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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주보기] 디스토피아의 문턱에서, 인간의 윤리를 묻다

오늘날 예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기술이 인간의 삶을 재편하고, 권력이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세계를 조직하는 시대에 여전히 예술은 그 역할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가. 아니,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예술이 가장 본질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할 순간이 아닐까. 서울에서 태어나 캐나다로 이민 간 윤진미 작가가 제1회 김병종미술상을 수상한 소식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하나의 응답으로 읽힌다. 윤진미는 오랜 시간 군사문화와 국가 권력, 감시 체계가 개인의 신체와 기억에 어떻게 각인되는지를 탐구해 온 작가다. 그의 작업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기술과 권력이 결합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통제의 구조를 추적한다. 특히 이미지와 영상, 퍼포먼스를 통해 구성되는 그의 작업 세계는 ‘안보’와 ‘질서’라는 이름 아래 작동하는 권력의 메커니즘을 가시화한다. 더 나아가 그는 기술과 권력이 결합할 때 형성되는 잠재된 디스토피아를 드러내며,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시스템을 낯설게 만든다. 이는 단순한 비판을 넘어 관객 스스로 질문하도록 만드는 장치이다. 결국 그의 작업은 묻는다. 기술과 권력의 시대에 인간의 생명과 자유는 어떻게 지킬 수 있는지를. 이 질문은 예술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지난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인공지능 ‘클로드(Claude)’ 개발사인 앤트로픽(Anthropic)의 기술 사용 중단을 지시한 사건은 기술과 윤리의 문제를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미국방부가 최근 중동지역의 군사적 충돌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인공지능의 군사적 활용 확대를 요구했지만, 앤트로픽은 이를 거부했다. 그 배경에는 분명 윤리적 판단이 있었다. 오늘날 인공지능 기술은 국제사회의 질서를 재편할 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안전하고 책임 있는 인공지능’을 내세우며 기술의 활용 범위를 스스로 제한하려는 앤트로픽의 태도는 기술이 지향해야 할 하나의 기준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기업의 선택을 넘어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경계하는 윤리적 실천이다. 이처럼 기술이 스스로의 한계를 성찰할 때, 예술 역시 그에 상응하는 역할을 요구받는다. 윤진미의 작업이 시사하듯, 예술은 기술과 권력이 결합하는 지점을 비판적으로 드러내고, 우리가 놓치고 있는 감각을 일깨운다. 결국 인공지능 기업의 윤리적 선택과 동시대 미술의 비판적 실천은 서로 다른 영역에 놓여 있으면서도 동일한 시대적 요구에 응답하고 있다. 기술이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지금 우리는 그 변화의 방향을 예술과 함께 성찰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올해 11월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에서 열리는 제1회 김병종미술상 수상자 전시는 단순한 지역 행사를 넘어 사회적 질문을 생산하고 공유하는 공론의 장이 될 것이다. 미술관은 동시대의 문제들을 사유하는 작가들과 함께 시대와 호흡하는 담론의 장을 형성한다. 지역과 세계를 잇는 교류, 새로운 매체 기반 전시의 확장, 동시대 이슈를 반영한 기획은 미술관이 세계적 수준으로 도약하기 위한 중요한 시도다. 지역성과 세계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은 고유한 정체성을 구축하며 국제적 담론에 참여하는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기술과 권력의 결합이 치밀하게 구조화돼 가는 오늘날 인간의 생명과 자유를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디스토피아의 문턱에 서 있는 지금, 이러한 질문을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의 역할이자 미술관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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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3.23 18:01

[문화마주보기] 초상화, 시간을 넘어선 공감의 순간

1713년, 조선 19대 임금 숙종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렸다. 임진왜란 이후, 살아 있는 왕의 얼굴을 직접 보고 초상화를 그리는 일은 처음이었기에 그 진행 과정이 녹록하지는 않았겠지만 비교적 매끄럽게 이루어졌다. 25년 전인 1688년에 경기전의 태조어진을 모사하는 사업을 했었는데, 그 과정이 <태조어진모사도감의궤>(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상세히 기록된 덕분에 참고가 되었기 때문이다. 1688년 경기전의 태조어진은 1410년에 그려진 것이었다. 경기전에서 한양으로 이안(移安)하여 모사한 뒤 완성본을 영희전에 모셨다. 세월이 흘러 영희전 어진이 퇴색하자 1872년에 다시 모사 사업을 벌였는데, 예전에 원본이 되었던 경기전의 어진 또한 오래되어 낡았으므로 한 본을 더 모사하여 경기전에 봉안하고 구 어진은 세초(洗草)하여 묻었다. 이 때 새로 봉안된 초상화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태조어진〉(어진박물관)이다. 전신상으로 온전하게 남아 있는 유일한 왕의 초상화, 건국 초기에 제작되어 두 번의 모사를 통해 전승된 역사의 산물이며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이 초상화 덕분에 무려 600여 년 전의 인물인 태조의 실제 모습을 지금 우리가 마주한다. 〈태조어진〉의 이성계는 조선의 창업군주로서 화려하고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당당하게 정면을 직시하는 모습은 한 치의 고민도, 흔들림도 없는 군왕의 카리스마를 내보이며, 그의 왕조가 영원토록 굳건할 것임을 웅변한다. 소매가 좁은 청색 포(袍)에 금실로 직조한 용보(龍補)는 고려의 영향이 남아 있는 복제(服制)이다. 반복적인 무늬와 색채가 돋보이는 채전(彩氈), 금빛 용을 그려 넣은 어탑(御榻) 등은 정치하고 세련된 화가의 솜씨다. 원본을 거의 그대로 옮겨 그리는 초상화 모사의 전통을 생각해 볼 때 1688년, 숙종 시기 어진의 품격 또한 유추할 수 있다. 어진 제작은 지금의 사업추진단이나 집행위원회 격인 한시적 조직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진행한 큰 사업이었다. 그런 만큼 사업을 벌인 연유가 단지 ‘초상화가 낡아서’만은 아니었을 터다. 어진을 모사하기 위해 원본을 한양으로, 완성본을 다시 봉안처로 이안하는 행렬은 예를 갖춘 위엄 있고 웅장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그림 그리는 일을 넘어서는 정치적 기획이었고, 행렬을 직접 보는 신하와 백성들의 반응을 의식했을 거라는 이야기다. 창업군주의 위엄을 빌어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후대 왕들의 기대를 짐작할 수 있다. 태조의 어진은 숙종과 고종이 기대했을 완벽한 왕의 초상화로 완성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우리는 고뇌를 가진 한 사람으로서 이성계(1335~1408)의 삶 또한 알고 있다. 그는 73년의 생애 중 왕으로 7년, 형제들의 골육상잔을 겪은 뒤 상왕과 태상왕으로 10년을 보내고 세상을 떠났다. 조선시대의 뛰어난 초상화는 사람의 외모뿐만 아니라 내면까지도 표출할 것을 요구받았다. 초상화를 통해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마주하고 성찰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적 아픔이 다 감추인 채 흠결 없는 군주의 모습으로 정좌한 〈태조어진〉은 어찌 보면 자신의 일부를 잃어버린 슬픈 초상화가 아닐까. 그 순간 정면을 직시하는 시선이 따뜻해 보인다. 눈이 마주친 듯, 과거의 유산이 말을 걸어오는 놀라운 순간이다. 세상이 기대하는 모습으로 열일 중인 왕의 초상화 앞에서 왜인지 모를 뜻밖의 위로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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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3.16 18:23

