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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벅뚜벅 전북여행] 김제 금산사 단풍길 : “오색 빛 가득한 가을 속으로의 낭만 걷기”

최근 서울과 서해안 어느 곳에는 첫눈이 소복이 왔다고 합니다. 일주일 전에는 무주 덕유산 향적봉에 첫눈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렇듯 가을과 인사하고 겨울로 한 걸음씩 나가고 있는 이런 계절, 아직 깊은 가을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있으니 바로 천년 고찰 김제 금산사 가는 길입니다. 금산사 경내까지는 시내버스 내리시는 곳에 자가용을 두고 가셔도 되고, 아니면 몸이 불편하시거나 임산부, 노약자의 경우 경내까지 차량으로 이동하실 수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오시는 분들께서는 전주역에서 내리시어 금산사 가는 시내버스를 이용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금산사 입구 금산성지라는 푯말을 지나면 바로 좌측으로 산책로가 있습니다. 금산사 산책길의 특징은 계곡을 따라 걸을 수도 있고, 혹은 숲 가운데를 지나 걸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여름 물놀이, 가을 단풍놀이로 사시사철 많은 분이 찾는 금산사 산책길이기에 군데군데 넓은 평상과 쉴 수 있는 긴 의자가 마련되어 있어 더 여유롭게 가을을 즐기시며 산책하실 수 있답니다. 금산사 가는 길, 가다가 힘들면 잠시 고개를 들어 단풍 사이로 비추는 가을 햇살을 감상하셔도 좋고, 겨울 식량 입안 가득 물고 어디론가 향하는 다람쥐를 보는 여유를 가져 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그렇게 가다 보면 계곡 건너 더 깊은 산 속으로 가시는 길에 피어 있는 단풍 꽃을 만나시거나 아니면 가면 갈수록 더 짙어가는 가을 계곡의 아름다움에 푹 젖어 보실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 앞에는 금산사 경내로 들어가는 길과 모악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행길 나타납니다. 금산사의 가을을 즐기시기 전 살짝 모악산 산행길로 빠져봅니다. 울긋불긋한 단풍과 돌담, 그리고 유유히 겨울로 흐르는 나뭇잎들이 계절의 흐름을 말해 주는 듯합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로 삼국시대 백제 무왕이 창건한 금산사. 경내에 들어서시면 빨갛게 물든 단풍을 배경으로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보물 제28호인 김제 금산사 당간지주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간 지주를 지나 경내로 들어서시면 보물들로 가득한 금산사의 가을을 감상하시면 됩니다. 제일 먼저 여러분의 시선을 사로잡는 보물은 모악산 정상과 그 지붕이 맞닿은 듯 높이 솟은 국보 제26호 미륵전으로 신라시대부터 미륵본존을 봉안했던 곳입니다. 미륵전 옆 계단으로 오르시면 금산사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보물 제25호인 오층석탑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금산사 대웅전 앞쪽으로는 보물 제23호인 석련대와 제27호인 육각 다층석탑이 있으며, 좌측에는 보물 제828호인 석등과 제827호인 대장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을 금산사 관람을 마치고 이제는 산책길이 아닌 차도 옆 인도를 따라 금산사를 내려옵니다. 금산사 가는 산책길도 아름답지만, 가을 가득한 인도를 따라 친구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하산하는 모습이 정겹기만 합니다. 소문난 단풍 관광지는 아니지만, 가을 물소리, 빛, 공기와 함께 거닐 수 있는 가을 감성 길인 금산사 가는 길. 더 늦기 전 감성 금산사 가는 길과 함께 어여쁜 가을 추억 만들어 보셨으면 합니다. 주변 관광지 : 작지만 아름다운 귀신사 / 모악산 너머 전북도립미술관 #지도 : http://naver.me/51BsJNPj /글사진영상 : 김찬권(전라북도 블로그기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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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02 17:12

