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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이젠 전주가 도와야 한다

20년 전이야기이다. 한 심포지엄에서 발제자 한 분이 '전북경제는 수매경제이고 대리점경제'라는 말을 했다. 다들 이 말이 무슨 뜻 인지 몰랐지만 의외로 그 분 설명은 간단했다. 상공업 발달이 뒤진 전북경제는 쌀 수매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므로 전북경제는 농촌경제의 사정에 따라 달라지고 농촌경제는 정부수매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니 수매경제이고 대리점 경제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쌀 수매대금이 농촌에 풀리면 전주로 돈이 들어와 은행, 시장, 술집에 생기가 돌며, 반대로 농촌지역에 돈이 떨어지면 전주의 구멍가게가 한가해지며 다시 쪼들리고 생기를 잃는다는 이야기이다. 전주는 농촌의 최대 수혜자전주 인구가 40만 조금 넘었을 무렵 나왔던 이야기이다. 이제 전주는 경제규모 커져 농촌의 돈에 흔들 흔들거릴 정도는 아니다. 인구도 그 때에 비해 20만 넘는 62만이 되었다. 현재 전주는 자기를 성장케 한 이웃 농촌에 도무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쌀 수매제가 없어질 판국이니 어디 농촌에 눈길한번 줄 수 있겠는 가.요사이 전주는 선두그룹에 끼지 못해 더욱 조바심이 나 있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 전주는 가면 갈수록 전국 10위권 밖에서 자꾸 뒤쳐져 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전주는 서울에서는 몰라도 전북 내에서는 떵떵거리는 향토세도가이다. 3%의 면적도 채 안된 전주에 전북전체의 30%가 산다. 예금 비중은 60%가 넘고, 국세 비중은 반절 조금 넘는다. 이러니 누가 뭐래도 전주는 전북에서는 당당한 맏형이며, 어느 누구도 전주가 선두대열에서 낙오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도시가 감히 넘보지 못할 정도로 전주가 전통문화도시로 우뚝 서길 원하는 것이다.도시란 원래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자급자족을 영위했던 농촌으로부터 상업 및 공업을 분리하고 인구를 흡수하면서 생겨나는 것이다.전주는 이런 면에서 이웃 농촌에게 너무나 많은 빚을 졌다. 전주가 '맛과 멋의 예향'이라고 불릴 만큼 농촌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전주는 농업·농촌의 희생위에 성장한 도시이다. 1980년대 후반 효자동을 시작으로 한 외연적 도시개발은 그 많은 논, 밭, 과수원을 주택용지, 상업용지, 도로 등으로 바꾸어 놓았다. 평화동의 미나리꽝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완산동 용머리 고개 너머 그 많던 복숭아밭이 사라졌다. 재배면적의 반 이상이 없어졌고 아파트와 아스팔트 도로로 기온이 올라 무엇 하나 제대로 자랄 수 없다. 현재 전주가 안고 있는 모든 도시문제는 농촌문제와 결부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이제 전주는 도시와 농촌, 생산자와 소비자, 소외된 인간관계를 재통합하고 농업을 복권시키는 데에 나서야 한다. 힘을 모으는 동력을 만들어 어느 지역이나 서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견제할 수 권력을 나누어 가지고 균형 있게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나가야 한다.전주가 보답해야할 때이다올해는 쌀 재협상의 해이다.벌써부터 전북의 논 가격은 전국에서 가장 많이 떨어졌다. 협상결과가 관세화이던 관세화유예이던 전북농촌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피해 본다. 앞으로 수년간 전북농촌에 얼마나 작고 큰 일이 벌어질지는 누구도 쉽사리 예견할 수 없다. 전주는 이제 농촌에게 보답해할 때이다. 빚을 진 농촌에 대해 러브콜을 해서 서로 마음을 터놓아야 한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전북에서 맏형 노릇을 할 수 있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맏형 아닌가. /소순열(전북대 농업경제학과 교수)

