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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핫클릭' : 5. 7~12] "핏줄은 못 속여" 가족이라는 이름의 따뜻함

△5월 7일~ 12일 5월 둘째 주 전북일보 홈페이지 방문자들은, 지난주에 이어 2주 연속 문정곤 기자의 '군산에 이런 곳도 있었네⋯황금연휴 가볼 만한 곳'을 가장 많이 살펴봤다. 두 번째는 그리운 어머니와 가족의 소중함을 담담하게 담아낸, 유대성 왱이집 대표의 기고글 '자식은 부모의 등을 보고 배운다'이다. 유 대표는 "어머니가 조그만 책상 위에 책을 펼쳐두고 뭔가를 쓸 때면 슬그머니 그 옆에 가서 책 읽는 시늉을 하곤 했다. 가끔 책 읽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실 뿐이었다"며 누가 따로 시키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고 했다. 세 번째는 문민주 기자의 '여의도 3분의 2 군산 금란도 개발 6월 윤곽, 관건은 민자 유치'다. 지역의 숙원사업인 군산 금란도 개발은 총사업비만 1조 4000억 원으로 예상되면서, 세계적인 경기 불황 속 민간투자 유치가 관건이 될 전망이라고. 이밖에 전주시가 민선 8기 들어 LH와 협의를 거쳐 재추진하고 있지만, 1000억 원에 달하는 지하차도 개설문제로 또다시 난항을 겪고 있다는 이종호 기자의 '또다시 제동 걸린 전주 역세권 복합개발 사업',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7일 한국 방문 첫 일정으로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방문해 참배했다는 내용을 담은 '기시다, 일본 총리로는 12년 만에 현충원 참배' 등이 관심을 끌었다.

  • 기획
  • 이용수
  • 2023.05.13 13:44

[전북 가담항설] (4)'콩쥐팥쥐' 고향은 - 전주성 서문 밖 30리 '완주 앵곡마을'

전북엔 도민 사이에서 전해오는 수많은 전래동화가 곳곳에 담겨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전래동화를 꼽자면, 단연 ‘콩쥐팥쥐전’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권선징악형 전래동화라 할 수 있는 콩쥐팥쥐전은 전북에서 탄생한 향토 동화다. 그러나 콩쥐팥쥐전은 알아도 그 유래의 배경이 전북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도민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어린이에겐 다소 잔혹한 콩쥐팥쥐전의 결말도 여러 이야기가 뒤섞여 중구난방식으로 세간에 떠돌고 있기까지 하다. 이에 도내 한 작은 마을에서 탄생한 전북의 이야기, 콩쥐팥쥐전의 유래와 현황에 대해 자세히 파헤쳐본다. △콩쥐‧팥쥐의 고향은 어디? ‘전주성 서문 30리 밖 최만춘 댁’. 콩쥐팥쥐전에서 밝힌 주인공 콩쥐와 팥쥐의 집 주소다. 물론 콩쥐와 팥쥐 모두 실존 인물은 아니다. 오늘날 널리 알려진 콩쥐팥쥐전은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전국적 분포를 보이던 관련 설화를 1914년 대창서원에서 각색해 출판한 고전소설이기 때문이다. 콩쥐팥쥐전의 배경인 ‘전주성 서문 밖 30리’는 오늘날 완주군 이서면과 김제시 금구면 일대를 지칭한다. 인근 도로 명칭도 ‘콩쥐팥쥐로’인 만큼 이곳 지역과 콩쥐팥쥐의 연관성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완주군과 김제시는 지난 2005년부터 지역에 남아있는 콩쥐팥쥐 관련 명칭을 근거로 서로 ‘콩쥐팥쥐의 본고장’임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완주군은 이서면 앵곡마을, 김제시는 금구면 둔산마을이 '콩쥐팥쥐의 고향'이라고 각각 주장했다. 실제로 완주군 앵곡마을과 김제시 둔산마을은 거리상 200m 떨어진 이웃 마을이기에 두 마을의 주장 모두 어느 정도 신빙성을 갖췄지만, 학계는 여러 고문헌 등을 근거로 완주군의 손을 들어줬다. 콩쥐팥쥐전의 배경인 ‘전주성 서문 밖 30리’의 정확한 위치는 완주군 이서면과 정확히 들어 맞으며, 이곳에 '콩죽이 팥죽이' 등 관련 지명이 상당수 남아있는 점을 고려했다는 설명이다. △“어린이 동화맞아?” 콩쥐를 죽인 팥쥐를 처단해 계모 배 씨에게 먹인 원님 완주군 앵곡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콩쥐팥쥐전의 줄거리를 간단히 살펴보면, 전주성 서문 밖에 사는 최만춘은 아내 조씨에게서 콩쥐라는 딸을 두었다. 이후 아내 조 씨가 세상을 떠나자, 최만춘은 팥쥐라는 딸을 가진 배 씨를 후처로 맞아들였다. 배 씨는 친자식인 팥쥐만을 총애하면서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한 시련을 주는 등 콩쥐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착한 콩쥐는 여러 동물의 도움을 받아 여러 난관을 헤쳐나가고, 선녀가 준 꽃신의 인연으로 고을 원님과 혼인까지 하게 된다. 이후 콩쥐를 괴롭히던 팥쥐와 계모는 벌을 받고, 콩쥐는 원님과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콩쥐팥쥐전은 이처럼 아름다운 묘사만이 가득한 동화는 아니다.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 다소 어린이가 받아들이기에는 잔혹한 부분이 내포돼있기 때문이다. 실제 원작이라 할 수 있는 대창서원판 ‘콩쥐팥쥐전’의 결말 부분에 따르면, 팥쥐는 원님과 혼인한 콩쥐를 연못에 빠트려 익사시키고 자신이 콩쥐 행세를 하며 원님을 속인다. 이후 부활한 콩쥐에 의해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 원님은 팥쥐를 거열형(사지를 밧줄에 묶어 수레의 힘으로 각각 반대 방향으로 당겨 찢어 죽이는 형벌)에 처한 뒤, 그 시체를 젓갈로 담가 계모 배 씨에게 보낸다. 이에 배 씨는 극도로 큰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즉사하고 말았다. 이처럼 콩쥐팥쥐전의 결말은 오늘날 받아들이기엔 잔혹한 부분이 농후해 시중에 유통되는 어린이용 동화나 책에서는 ‘팥쥐와 계모 배 씨가 죄를 뉘우치고 콩쥐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형식으로 순화돼 출판되는 경우가 많다. 콩쥐팥쥐전의 본고장인 앵곡마을에 남아있는 이야기 속에서도 이 같은 잔혹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지역 전래동화 활용한 관광 콘텐츠 마련 앞서 콩쥐팥쥐 쟁탈전에서 우위를 점한 완주군은 콩쥐팥쥐를 완주 대표 브랜드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콩쥐팥쥐 살림집과 외갓집, 연못 등을 재현한 테마마을 조성과 함께 군립 도서관의 명칭을 '콩쥐팥쥐도서관‘으로 짓는 등 관련 콘텐츠를 개발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지자체 차원에서의 노력에도, 여전히 전래동화 콘텐츠를 통한 관광 효과는 미비한 실정이다. 현재 콩쥐팥쥐마을의 방문객이 하루 평균 100여 명에 불과하고, 대부분 이곳을 단순 캠핑장이나 숙박시설로 알고 찾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남원시 아영면에 조성된 '흥부마을'도 마찬가지다. 전래동화 '흥부전'의 본고장인 이곳 역시 관련 테마마을을 조성했지만, 여전히 눈에 띄는 관광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콩쥐팥쥐마을 관계자는 "방문객을 상대로 자체적으로 이곳이 콩쥐팥쥐 본고장임을 알리는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며 "앞으로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전래동화를 접목한 다양한 관광 문화콘텐츠 마련에 힘썼으면 한다"고 말했다.

  • 기획
  • 이준서
  • 2023.05.11 15:37

[참여&공감 2023 시민기자가 뛴다]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문화공동체의 힘

전 세계는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이 높다. 인간의 삶은 오랫동안 기후가 변화하는 흐름에 맞춰 적응해 왔고, 자연에 순응하면서 문화를 형성해 왔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급격한 기후변화로 폭염, 가뭄, 홍수 등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이 변화는 인간의 무분별한 산업활동의 영향으로 급격하게 표출되고 있어 ‘기후위기’라는 용어로 심각성을 강조하고 있다. 기후위기에 대한 심각성은 우리 사회에 자주 언급되면서 시급한 대응이 필요함을 계속 사람들에게 요청하고 있다. UN(United Nation, 국제연합)은 다양한 환경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갖고 환경보호 행동을 촉구하기 위해 ‘세계 환경의 날’을 지정하여 매년 6월 5일에 추진하고 있다. 제1회는 1974년 ‘오직 하나의 지구(Only One Earth)라는 주제로 시작되었고, 우리나라는 1996년부터 매년 6월 5일을 ’환경의 날‘로 지정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하루 만이라도 전 지구인이 기후위기에서 지구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기후위기를 대응하는 주체는 대부분 환경단체를 비롯해 민간단체에서 주도하는 경향이 많지만 행정과 기업에서도 ESG경영을 내세워 환경을 생각하는 운영방침을 정하고 있다. 따라서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깨닫고 위기에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우리 주변에서 계속 울리고 있다. 하지만 관심을 갖지 않으면 전혀 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목소리 중에는 해양오염문제를 예술로 풀어내는 문화공동체의 실천도 있다. 군산에서 활동하는 ‘군산시협동조합협의회(이하, 협의회)’는 2021년 지역 내 문화예술분야 및 지역문화 관련 협동조합 15개가 모여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고 공동체 회복을 목표로 설립되었다. 협의회가 발족할 수 있었던 계기는 지역 내에 사회적 경제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더불어 다이룸협동조합(이사장 김춘학)이 주축이 되어 공동체의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는 점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이 함께하는 목적은 네트워킹에서 시작되었지만 행동은 사회적 가치 실천으로 드러냈다. 협의회의 사회적 가치 실천은 ‘비치코밍(Beach Combing)’에서 시작한다. 협의회가 발족된 후 협동조합 간 협업사업을 고민하면서 지역사회와 가깝게 맞닿아 있고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답이 된 것이다. 이는 회원 기관 중 ‘섬에물드는체험협동조합(대표 임동준)’이 ‘선유도주민통합위원회’와 연계되어 있어 적극적인 기획이 되었다. 비치코밍의 첫 시작은 2022년 3월, 혹한기와 혹서기를 제외하고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을 ‘비치코밍데이’로 정해 활동이 진행하면서 부터다. 참여자들은 군산시협동조합협의회 회원 기관을 비롯해 기업, 선유도 주민, 일반참여자가 함께하고 있다. 이들의 활동 횟수가 거듭될수록 지역사회의 관심은 점차 높아졌고 학교나 타 지역에서도 참여를 희망하는 문의가 많아진 상황이다. 이는 누군가의 실천 목소리가 사회에 울려 지역의 관심으로 화답하는 것이다. 최근 국내외에서 진행되는 비치코밍활동은 문화예술로 풀어내는 작업이 많아지고 있는데, 협의회의 비치코밍데이를 들여다보면 한 시간 정도 선유도, 무녀도 등을 돌면서 포대와 집게로 해안가 쓰레기를 줍는 정화활동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들이 모아 놓은 쓰레기는 군산시 항만해양과에서 수거해 간다. 우리가 눈여겨 볼 점은 비치코밍 이후에 참여자들의 문화적인 네트워크 활동이다. 이들은 선유도에 있는 문화공간(섬에물드는체험협동조합)에 모여 버스킹 공연을 즐기고 지역예술인이 생산한 문화상품을 판매하는 플리마켓도 열어 참여자뿐만이 아니라 지역민이 함께하는 자리를 만들고 있다. 또한 해변가에서 주운 쓰레기나 조개껍데기를 활용하여 시나 그림을 그리는 예술체험을 공유하고, 가장 많은 공감을 얻은 작품 주인공에게는 친환경 제품을 선물로 나누고 있다. 이러한 활동은 환경오염에 대한 문제의식을 문화예술로 연결하여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크다. 비치코밍데이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의미는 환경오염과 기후위기라는 거대 담론으로 개인의 실천이 개별의 점처럼 작아 보이지만 지역사회와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과정에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동력을 생산하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또한 공동체활동은 환경문제를 인식하게 만들고 해결하기 위해 문화예술의 사회적 가치를 실현한다. 협의회는 올해도 비치코밍을 비롯해 4월부터 ‘클린워킹’을 시작하여 지역의 둘레길을 걸으며 환경정화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들의 활동이 그들만의 실천으로 끝나지 않고 지역사회에 많은 점들로 확산되어 연결할 수 있도록 우리의 관심은 필요하다. 더불어 협의회와 같은 활동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함께 동참하고 응원함과 동시에 문화예술이 가진 힘을 다양한 방법론으로 발현시킬 수 있도록 인식을 만드는 것이다. 첫 단계는 환경문제를 문화예술 영역에서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 학습과 담론형성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다음 단계는 전략적 정책을 제안하고 문화예술활동의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만드는 노력이 이어져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지역사회의 공동체활동을 연결하여 다양한 주체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결국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우리의 노력은 지속가능한 미래의 삶을 만드는 것이기에 지역사회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관심으로 지속되길 바란다. /구혜경 전북문화관광재단 기획정책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기고
  • 2023.05.10 15:23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헌사료로 본 후백제] ⑤견훤의 광주 도읍 실패와 후백제 전주 정도

