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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석류꽃

박성숙 첫 수필집 <풀꽃이고 싶다>가 출간되어 책이 도착한 날이었다, 나는 이 책을 안고 맨 먼저 관음선원으로 달려갔다. 첫 번째 서명한 수필집을 부처님께 올리고 기쁨으로 일렁이는 마음을 다독이며 깊은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절에 당도한 때는 소나기가 한 둘금 지나간 뒤여서 무성한 나뭇잎에서는 그때까지 톰방톰방 물방울이 듣고 있었다. 사나운 빗줄기에 후벼 파인 마당 한편에서 꾸부정하게 허리를 굽히고 스님은 무엇인지 열심히 줍고 계셨다. 가까이 가 보니 스님께서는 비에 떨어진 흙 묻은 석류꽃을 줍고 계셨다. 스님의 하는 양을 바라보고 섰던 나도 어느새 슬그머니 따라 앉아 산 모래알이 튀어 배긴 빨간 석류꽃을 주워 모았다. 스님하고 나는 깨알처럼 튀어 박힌 흰 모래알을 말끔히 털어내고 새악시처럼 고운 얼굴을 드러낸 석류꽃을 미륵님 앞의 돌상 위에 놓아 드리고 예배했다. 펄펄 살아 있는 생명을 끊어 헌화한 때보다 지면에 나뒹구는 흙 묻은 꽃을 주워 헌화한 일을 더욱 여법(如法)하게 여기시는 듯, 미륵님은 투박한 얼굴에 자애 넘치는 미소를 날리며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그 정겨운 미소는 길고 긴 방황에 종지부를 찍고 대문 안에 들어선, 돌아온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웃음 같은 편하고 푸근한 안도의 미소였다. 스님께서는 큰 비가 내린 뒤의 축축한 누기는 건강에 해롭다시며 차를 권하시었다. 분청사기의 작은 찻잔에 따끈한 작설차를 따라 주시며 귀하고 예쁜 막내 따님을 보시어 기쁨이 크겠습니다. 하시며 자그맣고 예쁘게 장정된 수필집의 출간을 축하해 주셨다. 그렇지, 3형제 내 아들이 배가 아파 출산한 육신의 아들이라면, 내 수필집 「풀꽃이고 싶다」는 영혼이 진통하여 가슴으로 출산한 정한의 딸이겠지, 스님께서는 작가들도 생각하기 힘든 표현을 너무나도 쉽게 말씀하셨다. 법당을 내려서서 돌아올 무렵에는 축축하던 누기도 어지간히 가시고 뜨락이 뽀얗게 말라 가고 있었다. 그리고 반질대는 이파리 사이에 종처럼 매달린 빨간 석류꽃에는 서편으로 기우는 저녁 햇살이 찰찰 넘치도록 고여 있었다. 뜨락은 고요하고 백화는 만발한데 석류 앞에 멈춰선 내 발길은 차마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려야만 했다. 아무도 보아 주지 않는 후미진 곳에 피어 있는 꽃. 나마저 보아 주지 않는다면 석류꽃은 조르르 눈물을 흘리며 더운 한숨을 토해낼 듯, 그렇게 애잔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장미처럼 화려하지도, 봉숭아처럼 애처롭지도 않으면서 그저 여염의 여인처럼 수더분한 꽃. 초롱한 깎지 속에 숨어서 빨갛게 빨갛게 달아오른 꽃. 장미가 부조하는 현대인의 사랑을 대변하는 꽃이라면, 석류는 여인의 조여 맨 가슴속 깊이 숙성된 생명의 엑기스와 같은 꽃이 아닐는지. 뜨거운 열정을 알알이 뭉치고 수줍은 숨결로 곱게 물들인 후. 견딜 수 없이 꽉 찬 순간 툭 하고 터져서 가슴을 열어 보이는 꽃. 석류꽃은 어쩌면 늦깎이로 등단하여 알알이 뭉치었던 평생의 정한을 이제서야 한 권의 수필집으로 툭 터져 내보인 내 가슴속 같은 그런 꽃이 아닐는지. △ 박성숙은 한국문인협회 전북지부에서 시 부문으로 문예사조에서 수필부문으로 등단했다. 시집 규화목 사랑, 붉은 꽃 지고 수필집 풀꽃이고 싶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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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11 16:53

[금요수필] 나의 단골 이발소

박광안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꼭 찾는 이발소가 있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이발소가 있었는데 요즈음은 미용실이 대행을 하고 이발소가 쇠퇴하는 새 풍속도 속에서도 아직까지 꿋꿋이 찾는 이발소다. 어서 오세요. 코로나로 다들 살기가 어렵다고 표정이 어두운데 그래도 사장님은 신수가 훤하십니다.이렇게 찾을 때 마다 반갑게 맞아준다. 의자에 앉으니 창문 너머에는 면도거품 같은 구름 지나가고 이발사는 하얗게 아침을 부풀린다. 어긋난 문틈에서 비어져 나온 삼색 싸인볼은 늘 시간을 제자리로 회전시킨다. 이십 년 단골의자에 몸을 기대면 초침처럼 가위를 째깍거리며 요즈음 어떻게 지내세요?라며 의례적인 인사말을 건넨다. 예 코로나19라는 불청객이 찾아와 방콕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라며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지만 언젠가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방콕이라는 여행지라 불렀다. 그래요. 모두가 마찬 가지일 거예요?하면서 손은 여전히 비발을 한다. 20년이 넘도록 단골손님이 되어버린 이발와 나는 나이도 동년배로 농담도 허물없이 주고받으며 지내는 사이다. 그리고 더욱 정감이 가는 것은 서로가 장남이라는 가정에서의 역할에 공통점이 많아 통하는 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단골이 되다보니 어디를 어떻게 잘라달라는 말 한마디 없이 의자에 앉아 머리를 내맡긴다. 그래도 이발사의 날선 가위가 몇 번 춤을 추고나면 헝클어진 머리가 잘 정돈이 된다. 오늘은 아침 일찍 서두른 탓에 바로 이발을 할 수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두어 시간을 기다릴 때도 있다. 기다리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생활의 정보도 얻을 수 있는 사랑방 역할도 한다. 이발사는 열일곱 살부터 이발을 시작하여 오십 여년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가위질을 얼마나 많이 하였던지 몇 년 전부터 팔이 아파 일주일에 한번만 쉬어야 하는데 두 번을 쉬면서 물리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외길 육십년이 가까우니 이발 회갑년 까지만 하고 끝내야겠군요.라고 하니 놀면 뭐합니까? 할 수 있는데 까지 해야지라며 손사래를 치더니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한 숨을 쉰다. 그래도 젊었을 때 전성기에는 직원을 세 사람이나 두었어도 날마다 바빠서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어서 천국에 가겠습니다.라며 찬사를 보내자 너털웃음을 지으며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이발을 하고 거울 앞에 설 때마다 짧은 시간에 나를 새로운 얼굴로 변신을 시켜주어서 십년은 젊어진 것 같았다. 술 담배도 하지 않고 오직 성실하게 살아오면서 부모님을 평생 한집에서 모시다가 작년에 어머님이 돌아가셨다고 하니 지금세상 보기 드문 효자, 열녀다. 그리고 그 고된 삶 속에서도 시간을 쪼개서 여러 사회단체에 봉사도 많이 하는 것을 보면서 그에게 머리를 숙인다. 요즈음은 많은 사람들이 이발을 하려면 미용실을 찾는데 나는 아직도 미용실이 왠지 불편하다. 미용실에 가면 남성들만의 특권인 면도도 할 수 없는데 이발소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라져가는 것들이 어디 이 뿐일까 만은 허름한 이발소가 품고 있는 진한 추억의 향기도 사라져 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시대변천에 따라 전통으로 내려오는 것이 사라지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일까? ◇ 박광안 수필가는 교직에서 정년퇴임했으며 <인간과문학>에서 신인상을 받아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다. 덕진문학 사무국장을 역임했으며 수필집 <연못가 새 노래>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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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04 17:33

[금요수필] 그래도 아직 잘 모르겠다

김덕남 생긴 대로 논다라는 말이 있다. 대체로 무언가에 순응적인 그런 뜻만 있는 것은 아니며 부정적인 상황에서 쓰이는 말투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아는 만큼 행한다는 뜻과도 상통하지 않겠냐는 해석을 해본다. 예술분야의 창작 활동은 타고난 소질과 재능의 바탕위에 숙련의 고통과 열정이 더해야 빛을 발할 수 있다. 문학도 예외일 수는 없다. 글을 쓰는 목적은 감동과 설득을 통해서 독자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이러한 힘은 바로 잘 갖춘 생김인데 그것을 위한 자양분이 될 수 있는 조건들이 있다. 그런데 나는 좋은 글을 쓰기에 적합하게 갖춰진 생김도 힘도 조건도 일천하다. 남들처럼 고전을 많이 읽기를 했나, 음악에 심취해 보기를 했나, 그림에 미쳐보기를 했나, 멋지고 우아한 춤에 빠져보기를 했나. 이런저런 핑계로 어느 것 한 가지에도 마음을 쏟지 못하고 욕심만 앞세운 시늉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황혼에 들어서 요즈음 쓰고 있는 글들도 다정다감한 끌림이나, 감미롭고 부드러운 미사여구의 문장은 꾸미지 못하고 무미건조하기만 하다. 이것이 본디 내 감성의 생김이라는 방증으로 생긴 대로 놀고 있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어려서 부터 애완동물을 길러 보고 싶은 애착이나 예쁜 꽃을 피우는 식물을 가꿔 보고 싶은 의욕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엄밀하게 말하면 예쁜 강아지나 꽃들을 외면할 만큼 냉혈한은 아니었지만 그런 전원적인 환경에서 자라지 못한 탓도 크다. 어찌했건 이렇게 척박한 가슴과 머리로 글 농사를 지어보겠다고 무모하게 덤볐다. 그러고는 기름진 남의 밭 수확만 부러워했다. 그러면서 가끔은 비록 취미삼아 쓰는 글이지만 꼭 이래야 하나?며 가슴이 아파 그만 내려놓고도 싶었다. 언젠가 귀한 분으로부터 목성균 선생님의 책 누비치네를 선물 받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글의 힘과 생김, 그 분만의 색깔을 참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모든 글은 나의 수필 쓰기의 지침서였다. 나도 그의 글처럼 가슴을 울리는 좋은 글을 닮게 써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읽고 또 읽었다. 그런데 내 글이 에세이스트 최근호 <문제 작가 특집>에 실렸다. 문제 작가! 무엇이 문제라는 말인가? 설마 군대에서 말하는 관심 병사는 아닐 테고, 적어도 문학계에서의 문제라면 문학의 감각, 반향, 선풍 등을 뜻하는 센세이션을 일으킬만한 관심거리라는 좋은 쪽의 의미일 것이다. 내가 이런 문제 작가의 단 위에 섰다니 실로 나에게 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특집의 특은 일반적인 것을 뛰어넘어 유별나게 돋보인다는 개념이다. 문제적 작가로 관심 대상이 되고 있으니 남다르게 특별히 새롭고 좋은 글을 써보라는 주문일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변명으로 늘어놓은 배경처럼, 내 힘이나 내 생김이 하루아침에 달라질지가 큰 고민이다. 여태 엉터리일 수도 있는 글을 써 놓고도 내 그릇이고 내 색깔이라며 뻔뻔했다. 5년 전, 에세이스트 신인상 무대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이제 특집작가의 반열에 세워졌으니 석사 학위 자격의 모자를 쓴 셈이어서 어깨도 무겁고 걱정도 크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참 기쁘고 특히 나의 멘토인 남편 앞에서 더 자랑스럽다. 그리고 이제 내친김에 박사 학위까지도 넘보라며 부추길 것이 분명하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쓰는 노력만이 그 해결의 답일 것이다. 앞으로 그야말로 문제작을 양산하는 문제작가가 되고 싶다. △김덕남 수필가는 초등 교장으로 정년하고 에세이스트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향촌문학 대상을 수상했다. 수필집 <아직은 참 좋을 때> <추억의 사립문>이 있으며 삽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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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28 17:17