[문화마주보기] 기심과 인심

『장자』의 ‘천지’편에는 자공이 남쪽을 여행하다가 한 노인을 만나 나눈 이야기가 있다. 그 노인은 물동이를 안고 우물 속을 오르내리며 물을 길어 밭에 붓고 있었다. 힘만 들뿐 성과는 뻔했다. 자공은 도르래와 지렛대로 두레박을 쓰면 훨씬 수월할 것이라며 권유했다. 그러자 노인은 말한다. “기계가 있으면 기계로 할 일(機事)이 생기고, 그 일이 쌓이면 기계에 기대는 마음, 곧 기심(機心)이 생긴다. 그렇게 되면 마침내는 순백한 마음이 온전하지 못하고, 정신(神)의 생성이 안정되지 못한다.” 이 짧은 대화는 기술사용에 따른 사람의 마음과 태도를 잘 나타낸다. 이 대화에서 기심이란 단순히 도구를 사용하는 태도보다 더 넓게 해석한다. 계산, 효율, 통제, 성과를 우선으로 삼는 습관적 사고까지 포괄한다고 본다. 세상의 일과 방법을 관계의 장이 아니라 조작 가능한 효율 만능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대하여 노인의 말을 빌려서 경계한다. 그런데 장자에서 경계한 것은 편리함이 아니라, 편리함이 가져오는 심성의 방향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AI라고 하는 사회기술 ‘두레박’을 쓰고 있다. 여기서 알고리즘은 판단을 보조하고, 데이터는 결정을 빠르게 하도록 돕는다. 의료, 금융, 교육, 예술에 이르기까지 AI는 인간생활에 깊숙이 들어 왔다. 편리해진 것은 분명히 진보다. 그러나 지나치게 의존하면 사고의 근육이 약해지고, 책임 감각도 흐려진다. AI가 추천한 것을 의심 없이 따르고, 자동화된 평가를 객관적이라 믿으면, 우리는 기심의 체계 안으로 서서히 끌려 들어가는 꼴이다. 효율은 커지지만 성찰은 줄어든다. 이에 맞서는 태도를 인심(人心)이라고 보자. 이는 인간의 숙고와 공감을 중심에 두는 마음이다. 인간 중심의 독선이 아니다. 이때도 기술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속도를 즐기되 방향을 점검한다. 숫자를 참고하되 그 의미를 질문한다. 인심은 자동화의 흐름 속에서 잠시 서서 묻는 힘이다. “이 결정이 우리를 과연 더 인간답게 만드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기심과 인심은 적대가 아니라 긴장 속에서 이뤄내는 균형이다. 기술을 요모조모로 쓰지만 마음의 주권은 꼭 움켜주고 있어야 한다. 기계를 다루되, 기계에 마음을 맡기지 않도록 훈련해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AI는 인간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인간성을 확장하는 매개가 된다. 땀을 뻘뻘흘리며 우물을 드나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물을 길어 올릴 때 갖는 마음의 방향이다. 여기서 인심이 뜻하는 바는 AI윤리에 닿는다. AI 윤리는 따라서 기술 통제의 목록이 아니라 마음의 훈련이어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기사의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는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한다. 알고리즘의 결정이라 할지라도 설명하고 수정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그 다음은, 데이터와 모델의 한계를 공개하는 투명성이 필요하다. 완벽한 예측이라는 환상을 걷어낼 때, 인심이 산다. 끝으로 관계적 관점이 중요하다. 기술은 인간을 고립된 사용자로 만드는 대신, 상호 신뢰를 증진하는 매개가 되어야 한다. 『장자집석』을 펴낸 곽경번은 책 서문에서 “오늘날 기계와 기교는 두레박보다 만 배나 더 많다. 만약 장자가 이를 보았다면 어떠했겠는가”라고 개탄을 한다. 노인은 두레박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이 도구에 예속되는 상태를 우려했다. AI 역시 거부의 대상이 아니라 성찰의 대상이다. 우리는 속도를 늦추지 못하더라도, 방향을 점검할 수는 있다. 무엇을 더 많이 생산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공동체를 형성할 것인가를 묻는 태도, 기심을 넘어서서 공진화하는 윤리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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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3.09 19:13

[문화마주보기] 장수 트레일레이스와 ‘산촌 산업혁명’

장수군의 험준한 산맥과 굽이치는 능선은 오랫동안 ‘단절’의 상징이였다. 하지만, 지금 장수의 능선은 수천 년의 시간이 축적된 가야 문화의 숨결과 태고의 원시림을 잇는 가장 뜨거운 ‘기회의 길’로 변모하고 있다. 18세기 증기기관이 기계의 힘으로 자본주의의 꽃을 피웠다면, 21세기 장수는 인간의 정직한 발걸음을 동력 삼아 새로운 형태의 ‘산촌 산업혁명’을 준비 중이다. 이 혁명의 중심에는 오직 달리기에 미친 젊은 청년의 도전이 있었다. 모두가 고개를 저을 때 장수의 거친 지형을 지역 소멸의 원인이 아닌, 세계 어디에도 없는 ‘천연 자산’으로 통찰했다. 그가 일궈낸 ‘장수 트레일레이스’는 2022년 9월 첫 대회 이후 4년 만에 대한민국 아웃도어의 판도를 바꿨다. 매년 신청 개시 수 분 만에 3,000명의 유료 참가자가 매진되고, 연간 1만명 이상의 유동 인구가 장수를 찾는다. 세계 최고 권위인 UTMB 인덱스 대회로 공인받으며, 이제 장수의 길은 전 세계 트레일러들이 열광하는 글로벌 스탠다드의 길 중에 하나가 되었다. 이는 모타니 고스케가 이야기한 ‘산촌 자본론’이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외부의 거대 자본에 의존하는 대신, 지역의 숲과 물, 그리고 ‘시간’이라는 무형의 자산을 활용해 경제적 자립을 이루는 모델이다. 특히, 최근의 건강지능(HQ)의 시대는 장수에 거대한 기회를 제공한다. AI가 지능과 감성을 대체하는 시대에, 현대인들은 역설적으로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날것의 감각’에 열광한다. 자신의 근육이 비명 지르는 소리에 집중하고, 흙 내음을 맡으며 건강 지능을 높이려는 욕구는 장수의 험준한 산악 지형을 가장 비싼 체험 상품으로 탈바꿈 시키고 있다. 이제 장수군은 이 레이스의 성공을 실질적인 ‘산촌 산업혁명’으로 연결해야 한다. 스페인 ‘제가마’가 트레일 레이스를 마을 모두의 연례 행사로 준비하며, 1등만이 아닌, 마지막 선수가 들어올 때 샴페인을 터트리고, 축제가 시작되듯이, 장수군 모두의 축제로 준비해야 한다. 또한, 산업적 측면에서는 프랑스의 ‘샤모니’가 UTMB를 통해 노스페이스, 살로몬 등 글로벌 브랜드의 R&D 거점이 되었듯, 장수 역시 스포츠 이벤트를 넘어선 ‘비즈니스 생태계’ 구축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국내외 유수의 업체들이 장수를 주목하는 지금이 적기이다. 대기업과 아웃도어 실증랩을 통해, 장수의 지형을 테스트베드 삼아 웨어러블 기기와 장비를 개발할 수 있는 연구소와 스타트업 단지를 유치하고, 장수형 K-바이오 푸드를 통해 장수 레드 푸드를 스포츠 영양학적 관점의 고기능성 에너지 젤 및 헬스 케어 음료로 고도화 해야 한다. 또한 로컬 웰니스 스테이 특구를 조성하여, 빈집을 리모델링하고, 1년 내내 트레일러들이 머물며 훈련하고, 재활할 수 있는 전문 캠프 인프라를 확충함으로써 관계 인구를 정주 인구 수준의 경제 동력으로 활용해야 한다. 장수가 주도하는 산촌 산업혁명은 기계 문명에 지친 인류에게 건강한 대안을 제시하는 동시에 지역 소멸의 위기를 돌파하는 로컬 비즈니스의 교과서가 될 것이다. 장수의 산등성이는 이제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겁고 건강하게 고동치는 심장이다. /이수영 전북창조경제혁신센터 특화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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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3.02 18:55

