피, 탄두 및 철제편 등이 출토됐다. 이러한 출토품은 그 당시 군인 혹은 경찰이 착용하는 무기체계와 일치하고 무기체계의 일치는 학살의 가해자가 그 당시 군인과 경찰 등 정부에 의해 자행된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 조사단의 설명이었다. 치아를 분석한 결과 마모도에 의해 당시 희생자들은 29~35세 정도로 추정된다고도 했다. 이윽고 1년 넘은 발굴 조사결과 2021년 5월 18일 전주시와 전주대학교는 "군경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전주지역 민간인들의 유해와 유품이 발굴됐다"며 "유해 44개체를 발견했다"고 공식 밝혔다. 특히 유품에 대한 보존처리 결과 탄두나 탄피에 인골편(사람의 뼛조각)이 흡착된 것으로 나타나 당시 민간인들이 잔인하게 희생됐음을 엿보게 했다고도 덧붙였다. 전주대학교 박물관 박현수 학예연구실장은 “유해 출토 양상이 이전 조사와 유사하고 대퇴골, 두개골, 상완골 순으로 수습됐으나, 전반적으로 유실된 부위가 많고 잔존 부위 보존상태도 열악해 절반 이상의 유해가 부위 판별이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보고서는 "전주지역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을 통해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깊은 애도를 전하며, 조사과정 및 보고서 작성 등 모든 과정에서도 마음 깊이 희생자가 영면하길 기원한다"고 밝힌 뒤 "향후 지속적인 유해발굴 및 추모사업에 대한 관심과 예산지원이 필요하며, 유해발굴 및 추모사업을 통해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영면 및 유가족에 대한 위로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발굴만 이뤄지지 않았다. 전주시는 1차 유해발굴 조사에서 나온 두개골과 치아, 다리뼈 일부 등 유해 34개체와 M1 소총, 권총 탄피, 벨트 등 129건을, 2차에서 추가로 발굴된 유해 10개체와 유품 84점 등 2020년과 2021년 두차례에 걸쳐 세종시 추모의 집에 안치했다. 이어 전주시는 2023년 4월 13일 다시 황방산 일대에 대한 발굴작업을 위한 개토제를 시작했다. 작업은 오는 7월까지 이어지며, 발굴된 유해는 감식작업을 거친 뒤 세종추모의 집에 안치될 예정이다. 전주시 관계자는 "아픈 과거사를 정리하고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면서 "유해 발굴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겠다"고 말했다. △희생자 잊지 않기 위한 전시회도 개최 전주대학교박물관(관장 김건우)은 지난 2020년 10월부터 11월까지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사)한국대학박물관협회 주관으로 2020년 대학박물관 진흥지원사업의 일환인 한국전쟁 70주년 특별전 '70년의 기억, 그리고 전쟁이 남긴 아픔 그리고 화해'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가졌다. 당시 전시는 한국전쟁 70년이 되는 해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는 전쟁의 참혹한 현실과 슬픔을 어루만지고 좌·우의 대립이 아닌 과거에 대한 반성과 화해의 방법을 제시하고자 기획됐다. 전시에서는 2019년부터 전주시의 협조로 발굴조사 중인 전주 민간인 희생자의 유품으로 발견된 허리벨트, 고무줄, 단추 등 그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는 각종 유품을 최초로 소개하면서 관람객들의 공감을 이끌었다. 전시유품인 허리벨트에는 올림픽 오륜기와 복싱, 그리고 영문으로 ‘KOREA’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X-Ray’촬영으로 확인, 유품과 관련된 민간인 희생자가 누구였는지 깊은 관심을 유발했다. 이외 ‘춘’ 또는 ‘大工’으로 추정되는 글씨가 새겨진 허리벨트 1점도 큰 관심을 받았다. △땅속에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군산형무소 희생자들 유해발굴과 안치까지 이뤄지고 전시회까지 개최된 전주와 달리 군산의 사정은 확연히 다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보고서에 군산형무소는 전쟁 당시 900~1000여 명을 수용하고 있었는데 전쟁 직후 일반 수용자는 석방하고, 중형을 받은 수형자는 타 형무소로 이송했다고 하는데 좌익사범의 처리는 역시 기록되지 않았다. 간수들의 증언에 따르면 좌익사범들은 군산비행장에서 헌병과 경찰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한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피학살자 유족들의 진상규명 건의 중 9건을 확인했다. 특히 현재 군산비행장의 경우 미군 38전투비행단이 사용하고 있어 발굴 시도조차 힘든 상황이다. 구체적인 내용으로 '한국 교정사'에 따르면 군산형무소는 군산시 금광동에 위치했으며 1950년 7월 16일 일반 수형자는 일시 석방되고 중범수형자는 광주형무소로 이송됐다가 다시 대구형무소로 이송됐다. 교정사에는 한국전쟁 발발 후 소위 좌익사범들을 어떻게 했는지 기록돼 있지 않다. 다만 전쟁 수복 때부터 군산형무소에 근수했던 간수 진술에는 "10년 이상 징역형, 무기형, 사형을 받은 좌익사범들은 군산비행장에서 헌병과 경찰에 의해 처형됐다"는 내용이 있었다. 상당수가 여순사건 발생후 검거돼 군산형무소에 수감중인 이들이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 기획
  • 백세종
  • 2023.06.04 13:48

[한국전쟁 정전 70년] 최후의 전쟁, 백마고지 전투