[금요수필] 가고픈 농촌, 추억의 임실

최기춘 임실(任實)이란 명칭은알차고 충실한 열매를 맺는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어떤 국문학자는 임실을 순수한 우리말로 임들의 고장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내 고향 임실은 예로부터 맛과 멋 그리고 풍류가 어우러진 고장이다. 한편 전북지역에서 애국지사가 가장 많은 충효의 고장으로도 널리 알려지고, 박사들이 많이 배출 되었다하여 박사골로 불린다. 이러한 임실에 1964년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위해 부임한 벨기에 지정환 신부가 가난한 임실의 농부들을 돕기 위해 산양 두 마리를 보급한 것이 국내 치즈 역사의 첫 발자국이 되어 우리나라 최초로 치즈 제조가 시작된 곳이다. 하지만 요즈음 농촌은 산업화의 물결 따라 도회지로 몰려가 예전 같지가 않다. 아기들의 울음소리, 젊은 아낙들의 웃음소리가 멈춘 지 오래며 먹고 살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싱그럽고 풋풋했던 자연환경도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다. 동네 고샅도 시멘트로 덮여있고 도랑마다 쓰다 버린 농약병이나 폐비닐로 많이 오염되었다. 마을 앞을 흐르는 개천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가재나 미꾸라지, 송사리 같은 작은 물고기들을 구경하기란 옛날이야기다. 이러한 시점에서 임실군 심민 군수는 앞으로 행정과 주민 협의체를 중심으로 깨끗하고 살기 좋은 농촌 환경 가꾸기를 통해 농업인의 삶의 질 향상 및 <오고 싶고 찾고 싶은 농촌 마을>을 만들겠다고 밝히고 유관기관과 이장협의회, 부녀회를 비롯한 모든 주민들이 협의체를 구성하고 연차적 활동계획을 세워 지속적으로 야심차게 추진한다고 한다. 우선 폐비닐, 폐농약병 수거와 하천과 마을 안길 정비 등 손쉬운 일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해부터는 꽃 심기, 태양광 조명 설치 등 경관 조성사업을 추진한 결과 운암 상운 마을과 임실 정월 마을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마을의 환경이 깨끗하고 길가 언덕과 가로수 밑에 심은 꽃 잔디가 화사하게 피어 장관을 이루는 등 가고픈 농촌 만들기 사업이 해를 거듭할수록 튼실한 꽃을 피우고 있다. 요즈음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다 보니 사람들이 많이 답답해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국민들은 이 사태가 지나고 나면 제일 하고 싶은 일이 우리 국토사랑 여행을 하고 싶다는 설문조사가 있다. 코로나를 계기로 여행 패턴도 많이 변하고 있다. 떠들썩한 유명 관광지를 찾는 것보다 한적한 농촌, 잘 가꾸어진 둘레 길을 걷고 농촌의 맛 집을 찾아 고유의 음식을 먹으며 여유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많아 졌다. 임실군은 때맞추어 <가고픈 농촌 만들기 사업>을 조성하여 고샅마다 들길 마다 낯익은 꽃들이 반겨주고 냇가에는 피라미 송사리 다슬기들이 어서 꾀 벗고 들어와 추억 속을 첨벙대보라고 손짓을 하니 얼마나 선경지명이 있는 사업인가? 나는 지난 일요일 아내와 함께 운암 상운 마을에 갔다. 동네 주변 길가와 가로수 밑 언덕에 심은 꽃 잔디가 활짝 피어 온 동네가 꽃으로 가득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성미 급한 도시민들이 많이 찾아와 조용하던 농촌이 활기를 되찾은 느낌이었다. 낯익은 둘레 길은 안전하고 걷기 편하게 잘 만들어져 노소가 마음 놓고 다닐 수 있었다. 발길닿는 곳마다 눈길이 머문 곳마다 전통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었다. 자연의 싱그러움과 꽃향기에 취하여 아름다운 추억을 한 아름 담으며 아, 내 고향 임실이 오늘 따라 더욱 좋다. △최기춘 수필가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수필집 〈머슴들에게 영혼을〉이 있다. 대한문학작가회, 영호남수필 회원이다. 전북수필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임실문학회 회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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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21 18:48

[금요수필] 이팝꽃 가로수 길

박동수 이팝꽃은 작다. 단순하다. 작고 단순하지만 뭉치면 흰 눈송이를 이룬다. 봄에 하얀 눈송이를 이고 있는 이팝나무는 이색적이다. 그런 이팝나무 가로수 아래를 걸으면 마음이 정갈해진다. 눈송이 같은 하얀 이팝꽃 색깔 때문이다. 봄이면 이팝꽃으로 유명한 곳이 많다. 전주 팔복동 공단에는 이팝꽃으로 우거진 터널이 있다. 그 터널 속으로 철길이 놓여 있고, 하루에 한 번씩 빨간색 화물 기차가 다닌다. 공장 간 화물을 실어 나른다. 그 터널에 가면 하얀 이팝꽃들이 바람에 손을 흔든다. 빨간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보라고 한다. 이때쯤 나는 지리산 아래 카페 이팝에 가고 싶다. 7년 전 산청 한방약초축제에 갔다가 들른 곳이다. 전날 밤늦게 도착해 산 아래 펜션에서 아침 늦게까지 자고 카페에 가서 넓은 창으로 청명한 가을 풍광 속에서 그림같이 다가서는 지리산 천왕봉을 올려다보면서 갓 구운 토스트와 커피로 가을 아침 지리산 아래의 한기를 밀어냈다. 이팝나무 줄기와 가지를 단순화시킨 그림 옆에 작은 글씨로 카페 이팝라 적힌 간판이 벽에 붙어 있는 크지 않은 카페는 참 정겨웠다. 게 다리 모양의 천장 등에 포도가 그려진 도자기 천장 등갓, 창가의 크고 작은 화분들, 긴 탁자와 깔끔한 의자, 벽에 걸린 오래된 벽시계, 장식장 속 장식용 술병, 그림이 그려져 있는 접시 몇 개, 그리고 꽃병에 꽂힌 노란빛과 붉은색이 잘 섞인 장미 다발. 나는 넓은 창가에 앉아서 꽃 그림이 그려진 커피잔으로 커피를 마시면서 베란다 넘어 도로 양쪽에 줄지어 서 있는 이팝나무를 바라봤다. 그때는 가을이 무르익는 10월, 물론 이팝꽃은 없었다. 그러나 내년 봄에는 눈꽃처럼 하얗게 핀 이팝꽃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내년 봄에 꼭 와봐야겠다. 그 가을 동의보감촌에서 열리는 한방약초축제에서 허준 길도 걷고, 약초 족욕도 하고, 한방약재관도 관람하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한방약초축제보다는 지금도 나는 카페 이팝만 생각이 난다. 지금쯤 카페 옆 도로 이팝나무 가로수들은 하얀 이팝꽃을 실 지게 피워내고 있을 것이다. 벌써 그곳에 간 지가 7년이 지났다. 그런데 지금까지 다시 한 번 가지 못했다. 가을 아침 카페에서 갓 구운 토스트와 커피로 지리산 아래 한기를 같이 밀어냈던 친구와 함께 다시 한 번 그곳에 가고 싶다. 우리는 7년 전에 다음 해 봄에 같이 오자고 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서울 살고 나는 시골 살기 때문에 서로 만나지도 못하고 지리산 아래까지는 멀기도 해서 지금까지 다시 가지 못했다. 지금 지리산 천왕봉 아래 카페 이팝에 가면 넓은 창가에 앉아서 하얗게 눈이 쌓인 가로수 이팝꽃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저녁나절에는 베란다에 앉아서 지리산을 타고 내려오는 저녁노을과 가로등 불빛 속에서 흰 눈꽃처럼 빛나는 이팝꽃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하얀 꽃을 이고 있는 이팝나무 가로수 아래를 천천히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봄 이팝꽃이 지기 전에 그 친구에게 오랜만에 연락 한번 해야겠다. 이팝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란다. 올해는 정말 오랜만에 우리 시간을 내서 지리산 아래 이팝꽃 가로수 길을 함께 걸어보자. △박동수 수필가는 한국문협 월간문학으로 등단(82),현재 한국문협 이사로 활동하고 있으며,수필집 수염을 깎지 않아서 좋은날 등 6권, 전라북도문화상(학술)과 전북문학상등 문학관련상 다수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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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14 17:20