[문화마주보기] 인공지능 시대, 예술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이미지는 넘쳐난다. 몇 개의 단어만 입력하면 인공지능은 순식간에 그럴듯한 그림을 만들어낸다. 속도는 놀랍고 결과는 정교하다. 알고리즘은 학습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가장 적합한 형상을 추출한다. 우리는 그 기술의 편리함과 효율성에 감탄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항상 질문이 남는다. 그렇게 생성된 이미지는 과연 ‘예술’일까. 내달 초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에서 열리는 기획전 《김병종의 드로잉: 그럼에도》는 이 물음에 대한 하나의 방향을 제시한다. 드로잉은 단순한 선(線)이 아니라, 오랜 사유와 반복된 몸짓이 겹겹이 스며 있는 시간의 흔적임을 보여준다. 일필휘지로 그어진 한 줄의 선은 순간의 번뜩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수십 년에 걸친 수행과 숙련의 세월이 응축돼 있다. 그것은 계산된 결과가 아니라 사유의 깊이를, 속도가 아니라 밀도를 드러낸다. 나는 오래전 한 평론에서 드로잉을 “몸이 기억하는 언어”라고 쓴 적이 있다. 생각이 완성된 뒤에 그려지는 선이 아니라, 그리는 과정 속에서 사유가 형태를 얻는 행위라는 뜻이었다. 손은 머리의 지시만을 따르지 않는다. 축적된 시간과 감각이 손끝에서 스스로 길을 찾는다. 그래서 한 줄의 선에는 주저함과 결단, 망설임과 비약이 동시에 스며 있다. 그 복합적인 시간의 결이 화면 위에 고스란히 남는다. 인공지능이 데이터를 조합해 이미지를 산출한다면, 인간의 손은 체험과 감각, 망설임과 결단을 거쳐야만 작품을 남긴다. 화면에 남은 미세한 압력의 차이, 호흡의 흔들림, 멈칫한 흔적들은 완벽하지 않기에 오히려 더 생생하고 가치 있다. 그 불완전성은 오류가 아니라 살아 있음의 증거다. 예술은 데이터의 축적만으로 탄생하지 않는다. 예술은 손의 밀도가 켜켜이 스며든 자리에서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이른바 ‘손맛’이 살아 있는 작품에는 한 인간이 살아온 시간의 층위와 감각의 온도가 담겨있다. 그 온도는 보는 이의 마음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켜 설명하기 어려운 감동을 주고, 때로는 위로와 치유를 안겨준다. 감동을 주지 못하는 예술은 아무리 형식이 완결되어 있어도 생명력이 없다. 생명력이 있는 예술만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우리 내면의 결을 다시 다듬는다. 기술은 점점 더 정교해지고 인간의 표현 방식을 모방한다. 그러나 예술의 출발점은 여전히 인간의 몸에 있다. 손끝의 감각은 계산될 수 없는 생명의 떨림을 만들고, 그 떨림은 단순한 형상을 넘어 생기를 획득한다. 닫히지 않은 형상은 미완이 아니라 생성의 과정이며, 여백은 결핍이 아니라 가능성을 품은 사유의 장이다. 이는 채움보다 비움을 통해 본질에 다가가려는 한국적 미의식과도 맞닿아 있다. 물론 기술을 거부할 수는 없다. 알고리즘은 이미 우리의 일상이 되었고, 예술 은 언제나 동시대 매체와 호흡해왔다. 인공지능은 붓이나 물감처럼 예술가가 다루는 또 하나의 창작 도구일 뿐이다. 백남준이 당대의 보편적 기술이던 영상과 텔레비전을 새로운 예술언어로 전환했듯, 예술가가 디지털 시대는 디지털 기술을 인공지능 시대는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다. 예술가가 동시대의 기술로 창작에 임할 때 동시대의 삶과 당면 문제를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술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예술의 출발점이다. 예술은 계산에서 비롯되는가, 아니면 몸짓과 사유가 축적된 손의 밀도에서 시작되는가. 인공지능이 아무리 정교한 이미지를 생산할지라도, 한 줄의 선에 깃든 인간의 떨림까지 재현할 수 있을까.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의 《김병종의 드로잉: 그럼에도》는 ‘생명의 화가’ 김병종의 드로잉을 통해 예술의 기원을 다시 묻는다. 예술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그 시작은 속도나 계산이 아니라 시간과 사유가 켜켜이 쌓인 손의 밀도에 있음을. 그리고 그 한 줄의 선이야말로 존재의 깊이를 드러내는 자리임을 말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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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2.23 19:09

[문화마주보기]순간이 쌓여 역사가 된다

지금 국립전주박물관에서는 “대한국인 안중근 쓰다”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형 집행을 앞두고 옥중에서 쓴 안중근 의사의 서예 작품을 통해 그의 일생과 신념을 살펴보는 전시다. 전시의 마지막에 관람객은 안중근의 글씨가 아닌 한국 천주교의 첫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의 도자기 지석을 마주하게 된다. 두 사람은 1791년(신해년) 전주 남문 밖, 지금의 전동성당 터에서 순교했다. 신앙과 순교의 지고함 속에서, 죽음 앞에서도 초연했던 안중근 의사의 신념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박물관은 첫 순교자가 나온 땅, 전북 지역의 천주교 역사를 바탕으로 안중근 의사의 유묵을 오버랩하는 전시로 이 특별전을 기획했다. 역사는 1791년의 순교 사건을 신해박해라 부른다. 도자기 지석은 2021년 완주에 있는 초남이 성지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두 순교자의 지석과 유해가 발굴되는 과정은 놀라웠다. 묘소가 어딘지 위치조차 잃어버린 박해의 역사 속에서, 이름과 태어난 해, 본관, 매장 일시 등을 적은 열여덟 글자의 귀한 기록이 살아남아 유해의 주인이 윤지충과 권상연, 두 순교자임을 증언했다. 다른 지석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도 눈에 띈다. 윤지충의 지석과 권상연의 지석에 각각 적혀 있는 “권공묘재좌(權公墓在左, 권상연 공의 묘가 왼쪽에 있다)”, “윤공묘재우(尹公墓在右, 윤지충 공의 묘가 오른쪽에 있다)”. 이 다섯 글자는 한날 한 시에 함께 순교한 사람이 옆에 묻혀 있음을 알려주는 유일한 기록이다. 두 사람은 내외종간으로 윤지충의 어머니는 권상연의 아버지와 남매간이다. 순교자의 묘소와 유해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몰랐던 상황에서, 땅속 깊이 묻힌 유해가 혹여라도 드러나게 되었을 때 가까운 친척인 두 사람이 함께 발견될 수 있도록 안배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어 애틋하다. 사실 누군가 비장해 오던 선조의 편지라든가 외국의 작은 박물관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된 우리 옛 서화, 땅속에 묻혀 있거나 심지어 바다 깊이 잠들어 있다가 발굴되는 수백 년 전의 도자기 등 어느 시대든지 역사의 ‘새로운’ 조각이 갑자기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있다. 전주만 하더라도 청동기를 만들던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전북 지역의 중심지라는 지위를 놓은 적이 없는 역사적인 도시다. 그만큼 언제 어디서든 새로운 자료가 불쑥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후백제 도성 유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종광대만 해도 그렇다. 조금씩 드러나는 시대의 흔적들을 모아 역사를 복원하고 맥락을 밝혀 문화적 의미와 가치를 쌓아 올리는 것이 박물관의 역할이기에 새로운 자료의 출현은 늘 절실하다. 어느 시기의 무엇이 나올지 예측할 수 없지만, 지금도 어디선가는 새로운 유적이 드러나고 유물이 발견된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지역의 역사를 증언하는 자료이자 문화적 자긍심을 높이는 보물이 될 귀한 유산이다. 박물관에서는 두고두고 무한대로 활용할 소장품이며, 현대의 눈높이에 맞는 문화 콘텐츠로 개발하여 후대에 물려줄 미래 자산이기도 하다.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기적처럼 살아남은 종광대가 그렇듯이 200년이 넘은 전북의 천주교 역사도 머지않은 어느 날 우리 역사의 한 갈래로 박물관 전시실에 새롭게 자리 잡을 것이다. 시간은 흘러가고,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는 역사가 된다. 박물관 전시도 켜켜이 그 시간을 쌓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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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2.09 17:42