1951년 5월16일부터 22일까지 인제군 현리에서 6·25전쟁기 중 국군의 가장 큰 패배로 일컬어지는 ‘현리전투’가 벌어졌다. 9사단을 포함한 우리 국군과 중공군 사이에 벌어진 현리 전투에서 국군은 별다른 교전도 벌이지 못하고 와해되고 동부전선은 위기를 맞는다. 다음해인 1952년 10월초, 현리전투에서 중공군에 패했던 우리 국군은 철원 서쪽의 이름없는 395고지(백마고지)에서 또다시 중공군과 맞선다. 이 때 395고지를 지키고 있던 국군은 9사단. 하지만 395 고지의 9사단은 1년 전 중공군의 공격에 물러선 부대가 아니었다. 중공군 3개 사단과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시종일관 유리하게 전황을 이끌었고 결국 395고지에서 중공군을 완전히 몰아낸다. 백마고지 전투 승리로 국군과 유엔군은 군사 요충지를 확보하고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었다. 또 백마고지 전투 승리는 드넓은 평야를 품은 철원지역 일대를 우리 땅으로 만드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시작된 휴전회담 그리고 예고된 혈전=유엔군과 공산군은 6·25전쟁이 시작된 후 1년여 만인 1951년 7월부터 전쟁 휴전과 포로교환 등을 위한 회담을 시작한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없이 시간은 지나가고 공산군은 휴전회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마련한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중공군이 주도하는 고지 쟁탈전이었다. 당시 고지 쟁탈전은 중공군이 국군과 유엔군이 장악한 고지를 먼저 공격해 차지하고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이를 다시 되찾는 형태의 전투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1952년 가을께 포로문제에 대해 유엔군과 공산군의 협상이 난항을 겪었고 한반도 중앙의 최고 요충지 '철의 삼각지대'로 관심이 집중됐다. 국군 9사단이 주둔 중인 395고지, 철원평야와 평강고원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한반도 중부의 심장부인 이곳에서의 치열한 전투는 피할 수 없었다. △철의 삼각지대=철원과 김화, 평강을 잇는 지리적 삼각지대를 ’철의 삼각지‘라 부른다. 이 지역은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과 역시 원산으로 향하는 국도 5호선이 지나는 교통의 중심지로 지리적, 군사적으로 피아 간 절대 빼앗길 수 없는 중부 지역의 가장 중요한 요충지다. 철의 삼각지의 확보 없이는 중부전선 전체를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이는 곧 6·25전쟁 중 최대 혈전이 벌어지게 된 이유가 된다. 철의 삼각지는 평강으로 향할 수록 지대가 높아져 수비를 하는 국군과 유엔군 입장에서는 불리한 조건이고 공세에 나서는 북한군과 중공군에 있어서는 유리한 지형이다. 이에 중공군은 유리한 지형과 우세한 병력을 앞세워 군사·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철원 일대를 확보하기 위해 395고지를 노리고 대규모 공세를 감행한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395고지를 비롯한 철원평야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고 9사단은 395고지 일대에 주둔해 중국군 3개 사단에 맞선다. △열흘 간의 격전, 백마고지 전투=1952년 10월6일 새벽, 395고지 주봉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6일부터 9일까지 9사단과 중공군은 주로 포격전을 벌였다. 중공군은 유엔군에 비해 화력의 열세를 절감하면서 포병화력을 대대적으로 증강시킨 상태였다. 물론 유엔군에 비해서는 무기와 장비 등에서 열세를 보였지만 중공군의 화력 보강은 국군과 유엔군에게는 분명 부담으로 다가왔다. 미군은 9사단이 지키고 있는 395고지 사수를 위해 항공기를 투입, 중공군 포병부대에 대해 대대적인 폭격을 실시했다. 인근 국군과 미군의 포병부대도 중공군을 향해 포탄을 퍼부었다. 중공군도 9사단이 사수하고 있던 395고지 정상에 집중적으로 포격을 가하며 한편으로는 국군의 증원 및 군수지원 등을 방해하기 위해 395고지 북쪽에 위치한 봉래호의 수문을 폭파해 국군의 후방에 위치한 역곡천을 범람시켰다. 7일부터 11일까지는 국군 9사단과 중공군과의 직접적인 전투, 즉 고지 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진다. 화력에 열세를 보이던 중공군은 야간에 공격을 감행해 9사단이 방어하는 395고지를 점령했고 밀려난 9사단은 신속하게 예비대를 동원, 반격에 나서 고지를 재탈환 하기를 반복했다. 395고지에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투가 벌어졌다. 총성과 포격이 멈춘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을 만큼 치열한 공방이 계속됐다. 당시 9사단장 김종오 장군과 주요 지휘관들은 395고지 쟁탈전에서 적절한 시기에 강력한 예비대를 투입하는 등 효율적인 부대 운영과 작전을 펼쳤고 전체적으로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갔다. 395고지에서는 12차례의 고지 쟁탈전이 벌어졌고 7번이나 고지 주봉의 주인이 바뀌는 혈투가 벌어졌다. 11, 12일 이틀동안은 395고지 주봉을 차지한 9사단의 방어전이 진행됐다. 9사단의 계속된 방어에 중공군은 많은 병력을 잃었고 화력에서도 유엔군에 열세를 드러냈다. 결국 9사단은 395고지 북쪽의 낙타능선상의 전초진지를 탈환하면서 중공군을 완벽하게 몰아내는데 성공하며 백마고지 전투의 신화를 만들었다. △백마고지 전투 승리 요인=9사단은 1951년 8월부터 8주동안 국군 사단 중 처음으로 미 제1군단이 주관한 FTC(the Field Training Center)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이를 통해 지휘관들의 부대 지휘역량이 크게 강화됐고 전투원들의 전투수행능력도 높아졌다. 또 사단 자체 교육훈련도 꾸준히 진행했다. 백마고지전투 승리는 유엔군의 막강한 화력 지원과 함께 9사단 지휘관들의 신속한 예비부대 투입 등 탁월한 부대지휘, 전투원들의 전투수행능력 등이 맞물리며 중공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 끝내 백마고지를 지켜낸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물론 백마고지를 지켜내야 한다는 부대원들의 불굴의 투지도 한 몫한 결과였다. △집중된 화력과 병력…너무 컸던 피해=국군과 유엔군은 열흘 동안 이어진 395고지전투에서 무려 22만여발의 포탄을 발사했다. 중공군도 5만5,000여발의 포탄을 395고지에 퍼붓는 등 피아간 총 28만여발의 포탄이 집중 사용됐다. 유엔군은 9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항공기를 750여회 출격시키는 등 395고지 사수에 집중했다. 치열한 백병전과 함께 수십만발의 포탄이 395고지를 타격하자 고지의 수목은 사라졌고 하얗게 된 민둥산의 모습은 흡사 하얀 말이 누워있는 것 처럼 보였다. 이에 국군은 이때부터 395고지를 백마고지로, 9사단은 백마부대로 부르게 됐다. 