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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의 비밀]나무·흙·돌 '천연재료'로 지어 온화하고 편안

한옥은 오랫동안 소외돼 있었다. 서양식 건물에 밀리고, 좁고 추워서 살기 불편하다는 이유 등으로 우리 주거 문화의 중심에서 멀어져갔던 것이다. 하지만 전주 한옥마을 등과 같이 버림받고 있던 한옥이 전국 곳곳에서 새롭게 되살아나고 있다. 한옥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고 한옥 본래의 좋은 점을 살릴 수 있다면, 한옥은 한국인의 삶과 정서를 담는 공간으로 새롭게 와 닿을 수 있다."전통적인 한옥은 천연재료로만 짓습니다. 기본 골격인 나무에서부터, 흙과 돌 또한 자연물입니다. 벽과 바닥에 사용되는 석회 또한 자연에서 얻은 것이고 섬유질이 풍부한 다시마를 첨가해 갈라지지 않게 하는 것 또한 자연이 준 재료의 성질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고요."이택근씨의 설명은 더 나아간다. 황토, 창호지, 구들, 콩댐(나무에 콩기름을 먹이는 것) 등으로 구성되는 한옥은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새집 증후군' 과도 거리가 멀다. 못 하나 쓰지 않고 돌 위에 그냥 얹은 기둥이 그렇고 그 위에 짜임으로 올라가는 부재(구조물의 뼈대를 이루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는 여러 가지 재료)들 또한 자연에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도편수 이택근 씨가 설계한 어느 집 마당에는 채송화가 피었고 또 다른 집의 뒷마당에는 자귀나무가 꽃을 틔우고 있었다. 아직까지 낮잠을 자는지 꽃소식 잠잠한 배롱나무 가지 사이로 하늘을 향해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처마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도 한옥의 비밀이 숨어있다. 처마와 처마가 일정한 각도로 만나는 부분에 경계를 이루듯이 추녀 위에서 양쪽 지붕이 만나면서 생기는 선을 추녀마루라고 한다. 이 추녀와 추녀마루의 곡선이 물매라는 과정을 통해서 결정이 난다는 것. 지붕이 기울어진 정도를 물매라고 하는데 나무의 작은 조각들과 황토 등을 섞은 적심(피죽이라고도 함)으로 강회다짐이 등의 여러 과정을 거친 다음에 기와가 올라가야 물매가 완성이 된다고 한다. "요즘 새로 지어지는 한옥들을 보면 난방에 대한 걱정 때문에 마감할 때 이 과정에서 흙이 들어가지 않고 보온단열재가 들어가고, 현대식 자재가 들어가요. 생략되는 건 이것만이 아니에요. 전통 기법으로 벽을 만들면 황토 벽돌을 쌓거나 대나무 등 나무를 엮고 흙을 발라서 세우는데 이것을 욋대를 엮는다고 해요. 이 욋대를 엮는 과정은 번거롭고 어려워도 벽을 여러 겹 쌓고 마감을 하는 거니까 단열에도 도움이 되고요." 추울 때 하나 입는 것보다는 여러 겹을 입는 게 더 따뜻한 것과 같은 원리라고 덧붙인다. 자식 자랑하는 아버지처럼 이곳저곳으로 이끌던 그가 이 대목에선 목소리가 바뀐다. "건축비를 줄이기 위해 한옥의 전통기법들이 생략되고 과정이 지나치게 단순화 되는 것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바람직하지 않아요." 그가 최대한 전통방식을 따르고자 하는 이유는 사람 때문이다. 한옥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옛사람의 숨결을 제대로 느끼고 가기를 바라는 마음. 그가 지은 공간에 머무는 사람들이 자연을 누렸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택근 씨는 자신이 세운 원칙 안에서 충분히 자유롭다. "한옥마을에 현재 12평 정도 되는 집을 하나 짓고 있어요. 그 작은 규모로 무슨 집이 되겠느냐고 의문을 품겠지만 교동에서는 드문 맞배지붕을 올렸어요. 대지가 극히 제한적인 지역에서는 효율적인 건축구조라 생각했거든요."한옥은 기와집과 맞배집, 우진각집이 대부분이지만, 너와집, 굴피집, 귀틀집, 움집 등 여러 가지 지붕을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교동지역은 팔작지붕을 선호한다는 것. 대지의 협소함이나 건축구조의 다양함 등을 생각했을 때 여러 가지의 건축기법을 통해서 다양한 구조의 한옥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저는 똑같은 집을 짓지 않아요. 방을 줄이고 아파트의 베란다처럼 누마루를 만든달지, 'ㄷ'자형의 집을 짓는 달지, 전통기법을 활용해서 집마다 특별한 것들을 하나씩은 넣으려고 노력합니다. 전통기법을 따르되 표현은 자유롭게 하자는 거죠. 우리 조상들도 그랬어요. 휘어진 나무들을 그대로 사용해서 기둥으로 쓰기도 하고 다른 부재로 활용을 해왔거든요. 요즘 사람들의 사고가 자유분방하다고 하지만 그런 면에서 보면 조상들이 훨씬 더 자유로웠죠. "그와 내가 앉아 있는 대청마루 위로 바람이 지나간다. 비 오는 날 마루에 앉아 마당으로 떨어지는 처마 끝 빗소리가 좋다는 그를 어디선가 또 찾는 모양이다. 그가 타고 온 스쿠터 앞에서 선 채로 인사를 나눴다. 목수들의 손길이 다시 바빠지겠다.

  • 주말
  • 기고
  • 2013.06.28 23:02

[전주 한옥마을 도편수 이택근]"오래오래 손때 묻히며 살고 싶은 집 짓는 게 내 일"

날씨는 덥고 하늘은 흐린 유월의 어느 날. 꽃을 피워 올리느라 바쁜 능소화 아래에서 그를 기다렸다. 어디선가는 한창 공사를 하고 있고 손 잡은 연인들은 한가롭게 거니는 전주시 한옥마을. 할 일 없는 사람처럼 남의 집 담 밑을 몇 분쯤 서성였을까. 작은 오토바이를 타고 그가 나타났다. 일을 하다가 잠시 빠져나왔다면서 웃는 그는 한옥을 짓는 도편수 이택근 씨. 그가 내부 공사를 도왔다는 한 민박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마주 앉았다. 불과 몇 분 사이에 전화기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그를 찾았다. 그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한옥마을에 그의 손길과 발길을 기다리고 있는 집이 열 채 가까이 된단다."전주로 다시 돌아온 것은 서른 살 때였으니까 1993년 무렵부터였을 거예요. 군대를 제대하고 다른 일을 하다가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목수 일을 시작했습니다. 전주에 자리를 잡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20여 채를 새로 짓고 보수를 했어요. 목수 일을 시작한 후부터 지금까지 안 쉬고 다른 데 한눈 팔아본 적도 없어요." 서른 살에 한옥 짓는 일에 뛰어들었다면 그다지 빠른 편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어린시절부터 나무 냄새를 맡으며 자랐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목수였기 때문. 한옥마을에 자리 잡은 학인당에 그의 할아버지, 이만호 선생의 손길이 닿았다. 아버지 이존엽 선생 역시 모악산 자락에 앉은 대원사 대웅전을 중건할 때 현장 책임목수인 세화로 대물림을 했다. 이택근 씨는 3대 째 가업을 잇고 있는 것. 그런데 자세한 자료는 남아있지 않지만 그의 증조부도 목수였다고 귀띔을 해준다. "근거 자료는 없지만 증조부께서도 도편수였다고 들었어요. 아직 살아계신 어르신들도 그 사실을 확인해 주시기도 했고요. 집을 짓는 것은 목수이지만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주인이니까 그 집안 어디에게 목수 이름은 남아있지가 않잖아요. 저희 조부도 마찬가지예요. 조부가 지은 집이나 사찰 같은 건물들은 남아 있지만 기록들이 없으니까 안타까울 때가 있어요."그래서 그는 서른 살이 되기 전 잠시 한눈을 팔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해군에서 제대를 하고 방파제 공사를 할 때 물 속을 평탄하게 하는 산업잠수부로 일을 하며 위도, 왕등도 등을 떠돌며 객지생활을 했다. 하지만 고향이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리고 결국엔 목수로 그를 한옥마을에 들어 앉혔다. "한벽루 옆 철길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는데 철길 터널 안에는 총알이 많이 박혀 있었습니다. 일 삼아서 그 총알을 빼내려고 용을 쓰기도 하고 승암사, 좁은 목부터 기차가 천천히 들어오면 10대 후반에서 20대 정도 되는 청년들이 달음박질해서 기차에 올라타는 것을 구경하기도 했죠. 당시엔 무임승차를 해 서울로 다녀오는 것은 흔한 일이었거든요."어린 그에겐 교동 전체가 놀이터이자 앞마당이고 뒷마당이었다. 이제 이택근 씨가 뛰놀던 한옥마을이 그의 일터이자 삶터가 되었다. 그가 추억을 더듬거나 말거나 전화기는 끊이지 않고 울어댄다. 부드러운 인상에 깜빡 속을 뻔 했다. 전화기를 든 손이 나뭇등걸처럼 거칠고 투박하다. 한눈에 봐도 이 손의 주인은 부지런하고 고집스러운 사람일 것이라고 짐작이 될 만큼. "처음 아버지 밑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는 밑바닥부터 단계를 밟아서 배웠지만 지금은 현장에서 직접 몸을 쓴다기 보다는 설계를 하죠. 어떤 자재를 써서 어떤 기법으로 해달라, 여기는 어떤 마감재를 쓰고 어떤 포인트를 줘라, 서까래는 어떤 기법을 써라, 감독하고 세화, 부편수 등 각 현장마다 집을 짓고 있는 책임자들이 계시죠. 그런 분들과 의견을 나누고 현장을 살피는데 하루가 가요. " 나무를 다루어 집짓는 일로 업을 삼은 사람을 '목수' 또는 '목장'(木匠)이라 통칭하는데, 그 가운데 문짝반자난간과 같은 사소한 목공을 맡아하는 소목(小木)과 구분하여 따로 대목, 또는 도편수라고 부른다고 한다. 세상이 그에게 준 직함인 셈이다. 도편수는 건물을 설계하고 공사의 감리까지 겸하는 까닭에 그의 소임이 막중한 것은 당연한 일. 좋은 나무와 재료들을 선별할 줄 아는 것이 목수의 안목이라면, 사람을 알아보는 것 또한 도편수의 소임일 터. 그와 함께 10년 넘게 일 해 온 목수들만 헤아려도 20명에 이른다. "저와 같이 집을 짓는 목수들은 오랜 세월 한옥을 지어온 분들이에요. 자기 식구들 거느린 분들이죠. 모두 성품이 온화한 사람들이에요. 어느 일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집도 목수의 성품을 닮아요. 성격이 급하고 과격한 사람들은 나무를 다룰 때도 그렇게 다루거든요. 성격 급한 사람이 운전할 때 얼마 앞서 가지도 못하면서 경적만 요란하게 울려 대며 서두르기만 하잖아요. 그것과 같은 이치인 거 같아요."서두르지 않고 챙겨야 할 것들을 놓치지 않는 것이 그의 일이라는 이택근 씨. 그에게 물었다. 챙겨야 할 것들은 무엇이 있느냐고. 그는 망설임 없이 답을 주었다. 제대로 된 목수는 첫 번째로 부재를 아끼면 안 되고, 두 번째는 좋은 나무를 쓰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전통 한옥의 기법이 생략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만 지으면 예쁜 집이 지어진다고 웃는다. 그래서 그는 한옥을 짓는 동안은 집주인과 똑같이 생각하려고 애쓴단다. 집을 짓는 동안만큼은 자신이 집주인이라는 여기며 일을 한다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생각하는 예쁜 집에 대해. "집을 짓고 나서 그 집의 주인이 생활하면서 손때가 덧입혀지는 집들이죠. 제 손에서 끝나지 않고 살면서 쓸고 닦고 기름칠도 하고 그렇게 해서 다시 작품을 만들어가는 집.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어지는 집 말입니다."그가 매일 스쿠터를 타고 살피는, 공사 중인 한옥들을 둘러보다가 누마루가 한옥마을의 골목들을 내려다 보고 있는 집 앞에서 발길이 멈췄다. 집주인과 마주쳤기 때문이었는데 그녀는 한지공예가 김희자 씨였다. 1층은 한지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두고 2층은 손님들이 머물 수 있는 민박집으로 꾸밀 계획이라고 했다. 목공예 하시는 분께 출입문에 세울 장승도 받았다며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7월에 집이 완성되면 정원을 어떻게 가꿀까 고심 중이라고도 했다. 주춧돌이 놓이고 기둥이 세워지고 집이 형태를 갖추어 갈 때마다 그녀는 앞으로 이 집 안에 들여놓을 새로운 꿈을 매일 꾼다. 그가 바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쉴 새 없이 전화기 너머에서 그를 찾아대고 스쿠터 하나로 한옥마을을 종횡무진 누비는 이유도 알겠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어쩌면 다른 이의 꿈이 놓일 자리에, 그들이 쌓아갈 시간 아래 주춧돌을 놓는 일인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목수는 부지런하고 성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무 향이 베어있을 것 같은 그의 손이 말해주듯이.김정경 문화전문시민(방송작가)