후백제사에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삼국사기> 권 제 50 열전 제10 견훤전에 “무진주를 습격한 후에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오히려 감히 공공연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왕을 칭할 따름이었다(遂襲武珍州自王 猶不敢公然稱王)”는 내용이다. 자왕(自王)과 칭왕(稱王)의 관계다. 자왕은 견훤이 한 달만에 5000명의 무리들을 모아서 892년 무진주를 습격하여 자기 스스로 왕이라 하였는데, 왕으로서 즉위식은 커녕 다른 사람들에게 내놓고 왕으로 행세하지 못하고 자칭 왕으로 그쳤다는 이야기다. 견훤이 광주를 습격하여 ‘내가 왕이로소이다’선언하였는데, 광주 전남지역의 지방세력들은 왜 동조는 커녕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것일까. 자왕과 칭왕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신라하대 광주 전남지역의 정치적, 종교적인 상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신라하대에 진골귀족들이 왕권경쟁으로 골육상쟁을 벌일 때, 중앙정부의 권력은 약화되고 상대적으로 지방권력들은 성장하였다. 신라는 고대국가 발전 과정에서 각 지역의 소국의 지배층에게 촌주(村主)라는 관직을 부여하였고, 촌주의 재지권(在地權)을 인정해주는 방식으로 국가통합을 성취하였다. 촌주세력들은 중앙권력의 지방통제가 약화되는 상황을 틈타 호족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촌주들은 국가의 말단 행정 관리였지만, 실제 각 지방의 재지유력자들이었다. 신라하대 촌주들은 각 지방의 호족세력으로 성장하고 정치력, 경제력, 군사력을 장악한 성주(城主)와 장군(將軍)으로 등장하였다. 각 지방의 촌주, 호족들이 토착지배세력으로 성장하면서 종교사상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신라하대에 당나라 유학승들은 남종선(南宗禪)을 들여왔는데, 신라중대 왕권, 귀족 중심의 화엄종보다는 지방호족들과 결탁하여 선종을 지방에 뿌리를 내리게 한다. 불교계의 활동 무대도 중앙에서 지방으로 중심이동이 이뤄지고, 불사(佛事)의 주체도 왕실과 귀족에서 지방의 촌주, 호족들이 주도하였다. 교종이 선종을 배척한 이유가 있었지만, 선종이 지방독립적인 토착세력들의 정치적 성향과 서로 부합하였다. 선종승려들은 왕실과 거리를 두고 지방호족들과 사상적으로 유착하였지만, 산문에 따라서는 신라 왕실의 지원을 받고 요청에 따르며 중앙정치에 영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신라하대에 9산선문이 개창되면서 가지산문, 실상산문, 동리산문이 전라도 지역에 들어섰다. 가지산문의 개산조는 도의선사다. 도의(道義)는 784년에 입당하였다가 40여년 뒤 821년에 귀국하였다. 도의가 장흥 가지산 보림사에서 산문을 열었다. 가지산문은 도의-염거-체징-형미로 법통이 이어졌다. 실상산문의 개산조는 홍척선사이다. 남원 운봉은 남원경이 설치되어 있었던 곳이기에 신라지배층의 성향이 강하였다. 홍척(洪陟)은 신라왕실과 자주 왕래 소통하면서 실상사가 왕실사찰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실상산문은 홍척-수철-편운으로 법통이 이어졌다. 동리산문은 곡성 동리산 태안사에서 혜철선사가 개창하였다. 혜철(慧徹)은 완도 청해진의 장보고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혜철의 법통은 도선-윤다-경보로 이어졌다. 이처럼 신라하대 선종산문과 왕실과 지방세력은 상호호혜적 유착관계를 보여줬다. 신라말 고려초에 서남해안에는 다음과 같은 선종사찰이 산문을 열었다. 동리산문, 가지산문, 사자산문 문도들은 개산조 입적 이후에도 서남해안 일대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선종사찰은 대안사(태안사:곡성), 연곡사(구례), 쌍봉사(화순), 무위갑사(강진), 송계선원(광주), 보림사(장흥), 옥룡사(광양)가 분포하고 있었다. 의상(義湘:영암 도솔암, 화순 규봉사), 도윤(道允)·체징(體澄:능성 쌍봉사, 장흥 보림사), 영통(靈通:장흥 천관사), 도선(道詵:영암 도갑사, 강진 무위사, 화순 규봉사), 의조(義照:영암 달마산 서굴), 지눌(知訥:화순 규봉사), 진각(眞覺:강진 월남사), 원묘(圓妙:강진 백련사), 혜일(慧日:완도 법화암)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였다. 선사들의 활동 무대는 영암, 화순, 능성, 장흥, 강진, 완도 등지였다. 이처럼 신라 진성여왕 때까지 한반도 서남해안의 친신라계 선종 사찰과 승려들은 신라 왕실과 지방호족 사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진성여왕 6년(892)에 견훤이 서남해안에서 거병하였다. 신라하대 서남해안 선종도량과 왕실의 유착관계는 분명하나, 선종을 후원하였던 지방호족의 실체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신라하대 선종산문의 후원자들이 밝혀진 바가 없고, 문헌과 금석문에도 밝혀진 사례가 없다. 9산선문의 후원자들은 각 지방의 토착호족, 즉 토호(土豪)들은 분명한 듯하다. 왜냐하면 신라하대에 촌주세력이 불사(佛事)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신라하대 호족들은 토착호족(토호)과 낙향호족이 있었다. 토착호족은 촌주들이 재지기반으로 성장한 호족이라면, 낙향호족은 왕권쟁탈전에서 패퇴하여 지방에 은거하는 호족들이다. 토호가운데 정치적, 군사적 위상을 가진 성주·장군은 후삼국시대 후백제 견훤과 고려 왕건과 전투 과정에서 투항자 명단이 밝혀졌다. 각 지역의 토호들은 유력한 토성(土姓) 집단을 대표하는 호족이었다. 나말여초 토성집단의 대표 호족이 성주·장군이었다. 나말여초 서남해안 각 지역의 토성집단을 살펴보면, 왜 견훤이 광주에서 칭왕(稱王)으로 끝나고 말았는가를 유추해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각 군현별 성씨 자료와 전남종가회에서 밝힌 전남지역 성씨 자료를 분석해보면, 나말여초 당시 전남지역 토호집단의 정치적 성향이 엿보인다. 전라남도 장흥, 해남, 강진, 완도, 구례, 곡성, 영암, 화순, 능성 등의 토성집단을 살펴보면, 신라 사로6촌 및 신라왕실의 인물을 시조(始祖)로 두고 있는게 대부분이다. 대표적인 성씨는 경주이씨(나주), 무안박씨(무안), 김해김씨(화순,영암), 함양박씨(영암), 청주김씨(장흥), 밀양박씨(장성,나주), 진주정씨(보성), 양산김씨(강진), 낭주최씨(영암), 동래정씨(영광), 장흥위씨(영암), 경주정씨(순천), 반남박씨(영암), 창녕조씨(영암), 나주김씨(무안) 등이다. 이 성씨들이 나말여초 당시 토호세력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전남 서남해안 토성가문들은 친신라계 성향을 가졌으며, 궁예-왕건 정권과 유착은 예상되는 일이다. 전남 토성가문의 대표호족들은 반신라적 민중봉기를 일으킨 견훤을 지지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정서였을 것이다. 견훤과 전남지역 호족의 관계는 승주의 호족 박영규(朴英規:순천박씨 시조)와 김총(金摠:순천김씨 시조)을 사위로 맞이하였으며, 광주의 호족 지훤(池萱)과 강주장군 유문(有文), 오어곡성장군 양지(楊志)·명식(明式) 등 6인, 순주장군 원봉(元奉) 등이 후백제 견훤에 귀부한 호족들이었다. 하지만 정권을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견훤은 광주에서 8년동안 호족연합정권을 세우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전남지역이 가진 마한시대 전통의 지역적 토착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900년에 백제의 땅 전주로 향하였다. /송화섭(전 중앙대 교수) 후백제 견훤과 선종의 관계 나말여초기 왕권과 선종과 유착 관계는 견훤의 후백제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견훤은 곡성 태안사의 동리산문과 남원 실상사의 실상산문과 호혜 관계를 맺었다. 도당유학승 동진대사 경보(洞眞大師 慶甫)가 921년 사수천 신창진으로 들어왔다. 사수천은 현 만경강의 옛 지명이다. 신창진(新倉津)은 만경강 하구 나루터다. 견훤은 친히 경보를 맞이하여 남복선원(南福禪院)에 모셨다. 남복선원은 전주 남복산에 있었다. 남복산(南福山)은 현재 전주 완산칠봉이다. 경보는 동리산문(桐裏山門)에 속한 선종승려이며, 도선국사의 제자이다. 경보의 임피현 신창진 귀국은 견훤의 배려로 보인다. 경보는 일단 옥룡사로 갔다가 견훤정권의 국사로 남복선원에 돌아와 주석하였다. 924년 당의 유학승이었던 정진대사 긍양(靜眞大師 兢讓)도 희안현 제안포로 귀국하였다. 희안현 제안포는 부안군 보안면 남포 일대다. 운봉 실상사 조계암지에는 홍척국사의 제자인 편운화상의 부도탑이 있다. 편운화상 부도탑(보물 제2208호)은 원통형 형태인데, 이 부도탑 탑신 상단에 “홍척의 제자로서 인봉사를 개창한 편운화상의 부도이다. 정개십년 경오년에 세웠다(創祖洪陟弟子 安峰創祖 片雲和尙浮圖 政開十年庚午歲建)”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정개십년 경오년은 견훤이 900년 완산주에 도읍을 정한지 10년이 되는 해다. 이 명문은 후백제가 연호를 사용했다는 유일한 자료다. 나말여초 당시 중국 황제 외에 독자적인 연호를 쓸 수 없었는데, 후백제 정개 연호는 역사적 의미와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큰 것이다. 정개(正開) 연호는 후백제가 중국과 신라에 예속된 나라가 아닌 독립국가라는 선언적 의미가 있다. 이 편운화상 부도탑은 후백제 견훤정권과 실상산문의 지원과 지지의 호혜적 관계를 말해준다. 이러한 후백제 견훤정권의 선종 후원은 실상사 약사전 철조여래좌상의 조성이 말해준다. 이 철조여래좌상은 국내 철불의 효시이며, 운봉 일대의 철산지를 운용한 후백제 견훤정권의 상징적 유물이다. /송화섭(전 중앙대 교수) 편운화상 부도에 음각된 정개10년 연호 탁본.

  • 기획
  • 기고
  • 2023.05.09 15:43

[윤 대통령 취임 1주년, 한국지방신문협회 공동기획] 윤대통령 "전북도 숙원사업 꼼꼼히 챙기겠다”는 약속 가시화

5월 10일 취임 1주년을 맞는 윤석열 대통령이 선언한 국정비전은 ‘다시 도약하는 대한민국, 함께 잘 사는 국민의 나라’ 다. ‘어디서나 살기좋은 지방시대’를 국정목표로 정한 이유다. 한국지방신문협회 소속 9개사(전북일보 강원일보 경남신문 경인일보 광주일보 대전일보 매일신문 부산일보 제주일보)는 윤 대통령 취임 이후 지난 1년간 균형발전을 위한 각 시도별 핵심 공약 이행 상황과 향후 과제, 지방분권 이행을 위한 제도적 성과 등을 각 지역의 상황에 맞춰 3회에 걸쳐 게재한다. “전북에서 핵심적으로 추진하는 숙원사업들을 관계부처와 함께 지원하고 꼼꼼하게 챙기겠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월 10일 전북도청에서 열린 ‘제3회 중앙·지방협력회의’를 주재한 후 군산조선소에서 개최된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첫 블록 출항식’에 참석해 밝힌 말이다. 그러면서 전북도의 핵심 추진사업인 그린수소 생산클러스터와 글로벌 푸드허브 구축 사업이 순조롭게 추진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새만금 하이퍼튜브 테스트베드 구축 사업의 차질없는 추진도 언급했다. 이들 사업은 윤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에 밝혔던 공약 사업들과 맥을 같이 한다. 윤석열 정부의 ‘(전북)지역 균형발전 비전 및 국정과제’에는 새만금 공항과 항만 등 핵심 인프라 구축과 그린수소 생산 클러스터 구축 등이 7대 공약, 15대 정책과제로 반영됐다. 윤 대통령의 전북도에 대한 약속은 점차 가시화되고 있다. 지난 3월 전북도의 전략산업인 농생명·수소와 연계된 익산 국가식품클러스터 2단계와 완주 수소특화 산단이 국가첨단산업단지 후보지로 최종 선정됐다. 정부는 후속 조치로 이들 국가산단 조성사업이 사업시행자 선정 등의 절차를 거쳐 차질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키로 했다. 전북 국가산단 선정은 지난 2014년 전주 탄소소재 국가산단 선정 이후 8년 만으로, 이들 산단은 전북이 국내 식품산업과 수소산업 중심지로의 위치를 확실히 굳힐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윤석열 정부의 지역정책과제 중 하나인 전북특별자치도의 경우, 지난해 12월 관련 법률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전북도가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맞고 있다. 특별법 제정 이후 정부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총리 산하 지원위원회를 구성한데 이어 전북도에서도 민간차원의 국민지원위원회를 출범시키는 등 후속 작업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전북도는 전북특별자치도의 목표를 ‘글로벌 생명경제 도시’로 설정했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전북형 특례 655개를 발굴하고 특별법 개정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또 다른 지역정책과제인 새만금 신항만의 경우, 첫 번째 화물부두 개발사업인 ‘새만금 신항 접안시설(1단계) 축조사업’이 지난해 8월 착수됐다. 잡화부두 2선석과 배후 물류부지 19만㎡ 등이 조성돼 연간 176만 톤의 화물처리능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이와 함께 자치단체 주도의 지역특화발전이라는 현 정부의 기조에 따라 중앙-지방 정부의 협력 속에서 전북도는 국립호남권 청소년디딤센터와 지역 특화형 비자 시범사업, 지역혁신 메카프로젝트(동물용의약품 및 기능성 사료용 농생명 소재 개발) 등 대규모 국가사업을 잇따라 유치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군산항 제2준설토 투기장 건설과 새만금 지역간 연결도로 건설사업, K-Carbon 플래그십 기술개발 사업 등의 대형 국책사업도 무난히 예타를 통과했다. 다만, 윤 대통령이 약속했던 제3금융중심지 지정 논의는 오히려 후퇴,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앞서 정부 하에서 ‘전북혁신도시 제3금융 중심지 지정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윤석열 정부는 전북 제3금융 중심지 지정을 위해 매진하겠다”고 밝혔다. 제3금융 중심지 논의는 향후 진행될 2차 공공기관 지방이전 때 한국투자공사의 전북혁신도시 이전 여부에 따라 최종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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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준호
  • 2023.05.08 19:23