[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본 것과 믿는 것 사이에서

1990년 8월 23일 어느 시간, 만 31살이 조금 넘은 나는 홍콩행 비행기를 탔다. 처음 타보는 비행기가 국제선이어서 좀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국제선은 국내선을 충분히 타 본 후에 타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었다. 내게 홍콩행 비행기는 홍콩을 가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목적은 위도 상 훨씬 더 높은 곳에 있는 하얼빈이었다. 하얼빈에서도 흑룡강 대학이 최종 목적지였다. 당시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국교가 수립되지 않아서 거의 모든 방면에서 교류가 되지 않을 때라 비행기도 바로 가는 것이 없었다. 사회주의 국가 중국의 하얼빈 공항에 내리니 저녁 7시가 조금 넘었었다. 어둠이 많이 내려앉았고, 대륙 북방의 서늘한 기운이 벌써 깊은 가을처럼 느껴졌다. 공항은 한국의 지방 소도시 버스 터미널 같았다. 지방 소도시 버스터미널처럼 보이는 공항을 보고 중국이 경제적으로 매우 낙후한 나라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공항을 떠나 흑룡강 대학까지 오는 풍경은 아직도 내게 깊이 새겨져 있다. 이것이 중국의 첫 인상이다. 사람들은 어깨에 별 이득도 없는 무거운 짐 하나를 진 채 그저 걷기만 해야 하는 숙명을 지닌 사람들처럼 맥이 없었다. 지금도 기억한다. 공항이 남루한 것은 공항 자체의 탓도 있지만, 공항을 채운 사람들의 표정과 걸음걸이가 그렇게 보이도록 한 탓이 더 큰 것 같았다. 삶의 생기가 돋아나지 못할 어떤 덫에 갇힌 것 같았다. 정비되지 않은 길 양 옆으로는 군인인지 민간 경비원인지가 애매한 사람들이 긴 총을 메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성거렸다. 감시할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자세다. 공항을 훨씬 떠나 시내에 가까워 오면서도 공항에서 발견했던 무기력과 가난과 감시와 통제라는 음산한 기운은 내 인식의 언저리를 떠나지 않았다. 첫인상은 상당히 오래갔다. 강렬해서 오래 가기도 했지만, 하얼빈에서 사는 내내 그런 것들이 매일매일 경험되었기 때문이다. 하얼빈이라는 낯선 곳으로 오기 전에 학교생활만 줄곧 했던 나는 비판적인 지식인의 형상으로 채워진 분위기 안에 잠겨 있었다. 그 분위기는 내가 거기에 얼마나 친화적이었었는지 상관없이 마치 컴퓨터의 바탕화면처럼 보편적이었다. 내가 대학 1학년 때 대통령이 자신의 심복에게 피격되어 사망했다. 군대 가기 전 2년간의 대학 생활동안 기말고사를 봐 본 적이 없다. 기말고사 기간까지 수업이 진행되기 어려울 정도로 학생들은 반독재 투쟁에 여념이 없었고, 심지어 경찰들이 교정에까지 들어와 머물렀다. 매 학기 중간도 못 가 휴교를 반복했다. 박정희를 거칠게 욕하는 일이 지식인에게는 매우 당연시 되었다. 대부분의 젊은 학생들은 학습이 깊어지면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파고들었다. 운동권도 아닌데다가, 경찰에게 잡히거나 경찰서에 불려가 본 적도 없이 그저 데모 행렬 꽁무니나 따라다니던, 당시 풍조에서 볼 때는 외양만 겨우 지식인 꼴을 한 나 같은 사람도 박정희 비난과 자본주의 비판에는 인색하지 않았다. 얼마나 깊은 정도로 발을 담근 운동권이냐는 상관없이 대학생이라면 반정부와 반자본주의 구호는 그렇게 강하게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주류의 흐름이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김일성과 사회주의에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거나 거기서 무슨 탈출구를 찾으려고 하는 일군의 시도가 강하게 있었다. 당시에는 나에게도 사회주의나 김일성은 우리의 모순을 들여다보는 또 다른 창이거나 대안으로 보이곤 했다. 하얼빈에는 북한 유학생들이 있었다. 나는 북한 유학생들과 면식을 트고 지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가능해지니, 호기심이 더 생겼다. 괜히 그동안 보여주지 못했던 동포애를 어떻게든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싸이기도 했던 것 같다. 중국은 나에게 한국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할 대안으로 제시되곤 했던 사회주의를 직접 보는 계기가 되었고, 북한 사람들은 김일성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세력들이 대학가를 지배하던 때라 김일성의 후예들을 직접 상대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나는 여기서 놀라운 경험을 한다. 어느 날 나하고 친하게 지내던 북한 학생 한 명이 어떤 낯선 사람과 함께 얘기하면서 다가왔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네려고 하는데, 그 북한 학생은 나를 애써 외면하였다. 그의 표정에서 나는 모른 체 해야만 하는 어떤 곤혹스러움을 읽었다. 돌아와서 이 이야기를 하자, 나보다 먼저 북한 학생들을 만나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런 경우를 당해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북한 학생들은 아무리 친해도 제3자인 다른 낯선 북한 사람과 동행할 때에는 남한 사람들을 모른 체 했다. 서로를 경계하고 의심하는 태도를 취해야 살아갈 수 있는 나라라면 어떻게 설명하더라도 지상낙원일 수 없다. 나는 하얼빈에 온지 약 100일 만에 심하게 앓은 적이 있다. 이유도 없이 아팠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잘 모른다. 혹시 사회주의와 북한을 자본주의와 대한민국의 비판적인 대안으로 간주하던 인식을 부정하는 일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었나 하고 짐작할 뿐이다. 자기 인식의 틀이나 믿음을 자각하여 부정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이 불가능한 일을 하느라 심하게 앓지 않았을까? 내가 직접 두 눈으로 본 사회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가난이었다. 등소평도 가난이 사회주의는 아니다.고 말할 정도로 가난과 사회주의는 이미 매우 가까워져 있었다. 북한 학생들의 생활 모습이나 외모나 태도 등을 통해서 북한은 또 얼마나 가난한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하얼빈에 체류할 때는 등소평이 1978년 12월 18일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회의에서 개혁개방을 천명한지 벌써 12년이나 흐른 뒤이다. 개혁이란 내내적으로 적용되는 관념으로서 자유 시장과 자본주의를 받아들인다는 뜻이고, 개방이란 대외적 관념으로서 중국이 국제 시장에 문호를 개방한다는 뜻인데, 자본주의적 요소를 받아 들인지 12년이나 흐른 후인데도 가난은 너무 분명했다. 내가 사회주의와 북한 사람들을 직접 경험하고 나서 얻은 결론은 다음의 몇 가지 단어들로 남았다: 가난, 감시, 통제, 불안, 공포, 독재, 억압. 타율. 막연한 상상이나 이론으로만 접할 때하고, 직접 눈으로 보며 경험하며 접할 때가 너무 많이 달랐다. 여기서 나는 엄청난 당황스러움에 빠져 괴로워했다. 앓고 나서는 몇 가지 이데올로기적인 믿음을 수정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자본주의가 아무리 모순을 내포하고 있더라도 사회주의보다는 낫다. 박정희 대통령이 아무리 심하게 독재를 했어도 김일성의 독재보다는 낫다. 대한민국의 언론 자유가 아무리 비판을 받더라도 중국이나 북한의 그것보다는 훨씬 낫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치욕의 역사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역사다. 나는 지성을 성장 시키는 분위기가 아니라 지성을 마비시키는 분위기에 압도되었었다. 건강하게 성장하는 지성이었다면, 자본주의 비판하다 사회주의로 바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 비판하다가 바로 김일성에게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 비판하다가 중국이나 소련으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하얼빈에서 크게 앓으면서 현실 속에서 내 눈으로 직접 경험한 것을 가지고 나를 교정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 비판은 사회주의로의 전향이 아니라 자본주의 수정으로 귀결되어야 하고, 박정희 비판은 김일성 추종이 아니라 박정희 수정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렇지 않았다면,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을 보고, 소련이 해체되는 것을 보고,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성큼 성큼 발전하는 것을 보고, 사회주의 정책을 고집하다가 몰락한 베네수엘라를 보고도 다른 사람들이 한 말들로 채워진 믿음을 계속 믿으려 고집을 피우다가,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을 외면하는 우를 범했을 것이다. 한동안 북한에 대한 인식 방법으로 내재적 접근법이라는 이론이 상당한 환영을 받으며 유행한 적이 있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내재적 접근법은 북한을 그들이 설명하는 가치와 이념에 따라 있는 그대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북한을 북한의 시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의 대접을 받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론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최소한의 미덕은 객관성과 보편성이다. 주관적인 감각을 벗어나야 하며, 어떤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매우 넓은 범위 어디에나 치우침이 없이 적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북한을 대할 때만 내재적 접근법을 사용하였다. 우리 자신, 즉 대한민국을 대할 때는 내재적 접근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 스스로에게는 인류 보편의 가치 기준을 적용하였다. 북한을 이해할 때는 북한의 특수한 상황을 기반으로 해서 하고, 우리를 이해하려 할 때에는 인권, 민주 등의 보편적인 잣대를 가지고 했던 것이다. 편파적이나 임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이론이 아니다. 이론이 아닌 것을 이론처럼 사용하던 그런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고, 그것을 변경하지 못하는 지금의 시간들도 있다. 이론을 이론으로 다루는 훈련을 전문적으로 받았다는 지식인들도 이 내재적 접근법을 편파적으로 사용하고, 정작 자신의 내재적 상황에는 한없이 자학적이었으면서도 매우 냉철한 지적 시선을 유지하는 것으로 포장하던 시절이었다. 내 책 『인간이 그리는 무늬』에 나오는 한 대목을 옮겨 본다. 우리가 진리하고 하면, 구체적인 세계를 넘어서서 어떤 무엇인가로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요. 진리는 어쩐지 변화무쌍한 구체성과는 다른 어떤 것 같습니다. 초월적이고 관념적인 어떤 형상을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런 것은 조작된 것입니다. 가공물이고 인공물이지요. 이 세계에 존재하는 건 구체적인 실재의 세계뿐이지요. 진리의 세계는 실재의 세계에 있다. 그래서 등소평도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實踐是檢驗眞理的唯一標準)이라는 말을 한 것이다. 진리는 실재의 세계에서 태어나고, 실재의 세계에서 구현될 뿐이다. 남이 정해준 어떤 주의(主義)에 대한 믿음 대신에 내 눈으로 직접 경험한 것을 더 신뢰할 수 있으려면 상당한 정도의 용기와 지적 계몽이 필요하기도 하다. 뮤지컬 시카고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키티가 자신의 남편이 다른 두 여자를 끼고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는 분개하여 총을 겨누자, 남편이 말한다. 당신이 본 것을 믿을래? 아니면 내 말을 믿을래? 말이 끝나자 키티는 자신이 본 것을 믿고 남편에게 총을 발사한다. 남편이 설득하려고 하는 말은 결국 남이 하는 말이다. 우리에게 있었던 거의 모든 주의(主義)는 남들이 정한 것들이다. 남의 말인 것이다. 자신이 직접 본 것을 믿고 파고드는 자는 총을 발사하는 위치에 서고, 다른 사람의 말을 믿자고 하는 자는 총을 맞는 위치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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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02 17:09

국제라이온스 356-C(전북)지구 제42대 김영천 총재 “모두가 참된 봉사 할 수 있는 라이온스 만들 것”