  • 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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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6.28 23:02

김현두씨의 상징, 분홍트럭 '공간이'

김현두씨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키워드는 두 가지다. '건국청년'이라는 별명과 분홍색 커피트럭 '공간이'다. '건국청년'은 현두씨 스스로가 자신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이 별명은 김대중 대통령이 이야기했던 '제2의 건국'에서 얻어온 것이다. 현두씨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 바로 '공간이'다. 현두씨를 떠올릴 때 '공간이'를 빼고 생각할 수 없다. 현두씨는 분홍색 커피트럭 '공간이'에 앉아있을 때 가장 멋지다. 이 트럭은 현두씨가 처음 커피여행을 생각하면서 구입한 오래된 트럭이다. 지금은 이름이 바뀐 대우자동차에서 출시된 '라보(Labo)'라는 모델이다. 이미 단종된지 오래다."이 차를 폐차하지 않고 평생 간직할 거예요."'공간이'와 평생 함께 하겠다는 현두씨의 말이다. 그가 이토록 차에 애착을 보이는 이유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인생의 전환점에 함께 한 동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처음 핑크색으로 도색할 때부터 커피를 판매할 수 있도록 차량 곳곳을 개조한 일, 더불어 이 차에 묻은 도료 하나, 부품 하나까지 모두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낸 '작품' 이기 때문이다. "이 차가 오래된 차라며 바꾸라고 조언하시는 분들이 간혹 계시긴 하는데요. 제겐 이 차가 단지 자동차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이녀석 덕분에 전국을 여행했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어요. 얼마전엔 같이 배타고 제주도에도 다녀왔어요. 제 분신과도 같은 녀석이죠. 이런 녀석과 어떻게 이별하겠어요? 요즘은 저보다 '공간이'를 더 기억해주시는 분들도 많은데. 사랑할 수밖에 없는 녀석이에요."현두씨의 말이 흥미롭다. 자신의 말처럼 그는 앞으로도 '공간이'와 함께 할 계획이다. 어디서 무엇을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곁에서 '공간이'를 떼어놓을 생각이 없다. 혼자 떠나 더욱 외로운 여행, '공간이'야말로 그의 곁을 지켜주는 친구이자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비록 낡은 트럭이지만 앞으로 현두씨와 함께 삶의 소중한 순간들을 함께 기억할 수 있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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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6.21 23:02

김현두씨의 '커피여행'

누구에게나 원하는 삶이 있다. 여행을 하는 삶, 많은 것을 즐기거나 누리는 삶,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살아가는 삶 등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고 상상하고 또 꿈꾸는 삶이 있다. 그러나 이런 삶을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대개는 현실과의 타협(?)에 의해, 지금 눈앞에 놓인 어떤 것을 포기하며 살아간다. 떠나고 싶은 이는 오늘도 아침마다 넥타이를 목에 조여매고, 배우고 싶은 이는 오늘도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해 눈앞에 놓은 성과 앞에서 전전긍긍한다. 삶은 이렇게 이상과 현실의 간격을 메워내지 못한 채 또 하루 흘러간다. 오늘 소개할 김현두씨는 자신의 생각으로 현실을 바꿔낸 사람이다. 그에게는 남부럽지 않은 직장도, 미래를 촉망받는 능력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정해진 길을 거부했다. 아니, 운명이 그를 이끌었다고 보는 게 좋겠다.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손수 만든 분홍색 커피트럭 '공간이'와 함께 돌연 여행을 시작했다."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가 궁금했어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안정된 직장보다, 보장된 미래보다 제겐 그게 더 중요했어요."현두씨의 말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현두씨 삶의 버팀목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해, 현두씨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됐다. 그리고 '커피트럭을 타고 떠나는 여행'이라는 누구도 선택하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 택했다. △ '여행자'의 삶 함께 열어준 커피트럭 '공간이'그의 새로운 길은 우연히 본 책 한권에서 시작됐다. 일반 커피보다 훨씬 만들기 어려운 핸드드립커피만을 파는 어느 커피노점상 이야기를 담은 책이었다. 그는 책을 접하자마자 '이거다!'라고 생각했다. 퇴직금을 탈탈 털어 인천의 어느 중고차 거래소에서 오래된 트럭을 한 대 구매했다. 준비한 디자인에 맞춰 차에 색을 입히고 이곳에서 커피를 팔 수 있도록 개조했다. 이름도 붙였다. 이제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커피트럭 '공간이'의 탄생이다. 인생의 전환점이 된 커피트럭. 현두씨는 이 차를 타고 커피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아니, 커피트럭을 핑계삼아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그는 하나의 문화코드가 된 '커피'를 매개로 삼아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보다 많은 공간을 여행하고 싶었다. 진안에 거주하고 있는 그는 일단 트럭을 시작하면서 전주쪽에서 커피를 팔기 시작했다. 그러나 쉽지는 않았다. "처음 커피트럭 시작했을 때는 제가 이런 노점방식이나 이쪽 세계의 룰 같은 걸 잘 아는 게 아니라서 어려움이 많았어요. 갔다가 쫓겨나기도 하고 한 잔도 못 팔고 올 때도 있었죠. 주로 전주 지역에 있었는데 장사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여러모로 처음엔 힘들더라고요. 그때 고생 많이 했었습니다." 장사를 해본 적 없는 그가 '대박'을 터뜨릴 리 만무했다. 당연했다. 상심한 그에게 친구가 뼈저린 조언을 해줬다. 그가 말했다 "너 지금 뭐하는 거냐"고. "여행하려고 시작한 일이라면 왜 한 지역에 갇혀 '장사'를 하고 있냐고 하더군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그래서 다음날 바로 떠났죠. '장사'가 아닌 '여행'을 하기 시작했어요."원래의 목적으로 돌아온 현두씨. 장사는 순식간에 크게 좋아지진 않았지만 여행을 하기 시작하니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만나는 사람 한 명 한 명이 모두 소중하고 눈앞의 풍경, 자연, 수많은 인연이 소중했다. 친구의 조언을 듣자마자 떠난 하동, 구례 등을 거치는 열흘간의 남도여행은 현두씨에게 진정한 자신의 길을 일깨워주는 중요한 통로가 됐다. △ 소셜미디어, '공간이'를 스타로 만들다 현두씨는 커피트럭을 타고 '여행'을 하기 시작했고, 그의 여행은 수많은 인연을 만들었다. 최근 방송에서 유명해진 배우 조달환과 막역한 사이가 되기도 했고, 매일 이동하는 그이지만 알고 찾아와주는 분들도 늘었다. 그는 커피를 파는 것이 아니라 커피를 매개로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그 중심에 SNS가 있었다. "여행을 하는 것은 좋은데 제가 매일 이동하다보니 저를 위해 직접 찾아와주시는 분들이 헛걸음 하시는 경우들이 있었어요. 인터넷을 찾아보니 고기BBQ라는 트럭노점이 SNS로 자신들의 이동경로를 알려주면서 이동식 판매를 해 성공을 거뒀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한 번 시도해보게 됐어요."고기BBQ의 사례를 발판 삼아 현두씨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오늘 어디서 몇시에 문을 여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등에 대한 이야기를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온적이던 반응들이 시간이 지나자 현두씨의 페이스북을 참고해 현두씨와 커피트럭의 위치를 파악해 찾아오는 등 적극적으로 변했다. SNS가 현두씨의 이야길 전하는 하나의 통로가 된 것이다. 온라인상의 적극적인 활동 때문이었을까. 얼마전 현두씨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게 됐다. 얼마 전 현두씨를 소개한 전라북도 블로그의 글을 본 한 방송사의 리얼다큐 프로그램에서 현두씨를 밀착 취재해 소개한 것. 방송을 본 사람들이 온라인을 통해 현두씨와 공간이의 이름을 검색하게 됐고, 그는 사람들에게 일약 '자신의 꿈을 위해 여행하는 멋진 커피트럭 여행자'로 소개됐다. "SNS를 통해서 알려지는 제 이야기를 두고 사람들은 여유있다고 느끼는데, 마음은 여유가 있지만 금전적으로는 여유가 지금도 없어요. 그렇지만 저는 저의 여행 이야기가 좋아서 시작했기에 만족하고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 이곳 '공간이'를 사랑해요."△ 전주에 여행자카페 만드는 것이 꿈전국적인 스타(?)가 되었지만 그의 꿈은 소박하다. 전주에 여행자 카페를 차리는 것.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것처럼 전국을 여행하는 여행자들이 마음편히 잘 쉬고 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단다. 더불어 그가 커피트럭과 함께 길 위에서 느꼈던 여러 감정과 기억, 추억, 소중한 사람들을 담아내는 책도 한 권 내고 싶다고. 커피와 여행이라는 두가지 테마로 진정한 자신을 찾아 떠난 현두씨. 누구도 쉽게 하기 힘든 도전을 무던히도 해 나가고 있는 든든한 그의 모습을 보며 오늘도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을 생각해보게 된다. 성재민 문화전문시민(선샤인뉴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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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6.21 23:02

서양화가 고보연씨는?

