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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68. 천년을 지킨 미륵사지석탑의 석인상

익산 금마면에 있는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석탑 하단 모서리에는 천진한 얼굴의 석인상이 있다. 20여 년간의 복원 기간을 마치고 공개된 석탑에 눈길을 빼앗기느라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자그마한 크기이다. 미륵사는 백제 제30대 왕인 무왕 대(639년) 창건된 사찰로 당시 목탑 1기와 동편과 서편에 석탑 2기를 세웠으나 목탑은 소실되었고 동편의 석탑은 1990년대 복원되었다. 미륵사지석탑으로 불리는 서편의 석탑은 일제강점기 탑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당시 기술로는 최선인 콘크리트로 보수했지만, 석탑위에 덧바른 콘크리트는 우리 역사위에 덧씌워진 오욕의 흔적처럼 아픈 더께로 남아있었다. 조선에 존재하는 석탑 중 최대라며 미륵사지석탑을 평했던 일제는 1910년 12월 조사단이 촬영한 사진과 1915년 석축과 콘크리트로 무너져내린 서쪽 면을 보강한 뒤 석탑의 사진과 도면을 『조선고적도보』 등에 남겼다. 콘크리트로 보강되었던 석탑은 1998년 정밀구조 안전진단 결과 안전성에 문제가 제기되어 문화재위원회에서 해체보수가 결정되면서 복원을 하게 되었다. 앞서 복원된 동탑이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조형물로 인식되자, 서탑의 복원은 2001년부터 18년간의 검증을 거치며 원래 있던 부재를 80%가량 사용해 복원을 마무리했다. 해체와 복원을 거쳐 공개에 이르기까지 지난한 과정이었지만, 그 시간을 다독인 손길들에 의해 미륵사지의 비밀을 풀 수 있는 결실도 얻었다. 2009년 해체조사를 하던 중 석탑 1층 심주석 중앙에 봉인해 놓은 사리장엄구의 발견은 석탑의 건립시기와 미륵사 창건과 연관된 사연을 알게 된 최대의 성과였다. 그에 앞선 2008년에는 그 천진한 얼굴의 석인상 1기가 발견되었다. 해체 전 탑의 북동, 북서, 남동 측의 기단 모서리와 바닥에는 총 3기의 석인상이 있었는데, 남서 측의 석인상이 발견되면서 석탑의 사방을 수호하는 수호석상의 완전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보물로 지정된 석탑과 사리장엄구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발견 당시에 화제가 되었다. 해체하던 중 남서 측 바깥의 지면 석축 내부에서 발견된 석인상은 오랜세월 외부에 노출되어 풍화작용을 겪은 3기의 석인상과 달리 석축 안에 있던 상태라 보존상태가 매우 좋았다. 보수정비사업단에서 실무를 담당한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사 김현용은 석인상이 하나 더 있으리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당시 7~8명이 함께 석축 해체 작업을 하는데 넙적하게 덮어 놓은 돌 아래에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돌을 걷어내니 둥그런 머리통에 이어 온전한 몸통을 지닌 석인상이 드러나는데 어찌나 기쁘던지요. 늘 긴장하는 현장에서 순박한 얼굴과 가지런히 손을 모은 모습을 온전하게 발견한 그 날이 아직도 생생해요라며 당시의 감회를 전해주었다. 석탑 모서리에 자리한 석인상에 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1910년대에 일제가 남긴 사진과 도면을 통해 붕괴된 석축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구석에 반쯤 묻혀있거나 삐딱하게 자리한 석인상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자료를 보면 9층으로 추정된 석탑이 17세기 초 7층으로 무너지기 전에 이미 석축을 쌓았고, 18세기 중기에 석축이 다시 무너져 6층으로 변형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과정에서 석탑의 사방에 놓여 있던 석인상도 석탑이 붕괴되고 보수되는 과정에서 조금씩 이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석인상은 석탑이 처음 창건된 백제 때 탑과 함께 조성된 것이 아니라, 후대에 사방수호신격으로 탑의 네 모서리에 안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 1층 기단 주위에 노출되었던 기존의 석인상 3기는 풍화와 훼손이 심해 제작시기와 양식을 알기 어려웠지만, 남서의 석인상이 발견되면서 그나마 추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각각의 석인상은 미세한 높이 차이가 나지만 그들의 키는 대략 92~93cm이다. 북동의 석인상은 가장 심하게 풍화된 상태지만 두상과 몸체를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을 지녔고, 북서의 석인상 역시 풍화가 심한 상태로 두상의 일부가 파손되어 떨어져 나가 있으나 손과 얼굴의 모습이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상태이다. 남동의 석인상은 1910년 조사단이 촬영한 사진에서도 그 모습이 상세히 남아있는 석인상으로 북쪽의 석인상에 비해 손 모양과 두상의 귀 모양 등 몸체의 구분이 분명하다. 일제가 기록한 사진과 도면을 통해 붕괴된 석축의 모습과 석인상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남서 측의 석인상은 석축을 축조하면서 석축 안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외부 환경과 차단되면서 다른 세 위치에 놓인 석인상에 비해 훼손되지 않고 뚜렷한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이다. 석인상의 투박하고 순진한 얼굴은 돌하르방과 돌장승을 닮았으며 가지런히 두 손을 가슴에 얹은 자세로 조각되었다. 석인상은 동물에서 사람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이며 둥그런 몸체와 두툼하고 큰 귀의 표현 등을 보았을 때 고려말이나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와 흡사한 유래로는 진묘수(鎭墓獸)라 하여 무덤을 수호하는 목적으로 사용한 석상이 있다. 