[정전 70주년] 50만 신병 배출한 제주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을 빼앗긴 정부는 ‘1·4후퇴’를 통해 부산으로 피난했다. 이후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정부는 전선에 안정적으로 병력을 투입할 수 있도록 장병들을 훈련할 공간이 필요하다고 판단, 1951년 3월 21일 대구의 제25연대를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로 옮겨 육군 제1훈련소를 설치했다. 이후 육군 제1훈련소는 1956년 문을 닫을 때까지 5년간 50만 장병을 육성, 서울 재탈환을 비롯한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후방 핵심 전략기지가 된 육군 제1훈련소 최초 모슬포에 설치된 육군 제1훈련소는 전쟁으로 인해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을 짓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천막으로 막사를 대신하면서 거대한 천막도시와 같은 모습이었다.훈련소의 면적은 198만㎡(약 60만평) 규모로 모슬포 남쪽에 본부가 있었고 보성리와 인성리 방면에는 연대들이 자리잡았다. 그 사이에 공병대와 헌병대, 정훈부, 통신대, 하사관학교, 병참대가 들어섰다. 모슬포에 육군 제1훈련소가 들어선 것은 이 지역이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가 중국 본토 침공을 위한 중간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1931년부터 군사기지가 설치됐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미군에 의해 일제들의 무기는 해체됐지만 각종 시설들은 그대로 사용되면서 1946년에는 조선경비대의 주둔지가 됐고, 이후 육군 제1훈련소로 사용됐다. 치열해지는 전쟁으로 인해 사상자가 늘어나면서 부족해진 병력을 빠르게 보충하기 위해 당시 제1훈련소의 훈련기간은 12주에서 3주로 단축됐다. 훈련기간이 크게 짧아진 대신 훈련은 더욱 엄하고 혹독하게 진행됐다. 다만 모슬포는 땅은 넓었지만 훈련소로 운영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화산섬인 제주의 특성상 빗물이 고이지 않고 모두 지하로 흡수되면서 물이 부족했고, 바람이 많이 불어서 훈련이 쉽지 않았다. 당시 해군이 화순 항만대 해안을 통해 상륙함과 수송선을 운영하며 장병과 물자를 실어 날랐는데 연중 비바람이 심하다 보니 배가 다닐 수 있는 날이 90여 일밖에 되지 않아 신병과 훈련 장병 수송에도 지장이 많았다. 이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육군 제1훈련소는 1956년 1월 훈련소가 해체될 때까지 50만 명의 장병을 배출, 후방 핵심 전략기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현재 훈련소 정문 기둥과 지휘소, 의무대 등이 남아 있어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 이 곳에는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던 해병 3기생들이 훈련을 받았던 훈련소 병사 건물과 세면장, 사열대 등도 남아있다. 이 시설들은 등록문화제 410호로 지정됐다. 모슬포에 대규모 군사 훈련장이 조성되면서 피난민들도 훈련소 주위에 몰려들었고, 모슬포는 군사 도시로 자리를 잡았다. 훈련병들이 몰래 가지고 나오는 군복이나 양말 등의 군용물품들이 거래됐고, 모슬포 주민들은 삶은 고구마를 배고푼 훈련병들에게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모슬포 중심에 위치한 용천수인 신영물에는 피난민들이 물지게로 물을 길어다 사용했고, 인근 도로변에는 고구마와 보리떡같은 간식을 파는 즉석 판매장이 들어섰다. 신영수 취수장 인근 빨래터에서는 대정부녀회원들이 훈련병들이 쏟아낸 엄청난 양의 군복을 빨래를 돕기도 했다. 육군 제1훈련소가 후방 핵심 전략기지로 자리잡으면서 정부 고위 인사들과 장성들도 잇따라 방문, 훈련을 참관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을 비롯한 참전국 대표단이 수시로 모슬포를 찾았다. 모슬포에 위치한 대정고등학교 앞 너른 터가 ‘워커 운동장’으로 불리고 있는데 이는 워커 장군이 훈련소를 방문한 기념으로 붙여졌다. 공군사관학교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귀포시 대정읍으로 이전, 대정초등학교에 임시로 자리를 잡았다. 1951년 2월 1일부터 4월 23일까지 80여 일의 짧은 시간동안 운영됐음에도 공군 장교 후보생 1000여 명을 배출했다. 이를 기념해 대정초 교정에는 훈적비가 세워졌으며 주민들을 이를 ‘보라매탑’으로 부르고 있다. 육군 제1훈련소가 창설된 이듬해인 1952년에는 의무대와 후송병원을 맡았던 제98육군병원이 서귀포시 대정읍에 설치됐다. 당시 제주도민과 피난민을 치료하는 제주 유일의 3차 의료기관의 기능도 수행했던 이 병원은 총 50여 개 병동이 지어졌는데 1964년 3월 대정여자고등학교가 개교하면서 병동 건물들은 차례차례 철거되고 현재 본 건물 한 채만 남아있다. △훈련병들을 다독인 ‘강병대교회’ 육군 제1훈련소가 설치된 이후 치열한 전선에 투입될 장병들을 정신력을 강화하기 위한 교회가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건립됐다. 당시 훈련소장을 맡았던 장도영 장군은 강한 병사를 기르기 위한 취지로 교회에 ‘강병대(强兵臺)’라는 이름을 붙였다. 전쟁이 한창인 시기였기 때문에 전문 기술자가 아닌 국군 공병대가 건설한 이 교회는 제주 현무암으로 지어졌으며, 현재까지 그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제주지역 군사유적지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전돼 2002년에는 등록문화재 38호로 지정됐다. 예배당 595㎡, 교육관 51㎡로 전체 건물 면적은 646㎡ 규모다. 건립 당시에는 목재 골조 위에 함석 지붕을 씌웠지만 2006년 보수공사를 벌이면서 지붕과 교회 첨탑이 새롭게 단장됐다.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빠른 병력 수급을 위해 육군 제1훈련소는 훈련 기간을 12주에서 3주로 단축한 대신 엄혹한 훈련을 이어갔다. 혹독한 훈련에 심신이 지치고 연일 들려오는 전선의 소식에 극도의 두려움을 겪게 된 훈련병들은 강병대교회에 들려 마음의 안정과 용기를 가졌다. 제주로 피난을 온 피난민들도 강병대교회에 마음을 의탁하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도했다. 특히 강병대교회는 주민을 위한 교육 공간이자 대민봉사 기관으로도 활용됐다. 모슬포지역의 첫 유치원인 샛별유치원이 1952년 이 교회에서 태동했고, 인근의 모슬포 중앙교회와 모슬포 제일교회의 모태가 됐다. 고등교육을 받은 군인들은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연말이면 전쟁고아들을 위해 산타할아버지로 변신, 옷과 신발 등을 선물했다. 강병대교회는 전쟁이 끝나고 12년 후인 1965년 공군 8546부대로 편입돼 기지교회로 새롭게 발족됐다. 1966년에는 교회 부설 야간 중학교인 신우고등공민학교가 설립됐고, 1981년 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2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제주일보=김두영 기자 ※사진설명 -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남아있는 옛 육군 제1훈련소 정문 기둥. - 현재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해병대 제9여단 91대대 안에 위치해 있는 옛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 - 옛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 내부의 모습. - 육군 제1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장병들에게 대정 부녀회원들이 주먹밥을 배급하는 모습. (사진제공 김웅철 향토사학자) - 대정여자고등학교에 남아 있는 제98육군병원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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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08 14:48

[뉴스와 인물] 강은호 “국방과학 기술의 미래, 새만금에 달려 있다”

방위산업(방산)이 전북의 새로운 미래 먹거리산업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4월 21일 새만금개발청과 국방과학연구소(ADD)는 새만금에 방산 신기술 개발을 위한 연구·실험 시설을 짓고, 관련 기업과 기관을 모은 방산클러스터를 조성하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전북도는 조직개편을 통해 방위산업팀 신설을 추진한데 이어 인력양성을 위해 전북대에 방산학과 신설을 제안하는 등 방산 육성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방산 분야 물적·인적 기반이 미약한 지역 상황을 감안한다면 진행 속도가 매우 빠른 편이다. 이 같은 상황에는 전북에 K방산의 씨를 뿌린 강은호 국방과학연구소 정책자문위원(58·김제·전 방위사업청장·사진)이 자리하고 있다. 강 위원은 새만금 방산클러스터 조성 밑그림에서부터 생태계 조성을 위한 기업유치 등 전북형 방산의 조기 착근을 위한 가이드 역할을 맡고 있다. 그는 전북에 방산클러스터가 조성되면 새만금은 국내 방위산업의 새로운 거점이 될 것이라면서 “향후 국방과학 기술의 미래는 새만금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방위사업청장을 역임하는 등 국내 방산 분야 전문가인 강 위원을 만나 전북형 방산의 전망과 비전을 들어봤다. - 최근 국방과학연구소(ADD)와 새만금개발청이 새만금에 방산클러스터를 조성하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했는데, 어떤 내용입니까. “핵심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신기술 관련 연구 및 실험 시설, 기업 입지이며, 둘째는 이와 관련된 교육과 인재 양성입니다. 특화연구센터를 거점으로 기초기술을 확보하고, 지역 대학과 연계해 연구활동을 수행하는 게 주된 내용입니다. (두 기관은 협약을 통해 인공지능(AI), 드론 등 첨단기술 개발을 위해 새만금 1권역에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실험시설을 구축하고, 3권역에는 관련 기업과 학교, 기관 등을 연계해 조성키로 했다.) - 창원·구미 등 기존 방산중심도시와는 어떻게 차별화되는지. "K방산의 고도화와 지속적 상승을 위해서는 방산 분야 연구개발을 통해 차별화된 기술을 확보해야 합니다. 이에 맞춰 새만금은 신소재·신기술 개발을 특화하는 것으로 계획됐습니다. 인공지능(AI), 드론 등의 첨단기술이 접목된 방산 기술개발에 주력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개발된 신기술은 각 지역별로 방산클러스터와의 협업이 이뤄집니다. 이와 더불어 신기술 개발의 지속화를 위해선 학문기반 마련이 중요한데, 현재의 직원 재교육 수준의 교육과정으로서는 이를 충족하기 어려습니다. 그래서 방산에 특화된 최고 수준의 인재 양성을 위해 대학 내 방산학과 개설 등 시스템화된 교육체계 구축작업도 병행될 것입니다." - 그동안 전북 방산클러스터 조성을 제안해 왔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먼저, 전북은 방위산업의 전략거점이 될 잠재력이 풍부합니다. 새만금이라는 풍부한 산업용지가 있고, 탄소산업을 비롯해 미래 항공우주산업에 필요한 소재산업에 강점이 있습니다. 탄소 등 연구인력 집중화가 가능한 대학도 있고요. 여기에 기존 방산중심도시와의 접근성도 좋아 신기술 개발을 통한 협업으로 새로운 방산 거점이 될 수 있는 요건도 갖추고 있습니다. 더불어 전북은 그동안 아쉽게도 36개 국방벤처센터 협약기업이 있는데도 불구, 이를 집적시킬 거점연구센터가 없어 시너지 효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 언제부터 전북에 방산을 육성할 생각을 갖게 됐는지. “4년 전부터인데, 처음 전북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는 탄소가 전주에 있기 때문입니다. 방산은 탄소와 관련성이 높습니다. 모든 무인기와 우주기기, 그리고 전차와 장갑차 등은 무게를 줄이기 위해 철 보다 1/4 정도 가벼운 탄소 소재로의 교체 요구가 커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전북대와 군산대 등에 탄소 관련 연구원들도 많아 그들과 협업하면 매우 큰 시너지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었죠. 그런 가운데 지난해 여름께 전북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김관영 지사를 만나 전북이 방산 분야에서 참여할 수 있는 분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기존 방산중심도시와 충돌하지 않은 신소재·신기술 개발에 대한 저의 제안을 김 지사께서 흔쾌히 동의해 주면서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 후발주자인 전북이 방산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우려도 있습니다. "만약 10년 전에 저에게 이런 요청이 있었으면 못 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시기가 도래했습니다. 방산에 대한 국민 인식이 개선됐고, 국가적으로 신기술 육성의 필요성이 높아진 상황 속에서 전주 탄소산업 등 소재산업과 새만금 입지 조건 등이 딱 맞아떨어진 것이죠. 또한 전북도를 비롯한 대학의 적극적인 참여 등이 잘 조합되고 있어 전북에서의 방산은 무조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 새만금에서의 가시적인 성과는 언제쯤 나올 것으로 예상하는지. "내년께 시설이 완공돼 연구개발 작업이 시작되면 하반기부터 관련 기업들이 들어올 겁니다. 최소 15개 정도의 기업이 입주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방산 분야는 완전 자동화가 불가능한 산업이라 고용효과가 곧바로 나올 것이라, 2∼3년 내에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15년 후면 국내 방산 허브로 성장해 국방과학 기술의 미래가 새만금에서 결정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 전북형 방산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기업들이 전북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프라 구축이 시급합니다. 고속도로와 KTX가 우선적으로 중요하고, 공항과 항구도 빨리 만들어야 합니다. 더불어 기업 연구원 및 종사자들이 생활하기 편하도록 정주 여건와 교육시설 등을 개선해야 합니다. 다행히 도지사를 비롯해 전북대·군산대 총장과 새만금개발청장 등이 매우 적극적이어서 무난한 해결이 기대됩니다. 더불어 전북도민들의 관심과 성원도 매우 필요합니다. 관광·문화 도시도 좋지만, 최첨단이 결합된 새로운 미래 먹거리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도민들의 의지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 강은호는...방위사업청장 출신 국내 방위산업 전문가 1966년 전북 김제 출생. 전주 완산고-연세대(행정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직후 행정고시(제33회)에 합격해 공직에 입문한 후 방위사업청(이하 방사청)에서 16여년을 근무한 방산 전문가. 2006년 방사청 개청 당시부터 근무한 원년 멤버로, 유도무기사업부장, 방산기술통제관, 기획조정관, 사업관리본부 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2020년 12월 방사청장에 임명됐다. 방사청장 재직 시절, 방산 수출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수출 ‘효자’로 손꼽히는 K9 자주포를 중심으로 한 방산 수출이 100억 달러를 돌파하는 등 방산 수출이 수입을 초과한 방산 수출국으로 전환되는 성과가 그의 재임 시절에 이뤄졌다. 그는 오래전부터 신기술 개발과 방산 인력 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K방산 성공은 기술과 제조 능력, 정부의 일관된 정책 지원이라는 3박자가 맞아떨어진 결과”라면서 K방산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미래 신기술 개발과 함께 이를 방산에 접목할 수 있는 우수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교육체계 구축을 역설했다. 서울=김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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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준호
  • 2023.05.07 19:44