설치미술가 고보연씨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언제부터 사회 소수자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유학길에 올라 독일의 드레스텐 미술대에서 설치미술을 공부했다. 그곳에서 보낸 5년 유학생활 동안 그는 피부색, 눈동자색이 다른 인종 소수자였다. 더욱이 언어소통의 한계에서 오는 시련과 타지에서의 외로움은 한국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시련임과 동시에 도전이었다고 회고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선천적 장애를 가진 게다가 해결되지 않는 시련을 평생 안고 살아가는 장애우들을 보면서 독일에서 자신이 소수자로서의 아픔을 느꼈던 경험을 치유받았다는 것. "이들이라고 처음부터 아프고 싶지는 않았을 거잖아요."아내이자 엄마로, 창작활동을 하는 작가이자 활동가로 또 장애소수자를 위한 군산정신 보건센터 예술요법 강사로 활동하고는 있지만 처음부터 이 일이 신나고 좋지만은 않았다. 순수작가가 되고 싶어 오랫동안 쉬지 않고 배움과 작업을 오가며 앞만 보고 달려가던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쳐 건강이 악화됐다. 그 과정에서 내려놓아야 했던 많은 것들을 통해, 자신처럼 몸과 마음이 지친 사람들을 위한 봉사를 해보고자 미술로 다가가게 됐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을 향한 그의 따뜻한 연대가 '지속'되는 일이다. 그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준 소수자들은 이제 그를 먼저 기다리고, 함께하는 시간을 즐거워한다. 그들이 지속적으로 '채움'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고, 자신의 사회의 관심·지원이 필요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가 바라는 것 역시 소수자와의 지속적인 '함께'의 공간으로서 채움이 지역사회 안에서 자리매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채움'이라는 공간이 채워질 수 있도록, 또 문화예술이 사람들의 삶과 맞닿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만히 그의 진심을 응원해본다. 군산에서 태어나 전북대 서양화과와 동대학원을 나온 그는 독일 드레스덴 미술대학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0번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을 열었고 광주 신세계 미술상, 전북청년미술상 등을 수상하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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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6.14 23:02

문화공간으로 거듭나는 군산 원도심

지역의 유휴공간들이 예술가들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일제시대 군산항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군산의 옛 도심 장미동. 군산 시민들의 생활권이 옮겨지면서 인적이 드문 한적한 장미동 골목. 그리 높지 않는 회색 건물들 사이로 조선은행 부근에 위치한 2층 건물의 낯선 간판 문화공간 '채움'이라는 이름이 눈에 띈다. 몇 년 전만 해도 동네 주민들이 드나들던 병원 건물의 2층에 언제부터인가 예술가가 드나들고 작품이 걸리기 시작했다. 거기서 동네 할머니들은 바느질을 하고 정신 장애인들이 그림을 그리고 차가운 형광등 대신 할로겐의 세련되고 온화한 노란빛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지인이자 건물의 주인으로부터 공간을 무상임대 받아 어느새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채움'은 소수자와 예술가가 함께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는 프로젝트 중심에 서양화가 고보연씨(41)가 있다. 예술가들의 존재방식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역할을 실천으로써 제시하고 있는 그는 지역사회에서 소외되고 방치되는 정신장애인과 같은 사회 소수자와 예술가의 만남을 주선한다. 새로운 공간에서 그들과 함께 문화교육과 예술 활동의 과정을 경험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픔을 문화로 수용하고 승화시키는 작업을 통해 지역사회, 예술가, 소수자가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는 문화공동체가 되었으면 하는 것. 지역 예술가들과 함께 삶과 일상을 연결하여 치유와 소통의 행위로서 문화예술교육을 실천하는 대안공간을 만들겠다는 계획은 2006년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상공간기획소의 기획으로 진행된 '다섯동네, 다른공간'은 군산보건센터의 정신장애우들과 미술작가들이 교류하는 계기가 됐다. 이는 정신 장애우들이 세상과 만나는 일상적 문화예술교육, 그러한 환경을 꾸려나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그는 그들에게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고, 2008년 5명의 지역작가와 몇몇 정신장애우들이 안산예술회관 '달그락 다섯 공간전'에 초대되기도 했다. 지역 주민과 예술인들을 이어주는 공간도 늘어나고 있다. 군산시 월명동에서 50년 가량 자리를 지켜온 '삼봉여인숙'은 창작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군산 출신 예술가 이상훈씨(42)가 고쳐 지어 2011년 3월 문을 연 '군산 창작문화공간 여인숙'에는 작가들이 일정 기간 머물며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군산시로부터 '마을만들기 사업'의 일환로 후원받아 주민 40여명과 함께 공터의 폐건축자재 등 쓰레기부터 말끔히 치우는 것으로 사업을 시작해 주민들과 벼룩시장과 노래자랑을 통해 하나가 됐다.문화공동체 '감'은 2007년 개복동 골목을 '예술의 거리'로 바꾼 데 지난해 '동국사 가는 길' 조성으로 '2012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 최우수상(국무총리상) 수상자로도 선정됐다. 군산시 월명산 입구에서 금광초등교에 이르는 200여m '동국사 가는 길'을 과거 쇠락한 원도심 거리에서 예술이 숨쉬는 거리로 바꾼 것. 이 상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자동차와 부동산들이 점유한 잃어버린 공간을 사람과 문화가 주인이 되는 공간으로 만들겠다며 제정한 것이다.그 결과 도로가 말끔히 재포장됐고, 벽과 담이 일본식 주택가 어우러지도록 리모델링됐다. 담장에는 이전에 동국사에서 스님이 되고자 했던 고은의 시 10여편이 나무 액자로 내걸렸다. '8월의 크리스마스', '타짜' 등 군산 원도심에서 촬영된 영화와 군산상고 야구부, 채만식의 소설 '탁류' 등의 이야기도 소개 돼 볼거리까지 더해졌다. 이 거리는 군산을 찾는 많은 블로거들에 의해 입소문을 타면서 매주 수백 여 명의 관광객들이 몰리는 군산의 명소 중 하나가 됐다. / 임진아 문화전문시민 (전북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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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6.14 23:02

이병철·박정자 부부가 추천하는 축제

자칭 '공연 열혈 마니아' 혹은 '관객 전문가'라는 이병철 박정자 부부는 노래자랑 외에도 전국 팔도 축제현장을 찾아다니며 흥을 즐긴다. 부부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축제를 꼽아봤다. 먼저 지난 1일 개막한 무주 반딧불 축제장. 무주까지 먼 거리도 마다않고 달려간 보람이 있었다. '자연의 빛 생명의 빛 미래의 빛' 무주반딧불축제. 특히 반딧불을 형상화 한 석채 현판 퍼포먼스와 '자연의 빛 생명의 빛 미래의 빛'이 하나 돼 반딧불축제의 불을 밝힌다는 스토리로 진행된 주제공연이 시선을 모았다. 그 다암은 문화체육관광부 3년 연속 대한민국 유망축제로 선정한 순창장류축제. 고추장, 된장을 좋아하는 부부에게 순창 장류 축제는 냄새만으로도 흐뭇해지는 축제다. 평생 농사를 짓고 있는 부부는 '김제 지평선 축제'도 매년 빠지지 않고 찾는다. 익산과 가까워 지리적인 이점도 있지만, 축제 규모가 커서 축제장에서 느낄 수 있는 흥겨움이 배가 된다. 축제 현장에는 사람이 있고 음악이 있어 즐겁다. 부부는 젊은 사람들이 일상의 스트레스에 억눌려 음악이 있어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다고 했다. 축제 현장을 찾아 남의 눈치 보지 말고 맘껏 즐기라는 것. 그게 바로 "사는 낙"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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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6.07 23:02

전국노래자랑 309회 참관한 익산 이병철·박정자 부부

익산시 오산면 오산리 관음마을. 초행길이지만 마을 어귀에 내려 이병철씨 댁을 물으니 주저 없이 빨간 벽돌집을 가리킨다. 젊은이들이 모두 떠난 시골 마을의 적막함. 낯선 이의 방문을 경계하는 견공들의 경고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마을이다. 빨간 벽돌집에 가까이 갈수록 들리는 음악 소리. 가까이 가보니 라디오 소리다."계십니까? 아무도 안 계세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는다. 분명 라디오 소리는 들렸다."저기 계세요?" 더 크게 부르자 "뉘시오?"라는 답변이 들렸다.오늘 만남의 주인공 'KBS 전국노래자랑'의 광팬. 이병철(75) 박정자(73) 부부. 평생 농사일에 새까만 얼굴, 깊게 패인 주름, 아담한 체구. 십 여년동안 전국노래자랑의 광팬이자, 전국 곳곳 축제, 행사에 단골인 노부부다.'빠람~ 빠람 빰 빰빰~빰빰랴 빰빠 빠라~딩동댕 전국 노래자랑~'매주 일요일 낮 12시 방송되는 '전국노래자랑'. 1980년부터 30년이 넘게 장수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전국노래자랑'의 간판 스타는 역시 MC인 송해. 어느 해부터인가 송해만큼이나 기다려지는 사람이 있다. 바로 방청석 맨 앞줄에 자리를 잡고 유명가수들이 나올 때마다 신나게 막춤을 추는 노부부.이 국민 프로그램을 11년전부터 한주도 빠지지 않고 녹화장을 찾아 다니는 이들 부부는 현재까지 총 309회를 참관해왔다. 이들의 트레이드 마크는 빨간색 티셔츠. KBS 전국노래자랑을 즐겨 시청하시는 분들은 이분의 뒷태가 낯설지 않으실지도 모르겠다. 맨 앞줄에서 빨간티를 입고 막춤을 추는 열성팬 부부. 바로 그 분들이다. 전국노래자랑 제작진이 인정하는 공식 왕팬이다. 평범한 농부인 이씨 부부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노래자랑 단골 손님'이 된 것은 2002년. 허리 디스크로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살살 다녀보라는 의사의 권유로 여행을 무리가 안가는 여행을 찾던 중 전국노래자랑 팬이 되어 전국 유람 길에 나서면서부터다.이들 부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 2시면 일어나 도시락을 싼다. 겨울 김밥, 여름 김치몇가지 반찬. 겨울에 실내체육관에서 녹화를 하는 제작진들에게 도시락 냄새를 풍기지 않기 위해서 겨울에는 김밥을 고수하는 그야말로 진정한 왕팬다운 성숙한 마음 씀씀이다.새벽 2시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서 자전거로 익산역까지 내달린다. 목적지까지 가는 가장 싼 차편을 알아보고 2~3번 갈아타며 녹화장에 도착하고, 녹화가 끝나고 막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면 새벽. 겨울철엔 빙판길에 위험하기도 하지만 아내와 함께 방청할 것을 생각하면 즐거운 마음 뿐이다. 지금도 허리가 좋지 않은 아내를 위해, 남편은 손을 꼭 잡고 다닌다. 현장에 도착하면 이젠 제법 알아보고 반기는 일반인들도 많다. 물론 제작진과는 한가족처럼 허물없이 지낸지 오래. 녹화 전 사회자 송해씨는 멀리서 와준 노부부에게 언제나 팬서비스를 아끼지 않는다."오늘도 멀리 익산에서 새벽밥 해 드시고 오셨습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오시는 왕팬입니다. 두 부부가 손을 꼭 잡고 다녀서 내가 샘이 나잉~."짧은 소개지만 송해씨의 안부 인사는 팬으로서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시간. 전국노래자랑의 홍보대사. 이제는 담당PD가 녹화 일정표를 미리 챙겨줄 정도다."한번은 아내가 함라산 둘레길을 다녀와서 몸이 아파서, 여수 녹화를 못갔지. 그 다음주에 갔더니 심사위원들이 왜 안왔냐? 아팠냐? 걱정을 해서 그 뒤로는 절대로 안빠지지 않아요. 내가 좀 아프더라도 팬으로서의 자세를 지켜야겠다 그래 생각했지" "왜 힘들게 녹화장을 다니냐"는 질문에 그는 TV로 보는 것과는 "(감동의) 차원이 다르다"고 설명한다. '한국 남자와 결혼한 일본출신 아내가 9남매를 데리고 나와 11명을 낳는 것이 목표'라며 큰 웃음을 줬던 일본인 아내, 불편한 장애의 몸을 이끌고 휠체어를 타고 노래를 불러 합격했던 여자 등등 녹화장에서 직접 느끼는 감동으로 에너지를 받는다고 한다. 매번 똑같은 녹화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들 부부에게는 매번 다른 장소이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감동의 무대다.지금은 이병철씨 부부의 뒤를 이어 팬층이 형성됐다. 4~5년 전부터 부산목포천안에서 후배 팬들이 오기 시작한다. 선배로서 모범을 보여야겠다는 다짐도 한다. "내가 젊은 시절부터 산악회 활동을 했는디, 세상 천지에 안 가본 산이 없어. 정상을 밟아 본 사람은 또 산을 가거든. 그거랑 비슷혀. 전국노래자랑을 만나면서 대한민국 방방곳곳을 다니지. 직접 가서 보는 감동은 안 다녀본 사람은 말을 허덜 말어. 건강이 허락하는 한 노래자랑 녹화현장은 앞으로도 계속 갈 거여. 유일한 재미고만."집안 곳곳 전국 여행을 다니며 모은 관광책자가 즐비하게 정리되어 있는 모습이 두 부부의 추억 도서관처럼 느껴졌다. 시원한 수박 한 조각 내놓으며, 6월 8일날 인천 월미도 녹화를 위해 길 떠날 채비를 하시는 부부.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똘똘 뭉쳐있는 이들 부부가 규정하는 노년의 키워드는 의지와 선택, 열정인 듯 싶다. 김진아 문화전문시민(익산문화재단 경영관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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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6.07 23:02