당시 전투에서 9사단은 3,500여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중공군은 무려 1만4,000여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백마고지 전투로 중공군 제38군 예하 3개 사단은 와해됐다. △기억해야 할 백마고지전투=휴전선 남쪽, 철원읍 산명리에는 백마고지전투를 기리는 백마고지 전적지가 조성돼있다. 전투 승리를 기념하는 전적비와 충혼비, 위령비, 백마고지전투 현황 등이 기록된 기념관, 대형 태극기 계양대 등이 설치돼있다. 전적지에서는 서쪽으로 백마고지와 함께 드넓은 철원평야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백마고지 전적지를 찾은 관광객과 모내기에 나선 농부들, 불과 수㎞ 거리의 DMZ초소의 모습이 교차되면서 평화는 아직 멀게만 느껴진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름없던 395고지에서 적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우리 군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잊지 말아야 할 이유다. 강원일보=김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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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22 16:11

[한국전쟁 정전 70년] 50만 신병 배출한 제주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을 빼앗긴 정부는 ‘1·4후퇴’를 통해 부산으로 피난했다. 이후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정부는 전선에 안정적으로 병력을 투입할 수 있도록 장병들을 훈련할 공간이 필요하다고 판단, 1951년 3월 21일 대구의 제25연대를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로 옮겨 육군 제1훈련소를 설치했다. 이후 육군 제1훈련소는 1956년 문을 닫을 때까지 5년간 50만 장병을 육성, 서울 재탈환을 비롯한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후방 핵심 전략기지가 된 육군 제1훈련소 최초 모슬포에 설치된 육군 제1훈련소는 전쟁으로 인해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을 짓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천막으로 막사를 대신하면서 거대한 천막도시와 같은 모습이었다.훈련소의 면적은 198만㎡(약 60만평) 규모로 모슬포 남쪽에 본부가 있었고 보성리와 인성리 방면에는 연대들이 자리잡았다. 그 사이에 공병대와 헌병대, 정훈부, 통신대, 하사관학교, 병참대가 들어섰다. 모슬포에 육군 제1훈련소가 들어선 것은 이 지역이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가 중국 본토 침공을 위한 중간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1931년부터 군사기지가 설치됐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미군에 의해 일제들의 무기는 해체됐지만 각종 시설들은 그대로 사용되면서 1946년에는 조선경비대의 주둔지가 됐고, 이후 육군 제1훈련소로 사용됐다. 치열해지는 전쟁으로 인해 사상자가 늘어나면서 부족해진 병력을 빠르게 보충하기 위해 당시 제1훈련소의 훈련기간은 12주에서 3주로 단축됐다. 훈련기간이 크게 짧아진 대신 훈련은 더욱 엄하고 혹독하게 진행됐다. 다만 모슬포는 땅은 넓었지만 훈련소로 운영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화산섬인 제주의 특성상 빗물이 고이지 않고 모두 지하로 흡수되면서 물이 부족했고, 바람이 많이 불어서 훈련이 쉽지 않았다. 당시 해군이 화순 항만대 해안을 통해 상륙함과 수송선을 운영하며 장병과 물자를 실어 날랐는데 연중 비바람이 심하다 보니 배가 다닐 수 있는 날이 90여 일밖에 되지 않아 신병과 훈련 장병 수송에도 지장이 많았다. 이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육군 제1훈련소는 1956년 1월 훈련소가 해체될 때까지 50만 명의 장병을 배출, 후방 핵심 전략기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현재 훈련소 정문 기둥과 지휘소, 의무대 등이 남아 있어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 이 곳에는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던 해병 3기생들이 훈련을 받았던 훈련소 병사 건물과 세면장, 사열대 등도 남아있다. 이 시설들은 등록문화제 410호로 지정됐다. 모슬포에 대규모 군사 훈련장이 조성되면서 피난민들도 훈련소 주위에 몰려들었고, 모슬포는 군사 도시로 자리를 잡았다. 훈련병들이 몰래 가지고 나오는 군복이나 양말 등의 군용물품들이 거래됐고, 모슬포 주민들은 삶은 고구마를 배고푼 훈련병들에게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모슬포 중심에 위치한 용천수인 신영물에는 피난민들이 물지게로 물을 길어다 사용했고, 인근 도로변에는 고구마와 보리떡같은 간식을 파는 즉석 판매장이 들어섰다. 신영수 취수장 인근 빨래터에서는 대정부녀회원들이 훈련병들이 쏟아낸 엄청난 양의 군복을 빨래를 돕기도 했다. 육군 제1훈련소가 후방 핵심 전략기지로 자리잡으면서 정부 고위 인사들과 장성들도 잇따라 방문, 훈련을 참관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을 비롯한 참전국 대표단이 수시로 모슬포를 찾았다. 모슬포에 위치한 대정고등학교 앞 너른 터가 ‘워커 운동장’으로 불리고 있는데 이는 워커 장군이 훈련소를 방문한 기념으로 붙여졌다. 공군사관학교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귀포시 대정읍으로 이전, 대정초등학교에 임시로 자리를 잡았다. 1951년 2월 1일부터 4월 23일까지 80여 일의 짧은 시간동안 운영됐음에도 공군 장교 후보생 1000여 명을 배출했다. 이를 기념해 대정초 교정에는 훈적비가 세워졌으며 주민들을 이를 ‘보라매탑’으로 부르고 있다. 육군 제1훈련소가 창설된 이듬해인 1952년에는 의무대와 후송병원을 맡았던 제98육군병원이 서귀포시 대정읍에 설치됐다. 