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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은 현실이 된다…전북일보가 그린 ‘전북의 미래’

이정문 화백의 만화 서기 2000년대 생활의 이모저모를 기억하시나요? 이 화백이 1965년에 35년 후 미래를 상상하며 그린 만화에는 태양열을 이용한 주택, 전기로 달리는 자동차, 영상통화 기능이 있는 휴대전화, 인간 대신 청소하는 로봇, 집에서 치료받고 공부하는 원격 진료학습 등 지금은 대부분 현실이 된 모습들이 담겨 있습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 이 그림은 황당무계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상상은 현실이 됐습니다. 상상에 불과했던 것들이 현실이 되기까지는 끊임없는 도전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창간 71주년을 맞은 전북일보가 전북의 미래 모습이 담긴 그림을 싣습니다. 정윤성 화백이 만화로 표현한 전북의 미래 모습입니다. 만화 속 기회의 땅 새만금에는 국내외 기업들의 투자가 봇물 터지고, 젊은 세대는 보육교육 걱정 없이 아이를 낳아 키우고, 노년에도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립니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뜁니다. 대형 사회간접자본(SOC)의 부재와 전국 최저치인 각종 경제 지표, 젊은 세대의 지역 이탈.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낙후와 소외만을 이야기해왔습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우리 모두에겐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신문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자 시대를 이끄는 길잡이입니다. 이제는 그림 속 상상이 현실이 되도록 전북일보가 앞장서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겠습니다.

  • 문화일반
  • 문민주
  • 2021.05.31 19:03

[로컬크리에이터를 찾아서] 정읍 김보정 도자기 김보정 대표, "'참여하는 예술활동' 콘텐츠 실현이 목표"

김보정 정읍 김보정 도자기 대표 정읍시 옹동면의 한 마을, 그 곳에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김보정 도자기(토얼 art)의 대표 김보정 작가가 지은 공방이다. 전통과 현대적 감각이 어우러진 이 공방에는 도자기 굽는 가마, 수장고, 전시관, 다도실 등이 있다. 김 작가는 이 공간에서 주로 도예 작업을 한다. 그는 20년 이상 도예를 한 베테랑 작가로, 기능올림픽에서 수상할 만큼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작업하는 탁자 주변과 전시실에는 그가 만든 도자기가 즐비하게 놓여있다. 찻잔, 접시, 그릇, 장식품 등 다양하다. 김 작가는 작업이 일상이라며 이 공간에서의 일상을 유튜브에 담기도 한다고 말했다. 작업 과정을 담은 영상은 유튜브 검색창에 김보정 도자기를 입력하면 찾을 수 있다. 흙 밟기, 도자기 때기, 조형물 쌓기, 가마 불 지피기 등 체험활동도 이뤄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사람이 찾는다고 한다. 특히 아이들이 많다. 김 대표는 공방 체험에만 국한하지 않는다며 주일에 바쁜 일상을 보낸 사람이 주말에 편하게 쉬러 오는 공간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공방 옆에 있는 한옥집을 가리켰다. 76년이나 된 한옥집이다. 김 대표는 서로 소통하면 어우러질 수 있다는 뜻을 담아 내부를 현대식으로 개조했다며 마을 분이나 다른 지역에 사시는 분들이 오셔서 숙박을 한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이 공간에서 토얼 art를 설립할 파트너를 만나기도 했다. 이처럼 김 대표는 정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본래 고향이 전북은 아니다. 서울 토박이다. 결혼 후, 외가가 있는 경북 경산에 터를 잡고 도자기 공방을 운영하다가 4년 전 이곳에 왔다. 정착도 수월했다. 당초 농촌생활에 대해 동경하고 있어서다. 이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과도 수월하게 친분을 맺었고, 지난해는 마을 어귀에 예술인촌을 만들기 위한 부지도 확보했다. 김 대표는 어린 시절 외할머니댁의 풍경과 같은 느낌이라며 어려서부터 이런 곳에서 도자기를 만들고 그림도 그리면서 내 인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창업도 성공적이었다. 정착한 지 4년 동안 구절초 축제 참여, 청자 박물관 강의 등록, 게스트 하우스 운영, 꾸준한 수강문의, 도자기 제작 의뢰가 끊임없이 지속됐다. 현재는 주변 밭에 옥수수 등 곡물을 심는 등 농촌체험 활동의 장으로도 확대하고 있다. 김 대표는 서울에 있었으면 부지가 좁아 다양한 콘텐츠를 활성화하기보다 개인 작업공간으로만 그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래 비전도 갖고 있다. 지역단위로 도자기를 비롯한 인근 지역의 문화체험, 숙박. 시골 맛집 들을 연계할 수 있는참여하는 예술활동콘텐츠를 실현하는 게 목표다. 일본 등 많은 국가를 상대로 해외 판로를 개척하고 싶은 꿈도 있다. 지역 로컬크리에터를 꿈꾸는 청년들을 향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김 대표는 지역에 오기 전, 정확하게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갖고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5.31 16:36

[로컬크리에이터를 찾아서] 로꼬로꼬 이누리 대표 “풍부한 지역의 자원, 활용이 관건”