백제 무령왕릉을 지키는 무덤에도 있으며, 신라시대 성덕왕릉 앞에도 석조물이 있다. 그러한 수호의 기능을 위해 석탑의 사방을 지키는 사방신의 의미로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듯하나 각각 바라보는 방향도 각기 다르고 손과 얼굴의 모습도 다른 석인상은 백제 무왕과 왕비가 품었던 꿈을 굳건하게 수호한 물상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천년을 넘게 사방을 주시하며 그곳을 닳도록 지켜 온 석인상을 만나 그 순전한 모습을 마주하고 탑돌이를 하며 우리의 꿈도 기원하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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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12 17:16

[떠나자 전주여행] 어릴 적 추억이 떠오르는 그 길, 자만벽화마을 둘러보기

전주 한옥마을 못지않게 전주 시민과 관광객에게 사랑받는 `자만벽화마을`. 이곳은 과거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달동네인데요. 시간이 흐르면서 늘어나는 공가, 벗겨진 벽화, 쓰레기로 많은 문제점이 드러났지만, 마을 주민들과 공공 기관들의 노력으로 지금의 알록달록 벽화들로 전주 시민과 관광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마을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즐거움과 추억이 가득한 자만벽화마을을 걸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만벽화마을에 도착하면 두 갈림길이 보입니다. 왼쪽부터 올라가 봤는데 입구에는 안내 표지판도 있어 참고하셔도 좋을 듯싶습니다. 입구에는 쉬다 갈 수 있는 예쁜 카페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요. 카페 앞에 있는 의자는 알록달록 색을 입혀서 포토존으로 활용해도 손색없어 보입니다. 벽화는 일본 애니메이션 원령공주, 마루 밑 아리에티 등 유명한 만화 주인공으로 시작되는데요. 이외에도 어떤 벽화가 나타날지 궁금함을 자극합니다. 연인끼리 오면 사랑이 싹 틔 일만 한 벽화도 눈에 띕니다. 커플들은 그림 앞에서 추억을 남겨도 좋을 듯싶습니다. 옛 기억을 새록새록 떠올리게 만드는 추억의 만화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70년대~90년대를 풍미한 달려나 하니, 슬램덩크, 영심이, 빨간 머리 앤, 시티헌터 등 캐릭터 등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만화 속 주인공들이 벽화 속에서 말하는 거 같네요. 과거 추억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유명 캐릭터를 보며 옛 기억에 잠시 젖어보세요. 캔디 밑에 있는 만화책은 주민들이 쌈짓돈을 모아 준비했다고 하는데요. 책의 상태는 좋지 못한 상태여서 그림과 함께 눈으로만 즐기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걷다가 지치면 카페에서 잠시 쉬다 가세요." 목 축이러 들어간 카페는 `꼬지따봉` 이란 곳입니다. 카페도 벽화마을 특색에 맞게 외관을 꾸며놨습니다. 곳곳에도 카페가 있었지만, 중간 언덕쯤이라 걷다 힘드시면 한번 들러 커피 마시며 쉴만한 곳입니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나오시면 존 레넌, 메릴린 먼로, 마이클 잭슨과 같은 유명인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유명인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네요. 자만벽화마을엔 벽화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마을의 소소한 일상들도 엿볼 수 있었는데요. 햇볕에 말린 고추도 있고 담장 넝쿨도 보이고 대하에 심어놓은 식물들도 눈에 띕니다. 그리고 높은 곳을 가면 전주 시내를 바라볼 수 있는 풍경도 있는데요. 벽화를 보다 잠시 소소한 일상도 둘러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식물들도 많이 그려져 있습니다. 벽면 표면이 울퉁불퉁해 해바라기 등 그림들이 입체감이 느껴졌는데요. 가을이 가고 겨울이 다가왔는데 이번에 가을 감성을 못 느끼신 분들은 벽화그림을 보며 아쉬움을 달래보세요. 작가들의 작품들도 눈에 들어옵니다. 첫 번째 그림은 이지현 작가의 `지지 않는 코스모스`라는 작품입니다. 우리 어머니들의 삶과 달리 화려한 색채로 젊음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 그림은 `이름조차 상상해버린 당신 나에 엄마`인데요. 엄마들의 사랑과 희생에 감사함을 늘 우리 삶 가까이 존재하는 쌀에 비유해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그림은 로사 작가의 `아직은....`입니다. 찬란한 내일을 위해 청춘이니깐 절망하지 말고 한번 해보자는 메시지를 물감에 녹여냈다고 합니다. 마지막 그림은 오얏꽃과 고종황제 손자 이우 인물입니다. 그림 밑에는 자만동금표 비석도 함께 있었는데요. 조선 왕조 선대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자만동을 보호하기 위해 고종이 1900년경 금표를 세우게 됐는데 이를 `자만동금표`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한글로 된 벽화와 비빔밥 그림과 함께 한국화와 점묘화도 많이 그려져 있습니다. 마지막 길에 다다르면 스파이더맨과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림 그리고 알록달록한 가족 그림도 있습니다. 색채가 예뻐 마음마저 순수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이렇게 자만벽화마을을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입구로 돌아왔습니다. 올겨울 전주로 여행을 계획하고 계신다면, 이곳 자만 벽화마을을 여행해 보시길 추천해 드립니다. /글사진 = 송다예(전주시 블로그 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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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09 14:10