당시 제주도민과 피난민을 치료하는 제주 유일의 3차 의료기관의 기능도 수행했던 이 병원은 총 50여 개 병동이 지어졌는데 1964년 3월 대정여자고등학교가 개교하면서 병동 건물들은 차례차례 철거되고 현재 본 건물 한 채만 남아있다. △훈련병들을 다독인 ‘강병대교회’ 육군 제1훈련소가 설치된 이후 치열한 전선에 투입될 장병들을 정신력을 강화하기 위한 교회가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건립됐다. 당시 훈련소장을 맡았던 장도영 장군은 강한 병사를 기르기 위한 취지로 교회에 ‘강병대(强兵臺)’라는 이름을 붙였다. 전쟁이 한창인 시기였기 때문에 전문 기술자가 아닌 국군 공병대가 건설한 이 교회는 제주 현무암으로 지어졌으며, 현재까지 그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제주지역 군사유적지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전돼 2002년에는 등록문화재 38호로 지정됐다. 예배당 595㎡, 교육관 51㎡로 전체 건물 면적은 646㎡ 규모다. 건립 당시에는 목재 골조 위에 함석 지붕을 씌웠지만 2006년 보수공사를 벌이면서 지붕과 교회 첨탑이 새롭게 단장됐다.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빠른 병력 수급을 위해 육군 제1훈련소는 훈련 기간을 12주에서 3주로 단축한 대신 엄혹한 훈련을 이어갔다. 혹독한 훈련에 심신이 지치고 연일 들려오는 전선의 소식에 극도의 두려움을 겪게 된 훈련병들은 강병대교회에 들려 마음의 안정과 용기를 가졌다. 제주로 피난을 온 피난민들도 강병대교회에 마음을 의탁하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도했다. 특히 강병대교회는 주민을 위한 교육 공간이자 대민봉사 기관으로도 활용됐다. 모슬포지역의 첫 유치원인 샛별유치원이 1952년 이 교회에서 태동했고, 인근의 모슬포 중앙교회와 모슬포 제일교회의 모태가 됐다. 고등교육을 받은 군인들은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연말이면 전쟁고아들을 위해 산타할아버지로 변신, 옷과 신발 등을 선물했다. 강병대교회는 전쟁이 끝나고 12년 후인 1965년 공군 8546부대로 편입돼 기지교회로 새롭게 발족됐다. 1966년에는 교회 부설 야간 중학교인 신우고등공민학교가 설립됐고, 1981년 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2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제주일보=김두영 기자 ※사진설명 -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남아있는 옛 육군 제1훈련소 정문 기둥. - 현재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해병대 제9여단 91대대 안에 위치해 있는 옛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 - 옛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 내부의 모습. - 육군 제1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장병들에게 대정 부녀회원들이 주먹밥을 배급하는 모습. (사진제공 김웅철 향토사학자) - 대정여자고등학교에 남아 있는 제98육군병원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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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08 14:48

[한국전쟁 정전 70년] 인천상륙작전, 빛과 그림자 (하)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 초반 전세를 순식간에 뒤집었으나, 인천 지역은 피해가 막심했다. 유엔군과 한국군이 전세를 뒤집기 위해 육·해·공의 병력과 화력을 총동원하면서 상륙지 월미도는 쑥대밭이 됐고, 인천 시내가 파괴됐다.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꼽히는 군사 작전의 이면은 지역 차원에서만 간간이 다뤄질 뿐이다. 전갑생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Archive Ⅱ)에서 발굴한 <사진 1>을 살펴보자. 인천상륙작전 당일인 1950년 9월15일 인천 월미도 동쪽 마을의 한 민가가 폭격을 맞아 불타고 있고, 소총을 든 유엔군 병사들은 수색 활동을 하는 듯한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사진 1>의 행간을 조금 더 읽어보자. 활활 타오르는 민가는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며칠 전 월미도 일대 공습에서 대대적으로 퍼부은 화염 무기 '네이팜(Napalm)탄'의 위력을 보여준다. 집에 난 불을 꺼야 할 집주인이 사진 속에서 보이지 않는 건 폭격으로 인한 희생 또는 피난으로 섬에 살던 주민들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문이 남는다. 정말로 전쟁 상황에서 피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을까.  ■단테가 그린 지옥, 월미도 인천상륙작전 당시 인천 지역 피해에 대해선 정부의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8년 '진실'로 규명한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 보고서와 미국, 프랑스 기자들이 쓴 한국전쟁 논픽션들을 종합했다. 상륙작전 닷새 전인 1950년 9월10일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미 해병대항공단 항공기들이 월미도 동쪽 지역에 세 차례에 걸쳐 95개(tank)의 네이팜탄을 투하하고, 육지를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유엔군은 9월13~14일 월미도와 인천항 등 시내 일대 함포사격과 공습을 감행하며 다음날 상륙을 개시한다. 월미도 동쪽엔 120가구 약 600명이 사는 마을이 있었다. 당시 월미도에 주둔한 북한군 추정 병력은 미군 기록상 1천명이었다. 한국군 참전자 회고록엔 4문의 고사포와 400여명의 병력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됐다. 월미도 주민 전모(당시 17세) 씨는 네이팜탄이 투하된 날 "폭탄이 떨어지자마자 불이 확 붙어 온 동네가 불바다가 됐다"고 증언했다. 주민 유모 씨(당시 27세)는 같은 날 새벽 집에서 잠자다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와 갯벌로 도망쳤다. 갯벌로 대피한 주민들은 미 항공기의 기총소사를 피하려고 서로에게 진흙을 발라줬다고 한다. 