시타르는? 몽환적 음색…비틀즈 등 세계적 팝스타들 음악에 접목 시도

인도 전통음악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현악기인 시타르(Sitar)는 13세기 기존의 인도 전통악기인 비나와 페르시아의 유사 악기인 세타르를 개량한 것이다. 시타르 연주의 세계적인 거장이라고 하면 재즈 가수 '노라존스'의 아버지인 '라비 샹카'(Ravi Shankar)를 꼽는다. 2003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노라존스는 샹카가 혼외정사로 낳은 딸. 언뜻 보기에 시타르는 기타와도 비슷하고 만돌린과도 유사하다. 6~13개의 줄이 있고, 줄 감는 부분이 뒤로 꺾였으며, 손가락이나 '픽'으로 퉁겨서 연주하는 게 특징. 이집트와 아라비아를 거쳐 중세에 유럽으로 들어와 18세기 말엽까지 널리 쓰였으며, 동양에서는 비파로 발전했다고도 전해진다.시타르는 몽환적인 음색으로 유명하다. 샹카는 미국의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 미국의 재즈 색소포니스트 존 콜트레인과 협연하며 시타르 연주를 세계적인 음악의 반열에 올려놓았으며, 1960년대 히피 음악의 상징인 세계 록페스티벌인 '우드스탁'(woodstock)에서 공연했고, 영국의 전설적인 록밴드 '비틀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샹카는 '비틀즈'의 조지 해리슨에게 시타르를 가르치는 한편 '롤링스톤스'의 브라이언 존스 등 동양 문화에 매료된 팝스타들이 시타르 연주를 도입하게 만들었다. 일반인들에게는 베트남전을 영화로 제작한 '페인트 잇 블랙'(Paint it, Black )에서 '롤링스톤즈'의 OST를 듣다 보면 시타르 연주가 나온다. 이외에도 밥딜런과 에릭 클랩튼도 자신의 음악에 시타르 연주를 접목시키곤 했다.그러나 국내에선 시타르를 연주하는 이는 거의 손에 꼽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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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5.31 23:02

잘나가던 국악인 인도음악에 빠지다

인도하면 '명상'과 '요가'로 잘 알려져 있는 나라다. 인도의 대표 악기 중에 하나인 시타르는 몽환적인 음색으로 유명하다. 동양 문화에 매료된 팝스타들이 이미 그들의 음악에 시타르 연주를 직·간접적으로 접목시켰다. 현재 한국에서 시타르 등 인도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은 손에 꼽는다.시타르를 연주하는 이금섭(53)씨는 특이하게도 국악 전공자다. 정읍에서 나고 자란 이금섭씨는 서울 국악고에서 피리를 공부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선배들의 권유와 장학생 제의를 받아 부산에 내려가서 부산대 국악과를 졸업하고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에서 활동했다. 소위 잘나가는 피리 연주자이며, 많은 학생들을 거느린 선생님이 자신의 음악과 삶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외부에서 바라보는 저와 스스로 바라보는 저의 괴리감이 컸습니다. 연주자로서의 회의감과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거든요. 틀에 밝힌 삶이었죠."피리 연주 외에 부산 풍물패의 광안리 바다축제 기획·연출과 아쟁 연주에 까지 분야를 넓혀봤으나 부족감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음악의 폭을 넓혀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까운 중국과 일본 음악에 대해 알아보았으나, 그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인도가 세계적으로 가장 전통과 민속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판단해 지인을 통해 잘나가던 그의 생활을 접고 가족과 함께 인도로 단지 음악 공부를 위해서 건너가게 됐다.△ 인도에서 음악 공부 다시 시작수많은 유명한 인도 철학자·시인·음악가가 거주하며, 가장 전통적인 도시로 불리는 바라나시(Varanasi)에서 인도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인도는 음악원(Conservatory) 혹은 대학원도 인도음악을 모르면 입학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우스타드 우스만 칸 (Ustad Usman Khan)에게서 1년 공부를 한 뒤 뿌나라는 도시로 집을 옮겨 나드학교(Gandharva Mahavidyalaya-Naad-Pune-한국의 대학원 과정)에서 공부를 그는 3년 만에 졸업하게 됐다. 우스타드는 인도에서 음악 분야의 최고 경지에 오른 명장에게 붙이는 호칭이다."인도에서 4년 어렵게 공부를 하고 나니 견문이 넓어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서양음악도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그가 다시 짐을 싸서 건너간 곳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배경이 된 알자스 지방, 경제·문화 중심지인 슈트라스부르크(Strassburg)다. 파리와 독일의 국경지대로 유럽 전체의 교통의 요지이며, 문학 작품의 소재로도 인용된 도시다.국립 슈트라스부르크 음악원(Strasbourg Conservatoir)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데틀레프 키예프(Detlef Kieffer)에게서 지휘와 작곡을 2년 동안 수료했다. 시간이 나는 대로 옆나라 오스트리아의 돈빈 음악원(Dorbirn Stadische Musikschule)의 원장이자 지휘로 유명한 이탈리아 출신의 이반 페들레(Ivan Fedle)에게 지휘를 따로 공부하기도 했다.3년 다양한 공부를 한 후 귀국한 이금섭씨는 여러 대학 등에서 강의와 작곡·연주 활동 중이다. 5년 전 고향으로 귀향한 부모님을 따라 정읍에 새 보금자리를 틀고 작곡과 자신을 위한 연습을 매일 하고 지내고 있다. 작곡과 하루도 쉬지 않는 연주(연습)을 통해서 본인의 만족을 채우며 살아가고 있다.사진 촬영을 위해 잠시 시타르를 연주하는 이금섭씨의 모습에선 시타르 연주보다는 악기를 대하는 그의 모습이 잔잔하게 남았다. 고향에서 다시금 음악활동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이금섭씨의 모습은 긴 여정을 마친 순례자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시타르의 제대로 된 연주는 접하기 쉽지 않다. 인도의 음악 체계가 그들의 신화 만큼이나 복잡하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배우기도 어렵지만 연주하기도 어렵다는 말이다.오랜 기간 한국음악과 서양음악을 자기 삶처럼 공부해 온 이금섭씨를 통해서 머나먼 땅의 신비하고 몽환적인 소리가 아닌 한 예술가의 고뇌가 녹아 있는 시타르의 음색을 우리 지역에서 자주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김정준 문화전문시민(전주 전통문화관 공연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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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5.31 23:02