[지난 주 '핫클릭' : 4. 30~ 5. 5] 황금연휴 가볼 만한 숨은 명소는

△4월 30일~ 5월 5일 비슷하지만 다른 말, 가족(家族)과 가정(家庭). '가족'은 부부나 부모·자녀와 같이 혼인이나 혈연 등으로 맺어진 사람들을 뜻하고, '가정'은 가족이 모여 사는 '생활 공간'을 말한다. 가족은 '관계', 가정은 '공간'에 집중된 것이다. 가정의 달 5월 첫째 주, 전북일보 홈페이지 방문자들은 문정곤 기자의 '군산에 이런 곳도 있었네⋯황금연휴 가볼 만한 곳'을 가장 많이 클릭했다. 이 기사는 군산 '청암산 둘레길', '금강습지생태공원', '말랭이 마을', '비응 마파지길' 등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지역의 숨은 명소를 소개했다. 특히 '말랭이 마을'은 일제강점기 아픈 역사가 스며있고, 배우 김수미 씨가 군산초등학교에 다닐 적 살던 생가도 복원돼 있다고. 두 번째로는 이강모 기자의 '조국 딸 조민 전주 한옥마을 방문 눈길'이 관심을 끌었다. 지난 4월 19일 전주 한옥마을 한벽문화관에서 북콘서트를 열었던 조국 전 법무부장관의 딸 조민 양. 이 기사는 그녀의 1박 2일 전주 여행을 담았다. 세 번째는 이종호 기자의 '서민은 못 들어가는 전주지역 임대 아파트'이다. 임대 보증금이 무려 4억 원, 분양 아파트 뺨치는 전주 임대 아파트를 비판대에 올렸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접어야만 했고 이젠 임대 아파트도 언감생심이 된, 서민은 그저 서럽다. 이밖에 송승욱 기자의 '익산 함라산, 전북 대표 힐링 트레킹 명소 부상', 김원용 기자의 '화재 발생 완주 대주코레스 정상화 팔 걷어' 등이 주목받았다.

  • 기획
  • 이용수
  • 2023.05.06 13:10

[동행, 2023 전북지플] (2) 전북 현안 17개 의제 선정

2023년 전북지역문제해결플랫폼(이하 전북지플)이 시민이 제안한 복지·경제·환경 관련 17개 의제를 선정하고 지역 문제 해결을 위한 발걸음을 시작했다. 전북지플은 3일 오후 2시 전주대학교 본관 147호에서 2차 집행위원회를 열고 올해 추진할 실행의제를 확정했다. 이날 회의에는 의제 제안자·전문가·공공기관 관계자 등 32명의 위원이 참석해 14개의 신규 의제와 지난해에 이어 추진하게 되는 연속 의제 3건을 실행의제로 확정했다. 이번 2023 전북지플을 통해 새롭게 선정된 의제는 △초고령화 사회 대비 노인 맞춤형 의료서비스 제공 및 지원(전주) △민간거점을 활용한 재활용폐기물 수거체계 구축 시범사업(전주) △걷기 편한 동네 만들기 ‘남원시 쉼(배려)의자’와 ‘개방화장실’(남원) △지속가능한 지역축제 만들어 탄소제로 사회에 기여(전북) △탄소중립을 위한 제로화석 연료 프로젝트! 겨울철 취약계층의 탄소섬유 난방환경 개선사업(전주) △용담댐 지역동행 프로젝트 ‘용담댐 탄소제로형 스마트 에코마을 시범사업’(진안) △스마트 건강장수 마을 만들기(순창) △빈집의 재탄생! 외로운 도시민들의 고향집이 될 전주관계안내소(전주) △‘전주 인친’프로젝트-유니버셜 인권친화상점(전주) △지역 사회 정착을 위한 청년커뮤니티의 안전망 구축(전북) △자립 청년 창업 지원 프로젝트(전주) △안전한 자전거통학 시범구간 만들기(남원) △고군산도 비치코밍(군산) △지역 청소년들의 교육 소외 해소를 위한 온라인교육장 구축(장수) 등이다. 14개의 신규 의제는 지난달 25일 지역문제 제안자, 분야별 전문가 등 총 89명의 참여자가 온·오프라인을 통해 수렴된 237개 의제 중 논의를 거쳐 선정한 것이다. 지난해에 이어 추진되는 연속 의제는 3건으로 △무장애도시 진안만들기 △민관공 협력 제로플라스틱 운동 △커피찌꺼기 활용 수거체계 구축 등이다. 선정된 의제들은 과거 관에서 해결을 주도하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주민들이 주도적으로 지역 문제제기 후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진행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특히 민간 뿐만 아니라 지자체, 공공기관 등 의제와 관련된 지역사회 전반의 인력과 재정을 연계하는 협업시스템을 구축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해결을 이뤄 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선정된 의제들은 이후 5월 말 매칭데이를 통해 협업체계를 단단하게 하고 6월부터 10월까지 5개월간 각각의 의제를 실행에 옮긴다. 한동숭 공동집행위원장(전주대학교 게임콘텐츠학과)은 “좋은 의제로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실행 주체들이 이 의제를 실행할 능력이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공공기관과 민간단체가 최대한 자주 협의 테이블을 가지고 활동 주체가 제대로 실행할 수 있도록 인프라를 갖추는데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고 밝혔다. 김재우 전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앞으로 집행위원회와 연계 기관들이 협업해 14개 의제들의 질적인 차이가 크지 않도록 철저한 준비와 실행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한편 지역문제해결플랫폼은 지난 2019년부터 행정안전부 사업으로 시작돼 올해로 5년차를 맞았다. 전북은 지난해 전북도 등 57개 기관과 시민 8340명이 힘을 모아 17개 의제를 실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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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은현
  • 2023.05.03 16:00

[참여&공감 2023 시민기자가 뛴다]우리나라 숨은 비경(祕境) 탐방, 황매산-당신의 마음 속 철쭉 꽃 피우다

황매산(해발 1113m)은 경상남도 합천군과 산청군의 경계 지점에 있다. 1983년 합천군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합천호의 푸른 물속에 잠긴 산자락의 모습이 마치 호수에 떠있는 매화 같다고 하여 수중매(水中梅)라고도 불린다. 아침 일찍 서두른 덕분에 오전 8시 산청군 제1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된 차가 이미 가득해서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주차 안내하는 사람하고 눈이 마주쳤다. 되돌아 나가라고 할까 봐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다행히 한 자리 비어있어서 겨우 주차할 수 있었다. 주차장 왼쪽에 ''등산로 입구'라는 안내표지가 선명하게 보여서 산행을 시작했다. 황매산은 봄에 철쭉으로 불타오른다. 소백산, 바래봉과 더불어 한국의 철쭉 3대 명산이다. 그런데 조금 일찍 방문했나 보다. 철쭉나무가 산을 덮었는데, 아직 대부분은 봉오리가 맺힌 상태였다. 황매산 산행은 처음에 폭신폭신한 흙길로 시작한다. 황매평전에서 황매산 정상을 향하여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며 가파른 나무계단이 나오고 정상이 가까워지면 줄을 잡고 암벽을 타기도 한다. 황매산 정상에 가까울수록 바람이 거세지고 사람들도 많아졌다. 올라가는 사람과 내려오는 사람들이 좁은 바윗길에서 교차하느라 한참씩 기다리는 곳도 여러 곳 있었다. 산행할 때마다 느끼는 건데, 처음 보는 사람끼리 서로 인사하고 양보하면서 오르고 내려오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드디어 정상에 도착하니 기념사진을 찍기 위한 대기 줄이 길게 늘어서 있어 놀랐다. 그리고 오늘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 빼곤 모두 부지런하구나!’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부는지, 모자가 날아가고 사람들이 휘청거렸다. 정상석이 두 곳이다. 바위 꼭대기 위에 원래 정상석이 있고 그 바로 아래에 새 정상석이 있다. 원래의 정상석은 위험하니 바위를 올라가지 말라는 안내표지판이 있지만, 무시하고 굳이 바위를 기어서 올라가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이렇게 안전 수칙을 지키지 않은 채 마음대로 하기에 많은 안전사고가 발생한다. 교사로서의 직업의식이 발동해서 위험하니 올라가지 말라고 적극 말리고 싶었지만, 통할 것 같지 않아 오지랖을 누르며 참았다. 황매산 정상에서 지리산 천황봉, 웅석봉, 필봉산, 왕산 등이 보인다. 오늘은 운무 때문에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한참 기다린 덕분에 정상석에서 무사히 기념 촬영을 하고 하산하기 시작했다. 멀리 보이는 널따란 황매평전엔 철쭉꽃 봉오리가 맺혀있고 가을에 넘실대던 억새가 베어져 억새밭은 황량하게 보였다. 모산재 방향의 합천군 소재 철쭉 군락지가 개화된 듯이 보였다. 철쭉 군락지로 내려가는 길은 힐링의 길이다. 황매평전의 탁 트인 시야는 푸른 바다 못지않게 시원하다. 가슴이 뻥 뚫리는 보약이다. 평지라서 걷기가 쉽지만 그래도 힘들면 그냥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어도 된다. 작약도 작은 아직은 작은 키지만 쑥쑥 자라고 있어서 앞으로 꽃을 피우면 또 다른 황홀경을 선물할 것 같다. 모산재 방향의 합천군에 위치한 철쭉 군락지에 도착했다. 이제 막 봉오리를 터트린 철쭉꽃이 밝은 아침 햇살을 받아 화려한 분홍 꽃바다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불청객인 세찬 바람에 사정없이 흔들리면서도 꿋꿋하고 화사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에 경외감마저 들었다. 전국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철쭉꽃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바빴다. 철쭉꽃보다 더 화려한 옷차림과 즐거운 웃음소리가 청매산에 가득 울려 퍼졌다. 이곳에선 모두 근심걱정 없이 온통 행복한 사람들뿐이었다. 혹시 우울하거나 힘든 사람들은 지금 바로 청매산을 찾길 바란다. 마음 속 깊이 철쭉꽃으로 물들며 화사한 행복이 피어난다. 예전엔 합천군 오토캠핑장 쪽에서 산행했다. 오늘은 산청군 쪽에서 산행 시작하고 정상 인증 후에 합천 젤 아래쪽 <철쭉 군락지>에 갔다 다시 산청 주차장으로 원점 회귀하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가을엔 황매평전의 억새밭이 장관이다. 때 지난 억새를 자르고 정리를 해놓은 모습을 보니 가을 억새가 그냥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황매산에서 봄엔 철쭉을, 가을엔 억새의 장관을 선물 받는 것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생하는 손길이 있음을 깨달으며 감사함이 몰려왔다. 주차장 아래 축제장에는 꽃잔디가 진분홍 비단 카펫으로 빛나며, 만개하지 않은 철쭉꽃의 아쉬움을 달래줬다. 산행 직후라 마침 배가 고픈데 먹거리 장터가 열리고 있었다. 반가워서 한걸음에 달려가서 묵 무침을 안주로 맥주 한 잔과 산채 비빔밥을 맛있게 먹었다. 4.29~5.14일까지 '제39회 황매산 철쭉제' 가 개최 중이다. 주소는 산청군 차황면 법평리 1-1번지이다. 철쭉꽃이 피기 시작하니, 만개 시기를 잘 맞춰서 산행하면 환상적일 듯하다. ‘당신의 마음 속 철쭉 꽃 피우다’ 산청군 축제장에 설치된 문구이다. 봄날이 무르익고 있다. 남은 봄이 고맙다. 나중이란 없다. 지금이 온전히 즐겨야할 때이다. 하송 시인, 교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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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03 15:46