[뚜벅뚜벅 전북여행] 전주 황강서원, '조선의 역사를 지켜오다'

전주는 조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지역입니다. 10년 전 아니 1년 전 흔적 또한 빠르게 사라지는 세상이건만 전주는 여전히 조선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 황강서원 역시 오래된 조선의 역사를 지닌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조선시대 유학자를 기리고 당대의 특징을 살펴보기 좋은 건축물이랍니다. 높다란 아파트와 달리 조금은 낮지만 고즈넉한 이곳으로 여행을 떠나봅시다. 황강서원은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 마전에 있으며 황강 이문정의 호를 본떠 만든 서원입니다. 서원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조선시대 저명한 이문정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입니다. 이문정은 관직 생활에서 물러난 후 효자동 문학대에서 많은 인재를 양성했습니다. 황강 서원에는 이백유, 이경동, 이목, 이덕린, 유인홍, 강해우 등의 위패를 기리고 있습니다. 본래 황강서원은 지금의 장소가 아닌 전신은 전주 곤지산 아래에 창건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종 5년(1868)엔 서원철폐령에 따라 허물어졌고 이후 광무 2년(1898)에 지금의 위치로 황강서원이 새로 세워졌습니다. 황강서원은 자칫 역사 속에서 사라질 뻔했지만 고난을 넘기고 오늘날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게 됐습니다. 황강서원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2호로 입구엔 붉은 칠을 한 나무문인 홍살문 하나가 보입니다. 홍살문 너머 산 언덕 위편엔 이문정이 인재를 양성하던 문학대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황강서원의 강당부터 천천히 둘러봤습니다. 기둥마다 여섯 개의 주련이 보이고, 가장 두드러지는 건 황강서원과 완산재라고 적혀있는 현판이에요. 현판은 여산 송성용 선생의 글씨로 거침없는 필체가 인상적입니다. 강당 앞 편에는 3개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곳곳에 이끼가 끼고 낡은 것으로 보아 꽤 오랜 시간 동안 제자리를 고수했음이 느껴집니다. 황강서원 강당 뒤편엔 황강사가 있습니다. 황강사는 황강 이문정 외의 선현 제향 및 위패를 모시는 사당입니다. 황강사 동쪽에는 양후사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양후사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인 이백유의 시호에서 유래됐습니다. 황강사가 나무 원목 자체의 느낌이 강한 건물이라면 양후사는 보다 세련된 느낌이 가미돼 있습니다. 한옥 단청의 오방색이 참 화려하죠? 현대식 아파트와 견주어도 될 정도로 아름다운 우리 전통 한옥의 모습입니다. 다만 아쉽게도 문화재 보호를 위해 내부 관람은 불가했습니다. 자물쇠로 굳게 닫혀있기에 외관만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상심하던 찰나, 황강서원에선 예상치 못한 존재를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황강서원의 터줏대감으로 보이는 고양이가 그 주인공입니다. 마치 자기를 따라오라는 듯 도슨트를 자처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고양이 따라 황강서원의 이곳저곳을 누벼봤습니다. 부속기관 곳곳마다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칠이 벗겨지고 일부 균열이 갔지만 150년을 세월을 고려하면 전반적으로 보존이 잘 된 것 같았습니다. 이밖에 황강서원의 바깥, 전주이씨 시중공파 황강공대종원 옆엔 동래정씨 정려문과 효자전주이공춘선지려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선조들이 중시했던 덕목 중 하나인 효행에 대해 생각 해보게 됩니다. 황강서원은 조선의 건물양식은 물론 건물적 가치와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는 공간입니다. 이곳에서 전통 조경의 맛과 멋 모두를 느껴보세요. /글사진 = 김선화(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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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09 13:37

[뚜벅뚜벅 전북여행] 전북 장수 천연기념물, 봉덕리 느티나무 “500년의 역사를 지닌 마을의 수호신”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진입하는 때, 금강이 흐르는 전라북도 장수군 천천면을 들렸습니다. 이제 가을의 옷을 벗고 겨울의 옷을 입고 있는 장수군 그것도 천천면에 있는데 인근에서 이곳에 유명한 나무, 그것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방문한 곳이 바로 천천면 봉덕리에 소재한 느티나무입니다. 봉덕리 느티나무는 천천면 사무소에서 도보로 10여 분 정도에 소재한 고금마을이라는 곳에 있었습니다. 낙엽이 후두두 떨어진 길, 하늘은 파랗고 땅은 갈색빛을 띠고 있는 날 기분 좋은 발걸음, 저 멀리 느티나무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느티나무 가까이 들어서니 주변에 보호선을 쳐둔 공간에 작은 설명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천연기념물인 관계로 최소한의 보호와 관람객들의 안내 문구가 보입니다. 대한민국 어디서나 보기 어렵지 않은 느티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유는 무엇일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설명의 전문을 읽으니 장수군 천천면 봉덕리의 느티나무에 엮인 다양한 유래가 있습니다. 