이누리 고창이엠푸드 실장이 수확한 땅콩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지역의 장점이요? 지역엔 자원이 많아요. (밖을 가리키며) 저 풀도 다 파는 거라고 생각해요. 누가 파느냐에 따라 다른 거겠죠. 쑥이 땅콩밭에 나면 잡초지만, 쑥을 캐는 사람에겐 판매 상품인 것처럼요. 결국 자원을 어떻게 가공하느냐 판매하느냐의 차이인 것 같아요. 청년농부 이누리(30) 고창이엠푸드 실장은 최근 자신만의 사업을 일궈나가기 시작했다. 로컬에 미치다라는 뜻의 로꼬로꼬를 창업한 것. 고창이엠푸드는 그의 아버지 이경수(63) 씨가 세운 영농조합법인이다. 친환경 EM(유용 미생물) 농법으로 땅콩을 재배한다. 현재 농가 62개가 참여하고 있다. 이누리 씨가 대표로 있는 로꼬로꼬의 아이템은 냉동 판매하는 삶은 풋땅콩이다. 알이 굵은 신팔광 등 3~4가지 땅콩 품종을 이용한다. 삶아 먹는 땅콩이 조금 생소할 수 있지만, 사실 전국에서 재배하는 국산 땅콩 60%가 풋땅콩으로 소비된다고 한다. 30%는 볶음땅콩, 10%는 가공용으로 소비된다. 이 대표가 고향인 고창으로 돌아온 건 2016년.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한국농수산대에 진학할 때만 해도 자신이 고향에서 직접 농사를 지을 줄은 몰랐다고 했다. 농사에 농자도 몰랐어요. 대학에서 선배들에게 삽질을 비롯한 각종 농기구 다루는 법부터 배웠어요. 대학을 졸업한 뒤엔 농촌진흥청에서 토양식물체분석 연구원으로 4년간 근무했다. 그는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그동안 쌓은 경험을 현장에 접목하면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을 때 농사, 농부의 길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아버지를 도와 다양한 품종을 연구재배하고, 고창 토성에 맞게 두둑 재배법을 도입하는 등 국산 땅콩의 경쟁력 향상을 도모해왔다. 이제는 농사를 매개로 지역의 가치를 알리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는 지금은 소비자에게 농산물의 가치를 알리는 방법, 어르신들의 일자리 창출 등과 같은 지역 활성화에 대한 고민을 가장 많이 한다고 했다. 대부분 마을 어르신들은 소농이기 때문에, 작은 평수에서 고수익을 창출하는 방안을 계속 강구하고 있어요. 풋땅콩을 판매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죠. 가능하다면 일자리 문제는 마을 안에서 풀고 싶습니다. 이것이 자주 언급되는 지방 소멸을 막는 한 가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에게 도시 생활에 대한 갈증은 없는지 물었다. 전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수원에서 첫 직장을 다니면서 어느 정도 도시 생활을 해봤기 때문에 별다른 로망이 있진 않아요. 김포에서 수원까지 왕복 5시간 출퇴근을 경험해봤으니까요. 도시 생활과 시골 생활 모두 근본적으로는 다른 점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는 해가 뜨면 밭에서 일하고, 해가 지면 공장에서 일한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 <리틀 포레스트> 속 삶을 꿈꾸지만, 현실은 실전이다. 그럼에도 지역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다. 젊은 사람들이 농촌으로 많이 왔으면 해요. 농업과 연계된 사업이나 직업이 생각보다 많거든요. 시골 생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준비만 잘한다면, 기회는 정말 많기 때문에 도전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문화일반
  • 문민주
  • 2021.05.31 16:36

전주미래유산 ‘비사벌초사’ 명칭 찬반 논란 이유는

비사벌초사 신석정 고택 /사진제공=전주시 일제와 독재에 항거하던 전북의 시인, 신석정 선생(1907~1974)이 살았던 자택 비사벌초사를 두고 명칭논란이 한창이다. 역사사료에 비사벌이 전주의 옛 이름처럼 등장하지만, 당시 완산주(전주 옛 이름)와 비사벌의 지리적 위치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역사학계에서도 그 시기의 비사벌은 경남 창녕지역으로 보고 있다. 이런 이유로 전북 내 일부 식자층은 비사벌 명칭을 바꾸자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전주가 오래도록 지켜야 할 미래유산의 취지와도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온다. △발단 <삼국사기> 문제의 원인은 <삼국사기>에서 비롯됐다.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진흥왕조 기사에 따르면, 신라는 진흥왕 16년(555년) 비사벌(比斯伐)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와 함께 같은 책 제36권 지리지에는 전주는 본래 백제의 완산이었다. 진흥왕 16년에 주를 삼았다고 나와 있다. 이를 근거로 비사벌은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옛 전주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됐다. 특히 전북 문학인들의 작품, 전주찬가, 전북대 교지 등에도 상징적으로 쓰였다. 앞서 신석정 선생도 1950년대 비사벌을 전주의 옛 지명으로 여기고, 볏짚으로 지붕을 만든 집을 뜻하는 초사와 결합해 비사벌초사라 이름을 붙였다. △역사적 사실과 배치 가능성 제기 그러나 1990년대부터 당시 신라와 백제 사이 획정된 영역을 보면 기록이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진흥왕 16년 인 555년, 전주는 백제의 영토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다. 고인이 된 이병도 전 성균관대 교수는 자신이 삼국사기를 번역하고 주석을 단 책 <삼국사기 역주 하>(1996)에 당시 백제의 심장이었던 땅을 취해 주(州)를 삼은 것은 어림없는 오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문헌 기록을 수용해 전주와 창녕의 옛 지명이 똑같이 비사벌이라는 점에서 서술에 착오가 있었다고 부연했다. 정구복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를 비롯한 5명의 역사학자가 펴낸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2012)에서는 완산주를 경남 창녕에 설치한 비사벌주로 해석하고 있다. 이강래 전남대 사학과 교수는 자신이 쓴 <삼국사기 인식론>(2011) 비사벌(창녕)에 있었던 가야 사람들을 백제의 완산(전주)으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그곳(전주)을 비사벌로 부르는 전통이 생겼다. 이런 전통이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잘못 기술하게 했다고 분석했다. 전덕재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창녕에 있는 신라 진흥왕 척경비와 <삼국사기>를 비교 분석한 뒤, 김부식이 비석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오류로 파악했다. △전주시 명칭 유지 입장 앞서 지난 2018년 비사벌 초사를 미래유산으로 지정한 전주시는 명칭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전주시 관계자는 신석정 선생님께서 작고하실 때까지 거주를 하셨고, 비사벌이라는 이름도 직접 지으셨다며 후대에서 바꾸긴 어렵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문헌사료에 나온 기록보다 신석정 선생님께서 실제로 사셨던 고택이었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역사문화적인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5.30 17:55