[금요수필] 행복을 찾아서

박경숙 친구가 곧 산골로 이사를 한다. 그곳에 학교를 짓고 싶어서란다. 20여 년의 의사 생활을 그만두고 가족 모두 떠난다. 그녀를 만나 왜 그런 선택을 했냐고 물었다. 그녀는 더 행복하고 더 재미있게 살기 위해서라고 했다. 은행 융자는 많이 걱정 되지만 더 늦기 전에 소외 된 이들과 더불어 나누고 공감하며 살기 위해 용기를 냈다고 했다. 학창 시절 괴짜라는 소리를 듣던 친구다. 가진 게 별로 없는 고학생이면서도 오페라를 즐겨 찾았다. 낮에는 아르바이트하고 밤에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한 뒤 야학을 같이했던 선배와 결혼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는 가약佳約이었지만 부부는 여전히 깨가 쏟아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인간은 행복해지려고 산다.는 어느 문화심리학자의 글이 떠올랐다. 그의 말에 의하면 행복은 하루 중에서 기분 좋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나는 많이 웃고 재미나게 사는 삶이 행복이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은 거창한 것도 대단한 것도 아닌 이른 아침 구수한 된장국이나 오후의 산책처럼 소박해야 한단다. 침대에 하얀 시트 깔고, 호텔식 샹들리에로 조명을 바꿨을 때 느끼는 행복. 그 행복을 얻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한 뒤 월급봉투를 포기하고 아내로부터 하얀 침대 시트를 얻어냈다고 한다. 비우면 맑아지는 걸까. 주변을 돌아보면 행복한 사람들은 소소한 일상에서 확실한 행복을 찾는다. 항상 스스로에게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할 수 있을까를 묻는다. 그 물음을 통해 구체적인 답을 얻고 실천한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벌까. 어떡하면 유명세를 탈까에 집착하지 않는다. 행복을 얻기 위해 기존의 것을 버리고 용기 있게 선택한다. 며칠 전, TV 인간극장 프로그램에 대기업에 다니다가 명퇴한 50대 남자가 나왔다. 그는 지금까지 좀 더 높은 보수와 더 많은 여가가 주어지는 직장으로 끊임없이 옮겨 다녔다고 했다. 그런 어느 날 퇴근길 쇼윈도에 비친 자기 얼굴이 낯설게 느껴지더란다. 영화 관람과 소설책을 좋아했던 그 소년은 어디로 갔을까? 어렵게 취직한 직장에서 청춘을 바쳐 치열하게 살았지만, 어느새 중년이 되고 말았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도대체 행복한 인생은 언제 시작 되느냐며 성공해야 행복한 게 아니라 행복해야 성공한 것이라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 책상에는 어느 해 가을, 우리 가족이 고창 선운사로 소풍간 사진이 놓여 있다. 사진 속의 나는 파란 줄무늬 원피스에 흰 모자를 쓰고 두 아이를 꼭 껴안고 있다. 초등학생 딸아이는 내 손에 턱을 괴고 유치원생 아들은 사진 찍는 아빠를 향해 찡끗 윙크를 날린다. 나는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도시락을 싸고 새우튀김을 만드느라 밤을 꼬박 새워도 행복했다. 꽃무릇 양탄자가 깔린 숲에서 김밥을 먹다가 사진기를 잃어버려 일회용 카메라로 찍으면서도 좋았다. 나는 그때 별것도 아닌 일에 참 많이 웃고 즐거워했지만 그것이 행복인 줄 몰랐다. 새봄을 맞아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 더 재미있는 삶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수첩에 적어보려 펜을 든다. 많을 것 같았는데 막상 펜을 드니 적을 게 없다. 달빛이 창에 비쳐 방 안이 환하다. 머리맡 창문을 활짝 여니 미풍이 건들거린다. △ 박경숙 수필가는 <계간수필>에서 등단하였다. 전북문인협회와 행촌수필, 영호남수필, 계간수필문우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전북수필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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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4.23 15:45

[금요수필] 꽃물

최정순 4월 어느 날, 그날 아침엔 까치도 울지 않았는데 아무런 기별도 없이 불쑥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꽃물이었다. 7형제의 무녀리인 나는 초등학교시절에 툭하면 두드러기가 솟고 추악(학질)을 앓아 키니네를 입에 달고 살았다. 핼쑥한 얼굴에는 마른버짐이 퍼져 까칠했고, 목은 가느다랗고 종아리는 새 다리였다. 거기다 먹성조차 까다로워서 밥상에 앉으면 콩을 가려냈으니 그 꼴이 어떠했을까. 그저 눈만 커서 눈보라 부르게 된 것이 무리는 아니었다. 여자는 모름지기 둥근달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서 때로는 초사흘 달처럼 야릿하게 핏기 없는 핼쑥한 얼굴이 더 예쁠 때도 있다. 어느덧 허약했던 내가 여중생이 되었다. 교복은 아예 3년 동안 입을 요량으로 크게 맞춰서 버마재비 폼에 운동화는 늘 논흙이 묻어 있었다. 어설픈 시골뜨기 여학생이었지만 새끼줄에 매달린 오뉴월 오이처럼 하루가 모르게 달라졌다. 젖가슴은 몽실한 망울이 생기고, 볼기와 새다리도 살이 토실 올랐다. 갸름한 얼굴에, 귀 밑에는 명주털이 보송보송 돋고, 속눈썹은 꽃술처럼 피어났으며, 복숭아 빛 볼에 발그레한 입술사이로 드러난 이가 유난히도 반들거렸다. 하얀 깃을 단 까만 교복차림이 물 찬 제비처럼 S라인을 만들어 갔다. 더욱 두드러진 것은, 생각과 행동이 몸을 따라 나선 것이다. 창피하고 부끄러운 것, 아름답고 멋스런 것을 알고, 때로는 내숭도 떨었다. 그리고 이성에도 조금씩 눈을 떴다. 성적이 떨어지면 창피해서 더 열심히 공부했고, 부끄럼을 타서 혀를 날름거리는 버릇도 생겼었다. 요 밑에 깔아 주름을 잡은 바지를 입고 애교머리로 멋을 부렸으며, 손수건, 손거울, 빗은 가방 속에 항상 챙겨가지고 다녔다. 옆집에 멋진 남학생이 하숙을 하고 있었다. 우물가에서 양말이나 손수건을 빨고 있으면, 그 집 대청마루에서 영어책 읽는 소리가 춘향골 이 도령의 사서삼경 읽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래서 내 딴엔 영어단어도 열심히 외웠고, 오락시간엔 영어노래로 인기 좋던 여고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내 나이 열다섯 살 때였다. 어느 날 꽃물이 툭! 터지던 순간, 심장이 뛰고, 땅이 진동하고, 태양이 곤두박질쳐 눈앞이 캄캄했다. 반세기가 흘렀는데도 잊혀 지지 않는다. 느닷없이 불쑥 찾아온 손님 때문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행여 누가 알까 싶어 골방구석으로 도망가 두려움에 떨었다. 내 옆엔 할머니도 계시지 않았다. 내 문제는 나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경험했었다. 그해 4월의 봄은 나에게 가혹하리만치 잔인했다. 내 살갗을 찢고 화산처럼 치솟은 꽃물, 꽃물이 찾아왔을 때 비로소 나는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마땅히 축복받아야 할 일이었을 텐데 왜 그리도 부끄럽고, 창피하고 두려웠던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제 꽃물은 내 곁을 떠났다. 꽃물, 너를 보내고 나는 내 정신이 아니었다. 순장(殉葬)이라도 하고 싶었다. 우리는 28일을 주기로 40년이란 세월을 같이 보냈다. 그런 너를 내가 어찌 잊으랴! 견디다 못한 나머지 에스트로겐이란 친구와 사귀어 봤지만 첫정인 너만 했을라고. 너도 나를 못 잊어 초사흘 달이 되어, 보름달이 되어, 싸늘한 새벽달이 되어, 어느 땐 구름에 가려진 낮달이 되어, 너의 넋은 내 곁을 지금도 맴돌고 있지 않느냐. 우린 비록 떨어져 있지만 내 목숨 다하는 그날까지 너는 내 마음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으리라. △최정순 수필가는 종합문예지 《대한문학》 수필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수필집 <속빈 여자>를 출간했고, 제7회 행촌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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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4.16 18:20