[전북 가담항설] (3) 서로 다른 문화 공존하는 전주 한옥마을(하)- 근대 한‧일 건축물 공생

전주 한옥마을은 25만㎡ 부지에 700채가 넘는 한옥이 조성된 전국 최대 규모 한옥촌이지만, 그 명성과 규모에 비해 정작 역사는 100년이 채 안 된다. 수백 년간 형성돼 오늘에 이른 서울 북촌과 경주 한옥마을과 비교하면 무척 짧은 편이다. 이로 인해 전주 한옥마을에서 전통 한옥의 모습은 보기 어렵다. 658채의 한옥은 대부분 유리로 만든 창문과 여닫이문, 화장실까지 실내에 갖춘 근대 한옥에 가깝다. 특히, 태조로를 중심으로 경기전 방면엔 일제시대 공공 기관으로 쓰이거나 일본인이 주로 거주하던 일본식 가옥의 모습도 남아 있다. 전주 한옥마을은 수백 년간 이어온 전통 한옥촌이라기보다는, 근대 한옥과 일본식 가옥이 공존하는 역사적 장소인 셈이다. △일본 상인 피해 형성된 전주 한옥마을 본래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오늘날 중앙동‧다가동 일대엔 1388년 축성된 이후 500년 넘게 전주의 중심지로서 기능한 전주부성이 존재했다. 당시 전주의 도심이라 할 수 있는 전주부성 안에 거주하려면 신분이 높거나 경제적으로 부유한 양반층이어야 했고, 자연스레 성문 밖 중간지역은 상인이나 천민 등 서민계층으로 채워지게 됐다. 이러한 거주 형태가 무너진 것은 일제에 의해서였다. 1911년 일제가 '폐성령'을 실시해 풍남문을 제외한 전주부성 성곽을 모두 철거하자, 서문 밖 전주천 인근에 거주하던 일본 상인들이 전주부성 중심 상권 일대로 거주지를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날이 갈수록 그 수는 점점 늘어났고, 1930년대에 이르자 전주부성 안이었던 중앙동·다가동 일대는 이곳 상권을 장악한 일본 상인들이 지은 일본식 가옥이 가득차게 됐다. 반대로 점차 풍남문 밖 교동·풍남동 일대엔 일본인에 대한 반발로 뭉친 한국인을 중심으로 한옥촌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것이 오늘날 ‘팔작지붕이 늘어선 곡선 형태의 한옥’이 가득 찬 전주 한옥마을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 한옥마을의 정체성·진정성 고려한 정책 필요 기존 전주부성 안에 살던 한국인이 일본인에 대한 대립의식으로 성 밖에 새로운 한옥촌을 형성하자 성곽이 있던 태조로를 중심으로 양 집단의 거주 형태가 나뉘게 됐다. 실제로 오늘날 경기전 인근 가옥 일부는 내부 가운데 자리에 복도가 놓이는 등 전형적인 일본식 건축기법을 보여주며, 2층 가옥에 한국식 기와지붕을 얹어놓기만 한 혼합 가옥 형태다. 게다가 경기전 동문 방향엔 1927년부터 일제시대 경찰서장의 관저 등 일본식 공공 기관 건물도 남아 있다. 반면, 전동성당에서 전주향교 인근의 가옥들은 일본식 건축기법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으며. 서울 북촌과 비슷한 형태의 단층집으로 구성된 한옥이다. 사실상 전주 한옥마을은 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일본식 가옥과 한옥 수백여 채가 공존해 역사적·건축사적으로 의미 있는 복합 공간인 셈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인이 형성한 한옥촌은 일본인이 남긴 일본식 가옥에 밀려 관광객의 철저한 외면을 받고 있다. 일본식 가옥이 남아 있는 경기전 인근은 연일 수많은 방문객으로 문전 성시를 이루고 있는 반면, 근대 한옥촌이 형성된 전동성당∼전주천 인근은 발길이 끊겨 대부분 임대나 매매 현수막이 걸려 있는 실정인 것이다. 이는 전동성당 방면 단층 가옥이 관광 상품으로서 관광객의 이목을 끌 가치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각종 문화시설이나 먹거리 점포 등이 일식 가옥이 혼재된 경기전 방면에 밀집된 탓이다. 이에 대해 전북대학교 한옥건축학과 한 교수는 "한옥마을은 그저 박제된 전통 마을이 아닌, 근현대부터 오늘날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생활을 추구해온 삶의 터전"이라며 "한옥 뿐만 아니라 일본식과 서양식 건물이 혼재된 복합 공간으로서 한옥마을의 정체성과 진정성을 고루 살린 정책을 지자체 차원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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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준서
  • 2023.05.02 15:45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헌사료로 본 후백제] ④영산강과 영암만, 압해도 일대 후백제 이야기

한국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10세기 초반의 한반도 지도를 보며 한 번쯤 의아하다는 생각을 해봤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호남지역을 기반으로 성립한 후백제의 배후가 그들 영역으로 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형세는 언제 이루어졌을까? △후고구려 궁예, 송악의 대호족 왕건을 품다 견훤이 완산주(전주)에서 백제의 부활을 선언한(900) 이듬해, 신라 북변의 거주민들을 향해 잡초로 우거진 평양을 환기하며 고구려의 복국을 외친 이가 있었다. 신라의 왕자 출신인 궁예였다. 어릴 적 신라 왕실에서 벌어진 구구절절한 사연은 차치하고, 894년 명주(강릉)에 입성한 뒤 자립하는데 성공한 궁예는 동해안을 크게 휘돌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자신을 거두어준 양길과의 대전 준비가 한창이던 896년, 송악(개성)의 호족 왕륭・왕건 부자가 궁예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오랜 시간 바다를 주 무대로 활동하며 여러 해상세력과 폭넓은 호혜 관계를 형성해왔던 그들의 선대였다. 왕건의 증조부인 작제건의 할아버지가 당 7대 황제 숙종이라는 ‘고려세계(高麗世系)’의 설명은, 물론 왕씨 가문의 유구함과 고려 왕실의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한 분식이겠지만, 수용 여부와 별개로 그들 선대의 활발한 해상활동을 암시한다. 송악 일대의 확보는 거들뿐, 궁예를 크게 고무시킨 것은 이들이 소유한 ‘해상력’이었을 것이다. 궁예는 곧장 왕륭을 금성(金城, 김화) 태수로, 왕건을 발어참성(勃禦槧城) 축조의 책임자이자 성주로 임명하여 그들의 귀부에 부응하였다. 두 부자를 앞세운 후고구려의 수군은, 적극적인 해양 활동을 통해 웅비를 꿈꾸던 견훤의 후백제에 장차 큰 위협을 예비하고 있었다. △후백제와 후고구려, 나주에서 최초로 맞붙다 견훤은 무진주(광주)에서 나라를 열었다. 의견이 분분하나, 견훤이 비장에 임명되어 방수 임무를 수행한 ‘서남해’의 위치를 나주나 그 인근으로 보는 견해들도 있다. 그렇다면 이곳은 후백제 건국의 기반이 되는 소중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9세기 후반의 나주는 느슨한 형태로나마 견훤이 차지하고 있었으나 곧 궁예에게 귀부한 공간이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궁예는 903년에 왕건을 보내 광주 경계의 금성(錦城)을 비롯한 10여 군・현을 빼앗고, 이곳을 나주로 고쳤다고 한다. 이보다 먼저 901년 8월에 대야성(합천) 공략에 실패한 견훤이 군사를 ‘금성 남쪽’으로 옮겨와 그 주변을 약탈하고 돌아간 적이 있다. 제 영토를 ‘노략질’하는 군주가 있을까? 아마도 나주를 비롯한 이 영산강 유역의 호족들은 이 이전부터 후백제의 영향력 밖에 있었던 것 같다. 당연한 말이지만, 육로를 통해 후고구려가 후백제의 지배 영역을 관통하여 나주 일대까지 진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후고구려의 수군이 후백제의 뒷공간을 공략한 결과이다. 이렇듯 903년의 나주는 후삼국시대를 열어젖힌 두 신생 국가의 물리력이 충돌한 최초의 시・공간인 셈이다. 강진 무위사에 세워져 있는 선각대사 형미(迥微)의 탑비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이 서남부 지방의 경략에 후고구려왕 궁예가 친히 거둥했다고 한다. △후백제와 후고구려, 바다에서 외교로 맞붙다 탁월한 안목과 적절한 인식을 바탕으로 국제 관계에 민첩하게 대응하여 국익을 취하는 것이야말로 한 나라의 원수가 지녀야 할 중요한 자질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완산주에서 백제 복국을 공식 발표한 견훤이 첫 번째로 선택한 정치적 행보는 중국의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는 일이었다. 견훤은 정국 운영 과정에서 변수가 발생했을 때마다 오월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후백제가 오월에 손을 뻗치던 즈음, 중국 역시 5대 10국으로 분열된 혼란기였다. 중원의 패권 다툼에 여력이 없었을 오월로부터 후백제가 군사적인 도움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들로부터 책봉을 받아 국내・외 정치에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또한, 후고구려가 자취를 감춘 918년 그해에 견훤은 오월에 ‘말’을 진상하였다. 그는 월주(越州)에서 생산된 ‘도자기’를 적극적으로 수입하기도 했다. 경제적・문화적 목적에서의 교류 맥락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런데 909년에 염해현(鹽海縣) 앞바다에서 오월로 들여보내는 선단이 후고구려군에게 붙잡힌 일이 발생하였다. 신안, 무안, 영광 등 위치 비정을 둘러싸고 합의가 여의찮으나, 염해현은 후백제가 오월과의 공세적인 교섭을 위해 거점으로서 중요하게 여기던 곳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후백제의 해양 활동이 상당히 위축되었을 것임은 불 보듯 뻔하였다. 궁예는 나포의 주역인 왕건을 크게 포상하였다. 이 사건은 후고구려에게 서남해 일대의 장악을 위한 자신감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압해도의 해상영웅 능창, 궁예에게 욕보이다 외교 선단의 피랍이라는 국가적 위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신안 압해도 인근에서 능창(能昌)이 후고구려에 사로잡혔다. 압해도의 송공산성 일대를 드나들며 인근 해상세력을 규합한 능창은 ‘수달’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수전에 능하였다. 지금 송공산 앞에는 압해도 일대를 주름잡았던 능창을 기리는 기념비가 우뚝 서 있다. 하늘은 주유를 낳았지만, 제갈량도 함께 보냈다. 그를 붙잡은 것은 이번에도 왕건이었다. 능창은 철원으로 압송되었고, 궁예에게 갖은 모욕을 당한 뒤 저잣거리에서 참수되었다. 능창과 견훤이 무슨 관계에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궁예는 능창이 보유한 ‘해상 공격력’을 포기하였다. 왕건에 대한 신뢰를 엿볼 수 있는 동시에, 능창을 욕보임으로써 어떠한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메시지의 수신처는 후백제 왕도 전주였을 것이다. 훗날 고려 후기의 관료 조준은 우왕에게 “우리 신성(神聖, 태조)께서 신라와 백제를 평정하지 못하셨을 때, 먼저 수군을 조련하시어 친히 누선을 타고 금성의 항복을 받아 점령하시니, 여러 섬의 이익이 모두 국가에 속하게 되었고 그 재력에 힘입어 마침내 삼한을 통일하시었습니다”라고 한 바 있다. 이처럼 고려인들에게 나주 일대의 공략 성공은 고려의 후삼국 통합을 위한 정초(定礎)로 회자되었다. 반면, 뒷문 단속에 실패한 후백제는 후삼국 쟁탈전의 레이스 도중에 계속해서 뒤를 쳐다봐야만 했다. 앞만 보고 달려도 모자랄 판에 자꾸만 뒤까지 신경 써야 했던 후백제였다. 물론 후고구려나 고려 역시 빼앗은 거점을 지켜내기 위해 인적・물적 투입을 지속해야 했다는 점에서 등가적이다. 그러나 후백제에게 후방 제어 실패의 대가가 뼈아팠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홍창우 (전남대학교 사학과 강사) 후백제 역사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자료’의 문제 궁예와 견훤은 후삼국 쟁패전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하였다. 이는 고구려・백제 복국 운동의 ‘자초지종’에 대한 자기주도적 설명 기회의 상실을 의미한다. 정작 그 권한은 이들을 패망의 길로 내몰았던 왕건의 고려가 움켜쥐게 되었다. 한 사람은 왕건이 전면에 나서 혁명을 일으켜야 할 빌미를 제공한 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에게 끝까지 칼을 겨누며 훼방을 놓은 이였다. 왕건에게 궁예는 ‘창업’, 견훤 은 ‘수성’의 명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왕건은 궁예의 신하였다. 자신이 섬기던 자를 내몰고 왕이 된 인물인 셈이다. 이신시군(以臣弑君), 즉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는 행위는 유교 국가에서 불인(不仁)의 상징이다. 고려 사람들이 ‘거의(擧義)’라 에둘러 표현한 이 ‘찬탈’에 대해 왕건 본인조차 훗날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고 내릴 것을 염려하였다. 이를 감추고 싶었던 것일까? 궁예는 한 나라의 군주가 아닌 독부(獨夫)로 규정되었고, 견훤은 원악(元惡)으로 지목되어 비난의 포화를 감당해야 했다. 이들은 단지 태조의 창업을 위해 백성들을 잘 갈무리해 준 ‘구민자(歐民者)’에 지나지 않았다. 고려시대가 지속되는 한, 궁예・견훤과 그들의 복국 왕조를 향한 서술이나 평가가 균형 잡힐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려는 이들의 사적을 철저하게 ‘고려화’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한계가 명백한 고려시대의 저작물들을 토대로 후백제 역사를 다시 일으키는 작업은 마땅히 ‘불편’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위시한 자료들을 내버려 둔 채 우리가 후백제의 역사로 다가갈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데 있다. 따라서 우리는 동원할 수 있는 자료의 한계를 받아들인 연후에, 그로부터 후백제 본위의 호흡과 시선을 가려내는 시도를 그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연구자들은 관련 기록들을 세심하게 분석하여 이른바 ‘후백제사(後百濟史)’와 같은 후백제 계통의 역사서가 존재했음을 밝혀내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처한 자료 환경에 대한 적실한 각성이야말로 후백제의 역사를 다시 세우는 실마리일지도 모른다. /홍창우 (전남대학교 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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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02 15:30