[문화마주보기] HAI 시대, 지역사회 감응에도 주목

출판을 앞두고 작업 중인 시집에 추천서를 써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시인이 아닐뿐더러 그 작가를 알지도 못하는 나더러 왜 쓰라고 하는지 물었다. 이 책은 시인이 시를 쓰고, 시 하나하나마다 AI가 평론을 하는 독특한 방식인데 내가 적합할 것으로 생각되어 부탁한다는 것이다. 당황스러움을 싸맨 채 며칠간 생각을 쥐어짜고 있다. 요즘 시간개념으로는 꽤 오래 된 8년전, 나는 ‘4차산업과 소셜디자인 문화전략’에서 인간지능과 인공지능이 결합된 형태(HAI)가 어떻게 진화할 지를 3단계로 설명한바 있다. 대략 양적인 확장 -> 인간활동 대체 -> 위임과 같은 외부화로 진화할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지금 이 시집은 바로 HAI 합작품으로 구성됐고, 마지막 단계인 AI에 위임해 외부화된 평론이 당당하게 함께 자리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 우리는 매우 ‘숙련’되고 ‘보편화’된 AI를 끼고 산다. 많은 일들을 AI에 맡기고 있다. 컴퓨터가 두뇌를, 로봇이 몸 대신 위임받은 일을 잘 해준다. 이처럼 누구나 편히 쓰는 범용인공지능(AGI) 시대를 누리려면 인간의 창의성과 통합해서 수행하도록 세심히 관리해야 한다. 인간지능(HI)과 인공지능(AI)이 결합한 ‘HAI의 공진화’로 나아가는 지능사회를 위해 투명하고 책임 있는 시스템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일상생활의 인지보조, 스마트홈, 웨어러블에서 HAI 통합이 이뤄질수록 신뢰는 더욱 절실해진다. 지속발전을 위해 디지털 플랫폼을 기반으로 하는 협업시스템 구축이 중요하다. 특히 지역사회에서라면 이런 사회적 관계망의 중심에서 공동 대응을 할 협력구조가 핵심 아닐까? 특히 분산형 협력의 기술적 토대인 디지털 플랫폼은 지리・언어・문화적 경계를 넘어 다양한 주체가 지식・자원・기술을 공유 협력하는 새로운 사회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코로나19 뒤에 원격 협업 시스템, 온라인 공동창작, 오픈소스 기반 프로젝트가 급속 확대됐다. 시간・공간・인간에 구애받지 않는 ‘협력공진화’ 모델이 현실적으로 가능함을 잘 봤다. 지금 이 같은 AI전환의 시대에 지속가능한 미래를 보장하는 것은 혁신과 신뢰의 균형이다. 신뢰를 위한 활동 주체들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이처럼 우리는 인간과 기술이 서로의 숨결을 감지하는 시대에 산다. 앞에서 말한 HAI와는 다른 HAI(Human–AI Integration)가 요구된다. 그저 말장난으로 쓰는 것이 아니다. 단순한 기술융합을 넘어, 인간 사회 전체의 감응체계가 다시 짜여지는 조용한 혁명을 맞고 있다는 말이다. 앞에서 말한 1, 2단계에서의 AI는 효율과 예측의 도구로 여겼다. 이제 그 역할은 훨씬 더 섬세하고 관계적이며, 사회적 감정의 층위까지 비추는 ‘조감 장치’가 되어가고 있다. 기술이 인간의 감각을 대신하는 시대가 아니라, 인간의 감응을 확장시키는 시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감응성’에도 주목해야 한다. 특히 지역사회적 감응이라면, 한 지역사회가 변화의 흐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감정으로 해석하며, 어떤 방식으로 공동의 행동을 선택하는가를 뜻한다. 이는 경제나 제도의 문제를 넘어, 사회의 결을 이루는 정서적 지능이다. ‘휘몰이 충격’의 구조적 변화는 모두 감정의 파동을 동반한다. 그러니 감응을 읽지 못하는 지역사회는 변화를 관리할 수 없고, 감응을 외면한 정책은 설득력을 잃는다. 이제 시대는 숫자보다 정동을, 통계보다 감응을 보라고 말한다. 언제까지 소멸 타령이나 하고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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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2.02 19:03

[문화마주보기] 전북 문화기업의 성공조건: 인내자본과 문화액셀러레이터

우리가 평소에 접하는 물건들은 저마다 ‘가격표’를 달고 있다. 편의점에서 사는 생수 한병, 서점의 베스트셀러 소설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단순히 가격표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를 품고 있다, 낡은 고택, 명창의 판소리 공연, 혹은 방탄소년단(BTS)의 뮤직비디오가 그렇다.세계적인 문화경제학자 데이비드 트로스비는 문화가 가진 이 특별한 비밀을 두 개의 가치라는 틀로 명쾌하게 설명했다. 바로 가격표 뒤에 숨겨진 또 다른 가치를 설명한 것이다. 트로스비는 문화상품에는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문화적 가치’가 하나 더 있다고 말했다. 이는 크게 다섯가지 요소로 나뉜다. 미적가치는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아름다움이며, 영적 가치는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고 정신적인 풍요를 주는 힘이다. 사회적 가치는 공동체에 소속감을 주고 서로를 연결한다. 역사적 가치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정체성의 뿌리 역할을 한다. 상징적 가치는 특정 시대나 정신을 대표하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트로스비 이론의 또 다른 핵심은 ‘문화자본(Cultural Capital)’이다. 보통 자본은 은행의 예금, 공장의 기계를 떠올리지만, 문화 역시 자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문화적 가치가 꾸준히 쌓이면 하나의 커다란 ’자산‘이 된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전통유산이 오늘날 K-콘텐츠의 뿌리가 되어 거대한 경제적 이득을 창출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즉, 지금 우리가 문화를 보존하고 향유하는 행위는 단순히 돈을 쓰는 소비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 저축하는 투자인 셈이다. 전북은 자타가 공인하는 문화적 인프라가 뛰어난 지역이지만, 정작, 지역을 대표할 만한 ’문화 유니콘 기업‘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지역 내 문화 자산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경제적 자본으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죽음의 계곡‘을 건너게 해줄 통합적 지원시스템이 없기 때문이다. 문화적 가치는 아카이빙과 진정성을 통해 서서히 문화자본이 되지만, 시장이 요구하는 경제적 가치는 즉각적인 매출과 지표로 증명되어야 한다. 문화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는 시간차가 있다. 이 시간의 간극을 견디지 못할 때, 잠재력 있는 문화기업들은 스케일업의 문턱에서 좌절하게 된다. 전주에서 무형문화재의 서사를 현대적 콘텐츠로 기록하면서 창업과 초기 투자유치도 성공했던 한 문화기업은 이후 매출 등의 지표를 중요하게 여기는 후기 투자로 넘어가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이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통을 기반으로 하는 문화기업은 브랜드의 깊이를 만드는데 시간이 걸리지만, 일반적인 벤처캐피탈, 액셀러레이터들은 단기적 회수율을 더 요구한다. 결국, 문화적 자본이 경제적 자산으로 완전히 만개하기 전, 투자의 시계가 멈춰버리는 셈이다. 전북에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단순히 창업지원금을 주는 것이 아니다. 문화적 가치의 중요성을 깊이 이해하며, 경제적 가치가 궤도에 올라올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는 ’문화 특화 액셀러레이터‘와 ’인내자본‘인 것이다. 진정한 문화수도가 되기 위해서는 문화기업이 가진 이중적 가치를 품어주는 통합 지원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그 가치를 알아주는 ’인내하는 파트너‘가 많아질 때 전북의 문화는 비로소 지역의 부(富)로 피어 날 것이다. 이수영 본부장은 전북창조경제혁신센터 미래전략본부장, 전북창조경제혁신센터 투자육성팀장, 전주 동문예술거리추진단 기획팀장, 삼천문화의집 관장, 이수영 음치클리닉 원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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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1.26 18:44