세계가 한국을 배운다 - 이종희

이종희 수필가 지금 세계는 전쟁보다 더 무서운 코로나19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다. 이런 와중에서 독일은 한국에게 코로나19 대응 및 협력방안을 협의하고 싶다며 방문을 요청을 했다. 그러나 국내 상황이 엄중하니 화상회의로 대체하자고 제안했다. 독일은 한국의 광부와 간호사 등 인력수출을 받아들이며 우리 경제성장을 견인한 선진국이다. 이런 나라가 수혜국인 한국에게 코로나19의 대비에 한 수 배우겠다니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었다. 요즘 우리 대통령은 G20 정상회의를 비롯한 세계정상들과 국가 간 코로나19 대응방안에 대한 공동선(共同善)을 모색하는 외교활동으로 매우 바쁘다. 국가 봉쇄를 선언했던 모로코가 우리 교민을 싣고 와서 의료품을 싣고 간일이나, 꽉 막혔던 베트남 총리와 협의를 통해 우리 기업들의 난제를 해결해 주기로 약속받았다. 이 모두가 코로나 19에 대한 선제적 대응으로 확진자를 최대한 줄인 우리의 성공적 사례를 높이 평가하여 국가의 위상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코로나 발생의 초기부터 우리정부는 유증상자들에게 진단키트 검사를 통해 양성 판정을 받으면 중환자는 음압병실에 입원시키고, 음성 판정자들은 정부에서 마련한 집단시설에 격리시켜 2주 이상 상태를 관찰하며 2회 이상 검사결과 이상이 없으면 격리를 풀었다. 이처럼 철저한 격리만이 감염 전파를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더불어 감염환자의 진원지와 감염자가 이동한 경로를 추적하여 추가 감염 확산 방지에 힘을 기울였다. 경로를 추적하던 중 최대 확진 자가 발생한 대구신천지교회를 찾아낸 이후 4월 3일부터 현재까지 감염의 80%를 차지한 대구, 경북을 긴급재난지역으로 선포하였고, 국회에서 추가경정예산이 통과되어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이제야 끝이 보이는 듯하다. 특이적 양방향 신장 유전자 증폭기술(SBDE-PCR)을 이용한 DNA 분자진단키트로 희박한 양의 바이러스로도 코로나19 확진이 가능했다. 이러한 정밀 의료기술은 해외에서 수입 주문이 폭증하고 있을 정도다. 또, 세계가 인정하는 우리 IT기술이 휴대폰에 앱을 깔아주어 발열증세 등 자가진단 프로그램으로 방역당국이 인지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이 성공적으로 도입되었다. 자동차를 이용한 드라이브스루 역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등 한국인의 우수성이 빛나고 있어 침체된 요즈음 삶에서도 가슴이 뿌듯하다. 정부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초기대응이 잘못되었다며 비아냥거리던 무리들의 주장이 무색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맡겼으면 코로나19 사태가 이미 종료되었을까? 국내 상황이 어려우면 함께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국민의 도리일 텐데 사사건건 트집만 잡는 행태는 언제까지 계속 될까?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나 일본 아베 수상도 초기 한국의 방역대응을 비웃었다. 그런 그들의 지금 상황은 어떤가. 언론에서 과학자들이 한국의 대응을 옳았다고 해도 오만과 자존심에서 갇혀 선뜻 따르지 않던 그들은 지금 국민들에게 뭇매를 맞으며 한국을 배우라고 하고 있다. 개인이 아닌 국가나 사회, 또는 온 인류를 위한 마음이 공동선이다. 정부에서 접촉차단이 최선의 방역이라는 의지로 학교, 종교시설, 사회복지시설에 사회적 거리두기 실천을 마지막으로 호소하고 있다. 내 삶이 답답해도 참고 따라 주다보면 멈출 날이 앞당겨질 것이다. 소극적 대응으로 확산세가 급증하는 나라들을 거울삼아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의 힘을 보여줄 때다. /이종희 수필가 △이종희 수필가는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하고 대한문학에서 수필로 등단을 했으며 은빛수필문학회장을 역임했다. 수필집 <여행 & 힐링>외 2권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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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4.09 15:17

쪽진 머리 -김종윤

김종윤 친구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고향의 부모님 집에서 잤다. 요즘은 수도권에서 행사를 치르려면 관광버스를 대절하고 음식을 마련하여 축하객들을 모시는 것이 보통이다. 서울까지 가려면 일찍 출발을 한다. 아래쪽에서 빨간색 버스가 양쪽 방향지시등을 깜박거리며 올라오는 것을 보니 대절차가 틀림없었다. 차에 오르니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차에 올라서 인사를 하고 중간의 창 쪽에 자리 잡았다. 차가 출발하자 아주머니 한 분이 떡과 닭튀김, 귤, 땅콩 등이 들어 있는 비닐봉지를 하나씩 주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버스가 쉬고 몇 사람이 타는데 뒤에서 저 사람이 누구야? 하고 깜짝 놀라는 것이다. 모자를 쓰고 옅은 색안경에 하얀 수염이 수북하니 못 알아보았다. 한 마을에 살다 소재지로 이사간 사람이었다. 그는 젊어서 기타도 잘치고, 노래도 잘 불러 멋쟁이였는데 그 모습이 달라진 것이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는 수염과 머리가 큰 영향을 준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의 머리모습이 변하면 마음도 변화가 있는지 의심해 보는 게 보통이다. 우리 어머니의 머리는 지금도 쪽진 머리다. 새마을운동을 하던 무렵에 파마머리를 권유해도 시집 올 때부터 그대로 쪽진 머리를 고수하고 있다. 주변에서 뽀글이 파마를 권장해도 오로지 쪽진 머리를 고수하는 것이다. 쪽진 머리는 깔끔하게 빗고 한복을 입어야 하는 제격이다. 바쁜 아침이나 머리를 감지 못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유용한 경우도 있다. 가운데로 가르마를 타게 되면 깔끔하고 우아한 여성미를 느낄 수가 있다. 동생들이 어머니께 파마머리를 권해 보지만 한사코 거절하셨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미혼여성은 미혼남자와 마찬가지로 묶은 머리나 땋은 머리를 하고, 기혼일 때는 쪽진 머리나 얹은머리를 주로 하였다. 이 머리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볼 수 있는 머리모양으로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를 지나 요즈음까지 우리나라 기혼녀의 기본형이다. 쪽진 머리로 남과 다른 머리 모습을 하신 우리 어머니에겐 일화가 있다. 명절이 돌아올 때 살구나무 밑 확독 옆에서 전을 부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전형적인 한국여인의 모습이라며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진사는 가면서 5천원 권 지폐 한 장을 주고 갔다. 그 뒤 그 사진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또 이끼 낀 돌담 옆 지붕위로 저녁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데 가을걷이를 하는 여인의 모습으로 JTV전주방송에 나온 적도 있었다. 또 아버지 팔순잔치 때의 일이다. 저녁식사나 하자며 남매들과 조카들을 전주로 초대했는데 모인 김에 가족사진이나 찍자고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그 뒤에 시진관 쇼윈도에 전시가 되어 4거리에서 신호대기 중일 때 쪽진 머리의 어머니를 볼 수가 있다. 열아홉 살에 부안 김씨 외아들인 아버지께 시집을 와 파마머리 한 번 못하고 쪽진 머리 아줌마 남동댁으로 팔순을 바라보며 살고 계신다. 방아실 거리 논에 무농약으로 쌀농사를 지어 보내 주시고 철마다 무와 배추, 고추, 쑥갓, 고수 등을 봉지, 봉지 싸서 마음을 담아 택배로 보내주신다. 어머니는 새댁 때부터 새벽마다 정갈하게 빗은 쪽진 머리에 은비녀를 꽂고 물을 길어다 부뚜막에 정화수를 떠 놓고 가족들의 무병장수를 비셨다. 젊어서는 군대 간 아들이 무고하도록 빌고 늙어서는 군대 간 손자의 무탈을 비셨다. 오늘 따라 쪽진 머리의 우리 어머니가 무척이나 존경스럽다. 평생 근면과 성실로 사신 어머니 덕에 오늘의 내가 있다. 쪽진 머리에 은비녀를 꽂은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늘도 나는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 김종윤은 장수군 출생, 산림조합에서 정년을 하였다. 대한문학에서 수필로 등단하여 수필집 <시나브브로 가는길>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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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4.02 15:18

[금요수필] 삼라만상을 두루적시는 남고 모종

김정길 <남고모종>은 천년 고찰 남고사의 범종소리가 조선시대에 전주부성의 저녁노을을 갈라 울리며 삼라만상을 두루 적셨던 전주 10경의 하나였다. 기린봉 위로 휘영청 솟아오른 달, 전주천과 어우러진 한벽당의 정취, 저녁연기 피어오를 무렵 남고사에서 울려 퍼지는 철고소리는 옛 전주부성의 맥박처럼 느껴지는 풍취였다. 조선 선비들은 서녘하늘에 붉게 물든 낙조를 바라보며 남고사의 저녁종소리를 듣는 아름다운 승경을 즐겼다고 한다. 여기에 남고산의 어머니 산으로 일컫는 고덕산에 머물던 구름이 돌아온다ㄹ하여 고달귀운(高達貴雲)으로 묘사를 했다. 남고사는 창건 당시 고구려 연개소문이 도교를 도입한데 반발하여 명덕화상이 전주에 남고사를 세웠다 하여 남고연국사(남(南高燕國寺)로 불렸다. 그 뒤 남고사는 전주부성의 4대 비보사찰 중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견훤은 완산주(전주)에 후백제 도읍을 세운 뒤 도읍의 수호를 위해 동서남북에 동고진, 서고진, 남고진, 북고진을 두었다. 여기에 각 진마다 사방을 지키는 동고사, 서고사, 남고사, 북고사를 두어 외침을 막고자 노심초사하였다. 남고산성에 들면 탁 트인 전주시가지가 눈앞을 가득 채우고, 천경대, 억경대, 만경대가 버선발로 뛰어나온다. 만경대 남쪽바위 벼랑에는 고려 말 충신 정몽주가 쇠퇴해 가는 고려를 걱정하며 읊었다는 시가 새겨져 있다. 그 시에는 고려 말 이성계가 황산전투에서 왜구를 무찌르고 전주 오목대에서 전주 이 씨 종친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베풀면서 장차 고려를 뒤엎고 조선 창건 뜻을 은근슬쩍 내비쳤다. 그 때 종사관으로 따라왔던 정몽주가 우국충정의 시를 읊었다. 천리바위머리 돌길 돌고 돌아/홀로 다다르니 가슴에 메는 시름이여/청산에 깊이깊이 잠겨 맹세된 부여국은/누른 잎 휘휘 날려 백제성에 쌓였 도다/9월 바람은 나그네 시름 짙고/백년의 호탕한 기상 서생은 그릇 쳤네/하늘가 해는 기울고 든 구름 마주치는데/열없이 고개 돌려 옥경만 바라본다. 언제 봐도 남고산성의 서문을 지키고 있는 남고진사적비가 듬직하게 여겨진다. 그 비문은 1846년 조선 현종 때 최영일이 글을 짓고 조선 후기의 명필이었던 창암 이삼만이 일필휘지했다. 남고산성은 <세종지리지>에 고덕산성, 임진왜란 당시 <선조실록>에는 만경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남고산성 축성을 완성한 전라관찰사 박윤수가 쓴 <만익주신건기>에는 남고산성과 동고산성이 서로 맞서서 돌부리가 솟아 만마동 40리 골짜기를 안고 있다는 기록도 보인다. 남고산성의 이름은 그 때 붙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임진왜란 때 이정란 장군이 남고산성을 보수하여 왜적을 물리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남고사의 전방에 남장대, 후방에 북장대, 남장대 아래 서쪽 골짜기에 진창(진(鎭倉), 군기고, 화약고 등을 설치하여 1,500명의 병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했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남고사를 품은 남고산성은 후백제의 얼이 살아 숨 쉬는 문화유적의 보고다. 백제의 얼을 계승하려고 고심했던 견훤이 백제의 옛 땅 완산주(전주)에 후백제를 창업하고 전주부성의 수호를 위해 쌓았던 유서 깊은 유적이다. 그런데 전주에 살면서도 남고산성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전주에 산재한 역사문화유산을 많이 찾고 사랑하는 것이 전주 사랑의 지름길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 남고산성을 더욱 아끼고 보존하며 사랑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 김정길 수필가는 전주상공회의소 기획관리실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영호남수필문학협회장으로 있다. 후백제 천년의 역사와 문화를 재조명하고 있으며 <어머니의 가슴앓이> 등 다수의 수필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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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26 16:59