공습이 잠시 멈췄을 때 돌아온 마을은 화염에 휩싸이고 있었다. 유 씨의 시아버지는 머리에 파편 2개가 박힌 채 희생됐다. 집집이 희생자의 시체를 가매장했다. 폭격이 다시 시작되자 생존자들은 불타버린 집과 희생자들을 다 수습하지도 못한 채 월미도를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월미도에서 민간인이 최소 100명 희생됐다고 결론을 내렸다. 인천상륙작전 현장에 있던 프랑스 종군기자 앙리 드 튀렌(Henri de Turenne)이 쓴 당시 르포기사가 '한국전쟁통신'(2012·눈빛)에 실려 있다. 그는 월미도의 모습을 "정녕 단테가 그린 지옥이었다"고 묘사했다. "항만 전체가 을씨년스런 자줏빛으로 환하게 불타올랐다. 바다와 하늘은 피처럼 검붉었다. 몇 시간 동안 끊임없이 쏘아 대는 함포들이 모든 함정을 뒤흔들었다. (중략) 코세어 전투기들은 우리 전방 200m 앞 해안까지 네이팜탄을 끊임없이 퍼부었다. 그 거대한 불기둥을 치솟게 하는 포격은 어둠 속에서 험상궂게 일그러진 얼굴들을 환하게 비춰 주었다." 인천 시내 폭격 피해도 컸다. 전갑생 연구원이 미군 자료 등을 발굴·분석해 쓴 '인천과 한국전쟁 이야기'(2020·글누림)를 보면 인천 시내 폭격은 9월7일부터 21일까지 이어져 시내 곳곳이 완전히 파괴됐다. 특히 유엔군 상륙 직전인 14일 오전 5시 55분부터 월미도와 인천 일대 59.8시간 동안 폭격 작전이 전개돼 폭탄, 네이팜탄, 기총소사가 78차례 진행됐다. 또 1000-1B 범용폭탄 100개가 투하되고 115개의 로켓 공격이 이뤄졌다. 이어 15일 오후 5시 5분 로켓함 3척이 20분 동안 6천여 발의 로켓을 인천으로 발사했다. 이 기간 인천 지역 인명 피해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다. 전갑생 연구원이 NARA에서 발굴한 1950년 9월15일에 촬영된 <사진 2> 속 건물들이 불타고 무너진 인천 시내 모습이 당시 피해 상황을 가늠하게 한다. 앞서 소개한 '한국전쟁통신'의 9월16일 르포기사를 다시 인용해본다. "섬과 내륙을 잇는 인천은 여전히 연기가 치솟는 죽음의 도시였다. 담배공장은 엄청난 화염에 휩싸여 타오르고, 그 화염 기둥은 30m 높이로 치솟아 지독한 악취를 퍼트렸다. 한 청년이 끔찍한 부상을 입은 할아버지를 손수레에 싣고서 황량한 대로를 걸어 내려왔다."  ■민간인 희생은 예상됐다 인천상륙작전 직전 월미도와 인천 일대 폭격은 초토화 목적의 '전략폭격'이었다. 여러 정황상 유엔군은 월미도 일대 민간인 거주지와 인천 시내 민간시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인천항은 1945년 해방 직후부터 1949년 철수하기 전까지 미군의 군수 보급 통로이었고, 부평에 군수보급기지(Army Service Command 24th Corps·현 캠프마켓)가 있었다. 당시 시가지 지도와 정밀한 항공사진도 확보하고 있었다. 월미도에도 한국전쟁 전까지 미군기지가 있었다. 폭격 피해를 본 월미도 주민들은 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동네는 완전히 무너졌지만, (전쟁 전부터 있던) 미군 부대 막사는 폭격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인천상륙작전은 북한군에게 낙동강 전선까지 밀린 유엔군과 한국군이 전세를 일거에 역전해 전쟁을 종식하기 위한 총공세였다.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유엔군 총사령관이 병사들에게 "늦어도 크리스마스는 고향에서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한 이유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얼마나 화력을 쏟아부었는지 낙동강 전선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올 정도였다. 데이비드 핼버스탬이 쓴 한국전쟁 논픽션 '콜디스트 윈터'(2009·살림)를 보면, 낙동강 전선을 지킨 월튼 워커(Walton H. Walker) 미8군 사령관은 "월미도와 인천에 있는 애송이들을 상대하느라 우리보다 더 많은 탄환을 썼다. 우리는 적의 지상 병력 90%를 감당하면서도 그만한 지원을 못 받았다"고 했다. 인천 앞바다는 조수 간만의 차이가 심한 갯벌 지대로 상륙작전을 감행하기엔 악조건이 많았다. 월미도와 인천 시내 일대 대규모 전략폭격은 상륙작전의 '불확실성'을 모조리 제거하기 위한 '절멸 작전'이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악마의 무기라 불리는 네이팜탄 투하가 연결된다. 네이팜탄은 알루미늄, 비누, 팜유, 휘발유 등을 섞어 젤리 모양으로 만든 네이팜을 연료로 하는 무기다. 3천℃의 고열을 내면서 반지름 3m 이내를 불바다로 만든다. 전쟁역사가 아라이 신이치(荒井信一)는 '폭격의 역사'(2015·어문학사)에서 "도시 소이탄(네이팜탄) 공격의 주된 목적 중 하나는 전시 생산을 지탱하는 노동력 그 자체의 직접적인 파괴"라며 "공업 노동력, 즉 생산과 관련된 민간인의 붕괴에는 노동자뿐 아니라 그 가족과 이웃을 불태워 버리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고 했다. 전갑생 연구원은 "유엔군은 인민군 치하에 있던 인천 지역의 모든 주민을 사실상 적으로 간주했고 민간의 피해를 '부수적 희생'으로 봤다"며 "민간인은 전쟁 중 공격의 대상이 돼선 안 되는 헤이그협약 등 국제규범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경인일보/박경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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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24 15:24

[한국전쟁 정전 70년] 인천상륙작전, 빛과 그림자 (상)