[김용호 전북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장 전통문화바라보기] 순수예술의 가치와 절실함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순수예술을 보고 들으며 삶의 여유로움과 아름다움을 찾는다. 또한 가까운 곳에 두고 향유하고 싶어하며 자신의 힘들고 찌든 삶에 활력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어떤때에는 고통을 덜어내는 촉매로, 어떤때에는 생명을 살리는 소중한 도구로 우리 삶을 지켜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삶의 치유제이며 활력소인 순수예술를 반기며 업으로 즉 삶의 직업으로 만들려 하지 않는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순수예술 전문가 교육을 하는 과정의 학생 정원은 나날이 줄고 있으며 졸업자 또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물론 코로나19의 팬데믹 시대에 순수예술만이 그렇겠냐마는 더욱 억울한 사정은 팬데믹 시대 이전부터 순수예술를 위한 배움터와 졸업자의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세간의 뉴스엔 항상 순수예술 관련 소식이 보도된다. 재벌가의 누구가 귀한 미술품 수백, 수천점을 내놓았네. 누구누구가 세계 유명 콩쿠르에서 입상했네. 한국의 전통예술이 다른 나라에서 이슈가 됐네. 자랑스럽고 귀한 소식들로 가득 차 있지만 정작 그들을 위한 교육과 정책은 바르게 가고 있는 것일까? 필자는 대학 시절, 부모님의 반대와 지인들의 만류에도 다니던 사범대를 자퇴하고 국악으로 인생 행로를 바꾼 과거가 있다. 그렇게 순수예술에 대한 많은 조언와 편견에도 묵묵히 그 길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한가지. 나에게 다가온 전통예술의 절실함 때문이었다. 그 절실함은 무엇이었을까? 절실함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JTBC 손석희 사장의 일화다. 손석희는 나이 마흔을 훨씬 넘겨 남의 나라에서 학교를 다니겠다고 결정했고 마흔셋의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남들처럼 어느 재단으로부터 연수비를 받고 가는 것도 아니었고 직장생활을 하며 마련해 둔 돈으로 떠나는 막무가내식 자비 연수였다. 미네소타 대학의 퀴퀴하고 어두컴컴한 연구실 구석에서 낮엔 식은 도시락으로 저녁에는 햄버거로 생활을 유지했다. 그는 유학시절 첫 학기 첫 시험 때 시간이 모자라 답안을 완성하지 못하고 연구실 구석으로 돌아와 억울함에 흘렸던 눈물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 시간이 절실했으며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가치였다고 믿었다. 그렇게 절실함은 오늘의 손석희를 만들었고 대중의 중심에 서있다. 물론 그 분의 졸업장 한장을 말하고자 함은 아니다. 자신과의 싸움. 즉 스스로 결정한 삶의 절실함은 운명도 바꾼다는 이치를 알리고 싶어서다. 이 세상엔 절실함보다 더한 희망은 없다. 절실하다고 후회할 필요도 없다. 순수예술을 공부하거나 업으로 삶을 지내고 있는 모든 이여! 지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우리에겐 스스로의 절실함이 있다. 그것은 백만금을 갖은 재벌가도, 세상의 모든 권력을 가진 자도 부럽지 않은 우리만의 존재가치이기 때문이다. 모두 힘을 내자. 이 세상은 우리의 가치에 의해 밝고 맑게 변화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말이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1.05.27 18:00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하) 보물로 지정된 봉덕리 금동신발

금동신발은 뒷부분이 포개어진 상태로 노출되었고, 우측 신발 내부에서 직물과 함께 뼈가 확인됨으로서 착장한 상태로 부장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신발의 길이는 32㎝, 너비 10.7㎝, 최대 높이 11.9㎝로 계측되지만, 양측의 신발이 약간의 차이가 있다. 먼저 제작수법을 보면 금동제 판을 목깃, 좌우 측판, 바닥으로 나누어 결구하고 있다. 양 측판 상부 안쪽으로 높이 2cm의 목깃 판을 세우고 그 둘레에 9개의 리벳을 박아 고청하였다. 신발의 앞부분 곧 콧등에 해당하는 곳에는 4개의 리벳으로 양 측판을 겹쳐 결합하고 있으며, 뒷축 부분에도 역시 양 측판을 겹쳐 3개의 리벳을 상하로 고정하고 있다. 그리고 양 측판의 하단은 둥글게 접어 그 안에 바닥판을 넣어 받칠 수 있도록 한 후 양측에 각각 4개씩 작은 리벳으로 고정하고 있다. 이 금동신발의 가장 큰 특징은 목깃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투조로 구획하고 수많은 상서스러운 동물을 화려하게 배치하고 있는 점이다. 양 측판을 보면 상중하 3단으로 문양대를 구획했는데, 상하에는 풀 혹은 구름으로 추정되는 문양을 반복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3단 가운데 중간의 문양대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중앙 부분에 귀갑문 곧 육각형으로 구분하고 상하에 반육각형의 문양대를 형성하여 3단으로 구분된다. 상하 반육각형의 내부에는 새(오리)를 비롯한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또한 귀갑문 내에는 용과 봉황, 인면조와 쌍조문 등이 입체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뒷축 부분에는 양 측판을 결합하여 형성된 3중의 원형 구획 안에 화염문을 투조로 장식하고 있다. 한편 바닥에는 앞에서 뒤쪽으로 4개+5개+5개+4개의 원형 구획을 한 후 각각 6엽의 꽃무늬로 장식하고 중앙에 징(스파이크)를 18개 부착하였다. 원형 구획의 중앙 부분에는 힘찬 용무늬로 장식하고 뒷꿈치 부분에는 역사상을, 앞부분에는 귀면상을 배치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자리에는 양 측판의 상단과 같은 문양을 투조로 장식하고 있다. 금동신발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그리고 일본에서도 발견되고 있는 유물로서 각각의 특징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봉덕리 금동신발은 가장 예술적 가치뿐만 아니라 문양의 내용에서도 상서스럽고 신비적인 문양을 입체감 있게 표현한 점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백제의 영역에서 발견되는 금동신발의 성격에 대해서는 주로 백제 중앙에서 사여를 통한 지방통치의 일환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현지에서 제작했을 가능성에 대한 견해도 있다. 다만 이러한 금동신발을 착장하고 매장된 피장자의 신분은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최고지배자였을 것임은 쉽게 짐작된다. 고창 봉덕리 고분의 구조나 금동신발을 비롯한 출토유물에서 백제시대까지 마한 모로비리국 전통을 이어받았던 지역 수장의 세력을 엿볼 수 있다.