지난 7월 27일 국제라이온스협회 356-C(전북)지구에 제42대 김영천 총재가 취임했다. 김 총재는 취임 후 회원 6500명이 넘는 라이온스 전북지구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특히 그는 전북지역에 점차 증가하고 있는 다문화가정을 위한 봉사활동과 전북 라이온스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지역 라이온스 활성화를 위해 열심히 뛰었다. 김 총재를 만나 그동안의 활동과 향후 국제라이온스 356-C(전북)지구의 계획 등을 들어봤다. -총재님과 국제라이온스의 인연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2007년 라이온스 입회하게 됐습니다. 그 이전에도 라이온스에 대해서는 지인들을 통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항상 업무에 치이다 보니 봉사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알지만 실천으로 옮기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몇몇 라이온스 회원들이 함께 동참할 것을 추천했고 이에 무언에 홀린 듯 봉사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봉사 덕에 그동안 봉사를 단순히 멋있고 배워보고 싶고 참여해보고 싶다는 선망이 아닌 실제 내가 함으로써 오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으며 그러한 것들로 지금까지도 계속 봉사에 빠져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봉사의 즐거움을 함께하는 라이온들 덕분에 봉사는 혼자 했을 때 보다 함께했을 때 그 기분이 배가 된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그 덕에 지금 이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렇기 때문에 2019-2020회기 동안 따뜻한 봉사, 행복한 라이온이라는 주제로 전북 지구를 만들 생각입니다. -취임하신 지 100일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어떠한 일들을 하셨는지요. 그동안 다양한 전북 내 소외계층을 위한 노력을 했습니다. 무료진료사업, 이웃돕기 물품 전달봉사 무료급식봉사, 장학금전달사업, 교통질서 지키기 캠페인, 무료 미용 봉사 등을 진행했고 그 밖에도 도내 108개 클럽에서 1년에 약 100억원 상당의 봉사를 펼치고 있습니다. 특히 무료진료 사업은 지역에 계시는 어르신들의 경우 의료 혜택을 받는데 어렵고 또 연세가 있다 보니 당뇨병을 갖고 계시는 분이 많아 라이온스에서 당뇨병을 진료하고 조언을 하는 등의 봉사를 진행했습니다. 또 최근에는 어르신들을 위한 눈 시력 보존 의료 협약을 맺어 임실 보절초등학교에서 주민들에 봉사한 바도 있으며 당시 한의사들과 함께 방문해 어르신들에게 한방 의료 지원 등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10년이 넘게 라이온스에서 봉사활동을 진행하고 계십니다. 기억에 남는 활동 있으신지요. 약 5년 전부터 필리핀에 거주하는 코피노들을 위해 해외 봉사를 다녔습니다. 대부분의 코피노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열악한 환경에서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얼굴에서는 자신의 반절은 한국인이라는 것에 대해 자긍심이 있었고 낯선 한국인에 대해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며 반겼습니다. 이러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봉사의 참된 의미를 앎과 동시에 이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는 많은 고민을 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그 뒤로 매년 필리핀을 찾아 감기약과 해열제, 진통제, 문구, 의류 등 아이들이 필요할 만한 것들을 지원했습니다. 물론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지만 아이들의 그 선한 눈빛에 매년 필리핀을 가게 된 것 같습니다. 그 밖에도 평소 소외계층에 관심이 많다 보니 장애인들에도 관심이 많아 이를 위한 다양한 봉사활동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올해 4월에는 중증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전주 모악산 등반을 진행한 적이 있는데 평소 중증장애인들의 경우 산악에 대한 어려움이 많은 우리 라이온들과 장애인단체가 합심하여 산에 올라 장애인들의 많은 호응을 얻었던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이번 2019-2020 회기 주제로 따뜻한 봉사, 행복한 라이온으로 정했습니다. 지역사회 모든 사람들이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는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함께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평소에 따뜻한 마음으로 배려하고 용서하며 나눔과 베풂을 생활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충족됐을 때 우리 모두가 따뜻해지고 행복한 생활이 되리라 생각하기에 회기 주제로 따뜻한 봉사, 행복한 라이온으로 정하게 됐습니다. 개인적으로 봉사라는 것은 내가 타인에게 봉사를 해줌으로써 타인들에게도 좋지만 반대로 나를 성장하고 따뜻한 마음을 갖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또 봉사는 나 자신과 타인을 연결해줘 모두가 함께 따뜻한 마음을 더 나아가 행복하게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저는 이러한 것들을 이번 회기 라이온들이 함께 했으면 합니다. 그래서 이번 회기에는 각 지역별로 최대한 협조를 구해 지역 라이온들의 봉사 사업을 활성을 중점적으로 하려고 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봉사는 모두가 함께했을 때 그 의미가 더 커지는 만큼 대규모의 행사성 보여주기식 단발성 봉사활동보다는 지역 특성을 감안한 활동을 펼치겠습니다. 예를 들어 군산의 다문화 가정을 위한 다문화 결혼식 봉사, 20년 넘게 진행되고 있는 익산의 무료 김밥 봉사 등 지역에서 운영되는 지역 특색에 맞춤형 봉사를 더욱 활성화할 계획입니다. 이러한 지역 맞춤형 봉사를 통해 더욱 정감을 갖고 봉사의 뜻을 성찰할 수 있는 모두가 함께하는 따뜻한 봉사활동들을 만들려고 합니다. -전북일보 독자와 라이온스 회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인생살이에 있어서 성공의 열쇠는 남을 위해 나눔과 베풂 봉사를 얼마나 많이 하였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봉사단체에 회원으로 가입하시어 봉사활동을 펼치시면 우리 사회가 더욱 따뜻하고 아름다워질 것이고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도 빠르게 성공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김영천 제42대 국제라이온스 356-C(전북)지구 총재는 1958년 전주에서 태어난 김 총재는 성공한 기업인으로서뿐 아니라 항상 성실히 주변인들과 함께 끊임없이 소통하려는 인물로 정평이나 있다. 15년 전부터 인수해 운영하고 있는 제조업체는 불경기에 회사 운영이 어려움에도 그는 봉사와 함께했다. 특히 그는 나를 내세우는 봉사가 아닌 봉사를 통해 사회가 조금이나마 따뜻해졌으면 좋겠다는 신념 덕에 지금까지도 봉사를 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의 이러한 따뜻함은 전북 라이온스 회원들을 더욱 결속시키기도 했으며 그 결과 전국에서 서울, 경기 다음으로 인구대비 가장 많은 회원을 보유하고 있는 라이온스클럽을 만들기도 했다. 취임 100일을 넘은 김 총재는 앞으로도 더욱 우리 전북 6500여명의 라이온스 회원들이 결속을 다지고 참된 봉사를 할 수 있게 만들 것이며 동시에 국내 21개 지구 중 전북지구만 유일하게 회관이 없어 자체 회관 건립에 남은 기간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이다며 아울러 전북 지구가 1만여 라이온스 회원을 보유한 클럽이 될 수 있게 더욱 성장시키겠다고 다짐했다.