[조법종교수의 전라도이야기] ⑥ 19세기 조선 개화의 또 다른 중심, 전주를 방문하다

1884년 11월 9일(음9월22일) 삼례장 전날 북적이는 주막들을 헤매다 간신히 방을 구한 주막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 포크 일행은 가장 좋은 방인 안방(Anpang:여자들의 숙소)을 쓰기를 원했지만 여자들이 몹시 화를 내 할 수 없이 한 방에서 3명이 자게 되었다. 방은 좁았고 밤새 수 많은 빈대들의 습격을 받았지만 나름 잘 막아내며 온돌바닥을 껴안고 잤다. 포크는 벌레에게 시달리며 동행한 역관 전양묵과 집사 정수일에게서 당시 조선의 개화정책에 대한 지방의 민심을 청취하게 되었다. △전주의 80대 개화사상가, 조선의 개화를 주창하다 미국 외교무관인 포크의 중요 임무중 하나는 각 지역의 민심을 청취하고 조선의 정세를 파악해 보고하는 일이었다. 삼례주막에서 들은 조선의 개화정책에 대한 민심은 외국문명 수용에 반대하는 여론의 확인이었다. “전양묵이 오늘 밤 많은 관리들이 외국 문명에 반대하고 있다고 내게 말했다. 이는 많은 사람들 대부분의 신념이라고도 했다. 심지어 지위가 매우 높은 이들도, 외국인들과 함께하거나 외국을 나갔다 온 경우에는 지역에서 소외되는 취급을 받았다고 했다. ”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곧 방문할 전주에 조선의 전반적인 서구문화 수용 반대 입장과는 달리 조선의 개화를 강조한 80대의 개화사상가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게 되는 내용이었다. 즉, 앞서 1880년 일본에 수신사 일행으로 다녀와 별기군 창설에 참여했다 임오군란때 죽을 뻔했던 김노완 용안현감은 전주의 노학자가 자신의 개화사상 스승임을 강조하며 자신의 최고 상관인 전라감사를 방문하기 전에 먼저 찾았음을 당당히 말하였다. “최근 전주를 방문한 그(김노완 현감)는 먼저 팔십이 넘은 한 노인을 찾은 다음 전라감사를 방문했다. 감사는 왜 자신을 먼저 찾지 않았는지를 추궁했다. 김노완 용안현감은 그 노인이 문명을 알려준 스승이라 그럴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이 노인은 지난 수년간 조선을 개방하고 외부 세계와 어울릴 것을 주창한 것으로 유명한 것 같았다. 김은 내가 그 노인에게 관심을 가지기를 바랐다. 나는 그럴 것이다.” 즉, 전주의 80대 노학자는 조선의 대부분 유학자와 민심이 서양문명 수용에 강한 거부감을 피력하던 시절에 전라감사도 인정할 정도로 중요한 개화사상가로서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전라북도의 근대 유학자의 대표 학자로서 위정척사적 성리학자인 간재 전우(1841-1922)선생과 그 제자분들이 존재하였다. 그런데 전주에는 이보다 40여년 앞서 태어나 1880년대 조선의 개화를 주장하며 개화사상을 설파한 전주의 노학자가 존재하였음이 이번 포크 기록을 통해 확인되었다. 특히, 전라감사 김성근도 전주를 방문한 용안현감이 직속 최고 상관인 자신보다 먼저 80대의 개화사상가를 찾은 것에 대해 문제를 삼지 않았던 것을 볼 때 이 학자의 위상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현재 이 학자의 실체를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조선 후기 개화를 반대하던 분위기에 맞서 1880년대에 조선의 개화를 역설하고 주창한 전주의 새로운 개혁사상가가 존재하였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개화정책에 대해 국가에 적극 개진해 신념을 실천한 사상가의 존재는 전라도, 전주지역의 개혁적 성격과 이후 1890년 근대개혁의 필요와 실천을 진행한 새로운 전라도의 역사적 토대와 정신적 계보로서 자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80대 개화사상가의 실체를 찾아내는 작업이 시급히 추진되기를 제안한다. △‘사수강’(만경강 원 이름)을 건너 전주 ‘가리내’로 들어서다 포크는 11월 10일 비구름이 오락가락하는 스산한 아침에 많은 기러기 소리를 들으며 사수강(泗水江)(Sac-su-gang)에 9시 44분 도착했다. 관련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밤에 다시 비가 왔고 오전에는 구름이 잔뜩 끼었다. 이상한 날씨였다. 기온은 어제 40F° (4℃)에서 55F°(12.7℃) 사이를 오갔다. 기러기는 여전히 많으며 거의 언제나 그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9시 23분에 길을 나섰다. 사수강(泗水江)(Sac-su-gang)에 9시 44분 도착했다. 물살이 거셌고 가장 깊은 곳이 4피트(120cm)였다. 서쪽으로 450피트의 강바닥이 펼쳐졌다. 우리는 남쪽 둑에서 출발했다. ... 평야에는 방앗간과 많은 마을이 있었다. 이곳에서부터 동쪽과 북쪽으로 개간되지 않은 거대한 평지가 펼쳐졌다.” 필자는 이 대목을 번역할 때 소스라치게 놀랐었다. 즉, 13년 전인 2005년에 만경강의 본래 이름이 ’사수강‘이란 사실을 발표했었는 데 놀랍게도 1884년 이 강을 건넌 미국 외교관의 기록에서 이 명칭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만경강(萬頃江)’이란 표현은 우리의 전통 역사서에는 나타나지 않는 명칭으로 일제강점기에 만경현과의 인접성 때문에 일본인들이 임의로 설정한 명칭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즉, 1870년대 제작된 <대동여지도총도>에 현재의 만경강을 ‘사수(泗水)’라 표현하고 있으며 1906년 완성된 <증보문헌비고> 여지고(輿地考)의 산천(山川)조 호남연해제천(湖南沿海諸川)에서는 우리나라 모든 강의 원류와 경유지 등에 대한 설명을 진행하면서 현재 만경강의 본래 명칭이 사수강(泗水江)임을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그리고 ‘사수’라는 이름은 공자의 고향 곡부(曲阜)의 강 이름이자 한나라를 건국한 한고조 유방의 고향인 풍패(豐沛)지역의 강 이름으로서 유교문화의 발상지이자 왕조의 발상지를 상징하는 강 이름이었다. 따라서 만경강의 본 이름 ‘사수강’은 조선시대 왕조와 문화발상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던 명칭이었다고 생각된다.(조법종, '만경강 이야기 땅과 생명 그리고 강-만경강의 역사', 전북일보 2006.3.15.) 현재, 완주군에서 추진하는 만경강 관련 사업에서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소개와 연구가 함께 필요함을 보여준다. 한편, 포크는 전주행을 서둘러 11시 8분에 사수(泗水)강의 본류로 보이는 물길에 이르렀는데 그곳의 명칭은 가리내(Kari-na) 마을이었다. 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가리내’라는 이름은 전주천과 삼천천이 합류하는 곳인데 전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해 전주로 들어가는 입장에서 보면 내가 갈려 나뉘어져 있는 모습으로 가리내의 뜻은 ‘(물이) 갈린 내’라는 의미로 파악된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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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01 19:35

[뉴스와인물] '인성교육 요람' 꿈꾸는 박병춘 전주교대 총장

지난해 전주교대 제8대 수장으로 선출된 전주교육대학 박병춘(61) 총장은 시골에서 태어나 대학 총장에 까지 오른 인물이다. 평소 전주교대에서 소박한 품성과 따뜻한 인성으로 존경받아온 그는 학생과 교직원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총장으로 취임했다. 그동안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임기를 수행해온 박 총장은 작지만 강한 대학을 줄곧 강조하고 있다. 지역사회의 기대가 큰 가운데 코로나19로 세상 흐름이 복잡다단하게 변모했고 교육의 방식도 디지털 교육으로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 인문학과 인성을 중시하는 박 총장에게 개교 100주년을 맞아 전주교대가 가야할 길과 향후 청사진을 들어봤다. -도내 두 번째로 100년된 대학교로서 자부심이 남다를 것 같은데요. 지역과 함께 성장해 온 대학교 등 ‘100년 의미’에 대해 평가해 주신다면요. "우리 대학의 100년은 대학의 역사를 넘어 우리 지역과 대한민국 초등교육의 역사와 다름없습니다. 아시다시피 과거 우리나라의 사회적· 교육적 환경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위기와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참,사랑, 새로움이라는 건학이념에 충실하면서 우수한 초등교원 양성 산실로서 역할을 다해왔습니다. 지난 100년의 역사를 교훈 삼아, 변화와 혁신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이를 실천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어제와 오늘을 넘어 내일로 더 도약할 수 있는 전주교대의 새로운 100년을 만들어 가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올해 개교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1일부터 5일까지를 기념주간으로 정하고,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했습니다. "1일 개교기념식을 시작으로 2일부터 3일은 우리대학 축제인 대동제가 개최되고, 4일 지역사회 사랑나눔 프로그램, 5일 황학 어린이날 대잔치 행사를 마련했습니다. 특히 지역사회 사랑나눔 프로그램은 아이들과 함께 성장해 온 전주교대가 관내 취약계층 아동‧청소년의 독서 및 학습 활동을 지원하고자 학용품과 도서 등을 담은 ‘행복박스’를 우리 지역의 양육시설, 공동생활 가정 및 위탁가정에 전달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또한 5일 열리는 황학 어린이날 대잔치 역시 지역사회 어린이들에게 창체활동 기회를 제공하고 예술 및 체육활동을 통해 바른 정서와 꿈을 갖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나만의 악기 만들기’ 등 19개 프로그램을 마련했습니다. 이외에도 ‘기록으로 보는 전주교육대학교 100년사’와 ‘개교 100주년 기념 동문 작품전’이 6월 30일까지 본교 황학당 지하 전시실에서 열리고, 이달 중순에는 동문체육대회가 열립니다." -총장님이 이번 개교 100주년 행사에서 특별히 집중하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100주년 행사를 통해 동문과 대학, 대학 구성원 간의 화합을 도모해 대내외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구성원들이 100주년을 함께 축하하고 화합할 수 있는 관점에서 행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대학 동문, 교수, 학생 등 많은 분들이 대학발전기금을 기부했는데요. "개교 100주년을 맞아 동창회에서 1억원을 쾌척해주셨고, 교직원들이 ‘도전! 100인 기부 릴레이’ 캠페인을 통해 1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해 성황리에 캠페인을 마무리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모인 발전기금은 초등교육 분야 발전과 저변확대를 위한 학술기금과 우리 학생들의 꿈을 지원하고 희망의 날개를 달아주기 위한 장학금으로 7000여 만원이 사용됐고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조형물 설치, 전주교육대학교 100년사 발간 등에 쓰일 예정입니다." -후보자 시절 바른 인성과 전문성, 미래교육 선도, 공동체와의 상생을 키워드로 내세운 바 있습니다. 어떻게 진행이 되어가고 있나요. "우리 대학에서는 바른 인성과 전문성을 갖춘 미래 인재 양성을 통해 교육대학의 역할과 경쟁력을 강화해가고자 인성교육원을 창설해 참스승 인증제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인성함양을 위한 다양한 비교과 교육 프로그램 참여를 강화하고 활성화하기 위해 사고력 신장 활동(책, 영화, 연극), 봉사활동, 리더십신장 활동, 협력 활동, 성장 활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또한 디지털 역량 강화를 포함한 미래형 교육과정 개선, 미래형 교육환경 및 시설 개선, 교수의 미래역량 지원 등을 통해 교사의 전문성 강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고, 기초학력 보조교사, JNUE 동행 프로그램(국내외 멘토링), 음악회, 봉사활동, 기부, 생태시민성 강화 등을 통해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공공성, 책무성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전주교대가 원하는 인재상은 무엇입니까? "우리 대학은 대한민국 교육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진리를 탐구하는 ‘참’, 고매한 인격과 양식을 품은 ‘사랑’, 미래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창조성을 지향하는 ‘새로움’을 건학이념으로 삼고 있습니다. 건학이념에 구현되어 있듯이 바른 인성과 전문성을 갖추고 변화와 혁신을 실천하는 인재를 기르고자 합니다." -어려운 시기에 총장이 됐지만 지난 1년간 어느 대학보다 많은 성과를 거뒀습니다. 그 동력은 무엇입니까. "지난 1년 동안 미래형 교육과정 개선, 인성교육 강화, 교수 교육 및 연구 지원 강화, 학생 임용 및 복지지원 강화, 직원 행정역량 강화, 미래형 강의실 및 교육환경 개선, 도서관 개축, 운동장 시설을 개선하며 미래교육을 선도하는 대학으로 자리매김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동력은 우리 대학 구성원들의 우수한 역량과 적극적인 지지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정부가 교원 감축을 기조로 중장기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여기에 학령인구 감소, 지역소멸 등 지방대 위기라는 인식이 있는데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전주교대만의 방안이 있는지요. "교원양성대학에서 마련한 대책에 대한 구성원들의 합의를 도출해 대응하고자 합니다. 작지만 강한 대학을 모토로 지역사회의 든든한 대학으로 자리매김하겠습니다. 그 토대는 구성원들간 화합과 신뢰의 기반 조성, 우수한 교원 및 학생 확보, 교수의 교육 및 연구 역량, 직원의 행정역량 강화, 교육과정 및 교육환경 개선 등을 통한 대학 경쟁력 확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총장으로 기억되고 싶은지요.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공정하게 대학을 운영하고, 구성원들의 화합과 신뢰를 강화해 대학의 위기를 극복하고 우리 대학의 새로운 100년의 기틀을 마련한 총장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위기를 기회로 삼는 작지만 강한 대학을 만들기 위해 교직원, 학생, 동문 구성원 모두가 삼위일체가 돼 지역사회에서 건강하고 꼭 필요한 대학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박병춘 총장은 박 총장은 농촌마을에서 태어나 도심학교로 진학해 성공한 전형적인 ‘흙수저’다. 전남 구례 출신으로 농사를 짓는 부모 슬하에서 6남 1녀 중 막내로 태난 박 총장은 광주 숭일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윤리교육과를 졸업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대학원 윤리교육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모두 취득했다. 1982년 국립 경찰대학에 입학했지만 그 해 중퇴하고 교육자의 길로 진로를 바꿨다. 대학수학능력 시험, 초등임용고사, 중등임용고사 출제위원, 초중고등학교 교과서 검정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전북지방경찰청 집회시위자문위원회 위원장, 시민감찰위원회 위원도 역임했다. 행정안전부 기부심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전주교대 교수협의회장, 한국초등도덕교육학회 부회장, 한국윤리학회 부회장, 한국배려학회 회장, 한국도덕윤리과교육학회 회장, UC Riverside. Visiting Scholor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김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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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호
  • 2023.04.30 17:48