  • 문화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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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5.25 18:08

[이승우의 미술 이야기] 아동미술에 대하여 ⑥

예를 들자면 둥근 산 밑에 작은 꽃들이 많이 피었다는 것은 엄마한테 불만이 많다는 뜻이고, 산이 두 개 이상 크게 그려져 있으면 부모의 과잉 욕구에서 오는 반항심이 내재되어 있으며, 산의 정상이 보이지 않으면 아빠의 태도에 문제가 많다는 의미로 보면 된다. 황토색이나 고동색이 배 부분에 칠해져 있으면 배고픔을 호소하고 있다고 보면 거의 틀림이 없다. 태양이 검정색이거나 황토색일 때는 아빠의 애정이 극히 부족하거나 멀리 떠나 있을 때 혹은 사망했을 때이다. 태양은 햇살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구름에 태양이 가려 있을 때, 햇살이 약할 때, 태양의 높낮이, 태양이 잘려진 상태에서도 아이들은 자기 속내를 말하고 있다. 나무도 그렇다. 주위에 비하여 나무가 너무 굵을 때는 표면적으로는 자신만만하나 불안함을 내포하고 았으며, 자기주장이 강하든가 아니면 열등감의 반발로 자기를 과시하려 할 때이다. 반대로 가지가 너무 빈약할 때는 환경과의 조화가 불충분하고 성격이 세심할 때이며 고목만을 그리면 자기 존재감이 약하여 불안감을 느끼거나 쓸쓸할 때이다. 나무보다 줄기가 더 굵을 때도 마찬가지로 내면적인 불안감을 감추려는 때이다. 나무를 많이 그리는 표현은 소유욕이 특히 강하고, 나무에 열매가 많이 달린 경우 여러 가지 색상으로 표현되었다면 부모의 간섭이 심하여 틀에 박힌 행동을 하는 어린이로 정서가 부족하다. 나뭇가지가 너무 짧게 그린 경우는 성격이 소심한 아이로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지 못하여 건전한 발달이 부족할 때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아동화의 교육 목적은 고른 정서의 발달과 상상력과 창조성, 관찰력의 향상을 목표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꾸지람은 절대 안 된다. 칭찬으로 일관하여 더욱 솔직한 표현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상을 받게 하기 위해서 하는 노력도 헛되다. 상을 주는 심사위원도 성인의 그림에 그 수준을 맞추는 어리석음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에서도 미술 교육은 전문성을 띄어야 한다.

  • 문화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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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5.24 18:07

전국 서예대전서 3관왕 달성…약사 서예가 은미덕 씨

은미덕 씨 붓글씨는 종이를 이기고, 붓을 이기고, 먹을 이기고, 마지막에는 마음을 이겨야 한다고 하더군요. 서여기인(書如基人)이라고 하죠. 글씨를 보면 제 내면의 마음을 들키는 것 같아 항상 부끄러웠어요. 그런 것들을 극복하려고 계속 붓글씨를 썼던 것 같아요.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 생각하면서. 제17회 전북서도대전 우수상을 시작으로 제21회 강암서예대전 우수상, 제33회 대한민국서예대전 우수상 등 5월 한 달간 전국 서예대전에서 3관왕을 달성한 은미덕(64) 씨는 약사 서예가다. 원광대 약대를 졸업해 약사로 일하는 그의 삶에 붓글씨는 천천히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은 씨는 그리움 때문에 붓글씨를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15년 전, 남편(권형철 전 전북대 의대 교수)이 미국 교환교수로 가게 돼 약국을 정리하고 동행했는데, 그 기간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한국에 돌아와 유품을 정리하면서 어머니가 개국을 축하하며 써주신 붓글씨를 발견하게 됐다. 그게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처음 붓을 잡았을 때 흰 종이에 먹물 떨어지는 모습이 환상적이었어요. 그렇게 빠져들어 일하면서도 계속 붓글씨가 쓰고 싶었어요. 전주 한솔요양병원에서 약사로 근무하는 그는 출근 전, 퇴근 후, 주말 등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붓글씨를 쓴다. 매일 서예학원에 가는 셈이다. 그런 그에게 서예학원은 놀이터나 마찬가지다. 그의 스승은 수암 김종대 서예가다. 은 씨는 훌륭한 스승을 만나 그 인연으로 오늘날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붓을 친구 삼아 걸어가라는 스승의 가르침 덕분이라며 수상은 걸어갈 때 돌부리에 걸리듯 부산물로 얻은 결과일 뿐이라고 말했다. 붓은 선(線)의 예술이지요. 선의 맛에 빠져, 남이 보지 못하는 선을 볼 수 있는 기쁨이란 말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내가 붓을 버리지 않는 한 붓은 절대로 먼저 버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어요. 앞으로도 붓을 친구 삼아 걸어가겠습니다.