  • 기획
  • 엄승현
  • 2019.12.01 19:01

동초제 심청가 완창, 음반으로 내놓은 장문희 명창

2004년 전주대사습대회가 내놓은 서른 번째 명창은 20대의 젊은 명창이었다. 대사습 사상 최연소에 심사위원 전원으로부터 만점을 받은 이 주인공은 장문희씨. 우리나이로는 스물아홉 살이었지만 12월에 태어나 며칠 만에 두 살을 한꺼번에 먹는 애민 살을 감안한다면 정식나이는 스물일곱 살 밖에 안 된 이 앳된 명창에 관심이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국악계가 주목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그의 스승은 이일주 명창. 서편제판소리의 대가였던 이날치의 손자 이기중이 그의 아버지이니 장문희 역시 이날치로부터 이기중을 거쳐 이일주의 맥을 잇는 소리가문의 후예였던 것이다. 일곱 살 어린나이에 소리 길에 들어서 햇수로 38년. 전통판소리를 공부하는 일에 온전히 삶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그가 새로운 의지를 모아 대중들과 만나는 길을 열었다. 15년 전 한 레코드사로부터 제안 받았지만 끝내 사양하며 자신의 과제로 돌려놓았던 음반을 스스로 제작해 내놓은 것이다. <장문희 심청가>. 다섯 시간이 넘는 심청가 완창을 5장의 CD로 엮어낸 그는 이제 판소리의 본질을 알리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장문희 명창(44,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수석단원)을 만났다. 스승이자 이모인 이일주명창의 소리를 그대로 받은 그의 판소리를 향한 애정과 신념은 단단했다. 판소리연구가 최동현교수가 그의 미덕을 왜 천부적으로 타고난 재능에 오직 한 길, 한눈팔지 않고 판소리에만 전력해온 성실함을 더했는지도 알 것 감았다. -음반이 예쁘게 나왔네요. 첫 음반인데, 기획사를 통하지 않고 개인 작업으로 음반을 냈다는 것이 의외입니다. 사실 오래 전, 음반 녹음을 제안 받았었어요. 대사습 명창부 장원이 됐을 때이니 20대였는데, 그때는 음반을 낸다는 것이 두렵더라고요. 연륜이 쌓이고 소리의 깊이를 더 채운 다음에 내고 싶었습니다. 신나라레코드사에서도 제안을 해주셨는데 완곡하게 사양했지요. 줄곧 이 작업은 제게 과제였지만 음반을 내는 일만은 제가 직접 나서서 하고 싶었어요. 여건이 될 때까지 기다리다보니 이제야 내게 되었습니다. -5시간이 넘는 완창 심청가를 녹음하는 일만으로도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쳤을 것 같습니다. 서울에 머무르면서 2-3일 동안 녹음하는 일을 여러 번 거쳤지요. 다행히 김형석 선생님이 녹음실을 제공해주셔서 좋은 환경에서 녹음을 할 수 있었어요. 마스터링도 따로 할 필요 없을 정도로 시설이 좋았는데 소리 보정을 위해 후반 작업을 하면서 마스터링은 따로 보완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자비를 들여 진행하는 일이 새로운 경험이었을 것 같습니다. 작곡가 김형석씨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습니까. "몇 해 전 케이블 음악채널 엠넷의 '더 마스터-음악의 공존'에 출연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편곡자로 참여하셨던 선생님과 인연이 되었어요." -그렇고 보니 2년 전쯤인가요. 엠넷의 더 마스터에서 장문희라는 이름은 화제였습니다. 그때 그랜드 마스터로 뽑혔죠. 다섯 번 출연했는데 두 번 그랜드마스터가 되었어요. 개인적으로 기대 이상의 결과였고 감사할 일이었지요. 그때 새삼 알게 되었어요. 대중들이 국악을 낯설게만 알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는데 판소리를 듣게 되면 확실히 끌리는 뭔가가 있다는 것이었죠. - 장문희란 이름 앞에는 최연소 명창이란 칭호가 늘 함께 합니다. 소리를 처음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습니까. 처음 소리를 만난 것은 여섯 살 때예요. 엄마가 이모(이일주 명창) 댁에 저를 보내셨는데, 며칠 지내다보니 이모가 너무 무서웠어요. 엄마를 졸라 다시 집으로 갔죠. 몇 개월 지났는데 엄마가 다시 보낸 것이 이듬해이니 일곱 살에 다시 이모 댁으로 온 거죠. -그럼 일곱 살 때부터 소리를 배웠습니까. 처음에는 그냥 이모가 소리하시는 것을 옆에서 듣고 보는 것이 전부였어요. 1-2년 그렇게 보내다가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춘향가를 배우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소리로만 살아왔으니 38년이나 되었네요. -초등학교 때 이미 심청가 완창회로 화제를 모았었죠. 이후 초등학생이 완창하는 무대가 더러 있긴 했지만 그때가 시작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밥먹고 학교 다녀오면 대부분의 시간을 소리공부로 보냈으니까요. 다른 사람보다 먼저 시작하고 또 많은 시감을 소리공부로 바쳤으니 당연히 빨리 익힐 수 있었어요. 안숙선 선생님께 받은 적벽가를 제외한 네 바탕을 일찌감치 떼었던 것도 그 덕분이고요. -사실 요즘 환경에서 판소리의 가업을 잇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그래서 장명창의 소리길이 더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명창의 후손이라는 무게가 제게 주는 부담이 가볍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나 스스로 열심히 하면 좋은 소리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런 선조들 덕분에 갖게 된 재능이 있었기에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장문희란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리게 된 것은 아무래도 대사습이었겠죠. 물론입니다. 2004년 대회에서 명창부 장원을 차지하면서 명창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으니까요. -그때가 스물여덟 살, 대사습 역사상 최연소로 명창의 반열에 올라 화제가 되었었습니다. 그것도 첫 번째 도전에 심사위언 전원 만점으로 얻은 영광이었는데 그때 어떤 심경이었을지 궁금합니다. 당황스러웠습니다. 사실 저는 10년을 바라보고 처음 도전한 것이었거든요. 그래서 상은 받았지만 제 소리의 부족함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웠어요. -그때 몇 년 더 도전을 해야 했다면 지금과 달라진 것이 있을까요. 경험해보지 않았으니 잘 모르겠지만 첫 도전으로 얻은 그 결과가 제게 좋은 역할만 한 것은 아니었어요. 정상에 일찍 올라섰다는 성취감 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으니까요. 지금도 무대에 서는 일은 늘 조심스럽고 자신이 없는데, 아마 그때부터 갖게 된 부담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만점이나 최연소에 대한 무게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죠. 무대란 것이 항상 완벽할 수만은 없잖아요. 실수도 할 수 있으니 항상 잘할 수만은 없다는, 조금은 편한 생각을 갖고 청중들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제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 아직도 무대에 서는 일이거든요. 그런 태도를 갖고 있으니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도 어렵고. 그때의 상황이 전통판소리에 대한 무거움을 저에게 안긴 것 같아요. -창작판소리에 대한 관심은 어떻습니까. 관심은 있지요. 그런데 어떤 창작판소리가 와도 기존의 전통 판소리보다 좋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선뜻 창작판소리에 나서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판소리에 대한 관심이 예전보다는 훨씬 나아졌지 않습니까. 그 바탕에는 창작판소리의 역할도 크지 않을까요. 다양한 창작판소리도 그렇고 퓨전 형식의 무대들로 청중들을 만나는 것도 필요합니다. 덕분에 판소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나 저는 판소리를 제대로 이해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음악이니까요. 그러려면 대중들이 판소리의 본질과 가치를 통해 판소리를 알게 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전통 판소리를 지켜오면서 안게 된 고민이 깊은 것 같습니다. :40년 가까이 전통판소리를 공부해오면서 가장 큰 과제가 대중들에게 갈 수 있는 길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었어요. 요즘 소리를 공부하는 20대들을 보면 긴소리를 잘 하지 못합니다. 5분까지는 아휴 목이 참 예쁘네 싶다가도 10분 정도 지나면 목이 난리가 나거든요. 여러 기회로 심사를 하게 되면 이런 환경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공부를 했고 기량이 어느 정도인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거든요. 어리지만 그 연배에 맞는 깊이 있는 소리가 있지 않겠어요. -왜 그런 환경이 만들어졌을까요. 가장 큰 원인은 대학입시제도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입시를 치를 때 부르는 시간이 3분이거든요. 아이들이 6년, 길게는 그보다 더 오랫동안 소리공부를 하고 대학을 가는데 고작 3분으로 가늠을 한다니....... 어떻게 그것으로 깊이를 가진 소리를 가릴 수 있겠어요. 게다가 요즘은 또 맑은 목과 가요나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갈 수 있는 재능이 주목받는 시대이니 전통판소리가 자칫 외면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지요. -화제를 돌려보죠. 어렸을 때부터 재능이 넘쳤는데, 소리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갔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 적 없었습니까.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저에게는 이 길이 숙명이었던 것 같아요. 제게 주어진 길. 그러니까 힘들어도 이것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전주로 내려왔습니다. 대학원은 다시 서울로 갔지요. 그리고는 다시 전주에 돌아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서울에서도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요. 그것 역시 숙명이었나 봐요.(웃음) 사실 한차례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우석대를 갔는데 졸업하고 바로 한예종 대학원에 들어갔거든요. 꼭 서울에 자리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기회가 주어졌다면 아마 그 길을 택했겠지요. 그런데 대학원 졸업 즈음에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단원 공고가 난거예요. 그때의 선택을 후회해본 적도 없거니와 오늘의 환경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전통 판소리에 마음을 두고 있는 입장에서는 창극 무대가 어떻습니까. 어린 시절부터 어르신들의 창극 무대를 많이 봐왔어요. 국립창극단은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죠. 제 기억으로는 무대의 화려함보다는 어른들의 소리를 듣고 있으면 정말 소리가 좋아서 전율을 느꼈던 것 같아요. 소리다운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는 말이겠죠. 그런데 갈수록 창극 무대가 본질보다는 포장이 앞세워지는 것 같아요. 본질이 중요한 가치가 되지 않고 주변의 것들을 더 내세워지는 무대는 그 생명력이 짧아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이 크기도 하고요. -우리 것을 찾는다면서 본질이 묻혀버린 요즈음의 풍토가 위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제가 이 시점에 전통판소리를 내놓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아직은 제가 젊은 세대잖아요. 이런 젊은 사람들도 전통을 지켜가려는 의지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저로서는 새로운 시작인 셈인데, 정작 음반을 내고 보니 해야 할 일이 더 많이 보입니다. -전통판소리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하는 일도 그중의 하나일 듯싶은데요. 맞습니다. 그러려면 제가 먼저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일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아직은 구체적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작이란 마음으로 나섰으니 길이 보이겠지요. 인터뷰를 하는 내내 젊은 명창의 의지를 이렇게 단단하게 엮어 놓은 바탕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그것이 어쩌면 한 시대를 소리로 빛냈던 명창 이날치의 후손이라는 자긍심일 수도, 아니면 20대에 명창의 반열에 우뚝 선 타고난 재능에 대한 자신감 일수도 있겠으나 그에게서 돌아온 답은 의외였다. 전통판소리만큼 좋은 것을 만나지 못했어요. 사람의 성음으로 구현할 수 있는 최고의 감동을 대신할 예술이 또 있을까요. 이 젊은 명창이 우리 판소리를 일으켜 세울 날이 그리 멀지 않았으면 좋겠다. ● 장문희 명창은 장문희 명창은 서편제소리의 대가인 이날치 명창의 후손이다. 이날치와 그의 손자인 이기중, 그리고 이모이자 스승인 이일주 명창으로 이어지는 소리의 맥을 잇고 있으니 전통적인 판소리 가계의 면모가 그 덕분에 지켜지고 있는 셈이다. 그의 어머니 또한 소리와 춤에 재능을 보였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그 길을 가지 못하고 큰딸인 그를 언니인 이일주 명창의 문하에 일찌감치 보내 소리꾼으로 대성하기를 소망했다. 소리 공부는 일곱 살 때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이모는 타고난 재능을 보이는 조카에게 선뜻 소리를 가르치지 않았다. 1-2년 동안 소리하는 것을 보거나 듣게 하는 것으로 조카의 귀를 열어주었던 이모는 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비로소 심청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다른 제자들보다도 유난히 엄하게 그를 가르쳤던 이모는 그를 오로지 소리만을 일상의 대부분으로 삼게 했다. 그의 어린 시절은 곤궁했다. 이모는 애정으로 돌봐주셨으나 넉넉지 않은 형편을 알고 있던 그는 급식비를 타는 일도, 숙제를 할 수 있는 참고서를 사달라고 말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참고서가 없으니 늘 숙제를 하지 못했던 그는 벌로 회초리를 맞아야 했던 초등학교 시절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워낙 타고난 소리로 주목을 받았지만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변성기를 맞았던 중학교 때가 그 첫 번째인데 상청이 안 나오는 것 뿐 아니라 온몸을 써야 하는 소리 공부 자체가 힘들어 다른 길을 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모는 그 어느 것도 허락지 않았다. 다시 마음을 다잡았지만 고등학교는 꼭 예고를 가고 싶어 엄마 이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로 갔다. 서울 외곽의 고등학교를 다니던 2학년 때 학생 대사습대회에 나가 2등상을 받았다. 그때 그의 기량을 눈여겨본 박범훈 교수가 국악예고로 편입할 것을 권했다. 전액 장학생으로 서울 국악예고를 졸업했다. 고2때 동아콩쿨에 나가 금상을 수상했지만 이듬해 대사습에 재도전해 장원이 됐다. 중앙대 국악과 입시를 치렀으나 실기시험에서 추임새까지 넣으며 그의 소리에 감탄했던 심사위원들은 그를 떨어뜨렸다. 이모의 권유로 우석대에 들어가 4년 동안 대학시절을 즐겼다. 졸업후 한예종 대학원에 들어가 석사 과정을 마친 그는 때맞춰 공고가 난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에 응시해 단원이 됐다. 이듬해 대사습 명창부에 도전했다. 명창이 되기 위해 목표한 시간은 10년이었으나 그는 단 한번 도전으로 명창이 되었다. 그해 대사습은 심사위원 전원 만점의 최연소 명창을 내는 기록을 갖게 됐다. 이일주 명창으로부터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네 바탕을, 안숙선 명창으로부터 <적벽가>를 이수한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완창회를 시작, 적벽가를 제외한 네바탕 완창회를 가졌다. 2017년에는 화제를 모았던 케이블 음악 방송 엠넷의 <더 마스터-음악의 공존>에 출연, 두 번이나 그랜드 마스터로 뽑혔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국악 관련 각종 대회를 휩쓸고 수많은 전통판소리 무대와 창극 공연에 출연하면서 이름을 알렸으나 쌓아온 경력 대신 자신의 소리로만 장문희라는 이름이 알려지기를 원한다. 이번에 내놓은 <심청가> 음반도 온전히 자비와 자기 시간을 투자해 제작했는데, 그 음반 어디에서도 이 젊은 명창의 화려한 경력을 따로 찾아 볼 수 없다. 심청가로 시작된 음반제작은 춘향가로 이어갈 계획.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수석단원으로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9.11.28 18:59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67. 시간이 쌓이는 만경강 다리