[문화마주보기]사랑의 도시, 예술의 도시, 남원

오늘날의 도시들은 하나같이 풍요와 속도를 말한다. 더 높은 빌딩, 더 많은 인구와 자동차, 더 빠른 기술과 산업. 경쟁과 효율, 첨단이라는 단어가 도시의 가치를 대신한다. 그러나 모든 도시가 같은 방향으로 달려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어떤 도시는 그 흐름에서 한 발 비켜 있을 때, 가장 그 도시다운 얼굴을 드러내며 그것이 곧 경쟁력이 된다. 남원은 바로 그런 도시다. 남원을 ‘사랑의 도시, 예술의 도시’로 부르고 싶다. 이는 새로 만들어낸 슬로건이 아니라 오랫동안 이 땅에 축적되어 온 정체성이다. 성춘향과 이도령의 사랑 이야기는 단순한 연애담이 아니다. 그 안에는 절개와 신의, 권력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인간의 존엄이 담겨 있다. 남원은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품은 도시이며, 세월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사랑의 서사를 일상의 공기로 간직한 곳이다. 남원이 지향해야 할 미래는 첨단기술산업도시의 모방이 아니다. 속도를 늦추는 용기, 느림을 선택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빠르게 통과하는 도시가 아니라 천천히 걸을 수 있는 도시, 소비하며 스쳐 가는 공간이 아니라 머물며 사유하는 공간. 남원은 산책의 도시가 되어야 한다. 걷는 동안 자연과 역사, 그리고 자기 자신을 마주할 수 있는 도시 말이다. 또한 남원은 판소리가 살아 숨 쉬는 예술의 도시다. 동편제 판소리의 본향으로서 남원은 소리와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희로애락을 전승해왔다. 판소리는 전통 예술을 넘어 시간을 견뎌온 삶의 방식이자 공동체의 기억이다. 이 예술이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울려 퍼질 때, 남원은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와 미래를 잇는 문화도시로 성장할 수 있다. 이런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기반 또한 남원은 갖추고 있다. KTX를 통해 수도권과 남해안 권역을 잇고, 동서를 연결하는 88고속도로와 남북을 관통하는 순천–완주 고속도로는 남원의 접근성을 높인다. 한옥을 개조한 현대식 숙박시설, 지리산 자락과 섬진강 유역의 식재료로 완성되는 한정식과 추어탕은 자연의 섭리를 체감하게 하는 남원의 뿌리깊은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준다. 광한루와 만인의총 같은 전통 유산, 국립민속국악원과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 같은 현대 문화시설도 공존하며, 지금 조성되고 있는 함파우 예술특화지구에는 소리체험관과 천문관이 있고, 옷칠공예와 도자체험 시설도 더해진다.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에 지난 해 18만 명이 다녀갔다는 사실은 남원의 문화적 잠재력을 분명히 보여준다. 인구 7만이라는 수치는 한계가 아니다. 세계에는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문화 정체성으로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아온 도시들이 많다. 성 프란치스코의 도시로 알려진 인구 2만의 이탈리아 아시시(Assisi)와 바그너의 도시로 유명한 인구 7만의 독일 바이로이트(Bayreuth)처럼, 남원 역시 사랑의 서사와 예술의 전통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으로 세계와 만날 수 있다. 작지만 세계적인 문화도시로 성장할 충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남원은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사랑의 서사, 예술의 유산, 느린 산책이 허락되는 자연풍경. 이를 정성껏 가꾸고 계승한다면, 남원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도시가 될 것이다. 사랑이 전통이 되고, 느림이 경쟁력이 되며, 예술이 일상이 되는 도시. 남원은 그렇게 자신의 길을 가면 된다. 그것이 가장 남원다운 길이다. 허정선 관장은 영남대학교 미술사학 박사를 받았다. 울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를 역임했고 동국대학교 경주 캠퍼스 겸임교수를 지내고 경북대학교, 영남대학교 등서 13년간 강의를 진행했다. 영남대학교 미학 및 미술사학 박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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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1.19 18:20

[문화 마주보기] 한 관찰사의 믿음이 전해준 선물

1846년 병오년의 일이다. 전라도 관찰사 이시재는 덕진연못에 승금정과 취소정을 짓고 낙성연을 열어 도내 수령과 시인, 가객을 불러 모았다. 참석자들은 신분과 지위를 내려놓고 모두 시 한 수씩을 지었다. 1990년대에 공개돼 관심을 모았던 <승금정시회화첩>이 만들어진 배경이다. 이날 시회의 모습을 그린 그림과 참석자들의 시를 담고, 이시재가 서문을 쓴 <승금정시회화첩>은 잠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 화제가 되었지만, 곧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러던 <승금정시회화첩>이 다시 모습을 보인 것은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이건희 기증품을 공개하면서다. 국립전주박물관은 2024년 이 작품을 전시하고, 전주문화원과 함께 <승금정시회화첩>에 대한 후속 연구를 진행했다. 지난해 말 국립전주박물관과 전주문화원이 공동으로 발간한 학술총서 <승금정시회화첩>이 그 성과물이다. 소장품을 조사하고 학술적 의미와 가치를 밝히는 일은 박물관의 중요한 역할이다. <승금정시회화첩> 연구는 작품 자체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련 자료를 연계해 분석하는 일을 더했다. 승금정 시회와 화첩 제작의 배경, 그리고 그 의미를 통해 당시 전주 지역의 문화사를 밝히고자 했다. 주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다. <승금정시회화첩> 이면에 숨어 있던 조력자, 오상수와 이삼만의 발견이다. 오상수는 전주 출신으로 <풍요삼선>에 작품을 올린 시인이다. 그의 문집 <유사집>에 실린 <승금정화첩서>를 보면, 이시재가 시회를 기념하는 화첩을 만들면서 오상수에게 서문을 지으라 했다는 내용이 있다. 흥미롭게도 <승금정화첩서>에 실린 오상수의 서문은 <승금정시회화첩>에 실린 이시재의 서문과 다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최종적으로는 이시재의 서문이 수록된 것이다. 장황 또한 제목에 쓰인 ‘화첩’이 아니라 화권(두루마리)으로 바뀌었는데, <승금정시회화첩>의 글씨는 오상수의 필치에 가까워 화첩의 제작 과정에서 그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방증한다. 또 하나 주목할 문헌은 2020년 공개된 『풍패집록』이다. 이 자료는 전주 사람 채경묵이 19세기 말에 간행한 것이다. 승금정 시회에서 지어진 시의 현판과 승금정·취소정의 상량문 등 <승금정시회화첩>과 관련된 글들이 포함돼 있다. 승금정 상량문은 이시재가 짓고 이삼만이 글씨를 썼다는 것, 취소정 상량문을 이만용이 지었다는 기록 등은 승금정 시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나중에 덧붙여진 기록이지만, 이만용이 지은 취소정 상량문이 사실은 오상수의 대작이라는 내용은 흥미롭다. 정확한 사실은 앞으로 더해질 새로운 자료와 후속 연구로 밝혀지겠지만, 관찰사가 추진한 문예 사업에 오상수와 서예가 이삼만 등 당시 전주 지역에서 추앙받던 문사들이 큰 역할을 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승금정 시회는 일회성 행사가 아니었다. 관찰사 이시재는 이를 발전시켜 문예 공간이라 할 수 있는 후향시사를 결성했다. 여기에 자금을 출연하고 시사의 운영을 지역 문사들에게 맡겼다. 그는 <승금정>이라는 건물은 사라지더라도, 그곳에서 이룬 문예적 성과는 남아 그 아름다움과 풍류가 후세에 전해질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전해진 <승금정시회화첩>은 한 관찰사의 믿음이 이뤄낸 귀한 결실이다.다시 병오년을 맞았다. 새해의 시작점에서, 우리 박물관은 무엇으로, 또 어떻게 지역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 생각이 깊어진다. 장진아 학예연구실장은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2000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등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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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1.12 18:44