  • 문화일반
  • 문민주
  • 2021.05.23 18:10

“동학농민군 독립유공자 아니라고 할 근거 없다”

동학농민군을 독립유공자로 예우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제기됐다. 20일 국가보훈처가 주최하고, 한국역사연구회가 주관해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한 심포지엄 동학농민전쟁의 민족운동사적 성격 검토에서 유바다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관련법을 비교하고 동학농민혁명군의 활동양상을 보면 기준에 부합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유 교수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을 살펴보겠다며 법안에 따르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항일무장 투쟁을 전개한 사람들이고, 독립유공자는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항거한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문구를 비교하면 일제의 침략과 일제의 국권침탈, 국권의 수호와 국권침탈의 반대, 항일무장투쟁과 일제의 항거는 같은 의미라며 즉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 독립유공자에 해당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국가보훈처가 제시한 기준도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 교수는 보훈처가 1986년에 펴낸 <독립유공자공훈록>을 보면 의병, 31운동, 광복군, 임시정부활동 등이 기준으로 제시됐을 뿐 동학농민전쟁은 없다며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의 기준을 1895년 을미의병으로 잡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국권침탈은 1894년 6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시작됐으며, 1895년 을미의병은 이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며 이 사이에 일어난 2차 동학농민전쟁도 같은 문제의식을 지닌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을미의병이 독립운동이라면 동학농민전쟁 또한 독립운동으로 봐야 한다고 부연했다. 실제 동학농민전쟁 참여자로 인정받은 농민군 3146명 가운데 21명이 31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확인됐다고도 밝혔다. 유 교수는 여기에 31운동을 주도한 손병희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설립한 김구 등이 포진한 상황을 볼 때 매우 유의미한 사례라고 설명했다. 또 학계에서는 이미 1894년 갑오 의병 서상철을 발굴했다며 같은 시기 일제에 항거한 동학농민군이 독립유공자가 아니라고 할 근거는 없다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지금이라도 동학농민전쟁 및 의병전쟁에 대한 현 학계의 연구 수준을 반영해 이들 모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는 새로운 심사기준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토론에 나선 고태우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동학농민혁명 관련법과 독립유공자 관련법의 적용 대상자(순국선열, 애국지사) 조항은 서로 맞닿아 있다며동학농민전쟁 참여자들은 충분히 서훈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비슷한 시기의 을미의병 참여자가 서훈 대상이 되는 점과 비교할 때, 동학농민군이 배제되는 것은 법적논리상으로 모순된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5.20 19:31

[김용호 전북도립국악원 학예실장의 전통문화 바라보기] 전주대사습놀이와 남원춘향제

우리나라 유명 시, 도에서 개최되고 있는 각 지역 축제는 지역주민들의 범위를 벗어나 타 지역의 방문객을 유치함은 물론 축제를 통한 지역 이미지 개선으로 지역경제의 중요한 원동력이 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지역문화의 발굴과 보존, 창의적 지역문화 창출로 지역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특화된 지역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그러한 축제는 대한민국의 시대적 문화 사명을 주도하게 되며 나아가 전통의 역사가 된다. 5월 현재, 전라북도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전주대사습놀이와 남원춘향제축제가 동시에 시행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전통문화, 전통예술의 본향으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와 남원시는 코로나19의 팬데믹 상황이지만 열의와 정성을 다해 안전한 축제를 모색하며 성실히 추진 중이다. 남원 춘향제는 2021년 5월 16일부터 19일까지 춘향제전, 춘향국악대전, 전국춘향선발대회 3종목만 축소되어 비대면으로 운영될 예정이며 전주대사습놀이 또한 5월 14일부터 31일까지 진행되는데 이 또한 공연, 전시, 체험을 제외한 비대면 중심의 국악경연대회만 치러진다는 계획이다. 코로나19의 어려운 상황이지만 방역을 충실히 계획하며 전주대사습놀이와 남원춘향제는 축제의 여러 프로그램 중 국악경연대회 개최를 선별했다. 현재 많은 전국의 전통예술경연대회가 코로나19의 상황으로 어렵게 진행되거나 혹은 연기되는 사례가 많다. 그럼에도 전라북도의 특화된 명인, 명창 등용문인 경연대회를 지키고자 함은 그 축제 속에 함축된 전라북도 전통예술의 존재가치 때문일 것이다. 이는 누구나 경연에 참여 할 수 있으나 누구도 쉽게 될 수 없는 명인, 명창의 자리를 전라북도의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와 남원시는 보존하고 역사적으로 계승하고자 함이다. 1995년 지방 자치제 실시 이후 우후죽순처럼 많은 축제들이 생겨났다. 지역의 전통성을 져버리고 개인 또는 집단 이기주의로 경쟁적인 이윤과 사욕 추구의 남발, 운영단체 소속 원들 간의 충돌 등이 유발되어 지역 주민의 자발적 참여가 부족해지거나 졸속적인 불명예 축제로 변해가며 많은 문제점을 낳고 있는 부분도 적지 않은 사실이다. 1931년 5월 잠든 민족혼을 깨우며 시작된 남원춘향제는 올해 91회를 맞이하고 있으며, 전주대사습놀이는 조선 후기에 성행했다가 일제강점기의 중단을 거쳐 다시 1975년 부활하여 올해 47회를 치루고 있다. 모두 100년이란 세월이 무색한 전라북도의 전통문화, 전통예술 축제들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숭고한 선조들의 정신과 애향심이 담긴 축제를 올곧게 견고히 다져 충실히 이어 나아가야 할 역사적 순간에 도래했다. 아프고 상처 났던 지난날의 이야기는 이제 잊어버리고 전라북도 전통문화 중심 그 역할을 함께 나누며 대한민국 문화 중심을 향해 함께 나아가야 할 것이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1.05.20 18:34