만경강에 은빛 물결이 넘실거린다. 갈대와 물억새가 바람에 흔들거리며 군락을 이룬 모습은 봄철 벚꽃만큼이나 아름답다. 오래전부터 만경강 갈대밭이 백리길에 이른다 하여 이곳을 노전백리(蘆田百里)라 불렀는데 그 명성 그대로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그 모습을 여자의 마음에 빗대어 갈대와 같다고 했는데, 사실 그 갈대라 생각한 은색의 꽃이삭은 억새이다. 벼과에 속하는 둘은 헷갈릴 수 있지만, 구별방법은 의외로 쉽다. 억새는 정갈한 은빛머리이고 갈대는 갈색의 부스스한 사자머리를 하고 있다. 혼돈되고 잘못 알려진 경우가 어찌 갈대와 억새뿐 이겠는가. 그들과 함께 만경강에 어우러져 있는 새창이다리(만경대교)와 목천포다리(구(舊)만경교)가 그렇다. 만경강 다리들이 있는 마을에서는 만경강을 지나는 다리를 모두 만경강 다리라고도 불렀다. 그래서인지 1933년 준공된 새창이다리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콘크리트 다리라는 잘못된 정보가 알려지게 되면서 널리 퍼졌다. 사실, 한강의 최초 인도교인 한강대교는 1917년 준공되었고, 만경강만 보더라도 1928년 준공된 만경교가 새창이 다리인 만경대교보다 먼저 놓인 콘크리트 다리이다. 당시의 고증은 만경강교준공이란 제목 아래 백구면 유강리에서 준공식을 거행 하얏다더라라는 1928년 2월 16일자 기사와 8월 2일 성대한 준공식을 거행했다는 만경대교 준공을 알리는 1933년 8월 4일자 기사로 남아있다. 연장 길이 550m인 만경교는 지금의 김제시 백구면과 익산시 목천동을 잇는 다리로 만경강의 큰 포구였던 목천포에 위치했다. 그 목천이란 지명은 옥야현에 속한 곳으로 남쪽에 위치한 천(川)을 남쪽의 내라 하여 남(南)의 내라 했는데 나무내로 불리다 남이 나무로 인식되면서 목천이 되었다. 또 다른 설로는 목천(木川)이라는 이름을 가진 총각 뱃사공의 사연이 있다. 아름다운 처녀를 짝사랑한 청년이 처녀가 세상을 뜬 것을 알게 되자 상사병을 앓다가 죽자 그 이름을 따 목천포구라 했다고도 한다. 만경교는 만경대교와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일제가 곡물을 수탈하기 위한 통로로 만들어진 다리이다. 1928년 준공되었지만, 오랜 시간의 흔적과 켜켜이 쌓인 포구의 수많은 사연이 깃든 곳이라 그런지 만경교란 정식 명칭보다 마을에서는 목천포다리로 불렀다. 세월이 흘러 다리가 노후화되어 옆에 새로 다리가 놓이면서 기능을 잃고 폐교량이 되자 구 만경교로 불렀다. 1990년 새로운 다리에 역할을 넘기기 전까지 62년간 호남평야의 중심에서 지역의 추억을 잇고 26번 국도의 통로를 연결해 준 다리였다. 일제강점기 아픈 역사의 현장을 지켜본 다리였고, 6.25 전쟁 때에는 우리나라가 해병대를 설립한 후 처음으로 작전을 실시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서슬 퍼런 군부 시대에는 지나는 행인을 검문하던 초소가 다리 양쪽에 있었고, 봄철 강변을 따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벚꽃축제가 화려하게 열리던 장소였다. 또한, 윤흥길 작가의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기억속의 들꽃』의 배경이 된 다리이기도 하다. 푸른 하늘 바탕을 질러 하얗게 호주기 편대가 떠가고 있었다. 비행기 폭음에 가려 나는 철근사이에서 울리는 비명을 거의 듣지 못했다...눈길을 하늘에서 허리가 동강이 난 다리로 끌어 내렸을 때, 내가 본 것은 강심을 겨냥하고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는 한 송이 쥐바라숭꽃이었다. 소설 속 만경강 다리로 등장한 만경교는 이미 소중한 문화자산임이 분명한 다리였다. 지역에는 매우 의미 있는 다리였지만, 사고의 위험이 높아지고 주변 경관을 저해하며 만경강 유수소통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로 1988년 8월 감사원의 지적에 따라 노후교량으로 분류되어 철거 대상이 되었으나, 주민의 이동통로와 벚꽃축제에 이용하기로 한 마을의 의견에 따라 철거를 보류했다. 그러다 쓰임이 줄어들자 익산지방국토관리청에서 만경강 하천환경정비사업을 시작하면서 2014년 12월 철거 계획을 수립했다. 하지만, 역사적 흔적이 남아있는 다리를 두고 존치냐 철거냐에 대한 많은 공론이 오고 갔다. 당시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국 주민과 지자체와 관계기관의 의견을 수렴하여 구 만경교의 일부 교량을 존치하여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기로 합의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만경교를 기억합니다란 컨셉트로 2015년 6월에 교명판과 난간 등 기존 교대부와 슬래브 2경간인 26m를 양안에 남겨 기념할 수 있는 공간 구성을 하고 나머지는 철거했다. 김제시 청하면과 군산시 대야면을 잇는 만경대교도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다. 포구인 신창진(新倉津)의 이름을 새창이라 불리던 것이 만경대교에도 쓰여져 새창이다리가 된 것이다. 1928년 착공되어 1933년 준공된 만경대교는 노후화로 인한 사고 우려로 차량 통행이 금지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다리 곳곳이 금이 가고 일부 콘크리트가 떨어져 철골이 드러날 정도로 흉물스럽게 부서지는 등 붕괴의 위험을 안고 있지만, 사진을 찍고 낚시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어 시급한 조치가 필요하다. 세월의 흔적이 담긴 두 다리는 둘 다 만경강 다리로 불리며 닮은 역사의 흔적을 지녔지만, 다른 모습으로 남아있다. 구 만경교는 기념 공간만을 남기고 부분 철거되었고, 새창이다리는 주민들의 요청으로 철거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그 자리에 서 있다. 은빛 물결로 빛나던 만경강에 철새들이 찾아들고 흰눈이 내리게 되면 그 두 다리는 또 다른 시간 속 겨울 풍경으로 우리를 부를 것이다. 겨울의 문턱에서 만경강을 찾아 갈대와 억새들의 속삭임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는 것도 좋겠다.