동학 지도자였던 아내의 증조부 얘기 소설화 계획

팔순의 노모가 밤이고 낮이고 술항아리를 들여다보도록 만든 이병천 씨. 알고 보니 녹두장군을 향한 이 전라도 사내의 각별한 애정은 한해 두해 묵은 것이 아니다. 그는 1994년 이미 동학농민혁명을 다룬 소설 2권을 집필했다. '마지막 조선검 은명기'가 그것이다. 조선검의 자존을 지켜가는 검객, 은명기의 삶을 통해 조선검과 검술의 운명이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역사적 공간 속에 녹아든다. " 소설가로서 이른바 역사적인 사건들이 그 사건 안에서 어떻게 마무리되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이 많아요. 한바탕 크게 회오리 친 역사적 사건, 큰 광풍 불 듯이 휘몰아친 어떤 사건의 뒷이야기 말이죠. 인간의 삶은 영화처럼 상영시간이 끝난다고 해서 그 뒤로 모든 이야기가 끝나는 게 아니니까요."그래서 그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자료들을 무던히도 찾아다니고 발품을 판다. 그러나 소설은 때로 역사서에 나온 한두 줄에서 시작되는 경우도 있다. 짧은 한 문장에서 대하소설의 물꼬가 트이는 것이다. 이 소설의 시작도 그러했다. "전라도의 접주들이 체포되자 동학의 남은 세력들이 충청도의 동학교도인 북접의 접주 최시형을 찾아갑니다. 최시형은 그들에게 '너희들의 접주를 구하려고 한 번이라도 노력해 본 적이 있느냐.'라고 묻는 대목이 나오는데 무언가 제 가슴을 쳤어요. 정말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과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거죠. 그래서 김개남을 구출하라는 특명을 받은 은명기라는 인물을 등장시키게 된 거고요." 집필을 시작할 때만 해도 9권 분량의 대하소설을 구상했지만 여러 가지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그에게는 소설을 완결 짓지 못했다는 부채감이 늘 따라다녔다. 그래서일까. 이번 '녹두장군 한양 압송 차' 공연을 준비하면서 소설 쓰는 일만큼이나 신명이 나서 했다고 한다.△ 시가 흐르는 냇가에서 태어나다1991년 첫 소설집 '사냥'을 출간한 이후, 2011년 12월 '90000리'까지 모두 10여 권의 소설집을 낸 이병천 씨. 2년에 한 권꼴로 소설을 출간한 그는 대학 1학년이던 198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우리의 숲에 놓인 몇 개의 덫에 대한 확인'이 당선되어 먼저 시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더듬이의 혼'이 당선됐다. 3학년, 4학년이 되면 신춘문예 희곡과 문학평론 부문에 차례로 도전하려고 계획을 세워 준비한 적도 있었지만 시를 쓰다 보니 이상한 욕심이 생겨났다고 한다. 짧은 시로 언제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할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설 당선 이후 '짧은' 시를 접고 '긴' 소설 창작에만 매진해 해왔다. 어쩐지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도 유난하다. 시천(詩川)이란다. '시천'이라는 이름은 마을 서당에 다니는 학동들이 냇가에 앉아 붓을 씻어 먹물이 흐르곤 했다는 전설에 따라 지어졌다고 하는데 출생 직후 전주 모래내로 이주해서 초등학교를 입학하기 전까지 그곳에 살았다. "1962년 무렵 부모를 따라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완주 용봉초등학교에 입학해 그곳에서 졸업했죠. 이후엔 전주에서 학교를 다녔어요. 전주고등학교 재학 중에는 문학에 관심이 많은 친구들과 '글내'라는 이름의 동인을 결성해서 활동했는데 '글내'는 고향 '시천(詩川)'에서 따 온 거죠. 저희 어머니가 녹두장군 공연을 위해 담그시는 술도 바로 이 '시천(詩川)'에서 빚은 녹두꽃술이고요."30년 넘게 소설가로 살았고 그동안 많은 소설을 써왔지만 그는 쓰고 싶은 이야기는 아직 많다. 그러나 얼마 간은 미뤄두기로 했다. 서른 살부터 라디오 PD로 일해 온 그는 내년이면 정년 퇴직을 맞는다. 그토록 원하던 전업 작가가 되면 쏟아 부으려고 힘을 아껴두고 있다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소설로 풀어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이번에도 동학이 주춧돌이다. "아내가 언양 김씨의 자손인데 처가 쪽에 동학혁명에 몸 담았던 분이 계십니다. 동학혁명 당시 사발통문에도 이름이 등장하는 대포대장 김응칠(金應七)접주가 장인 어른의 할아버지이시죠. 대단히 의협심이 넘치는 분이셨다고 해요. 전라감영에 붙잡혀 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잠깐 풀려나게 돼요. 집안에서 논밭을 팔아서 어떻게든 피신 시키려고 했는데 혼자만 살 수 없다고 태연하게 다시 들어가서 거기서 사형 당하셨답니다. 이 얘기만큼은 꼭 한번 써보고 싶어요." △ 겸업 작가에서 전업 작가로 돌아가는 집, 귀거래사지금껏 10여권의 소설을 집필했지만 변변한 집필실이 없었던 이병천 씨. 그동안 주로 절방을 얻어서 글을 쓰거나 한옥마을 빈방을 구해서 들어가 집필을 해왔다. 그의 아내가 갸륵하게도 글방을 만들어주겠노라고 했을 때 내심 기뻤다고 한다. 오목대 아래 한옥을 짓고 작업실에는 '귀거래사'라는 이름도 붙였다.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빌려와 말씀 사(辭)자를 집 사(舍)자로 바꾸어 '귀거래사(歸去來舍)'로 정한 것. '여태껏 직장 생활하면서 겸업 소설가로 살다가 이제는 작업실도 생겼으니 나도 장차 전업 집필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도연명의 시에서처럼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서 소설을 쓰다가 새벽빛 희미해지면 '뜰의 나뭇가지 바라보며 웃음 짓는 '날이 올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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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5.24 23:02

전주에 전봉준 동상 세우려 매주 기금 마련 공연 지휘

흔하디흔한 철쭉이, 그나마 드문드문 떨어지기 시작하는 그 꽃잎이 유난히 붉어 보이는 5월 18일 토요일. 오후 네 시의 마당가에 한 남자가 앉아 있다. 전주 한옥마을에 자리한 부채문화관. 마당에는 공연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그는 붉은 꽃잎 점점이 떨어진 화단 턱에 앉아 마당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표정이나 몸짓이 어찌나 태연하고 느긋한지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뒤태를 구경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낮술로 노곤해진 몸을 봄볕에 말리고 있는 듯도 하다. 공연을 보러온 그의 지인들이 간간이 알은체를 하지만 않는다면 공연이 끝날 때까지 배우들과 관람객의 배경으로 가만히 놓여 있을 것 같았다. 앉은 자리가 어디 건 간에 매주 토요일 오후가 되면 이곳에 나타나는 이 수상한(?) 남자. 거리극 '녹두장군 한양 압송 차'의 총감독이자 소설가인 이병천 씨이다.지난달 27일 토요일에 공연을 시작한 후로 이번이 네 번 째 공연. 전봉준이 체포되어 한양까지 압송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역사적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들며 펼쳐진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주창한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이 서울로 압송 되는 길에 전주에 들렀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 이 거리극은 전봉준이 이인교에 올라 있는 사진이 단초가 되었다고 한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단 한 장의 사진이 1시간 20분 공연의 주춧돌이 되었고 매주 토요일마다 공연을 하게 된 이유는 동상 하나 때문이란다. 무슨 뜻일까."오래 전부터 전주에 녹두장군의 동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당시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에 무혈 입성한 그의 활동이 역사에 남아있기도 하고요. 동학농민운동은 실패하긴 했지만 여기에 참가한 동학농민군은 항일의병항쟁의 중심세력이 됐어요. 그 정신은 31독립운동으로 계승되었고요."우리 역사에서 전봉준은 체게바라에 뒤지지 않는 중요하고 위대한 일을 한 인물이라고 여긴다는 이병천 씨. 그는 늘 '어떤 방식으로 전봉준을 기릴 것인가. 어떻게 사람들의 관심을 모을 것인가'를 계속 궁리를 해왔다. 그의 오랜 생각은 의외의 순간 의외의 장소에서 꽃을 피웠다. "2011년 겨울에 소설 '90000리'를 출간했는데 가까이 지내던 선배 한분께서 그동안 고생했으니 술값은 얼마든지 대줄테니까 좋아하는 사람들 불러서 술 한잔 마시라고 권하시더라고요. 그 때 생각했죠. '녹두장군 전봉준 장군 동상 건립에 대한 얘기를 좀 해야겠다.' 마음 속으로 그런 조건을 걸고 그 제안을 받아들여서 출판기념회를 하게 된 거죠."소설 집필의 노고를 위로하고 책 발간을 축하하는 자신의 출판기념회에서 때 아닌 전봉준 동상 건립이라는 '폭탄발언'을 하게 된 것. 허나 가재는 게 편이요, 초록은 동색이라 했던가. 유휴열 화백을 비롯한 많은 예술인들이 그의 말에 마음을 모아주었다. 기금 모금을 통해서 동상 건립을 추진하자는 방법까지 논의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전주 한옥마을로 장소로 정했다. 하지만 바로 행동으로 옮겨지진 못했다. 첫 번째 이유는 모금 방법 문제였고 두 번째는 동상 건립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돼야만 그 의미가 살아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다시 고민에 빠진 이병천 씨. 하지만 그는 안 풀리고 꼬인 이야기를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 전문인 소설가 아니던가. 함께 활동하는 '얘기보따리' 회원들이 짐을 나누어 져주었다. "한 5년 전쯤 희곡 쓰는 곽병창과 최기우, 시 쓰는 문신, 영화평론하는 신귀백 등 몇몇이 모여서 얘기보따리라는 모임을 만들었어요. 전주의 역사, 문화, 인물에 대한 짧은 창작판소리를 만들어서 '짧은 판소리 전주'라는 책을 내기도 하고 CD로 제작을 하기도 했죠. 그 때 제가 '전주비빔밥뎐'이라는 걸 썼는데 전봉준이 남부시장의 비빔밥집에 자주 들렀다는 설정에서 시작했어요. 갖은 채소가 비벼지는 비빔밥이 임금과 신하, 백성이 한데 섞여 대동세상을 만들자는 동학의 정신과도 잘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거죠."'한양으로 압송될 당시 전봉준이 전주에 들르지 않았을까.', '만약 그랬다면 전주 사람들은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하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그런 애틋한 마음에서 출발한 작가적 상상력이 버무려져 결국 한 그릇의 전주비빔밥 같은 거리극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한 해 5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전주 한옥마을에 다녀간다는데 그들에게 전주의 역사, 그 속에 우리가 잊고 있던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녹두장군 전봉준이고 전주의 살아있는 역사 정신을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이다. 동상 건립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이번 공연은 결국 이 얘기를 전하고 싶어서예요." 한옥마을에는 경기전, 전동성당 같은 아름답고 역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공간들이 있지만 우리의 민족의식, 전주의 살아있는 정신을 보여줄 수 있는 소박한 공간 하나 만들어 보자며 시작한 일. '얘기보따리'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고 여러 극단에서 따로 활동하던 배우들도 이 공연을 위해서 한자리에 뭉쳤다. 그리고 팔순의 노모도 팔을 걷어부쳤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볼 수 있도록 무료로 공연을 하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 기금을 모금하는 방법을 선택했는데 기금을 낸 이들에게 이병천 씨의 어머니가 직접 빚은 '녹두꽃술'을 대접하기로 한 것. "얼마가 됐든 기금을 내주는 사람들한테 녹두로 빚은 술을 대접을 하기로 했어요. 원래는 '녹두꽃술'이 아닌 '녹두장군주'라고 하려고 했는데 정읍에서 이미 상표등록을 해놓아서 이름을 바꿨지요. 해열과 해독의 효능이 뛰어난 녹두는 술에 들어가면 술을 물처럼 묽게 만드는 성질이 있어요. 술의 재료로는 그다지 좋지 않은 거죠. 그래서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세요."여든 살의 전복래 씨는 아들을 위해, 아니 전주를 찾는 사람들을 위해, 아니 일찍이 모두가 평등하다고 온몸으로 외친 한 사내를 위해 술을 빚는다. 그리고 매주 공연 때마다 아들은 그 술을 사람들에게 내놓는다. "숱한 백성들이 참여해서 동학농민혁명이 이루어졌듯이 어느 날 동상 하나 달랑 세우는 것보다 십시일반으로 오천 원 만 원, 전국에서 온 사람들이 조금씩 다 같이 모아서 만드는 것이 훨씬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토요일만 되면 한옥마을을 어슬렁거리는 아들을 위해 여든 살의 전복래 씨는 오늘도 술 항아리 앞을 지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더러 실패할 수도 있지만 성공하기만 하면 그 맛과 향이 기가 막히다는 '녹두꽃술'과 체구가 작아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는 전봉준. 그리고 그를 다시 사람들 속으로 불러들이고 싶은, 역시 작은 체구를 가진 한 남자. 어딘지 모르게 닮아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봄볕 같지 않게 뜨거운 오월의 햇살이 빚어낸 착각일까. /김정경 문화전문시민(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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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5.24 23:02