특히 봉덕리의 느티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닌 오랜 세월 동안 봉덕리 사람들의 수호신처럼 여겨왔던 나무라고 합니다. 현재도 매년 정월 초사흘에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내는 공간이라고 합니다. 당산제에 대해 좀 더 알아보니 이는 한 해 동안 마을의 평안을 기원할 뿐만 아니라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과 축관은 당해 상(喪)을 당하거나 출산을 한 사람을 제외하고 가장 청결한 사람을 뽑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사 당일에는 인근의 우물을 깨끗이 치우고 황토를 뿌려 주변을 정화하고 당산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봉덕리 느티나무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봅니다. 장수 천천면 봉덕리의 느티나무는 지상으로부터 약 1.5m까지 외줄기로 되어있고 그 위로부터 줄기가 갈라져 있습니다. 그리고 느티나무는 한 그루가 아닌 주변 그루까지 합치면 총 3그루가 되어있는 일종의 느티나무 구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느티나무의 뿌리를 보면 봉덕리의 느티나무의 거대한 규모를 체감하게 됩니다. 과연 봉덕리의 느티나무는 얼마나 오랜 역사를 지닌 나무일지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정면에서 바라본 봉덕리 느티나무는 당산제라는 축제를 한 이유를 알 수 있게 합니다. 마치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서낭당의 모습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그리고 느티나무 정면에는 이곳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유가 잘 드러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궁금했던 이곳의 역사입니다. 봉덕리의 느티나무는 무려 5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나무입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날이 1998년이니 지금으로 치면 520여 년의 시간을 견뎌온 장수군 천천면 봉덕리의 살아있는 전설과도 같은 나무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를 꼽자면 느티나무의 두껍고 강건해 보이는 줄기에서 힘이 느껴집니다. 단지 커다란 나무라기보다는, 오랜 시간을 견뎌온 생명체만이 전달할 수 있는 에너지가 봉덕리 느티나무에서 느껴졌습니다. 고금나무 뒷산에서 여전히 생명력을 뿜고 자라고 있는 봉덕리의 느티나무는 18m에 이르는 높이 만큼이나 봉덕리 사람들의 보살핌을 오랜 세월 동안 받아왔기에 현재의 아름다움과 강인함을 드러내는 특별한 느티나무가 되지 않았을까요? 장수군의 봉덕리에 가신다면, 금강의 아름다움을 먼발치서 지켜보는 봉덕리 느티나무에 들리셔서 웅장한 모습과 나무가 뿜는 특별한 에너지를 받아오셨으면 합니다. /글사진 = 박경호(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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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09 13:22

이호석 호남지방통계청장 “이용자가 필요한 통계 생산 위해 노력”

이호석 호남지방통계청장이 취임한지 100일이 지났다. 지난 100일동안 이 청장은 지역발전을 위한 유용한 통계자료를 생산하기 위해 바쁜 일정을 보냈으며 나라키움 광주통합청사로 청사를 이전해 직원들의 근무환경 개선과 만족도를 높이는 성과를 보였다. 특히 그는 전북지역에 대두되고 있는 고령화저출산 문제들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활동들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이 청장을 만나 취임 소감과 그동안의 활동 그리고 계획 등을 들어봤다. - 호남지방통계청 청장에 취임한지 100여 일이 됐습니다. 우선 소회가 궁금합니다. "지난 7월 19일 취임 후 광주, 전남지역을 비롯해 호남지방통계청이 관할하고 있는 전북, 제주지역을 돌아보며 현장조사를 담당하는 직원, 응답가구, 사업체 등으로부터 생생한 현장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호남지역은 현장조사의 접근성이 떨어지는 산간농가와 도서지역이 많아 접근에 어려움이 많고 가구의 경우 개인 사생활 보호, 맞벌이 부부 증가 등으로 인한 조사의 어려움을 직접 현장을 방문하면서 피부로 느꼈으며 지자체, 언론 등 유관기관에서는 특히 저출산고령화, 인구유출 등의 당면한 지역문제에 대한 정책수립, 분석기사 등을 위한 기초통계 생산주문을 많아 받았습니다. " - 청장으로 활동하며 가장 큰 성과는 무엇입니까. "지역문제에 대한 정책수립 지원을 위해 완주군 아동청소년 사회환경조사 개발을 비롯해 행정자료를 이용한 광산구 여성통계 같은 청년여성에 관한 지역통계 개발을 완료했습니다. 또한 생산된 이후 묻혀 있는 통계들을 한데 모으고 비교분석하여 기획보도로 제공하는데 주력했으며 호남지역 인구사회 변화상을 지역 간 비교분석한 기획보도는 물론 전북지역만을 대상으로 한 1인 가구의 특성변화, 베이비부머 및 에코세대에 대한 심층분석 기획보도를 제공했습니다. 지난 10월 말에는 동천동 소재 나라키움 광주통합청사로 청사를 이전해 지역민의 통계이용 접근성 및 편의성을 한층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마이크로데이터 이용센터, 통계체험 센터 등 지역민을 위한 다양한 공간을 마련해 통계자료를 누구나 쉽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통계는 결국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특히 통계를 통한 사회의 변화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통계는 국가의 발전, 백년대계(百年大計)를 결정하는 소중한 국가자원입니다. 