  • 기획
  • 기고
  • 2019.11.28 16:49

[통합과 분권의 '지방자치' 시대] (에필로그)확실한 분권과 통합의 지방자치가 국가균형발전 이끈다

행정구역통합과 지방분권은 중앙과 지방정부의 권력 구조 개편을 통한 수평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제왕적 대통령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선 지역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국가균형발전의 중요성은 지역발전이 국민의 삶과 직접 관련이 돼 있다는 데 있다. 서울공화국에서는 서울시민과 타 지역민이 누릴 수 있는 실질적 권리에서 큰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제대로 된 지방분권과 지역통합을 통해 수요자 중심의 지방자치를 만들어 나가야한다. 인구수요 논리에만 사로잡혀 국가균형발전에는 관심이 없는 중앙부처와 국회에만 지역의 문제를 맡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낙후된 전북에서는 더욱 뼈아프게 느끼고 있는 사실이다. 이는 시혜적 차원이 아닌 지방이 본래 가져야 할 당연한 권한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작업이다. 이제 고루 잘사는 나라를 만들자는 큰 틀에 대해서는 이미 국민적 합의가 상당 부분 이루어진 상태다. 이제는 실질적 행동이 우선돼야 할 때다. △지역이 강한 나라 균형 잡힌 대한민국가난한 지역의 자립부터 해결해야 문재인 정부는 지역이 강한 나라, 균형 잡힌 대한민국을 구현해 가는 것이 목표로 국가균형발전 시책을 추진해나가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 전북은 인구감소와 급격한 고령화로 지방소멸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의석 수 감소로 전북의 정치력은 위축되고 경제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인구감소는 학령인구감소, 경제활동인구 감소로 이어진다. 인구감소는 정치력 약화와도 맞물린 문제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연동형비례대표제 선거구 개편안이 그대로 시행되면 전북의 의석 추가 감축이 불가피하다. 오랜 중앙집권적 사회시스템과 국민적 관행이 중앙과 지방의 극단적 불균형을 불러오고 있는 것이다. 전북은 대다수 시군은 이미 소멸위험지역에 포함됐다. 전북 소멸위험도는 전국 4위에 해당 한다. 민주주의 제도는 기본적으로 다수결의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 이 때문에 수의 논리에 앞서 사람이 많은 곳의 권리가 우선 보장된다. 지역구 제도와 비례대표 등가성 등 대의민주주의의 기본 제도들이 모두 다수의 논리위에서 구축된 제도이기 때문에 기존의 민주주의 제도 하의 전북의 위상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전북은 지방분권제도가 시행 되도 자립이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지역이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국가차원의 배려가 필요하다. 그러나 국가에 의존하기 전 내부에서 강한 중심권도시를 만들어 시대적 흐름에 대비해야한다. △거점도시 발전의 딜레마 극복 전주는 전북의 중심도시이지만 전북성장을 이끌어가는 중추적 기능에서는 타 지역 대도시보다 부족하다. 자족기능을 넘어 주변지역 파급효과까지 갖추려면 100만 이상의 인구와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고도화가 필수적이다. 지리적으로는 완주와 김제에 둘러싸여 전주시의 광역화는 요원하다. 이 때문에 완주과의 행정구역통합을 통해 대도시로 도약하는 지렛대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전북은 경남 창원과 충북 청주가 성공한 가운데 혼자서 통합에 실패했다. 이제 전주는 특례시 지정에 집중하고 있다. 거점도시의 발전이 전북전체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명분에서다. 그러나 인근 지자체의 사정은 다르다. 전북 내에서도 균형발전이 안 된다는 명목으로, 전주가 타 인근도시의 블랙홀이 될 수 있다는 명분에서 거점도시의 성장을 견제한다. 통합대상에 떠오른 완주군은 충분히 자족도시의 기능을 할 수 있다며 여전히 반대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청추와 창원은 행정구역통합으로 몸집을 불리고, 인근 산업단지 유치와 공항을 통해 대도시로 도약하고 있다. 예산규모도 전주의 배 이상으로 늘어나고 있다. 통합 후 가장 달라진 점은 재정 규모다. 올해 청주시의 예산은 2조 3353억 원이다. 이는 전국 220여개 기초지자체 중 4번째로 많은 수치다. 이들 지역은 광역시에 준하는 중심권 도시를 다시 만들면서 1차 산업에 치중했던 산업구조를 재편하고 있다. 청주시와 창원시는 가장 유력한 특례시 후보이기도 하다. 다원적 정치 질서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역 내부에서의 통합을 바탕으로 한 구심력을 갖춰져야 한다. 또 분권을 바탕으로 한 원심력이 균형도 중요하다. 프랑스 메트로폴은 강력한 지방자치와 권력균형의 한 예다. 대도시권연합이란 뜻을 가진 메트로폴은 코뮌(우리의 읍면에 해당하는 프랑스의 최소 행정구)에 분산됐던 지방권력의 한계를 극복해 글로벌 경쟁력을 육성하기 위해 2010년 12월 만들어진 지방정부 통합조직 체계다. 지방분권형 개헌 이후 지자체가 하나의 거버넌스 형성한 것이다. 메트로폴 의회는 자신의 권역에서 발생한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한다. 메트로폴에 주어진 권한과 책임은 중앙정부에 필적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서울공화국은 식민지적 행태 확실한 권력 이양 함께해야 서울공화국은 사실상 지방을 차별하는 식민지적 행태를 고착시킨다는 점에서 국가균형발전을 위한 통합과 분권의 지방자치는 더욱 중요해졌다. 지자체 공무원들은 예산철이나 주요 국가사업이 있을때마다 중앙부처 찾아가지만 가도 만나주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다. 단체장이 찾아가도 제대로 된 정보공유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앙에 애걸복걸하고 여기에 인맥을 통해야만 지방 현안 해결이 가능한 지방정치풍토가 정상으로 비춰지는 것도 이 같은 구조가 고착화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수도권 공화국에 길들여져 차별과 종속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이것은 지역민은 물론 서울시민까지 피폐하게 만들고 한국의 성장 동력을 서울로 국한하게 만드는 기형적 구조를 만들고 있다. 지역균형발전을 달성하려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정치적 결단과 정교한 정책설계는 물론 전 지방의 통합된 합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끝>