"불가능한 일 실행하는 게 당연한 세상 돼야"

'불가능공장'은 얼핏 보기엔 "그게 되겠어?"라는 생각이 들만큼 조금은 무모해 보이기도 한다. 전주 한옥마을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진행되는 여러 사업이 과연 하나의 '사업'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가능공장'은 작지만 의미있는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불가능공장'의 설립자이자 '아이디어 뱅크'로 불리는 대표 박세상씨(29)를 만나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곳은 상상과 실천으로 전주한옥마을에 변화를 주기 위해 설립한 곳입니다. 상상만 하던 일들을 청년의 열정과 실행력으로 현실화시켜보자는 취지죠."그가 굳이 '불가능공장'의 입지로 전주한옥마을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주한옥마을은 빠르게 성장했지만 그로 인한 여러 문제점들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주민들과 방문객들간의 소통이라던가. 그래서 다양한 프로그램과 아이디어로 전주한옥마을을 진짜 대한민국 대표 명소로 만들고 싶었습니다."전주 한옥마을을 진정한 '국민 명소'로 만들고 싶다는 세상씨. 그의 그런 노력을 '무모하다'며 폄하하는 이들도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세상씨에겐 그만한 자질과 능력, 경험이 갖춰져 있다. "제가 지난 2009년 세웠던 비영리단체 '아이엠궁'은 대전 충남대 앞 대학가를 문화공간으로 만드는 일을 했어요. 침체되어가는 지역상권 활성화를 위해서 모든 통합 솔루션을 제공하고 지역의 특색과 자원을 활용해 테마가 살아 있는 마을을 만드는 일을 진행한 경험이 있죠." 그가 세운 회사는 지난 2011년 사회적기업 법인으로 다시 태어나 충남 지역을 바꿔내는 우량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는 지난 성공을 발판으로 또다시 전주한옥마을의 의미있는 변화를 만들어내려 하고 있다. "앞으로 지역(한옥마을)의 자원과 특색을 활용한 여행, 교육, 축제, 컨텐츠 개발, 지역 정보제공 서비스를 하려고 합니다. 축제 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기 위한 축제가 아닌, 지역 주민들을 위한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모두가 바라보는 관광지로서의 한옥마을이 아닌, 화합을 이루고 보다 조화로워지는 내실있는 한옥마을을 꿈꾸는 세상씨. "불가능한 일을 사람들이 실행하는 행동 자체가 당연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말하는 그의 꿈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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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5.17 23:02

엉뚱해서 재밌는 한옥마을 관광상품 개발

지난 해 연간 방문객 500만명을 돌파해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여행지로 자리잡은 전주 한옥마을. 전주 향교를 따라 전주한옥마을 끄트머리로 쭈욱 걷다보면 다양하게 늘어선 카페들 속에서 조금은 독특한 간판을 가진 공간을 만나볼 수 있다. 간판에 쓰여진 문구는 'MR.WORLD I'm possible factory'. 이미 간판에서부터 독특한 그들의 정체성이 무엇일지 사뭇 궁금해진다. 그곳에선 전주한옥마을의 '진짜'를 보여주겠다는 열의로 가득찬 몇 명의 청년들을 만날 수 있다. "어서오세요. 이곳은 불가능을 원료로 다양한 가치를 생산하는 불가능공장입니다."이름부터 모습까지 독특함 그 자체인 매장 안으로 들어가니 반가운 인사가 방문객을 맞는다. 인사를 받으며 들어간 그곳에는 여러 가지 돌이 가득하다. 가지런히 놓여진 돌에는 다양한 메시지가 씌여 있다. '다 잘될거야' 'Just do it'과 같은 자기 암시 메시지부터 '잘 놀다갑니다' '우리 사랑 영원히'와 같은 개인적 내용도 있다. 평범해 보이는 돌에 사람들은 왜 글씨를 써넣은 걸까?"이건 저희가 만든 전주한옥마을 기념품입니다. 전주한옥마을에 와서 이렇다 할 기념품이나 이벤트가 없어서 돈도 안들고 쉽게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봤어요. 전주 한옥마을에 방문하시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무료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이야길 들어보니 전주한옥마을을 대표하는 기념품이 없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란다. 전주한옥마을의 문화를 직접 두 손으로 만들어가겠다는 패기넘치는 청년들답다. 연신 웃음을 잃지 않는 직원에게 물으니 이곳 '불가능공장'은 청년들이 '가능성' 하나만 보고 만든 실험적인 사업 공간이란다. "이곳은 '불가능'을 원료로 다양한 가치를 생산하는 곳입니다. 청년들의 상상력(soft ware)에 실천(hard ware)을 더해서 불가능 했던 것들을 '기적, 감동, 웃음, 사랑, 스토리'로 만드려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예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 상상했지만 현실이 될 수 없다고 포기되는 일. 엉뚱하고 쓸모없어 아무도 하지 않는 일. 세상에 '불가능'으로 남아있는 것들을 수집하고 가공하고 생산하고 유통합니다." 독특한 내부만큼이나 구성원들이 가진 생각도 독특하다. 이곳이 가진 사업분야 역시 독특한데, 그들은 '가능성'이라는 키워드 하나만 가지고도 다양한 사업들을 준비하고 있지만 지금 가장 집중하고 있는 사업은 전주한옥마을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위한 '맞춤형 컨설팅'이다. 그들이 전주 한옥마을을 여행컨설팅 지역으로 선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약 10년 전 당시, 침체되고 낙후된 지역이였던 한옥마을이 철거 위기에 처하자 새로운 대안으로 한옥이라는 특색을 살려 조성된 한옥마을이 현재는 연 500만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지역에 큰 자산이 된 한옥마을이지만, 짧은 시간에 성장한 부작용 때문인지 내부적으로 겪게 된 많은 지역문제들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관광객의 여행과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 문제해결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독특한 한옥마을 관광상품을 개발하게 됐다. 바로 '사람지도'를 통한 한옥마을 투어. 그들은 관광객들을 자신들이 개발한 '사람지도'를 통해 안내한다. 이 지도는 한옥마을과 전주의 문화에 대해 각기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관광객들과 만날 수 있게 함으로써 겉으로 드러나는 '건축이나 디자인으로서의 한옥마을'이 아니라 '문화와 가치, 역사를 간직한 한옥마을'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는 '사람지도여행'.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자는 그들이 내세울만한 아이템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뜻에 '재미'도 더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최근 전주한옥마을 내에서 이용가능한 인력거를 도입했다. '불가능공장'의 멤버들이 직접 인력거를 끌며 관광객들을 편하게 모시는(?) 것. 겨우 인력거 한 대 분량의 작은 서비스이지만 한옥마을을 즐겁게 만드는 활력소가 되고 있다. 그들의 무모한 도전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제 시작이다. 그들은 말한다. "불가능은 도전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도전들이 쌓였을 때 새로운 변화가 만들어지는 것이죠. 다양한 도전과 실패, 그러한 것들이 한옥마을을 바꾸는 밑거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전주 한옥마을에 '가능성의 바람'을 일으키는 그들다운 답변이다. 돌멩이부터 인력거까지 매번 독특한 아이디어로 차별화된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는 그들의 활약이 한옥마을을 전국적, 아니 세계적으로 만들 수 있게 되길 희망해본다. 성재민 문화전문시민(선샤인뉴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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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5.17 23:02

10년 넘게 '호스공예' 하는 일식집 사장 김광중씨

김광중씨(33)는 '행복한 아웃사이더'다. 회사와 조직, 월급에 목매고 사는 보통의 인사이더들과는 다르게 그는 자신만의 일탈로 즐거운 삶을 살고 있다. 쉴새없이 아내에게서 쏟아지는 눈총은 여전하지만. 전주 금암동에서 일식집을 운영하는 그의 낯이 익는 것은 KBS의 '안녕하세요'에 출연해서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허구헌 날 호스로 물고기를 만드는" 그가 아내의 고민을 유발하는 장본인. 가게를 찾았더니 하얀색 주방장 모자가 꽤나 잘 어울리는 건장한 체격에 인상 좋은 남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반긴다."어렸을 적부터 손재주가 있어 고등학교 시절 미술부 활동을 했어요." 남다른 감각과 손재주로 대학교 때 미술건축 공부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외식조리학과로 전향하면서 요리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교적이고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주방에서 요리만 하는 게 아니라 오는 손님들과도 눈을 맞추고 얘기하기에 일식이 제격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물고기를 유달리 좋아하는 취향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물고기를 보면 정말 기분이 좋아져요. 어렸을 때에도 물고기 모양을 너무 좋아해서 서류파일에 동네에서 파는 붕어빵을 모으기도 했거든요. 결국 파일 비닐 안에서 썩어서 버리긴 했지만요." 20대 초반 병원에 입원한 그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링거 줄을 꼬고 묶고 하다 우연히 물고기를 만들었다. 남다른 물고기 사랑이 바로 일명 '호스공예'로 재탄생하게 된 것. 현재까지 3000마리나 되는 호스 물고기를 만들었다. 주재료는 수도용 폐고무호스, 링거액 관 등. 그는 "호스를 구하러 고물상을 내 집 드나들 듯 했다. 고물상에서도 이런 게 왜 필요하냐고 돈도 안받고 그냥 가져가라고 하는 게 다반사"였다고 말했다. 투명 호스에 염색을 해서 자신만의 색감을 주기도 한다. 물고기를 더 화려하게 보이도록 하려면 색감이 중요하다는 판단. "전통자수실을 물에 담가두면 색깔이 빠져요. 그 물에 투명호스를 넣어두면 호스가 염색이 된답니다." 그만의 발색 노하우다. 인터뷰 도중 그는 꼭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며 차안을 조심스레 열어주었다. 역시나 차의 앞뒤옆창문할 것 없이 차안 가득 호스물고기로 도배가 돼 있었다. 그러더니 마치 안방을 꽃벽지로 도배하고 흐뭇하게 웃는 새댁 같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물고기 수가 많아지고 물고기 크기가 커지면서 아내 몰래 작은 원룸을 얻어 나만의 비밀 전시공간을 만들었는데. 방송에 나가면서 2년 만에 들통이 났어요." 하지만 그의 계획은 아직도 유효하다. 물고기가 5000마리가 되면 조촐하게 작은 전시장을 열 계획이라는 것. 그는 한 달에 두 번씩 가게문을 닫고 한옥마을로 발걸음을 한다. 물고기를 낚시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만들기 위해 나가는 것. 요리사 모자를 벗고 생활 공예가가 되어 한옥마을에서 관광객들에게 호스로 물고기를 만드는 시연을 보여주고 판매까지 호스가 주는 재질감이 귀걸이목걸이 등 여성 악세서리와 잘 어울려 제법 판매가 된다."사람들이 제가 만드는 물고기를 보고 신기해하고 멋있다고 하면 그냥 기분이 좋네요."한옥마을 어딘가에서 사람들에게 '호스 물고기'를 나눠주고 있을 그를 위해 이번주 한옥마을에 나들이 가보는 건 어떨런지. 호스 물고기 공예의 핵심은 '화려한 눈'10년 넘게 호스로 물고기를 만들고 있는 김광중씨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국의 대표적 서양화가 이중섭씨의 '물고기와 노는 아이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실제로 물고기는 다양한 상징성을 갖고 있다. 꿈속에서 물고기를 품에 안으면 꼭 좋은 일이 생긴다든 믿음이나, 또 불교에서 물고기는 깨어 있을 때나 잠잘 때 눈을 감지 않을 뿐 아니라 죽어서도 눈을 감지 않듯 수행자도 물고기처럼 항상 부지런히 도를 닦으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물고기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눈이라고 했다. 그래서 가장 크고 화려하게 장식한다고. 벽에 그린 용에 눈동자를 그려 넣은 즉시 용이 하늘로 올라간 것처럼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마쳐 일을 완성시킨다는 '화룡점정'이란 말은 물고기를 통해 무료해질 수 있는 삶에 생기를 불어넣고 자신의 삶의 가치를 스스로 완성시켜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물고기에 빠진 그의 삶은 화룡점정과는 다른 길이었다. 호스를 사는 데에만 한 달에 100~200만원을 지출했고, 이 취미로 인해 다니던 회사에서 세 차례나 해고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럼에도 그는 호스 공예품을 보면서 "사람들이 작품을 보고 관심을 갖고 예쁘다고 칭찬하면 그저 뿌듯하다"고 했다./임진아 문화전문시민기자(전북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팀장)-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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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5.10 23:02