[금요수필] 물 위에 누워보기

이재숙 아무 소용이 없었다. 병원 물리치료실을 나와 400미터 떨어진 집까지도 걸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혀를 차며 수영이 최곤디 라고 말했다. 시작도 힘들었지만, 수영을 계속한다는 게 너무 힘들었다. 수영반은 기초반 초급반 중급반 그리고 고급반으로 나뉘어 강습이 있었다. 보통 3개월이면 월반이 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쉬지 않고 수영 강습을 받았지만, 오랫동안 기초반을 벗어나지 못했다. 수영의 기본적인 동작인 물 위에 몸이 뜨질 않는 거였다. 발차기, 힘 있게 발차기, 엎드린 자세로 반듯이 눕기 이 동작이 모아지면 수영을 할 수 있다는데 일단 물 위에 몸이 뜨질 않는 거였다. 젊은 수영강사는 호루라기를 불며 힘을 빼란다. 힘을 빼면 뜬단다. 패드를 잡고 발차기를 할 수는 있다. 힘이 있어 가능한 동작이다. 하지만 패드를 잡지 않으면 배부터 갈아 앉고 물을 먹고 입과 코에서 물을 뿜으며 멈춰 서야한다. 힘을 빼세요 힘을 빼면 떠요 유급을 한 번 할 땐 눈칫밥이 없었다. 두 번째 유급을 결정할 땐 강사와 나는 물론이고 몇 명의 강습생들도 당혹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랬다 계속 패드를 잡고 발차기만을 할 수 없었다. 속도가 안 맞아 뒷사람에게 너무 피해를 주기 때문이었다. 나는 용기의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선생님 힘을 빼란 뜻을 모르겠어요. 힘을 빼면 쓰러지는데요. 살짝 망설이던 한 손이 수평으로 올라가더니 한번 누워보세요 수평으로 들렸던 강사 손이 등에 살짝 닿는다. 아 이렇게 힘이 들어가니 안되죠. 손을 저어보세요. 아 이렇게 손을 저으면 어떡해요. 힘을 빼고 하셔야죠. 전 수영을 못해서 여기 왔어요 그리고 선생님에게만 수영을 배웠는데요 왜 못할까요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했어요 아무래도 선생님이 잘 못 가르쳐 주시는 게 아닌가요? 내 나이가 얼추 수영강사의 큰어머니벌이니 당돌한 항의(?)에 꾹 참는 표정이다. 강사는 처음으로 내 배 위로 자기의 왼손을 가만히 갔다 댔다. 자 힘 빼고 누워 보세요. 아 더 아직도 힘이 들어갔어요. 힘 빼세요. 자 아주머니는 죽었어요. 죽은 사람 배에 이렇게 힘이 들어가나요? 온몸에 힘을 빼시고 힘 더 빼세요. 더 더 더 더 더 이렇게 쉬운 일이었다니 선생님 손 느낌에서 힘 빼기의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순간 몸이 가볍게 둥 떠오르는 느낌이 왔다. 사실 수영장에서 물에 빠져 죽기는 어려운 일이다. 죽자 하면 살고 살려고 힘을 주면 죽는 거였다. 진즉 이렇게 내 배와 선생님의 손이 맞닿았더라면 삼일이면 끝났을 일이 3개월도 넘어 이제야 힘 빼는 일이 완성되다니. 젊은 아가씨들이 수영을 빨리 익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무슨 이유였던 수영강사의 손이 나보다 빨리 그들의 몸에 닿았던 거였다. 힘 빼기는 그 후 나의 좌우명에 추가되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관용과 온화함, 그리고 애정을 잃어서는 안 된다. 관용과 온화함으로 애정을 기울이는 것. 그것은 몸과 마음에서 힘을 빼야 한다. * 이재숙 수필가는 전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으며, 제1회 국제해운문학상 대상을 받았다. 전주예술인상도 수상했고 시집 <젖은 것들은 향기가 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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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12 16:57

[금요수필] 사라져 가는 것들

배순금 그믐날에 혼인하고 초하루에 길을 떠난다구요? 당신은 양심도 없네요 혼인하느라 빚을 많이 졌으니 일을 열심히 해야지요 괜찮아요, 당신이 길 떠나면 난 당신을 그리워하며 베를 짜지요 이는 티벳에서 막 결혼한 신혼부부의 이야기로 신랑이 내일이면 길을 떠난다. 갓 시집온 신부의 얼굴도 채 익히기 전에 저 험난하고도 위험한 말을 타고 물자운반의 길을 떠나는 것이다. 티벳에서는 이를 마방이라 한다. 신부도 신랑이 마방을 떠난 텅 빈 집에서 긴 기다림의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마방들은 도시의 생필품과 곡식, 차(茶) 등을 물물 교환해 오는 1년 동안의 돈벌이다. 마방들이 집을 떠나기 전에 꼭 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말 장식으로서 첫째 말, 용감하고 신중한 암컷과 둘째 말 수컷에 종과 방울을 달아서 호화롭게 장식을 한다. 뒤 따르는 말들의 길라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말들은 늪지대가 나오면 안 가려고 고개를 휙 돌려 버린다 빠지면 나오기 어렵고 깊은 곳은 목까지 차오르기 때문이다. 다마고도(茶馬古道)의 가장 어렵고 위험한 곳은 외줄 하나로 3대 강 즉, 진사강, 란찬강, 누강을 건너기도 한다. 강의 협곡을 가로질러 건너는 일로서 말들은 무서워서 꽁지를 빼고 뒷걸음질만 치는데 마방 한명씩 외줄에 몸을 단단히 묶고 한참을 주르르르 반대편 숲길에 내린다. 위험하여 곡예를 하듯 하기도 하고 떨어지면 어쩌나 숨이 막히는 험난한 길이다. 형이 이렇게 험난한 마방의 길을 떠나면 동생이 아내와 함께 살며 농사를 짓는다. 형제공처의 이색적인 마방들만의 가족관계 풍습이 내려오고 있는데 이들을 청해성 소수민족인 황남 티벳 족이라 한다. 형은 혼자 남겨질 아내가 걱정이 되지 않아 서로 안심이 되고 살림이 훨씬 나아지니 아무런 불만 불평이 없는 그들만의 문화이자 풍습이다. 마방의 길을 떠나지 않을 때는 셋이서 같이 산다. 그렇지만 하나가 밭으로 나가면 하나는 짐승을 돌보는 등 항상 다른 일을 한다. 우리네 문화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 모두는 많은 돈을 지불해야만 아내를 얻을 수 있는데서 연유한다. 즉 형제들이 너무 가난하여 처 하나를 데려와 형제가 공유하는 것이다. 모계중심사회이기에 모든 권한이 여자에게 있으며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맏형의 자식이고 나머지 형제들은 삼촌으로 부른다. 찌든 가난의 해결이 결혼이나 그 밖의 여러 제도들보다 우위를 차지하기에 그러한 풍습으로 남아있고 자식은 아내가 부양하는 책임이 있는 티베트 족들의 독특한 풍습이고 문화다. 집에 있는 아내들은 험한 마방길에서 오로지 무사히 귀환하기를 염원하며 긴 기다림 속의 생활이 이어진다. 이 마방의 길은 당나라 때 꽃을 피우고 지금까지 천사백여 년을 이어와 유네스코에 등재된 문화유산이다. 이제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차츰 도시화가 되어 차들이 자유롭게 다니게 되니 이제 마방들의 이야기와 차마고도(茶馬古道)도 우리 인간들의 기억 저편으로 멀리 멀리 사라져가 옛 이야기가 되고 있으니 생각하면 참 아쉽기도 하다. * 배순금은 전주교대와 원광대 교육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으며 전북여류문학회 회장과 전북시인협회 지역위원장을 역임했다. 마한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시집 <사각지대>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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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05 16:14

[금요수필] 행복의 조건

이상우 광복 후 우리나라는 무한 자유로 치열한 분열을 가져 왔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좌우지간입니다.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부모, 자식, 형제, 친구도 없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밥상머리에서도 싸우는 말이 좌우지간 밥이나 먹자입니다. 지금의 세태가 그때와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국론이 사분오열되어 앞날이 보이지 않습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의는 사라지고 패거리 정치, 다수에 의한 횡포로 떼법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했습니다. 대통령도 강조한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선량한 국민을 가짜 뉴스로 선동하니 세상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최근 법무부 장관 사태를 지켜보면서 대한민국에서 정의는 실종되었다고 봅니다. 국민이 원하는 정의의 기본은 도덕성에 있습니다. 법의 본질이라면 당연히 법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법을 피하여 교묘하게 국민을 속이고 자기들의 이익만 챙기는 가진 자와 배운 자의 행태는 국민을 실망스럽게 합니다. 정말 사회의 지도층이라도 도덕적으로 존경 받지 못하면 콩으로 메주를 쓴다 해도 믿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천금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자기편이라 해서 부도덕한 행위를 변명으로 일관하고, 상대편의 잘못에 물 타기를 하려는 정치인들이 눈에 거슬려도 너무 지나칩니다. 자기편을 지키려는 행위가 너무나 유치하고 편파적이라서 국가의 앞날이 걱정됩니다. 국가의 불행한 국민의 행복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몇 년 전에 한국의 인문학 위기설이 회자 되었습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결국 인문학에 합당한 지도자가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요즈음 지도자들은 백면서생보다도 못한 도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사기꾼과 철학자만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합법적으로 상대방을 속일까 하는 한심한 세상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그 권력을 이용하여 돈을 벌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비록 정치인들 은 그렇다 쳐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모범이 되어야 할 교수가 부도덕한데서 국민은 분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일개 서민이 그들의 부조리한 행동에 맞설 수도 없으니 소크라테스나 디오게네스처럼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인문학에서 인생의 가치를 진선미로 표현합니다. 진(眞)은 논리적 사고와 사유적 탐구로 진리를 지향함으로써 지성인이 되는 것이고, 선(善)은 실천적으로 도덕적 행위를 하므로 사회의 규범이 되는 것이고, 미(美)는 예술을 통하여 미적으로 창조하여 사람들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진선미를 잘 통합하여 최종적으로는 행복을 추구하게 됩니다.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습니까? 경제적 급성장에 돈이 최고의 가치로 전락한 것이라고 합니다. 노동자에서부터 정치인은 말한 것도 없고 사표가 된다는 교수까지 돈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종교 단체마다 돈 거두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의 정점에 종교 지도자도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종교적 시설을 사유화하며 세습하는 모습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너무나 큽니다. 인생 최고의 가치는 종교적 선(善)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종교 지도자가 돈을 멀리하지 않고는 사회적 행복은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의 인문학 회복은 종교 지도자와 사회지도층의 도덕성과 청렴성에 있습니다. 성경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결국은 돈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행복하려면 돈과 일정 거리 두는 일입니다. * 이상우는 <문예사조>에서 수필, <한국아동문학회>에서 동시로 등단했다. 전북아동문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수필집 <자동차 시대에서 휴대폰시대까지> 외 다수가 있으며 전북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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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27 16:14