미래가 불확실한 이 시대에 통계에 기반을 둔 정책판단은 국민의 행복과 국가의 미래를 좌우합니다. 지방화분권화 시대를 맞이해 전북지역을 비롯한 각 지자체에서도 통계에 기반한 과학적 지역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기 위해서는 관련 지역통계가 필수불가결합니다. 예를 들어 요즘 저출산고령화 등 인구문제가 화두인데 전라북도의 경우 지난 1993년 출생아수가 2만 6천명에서 지난해는 1만 명으로 26년간 1만 6천명이 감소했고, 65세 이상 고령인구 구성비 또한 같은기간 8.3%에서 19.0%로 2배 이상 증가해 저출산 및 고령화 속도가 상당히 빨리 진척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1인 가구는 지난 2000년 17.3%에서 지난해 31.8%로 증가해 핵가족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출산고령화의 급진전 및 1인 가구 증가에 관한 통계를 통해 출산과 육아는 물론 근로시간 단축, 연금수급시기 지연, 소규모 주택 증가 등 고용과 주택정책에 대한 많은 변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 최근 빅데이터 등 통계의 중요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통계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한 대책은 무엇입니까.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 정확한 현장조사와 조사오류의 체계적 관리입니다. 조사 지침 숙지, 면접 기법 개발 등 조사원의 역량을 강화해 응답자로부터 정확한 답변을 이끌어 내고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 내검 프로세스를 통한 논리적 오류 점검 및 비교검증을 단계별로 실시함으로써 통계의 정확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둘째 최신 스마트 기기를 활용한 조사방법 개발입니다. 최근 실시한 가구주택기초조사에서는 과거 종이조사표의 틀에서 벗어나 공간정보가 장착된 태블릿을 활용한 전자조사를 전국규모 조사 최초로 실시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행정자료를 나아가 빅데이터 같은 민간자료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조사자료와의 비교검증을 통해 정확성을 높이는 데 활용될 뿐 아니라 행정자료나 빅데이터 자료만으로도 통계생산이 가능합니다" - 지역별로 통계에 대한 중요도가 다를 것 같습니다. 호남(전북)의 경우 특성 또는 주요 통계 중 중점적으로 통계조사 실시하는 분야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호남지역은 타 지역에 비해 농어업 분야의 비중이 크게 차지하고 있어 5년 주기 전국조사인 농림어업총조사에서 중심이 됐습니다. 전북지역은 자동차, 새만금산단 등 상대적으로 광제조업이 활발함에도 반기별로 실시되는 지역별 고용조사에 따르면 군산시와 익산시 고용률이 전국 시군구 중 하위권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최근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한국GM 군산공장의 가동 중단 등에 따른 고용률 변동추이도 중점으로 두고 있는 사안입니다. 이 밖에도 호남지역은 인구 고령화 현상이 타 지역에 비해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고령자 현황, 1인 가구의 특성 등에 관한 분석자료를 기획보도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 호남지방통계청이 최근 청사를 이전했습니다. 어떠한 변화가 예상됩니까. "내부적으로 신청사 이전을 계기로 직원들이 그동안 비좁은 청사시설로 인하여 일부 과가 외부에 임차를 얻어 근무하는 어려운 환경에서 벗어나 쾌적하고 편리한 시설에서 조직이 새롭게 결합하고 통합하는 기회도 마련됐으며 외부적으로는 지역민을 위한 다양한 공간 확보로 통계자료 이용과 교육을 위해 찾아오시는 지역민들이 한층 더 편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도 마련 될 것 같습니다. 더불어 광주전남지방벤처기업청과 이웃사촌이 되는 좋은 인연도 맺은 것 같다. 이번 기회에 신청사에 같이 입주한 광주전남중소벤처기업청과 향후 협업으로 광주전남지역의 소상공인, 자영업자 등 중소기업 지원을 위한 다양한 사업도 함께 구상해 볼 생각입니다" -끝으로 전북도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최근 전북지역뿐만 아니라 각 지자체의 공통된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지역 일자리 창출 문제와 저출산고령화 문제일 것입니다. 우리 지역 고용률, 실업률 등 정확한 국가통계생산을 위해서는 현장조사 직원들의 성실함과 헌신적인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이와 함께 조사에 응답해 주시는 분들의 정확한 응답과 협조도 중요합니다. 올바르고 정확한 통계생산이 우리 지역의 각종 정책수립 및 결정에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고 통계청 직원이 가구나 사업체에 방문했을 때 성실한 응답과 함께 따뜻한 미소로 대해 주시길 바랍니다. 호남지방통계청은 항상 새로운 시선으로 지역민의 요구에 귀 기울이고 지자체, 지역연구기관, 대학 등과 소통, 협업을 통해 지역정책수립에 필요한 수요자 중심의 통계생산기관으로 거듭나도록 하겠습니다" ● 이호석 호남지방통계청장 1962년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난 이호석 호남지방통계청장은 항상 주변인들과 함께 끊임없는 소통을 중요시 한다는 평가다. 특히 20여년 동안 통계와 관련된 직무를 통해 지역 통계를 위해 앞장서는 인물로 정평이 나있다. 서울고, 한양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고려대 경제학과 석사과정을 이수한 이 청장은 지난 1991년 7급 공채에 임용됐다. 1997년 통계연수원 교무과를 시작으로 경제통계국 서비스업통계과, 통계기획국 국제통계협력과, 서울지방통계청 경제조사과장, 기획조정관실 전략성과팀장, 감사담당관실, 기획재정담당관실, 혁신행정담당과장, 기획재정담당관을 역임했다.