인천상륙작전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 버린 한국전쟁 초반 전세를 순식간에 뒤집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판도를 바꾼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년 6월6일)에 비견될 만큼 성공적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질퍽대는 갯벌로 둘러싸인 악조건의 인천으로 대규모 병력이 상륙, 낙동강 전선에 집중한 북한군의 허를 찌른다는 작전 구상은 대담함을 넘어 무모해 보였다. 그 난관을 돌파한 상륙작전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총반격하는 발판이 됐고, 이후 한국전쟁을 상징하는 전투이자 신화로서 지위를 굳건히 다졌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도 전쟁은 3년 가까이 이어진 후에야 정전에 이르렀다. 인천상륙작전 직후 펼쳐진 전황이 한국전쟁을 교착 국면에 빠지게 하면서 상륙작전의 성공을 퇴색시키기도 했다. 상륙작전 전후 민가와 시가지를 향한 대대적 공습으로 월미도와 인천 도심은 만신창이가 됐다. 인천 지역의 피해에 대해선 다음 하(下)편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압도적 상륙작전 1950년 9월15일 새벽 감행된 인천상륙작전은 함대 261척, 미 해병대 1개 사단과 육군 7개 사단을 비롯한 총 7만5000명의 병력이 투입된 육·해·공 입체 작전이었다. 미 해군은 20㎞에 걸친 반원형 대형을 펼쳐 200여척이 넘는 함선을 서서히 전진시켰고, 상륙정(LST)들이 탱크와 해병대를 싣고 일렬로 월미도를 향했다. 프랑스 종군기자 4명의 기록을 묶어 낸 '한국전쟁통신'(2012·눈빛)에 실린 르포기사의 한 장면을 보자. "6시 30분, 큰 상륙정들이 섬의 갯벌에 앞문을 들이대고, 적군의 전방에서 아무런 저항도 없는 것에 다소 당황한 해병대를 토해 냈다.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아홉 대의 불도저 탱크들이 포로의 패인 구덩이 속에서 거대한 벌레처럼 비틀대며 숲으로 포를 쏘았다. 삼십 분 만에 해병대는 섬의 정상을 차지했고, 연대장은 미국 성조기를 꽂았다." 미 해병 제5연대 3대대가 이날 오전 6시 33분 월미도(그린비치)에 상륙했을 땐, 이미 섬은 항공모함 탑재기 코르세어(Corsair)가 퍼부은 공습으로 불타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월미도에서 60㎞ 떨어진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전투기들은 월미도 위에 파리 떼처럼 몰려들었고, 모든 함정에서 끊임없이 함포를 퍼부어 "땅을 말랑말랑하게 했다"고 '한국전쟁통신'은 전한다. 미 해병대가 큰 저항 없이 상륙 3시간 만에 월미도를 완전히 점령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이어진 상륙은 밀물을 기다리다 이날 오후 5시 30분부터 인천 북서쪽 해안(레드비치·현 동구 만석동)과 남서쪽 해안(블루비치·현 미추홀구 용현5동)에서 감행했다. 미 제5연대 1·2대대는 레드비치로 상륙해 응봉산과 항만시설을 확보했다. 미 제1연대는 블루비치로 상륙해 수봉산을 차지했다. 16일부터 월미도와 인천항으로 한국군과 유엔군 지원부대들이 차례로 상륙했으며, 인천 시내에서 적군 소탕 작전을 벌여 일사천리로 인천을 탈환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에 주둔하던 북한군 병력 2천여명을 전멸했다. 18일 오전 인천시청(현 중구청) 앞 광장에서 인천시장 취임식이 열렸는데, 인천시장을 지냈던 표양문(1907~1962)이 임시시장을 맡았다. 9월17일 오전 5시 45분께 미 해병대는 부평 원통이고개(현 인천도시철도 1호선 부평삼거리역에서 동수역 일대)에서 경인가도를 통해 인천으로 진입하던 북한군 전차부대를 기습해 서울 가는 길목을 확보했다. 한국군 해병대 제3대대는 경인선 부평역 일대에서 북한군과 교전을 벌여 김포비행장으로 향하는 미 해병 제5연대에 길을 터줬다.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는 9월19일부터 한강을 건너 서울 진입을 시도했으나, 시가지를 요새화한 북한군의 방어망을 쉽게 뚫지 못했다. 유엔군과 한국군이 교대로 투입돼 북한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압도적 전력으로 밀어붙인 인천상륙작전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흘렀다.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지 13일만인 9월28일 한국군과 유엔군은 마침내 서울을 수복했다. △기습작전은 아니었다? 인천상륙작전을 기습 작전으로 보긴 어렵다. 북한은 한국전쟁 초기부터 미군이 한반도 중간 지점에서 상륙 또는 공수작전을 펼칠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박태균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가 쓴 '한국전쟁'(2005·책과함께)에 실린 소련의 한 암호전문을 보면 1950년 7월 김일성은 미군이 군대 후방 또는 북한 쪽 항만에 상륙·공수 작전을 할 위험성이 있다며 스탈린에게 무기를 신속하게 공급해달라고 요청한다. 중국은 상륙작전 대상 지역이 인천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북한에 경고하기도 했지만, 낙동강 전선이 고착화하면서 북한군은 인천에 추가로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미 합동전략계획단은 9월 상륙작전 대상지로 인천, 군산, 주문진, 아산만 등을 검토했다.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유엔군 총사령관은 대부분 참모가 반대하는 인천을 고집했다. 데이비드 핼버스탬이 한국전쟁에 관해 쓴 '콜디스트 윈터'(2009·살림)에서는 맥아더의 당시 구상에 대해 "거의 모두가 인천은 해군을 싫어하는 사악한 천재들이 만든 도시라고 생각했다"고 평했다. 인천 앞바다는 최대 9m까지 치솟는 조수 간만의 차로 상륙 시간이 제한됐고, 썰물 때는 1~4㎞의 갯벌을 걸어야 했다. 상륙지점인 월미도는 항구 한가운데에 있어 수비대를 주둔시켜 방어하기 적합할 뿐 아니라 상륙 지역을 둘로 나누게 했다. 상륙작전의 악조건은 다 갖춘 셈이다. 그럼에도 인천은 상륙지로 낙점됐다. 인천은 서울이 가깝고 인천항, 김포비행장, 경인선 등 인프라를 갖춘 군사 요충지였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기 위한 교두보이면서도 낙동강 전선을 연결하는 북한군의 보급로와 퇴로를 차단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예상대로 인천상륙작전 이후 낙동강 전선의 한국군과 유엔군이 대구, 김천, 대전, 수원을 거쳐 북상하며 총반격에 나섰다. 서울 수복이 13일이나 걸리면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 빛바랜 측면도 있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을 시도하는 동안 서울과 중부지역 북한군은 후퇴해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벌었다. 