[문화마주보기] 지역문화정책, 물타기와 물갈이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변화’를 이야기한다. 대개 외침과 설계를 함께 담는다. ‘휘몰이 충격’에 대응하려니 새해에는 프로그램이나 예산 욕심 정도에 그칠 수 없겠다. 지역 문화정책이라면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하는 철학을 말해야할 것이다. 지역은 아직도 철학 부재의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무기력한 지역사회에 변화가 절실하다. 문화로 활기찬 사회만들기를 다짐하는 선언문이라도 새삼 필요하지않을까. 그동안 화려한 문화정책들이 반복되었다. 문화 거점 리모델링, 주민 참여, 연례 행사 축제는 수치로 그 성과를 자랑했다. 덕분에 문화소비는 늘었다지만, 공동체 활기는 좀처럼 재생(revolution)되지 않았다. 마을들은 시간이 멈춘 듯 하고, 공간은 텅 비어 있으며, 인간들은 여전히 관람객 수준이다. 이 3간의 불협화음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절감하며, ‘물타기’라는 말을 골라내 쓴다. 문화를 덧댄 때때옷 정책으로 삶의 온도까지 바꾸지는 못했다. 이제는 창발적이어야 한다. 진화(evolution)라는 말 등에 올라타고, 반기를 흔들며 시작해야한다. 위에서 설계해 내려보내 준 정답을 지역이 베껴쓰는 방식은 이제 아니다. 아래에서 시작된 질문들이 얽히고설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문화정책에 창발성이 필요하다는 말은, 행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행정이 창발을 가능하게 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문화정책이 지녀야 할 정책철학이다. 이제는 콘텐츠를 직접 공급하는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 소비자 스스로 문화를 충분히 실험 가능한 조건을 조성하도록 정책좌표를 옮겨야 한다. 예산은 ‘사업비’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다룰 수 있는 ‘블록’이 되어야 한다. 공간은 기능을 가득 채우는 창고가 아니라 정책의도를 설계할 수 있는 ’여백’이어야 한다. 정책은 완벽한 사용설명서가 아니라, 실패해도 괜찮은 조립식 플랫폼으로 존재해야 한다. 무엇보다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꿔야 한다. ‘지원 대상자’를 골라 베풀기보다, ‘역할‘을 만들어 줘야 한다. 기획자보다 조율자, 숙련된 행정가보다 조건설계자, 소셜 디자이너이자, 공동체의 문화생태 엔지니어 역할이다. 활력을 이끌어 낼 패실리테이터로 시스템을 설계해야한다. 누구나 아는것 처럼 쉽게 말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것이 거버넌스다. 선형 구조에서 루프 구조로 바꿔야 한다. 참여→집행→평가의 ‘직선’구조는 허수아비 막대기다. 질문→사회실험→전문평가→공유→조정의 ‘순환’ 구조로 바꿔야 한다. 공공은 개입을 늘리기보다 거버넌스 참여의 전제조건을 확실하게 설계해야 한다. ‘협치’가 아닌 ‘협창’(협동적 창조)에 몸을 던질 수 있게 신뢰거버넌스를 보장해야 한다. 소멸 위기와 휘몰이 충격으로 거북이 등딱지가 된 지역 문화정책. 이제 ‘문화 물타기’는 낭비다. ‘물갈이’로 물꼬를 터야 한다. 문화흐름(文流)을 가로막지 말고, 조용히 틈을 내주는 정책. HAI중심 열린 지능정보시대 문화정책은 지시하는 주체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고 함께 답을 찾아야 한다. 이 정책묶음을 공진화(coevolution)전략이라 부르자. 이를 품지 못하면, 우리는 한번 쓴 같은 물을 또다시 되돌려 쓰게 될 것이다. 새해 문화정책은 창발적 공진화 설계의 철학을 자문하며 시작하자. 이흥재 교수는 추계예술대학교 교수 , 전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장, 한국지역문화학회장, 한국문화경제학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로컬리티와 지역문화전략', ‘문화정책론’, ‘문화예술경제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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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1.05 17:47

[문화마주보기] 씁쓸하지만 따뜻한 올해의 영화

연말이 되면 시상식 결과가 공개되고 한 해를 정리하는 ‘올해의 영화’ 목록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권위를 자랑하는 기관이나 전통있는 매체가 선택한 영화들은 한번 더 주목 받을 수 있고, 제작진은 제작 과정과 집객에 어려움이 있었다할지라도 영화의 진가를 인정받았다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시민들이 자신만의 최고의 영화 목록을 공개하기에 이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한 시기이다. 필자도 12월 마지막 지면이라는 좋은 기회로 사람과 사람을 이을 수 있었던 올해의 영화를 소개한다. 2025년 한국 저예산 영화 부문에서 반짝인 제목들 중 전문가와 관객 모두에게 거론된 영화는 단연 <세계의 주인>이다. 활발한 고등학생 주인이가 어느날 학교 친구의 요청을 거절하며 벌어지는 상황을 그린 작품으로 윤가은 감독은 인간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해야한다는 리얼리즘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폭력과 사랑이 뒤섞인 우리의 세계를 성찰할 수 있는 영화적 방법을 찾았다. 18만명이 넘는 관객이 찾았지만 아직 더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영화다. <3학년 2학기>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중소기업에서 현장실습을 하게 된 창우의 삶을 보여준다. 이란희 감독은 사람을 갈아 사회가 돌아가는 구조를 직시하는 동시에 빛나는 재능이 없어도 밥값과 쓸모를 고민하며 미약하게 성장하는 한 인간의 기쁨을 담담하게 그린다. 변화가 쉽지 않은 현실에 대한 착찹함과 각자의 처지에 대한 공감이 공존하는 감독의 세계를 완성하는 지점에 유이하 배우의 연기가 자리하고 있다. <3670>은 동성애자인 탈북청년 철준의 남한 적응기를 진심어리고 쾌할하게 보여준다. 미지의 미래에 굴복하지 않고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은 솔직한 마음이 지금의 희망을 만들어내는 젊은 에너지가 생생한 영화이다. 겨울 외국 영화하면 <나 홀로 집에> 같은 정답도 있지만 이 곳에서는 씁쓸하고 따끔하지만 가족에 대해 다른 시각을 제시하는 개봉 영화를 소개한다. 먼저, 마이클 리 감독의 <내 말 좀 들어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분노와 극단적 분리를 한 가족을 통해 드러내는 진단서이다. 불평을 입에 달고 사는 성격 파탄 주인공과 어떤 반항도 못하고 방관하는 가족을 통해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는 순간 공동체 전체가 망가질 수 밖에 없음을 증명한다. 알랭 기로디의 미스터리 코믹극 <미세리코르디아>와 라두 주데의 신랄한 풍자극 <콘티넨탈’ 25>는 한 공동체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통해 인간 사회를 지속하는 힘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위 세편은 거짓 희망으로 현실 문제에 눈가리개를 하고 한 해를 정리하기 보다 우리 사회를 냉정하게 응시하되 지속해서 서로를 살리는 방법을 질문하는 영화들이다. 그럼에도 수북하게 쌓인 흰 눈처럼 따뜻한 최신 겨울 영화를 원한다면 <바튼 아카데미>를 찾아보시라. 남들 눈에는 실패자로 보이는 상처입은 영혼들이 서로의 뾰족함을 보듬으며 마음 속 빙하를 녹아내는 순간을 맛볼 수 있다. 한 편의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도 없고 한 사람을 구원할 수도 없다. 다만, 미약하게나마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에 길을 터주는 영화들이 있다. 완벽하지 않는 인간의 취약함을 드러냄으로서 오히려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영화들을 보며 2026년을 시작할 수 있는 힘과 포용력을 충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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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29 17:03

[문화마주보기] 생활인구 시대, 관광보다 문화예술교육이다

인구정책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이제는 주민등록 관점에서 벗어나, 누가 얼마나 자주 어떤 이유로 어느 지역에 머무는가를 분석 및 측정하는 ‘생활인구’가 정책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이는 인구감소지역에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을 열어주는 의미로, 단순한 주소 이전이 아니라 반복적인 체류와 라포(Rapport) 형성이 지역의 지속적인 활력을 결정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부안군은 2025년 2분기 행정안전부 생활인구 산정 결과에서 전북권 내 인구감소지역 시.군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 변산마실길과 부안마실축제 등 체류형 관광 전략과 천혜의 자연환경을 잘 보존한 부분이 성과로 나타났다고 본다. 하지만 관광과 축제는 생활인구를 빠르게 늘릴 수 있지만, 계절성과 일회성이라는 한계점을 갖고 있다. 반면 문화예술교육은 일정 기간 머무를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고, 반복성과 관계성을 동반한다. 특히 음악교육을 위한 유학, 음악캠프와 같은 학습은 체류 시간과 인적 교류를 동시에 확대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새만금 농생명단지 내 글로벌 청소년리더센터를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소속 49개 꿈의오케스트라와 전국 관악단체의 합숙형 교육 거점으로 활용한다면, 학생과 강사, 스태프, 가족까지 동반한 체류인구가 단기간에 형성될 것이다. 이는 관광과 달리 계획적이고 예측 가능한 체류 모델로, 유휴 공간을 문화예술을 통해 소멸 위기의 지역을 다시 생동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실제 2026 꿈의오케스트라 자립 거점기관 기획사업으로 부안, 무주, 홍성, 장수 등 인구감소지역 단원들이 연합 오케스트라를 구성해 소멸이 아닌 상생의 주제를 가지고 음악캠프를 진행 할 예정이다. 두 번째 대안은 전국 관악경연대회에서 항상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는 부안초등학교를 음악 분야 특성화 학교로 조성하여, 전국에서 관악에 꿈을 가진 아이들이 유학 형태로 찾아올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현재 부안초 관악부 출신으로 구성된 청소년오케스트라의 유럽 진출을 위해 지역 단체장이 직접 해외 기관에 정성이 담긴 서한을 보내고, 해외 공연 예산을 편성하는 등 지방의회와 지자체가 함께 아이들의 글로벌 역량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가 정식 해외 초청으로 이어진다면, 부안초등학교는 전국의 관악 유망주들이 주목하는 교육 거점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움직임과 더불어 광역 차원에서도 확산되고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산업과는 전북특별자치도의회와 함께 인구감소지역 꿈의오케스트라 단체(고창, 장수, 무주, 부안)에 전국 최초로 예산 지원을 확정했다. 이는 인구감소 대응을 문화예술교육과 결합하려는 정책적 신호이며, 타 광역에도 모범을 보이는 사례일 것이다. 생활인구 시대의 인구정책은 이제 숫자가 아니라 이유를 묻는다. 인구소멸지역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 머물 이유를 만드는 교육 인프라다. 문화예술교육은 그 질문에 가장 현실적인 답이 되고 있고 우리 전북특별자치도는 지금처럼 한목소리로 그 답을 위해 뛰어야 한다. /김수일 전북도립국악원 공연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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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22 18:29

