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후반까지 농촌에 근거를 두고 살아온 4·50대 이후 장·노년층이라면 아마 허리 구부리고 서럽게 넘었던‘보릿고개’를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풋보리가 익어가는 6월쯤이면 대부분의 농가가 양식이 바닥나 고구마나 감자 같은 구황작물(救荒作物)로 끼니를 떼우고 보리잎이나 자운영을 뜯어다가 희멀건 죽을 쑤어 연명을 했으니 그리 쉽게 잊혀질 것 같지가 않다.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입에 풀칠이나 하던 그 시절에 쌀밥은 땅섬지기나 소작으로 내놓던 지주집에나 가야 구경할 수 있었지 대다수 서민들은 보리밥이라도 배 안곯고 먹는게 목전의 소원이었다.
아침 한끼니 해결하기 위해 X지게 짊어지고 남의 집 푸세식 변소를 여남은번씩 들락거렸다고 한다면 “라면이라도 사다 먹지 왜 굶었느냐”고 묻는 요즘 아이들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있을까?
헌데 근래 쌀이 남아돌아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고 보릿고개시절 천대받던 보리쌀과 고구마가 상종가를 치고 있다니 참으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하기야 먹을 것이 지천으로 널린 세상에 쌀이 귀할리가 만무하겠지만 고구마와 보리쌀 값이 각각 1kg에 3천6백원과 2천3백원선을 넘어 1kg에 2천2백원인 쌀값을 추월했다니 세상 참달라져도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쌀이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면서 우리는 또다른 걱정거리를 떠안게 됐다. 5년 연속 풍년이 든데다 쌀 소비량마져 감소해 현재 쌀 재고량이 7백50만섬에 이르고 있고 올 생산량까지 합치면 무려 1천만섬을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는 유엔식량농업기구가 권고하는 적정재고량은 6백만섬을 66%나 초과한 수치다. 이 때문에 쌀값이 떨어져 창고에 잔뜩 벼를 보관하고 있는 미곡종합처리장들이 부도위기에 내몰리고 농민들도 쌀을 팔곳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잇따고 한다.
게다가 오는 2004년에는 WTO체제하에서 관세화를 전제로 한 쌀수입 전면개방 여부를 재협상하기로 돼있다. 자칫 일이 잘못되면 우리 쌀농사는 조종(弔鐘)을 울리게 된다. 7천만 민족의 주식이요, 농민의 주소득원인 논농사를 버리고 우리 민족이 과연 세세손손 살아남을 수 있을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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