  • 기획
  • 김선찬
  • 2019.12.08 17:38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옛 교과서가 전하는 풍경

교과서는 그리 만만한 책이 아니다. 아이들의 낙서장이나 아궁이의 불쏘시개, 변소의 휴지가 되기도 하지만, 교과서는 초중고등학교 교육 과정에 맞게 학생에게 가르칠 내용을 실은 책. 우리는 결국 교과서를 펼쳐가며 많은 것을 배웠다. 교과서적이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융통성 없고, 고지식하고, 창의력이 떨어지고, 평면적이고, 소극적이라는 표현으로 쓰이지만, 교과서적인 것이 당시 사회의 가치 기준과 올바른 사실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는 아니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이 나날이 심해지고, 신조어와 줄임말이 난발하고, 언어의 파괴가 한낱 재미로 여겨지는 모국어의 난세에 잊고 살았던 우리 언어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게 하는 것도 교과서다. 교과서의 가치를 알고 그에 얽힌 아련한 추억을 쉬 떨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금껏 교과서를 간직하고 있다. 교과서와 같은 선량한 사람들이다. △역사의 현장에 없던 일제하 교과서 2016년부터 2019년까지 전주시에 기증된 옛 교과서는 22종이다. 시대별로 나누면 1920년대 1종, 1930년대 2종, 1940년대 9종, 1950년대 2종, 196070년대 8종이다. 숫자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이은상(전주) 씨가 기증한 2030년대 교과서인 『초등농업서(권2)』(1924)와 『수신서(권5)』(1933조선총독부), 『이윤세제와 가격원칙』(1939고양서원)과 권태웅 씨(74전주)가 기증한 『새로운 작문』(1972정음사)이 포함돼 그 가치를 크게 높였다. 홍일이(67전주) 씨는 196070년대 초등학교 45학년 자연실과 교과서와 6학년 산수 교과서 7점을, 오미소(전주) 씨는 1940년 보통학교용 교과서 정가표를 기증해 흥미를 더했다. 이들 모두 교과서 변천사와 함께 대한민국 역사의 흐름을 살필 수 있는 뜻깊은 기증품이다. 일제는 한일 강제 병탄 이후 조선교육령을 개정해가면서 천황에게 충성하는 일본 신민(臣民)을 양성하고, 일본인다운 품성을 함양하며, 국어(일본어)를 널리 보급하는 것 등을 공포했다. 정치의식이 성장할 여지가 있는 고등교육과 인문교육의 기회를 빼앗고, 오직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실업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수신서』는 동화정책의 대표적인 예다. 보통학교 수신(修身) 교과서에 금상 천황폐하께서 내지의 인민도, 조선대만의 인민도, 모두 친자식같이 여기시고 똑같이 사랑해 주시는 것, 참말로 감사합니다.라는 내용으로 일본 천황과 일장기에 복종하게 했고, 조선인 의식의 밑뿌리와 실핏줄까지 찢고 물들이려 온갖 책략을 써가며 광분했다. 한 민족의 정신을 살리고 죽이는 것이 오로지 교육에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정기와 한국전쟁기의 한글교과서 옛 교과서에는 철수와 영이와 바둑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1953년 문교부에서 출판된 초등학교 2학년 1학기 사회과목인 『고장 생활』에는 군청색 반바지를 입은 종한이와 복남이가 산다. 책은 두 아이가 오늘부터 우리들은 이 학년이다. 일 학년 동생들이 생겼습니다.라고 노래 부르며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풍경으로 시작된다. 종한이와 복남이는 언덕길에서 힘들어하는 짐수레꾼을 도와주고, 어머니가 빨래하는 냇가에 가고, 시장과 농장과 집 짓는 것을 구경하면서 쌀과 옷과 물의 중요함을 알고, 서로 돕고 사는 세상살이의 즐거움과 일의 보람을 배운다. 교과서의 주인공은 이후 철수와 영이(19541963), 인수와 순이(19631973), 동수와 영이(19731981)로 바뀌며 시대의 언어를 들려준다. 『고장 생활』은 이조(85세전주) 씨가 기증한 미군정기와 한국전쟁기(19451953)의 교과서자습서 10점 중 하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해방을 맞은 기증자는 4학년 1학기 『우리나라의 생활 1』(1948문교부), 임시교재라는 부제가 달린 5학년 1학기 『초등 이과』(1947군정청문교부), 2학기 『셈본』(1947군정청문교부), 56학년용 『초등 지리 교본』(1946), 5학년 자습서인 『새전과자습서』(1947삼중당서점), 전국 중학교 입학시험 기출문제가 수록된 『입학시험문제집』(1948삼중당), 중학교 1학년 사회 교과서인 『중등 공민』(1949동심사)과 지리교과서인 『이웃나라 생활』(1949동지사), 2학년 영어 교과서인 『UNION』(1950일심사)을 기증했다. 1950년대 교과서는 책 제목과 본문에 셈본 등 살려 써야 할 옛말이 가득해 더 정겹다. 