[참여&공감 2023 시민기자가 뛴다] 사(四)에 대한 편견

4월(四月) 끝자락이다. 사월은 ‘넉사(四)’와 ‘달월(月)’이 합성된 한자어로, 음력으로 일 년 중 네 번째 달이라는 뜻이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한다. 이는 ‘T. S. 엘리엇(1888~1965)’의 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이하생략-『황무지』(1922) 서두에 기인한다. 이로 인해 4월의 이미지는 새싹 또는 초록이나 따뜻함이라는 봄의 속성보다 '잔인한'이라는 형용사가 먼저 떠오른다. 계절의 순환으로 봄이 되어 식물들이 다시 움트고 생명체들이 살아나야 하는 4월은 잔인하도록 아름다운 계절이라서 더욱 가슴 시린 달이다. 언제부턴가 소생의 아름다움과 삶의 시작인 긴장감을 잔인하다는 표현으로써의 ‘사(四)’가 ‘사(死)’라는 의미로 변형되어 삶에 깊숙이 각인되었다. 넉사(四)자인 ‘사(四)’는 에울위(ㅁ)+나눌 팔(八)로 네 손가락 모양인 ‘넷’의 뜻이다. 넷이라는 숫자는 문화 속에서 단독으로 쓰이기보다는 시간과 공간의 구성단위를 지시하는 서수이다. 숫자 ‘사(四)’에 얽힌 이야기들이 많다. 우주는 4방위(동·서·남·북)로 분리되고, 삶은 생로병사(生老病死) 네 단계로 진행되며, 1년은 4계절(봄·여름·가을·겨울)로 순환한다. 사해(四海)는 온 세상을 지칭하며 사민(四民)은 사농공상(士·農·工·商)에 종사하는 백성을 뜻한다. 천지자연의 네 가지 덕인 사덕(四德)은 원(元)·형(亨)·이(利)·정(貞)이다. 관리가 지켜야 할 네 가지 ‘사자(四字)’는 근(謹)·근(勤)·화(和)·완(緩)이다. 공자가 꼽은 위정자가 버려야 할 사악(四惡)은 학살·난폭·적(賊·)유사(有司)다. 조선왕조실록 4질(質)을 4곳(태백산·오대산·정족산·적상산)에 보관했다. 600년 전 수도를 정할 때 북악산·남산·인왕산·낙산을 서울을 지키는 4대 명산으로 보았으며, 4대문(1396년/태조5년 도성을 축조할 때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지금의 남대문)을 북쪽에 숙청문(肅淸門),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지금의 동대문), 서쪽에 돈의문(敦義門)을 두었다. ‘사(四)’자로 시작하는 단어에는 사각형(四角形), 사계(四季), 사고무친(四顧無親), 사면체(四面體), 사면초가(四面楚歌). 사방(四方), 사방신(四方神), 사사오입(四捨五入), 사서삼경(四書三經), 사인사색(四人四色), 사주팔자(四柱八字), 사천왕(四天王), 사촌(四寸), 사흉(四凶) 등이 있다. 이처럼 숫자 ‘사(四)’는 자연의 섭리이고 인간 생활 자체이며, 공생하는 소중한 관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四)’의 잘못된 관념은 건물의 층수가 올라가다가 4층을 F로 바꿔놓았다. 아파트는 4층과 4호가 없다. 버스나 기차 또는 비행기의 4번째 좌석은 재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등 생활 속에 큰 불편을 불러왔다. 이것은 사람들이 숫자 ‘4四’를 싫어하는 사회적 관습이 만든 현상이다. 사람들은 숫자 ‘사(四)’를 보면 ‘죽을 사(死)’를 연상한다. 이러한 정서가 세월이 흐르면서 ‘4(四)’를 싫어하고, 건물에 있는 ‘사(四)’자에 대하여 불안한 마음을 갖게 하였다. 그런 연유로 ‘4(四)’가 들어가는 4층과 4호 방을 피한다. 엘리베이터에서도 4층 표시를 하지 않는다. 병원에는 아예 4층을 두지 않거나 4자가 들어가는 것을 꺼린다. 이런 것들은 사회적으로 한 두 사람에게 있는 일이 아니며, 사회 전반적 현상이다. 시간적으로 일시적 해프닝이 아니라 해묵은 것이 되었다. 이것은 잘못된 사회적 정서가 낳은 ‘사(四)자 미신’에 불과한 것이다. 동음의 한문 ‘사(社,事,思,査,史,使,四,士,師,死,絲,射,私,司,寫,飼,寺,謝,舍 등)’자가 수많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사(死)’와 연결 짓는 것은 실소를 금치 못 할 일이다. 한자문화권인 중국인들 또한 우리처럼 ‘사(四)’를 불길한 숫자로 여겨 노골적으로 기피하고 터부시한다. ‘사(四)’는 ‘죽음’을 의미하는 ‘사(死)’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싫어한다고 한다. 중국의 광주와 심천에서 새로 출고되는 자동차 번호판에서 끝자리 수가 ‘4’인 차를 찾아볼 수 없다. 번호판 끝자리 수에서 ‘4’자를 아예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광동성, 복건성 등의 지역에서는 병원에 4호 병실을 두지 않고, 버스에도 4번이 없으며, 빌딩에도 4층이 없다. 그리고 14층이 없는 경우도 많다. 이유는 ‘14(十四)’는 ‘실제로 죽다’는 의미를 지닌 ‘실사(实死)'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국가 보훈처에서 발표한 ‘생활 속 일제 잔재 몰아내기’에 발표된 글에 의하면 ‘사(四)’가 ‘사(死)’로 연결하여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개화기 이후 일제시대부터라고 한다. 이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교활하고 간악한 음모와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四)’가 ‘사(死)’로 잘못 인식하게 된 것은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령한 일본인들이 자신들에게는 없지만, 우리에게는 있는 것이면 무엇이나 없애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우리 민족이 지닌 문화 중에서 자신들 것보다 월등하다고 느끼는 것은 모조리 말살시켰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세상만사는 생각에 따라, 보기에 따라 달라진다. 검정 안경을 쓰고 보면 세상은 온통 새까맣다. ‘사(四)’자 들어간 것 중에는 우리의 자랑거리들이 많다. 사군자(四君子, 매화梅花·난초蘭草·국화菊花·대나무竹), 사물(四物) (범종梵鐘·법고法鼓·목어木魚·운판雲板 4가지 사찰 의식용 도구), 사물(四物)놀이(꽹과리·장구·북·징으로 풍물놀이의 대표적 4가지 악기), 사물탕(四物湯), 당귀·백작약·숙지황·천궁 등 4가지로 구성된 약물), 문방사우(文房四候, 붓筆·종이紙·벼루硯·먹墨) 등이 있다. 토끼풀밭에서 네 잎 클로버를 발견한 아이가 ‘행운’을 잡았다며 기뻐하듯이 ‘사(四)’가 ‘사(死)’가 아니라 감사한 마음을 담은 ‘사(謝)’로 사랑받기를 기대한다. 정성수 시인. 향촌문학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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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26 13:00

[동행, 2023 전북지플] (1)라운드테이블- 의제 세부계획 수립 '치열'

‘경장’. 거문고에 오랫동안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느슨해진 줄을 당겨 다시 팽팽하게 한다는 뜻으로, 예로부터 국가와 지역에 산재한 문제를 해결하는 용어로 쓰여왔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그간 우리 사회의 외면을 받아 눅눅히 쌓여 온 전북 지역 문제에 대한 치열한 경장의 장이 열렸다. 전북지역문제해결플랫폼(이하 전북지플)은 25일 전주대학교 본관에서 전북도가 당면한 복지·경제·환경 등 지역 문제에 대해 도민이 발굴한 의제를 선정하고, 지속 가능한 실행 계획을 모색하기 위한 라운드테이블을 진행했다. 이날 라운드테이블에는 의제 제안자·전문가·공공기관 관계자 등 60여 명이 의제별로 머리를 맞댔다. 참여자들은 차분하게 또 한편으론 뜨겁게 원탁 위 토론을 이어갔다. 앞서 전북지플이 3월 27일부터 지난 16일까지 공모를 통해 도민에게 제안받은 의제는 총 222건이었으며, 이날 테이블에는 '지역성'과 '해결 필요성', '지속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도출한 20건의 의제가 올랐다. 한동숭 전북지플 집행위원장은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지역 문제에 관한 목소리는 외면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올해 2년차를 맞는 전북지플이 지역 문제를 지역민의 손으로 직접 해결하고 이것이 지속가능하도록 돕는 선례가 될 수 있도록 지자체, 공공기관 및 민간기업의 협업과 적극적인 참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날 주요 논의된 의제로는 △용담댐 주변 지역경제 활성화 △민간거점 시설을 활용한 재활용폐기물 수거 체계 구축 △장애인 친화 음식점 경사로 설치 지원 △정주 인구 감소에 따른 빈집 활용 여행자 스테이 운영 △외국인 유학생 생활 및 취업 지원 △제로 화석연료를 이용한 취약계층 난방 환경 개선 사업 △자립청년의 사회적 지원 인프라 마련 등이 있다. 의제 발굴에 참여한 정은실 간람록 대표는 "인구유출로 인한 지역 소멸 위기속에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아 방치된 빈집이 전북지역에만 4600여 채가 넘는다"며 "이러한 빈집 자원을 활용한 여행자 체류형 커뮤니티 숙소를 운영함으로써 지역에 방문한 여행객이 지역가치와 특색을 느낄 수 있도록 교류의 장을 제공해 단순한 일회성 여행객이 아닌, 지속 가능한 인구 유입 효과를 거두고자 한다"고 말했다. 또한, 국태봉 유한회사 더폴 대표는 "그간 베이커리 카페를 운영하며 자립 청년들의 일자리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해왔다"며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한 더욱 근본적인 차원에서 일시적인 지원을 넘어 현재 취업에만 국한돼있는 자립 청년들의 진로를 창업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한편, 이날 라운드테이블에서 논의된 의제는 민간‧지자체‧공공기관 등의 전문가 컨설팅을 통해 선정심사를 거쳐 다음달 3일 열리는 전북지플 2차 집행위원회에서 최종 의제가 확정된다. 전북지플에 따르면 올해 18개 안팎의 의제를 선정해 6월부터 10월까지 본격적으로 실행할 예정이다. 전북일보는 전북지역문제해결플랫폼을 통한 지역 의제의 해결과정을 현장 취재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할 계획이다.

  • 기획
  • 이준서
  • 2023.04.25 18:18

[동행, 2023 전북지플] 지역문제 해결, 마음과 마음 잇다

누군가에게는 '사업'처럼 보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삶'인 문제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마음과 마음을 잇는다. 소극적 '주민 참여형'이 아닌 적극적 '시민 주도형'으로 전북 곳곳의 문제를 끄집어 내고 자치단체·공공기관·기업·시민사회단체 등 민·관·공 협업체계를 구축하는 '우리 곁, 반가운 변화'. 이것이 '전북지역문제해결플랫폼'이 맡아 정성을 다하는 일이다. 전북지역문제해결플랫폼(집행위원장 한동숭, 이하 전북지플)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아름다운 도전에 옷소매를 걷었다. 25일 전북지플은 시민이 제안한 의제 20건에 대한 실행계획 수립 및 의제별 세부계획을 짜는 라운드테이블을 진행, 의제 선정·실행 절차를 본격화했다. 전북지플에겐 '성공해야 할 사업들'이 아닌 '실행해야 할 의제들'이다. 앞서 3월 27일부터 지난 16일까지 공모를 통해 의제 222건을 발굴했다. 오는 5월 3일 열리는 전북지플 2차 집행위원회에서 올해 추진할 실행의제를 확정한다. 15건 안팎의 신규 의제와 지난해에 이어 추진하는 연속 의제 3건 가량으로 압축할 예정. 이후 5월 말 매칭데이를 통해 협업체계를 단단하게 하고 나면, 6월부터 10월까지 5개월간 각각의 의제를 실행에 옮긴다. 지난해에는 총 17개 의제를 실행, 10개 의제를 완료했다. 전북도 등 57개 기관과 시민 8340명이 힘을 모았다. 사실 '지역문제해결플랫폼'은 그렇게 화들짝 놀랍거나 새로운 실험모델은 아니다. 행정안전부 지방자치균형발전실이 추진해온 '지역사회 활성화' 과제 중 하나이며, 이미 지난 2018년 대구·강원도 시범운영을 시작으로 광주·충북·대전 등으로 확대됐다. 그사이 행안부 지역공동체과에서 지역활성화정책과로 업무 이관도 이뤄졌다. 전북지플은 지난해 참여, 올해 2년차를 맞았다. 지역문제해결플랫폼은 특히, 주민 참여라는 방법론적 측면에서 '탈 많은 주민참여예산제도'나 '추진력이 희미해진 리빙랩'과 유사하지만 이들보다 진화한 형태라 할 수 있다. "선한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지역문제해결플랫폼은 마음 연결 플랫폼이라는 그 말이 아주 딱 맞는 거 같다. 연결 과정을 통해 많은 사람이 희망을 얻고, 힘을 얻어서 여러 가지 성과를 냈던 경험들이 전북 내에서 계속 퍼져 나가면서 같이 협업할 수 있는 그런 구조들이 만들어졌으면 한다." - 2022년 전북지플 성과보고회, 한동숭 집행위원장. 고민하고 풀어야 할 숙제도 있다. 진실로 '시민 주도형'인지, 그리고 또 단발적 상생사업이 아닌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는지. "지속 가능합니까?" 한동숭 집행위원장에게 슬쩍 물었더니 "플랫폼도 의제도 함께 지속 가능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향사랑기부금 모금액 등을 활용한 재원 확충이 과제라 할 수 있다"며 미소 지었다. '한국 지플계의 막둥이' 전북지플이 가야 할 길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전북지플이 끝끝내 만들어갈 담대한 변화, 그리고 그 두 번째 발걸음에 전북일보가 함께 한다.