  • 기획
  • 김윤정
  • 2019.11.27 16:42

[트램, 과거에서 미래를 보다] (중) 호주 시드니·멜버른 트램

도로폭은 한정돼 있고 차량수는 매년 늘어나면서 현대 도시들이 겪고 있는 공통 문제는 바로 교통체증이다. 교통체증이 늘면서 대중교통수단들도 정체되고 급기야 폐지되는 수순을 겪을 수 밖에 없는데, 시드니의 트램의 경우 폐쇄 위기까지 갔다가 다시 활성화 수순을 밟고 있다. △다시 전성기를 맞는 호주 시드니 트램 시드니 트램 네트워크는 1879년부터 1961년까지 도시 외곽 위주로 운행해왔다. 전성기때에는 이 트램이 대중교통 수단으로 영국 연방 가운데 가장 각광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승객들이 목적지에 따라 기차와 트램을 번갈아 환승하면서 이동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전에는 전차를 통해서만 도심의 목적지로, 또는 교외지역으로 여행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30년대 트램 운행이 최고조에 달하면서 한번에 약 1600대의 차량이 운행되는 전성기를 맞았다. 시드니 기차역에서 피트스트릿을 따라 써큘러키 지역으로까지 이어져 있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자가용 등 늘어나는 차량과 버스들에 밀려 트램이 교통혼잡을 더 가중시키는 것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러면서 1930년대 후반부터 점진적으로 노선이 폐쇄되기 시작했다. 시 정부는 트램을 잠정 폐쇄한다는 정책까지 내놓았다. 그럼에도 트램이용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여론도 만만치 않자 시 정부는 1950년대 초 트램 폐쇄정책을 폐지했다. 트램이 더 이상 늘어나는 일은 없었지만, 시 정부는 시간이 흐를수록 교통체증의 원인이 트램이 아니라 자동차 증가가 주 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도심 곳곳에 트램이 다시 운행하기 시작하고 현재는 시드니 중심가 도로인 조지스트릿(George Street)까지 트램 신설 노선 공사가 수년째 이어지고 있다. 공사를 위해 곳곳에서 교통통제도 이뤄지고 있었다. 실제 현장을 찾아보니 현재 조지스트릿에는 10여분 사이로 60m길이, 최대 500명까지 탑승이 가능한 현대식 트램이 노선공사를 마치고 시범운행 중이었다. 일부구간에서는 전통적으로 트램위에 전선을 잇는 것이 아닌 정류장 마다 충전후 다음 정류장까지 달리는 무선 충전식 트램인 무가선 트램도 도입될 예정이란다. 다른 교통수단과의 연계성도 높았다. 트램 교통카드와 시드니 시내 하버브릿지 등 크고 작은 하버들을 오가는 배편과도 연계돼 있어 편리했다. 시드니에서 트램에 탑승하기위해서는 이 교통카드를 사용하는데, 이 교통카드는 편의점이나 터미널 인근 티켓 발매기에서 구입한 뒤 충전하면서 사용하는 형태이다. 요금은 트램 정류장 한쪽 기둥처럼 생긴 인식기에 대면 자동으로 요금이 차감된다. 우리나라 지하철 같은 보증금 개념이 없고 한번 카드를 구입한 뒤 그 카드에 충전하면서 사용하면 할인폭이 커지는 형태이다. 우리나라 지하철 일회용 교통카드에도 도입할 만한 시스템이었다. 전주시와 시드니 시의회 교류 증진 자리에서 만난 로버트 쿡 시의회 의장은 시드니 시의 교통량이 늘면서 메인스트릿인 조지스트릿의 트래픽(교통체증)이 심각해졌다. 그래서 도로 한쪽을 아예 양방향의 차량통행을 막고 신규 트램노선을 설치하는 한편, 자전거길을 조성했다고 설명했다. △트램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한눈에, 트램의 성지 멜버른 멜버른 트램은 1960년대 자동차의 번성기와 맞물려 전세계적인 트램 폐쇄 정책과 달리 그대로 유지한 도시로 현재 세계 최장노선을 운행하고 있다. 연장은 250km, 노선은 26개 노선에 달하며, 정류장은 1763곳에 달한다. 트램 차량대수는 487대이며, 수송인원은 연간 2억명에 달한다. 멜버른은 초 트램도입부터 현재까지 그 역사와 전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트램 설치 및 운행을 위한 여러 가지 현장 조건에 맞는 기술과 노하우를 갖고 있는 지역이다. 도심에서 외곽 나가는 노선은 서로 분리하고, 고속으로 운행 가능한 전용 구간을 설치해 이동성을 향상시키는 한편, 도심에서는 여러 노선이 만나 환승을 용이하게 하고 많은 트램 차량이 저속으로 운행하고 있었다. 특히, 도심 관광 편의와 경제활성화를 위해 트램 무료 순환 노선으로 시티서클을 운영 중이며, 2015년부터 도심내 트램 이용이 전면 무료화됐다. 무료구간 내 승하차가 자유롭기 때문에 비교적 유동인구가 적은 시간대에도 많은 시민들이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멜버른에서 무료트램 구간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멜버른 트램운행은 멜버른시가 민간운영사에 위탁해 손실을 보존하고 연 6%의 수익을 보장해 주는 형태인데, 최근 무료구간 운행을 지속하기로 일단락 됐다. 수익의 일부는 트램 전체를 광고매핑을 하는 등 부가수익도 창출하고 있으며, 매핑된 트램 역시 도시경관과 조화를 이룬다. △직접 트램 타보니 도심 중심을 달리는 트램은 흔들림 없이 천천히 나아갔다. 시속은 10~20km 정도, 워낙 천천히 운행하다 보니 트램 바로 앞에서 행인들이 스스럼없이 도로를 건너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행인들이 행여 트램이 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까. 땡, 땡 울리는 종소리도 들린다. 이 종소리는 초창기 트램에 메달고 직접 손으로 치는 종소리를 그대로 녹음한 것이라고 한다. 이 종소리는 최신식 트램에도 그대로 도입됐다. 과거의 것을 기억하도록 하는 세심한 배려가 느껴졌다. 트램 한쪽으로는 승용차들이 달리는 구간도 눈에 띄었다. 어떤 구간에서는 트램이 선로를 지나가는 소리가 거칠었다. 함께 동행한 한국철도기술연구원 관계자는 최신식 선로의 경우 소리가 거의 없지만, 구선로도 그대로 이용하면서 소리가 좀 더 크게 들리고 거친 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과거선로와 현재선로가 그대로 공존하고 있는 것이었다. 간혹 앞모양이 우리나라 KTX 형태로 된 트램도 눈에 띄었다. 공기저항을 줄이고 트램몸체를 도로에 붙이면서 행인들의 안전사고를 막기 위한 최신식 미래형 트램이었다. 그런 가운데, 과거 초창기 트램들도 종종 도심을 오갔다. 멜버른 도로에서 우선순위는 보행자, 자전거, 트램, 일반 자동차 순이다. 일부 자전거 도로와 트램노선과 정류장 사이에 있는 자전거 도로에서 자전거를 타던 시민들이 트램이 멈추자 트램에서 승하차 하는 시민들을 위해 멈춰서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 곽재호 한국철도기술연구원 트램연구단장 트램은 친환경적이고 도시 재생에 효과적입니다 호주 멜버른 트램 취재와 함께한 한국철도기술원 곽재호 트램연구단장의 말이다. 곽 단장은 호주 멜버른의 특징은 보행자들, 시민, 관광객들이 친환경적으로 도시 곳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며 특히 도시 중심가에서는 관광객 등 이동수요가 많은데, 자동차 진입을 막기위해 무료 운행중인 부분도 주목할 만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수백억 달러의 적자를 감수하고도 무료트램을 운행하는 이유는 시민들에게 보행권을 제공하고 관광활성화를 통한 도시 발전 측면에서 이익이 더 크다고 판단한 때문인 것 같다고 분석했다. 곽 단장은 우리나라는 자동차 중심의 도로 운행 패턴인데, 호주 트램처럼 보행자, 인간 중심의 도로 형태로 발전돼야 한다며 도시가 발전하게 되면 도시 중심부는 사람과 자동차가 몰리게 되는데, 그 대안으로 트램을 추천할만하다. 신형 트램 한 대는 버스 4~5대와 같은 운송효과가 있고 전기로 움직이기 때문에 친환경적이며, 이를 통해 도시가 재생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 기획
  • 백세종
  • 2019.11.26 17:20