  • 전주
  • 전북일보
  • 2004.05.10 23:02

[전북광장]全州 영광을 되찾자

풍패지향의 호남제일성, 전라도관찰사가 있던곳, 60∼70년대만하여도 서울을 제외하곤 5대도시 였던 우리 전주가 이제는 중소도시로 밀려 전북의 행정수도로 안주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그저 우리 전북인은 '아! 옛날이여'만 외치고 있다는 말인가. 지난달 말 KBS의 심야대국민토론에서 광역시에 밀려 그 존재마저 보여주지 못하는 우리 전북을 보면서 전주의 역사와 전통에 걸맞는 위상을 되찾기 위한 온시민의 분발을 촉구하면서 특히나 정치인들의 환골탈태하는 노력이 없이는 우리 전주와 전북의 위상을 찾을 길이 없겠구나 하는 느낌이 나혼자 뿐 이었을까?17대 총선에서 국민은 당초개헌선 까지 거론되던 싹슬이 민심에서 사실상의 양당구도에 맞는 여당의 파트너로 발언권을 행사하는데 충분한 야당의석을 주었다.이제 남은 과제는 정치권이 민의를 국정에 제대로 담아 합리적 보수와 개혁적 건강한 진보를 통한 국정쇄신이 급선무이고 어느쪽이든 독선과 오만으로 세를 과시한다면 국민은 엉뚱한 심판을 한다는 사실을 직시 하도록 일깨워 준 것이다.하지만 KBS의 장장 4시간에 걸친 심야국민대토론을 지켜본 나의 소감은 한 마디로 극히 일부분을 빼고는 구태의연한 지역주의 이념분쟁, 오로지 자기 독백만을 늘어놓는 당, 정치인 국민 모두 비슷한것 같았다.모든것을 청산하고 새출발하자는 대토론이 국가의 미래를 예측하고 국익을 우선챙기자는 토론이 말만 앞서지 실제로는 탄핵철회를 가지고 여야가 첨예하게 이분법으로 패가르식 발언으로 종내에는 산란한 평행선을 이루었고, 사회자마저 탄핵철회를 유도하는식의 발언으로 항의까지 받는 상황이고 보니 우리의 참여정치의 한계점이 드러나고 있지 않나 하는 우려의 감마져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국회의 정치구도가 일당독주의 견제체제의 틀은 짜여 있으나 우리 전북만을 놓고 볼때 민주주의 장점인 견제와 균형의 양당체제가 아닌 일당독주로 하루아침에 어느 한당에만 일색을 만들어 주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같은 호남인 전남광주만 하여도 어느정도 다원의 목소리를 내주고 있는데 말이다.말만 균형개발이지 전북에는 신규사업은 고사하고 기왕 국책사업으로 책정된 사업마저 오히려 방해가 되는 현실에 어떻게 정부를 믿고 우리국회의원을 믿겠는가.선거득표를 위하여 노인폄하 발언은 젊은 세대의 용기는 두드러지게 내세우는데 노인들이 지혜는 보이지 않는가.자본주의체제를 거부한 칼막스도 '역사에서 배우라'하였고 처칠도 '더머리 뒤를 볼 수록 더멀리 앞을 볼 수 있다'고 하였는데 말이다.머지않아 오늘의 젊은세대는 그 다음의 젊은 세대와 또다시 단절된다면 세대간 용기와 지혜가 합쳐도 부족한데 용기만 가지고 세계와 경쟁을 할 수 있겠는가.이나라의 최고지도자는 바로 국가이고 자유민주주의 축으로서 그 축은 오직 국민을 위한 국인은 나라의 근간이다.개인과 정당의 이익이 상충될때는 정당의 이익이 우선되어야 하지만 정당과 국가 이익이 상충될때는 어떠한 경우라도 국가이익이 우선한다면 싸움의 정치는 자연히 해결될 것이다.이제는 진정 여·야를 막론하고 상대당의 반대의견을 겸허히 수용하고 자기당의 잘못이 있다면 먼저 승복하고 모든 권력은 국민과 국가를 위하여 발휘 한다면 화해와 상생의 정치가 바로 그 안에서 이루어 질 것이고, 진정 국가와 국민을 위한 훌륭한 정치가 될 것이다.우리 선조님들의 지혜와 음덕이 고루 잘 갖추어진 전주가 남의 눈치만 보는 곳이 아니라 슬기와 지혜를 모아 역사와 전통의 영광을 재현하는 미래의 가장 살기좋은 호남의 움도를 복원하는데 온고을 시민이 떨치고 일어날 지어다./최준용(전 전북도 공무원 교육원장)