박태균 교수는 '한국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 후 열흘 남짓한 시간이 없었다면 북한군이 만주에서 전열을 정비해 중국군과 함께 다시 진격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결국 유엔군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라고 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이어진 한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은 전쟁을 끝맺지 못했다.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미국 대통령은 서울 수복 다음날인 9월29일 미군의 38선 돌파를 승인하면서 만주 등 국경 지역에는 한국군만 진출하게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중국, 소련과 직접 충돌하지 말자는 차원이었다. 하지만 맥아더 사령관은 유엔군을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북진시켰고, 결과적으로 중공군의 참전을 불렀다. 맥아더 사령관은 병사들에게 "빠르면 추수감사절, 늦어도 크리스마스는 고향에서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장진호 전투 등 미군의 막대한 희생과 1·4후퇴가 뒤따랐다. 한국전쟁 연구자인 전갑생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은 "인천상륙작전이란 대규모 작전을 기획한 목적은 애초 미 국무부 원칙대로 38선까지 밀어 올리고 전쟁을 끝내고자 했던 것"이라며 "38선을 중심으로 정전 체제로 가기 위한 작전이었으므로 북진 이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 의미가 퇴색됐다"고 말했다. 경인일보=박경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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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10 14:52

[한국전쟁 정전 70년] 낙동강 방어선 전투(하)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북한군 9월 공세의 목표는 Y선(왜관-다부동-영천-기계-포항)이었다. 이를 위해 8월 31일 X선(왜관-남지-마산)의 마산 정면을 먼저 때렸다. 국군과 유엔군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리자 북한군 제2군단은 9월 2일 왜관·다부동, 신령·영천, 안강·포항에서 맹렬한 공격을 감행했다. 낙동강 방어선의 붕괴 위기가 또 다시 닥쳤다. 유엔군의 예상을 뛰어넘는 규모였고 격렬했다. 이때 북한군 작전방침은 “낙동강 일대에 압축된 국군과 유엔군을 두 개의 강력한 타격집단으로 대구 및 영천 일대에서 포위·소멸하여 최종목표인 부산을 점령한다”였다. 김일성도 8월 22일에 전선사령부를 방문해 ‘공세준비에 총력을 경주할 것’을 독전했다. 북한군은 9월 중순까지 공세를 계속했지만, 국군과 유엔군은 끝내 방어선을 지켜내 인천상륙작전과 북진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루 동안 미군 1245명 손실 악몽의 날 왜관·다부동은 미 제1기병사단이 국군 제1사단으로부터 방어지역을 인수받아 대구방어를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북한군 제1·3·13사단 등 3개 사단 역시 대구 점령을 위해 총공세를 감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아 모두가 운명의 전투를 피할 수 없었다. 특히 수암산 일대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됐다. 8월 공세 때와 비슷했다. 8월에는 국군 제1사단이 17일 동안의 혈전으로 방어진지를 지켜냈지만, 화력과 기동장비에 의존하는 미군은 단 3일 만에 진지를 북한군에게 내어 주고 4㎞ 후방으로 철수했다. 이제 대구까지 거리는 불과 10㎞였다. 미 제8군에게 9월 5일은 악몽의 날이었다. 이날 하루 미군은 전사 및 행방불명 724명, 전상 521명 등 1245명의 인원 손실이 발생했다. 제8군사령부는 낙동강 방어선을 포기하고 ‘데이비드슨 선’으로 철수할 것을 검토했다. 그러나 낙동강 방어선 포기는 인천상륙작전 자체를 불가능하게 할 우려가 있었다. 제8군사령부는 어떠한 수단을 강구하더라도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내야만 했다. 주 지휘소와 육군본부를 부산으로 이동시키고 대구에는 전방지휘소만 운용했다. 북한군 공격도 그때쯤 한계에 다다랐다. 유엔 공군의 폭격으로 보급 및 병력 부족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집요한 공격을 감행하던 북한군 공격이 12일 무렵 시들해지면서 대구는 지켜졌다. △영천 함락, 낙동강 전선 전체 위기 봉착 9월 들면서 북한군은 다부동을 통한 대구정면보다는 오히려 영천 돌파에 더 치중했다. 당시 영천에는 국군 제2군단의 제6사단과 제1군단의 제8사단이 북한군 제2군단의 2개 사단(제8·15사단)과 대치했다. 2일 밤 북한군 제8사단이 영천 서북쪽의 신령 일대에서 국군 제6사단을 공격하고 북한군 제15사단은 보현산 일대에서 국군 제8사단을 공격했다. 전세가 불리해진 국군 제8사단은 다음날 기룡산 일대로 철수했다. 이 무렵 국군 제8사단 방어선 오른쪽인 운주산 일대는 수도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수도사단이 북한군 제12사단의 공격을 받아 남쪽으로 철수하게 되자, 국군 제8사단의 오른쪽에 약 14㎞의 간격이 형성되었다. 이때 북한군 김무정 제2군단장은 “제12사단은 안강을 돌파했는데 제15사단은 왜 영천을 돌파하지 못하느냐”고 질책하면서 박성철 제15사단장을 해임하고 조광렬 소장으로 교체했다. 박성철 소장이 지휘한 북한군 제15사단은 개전 이래 동락리와 화령장에서 연거푸 국군에게 참패를 당한 부대다. 사단장이 교체된 북한군 제15사단은 국군 제8사단 오른쪽에 형성된 14㎞의 간격을 이용해 아무런 저항 없이 전선 후방으로 침투했다. 이어서 제15사단은 5일 새벽 1시쯤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국군 제8사단을 기습했고, 다음날 새벽 영천을 점령했다. 전광석화였다. 영천은 중앙선과 동해남부선 철도, 대구(34㎞), 포항(40㎞), 경주(28㎞) 등으로 통하는 전략적 교통의 요충지였다. 