[문화마주보기] ‘읽는 도서관’에서 ‘찾고 보고 즐기는 도서관’으로

이재 황윤석은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로 불린다. 고창 출신 그가 남긴 이재난고(頤齋亂藁)는 무려 53년 동안 그가 듣고 보고 배우고 생각한 것들을 담은 일기체 기록이다. 18세기 조선의 생활상과 지식 생태계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백과사전’, ‘타임캡슐’로 평가받는다. 12월 3일 고창에서는 이재 선생의 이름을 딴 의미심장 도서관 개관식이 있었다. 2019년 생활형SOC복합화사업에 선정되면서 시작해 햇수로 7년여 민관이 힘을 합쳐 준비해온 지역 거점도서관이 단장을 마치고 문을 연 것이다. <고창황윤석도서관>이라는 이름을 달고 자랑스레 첫선을 보였다. 군단위 도서관으로는 이례적이다. 200억을 웃도는 거대 예산에, 지하 1층에 지상 2층 총 3층 높이 3미터 이상 높다란 천정 목구조며, 100여 미터에 달하는 길이 외형은 ‘이례적’이라는 말 그대로다. 설계진과 고창군은 ‘커다란 나무 그늘에서 맘껏 책을 읽는’ 특별한 독서의 근본 경험을 건축의 틀로 반영했다고 한다. 지하 1층은 지역문화활동 중심공간이다. 다목적 강당과 동아리실, 배움실은 공동체 독서와 문화 모임을 담는 곳으로 마주침 공간은 작은 전시와 창작 발표가 이뤄진다. 마침 개관기념 팝업북 전시를 열고 있다. 도서관 핵심기능을 담은 지상 1층은 일반자료실·어린이자료실에, 도서관 상징 공간 북마운틴(Book Mountain)이 자리하고 있다. 이재 선생의 실학정신을 담은 다양한 기록관련 자료도 압축해 수서하고 있다. 차분한 독서와 감각적 체험이 가능한 지상 2층은 두 개 일반자료실과 책마루 테라스, 작은 카페와 미디어아트 갤러리, 오디오북 체험공간을 두루 갖췄다. 바야흐로 도서관 전성시대다. 책을 읽는 공간, 지식의 보급처로서 도서관은, ‘도서관이 생기면 집값이 오른다’는 생활중심형에서, 이제 지역의 거점 관광 인프라로서 기능을 확장하는 시대이다. 이웃 일본의 경우만 해도, 북콜로세움이라는 별명이 붙은 가나자와시 이시카와협립도서관이 ‘관광형 도서관’으로 주가를 올리며 ‘핫플레이스’에 등극했다. 마치 고대 로마 콜로세움처럼 4층 높이 서가가 원형으로 웅장하게 펼쳐져 도서관에 들어서는 순간 압도적인 시각적 경험을 주며 지역 주민보다 외부 관광객의 발길을 더 잡아끌고 있어 지역경제를 움직이는 중요한 축이 되고 있다. 이 추세는 ‘읽는 도서관’에서 ‘찾고 보고 즐기는 도서관’으로 변화상을 반영한 것이다. 국내에서도 최근 개관한 경기도서관이 독특한 외관과 나선형 서가로 도서관 전체가 하나의 서가로 이어진 형태로 건축미를 강조해 호평을 받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전주시는 다양한 형태, 테마를 가진 특별한 도서관 도시로 거듭나고 있고, 전북특별자치도는 2027년 완공을 목표로 축구장 4개 넓이, 20만 권 넘는 장서에 야외 정원까지 담는 전북대표도서관을 계획하고 있다. 도서관이 관광 거점으로 역할을 하고 있는 마당에, 지역의 인문테마공간을 찾고 연계해 다양한 책과 문화를 잇는 새로운 문화관광벨트로 확장하기를 바란다. ‘문화로 지역창생’하는 바탕을 다지는 일이다. 도서관을 비롯한 지역의 대표 책 공간을 연결해 조용하지만, 마음 양식을 든든하게 채우는 인문여행의 수요를 확보할 것이다. 물론 인문정신의 확산이라는 도서관의 본래 취지를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얼마 전 광주광역시 대표도서관 공사현장에서 매몰되어 세상을 떠난 일꾼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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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15 18:29

[문화마주보기] 누렁이와 빼빼

어떤 독서 모임에서 내 시편을 해설해 달라는 강의 요청이 왔다. 고마웠다. 세간에 알려진 유명한 시가 아니라 야인의 숨소리 같다는 내 시를 해설해 달라니. 작품을 몇 편 추리는데 문득 누렁이와 빼빼가 떠올랐다. 누렁이가 새끼를 열두 마리나 낳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틀 뒤 빼빼가 새끼 아홉 마리를 또 낳았다. 신통방통한 일이었다. 똥개가 새끼를 이렇게나 많이 낳다니.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 실제로 생기자 우리 가족은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스물넷이던 그해 봄, 개가 잘 되면 집안이 일어선다고 치성드리던 어머니 치맛자락에 치렁치렁 새벽빛이 매달려 있었다. 누렁이와 빼빼는 새끼를 혀로 핥아서 키웠다. 눈도 못 뜨고 낑낑대는 어린 목숨들의 요모조모를 짬짬이 혀로 핥았고 새끼가 구물구물해도 배곯은 놈에게 먼저 젖을 물렸다. 마릿수는 줄었지만 누렁이와 빼빼는 그 뒤로도 새끼 여러 배를 낳았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마당 화덕에 걸린 큰솥에 미역을 넣고 녀석들 밥을 펄펄 끓였다. 배란기가 오면 대문에 동네 수컷들이 모여들어 주둥이를 킁킁댔다. 어머니는 망설임 없이 덩치 큰 수컷만을 마당에 끌어들였는데 녀석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씨알 굵은 새끼들을 잘도 낳았다. 밤하늘을 빠개 먹듯 번갯불이 내리꽂히며 장대비가 좍좍 쏟아지던 밤, 녀석들 집을 살핀 적이 있는데 내가 다가서니 되레 내 손등을 살갑게 핥았다. 새끼를 낳았을 때마다 제 쌀강아지들을 장에다 몽땅 팔아버린 내가 밉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누렁이와 빼빼의 정은 한결같았다. 낯선 이가 대문께 얼쩡거리면 컹컹 짖어 빈집이 아님을 알렸고, 한 번도 내게서 등을 돌리지 않았다. 시 몇 편을 추리는데 까맣게 잊어먹은 누렁이와 빼빼가 왜 떠올랐는지…. 야인의 숨소리 같다는 내 시를 읽은 사람은 드물다. 시집을 네 권씩이나 냈어도 내 시를 평(評)한 사람은 더 드물다. 남들 시보다 빼어나지 못한 데다 언어의 쓰임새도 문명적 색감을 물고 광휘를 내뿜는 날렵한 섬광과 거리가 멀기 때문일 것이다. 농경문화 속에 버무려진 삶의 모양새 일부를 전북의 토박이말과 막말이 섞인 입똥내 튀는 말씨로 끌어낸 게 내 시의 주된 밑그림이므로. 하지만 소통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언어에 선행하는 사람다움의 행위를 돋을볕처럼 붓끝에 벼리고자 골을 뺐을지언정 현대성을 앞세워 시행 앞뒤의 맥락을 고의로 훼손하지 않았으니. 그러자 누렁이와 빼빼가 또 떠오른다. 뭔가가 못마땅한 눈치다. 까불지 말라는 것 같다. 남들 일할 때 나도 일하고 남들 쉴 때 나도 쉬는 세상- 이 꿈에 등을 보이지 않았다면, 젊은 시인들 시가 왜 앞뒤 내용을 고의로 왜곡하고 몽환적 관념에 빠진 것도 모자라 돌연 유령까지 출현시키는지 고민해봤냐는 항의로 읽힌다. 이쯤 되면 누렁이와 빼빼는 똥개가 아니라 내 시의 또 다른 현실이자 도반(道伴)이 아닐까. 그렇다면 녀석들은 문득 떠오른 게 아니라 나를 일부러 찾아온 게 틀림없다. 내 주변을 오래 맴돌았음이 분명하다. 아아, 까맣게 잊어먹은 옛정이 시의 정혈에 눈도 못 뜨고 낑낑대는 내 목숨의 요모조모를 혀로 핥아대다니. 난해하다고 자폐적이라고 비판받을망정 서정시의 오랜 질서를 거절하는 젊은 순정을 시의 문법으로 모시라고 나를 말똥말똥 바라보는 누렁이와 빼빼라니! 독서 모임에 가져갈 시편을 추리다 말고 나는 코가 시리다. 순정 한 잔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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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08 18:10