  • 전주
  • 전북일보
  • 2004.05.05 23:02

쌍둥이 형제의 닮은꼴 인생

"응시생 한명씩 들어가 면접을 보도록 돼있지만, 심사위원들이 워낙 특별한 경우라고 해서 둘이 함께 시험을 치렀습니다.”지난 2월 우석대 아동가정복지학부를 나란히 졸업한 심윤무·영무씨(27) 쌍둥이 형제는 최근 치러진 서울시 공무원 임용시험에서 사회복지직에 함께 응시, 64대 1의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합격의 영예를 안았다.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서 공부, 사회생활까지 함께하게 된 이들 일란성 쌍둥이 형제의 닮은꼴 인생은 이전부터 계속돼왔다.전주출신인 심윤무씨 형제는 중학교 3년동안만 서로 다른 학교에 다녔을 뿐 전주동초등학교와 삼례공고, 우석대까지 학력이 모두 닮아있다. 또 군대도 해군과 해병대를 제대했다. 외모와 성격이 닮은 쌍둥이 형제라고는 하지만 출신학교와 전공이 같고 거기에 바늘구멍 공무원시험을 통해 같은 진로를 가게 된 경우는 흔치않다."함께 공부하면서 도움이 많이 됐다”는 이들 형제는 대학 재학중에도 선의의 경쟁을 펼쳐 형 윤무씨가 평점 4.39점, 동생 영무씨는 4.21점으로 성적 장학금을 한번도 놓치지 않았다. "앞으로 7급시험과 고시를 거쳐 사회복지분야 정책입안에도 참여할 생각입니다.”공무원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 1일부터 동생과 함께 서울시 소속 자치단체에서 근무하게 될 윤무씨는 "사회복지 일선 공무원으로서 책임을 다하겠지만 도전을 계속할 것”이라며 당찬 포부를 밝혔다.이들 형제는 같은 직렬에 합격했지만 근무처는 형은 노원구청, 동생은 강북구청으로 서로 갈라지게 됐다. 그리고 첫 출근을 앞두고 직장 중간지점인 서울 도봉동에 하숙집을 얻어 놓았다.