북한군의 영천 장악은 아군의 중·동부전선 양단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낙동강 전선 전체가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영천을 점령한 북한군 제15사단의 예상 진출로는 대구로 진출하여 제8군사령부 후방을 차단하거나 경주로 진출하여 부산으로 직행하는 것이었다. 북한군이 어느 방향으로 진출하든 유엔군 입장에서는 위기였으나 제15사단이 경주-부산 방향으로 진출할 경우에 유엔군은 다소의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북한군이 하양-대구 방향으로 진출한다면 대구가 포위되어 제8군의 방어선이 연쇄적으로 붕괴될 위험이 있었다. △북한군의 패착에서 이끌어낸 승리 국군 제1군단과 제2군단의 경계지점인 영천이 돌파되자, 육군본부는 제1군단 소속의 제8사단을 제2군단으로 전환하여 영천 일대의 지휘체제를 정비했다. 위기에 직면한 유재흥 제2군단장 은 예하의 백선엽 제1사단장과 김종오 제6사단장을 소집해 각 사단이 1개 연대씩 차출하여 영천으로 증원하도록 했다. 당시 제1사단과 제6사단도 방어에 급급한 상황이었으나 대안이 없었다. 결국 제1사단 제11연대, 제6사단 제19연대가 영천 지역으로 급파되어 북한군의 대구 진출에 대비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북한군 제15사단은 대구가 아닌 경주 방향으로 진출했다. 때마침 국군 제8사단 제21연대는 적 후방에 고립된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영천 북방의 견부진지(전방 및 측후방을 통제할 수 있고 적의 진출에 있어서 반드시 확보되어야 하는 요충지)를 고수하면서 돌파구 확대를 막고 있었다. 제6사단도 북한군 제8사단의 공격을 계속 격퇴시키고 있었다. 그러자 김무정 북한군 제2군단장은 이번에는 북한군 제8사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제8사단이 신령을 돌파하지 못해 영천을 점령한 제15사단의 우측면이 노출되고 있다”고 질책했다. 그러나 국군 제6사단은 끝내 북한군 제8사단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에 따라 상황은 오히려 후방 깊숙이 침투한 북한군 제15사단이 국군에 의해 포위된 상황으로 바뀌었다. 반격태세를 가다듬은 국군 제2군단은 제8사단과 신편된 제7사단을 투입하여 9월 8일 오후 영천을 탈환했다. 9월 공세 당시 영천지역 전투는 8월 공세의 칠곡 다부동 전투와 함께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린 낙동강 방어전의 분수령이었다. 8월 초에 낙동강 선까지 진격한 북한군은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한다는 목표 아래 총공세를 감행했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의 낙동강 방어선은 견고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8월 1일~9월 15일까지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을 물리치고 인천상륙적전과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매일신문=이영욱 기자 △도용복 ㈜사라토가 회장이 말하는 다부동 전투 전 세계 190여개국을 다닌 오지여행가로 유명한 도용복(81·사진) ㈜사라토가 회장은 건강하고 활기찼다. 대구 대백프라자 카페서 만난 그는 지인 전시회를 관람하고, 그랜드호텔에서 특강을 하기 위해 대구에 왔다고 했다. 도용복 회장은 음악을 사랑하고, 여행을 좋아하는 성공한 사업가로 알려져 있지만, 어린 시절 다부동 전투 현장에서 생사를 오가는 줄타기를 했다. 국민학교 1학년 여덟 살 때였다. "인민군 내려온다는 소식에 피난길에 올랐고, 전쟁통에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저와 어머니, 동생 등 네식구는 우여곡절 끝에 칠곡 다부동 고개를 넘었는데, 그때가 다부동 전투가 벌어지기 불과 며칠 전이었을 겁니다." 어린 나이에 안동서 걸어 다부동까지 온 도용복 소년과 동생들은 배가 너무 고팠다. 어머니도 피난 온 타지서 자식을 챙겨 먹일 마땅한 방도가 없었다. 그때 귀가 번쩍하는 희소식 들렸다. 국군의 총알 나르는 일을 하면 흰쌀밥을 고봉으로 준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소년은 자기보다 큰 지게로 전투가 벌어지는 다부동 고지로 총알을 날랐다. 소년은 고지를 오가면서 군인과 민간인이 죽는 모습을 수없이 봤다. 어느 날 같이 일하던 또래 두 명이 보이지 않았다. 어른에게 물어보니 인민군 총에 맞아 죽었다고 했다. 무서웠다. 그만하겠다고 했다. 도 회장은 "살면서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아세요? 죽음? (고개를 가로저으며) 배고픈 겁니다. (총알 나르는 일을) 안 한다고 작심하고도 아침이 되면 쌀밥 유혹에 또 가는 겁니다"라고 회상했다. 당시 소년에겐 죽음의 두려움보다 배고픔의 고통이 더 컸다. 아침 식전 탄약통 2상자를 왕복 3~4시간 거리의 고지에 나르고 오면 정말 혼자서는 다 못 먹을 양의 쌀밥이 나왔다. 집에서 굶고 있을 어머니와 동생 생각에 호박잎을 따 주먹밥 두덩이를 먼저 만들어 챙겼다. 그렇게 소년은 15일 정도 죽음을 무릅쓰고 다부동 고지에 총알과 전쟁물자를 날랐다. 도 회장은 "(살면서) 무섭고 겁나는 게 없다"고 했다. 어린 시절 사선을 넘나들었던 경험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했다. 특히 그는 참전국에 각별한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참전국 용사들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뜻을 담아 UN참전국송을 만들었고, 꿈의 공연장 미국 카네기홀 무대에서 한국전쟁 전사자를 위한 레퀴엠(진혼곡)을 한미 합창단과 함께 불렀다. "우리 위정자들은 不經一事 不長一智(불경일사 불장일지: 한 가지 일을 거치지 않으면 한 가지 지혜가 자라지 않는다) 구절을 꼭 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6·25전쟁을 겪었지만 교훈을 얻지 못하면 같은 불행은 반드시 다시 오기 때문입니다." 매일신문=이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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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27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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