[카드뉴스]

  • 기획
  • 신재용
  • 2019.11.26 15:18

[소곤소곤 전북일상] 고창 만돌어촌 지주식김 : 서해안만의 특별한 자연보물

가정의 식탁에 매번 빠지지 않고 올라가는 대중적인 반찬으로는 뭐가 있을까요! 아이가 있는 우리 집에서는 밑반찬으로 김을 항상 올리곤 합니다. 평소에도 잘 먹는 반찬이기도 하지만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좋아하기 때문이죠. 입맛이 없거나 별다른 반찬 없이 음식을 조리하지 않아도 되니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반찬 중의 하나인 것 같아요.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람사르 습지로 지정된 고창갯벌은 다양한 생물이 서식하기로 유명한 곳으로 2010년 람사르협회가 지정, 등록해 보호하는 습지이기도 해요. 곱고 부드러운 모래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백사장으로 해가 지는 석양은 아름다운 장관을 이룹니다.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 핵심지역으로 람사르습지로 지정된 곳으로 바다의 섬과 바위가 어우러져 있어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입니다. 김은 단백질과 비타민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 영양이 풍부한 식품입니다. 마른 김 5매에 들어 있는 단백질은 달걀 1개분에 해당하며, 비타민 A는 김 한 장에 함유되어있는 것이 달걀 2개 분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또한, 콜레스테롤을 체외로 배설시키는 작용을 하는 성분이 들어 있어 동맥경화와 고혈압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으며 상식할 경우 암도 예방된다고들 하죠. (출처 : 네이버 사전) 고창군 심원면 만돌리의 고창군 서해 앞바다에서는 옛날부터 전통방식 지주식 김 양식장이 있습니다. 지주식 김은 일반 김의 생산과정과 엄격히 다른데요. 그 차이는 서해의 조수간만의 차로 인한 밀물과 썰물에 따라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벌에 지주를 설치하고, 김포자를 심은 그물을 설치하여 김을 재배하는 것으로 전통방식 그대로를 현재까지 고집하여 생산하고 있어요. 지주식 김은 충분한 광합성을 일으켜 성장하도록 일정한 시간을 노출관리 하여 김 본래의 맛과 향을 그대로 유지하고 친환경적 양식방법으로 생산된 자연식품이에요.!! 지주대에 그물을 설치하러 나가기 위해 물때를 기다렸다가 작업을 합니다. 직접 바다에 포자망을 가지고 가서 손수 그물을 매다는 작업을 합니다. 분양 전에 지주식 김을 발장하는 과정입니다. 포자이식이 끝난 발장을 분리합니다. 채묘된 김포자가 잘 자라나고 있습니다. 물을 흠ᄈᅠᆨ 머금고 있기에 경운기의 힘을 빌려 수확하는 과정입니다. 바닷물의 밀물과 썰물 해풍과 산풍 그리고 햇빛의 광합성에 노출되기를 반복하여 자연 그대로의 산물로 만들고 있습니다. 염산을 사용하지 않은 친환경 지주식 김은 만드는 과정 하나하나 사람의 손길이 안 닿는 부분이 없을 정도로 많은 정성과 노고가 있기에 우리가 각 가정의 식탁에 오르게 되는 맛있는 김을 손쉽게 맛볼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생명이 숨 쉬는 살아있는 갯벌을 마을 주민들이 아끼고 보호해서 후손에게 남겨준다면 이보다 더 값진 재산이 없을 것입니다. 400년 전통으로 한자리에서 전통방식을 고수하며 끝까지 지키고 있는 만돌어촌계 주민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만돌어촌계는 김을 이용한 제품으로 갯벌체험으로도 유명한 서해안 동죽으로 만든 동죽 말랭이, 동죽 말랭이 조림, 김 장아찌를 선보일 예정입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몸에도 좋은 김이 우리 것이라서 좋은 것입니다. 주소: 전북 고창군 심원면 애향갯벌로 320 만돌어촌계 문의전화 : 고창만돌 김현술어촌계장님 010-3682-1733 고창만돌갯벌체험장 063-561-0705 가을이라는 계절 때문인지 쓸쓸하고 고독해지는 이 계절 어른들과 아이들이 함께 가을바람 맞기 좋은 곳을 소개해드려요. 바로 람사르 고창갯벌센터와 갯벌식물원이에요. 갯벌의 살아 숨 쉬는 많은 여러 바다 생물을 한 곳에서 관찰하고 견학할 수 있는 센터로써 방문객을 대상으로 하는 월별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셔서 다양한 주제의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폭넓은 해양환경교육을 경험할 수 있어요.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주꾸미 놀이터는 바다 생물이나 어류에 관심 있어 하는 아이들의 동심을 자극하는 곳이기도 해요. 상상력을 불어 주고 조형물을 통해 아이들의 관심사를 눈으로 보니 갯벌센터에 맞는 놀이터가 마련되어 있으니 아이들과 갯벌센터에 오셔서 들려주세요! 주소 : 전북 고창군 두어리 애향갯벌로 591-34 #람사르고창갯벌센터 문의전화 : 063-560-2640 063-560-2639 /글사진 = 최유정(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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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1.25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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