[금요수필] 기억을 줍다

김재희 무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내 눈길을 끄는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화려한 조명을 받는 배우의 성근 머리칼이었다. 배우의 목소리는 각각 다른 감정의 기복에 따라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살결을 채색했다. 박력 있는 목소리일 때는 땀방울을 밀어 올려서 자르르한 윤기를 내기도 하고 떨리는 음성일 때는 파르르한 핏줄이 돋는 듯 하기도 했다. 무대의 분위기를 달콤한 크림 같은 말이 아련하게 휘감아 돌 때는 미끄러질 듯 아슬아슬한 빛이 퍼진다. 그러다가 말을 다 뱉지 못하고 침묵으로 무대가 잠시 숨을 멈출 때는 그 살빛에서 감정이 울컥 배어 나왔다. 삶의 온갖 흔적들이 공연 내내 고스란히 내게 옮겨오면서 왠지 모를 깊은 울림이 마음 안으로 파고들었다. 성근 머리칼은 나이가 들어가는 과정이며 상징이기도 하다. 물론 유전적인 요소가 아니고 신체의 변화에서 생기는 자연적인 과정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 외에도 주름이나 몸놀림에서도 나타나는 현상도 있지만 나는 유독 성근 머리카락의 모습에서 나이 들었음을 느낀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는 것과 가장 밀접한 것은 기억력 아닐까. 나이와 기억력은 평행선을 이루어 날이 갈수록 감퇴해 가는 기억력은 어쩔 수 없음을 느낀다. 나 역시 이 선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싶다.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 기억력과 관계된 책이나 영화에 관심이 쏠린다. 오래전에 보았던 중국 영화 <5일의 마중>이 새삼 감동으로 떠오른다. 문화대혁명으로 감옥살이하는 남편과 아내의 이야기다. 20년이 넘도록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는 생활고에 시달리다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그러면서도 남편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막상 돌아온 남편을 알아보지 못한다. 남편은 그런 아내의 기억을 온갖 정성으로 되돌려 보려하지만 모두 허사다. 아내는 5일에는 돌아갈 것이라는 남편의 편지만은 기억하고 매달 5일이면 역으로 마중을 간다. 그럴 때면 곁을 지켜주던 남편도 이웃집 아저씨인 양 동행을 한다. 옆에 있는 사람이 자기가 기다리는 남편인 줄을 모르고 매 달 외롭게 돌아서는 가슴 아픈 사연의 순애보다. 어느 간병사의 이야기도 있다. 우연히 치매 환자의 간병을 맡았는데 그 환자는 바로 첫사랑이었다. 비록 그동안 맺어지지는 못했지만 살면서 마음 한구석에 희미한 그림자로 남아 있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은 가정을 이루어 다복하고 평온한 삶이어서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 없이 가정을 지키며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올곧은 여인이었다. 그래서 상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퍽 다행으로 여기며 오로지 환자와 간병인의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면서도 온갖 정성을 다하여 그의 마지막을 지켜주고 싶은 연민으로 마음속 깊이 염원하고 예전의 건강한 모습이 되어 주길 빌고 또 빌었다. 위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비록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을 수는 없지만 은근한 정이 어려 있는 아름다운 사연이다. 서로 통하지 못하는 정의 깊이를 어느 것으로 재어 볼 수 있을까. 물이 보이지 않는 우물 속으로 내려 보내는 두레박줄이 끝없이 풀리는 깊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한 줌의 물을 퍼 올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살아갈 것이다. 무대 위의 배우를 보면서 또 다른 인물을 만난다. 주름살과 성근 머리칼이 말해주는, 실로 오랜만에 만난 눈은 잊힌 세월이었다. 긴 세월 동안 묻어 두었던 침묵에서 뚜욱 떨어진 물방울 하나. 배우 떠난 무대의 허공을 훑으며 누군가의 눈빛에서 사라진 기억을 찾아 줍는다. *김재희 수필가는 전북 정읍 출생으로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당성했으며 수필과 비평문학상, 전북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수필집 <그 장승이 갖고 싶다>, <꽃가지를 아우르며>, <하늘밥>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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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20 16:15

언어의 품격

한성덕 근래에, 기독교를 개독교라 칭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기독교를 폄훼하고 조롱하는 언어의 폭거다. 한편으로는 따끔한 질책인 성싶어 몸이 후들거리고,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다. 이런 점에서는 목사 된 게 부끄럽고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참에 기독교를 정리하고, 개독교라는 말의 실체를 살펴보련다. 예수그리스도의 선교와 가르침, 그 분의 생애를 통해서 비롯된 종교가 기독교다. 개독교란? 개(Dog)와 기독교를 합성시켜서 부르는 비속어다. 기독교라는 명사를, 개 같은이라는 형용사와 조합하고, 그걸 다시 줄여서 개독교라 부른다. 결국은 개 같은 기독교라 비아냥거리며 욕을 하는 것이다. 최근, 교회의 불미스러운 사태나 모 단체대표의 막말은 치가 떨린다. 그래서 기독교가 상스러운 소리를 더 듣는다. 넌더리가 나고 손가락질을 당해도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인다. 얼마든지 고운 말과 신사적인 매너로, 중후한 멋을 풍기면서 힘 있게 말 할 수 있지 않은가? 그 막말 때문에 눈살이 찌푸려지고, 격한 분개심이 솟구치며, 욕이라도 해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고 지인들이 소리친다. 그러면서 어떻게 못하냐고, 한 목사와 급이 다르냐고, 진짜 목사가 맞느냐고, 설교는 어떻게 하느냐고 목사인 나를 공박한다. 나는 원래 작은 사람에 불과한데 어떤 말이 먹히겠는가? 나 역시 난감하고 답답할 뿐이다. 일반인들도 조심스럽게 여기고 꺼려하는 말을 한다면, 언어폭력이 아닐까? 그토록 격한 말이 소위 성직자 입에서 쏟아지니 말이다. 한 언론사의 돋을새김란에 수록된 글 일부를 소개한다. 국민들이 총격을 가해서 죽인다니까. 다른 나라 같으면 누가 저런 대통령을 살려주겠나? 문재인은 심장마비로 죽는다. 문재인의 목을 따야한다. 문재인 저0 쳐내면 가정, 직장, 교회의 앞날이 열린다. 문재인 저0을 끌어내려 주시옵소서. 문재인은 하나님이 폐기처분했다. 독일 히틀러를 교훈 삼아 빨갱이 국회의원들 다 쳐내버려야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 (온라인 뉴스부장, 2020. 1. 7일. 27면 oo일보)라고 했다. 저속한 언어는 품격이 떨어진다. 제아무리 너른 마음으로 백번을 양보한다 해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국민의 대표로, 국민이 뽑은, 국민의 어른을, 저토록 난도질 해도 되는 건가? 엄연한 이 나라의 대통령이다. 그 나라님을 저잣거리에서조차 사라진 비속어(卑俗語)로 마구 해댄다. 말의 자유함은 끝도 밑도 없나보다. 참으로 해괴망측한 막된 말이다. 더욱이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는 말은, 사이비 교주에게서나 들을 법한 소리지 정통교단에서는 신성모독죄에 해당한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세계인들 앞에서 망신 주는 처사요, 국격을 훼손하는 일이다. 물론, 잘 못하는 경우의 쓴 소리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때에도 예의와 진정성을 가지고, 보다 품격 있는 말로 하는 게 상식 아니겠는가? 아무튼, 새천년을 기대해 본다. 막된 말은 사라지고, 순화된 말에서 오는 감동과 품격 있는 언어로 단장돼, 칭찬과 격려가 풍성한 경자년을 말이다. * 한성덕 수필가는 은혜림교회 목사를 은퇴하고 <대한문학>으로 등단했다. 현재 신아문예대학에서 수강 중이며 신(信).망(望),애(愛)로 버무려진 성직자 수필집 <단, 하루만이라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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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13 15:41