일부 책은 기증자가 전주 조촌공립초등학교와 신흥중학교에서 공부했던 것으로, 책의 곳곳에 밑줄과 낙서 등 70여 년 전의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조 씨는 『전주다움』(2018년 9월호)과의 인터뷰에서 선생도 학생도 한글을 모르는 해방 후 깜깜이 학교를 거론했다. 일본 책을 싹 없애버리고 한글로 공부를 하려는데, 어디 한글로 된 교과서가 있어야지요. 물론 한글 활자도 없었고요. 그때가 미군정 시절이었는데, 조선어학회에서 임시방편으로 철필로 한글을 한 자 한 자 써서 최초의 교과서를 만들었습니다. 철필로 원고를 쓴 다음 그것을 등사기로 밀어서 책을 만든 거지요. 그가 기증한 책은 조선어학회에서 직접 손으로 써서 만든 한글 교과서다. 민족의 서글픈 역사를 안고 기억과 기록의 역사에서 살아남은 우리만의 교과서다. △우체부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우체부, 그의 모든 것은 살아 있는 낭만이다. 그의 모자와 옷과 운동화의 빛깔들 그의 전신에서 흘러오는 모든 것은 무한한 그리움이다. 그의 낡은 가죽 가방은 시다. 흘러넘칠 만큼 배부른 사연들을, 때로는 헐렁헐렁하게 흔들리는 몇 통의 이야기를 담은 그의 큼직한 가방에는 어떤 기다림과 동경과 바램(바람)이 흠뻑 배어 있다. ∥최명희의 수필 「우체부」(1965) 중 권태웅 씨가 기증한 『새로운 작문』은 박목월(19151978) 시인과 문학평론가 전규태(전 전주대 교수)가 편집자로 참여한 고등학교 교과서다. 책의 본문에 소설가 최명희(19471998)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쓴 수필 「우체부」가 실려 있다. 작가는 수필을 통해 문명의 소음 속에서 사람들에게 인간의 슬프고 즐거운 호흡을 전하는 우체부를 보면 즐거운 몽상에 빠져들고, 자신도 보랏빛 우체부가 되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을 내비친다. 1965년 9월 28일 연세대학교가 주최한 제4회 전국 남녀고교생 문예콩쿠르에서 장원으로 뽑힌 이 수필은 1968년부터 1978년까지 작문 교과서인 『새로운 작문』과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인문계 고등학교 교과서인 『작문』(전규태정음사)에 실렸다. 그러나 『작문』에는 작가의 이름이 빠지고 학생 작품으로만 표기되었으며, 작품 제목도 「집배원」으로 바꿔 소개됐다. 두 책의 본문에는 우리가 거의 매일 대하는 우체부를 소재로 재치 있게 글을 엮어 나갔다. 짧으면서도 메커니즘에 대한 가벼운 비평이, 깔끔하고 차분한 문장에 담겨 있다고 소개됐다. 전주시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처럼 귀한 기억과 오랜 흔적이 담긴 물품의 기증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기증자가 우체부처럼 반갑고, 그들이 건네는 모든 것에 설렌다. 그리운 이름을 부르는 분홍빛 편지, 검은빛의 부고, 공무원 합격 통지서, 기차표와 버스 회수권, 행사 초대장, 묵직하고 먹먹한 곡절이 담긴 월급봉투,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고 좀이 슨 책, 한 시대가 담긴 흑백사진. 헤아릴 수 없는 손길과 대화로 부서지고 흩어지고 낡은 것들이 가득할 그들의 가방 속이 가장 푸짐한 인간의 호흡이며, 숱한 생명의 축소된 역사임을 알기 때문이다. 내 오랜 기억을 나누는 것은 허허로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채우는 일이다. 나만의 훈훈한 꽃잎으로 세상에 체온을 전하는 것이다. /최기우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 부위원장최명희문학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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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05 16:55

[트램, 과거에서 미래를 보다] (하) 전주시 롤모델 '뉴질랜드 크라이스트 처치 관광트램'