  • 기획
  • 이용수
  • 2023.04.25 17:42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헌사료로 본 후백제] ③견훤의 후백제, 해양국가의 지향성

△산골 출신 견훤, 해양에 입문하며 후백제를 건국하다 견훤은 원래 바다와는 거리가 먼 지금의 문경시 가은읍의 산골 출신이다. 그가 바다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889년(진성여왕 3)에 신라가 파견한 ‘서남해방수군’의 일원으로 참여한 것에서 비롯하였다. 국내외 해양의 핵심 거점에 해당하는 서남해지역을 방수(防戍)하는 것이 ‘서남해방수군’의 임무였다. 견훤은 그 일원으로서 진군하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워 소부대를 지휘하는 ‘비장(裨將)의 지위에 올랐다. 비장 견훤은 연전연승을 거두며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에 당도할 즈음에 5,000여 명을 헤아리는 무리가 자신을 따르는 것을 보고서 신라에 대한 반심(叛心)을 품기 시작하였다. 강주, 즉 진주는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이 흐르고 남으로는 사천 및 남해도로 통하는 남해안 해양의 요충지이기도 하였으니, 산골 출신 견훤이 이곳에서 처음 바다를 대면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어 순천을 접수하고 순천만과 광양만의 바다를 무대로 세력을 떨치던 박영규와 김총 등의 해양세력을 확보함으로써 견훤의 군대는 해륙(海陸)을 아우르는 대세력으로 급성장하였다. 순천에서 견훤은 잠시 숨고르기에 나섰다. 원래의 목적지인 서남해지역은 다도해를 기반으로 한 능창이나 영산강의 나주를 중심으로 한 오다련과 같은 강력한 해양세력이 버티고 있었던 반면, 광주는 유력 호족인 지훤 등이 자진 투항을 전해왔기 때문이다. 결국 견훤은 광주를 먼저 접수하여 전열을 가다듬은 뒤에 서남해지역을 진출하는 것으로 방침을 정하고, 892년에 광주에 입성하였다. 경주에서 진군을 시작한 지 3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견훤은 8년여 동안이나 광주에 머물며 서남해지역 진출을 시도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900년에 우선 전주로 옮겨가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 건국을 선언한 다음에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후백제 견훤, ‘영산강대전’에서 궁예의 해군장군 왕건에게 패하다 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의 서남해지역 공략은 더욱 격렬해졌다. 이에 심각한 위협을 느낀 영산강유역 나주의 유력세력 오다련 등은 마침 궁예가 901년 후고구려(후에 태봉)를 건국하자 그와 전략적 연대를 모색했다. 연대의 실행은 궁예의 해군장군 왕건에게 맡겨졌다. 왕건은 903년 궁예의 수군을 이끌고 서해안을 따라 영산강유역에 당도하였고, 첫 출전에서 오다련 등의 협조를 받아 나주 인근 10여 군을 접수하는 놀라운 전과를 거두었다. 왕건은 그 여세를 몰아 909년에는 중국 오월에 파견한 견훤의 사신선을 무안 앞바다에서 나포하였고, 912년에는 목포와 덕진포 사이의 영산강(‘몽탄강’)에서 견훤이 직접 인솔한 후백제의 수군과 결전(‘영산강대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으며, 다도해를 기반으로 비타협적 저항을 지속해오던 압해도의 수달장군 능창마저 생포하였다. 결국 918년 왕건은 서남해지역 장악의 성과를 배경으로 삼아 실정을 거듭하던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후백제 견훤은 최고의 해양 거점인 서남해 나주지역을 선점한 고려의 왕건을 상대로 힘겨운 해양 쟁투를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후백제, 고려와의 대결에서 해양 주도권을 잡다 당시 영산강유역의 중심 도시 나주가 서해와 남해를 잇는 해양의 핵심 거점이었다고 한다면, 서해안의 해양 중심 거점은 운주이고 남해안의 해양 중심 거점은 강주였다. 운주는 오늘날 충남 홍성을 중심으로, 서북으로 태안·서산·당진 등과, 동북으로 예산·아산 등과, 남으로 보령 등과 통하고, 안성천·삽교천·곡교천·무한천 등의 숫한 하천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서해 바다와 이어주고 있는 곳으로, 일찍부터 ‘내포(內浦)’지역이라 불리는 서해안의 최고 해양 요충지였다. 이곳은 일찍이 왕건이 서해안을 통해 영산강유역으로 진군할 때 해로의 중간 거점으로 활용했던 곳이기도 하였다. 강주, 즉 오늘날의 진주는 동으로 김해와, 남으로 남해도와, 서로 순천과 통하는 남해안의 최고 해양 요충지로서, 일찍이 견훤이 해양과 첫 인연을 맺은 곳이기도 하였다. 후백제 견훤은 나주와 운주와 강주를 중심으로 고려 왕건을 상대로 한 치열한 해양쟁패전에 나섰다. 나주를 선점한 왕건의 우세가 점쳐졌으나 실제로는 양자 간에 해양 거점을 둘러싼 일진일퇴의 공방이 이어졌다. 먼저 왕건이 선점했던 운주의 경우 918년에 견훤이 빼앗았고 927년 3월에는 왕건이 탈환했으며, 928년 하반기에는 견훤에게 다시 넘어갔다. 또한 견훤이 선점했던 강주의 경우 920년 왕건에게 넘어갔다가 924년경에 견훤이 탈환했으며, 927년 4월경에 다시 왕건에게 돌아가더니 928년 5월에는 견훤에게 다시 넘어왔다. 결국 강주와 운주 지역의 전황을 종합해 보면 927년에는 주도권이 왕건에게 잠시 넘어가는가 싶더니 928년 후반부터는 견훤에게로 넘어가는 형국이었다. 거기에 929년경에는 나주마저 견훤이 장악하였으니, 이제 서해와 남해와 서남해의 해양 주도권은 견훤에게 넘어온 셈이 되었다. 후백제는 그 여세를 몰아 해양 총공세를 펼쳤다. 929년 9월에 고려의 앞마당이라 할 예상강에까지 진출하여 고려의 배 100여 척을 불태우고 저산도(지금의 황해남도 소재 저도)에서 고려의 말 300필을 약취하였으며, 10월에는 대우도(지금의 충남 서산시 소재)를 공략하기도 하였다. 이제 해양 주도권의 대세는 후백제 견훤에게 완전히 돌아가는 추세였고, 고려 왕건은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려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후백제 해양의 꿈, 아쉽게도 해양으로 지다 왕건은 935년 4월 어느 날 여러 장수들을 모아놓고 나주 탈환의 대책을 논의하였다. 결국 나주 탈환의 중차대한 과업은 유금필에게 맡겨졌고, 유금필은 왕건의 기대에 부응하여 나주 탈환에 성공하고 개선하였다. 왕건은 친히 예성강에 나아가 자신의 전용선까지 내주며 출전하는 유금필을 배웅하였고, 개선해 돌아온 유금필을 예성강에 행차하여 맞이하였으니, 나주 탈환에 걸었던 왕건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가히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후백제가 나주를 고려에게 다시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1개월 전에 일어난 심각한 적전분열의 사건이 있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935년 3월 견훤은 넷째 아들 금강을 후계자로 삼고자 하였고, 장남 신검이 난을 일으켜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켰던 것이다. 결국 4월에 결행된 유금필의 나주 탈환은 이러한 후백제의 내분에 편승한 면이 컸다. 견훤은 그해 6월 금산사를 탈출하여 나주로 달아나 고려에 투항하였고, 유금필은 다시 군선 40여 척을 거느리고 불과 2개월 전에 자신이 탈환한 나주로 나아가 견훤을 정중히 모셨으니, 이로써 후백제의 역사는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 928년 후반 이후 해양 주도권을 잡아 확실한 우위를 확보해가던 후백제가 결국 내분으로 인해 해양의 최고 거점인 나주를 고려에게 내주더니, 그 나주를 통해 역사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니, 후백제의 입장에서는 심히 아쉽고도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강봉룡 (목포대 사학과 교수) 강봉룡 (목포대 사학과 교수) 해양개방정책의 노선을 추구한 후백제의 해양국가 지향성 견훤은 900년 후백제를 건국하자마자 중국 항저우(杭州)를 중심으로 해양강국의 위세를 떨쳐가고 있던 오월에 사신을 파견하여 해양개방정책의 노선을 분명히 하였다. 왕건이 909년 오월에 파견한 후백제의 사신선을 무안 앞바다에서 나포하였고, 918년 고려 건국 직후에는 그 역시도 오월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으니, 이는 고려가 차후 후백제와 치열한 해양쟁패전을 벌일 것을 예고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후백제는 고려에 대한 해양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전략으로 국제 해양교류의 다각화를 시도하였다. 먼저 925년 산둥반도를 중심으로 또 하나의 해양강국으로 발전해가고 있던 후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교류를 본격화하였으니, 이는 이미 후당과의 교섭을 통해 성장해 가고 있던 강주(지금의 진주)의 해양세력 왕봉규 등을 포섭하는 것으로 가능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어 일본의 해양세력과의 교섭에도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조정이 929년에 검비위사(檢非違使) 진자경(秦滋景) 등을 후백제에 파견한 적이 있었다. ‘검비위사’란 ‘비위(잘못)를 따지기 위해 파견한 사신’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므로, ‘검비위사’ 파견은 당시 일본 해역에서 독자 세력으로 성장해가고 있던 해양세력의 동향에 예의주시하고 우려하고 있던 일본 조정이 그 해양세력과 모종의 교섭을 시도하고 있던 후백제에게 엄중 경고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된다. 후백제가 928년 이후에 고려와의 해양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한 것은, 이렇듯 당시 해양개방정책을 견지하고 국제적 해양교류의 다각화를 시도해갔던 해양국가 후백제의 지향성이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할 것이다. 그런 만큼 후백제 실패의 역사는 아쉬움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강봉룡 (목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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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25 17:39

[전북 가담항설] (3) 서로 다른 문화 공존하는 전주 한옥마을(상) - 경기전 '성 안' 전동성당은 '성 밖'

매년 1000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한국 대표 관광지로 부상한 전주 한옥마을.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전주 한옥마을을 대표하는 상징을 꼽는다면 단연 ‘경기전’과 ‘전동성당’이라고 할 수 있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과 천주교 전주교구인 전동성당은 한옥마을 입구 태조로 거리를 사이에 두고 이웃해있다. 전주 시민뿐 아니라 한옥마을을 처음 방문한 관광객은 이 고풍스런 마을 입구에 우뚝 서 있는 두 건물의 모습에 이질감을 느끼곤 할 것이다. 조선시대 전각과 서양 가톨릭 성당이 마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가톨릭의 오래된 성당이 왕조의 갖은 탄압을 뚫고 조선 왕실의 태조를 모신 전각과 얼굴을 바로 맞댈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 이유를 찾기 위해 19세기 말 전주 한옥마을의 과거를 되짚어본다. △ 전주부성 성벽 있던 전주 한옥마을 태조로 경기전과 전동성당의 절묘한 구조는 두 건물 사이를 지나는 태조로가 조선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전주부성의 남측 성벽 자리였던 것에서 기인한다. 1911년 일제에 의해 다가동‧중앙동 일대에 있던 전주부성이 철거되기 전, 한옥마을 중심거리인 태조로는 전주부성의 남문인 풍남문에서 이어지는 성벽이 지나는 길이었다. 당시 남측 성벽은 경기전∼전동성당을 거쳐 경기전 동문‧중앙초교 사거리에서 동측 성벽과 연결됐다. 오늘날과 달리 100년 전 경기전은 전주부성 안, 전동성당은 밖에 위치했으며, 두 건축물은 성벽으로 명확히 구분돼 있었던 것이다. △ 풍남문 밖 처형터에 지어진 전동성당 전동성당은 1914년 윤지충 바오르 등이 순교한 천주교 성지인 전주부성 풍남문 인근 ‘남문처형터’에 완공된 성당이다. 성당은 한국 3대 성당이라 불리는 서울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설계했으며, 수많은 천주교인의 피가 얼룩진 풍남문 성벽을 헐어 성당 주춧돌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1886년 조선과 프랑스 간의 통상조약 체결로 그동안 조정으로부터 박해받던 국내 천주교 포교가 허용됐다. 이에 따라 그동안 숨어 지내던 천주교 신자들이 전주부성 인근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 수는 갈수록 늘어났다. 결국 천주교 전주교구는 전주부에 성당을 지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성당의 신축 부지로 순교자들의 영혼이 잠든 남문처형터가 선정됐다. △ 동양 유교 건축물과 서양 로마네스크 양식 공존 "전국 유일" 당시 조선 조정은 서양에서 넘어온 천주교 포교를 승인하면서도, 경기전과 같이 왕실의 제사를 지내는 전각 근처에 성당이 자리하는 것만은 용납하지 않았다. 500년간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국가 질서를 유지해 온 조선 왕조 입장에서, 왕실의 창업자인 태조를 모신 경기전 근처에 서양 건물이 들어서는 것은 상당한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주부성 안에 있던 경기전과 달리 성당의 공사 부지로 선정된 남문처형터는 성 밖에 있었기에, 두 건물 사이는 성벽으로 나뉘어있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성’이라는 장치를 공간적 구분의 명확한 기준으로 여겼다. 전라도를 관장하던 ‘전라감영’, 귀빈을 접대하던 ‘풍패지관’ 등 지방 핵심 기구가 모두 전주부성 안에 자리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성 바깥 중간지역은 왕실 입장에선 관심 밖 ‘외지’일 뿐이었다. 덕분에 비록 경기전의 맞은편이었지만, 엄연히 성 바깥이었던 전동성당 부지는 행정의 별다른 방해 없이 1889년 성당으로 설립된 이후, 1908년부터 본격적인 성당 건립 공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다 공사가 한창인 1911년 전주부성이 철거되면서 경기전과 전동성당은 마땅한 장애물 없이 서로 마주 보게 됐고, 그것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 같은 형태는 전국을 뒤져봐도 오직 전주 한옥마을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서울의 경우 조선 왕실의 위패를 모신 종묘 인근에 종로성당이 있기는 하나, 누워서 닿을 거리인 경기전‧전동성당과 달리 300m 정도 떨어져 있다. 현재의 종로성당 건물도 1987년에 지어져 조선 왕조가 존재하던 19세기 말부터 신자를 받은 전동성당과는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한다.

  • 기획
  • 이준서
  • 2023.04.24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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