유년시절은 청정제

임숙례 나무가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까지는 힘의 뿌리를 내릴 시기에 있다. 그 시기 중에서 근원의 힘이 되고 밑바탕이 되는 시기는 유년시절이 아닐까? 하얀 종이에 무지개를 그리고 꿈을 심던 유년시절은 세월을 살아가는 데 청정제 역할을 했다. 나는 요즘도 가끔 심신이 무기력해지고 의욕이 상실될 때면 어린 시절을 떠올려본다. 꿈을 꾸듯, 영화를 보듯 투영해보면 바닷물 위로 상승하는 고기비늘의 반짝임처럼, 무기력한 내 마음도 반짝이는 탄력이 생긴다. 그런 내 유년의 고향은 남해바닷물과 섬진강물이 만나는 하동군의 작은 포구 용포마을이다. 썰물이 지면 아이들은 바다호미를 들고 갱조개(재첩)와 백합을 캐러 모래 숨구멍을 찾으러 다녔다. 어둑한 새벽, 김을 다지는 통나무도마 소리에 추운 새벽이 열리던 곳. 쇠죽 아궁이에 솔가지가 활활 타오르며 하루가 시작되었다. 긴 부지깽이로 다독다독 눕혀가며 태우던 불꽃이 내 가슴속 온기로 퍼져가곤 했다. 그런 고향을 떠나 우리 가족은 여수로 이주를 했다. 처음에는 여수가 낯설어서 우리 형제는 방학만 하면 고향인 용포로 내달음질치기도 했다. 여수에서 여객선을 타고 하동노량에 도착하여 다시 작은 기선을 갈아타고 한 시간 반을 달려야 용포 어구가 나타난다. 선창가를 돌아 논두렁길에 들어서면 큰어머니는 어느새 우리를 보고 이름을 번갈아 부르시며 달려 오셨다. 아이고 내 새끼들 오나. 큰어머니의 찌렁한 목소리는 고향 포구를 감아 돌았고 두 팔로 감싸 안은 가슴은 고향의 아랫묵처럼 포근하고 넓었다. 큰엄마! 우리 오는 줄 어찌 알았노? 하메 느그가 올랑가 싶어 늘 선창가를 안 쳐다 봤나. 먼 데서 봐도 그냥 알것데이. 하시며 눈가에 이슬이 맺히곤 하셨다. 언젠가, 큰집에 갔었을 때 큰아버지의 빠른 걸음을 따라 걷다가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면서 발가락이 벌겋게 부어 욱신거리더니 곪아버렸다. 읍내와 멀리 떨어진 곳이라 약을 구할 수가 없자 큰어머니는 양잿물에 발을 담궈 부기를 가라앉힌 후 입으로 피고름을 빨아 내셨다. 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큰어머니는 바쁘셨다. 가마솥에 올벼쌀을 쪄서 덕석에 말려 절구에 찧으시랴, 마당에 가마솥 뚜껑을 걸고 호박, 방앗잎 전 부치랴, 이것저것 만들어 싸 주시느라 등줄기의 땀이 적삼을 적셨다. 큰어머니의 눈물도 뒤로하고 여객선에 올라 빵빵한 가방을 풀어서 갓 찧은 쫄깃하고 달짝지근한 올벼쌀을 씹으며 여수항까지 왔다. 가까이 다가 왔다가 멀어지는 섬처럼 세월도 많이 흘렀다. 우리를 친자식처럼 사랑하시던 큰어머니, 큰아버지, 부모님, 모두 고향 용포마을 선산에 계신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요즘은 디지털 시대라 하루가 다르게 변하더니 고향도 참 많이 변했다. 바다호미를 들고 나가던 모래밭도 없어지고, 아스라이 꿈처럼 바라보던 섬들도 육지로 변해 코앞에 앉아 있다. 아직도 내 마음속엔 썰물과 밀물이 교차하던 용포가 꿈틀거린다. 김을 떠 말리던 김 막도 온데간데없고 섬진강과 남해가 만나던 용포 어구도 사라졌다. 산을 깎아 바다를 채워서 바다도 저 멀리 밀려 났다. 그러나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어릴 적사랑은 여전히 내 삶의 힘이다. 세월의 나이테가 감겨 갈수록 큰어머니의 입속 온기가 엄지발가락을 타고 가슴을 활활 태운다. 솔가지 불꽃을 피우던 고향, 큰어머니의 따뜻한 온기로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고 싶다. * 임숙례는 <시와 산문> 수필. <소년문학>동시로 등단했으며, 제6회 녹색 수필상을 수상했다.산문집 <가끔씩 뒤돌아보며 산다>외 2권과 동시집 <꿈을 꾸며>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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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06 16:45

심중사(心中寺)의 겨울

정성수 입동이 지나자 심중사에서 장작 패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사하 마을까지 들려온다. 경내 앞마당에는 버섯을 비롯해서 무청이 수북이 널려 있다. 스님들이 뚫어진 문풍지를 바르고 폭설에 대비해 눈을 치울 싸리비를 만든다. 텃밭에 심은 채소들이 다소곳이 겨울채비를 한다. 심중사의 겨울채비는 소욕지족小慾知足으로 절약과 알뜰한 살림살이다. 그중에서도 시간과 노력이 가장 많이 드는 게 땔감이다. 겨울 추위와 맞서야 하는 심중사는 난방이 걱정이다. 젊은 스님들은 인근 산 속 고사목을 모으는 일로 땔감 준비를 시작한다. 그렇게 모은 땔감은 지게나 몸짐으로 심중사로 옮긴다. 옮긴 나무들을 도끼로 패서 장작이 되면 돌담 옆에 차곡차곡 쌓아 놓는다. 객승이나 기도를 하기 위해 찾아오는 보살 ? 거사들이 거처해야 할 방마다 불을 지펴야 하기 때문에 땔감을 넉넉하게 준비하는 것이다. 심중사의 겨울은 먹거리 마련도 중요한 일이다. 김장을 할 때는 날자 선택에 신경을 쓴다. 기온이 올라간 날에 김장을 하면 금세 시어지거나 색이 변해 보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심중사에는 소금이나 젓갈류를 과량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손발이 시리도록 추운 날을 택해 김장을 한다. 그 외에도 장류 준비 역시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이다. 수십여 개의 장독에 담겨 있는 된장과 간장과 고추장을 일일이 살핀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된장은 겨울 한 철을 이겨내는 보약이나 다름없어 각별하다. 겨울 반찬을 위해서 시래기를 엮어 처마 밑이나 담벼락에 걸어두고 상하지 않도록 바람을 치게 한다. 겨울 심중사는 특별한 반찬거리가 없기 때문에 해마다 반복되는 일이지만 하기 싫다거나 조금도 지겹지 않다고 큰스님 껄껄 웃으신다. 심중사 뒤꼍에 있는 샘이 얼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기도 한다. 샘가에 수북이 쌓인 가랑잎을 거둬내고 물바가지가 깨지지는 안했는지 살핀다. 한참을 기다려야 겨우 한 바가지 고이는 물의 양이지만 물이 고이는 시간만이라고 잡스런 생각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피다. 심중사의 스님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서 사분율四分律의 춥고 눈이 많은 나라에서는 옷을 덧입는 것을 허락한다는 부처님의 말씀 따라 겨울철 누비 승복과 회색 털모자들을 꺼내 놓고 손질하는 일도 해야 한다. 뭐니 뭐니 해도 겨울 심중사의 백미는 대웅전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소리다. 고즈넉하면서도 청아한 풍경소리는 잠들어가는 겨울을 깨운다. 댕그랑 댕그랑 울음을 가슴에 담으면 이름 모를 산새와 청솔가지를 덮은 눈이 심안心眼으로 다가온다. 심중사의 겨울은 산 짐승들에게도 시련의 계절이다. 눈이 온통 산을 덮으면 먹이를 찾아 멧돼지와 고라니 심지어 살쾡이까지 심중사 주위를 맴돈다. 그러나 한겨울은 스님들이 공부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텃밭을 가꾸거나 잡초를 멜 일도 없고 모기와 싸울 일도 없어 동안거에 들어가 오로지 수행에만 집념할 수 있다. 눈 내리는 심중사는 가슴을 설레게 한다. 천상에서 날아 내리는 수많은 흰나비들이 심중사를 포근히 감싸주는 모습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 넘쳐난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있는 마음속의 절 심중사는 피안彼岸으로 가는 길목에 겨울이 되어 다소곳이 엎디어 있었다. * 정성수 시인은 40여 년 간 초등학교에서 40여년간 봉직하면서 시와 수필을 써왔다. 향촌문학회장을 맡고있으며 시집동시집시곡집 등 50여 권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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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1.30 15:57

[금요수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

김춘자 그때가 봄이었을까. 봄은 숨죽이고 있던 생명들이 다시 움트는 철이기도 하지만 연약한 생명들이 꺾이는 계절이기도 하다. 봄의 종잡을 수 없는 기온이 온몸의 순환을 흩트려 병고에 시달리던 노인이나 어린 생명들이 움츠렸다 피어날 에너지를 얻지 못하고 세상을 뜨는 때이기 때문이다. 어려서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어느 봄날 동생이 음식에 체(滯)해서 하얀 광목옷 하나 걸치고 세상을 하직했다. 그때 아버지는 군대에 가셨던지 없었고, 작은아버지와 함께 동생을 묻고 돌아온 어머니는 넋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할머니는 나를 업고 팽나무 밑에 가서 내려놓더니 논두렁 아래 누렇게 뭉그러진 풀들을 우둑우둑 뜯어 불을 피웠다. 그리고 동생이 먹다만 약봉지와 몇 가지 물건 그리고 아픔들을 태우셨다. 니 동생이 영영 가는구나. 예쁜 내 손자가 참말로, 아주 떠나는구나. 강 건너 골짜기로 사라져가는 연기를 바라보며 눈물로 치마폭이 젖도록 얼굴을 부비며 흐느껴 우셨다. 엄마는 강 건너 앞산에 어린 것의 주검은 묻고 왔지만 그 동생을 내내 가슴에 묻고 살았다. 나는 다 크도록 동생이 묻혀있는 그 산이 무서웠다. 하지만 엄마는 자주자주 앞산으로 산나물을 뜯으러 가거나 그 자식이 보고플 때면 앞산을 바라보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는 내 동생이 죽어 새가 되었다고 했다. 가끔 새 한 마리가 마당에 와 놀고 있으면 입술에 피가 맺히도록 울음을 참으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확독에 보리쌀을 갈다가도 마당가의 새를 향해 보리 몇 알을 던져 주곤 했다. 새가 울타리 너머로 날아가면 그때서야 토방에 털썩 주저앉아 길게 숨을 뱉으며 눈가를 훔쳤다. 나도 덩달아 옆에서 아가, 가지마라. 동생아, 내일 또 와.하며 새가 날아 갈까봐 숨을 죽이곤 했다. 어머니는 그 아들이 떠난 뒤 내리 딸만 넷을 낳았으니 얼마나 가슴을 후볐을까. 그런데도 내색하지 않다가 아들 둘을 더 낳고 난 뒤에야 말씀하셨다. 네가 터 판 그놈이 살았으면 장정이 다 되었겄지야? 그 말이 하도 간절하여 응.이라는 짧은 대답 밖에 할 수 없었다. 너도 생각 나냐? 니 동생? 그 말에도 응.이라는 말 밖에는 더 못 했다. 나와 세 살 터울이었는데 이름도 얻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동생을 지금에 와서야 새삼스럽게 생각해본다. 행여 어머니의 아픔이 도질까봐 이름도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지내온 긴 세월, 잊은 적이 더 많았지만 내내 잊지 못하고 살았던 내 동생. 어머니와 나는 오랜만에 앞산 아장사리로 간 그 아이를 그리워하며 서로 말 한 마디 없이 손을 맞잡고 눈물을 흘렸다. 내 동생을 기억하는 할머니도 작은아버지도 세상을 뜨셨고 아버지는 아기가 가는 걸 보지 못하셨으니 그 아이 마지막에 대한 기억은 어머니와 나만의 것이었다. 그리고 수십 년이 흘렀다. 그 아이가 살았더라면 벌써 60이 지났을 텐데, 오늘 따라 뜬금없이 어머니 살아계실 때 그 아이 이야기를 살짝 꺼내보고 싶다. 몹시 그리워하며 살았다고 말하고 싶다. 세상엔 소중한 인연과 그리움들을 속속들이 쟁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모습, 음성, 몸짓, 추억, 시간들이 그리움이 된다. 그 그리움은 때때로 찾아와 기쁨을 주기도 하고 슬픔을 되새기게도 한다. 슬픔도 삭아 그리움이 되고 미움도 잦아 그리움이 될 때가 있다.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우리들 삶의 아름다움이다. * 김춘자는 임실 운암 출신으로 전북문협 사무국장을 지냈으며 전북문학상과 사임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수필집 《꿈꾸는 달항아리》외 2권과 《겨울을 날다》 등 시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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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1.16 17:05