△뉴질랜드 크라이스트 처치 2010년 9월 36만명 남짓한 평온한 시골 도시인 뉴질랜드 남섬 크라이스트처치에 강도 7.0~7.1의 지진이 발생했다. 이지진은 2011년 2월에도 6.3의 여진으로까지 이어졌다. 도시의 주요 건물과 도로는 파손되고 붕괴됐다. 사망자는 160명, 실종자까지 육박하면 200명에 달한다는 말도 나왔다. 지난달 기자가 찾은 크라이스트 처지는 지진의 상흔이 도시곳곳에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트램 관광도시로 거듭나고 있었다. 크라이스트 처치를 대표하는 관광자원인 트램은 1882년 증기기관으로 운행을 시작하고 1954년 운행이 중단됐다가 1995년 관광 목적으로 재운영되기 시작했다. 2011년 대지진 후 중단됐다가 재건, 2015년 재개통 했다. 중단 당시 노선보다 더 늘려 연장 3.9km에 달한다. 17개 정류장을 각기 다른 7대 트램이 경유하며 시내에 주요 관광지를 지나가며 트램과 곤돌라, 카누, 보카닉가든 투어 등과 결합 관광상품으로 운영하고 있다. 1일권은 성인기준 25 뉴질랜드 달러이다. 성인 1명당 어린이는 3명까지 무료다. 매 15분에서 20분 간격으로 운행되고 있었다. 저녁시간대는 트램 차내에서 식사가 가능한 레스토랑 트램이 운행중인데, 1시간 30분동안 17개 정류장을 2차례 돈다. 요금은 109 뉴질랜드 달러로 약간 가격대가 있다. 그러나 크라이스트처치 트램을 타기 위해 방문하는 관광객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 특이한 점은 트램이 바로 카페거리나 시가지 등을 오가면서 노상카페 바로 옆으로 지나가고 일반 보행자들 사이사이로 운행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트램전용도로로 운영되면서 상가에서 물건을 싣고 나르는 차량 외에 일반 승용차는 진입을 막았다. 트램들은 모두 190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의 고풍스러운 트램들이 운영되고 있었다. △관광트램 전주 전주시는 한옥마을에 트램을 도입한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전주시가 롤모델로 삼고 있는 곳이 바로 성공적으로 운영 중인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의 관광트램이다. 한옥마을의 근대식 한옥 거리에 동시대의 명물이었던 트램과 어우러져 근대역사의 풍광을 재현하고 크라이스트처치의 레스토랑 트램을 전주에 맞게 한정식으로 재현하면 훌륭한 관광상품이 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트램이 한옥마을 내에서의 관광용으로 활용됨은 물론 장래에는 한옥마을 외부 구도심 일대 대중교통 연계점까지 확장해 관광지 교통수단으로서의 특화를 도모한다는 계획이다. 일단 전주시는 반경 3.3km 정도로 20~30명을 수용하는 1량의 트램이 오가는 형태를 구상중이다. 사업비는 200억원 정도로 추산되는데, 관건는 민간 사업자를 어떻게 확보하느냐가 될 전망이다. 도시트램을 도입할 예정인 타지역과 달리 관광형 트램의 경우 B/C 면제 대상이 되기 때문에 사업추진도 수월한 상황이다. 한국철도연구원 관계자는 전주의 경우 초기 시작 구간이 작지만 확장 가능성 큰 곳이라며 차량통행은 느는데, 차선은 제한적인 곳에 추가 확대할 부분이 많은 곳이 트램이어서 최적지가 바로 전주라고 설명했다. ◆ 김승수 전주시장 "친환경적 이동수단, 구도심 활성화 위해 트램 필요" 한옥마을 2.0버전을 위해, 시민들의 보다 친환경적인 이동수단을 위해, 구도심 활성화를 위해 트램이 필요합니다 호주와 뉴질랜드 트램 현지 벤치마킹에 나선 김승수 전주시장은 이렇게 말했다. 김 시장은 이동권은 시민들의 기본권이며, 학교와 병원, 직장에 이동할 수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며 그런 이동권을 보장해 주기 위해 가장 친환경적인 수단은 바로 트램이다고 말했다. 이어 김 시장은 이제는 관광객을 유지하고 지속가능한 한옥마을을 위해 2.0버전이 나올 때가 됐고 그 매개체가 관광 트램이라면서 한옥마을 전체를 도시정원으로 만들고 그 내에 트램을 도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트램이 한옥마을 곳곳을 구경하는 큰 콘텐츠가 돼 한옥마을의 큰 매력이 될 것이라며 1차로 한옥마을 내부에 트램을 도입하고 2차로 구도심 전체로 확대해 교통체증을 해소하고 구도심을 활성화 할 예정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끝-

  • 기획
  • 백세종
  • 2019.12.03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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