[임진왜란·정유재란 속의 전북] 전국단위로 활약한 전북의병

전북 임진왜란사를 논할 때 의병은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왜란당시 이 지역 의병은 전국적으로 처음 거병했으며, 정유재란까지 전국 단위의 전투를 치렀다. 현 전북지역을 포함한 전라도 중서부지역 16개 고을의 사림들이 문중과 가솔을 데리고 참여한 장성남문의병이 대표적인 사례다. 희생도 적지 않았다. 많은 의병들이 전사했는데, 2차 진주성전투에 참여한 의병들은 대부분 순절했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라도 점령을 주된 목표로 일으킨 정유재란 때는 호남 전역이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의병의 실상을 전하는 사료가 부족한데다, 경상도 중심의 의병연구 패러다임으로 인해 전라도 의병의 위상이 주목받지 못했다는 게 학자들의 평가다. 이번 기사에선 왜란초기 전북 의병의 활동양상, 장성남문의병의 전투, 전북 의병의 성격과 의의 등을 재조명한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직후, 4월 20일 순창에서는 유팽로가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는 순창 지역 민중들이 경상도 지역의 왜군 피해 소식을 접한 뒤, 민심이 흉흉해진 상황과 관계가 있다. 일부 민중들은 산속으로 숨어들어가거나 왜군의 편에 서려고 했다. 유팽로의 시문집 월파집에는 왜적의 기세가 승승장구했다. 부랑배들은 성을 미리 점령한 뒤 왜적에 붙으려고 했다고 나와 있다. 나종우 전북문화원연합회장(원광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사료를 보더라도 전라도가 왜군의 침략소식으로 상당히 동요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팽로는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광주의 고경명, 남원의 양대박, 순창의 양사형, 동복의 정약수 등에게 거병을 촉구했다. 이 때문에 김천일, 고경명과 함께 전라도 의병운동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반면 경상도는 4월 22일 의령에서 곽재우가 거병했으며, 뒤이어 합천에서 정인총, 거창에서 김면이 각각 거병했다. 고경명의 의병과 곽영이 이끄는 관군은 7월 9일 고바야카와 다카가게 군대가 점령하고 있던 금산성을 협공했다. 조선시대 금산은 전라도였다. 그러나 다음날 전투에서 관군이 무너지고 수세에 몰렸다. 의병 역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유팽로는 고경명이 탈출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적진에 들어갔는데, 결국 고경명안영과 함께 순절했다. 고경명의 아들 고인후도 이 싸움에서 전사했다. 이로부터 40여일 후인 8월 18일, 의병장 조헌과 영규대사가 이끄는 칠백의사들은 금산에서 다시 왜군과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모두 순절했다. 순창출신 의병장 한응성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두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모두 패했지만 전투의 성과는 높게 평가받고 있다. 고바야카와 군에게 타격을 입혀 전주성 공격을 저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금산성을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김경수는 7월 18일 종제 김신남과 아들 김극후김극순, 기효간, 윤진 등과 장성 남문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격문을 띄워 의병과 군량을 모집했다. 진용을 갖추는 데는 총 3개월이 걸렸다. 정읍, 태인, 고부, 고창, 흥덕, 무장, 부안, 금구, 순창 등 전라도 중서부 지역 16개 고을에서 의병 1620여 명이 운집했고, 군량 486석이 모아졌다. 참여한 신분도 다양했다. 지방 수령과 관군, 학연을 기반으로 하는 사림, 문중과 그에 딸린 가솔, 사찰승려, 노비 등이 의병에 자원했다. 한문종 전북대 사학과 교수는 장성남문의병은 학연과 혈연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신분계층을 초월한 의병 연합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장성남문의병은 3차례에 걸쳐 활동했다. 1차는 1592년 11월 24일 태인-전주-여산-천안-평택-안성-용인까지 북상했다가 1593년 2월 17일에 장성으로 돌아온 기간이다. 당시 의병장 김제민은 김홍우김신남 등과 의병 1620여 명을 이끌고 북상해, 직산진위소사에서 왜군과 싸워 전과를 올렸다. 이와 함께 장성 의병청에 머무르던 김경수와 기효간은 의주 행제소, 영남 곽재우 의병소 등 각 지역 의병소에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2차는 경상도로 진출해 진주성 싸움에 참여한 1593년 5월 29일~6월 29일까지의 시기다. 당시 김극후는 진주성으로 가서 의병장 김천일고종후 군과 합세한 뒤, 성을 포위하고 있던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당시 폭우로 진주성 동쪽 성벽이 무너졌고, 이틈을 타 왜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결국 장성남문의병 대부분이 순절했다. 한 교수는 전투는 패했지만 왜군에게 큰 손실을 입혔다며 이는 정유재란 이전까지 전라도를 보존할 수 있도록 한 계기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3차 의병은 정유재란시기 1597년 8월 16일부터 9월 10일까지 활동했다. 당시 의병의 목표는 북상해 왜군을 공격해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남문의병의 원한을 갚는 것이었다. 사료 남문창의록에 따르면, 의병대장 김경수는 종제 김신남에게 지난 임진난때 두 아들(김극후, 김극순)이 전사한 뒤부터 날마다 원수갚을 일만 생각해왔다며 의병 규합을 요청했다. 그 결과 3차 남문의병이 다시 결성됐다. 이들은 북상한 뒤, 경기도 소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고 조선인 포로 남녀 17여명을 구출하는 전과를 거뒀다. 3차 장성남문의병이 활동하기 직전인 1597년 7월, 왜군의 좌군대장 우키다 히데이에와 고니시유키나가는 구례와 운봉에 집결해 남원성을 포위했다. 당시 남원은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오는 관문으로, 조정에서도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전라병사 이복남, 방어사 오응정, 중군 이신방, 천총 장표 등 조명연합군은 방어에 나섰다. 의병은 박계성, 오흥업, 강복덕 등이 거느린 군대가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8월 13일부터 16일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완전히 궤멸 당했다. 그 결과 전라도민 2만4394명의 코가 잘려나갔고. 남원 도공들도 대거 잡혀갔다. 이와 함께 전라도 전역 대부분은 혼란 상태에 접어들었다. 같은 시기 부안고창 흥덕면 남당에서도 의병들이 해안 지역에 침투한 왜군들과 전투를 치열하게 벌였다. 당시 고창 의병장 채흥국과 평강채씨 문중 인사들, 고덕붕, 조익령은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은 뒤, 삽혈동맹을 맺었다. 이들은 호벌치에서 일대 혈전을 치렀으나 왜군을 격퇴하지 못하고 전사했다. 조원래 순천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무명의 향촌선비들과 농민천민승려계층이 하나로 결합, 최후까지 침략군에 대항하여 싸운 의병항쟁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평가했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5.20 18:11