  • 전주
  • 김종표
  • 2004.04.01 23:02

[오목대] 동문거리 살리기

산업화 시대 이전 전주가 전국 7대도시의 반열에 들어 있을 때 전주시의 도심권을 중앙동과 경원동·고사동·풍남동 일대였다. 청석동 파출소에서 관선동 파출소에 이르는 동서(東西)로 길다랗게 뻗은 도로가 중심 상가를 이뤘다. 문화와 패션과 소비오락과 물류가 이 거리를 통해 생성되고 전파됐다. 인구 30∼40만명선을 유지하며 이런 패턴을 유지해 온것이 대략 70년대 초까지였다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지금 50대 중·후반 이후 세대들에게는 책갈피속 노란 은행잎만큼이나 진한 추억을 남겨주고 있는 이 거리가 쇠락(?)의 길로 들어선것은 70년대말쯤 부터라고 보여진다. 상권이 차츰 북상하면서 동서로를 거쳐 오거리 쪽으로 옮겨 나가고 도시의 다행(多倖) 기능에 따라 신도심권이 형성되면서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바로 도로 하나를 건너 객사 일대 고사동 지역에 조성된 현란한 도심 환락의 외양(外樣)이 활력이 떨어진 구도심권 상가의 잔영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보석·가구·패션을 중심으로 명맥을 잇고 있는 중앙동 일대나 대중 음식점 몇곳과 서점 한 두군데로 옛 명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경원동 상가 주변의 몸부림이 그렇다.그 상실감에 대한 보상심리나 반작용때문일까? 최근 구도심의 중심지중 하나였던 동문네거리를 살리자는 운동이 민간모임을 중심으로 소리없이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지난 주말 동문거리 삼양다방에서 열린 제1차 상가 워크샵에는 이 일대 주민은 물론 거리 활성화에 관심이 있는 시민들이 참석해 활발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6회에 걸쳐 동문거리신문 제작과 동문거리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제작등 동문거리 살리기 운동을 주도하고있는 이 모임의 김병수대표는 이런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 구심도권의 활력을 되찾게 될 때 '추억의 거리'가 전주의 또다른 명소의 하나로 자리잡을 수 있을것이라는 희망을 숨기지 않고있다.그러나 아쉬운것은 이런 적극적인 주위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정작 현지 주민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는 점. 미래에 대한 확실한 보장없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기를 바라는건 사실 무리일수도 잇다. 흔히 말하는 성장동력(成長動力)이 여기에도 필요하다는 논리는 그래서 당연하다. 그것은 자발적인 시민들의 투자일수도 있고 지자체의 선택과 집중일 수도 있다.

  • 전주
  • 전북일보
  • 2003.12.02 23:02

[딱따구리] 동문네거리, 그 곳엔…

주인이 바뀌어도 상호는 그대로인 거리, 맛이 바뀌어도 단골의 발길은 여전한 거리. 전주 구도심의 중심지였던 동문거리를 살리기 위해 공공작업소 심심(대표 김병수)과 성균관대 신+도시건축연구실(책임교수 신중진)이 29일 '동문거리 제1차 상가워크숍'을 열었다. 외소해진 거리를 풍성하게 하려는 이들이 선택한 방법은 주민들과의 대화. 김병수씨는 50여곳의 상가를 3번이상 방문해 주민 40여명의 참석의사를 확인했단다. 10명만 참석해도 좋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이 날 참석한 주민들은 고작 6명. 주말오후, 가게를 비우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간담회는 조촐했지만 거리의 추억과 현재의 모습에 대한 꽤 많은 의견들이 오고갔다. '동문거리하면 떠오르는 것은?'. 이 거리에서 생활한지 10년 됐다는 한 주민은 '홍지서림'과 '왱이집'을, 10개월차 주민은 '해태바베큐'와 '겐스빌치킨'을 말했다. 12년차 남성은 막걸리와 푸짐한 안주로 유명한 '경원식당'과 7·80년대의 아련한 향수처럼 남은 '헌책방'을 꼽기도 했다. 동문거리의 역사와 추억이 담긴 곳이 어디 이뿐일까. 참석자들은 이런저런 가게들을 떠올리며 거리의 소중함을 느껴가고 있었다. 간담회가 열린 삼양다방만으로도 동문거리의 역사는 고스란히 드러난다. 1950년대 초반에 생긴 삼양다방은 현재의 건물을 짓기 전부터 그 자리에서 그 상호를 가지고 운영해 온 이 거리의 대표적인 공간. 이처럼 상징적인 역사와 공간을 안고 있지만 2003년 11월 동문거리는 차량의 통행만 번잡할뿐 머무는 사람들이 없는 거리, 날이 저물면 사람의 흔적이 없는 거리로 변해버렸다. "아직은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합니다. 간담회를 준비하면서 이곳 주민들과 더 자주 인사를 나눈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제가 조금 더 이 거리를 걷게 되면 그 분들도 함께 걸어주시겠죠”(김병수) 이번 간담회를 통해 첫 걸음은 내디딘 셈. 동문에서 시작되는 네 방향의 길. 그곳의 흔적과 현재의 삶에 생명을 부여하는 숙제는 이제 그 거리에 남았다.

  • 전주
  • 최기우
  • 2003.12.0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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