[금요수필] 야외 수업하는 날

박동희 오늘은 수필반 야외 수업을 하는 날이다. 반복적이던 교실을 벗어나면 왠지 자유스럽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함께 한다. 등굣길 아침 찬 갈바람이 뺨을 스친다. 오늘 수업장소인 국립무형유산원이 눈 가까이 들어온다. 전주천이 빛바랜 억새와 함께 어느덧 가을이 문턱을 넘는다. 억새꽃 뒤 가로수도 갈 빛으로 옷을 훌훌 벗어버릴 채비를 하고 있다. 겨울이 온다는 신호다. 우리 고장 전주에 대한민국 문화재청의 소속 국립무형유산원이 있다는 것은 큰 자랑이다. 2013년에 건립을 했으며 무형 문화유산의 보존전승연구조사기록 관리 보급 및 진흥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곳으로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웅장한 건물에 깜짝 놀랐다. 시설도 시설이지만 방대한 면적에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아름답게 조성된 조경도 훌륭한 도심 속 공원으로 익어가는 가을 카메라 앵글을 어디에 대봐도 한 폭의 그림이다. 벌써 싸늘해진 바람에 등이 구부정해져가는 노령학생들의 어깨 폭을 좁힌다. 어디 훈훈한 곳이라도 없나? 기웃거리다가 사랑채 북 카페에서 따스한 커피 한 잔에 움츠려진 허리를 편다. 학창 시절에나 더러 찾았던 도서관 분위기에서 마셔보는 차 한 잔의 여유와 낭만도 오랜만이다. 유산원의 사랑채에서 수업이 시작됐다. 자연 속에서 자연을 소재로 한 시, 수필 강의가 만학의 수강생들 혼을 앗아갔다. 수업을 마치고 찾은 남양집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대화도 천변의 물소리와 함께 무르익으며 자연스럽게 소통이 이어졌다. 식사를 마치고 초등학교시절 일찍 수업을 마친 학생처럼 홀가분한 기분으로 전주 천 따라 귀가를 하니 바람에 하늘거리는 하얀 억새들이 가을의 마지막 손짓이 애련하다. 하얀 백로가 사뿐사뿐 거닐다가 물고기를 낚아채려 주시하는 맑은 시냇물도, 자전거 타고 잽싸게 달리는 사람, 묵묵히 홀로 걷는 사람, 핸드폰을 들고 셀프로 멋지게 포즈를 취해보는 관광객인가? 전주천 가을 모습도 다양하다. 전주 천 너머 목가적인 한옥마을도 스산한 가을을 타나? 혹시 관광객이 줄어 조용타 못해 쓸쓸해 외로운가? 호기심은 징검다리를 건넌다. 한옥마을 입구 천변 둑이다. 한때 설렁했던 전주 천변 둑 위의 도로가 이렇게 화려하고 멋진 거리가 되다니 감회가 새롭다. 야외 공연장에선 인형극에 간간히 어린이들의 웃음소리도 쏟아지고, 길 따라 한벽문화관과 완판본 문화관, 향교 문화관, 강암 서예관등 각종 문화관도 즐비하다. 그간 참 많이 변했다. 한옥마을의 랜드마크가 된 남천교 위 청연루와 연결된 은행로에 들어서자, 어릴 적 골목길의 당산 나무처럼 여겼던 꽤 오래된 은행나무가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전화도 별로 없고 카페 같은 곳도 없었던 시절 젊은 연인들이나 학생들이 만남의 장소로 즐겨 찾았던 은행나무다. 어느새 발길은 은행나무가 서 있는 한옥마을로 귀가 길의 발걸음이 옮겨졌다. 전주의 명물이 된 한옥마을 거리가 볼 때마다 새롭게 변신한다. 주말엔 발 디딜 틈도 없었던 거리가 주중이라서 일까? 간간히 한복을 입은 사람들 빼고는 오늘따라 한산한 것 같다. 고즈넉한 한옥이 밀집한 차분한 거리라기보다 지붕만 기와를 얹은 거리에 생소한 이름의 먹거리 좌판이 깔린 상가가 즐비하다. 간혹 개량 한복 입은 단체 외국 관광객들이 군데군데서 서성인다. 인생도 하교 길, 이미 녹음되어 지워지지는 않는 인생테이프이지만 다시 새롭게 녹음하며 신선함과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 짐짓 흘러간 청춘의 아쉽고 애틋한 숲을 거꾸로 걸어 보고 싶다. 만학의 즐거움에 마냥 빙긋이 미소 짓는 하루였다. * 박동희 씨는 정읍제일고 등 중등교장을 역임했다. 여행과 사진을 취미삼아 하고 있으며 전북교육문화관 에서 시, 수필을 공부하는 만학도로 건전하고 활기찬 여생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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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1.09 16:15

[금요수필] 금년 한해는 정말 후회 없이 살자 -

안도 우리고장 출신 송대관의 <새 출발>이라는 노래다. <새 출발이야, 저 하늘도 손뼉 치며 나를 축복할거야. 운명아 비켜라. 내가 지나간다. 힘들고 지친 몸 붙잡지 마라. 뒤돌아볼 시간이 없다. 서럽고 괴로운 지난 날 가슴에 묻고 뛰고 또 뛴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든다. 오늘을 놓치면 나는 낙오자, 희망을 잃지 않고 달려 가면은 저 하늘도 손뼉 치며 나를 축복할거야> 우리는 해마다 희망과 기대 가운데 새해를 맞이한다. 새해를 맞아들이는 길들이 다양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 그래서 연말연시 즈음이면 누구나 다 마음을 돌아보고 새로운 결심의 시간을 갖는다. 이렇게 하는 것은 아마도, 한 번 흘러가면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불가역성에 대한 깨달음과 그 시간 안에서 촌음을 아끼고 시행착오를 줄여 진선미의 삶을 살려는 마음 스스로의 울림인 듯하다. 새로운 결심으로 새해를 시작하며 꼭 지녔으면 하는 마음은 곧 새 마음이다. 정채봉 시인은 <첫 마음>에서 새해아침에 찬물로 세수 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 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 일을 한다면 그때가 언제인지 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고 했다. 새해를 맞이하며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늘 새 마음, 첫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조선조 정조 임금 때 항상 실학을 강조했던 성재(性齋) 허전이이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문집에 歳時來拜人 歳時來拜人 半是鬍眉皓 不知己年高 還驚少年老라는 5언 절구를 남겼다. 해석을 하면 새해에 세배하러 찾아오는 사람/ 절반은 수염 허연 사람들이네/ 내 나이 많아짐을 알지 못하고/ 소년들 늙었음에 도리어 놀라네. 라는 시다. 우리는 지금까지 새해를 어떻게 맞이했을까? 어렸을 때는 세뱃돈이 생겨서 좋았고, 새 옷이 하나 더 생겨서 좋았고,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되어 좋았다. 또 무언가 새로운 듯 한 분위기 속에서 막연히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만 같았고, 거창한 신년 계획을 세워 놓고 계획표만으로도 한 뼘 더 성장한 듯 의기양양했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는 달력의 빨간 날이 되었고, 그저 어제의 다음날이 되지 않았나싶다. 그런데 어느 날 거울로 본 우리는 위의 시에서처럼 나이를 먹었다. 위의 시는 노시인이 새해를 맞으면서 느끼는 감정을 평이하며 아주 순수하게 표현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새해에 인사를 드려야 할 사람은 점점 줄고, 찾아와 인사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게 마련인데, 이 시에서는 찾아오는 이들 중 머리와 수염이 하얀 사람이 절반이나 된다고 하였다. 평소 자신의 나이를 크게 인식하지 못하다가 찾아오는 젊은이들을 보고 노인이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에 시인은 깜짝 놀라고 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새해지만, 결코 누구나 똑같지는 않다. 어떤 이에게는 희망이, 어떤 이에게는 그냥 휴일이, 어떤 이에게는 서글픔이 될 지도 모른다. 새로움은 언제나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일 것이다. 우리의 짧은 삶이지만 잘 살면 한 번으로도 족한 것이 인생이다. 문제는 '잘' 사는 것이 쉽지 않다. 새로 맞은 한 해를 잘 살아보자고 다짐해 본다. 다짐은 줄이고, 행동을 늘리는 한 해를 살자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또 다시 이렇게 다짐을 한다. 금년 한해는 정말 후회 없이 살자. * 안도 시인은 전북문인협회 회장과 전북문학관 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전라북도 국어진흥위원회 위원장과 전북교육문화회관 시. 수필 전담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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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1.02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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