‘제53회 전북미술대전’ 부문별 대상작 발표…출품작은 감소세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제53회 전북미술대전 부문별 대상작이 가려졌다. 한국미술협회 전북도지회는 17일 제53회 전북미술대전 부문별 수상작을 발표했다. 다만 올해도 코로나19 상황을 고려, 종합대상은 선정하지 않았다. 각 부문 심사위원들의 종합대상 선정을 위한 토의 절차가 이뤄지기 힘들다는 이유에서다. 올해 전북미술대전에는 10개 부문에 총 925점이 출품됐다. 2020년 957점, 2019년 1164점보다 감소한 수치다. 부문별로는 문인화가 352점으로 가장 많았고 서예 132점, 디자인 96점, 한국화 94점, 수채화 84점, 민화 55점, 서양화 42점, 공예 35점, 조소 24점, 판화 11점 순이었다. 이 가운데 대상, 우수상, 특선, 입선 등 입상작 589점을 선정했다. 올해 대상작은 6개 부문에서 나왔다. △한국화 부문 손경미 씨의 쉿!! △수채화 부문 정숙희 씨의 멍에 △조소 부문 박경덕 씨의 명제 공상가 △디자인 부문 이유나 씨의 LG퓨리케어 미니 신문광고 △서예 부문 정의방 씨의 만해선생시 △문인화 부문 박은영 씨의 국화1 등이다. 이외 서양화, 판화, 공예 부문은 출품작 수 미달로 대상작을 선정하지 않았다. 민화 부문은 대상작 대신 우수작 3점을 선정했다. 이승우 심사위원장은 코로나19로 인해 동아리 활동이 주춤해져서인지 예년에 비해 출품작 수가 다소 감소했다.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전북미술대전의 발전을 위한 출품작 확대 노력이 아쉽다며 예술성, 참신성, 충실성에 초점을 두고 심사에 임했다고 총평했다. 수상작은 1부2부로 나눠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전시실에서 선보인다. 17일부터 23일까지 한국화, 서양화, 수채화, 판화, 조소, 공예, 디자인, 민화 등 8개 부문을 전시한다. 이어 25일부터 30일까지 문인화, 서예 등 2개 부문을 전시한다. 이와 함께 운영심사위원, 초대추천작가 초대전은 21일부터 27일까지 전북예술회관에서 열린다.

  • 문화일반
  • 문민주
  • 2021.05.17 18:21

[이승우의 미술 이야기] 아동미술에 대하여 ⑤

김강민(5년 2개월), 내 엄마 아이들은 나이에 맞은 발달 과정을 겪는다. 무의미한 끄적거리기를 하다가 원이 나오고 원에서 팔다리가 나오는 두족화가 표현되고 7세쯤 되면 보이는 대로 그리기보다는 알고 있는 것을 그리는 시기로 아직 주관이 많이 앞서는 시기를 지나 집단을 이루려는 시기를 지나면서부터 그림을 잘못 그리는 것에 실망을 느끼게 된다. 어렸을 때는 엄마의 모습을 보지 않고도 곧잘 그렸는데 이제는 엄마를 수없이 쳐다보아도 도무지 그릴 수가 없다고 느낀다. 15세쯤 되면 잃었던 흥미를 다소 찾게 되는 부활의 시기가 찾아온다. 남자아이는 기술적이고 기계적인 표현에 흥미를 느끼고 여자아이는 색채나 선, 어여쁜 형상에 관심을 갖게 되어 장식적인 표현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아이들은 또 그림에 자기가 원하는 것이나 자신의 감정, 건강 상태, 환경 상태 등을 암시하기 때문에 유의하여 보면 지금의 처지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뭔가 점을 찍는 아이는 지금 불안하고 초조하다. 화장실에 간 여자아이가 안에 사람이 있어 볼일을 보지 못하면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거리는 것과 같다. 나타난 표현이 혼선일 때는 정신이 혼란한 상태를 나타내며 뭔가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이다. 옆으로 사납게 그어진 횡선은 도리질처럼 부정하는 것이고 긍정적일 때는 고개를 끄덕이듯 종선이 사용된다. 그 횡선과 종선이 잔잔하냐 아니냐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만약 어떤 인물을 그려놓고 그 위를 검은색이나 빨간색으로 거칠게 칠해 있으면 그 인물을 죽이고 싶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같은 빨간색이라도 부드럽게 사용할 때는 애정이 풍부한 경우이다. 꼭 알아야 하는 것으로는 신체의 세부를 크게 강조하는 경우 그 부분에 대한 혐오감을 말하거나 아픈 경우이다. 특히 귀를 더 크게 그리는 아이들이 많은데 이는 잔소리 때문인 경우가 많다. 아빠를 상징하는 것으로는 삼각형의 지붕이나 산, 태양, 해바라기 등이고 엄마를 상징하는 것으로는 둥근 산이나 지붕, 튤립 등이 있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1.05.17 18:21

전북민속예술축제 대상에 김만경외애밋들노래, 강호항공고 농악부

한국예총 전북연합회가 주최한 2021 전북민속예술축제에서 김만경외애밋들노래와 강호항공고 농악부가 대상을 받았다. 두 팀은 오는 10월 7일 충남 공주에서 열리는 제62회 한국민속예술제와 제29회 전국청소년민속예술제에 전북 대표로 출전한다. 지난 15일 열린 전북민속예술축제는 코로나19로 심사위원들이 현장을 방문해 심사하고, 순위 없이 대표팀만 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일반부에서는 전주 한우리농악단과 김제 김만경외애밋들노래, 모악예술농악단, 고창 태봉농악단, 순창 쌍치흙사랑풍물패가 열전을 펼쳤다. 청소년부에서는 고창 강호항공고 농악부가 참여했다. 심사 결과 일반부에서는 김만경외애밋들노래, 청소년부에서는 강호항공고 농악부가 전북 대표팀으로 선정됐다. 심사는 송화섭 중앙대 교수와 유지화(우도농악 무형문화재), 류명철(좌도농악 무형문화재), 소덕임(전북국악협회장), 황미연(전북문화재위원) 씨가 맡았다. 송화섭 심사위원장은 대회의 취지는 사라져 가는 우리의 민속예술을 발굴해 재현하고 이를 후손에 계승하는데 있다며 코로나19의 어려움을 딛고 주민들이 공동체를 이뤄 한마음으로 참가한 팀들이 많아 의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대상을 받은 김만경외애밋들노래는 원형이 잘 보존된 작품으로 지역성과 작품성이 뛰어났다고 평가했다. 소재호 전북예총 회장은 도내에는 소중히 보존하고 반드시 계승발전시켜야 할 민속이 많은데, 아쉽게도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거나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지방자치단체가 앞장서서 보존하고 계승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 문화일반
  • 문민주
  • 2021.05.16 18:02