벨라 타르 '인간존엄성 주목' 라브 디아즈 '가장 긴 영화 제작'

이현정씨가 꼽은 베스트 감독은 다 뻔한 주제를 다루지 않았다는 데 있다. 헝가리의 벨라 타르 감독과 필리핀의 라브 디아즈 감독이 제작한 영화는 '누구나 보라고 만든 영화가 아니다'. 만인을 만족시키려 만든 영화가 아니니 혹평도 개의치 않는다. 그래서 두 감독 다 소신 있는 감독으로는 세계 최고라 일컬어진다. △ 인간의 존엄성에 주목하는 벨라 타르 감독헝가리의 거장 감독 벨라 타르(Bela Tarr). 감독은 전주영화제와는 인연이 깊다.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벨라 타르의 '사탄 탱고'가 상영된 뒤 국내에도 벨라 타르 지지자들이 암암리에 늘어났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영원성이다. '내 생각에 인간의 존엄성은 영원한 것들 중 하나이고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주제다' 라고 말한다. 못생긴 사람이건, 범죄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인간의 존엄성을 지니고 있고, 그들도 개성과 삶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감독은 보여주려 해왔다. 놀랍게도 감독은 스물 둘이란 아주 이른 나이에 장편 데뷔작 '패밀리 네스트'(1977)를 만들었다. 이는 주택난을 제대로 해결해주지 못하는 시스템 아래에서 부모와 같이 살 수밖에 없는 젊은 부부에 대한 영화다.감독이 이뤄낸 가장 큰 미학적 성취는 단지 사람의 얼굴만이 아니라 다른 물체, 공간, 빛 그리고 시간에게도 표정과 물성을 부여해 '감촉의 영화'를 만들어내는 데 있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중요한 주제로 삼는 감독 벨라 타르. 전주영화제와 색깔이 잘 맞는다. △ 흑백으로 11시간을 이야기하는 라브 디아즈 감독 '필리핀 가족의 진화'는 상영시간만 643분. '엔칸토에서의 죽음'은 540분. 긴 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필리핀 라브 디아즈 감독(Lav diaz). 무지막지한 러닝타임에 관해 물으면 그는 2시간 내외로 이야기를 끝내버리기에 영화는 너무 거대한 매체라고 말한다. 러닝타임 11시간은 말이 안되는 이야기지만, 그래서 존경스럽기도 하다. 심지어 그의 영화에는 컬러도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흑백이다. 던져둔 것 같은 카메라 앵글이나 다큐멘터리적 현실과 극적 인간을 혼재시켜버리는 기발한 의식. 카메라 고정하고 계속 촬영을 한다. 롱테이크를 많이 쓴다. 그의 영화가 낯선 관객들은 '이게 영화야'라고 말한다. 영화는 지루하고 마냥 천천히 긴 영화인데, 라브 디아즈 감독은 의외로 초스피드로 얘기하고 경쾌한 사람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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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5.03 23:02

【영화통역가 이현정(영어명 Roc)씨】감독과 관객 잇는 '소통의 다리'

제14회 전주국제영화제가 3일 막을 내린다.그의 첫 인상은 맛있는 밥집의 손맛 좋은 안주인 같았다. 깔끔하게 쪽진 머리, 편안한 옷차림. 영어보다는 전라도 사투리가 더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영어 이름은 Roc. 한국 이름은 이현정. 어린 시절을 영국에서 보낸 인연으로 영어가 익숙하다. 아버지의 사업으로 살게 된 영국 생활은 그에게 영미 문화권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Roc가 영화통역과 인연을 맺기 전까지 그의 직업은 영어 강사. 꽤 잘 나가는 영어 강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 때 지인의 소개로 2000년에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통역을 맡았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와는 또 다른 감동이 있었다. "재밌었어요. 특이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흥미로웠거든요. 이후로 입소문이 나서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김기덕 감독님이 '섬'이라는 영화로 선댄스 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는데, 그때 동행하게 됐죠." 그러나 영화판에 뛰어든 결정적인 계기는 영화배우 장동건씨 덕분. 장동건씨가 무극 출연이 결정되고 칸 영화제를 가는데, 그에게 통역 제의가 들어왔다. 그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던 칸은 너무나 가고 싶었던 도시였고, 사실 장동건씨는 보기만 해도 흐뭇했기에" 모든 걸 제쳐두고 '도박'을 벌였다. 그러나 번역과 영화 번역은 많이 달랐다. 작업 환경은 물론 영화에 관한 이해가 뒷받침돼야 했다. 그는"감독이나 배우는 대개 미리 준비된 말을 하기 보다는 열정적으로 작품 세계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문장이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결국 감독이 전하는 내용을 전달하면 듣는 사람조차도 헷갈릴 때가 많다는 것. "영어라고 해도 다 똑같은 영어가 아니에요. 스리랑카 관객들이 대거 온 적이 있는데, 그분들의 영어가 억양이 강해서 다들 알아듣기 힘들어하는 거에요. 그때 제가 투입(?)됐는데, 처음 5분 정도 이야기를 해보니까 이들의 발음이 어떤지 감이 오더라구요. 그래서 어렵고 까다로운 통역 업무가 유독 많이 배정됐던 것 같습니다." 전주영화제와의 인연은 3회 때부터. 영화제 개막식부터 폐막식까지 도맡아 통역해오면서 영화에 관한 이해도 깊어졌다. 영화제 자료가 부족해 감독과 작품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면서 독학하는 경우도 많다. "대개 감독들이 영향을 받은 감독이나 작품을 굉장히 빨리 나열할 때가 많아요. 그 이름이 익숙하면 퍼스트 네임만 적으면 아는데, 전혀 모르고 하게 되면 당황하게 되죠. 하지만 저는 좀 뻔뻔해서 "잠깐만요? "하고 다시 물어보게 되지요." 영화를 본 다음에 감독의 이야기를 들으면 영화가 완전히 달라 보이는 경험도 많았다. 그래서 그는 감독과의 대화를 적극 권유한다. "전주영화제는 저에게 특별하지요. 전세계 모든 감독들이 전주를 오고 싶어한다고 들었어요. 진짜 힘들게 영화를 제작했거나 예술가로 인정받고 싶은 감독들이 말이죠. 그래서 전주는 영화를 위한 영화제죠. 처음에는 여기 뭐야 아무 생각 없이 왔던 분들이, 가실 때는 너무 기분 좋게 웃으면서 가세요. 단 한 명도 안좋게 얘기하고 간적이 없어요. 무슨 영화 동아리에 온 거 같아요."한국에서 와서 소주를 병 채 마시며 영화를 토론하는 현장, 몇 시간 긴 영화를 최고의 인내심으로 버티며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는 관객, 인생의 경험과 영혼을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최선을 다하는 감독들. 그는 이들의 이야기가 그저 좋다. 감독과 관객이 제대로 소통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하는 그의 열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김진아 문화전문시민(익산문화재단 경영관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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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5.03 23:02

【음악으로 맺은 인연 이형로·김저운 부부】노랫말 쓰는 아내, 곡 붙이는 남편

전주 서서학동 1-1번지. 나무 대문을 열자 넓은 마당이 먼저 반긴다. 마당 한쪽엔 겹홍매가 분홍빛으로 처마를 밝히고 있다. 홍매화 그늘 끝에는 대파며 치커리, 상추들이 해바라기 한다. 한옥이 앉은 앞마당에는 사람 키를 훌쩍 넘긴 모란이 잎을 틔웠고 그 밑에 돋아난 작은 잎들도 사이좋게 봄볕을 나눠 가지고 있다. 마당의 주인은 이형로 씨와 김저운 씨. 음악을 하는 남자와 글을 쓰는 여자가 한지붕 아래에 살고 있다. 이 부부를 맺어준 것은 다름 아닌 음악. 부안에서 나고 자란 김저운 씨. 학교 오가는 길에 늘 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녔다. 매일 수업이 끝나면 음악실에 가서 살았고 방학 때면 교회에 가서 '우리동요 365곡집'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풍금을 치고 노래를 불렀다. 교사로 첫 발령을 받은 경기도 안성에선 합창단원으로 활동 중이다. 비록 문학을 향한 열정에 지고 말았지만, 음악에 대한 그녀의 남다른 애정은 음악하는 남편과 함께 하면서 제대로 피어나고 있는 셈이다. 소설과 수필을 쓰는 김저운 씨가 노랫말을 직접 쓰고 이형로 씨가 곡을 만든 노래가 10여 곡, 다른 작가들의 글에 곡을 입힌 것이 10여 곡, 거기다 두사람은 '한사람 1곡 갖기 운동'이라는 독특한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시인화가 등 예술인들에게 노래를 선물하고 그들이 직접 노래를 부르는 '동네앨범' 제작이 그것이다. 부부는 함께 완성한 곡으로 가끔 무대에 오르기도 한다. △ 모던민속밴드 '놉'의 리더 남편과 후원자 아내"어릴 때 형님이 음악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게 됐지요. 기타가 있으니까 기타를 치고 피아노가 있으니까 피아노도 뚱땅거려 보고 학창시절엔 그룹사운드 활동을 하기도 했어요. 음악을 하는 건 저한테는 그냥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 같아요." 재즈 음악에 오랫동안 심취했지만 '서양악기로 왜 서양음악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품게 된 이형로 씨. 젊은 시절 틈틈이 거문고를 익히고 정정렬 바디 '춘향가' 보유자인 최승희 선생 밑에서 10년 동안 판소리를 배우기도 했다. 무언가 그의 속에서 꿈틀거렸지만 손에 닿을 만큼 가깝지는 않아서 전주를 떠나 서울로 갔다. 8년 전 다시 전주로 내려와서 운명처럼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그때부터 그가 하고 싶었던 음악의 토대를 만들게 됐다는 이형로 씨. 음악에 대한 것이라면 김저운 씨가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모던 민속밴드 '놉'이 탄생하기까지 아내의 공이 컸다. 판소리, 농악, 민요 등 전통국악에 현대적인 감각을 입힌 새로운 음악이 하고 싶어서 5년 전 '음악하는 일꾼'이라는 의미를 담아 '놉'을 결성했다. '놉'의 음악은 옛 것에 뿌리를 두었지만 과거에 머물지는 않는다. 피아노, 드럼, 섹소폰 등 서양악기로 민속음악을 재해석한다는 시도 자체가 실험이고 도전 아닌가. '놉'은 지난해 전주세계소리축제에 경연 방식으로 진행된 '소리 프론티어' 에 최종 선발된 8팀 중 한 팀으로 참가하기도 했으며 1년 한번 정기공연도 갖는다. 최근 몇 년 간은 굿의 형식을 빌어와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이형로 씨. 그동안 작업한 곡들을 모아서 조만간 연주음반을 내놓을 계획이다. 또한 '놉'에서 같이 활동하고 있는 유성운 씨의 앨범 '전라도 길'도 막바지 작업 중이다.△ 마당 넓은 집에서 꽃출석부를 만드는 시간음악작업을 하지 않을 때는 마당에 나와 있는 시간이 많다는 이형로 씨. 그런 남편을 보는 아내의 눈이 곱지만은 않다. "어느 날엔가 도라지 스무 송이를 마당에 심는다고 하더라고요. 어떻게 심으면 그럴 수가 있는지 아직도 모르겠는데 꼬박 4시간이 걸렸어요. 지금 장독대 자리도 이리 옮겼다 저리 옮겼다 3번 정도 한 것 같아요. 마당에서 뭘 한다 하면 한나절이에요." 남편의 반박도 만만치 한다.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출근해서 업무를 보고 점심을 먹고 퇴근할 때까지의 모든 시간을 일하는 시간으로 포함하는 것처럼 그가 마당에 머무는 시간 또한 음악을 만드는 작업에 포함이 된다는 것. 도라지 심는 데 걸리는 시간이 반나절이든 한나절이든 부부는 마당이 있어서 좋다. "박완서 선생님의 수필 '꽃출석부'에 복수초로 시작해서 피어나는 울안의 꽃들을 출석 부르신다는 표현이 있어요. 형로 씨가 봄에 핀 꽃들을 세어본 적이 있는데 저희 집 마당의 꽃도 60여 가지 되더라구요. 박완서 선생님 댁처럼 야생화들이 많이 포함돼 있긴 하지만요." 부부의 '꽃출석부'가 있는 마당과 별채 2층에 마련한 김저운 씨의 아담한 '글방'은 가끔 손님들 차지가 되기도 한다. 얼마 전 민박을 시작한 것. 이름을 '마당 넓은 집' 이라고 짓고 이형로 씨는 블로그에 '마당은 주인의 마음입니다'라는 문장을 손수 골라 같이 걸어두었다. 민박을 하기로 결정한 것은 전주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서서학동 마을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첫 번째 이유고, 이 마을에 둥지를 튼 예술인들의 자생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남편이야 1층 작업실이 따로 있으니 그렇다 쳐도 글을 쓰는 작가가 자기만의 공간을 내어놓는다는 것이 김저운 씨에겐 큰 모험이었다. 그러나 사람 만나는 즐거움이 언젠가는 그녀의 글밭을 풍성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 제일 먼저 이사온 죄로 서학예술마을 촌장이 된 이형로 씨넓은 마당에 반해서 이 집을 고치고 다듬어 살기 시작한 부부. 서서학동의 주민이 된 것은 올해로 3년째다. 이곳에 정착하려는 다른 예술가들에게 집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나, 둘 모여든 사람들이 현재는 열네 가구쯤 된다. 마을 입구에는 '서학예술마을' 표지석도 섰다. 제일 먼저 이사온 죄(?)로 남편 이형로 씨는 서학예술마을의 촌장이 됐다. "맞은 편에 사는 한숙 화가가 이 마을에서 와서 십몇 년 만에 아기를 낳았어요. 제가 남부시장에서 새끼줄 사고 숯과 고추를 가져가서 대문에 매달아줬어요. 여기서 살아보니까 사람 사는 동네 같은 느낌이 들어요." 하루에 오며 가며 들리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어느 날은 하루 동안 30개가 넘는 찻잔을 씻기도 했단다. "그래도 이런 게 사람 사는 재미"라며 이형로 씨는 사람 좋게 웃는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아 마을축제를 열 계획이다. 공연도 하고 음식도 나누어 먹고 그렇게 정과 흥이 끓어 넘치는 '사람 사는 동네'를 만들고 싶은 이형로김저운 부부. 이들의 마당 넓은 집에는 상큼한 봄내음과 은은한 사람의 향기가 가득하다. /김정경 문화전문시민(전주MBC 작가)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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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4.19 23:02

【할리 데이비슨 마니아 김기헌씨】두두두둥~ 자유질주 짜릿한 인생

할리데이비슨의 매력은 심장 박동 소리 같기도 하고 말발굽 소리 같기도 한 특유의 묵직한 배기음이다. 할리데이비슨 마니아들은 바로 이 특유의 소리와 온몸을 울리는 진동 때문에 점점 더 빠져든다.할리데이비슨은 1903년 미국 밀워키에서 '페달 밟을 필요가 없는 엔진 달린 자전거'를 만들고자 뜻을 모은 윌리엄 할리, 아서 데이비슨이 그들의 이름을 걸고 만든 모터사이클 브랜드. 내성적인 김기헌(68)씨는 배기량(883~1450cc)이 크고 무게도 500kg 이상 나가는 커다란 오토바이에 푹 빠졌다. "30대 초반부터 모터싸이클을 타게 됐는데 산골 교사로 있으면서 늘 답답함이 저를 짓누른 것 같아요. 저의 극심한 스트레스에 대한 의사의 처방이 '즐겁게 살라'는 것이었죠." 가죽 재킷과 가죽 바지장갑선글라스에 번쩍이는 체인까지 결코 평범하지 않는 복장까지, 자유와 멋을 상징하는 '할리 정신'은 매력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같은 복장은 단순한 멋이 아니라 안전장치일 뿐이고 오히려 섬세한 이들이 더 많다"고 했다. "할리만의 문화가 남다릅니다. 절대 고속으로 주행하는 법이 없죠. 평균시속 80~100㎞로 달립니다. 투어링을 함께 하는 회원들 역시 '준법운전'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에 주변에 피해를 주는 일이 없어요." 그렇다면 할리를 잘 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처음에는 인적이 드문 공원이나 공터에서 충분히 연습한 뒤 정해진 목적지까지 주행하면 된다"면서 "초보자에게는 40km 정도 코스가 좋다"고 훈수를 뒀다. 장거리 투어를 하려면 경험이 풍부한 인솔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충고도 빼놓지 않았다. 할리의 가장 큰 재미는 낮고 푹신한 시트에 깊숙이 눌러 앉아 시속 80~100km 속도로 달리면서 경치를 감상하는 것. 특히 할리데이비슨 동호회 모임에서 2008년 떠난 유라시아 일정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비포장 도로에서 졸음과의 사투가 가장 힘든 장애물. 처음 예정으로 잡았던 일정들이 예상치 못했던 도로 사정으로 어긋나기 시작했으나 어릴 적 기억을 쥐어짜내며 부른 노래가 졸음을 쫓는 유일한 무기가 됐다고 기억했다.할리는 대부분 1인승이거나 최대 2인승이지만 그렇다고 혼자서만 즐기는 것만은 아니다. 가족들이 할리와 함께 차로 이동하면서 중간중간 쉬어가는 드라이브 여행을 즐길 수 있기 때문. 그는 "할리를 비롯한 바이크는 고속도로 통행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장거리 드라이브를 즐기려면 반드시 국도를 이용해야 한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결혼 이후 할리를 중단했다가 '육해공 취미'를 다 해보며 '금단 현상'을 겪은 그는 최근엔 새로운 철마(BMW 1200GS)로 넘어와 새로운 묘미에 빠졌다. "전국 곳곳을 몇 바퀴나 누볐지만 갈 때마다 느낌이 달라요. 그러니 아직 가 볼 곳이 많죠. 가다 쉬다 가다 쉬다 여유롭게 세상구경을 하다 보면 자동차로 다닐 때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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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4.12 23:02

복제 경주용 머신 '레플리카' 핸들 높지만 편한 '네이키드'

오토바이의 정식 명칭은 오토바이크(Autobike), 모터싸이클(Motorcycle)이다. 주변에서도 주말마다 동호회원들과 열을 지어 대형 오토바이를 끌고 투어를 나서는 이들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국내 대형 모터사이클 라이더가 최소 2만 명은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가장 큰 동호회를 운영하고 있는 가장 큰 단체 중의 두곳이 할리데이비슨의 동호회인 'HOG'(Harley Owners Group)와 BMW바이크의 'MCK'(Mottorad Club of Korea)다. 엔진 소리가 주는 박동감과 한 눈에 들어오는 스타일 때문에 운전하는 부류와 안전성과 기계가 만들어낸 가장 적합한 형태여서다. 그래서 세계의 주요 국가의 대통령이나 주요 인사의 의전용 모토싸이클로도 할리데이비슨이나 BMW가 많이 사용된다. 125㏄를 초과한 바이크를 운전하려면 자동차 면허가 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제2종 소형 면허를 따야 한다. 크게는 일반도로를 달리는 온로드(On-Road)와 비포장에서 타는 오프로드(Off-Road)로 나뉘는데, 125㏄ 초과 바이크의 경우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온로드는 레플리카, 네이키드, 아메리칸, 투어러 등이 속한다. 레플리카는 복제한 경주용 머신으로 'R카'라고도 불린다. 경주용 바이크와 같이 바이크 외장은 플라스틱이 덮여 있고 핸들 위치가 낮으며, 풋스텝이 높게 달려 있어 엎드려 타야 한다. 고속을 위한 것으로 최고 시속 300㎞를 너끈히 넘는 경우가 많다. 네이키드는 외장 플라스틱을 벗겨낸 뒤 풋스텝을 낮추고 핸들 위치를 높인 바이크. 레플리카보다 자세는 다소 편하다. 엔진 등이 드러나 있어 정비하기 편하고 가벼우며 고속 주행도 가능하다.할리 베이비슨을 대표적으로 꼽는 아메리칸도 있다. 앉아서 타는 스타일이어서 고속 주행은 힘들다. 보통 시속 80~100㎞ 된다. 또한 300kg이 넘는 무게를 감당하고 균형을 유지한 채 자유자재로 눕히고 세울 수 있는 체력과 힘, 요령이 필요하다. 어드벤처투어러의 경우 BMW 기종이 대표적이다. 세계일주용 바이크로 온로드와 오프로드 둘 다 주행이 가능하다.반면 오프로드는 산과 계곡 등을 달릴 수 있는 바이크로 높은 배기량에 비해 차체가 가벼운 것이 특징이다. /김정준 문화전문시민(전주 전통문화관 공연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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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4.12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