전국대사습대회 전국대회 개최

국악 분야 최고 등용문인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가 2주동안 펼쳐진다. 전주시와 전주대사습놀이조직위원회는 오는 15일부터 31일까지 국립무형유산원, 전주대사습청, 전주덕진예술회관 등에서 제47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와 제39회 전주대사습놀이 학생전국대회 본선경연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올해 전주대사습놀이는 무용 일반, 판소리 명창, 민요 신인, 무용 신인, 기악, 판소리 신인, 고법 신인, 판소리 일반, 무용 명인, 가야금 병창, 민요, 시조, 농악 등 13개 분야로 나눠서 치러진다. 대회 예선경연은 코로나 19확산방지를 차원에서 장소를 분산해서 치러진다. 학생 전국대회 예선은 15일부터 29일까지, 전국대회 예선은 15일부터 30일까지 전주대사습청, 우진문화공간 예술극장, 국립무형유산원 야외극장, 전주덕진예술회관 등에서 열린다. 본선의 경우, 학생전국대회는 30일 국립무형유산원 대공연장에서 하룻 동안 치러진다. 전국대회는 26일 국립무형유산원 대공연장, 28일 전주대사습청, 31일 국립무형유산원 대공연장에서 열린다. 조직위원회 등은 대한민국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판소리 명창부의 장원에게 대통령상과 함께 상금 6000만원을 수여할 예정이다. 특히 경연심사 과정에서 투명성과 공정성 확보에 심혈을 기울일 방침이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5.13 18:56

[김용호 전북도립국악원 학예실장의 전통문화 바라보기] 대사산이 그리고 꿀빵

대사산이 정영만 망망한 남해 바다 위. 휘날리는 신장대를 품고 저 멀리 파도를 가르며 지나는 웅비의 어선 행렬. 뿌려지는 어망. 날아드는 기러기 떼. 그곳은 천혜 한려수도이자 남해의 진주.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는 통영이다. 통영시의 옛 명칭은 충무였다. 오랜 시간 충무라 부르며 다니던 필자로서는 맛도 이름도 변하지 않는 통영의 향토 음식 충무 김밥처럼 왠지 충무라는 옛 명칭이 더 정겹고 맛있는 사심(私心)이 있다. 충무공 이순신의 시호를 도시 이름으로 썼던 통영은 다도해를 중심으로 임진왜란 때 충청, 전라, 경상 삼도 수군을 통할하던 통제영이 상주한 지리적 요충지였다. 통영은 임진왜란 당시 이러한 지리적 요건과 기묘한 전술을 이용한 한산대첩으로 왜군을 크게 물리쳐 우리 선조들의 꿋꿋한 용맹과 패기를 널리 알리는 고장이었다. 또한 한국 저명한 예인들의 고향으로 윤이상, 박경리, 유치환, 김춘수 등을 낳았으니 통영이야말로 예향의 보배스런 땅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남해안 별신굿은 경상남도 거제도와 이곳 통영 일대 어촌 마을에서 행해지는 제의이다. 1987년 7월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82-4호로 지정되어 11대 세습무 정영만 대사산이(굿판의 유지와 장식 및 굿 음식 장만 등을 책임지며, 승방<굿을 주재하는 무당>을 가르치는 사람)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남해안 별신굿은 여느 별신굿처럼 마을의 평안과 풍농풍어를 기원하며 축원한다. 이러한 해원(解寃)에 화룡점정을 찍듯 무가와 무악은 굿판의 중요한 요소이자 빠질 수 없는 점정이다. 남해안 별신굿의 무가와 무악은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는 동해안 별신굿, 전라도의 씻김굿과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특이한 선율의 맥락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산을 오르며 흥얼거리는 듯한 동해안 별신굿의 메나리 토리도 아니요, 슬프고 애절한 전라도 씻김굿의 육자배기 토리만도 아니다. 경상도의 메나리는 울진, 포항, 부산, 거제 등 경상도 전역을 토대로 통영에 왔으며 전라도의 육자배기는 전주, 남원, 진도, 해남, 순천, 여수 등 전라도 전역을 거쳐 통영에 도달했다. 이렇듯 영호남 접경지인 통영에서 행해지는 남해안 별신굿은 지리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두 지역의 굿 음악 토리가 혼합되면서 독특하고 창의적인 선율을 형성하게 된다. 이렇듯 통영의 별신굿 속에는 다른 지역의 굿과 비교해 특별함이 많다. 특별함 중에 또 하나의 귀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먹을거리다. 여느 지역의 굿처럼 화려하고 풍성한 상차림은 물론이고, 굿 연희 중 필자와 같은 산이(남해안 별신굿의 악사를 칭하는 말)들이 먹었던 주전부리는 통영 꿀빵이었다. 이 꿀빵은 굿의 진행 과정 중 쉬는 틈을 타서 별신굿의 산이들이 먹었던 통영의 향토 음식으로 개인적으로 빵을 좋아하던 필자에게는 굿과 주전부리였던 꿀빵이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었다. 오늘날 통영의 꿀빵은 충무 김밥과 더불어 통영을 대표하는 향토 음식이 되었다. 지금도 유명한 통영의 중앙시장과 통영 지역 여러 곳에서 꿀빵이 다양한 종류로 판매되고 있는데, 필자가 별신굿을 배우러 왔던 1990년대에는 그 종류와 판매하는 곳이 많지 않았다. 통영의 꿀빵. 잔잔한 달콤함을 입에 물고 아쟁 활대를 그을 때에는 이미 소리 속엔 희락(喜樂)이 있었다. 이렇듯 꿀빵은 남해안 별신굿과 함께 달콤함과 즐거움으로 그렇게 필자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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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5.13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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