[문화마주보기] 전주의 헤리티지, 영화

콘텐츠 업계에 시간의 개념이 달라지고 있다. 대중음악계에서는 ‘차트 역주행’이라는 표현이 흔해질 정도로 과거의 노래가 신곡이 아님에도 인기를 끌며 재조명 받는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 최근 영화관도 신작보다 고전영화의 집객 결과가 높을 때가 많다. 이를 반영하듯 수입배급사들은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명작이나, 유명한 영화의 복원판을 구해 재개봉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수치로만 봐서는 음악이든 영화든 신작이 줄어 생긴 현상은 아니다. 음악 소개 사이트를 보면 하루에 수십곡이 발표될 정도로 많은 창작물이 쏟아진다. 한 명의 인간이 내용을 소화하고 즐기고 애착을 느낄 시간에 비해 과도한 선택지가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예전처럼 2주 안에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창작자들에겐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긍정적 측면은 창작물이 온라인 공간 속 어딘가 존재만 한다면 절적한 시기에 향유자를 만날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고, 부정적 측면은 창작자들은 이제 시대를 초월해 역사 속 모든 창작물과 경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창작물이 있어도 제대로 된 관리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며칠전 대만 감독 허우 샤오시엔의 <비정성시>(1989)가 한국에서 특별 상영을 했는데 표를 못구한 사람들의 개봉 요청이 소셜미디어에 빗발쳤다. 이정도 호응이면 수입사들이 움직일법도 한데 저작권과 관련된 복잡한 사정으로 이 영화는 이벤트 상영으로 그치게 됐다. 80년대 후반 영화가 2025년에 여전히 현재의 영화로 관객들에게 다가갈 수 있음이 증명되었지만, 저작권에 대한 세밀한 관리가 한 곳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확장성이 제한된다는 것을 깨우친 사례이다. 인터넷이 불러온 디지털 환경은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정보를 찾아서 즐길 수 있게 했다. 오프라인에만 존재하던 과거의 기록을 온라인 공간에 아카이빙 하기 시작한 여러 기관과 개인의 참여로 이제 우리는 대부분의 정보를 온라인에서 접할 수 있게 됐다. 영화분야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한국영상자료원이 만든 자체 사이트 KMDb VOD를 들 수 있다. ‘한국고전영화’ 라는 이름으로 방대한 한국영화와 관련 영상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고 현재는 유투브와 네이버TV에서도 상영중이다. 이는 국내외 시네필, 영화관련 종사자와 학자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한국 영화 아카이브 중 하나이다. 전주라는 도시가 영화로 알려지게 된 것에는 전주국제영화제의 활약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 영화제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영화제가 영화를 제작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초기 ‘디지털삼인삼색’이라는 이름으로 42편의 단편영화를 제작했고 일부를 제외하고는 저작권도 영화제가 확보하고 있다. 이후 장편 영화 투자 프로그램 ‘전주시네마프로젝트’의 경우 약 40편이 만들어졌고 저작권의 일부 권리를 가지고 있는 형태이다. 지금까지는 영화관, 미술관 등과 협업을 통해 특별 상영 형식으로 스페인, 독일, 멕시코 등에서 상영을 해왔지만 콘텐츠 업계의 변화된 시간 개념을 고려한다면 전주국제영화제가 저작권을 보유한 창작물을 아카이빙을 하고 한국영상자료원의 예와 같이 전세계 관객과 만날 수 있는 온라인의 공간이 마련되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전주국제영화제가 제작한 영화들은 수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문화 유산으로서 관리될 수 있는 행정, 제도적 절차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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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01 18:42

[문화마주보기]중앙의 문화정책, 이젠 속도보단 방향이다

최근 문화예술정책자문위원회(위원장 은희경)와 대중문화교류위원회(공동대표 최휘영장관, 박진영)가 잇따라 출범했다. 문학, 연극, 뮤지컬, 음악, 국악, 무용, 미술 등 9개 분야에서 현장 이해도와 통찰력, 전문성, 경험을 갖춘 위원 90명으로 구성된 정책자문위원회는 창작 기반과 예술정책 자문을 집중 담당하고, 대중문화교류위원회는 글로벌 진출과 산업 교류 역할을 실행하고자 설립되었다. 창작과 산업, 그리고 해외확장이라는 한국 문화정책의 두 축이 마련된 셈이다. 문화예술 현장을 담아 문화산업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문화계에서 오랫동안 기다려온 염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두 위원회의 구성과 역할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가지 결정적인 헛점이 보인다. 바로 지역문화의 비전과 과제를 논의할 분과가 없다는 점이다. 위원 명단에 지역 인사가 일부 포함되었다고 해서 지역문화정책이 자동으로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문화예술교육, 순수예술지원, 중소공연장 활성화, 예술단체의 존속성 같은 과제는 중앙보다 지방이 훨씬 절실할것이다. 지역의 생각과 전략을 다룰 제도적 기구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최근 대통령직속 지방시대위원회와 국립중앙박물관이 국가균형성장과 지역문화 활성화를 위해 처음으로 공식 협약을 체결한 것은 지역입장에서는 고무적이다. 전국 13개 국립박물관을 지역문화의 중심기관으로 육성하고, 지역 간 문화격차를 해소하며, 각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반영한 콘텐츠를 공동 개발하겠다는 것은 분명 중요한 진전이다. 지방시대위원회가‘문화가 함께할 때 국가균형 성장이 완성 된다’고 피력 한 것은 지역문화의 중요성이 국가 전략으로 필요불가결(必要不可缺)한 요소임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이런 외침만으로는 구조적인 변화에 한계점이 있다. 지역의 현실과 니즈를 수시로 분석하고 지원할 지역 단위의 정책기구가 없다면 정책은 여전히 중앙 중심의 흐름 속에서 머무르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해외 사례를 살펴보면 우리는 더 이상 주저할 필요가 없다. 프랑스는 중앙 문화부와 함께 지역 단위의 지방문화청(DRAC)을 운영하면서 순수예술 지원과 지역문화 생태계 조성 관리를 통해 직접 지원 한다. 영국 아츠카운슬(Arts Council)은 런던 본부 아래 지역별 사무소를 두어 지역 예술단체 지원, 투어링 공연 배분, 창작 레지던시 운영을 자율적으로 결정한다. 독일은 연방과 주(州)가 문화정책을 이원화하여 지역의 문화기관이 독립적으로 예술인을 지원하고 프로그램을 기획할 수 있게 도와준다. 해외에서는 이미 ‘중앙–지역’이 병렬적으로 움직이는 구조가 기본이 된 지 오래다. 이제 우리도 지역문화위원회(Local Arts Council)를 출범해야 한다. 단순한 자문기구가 아니라 지역문화를 직접 설계하고 집행할 권한을 주기 위해 전폭적인 예산지원도 필요할 것이다. 위원회가 성공하기 위한 제언을 하자면, 첫째, 지역의 예술인, 공연장, 예술단체를 연결하는 창작 생태계의 조정자 역할이 필요하다. 중앙 공모사업 중심 구조로는 지역 간 격차를 좁히는 건 한계가 있기에 전문 컨설턴트를 지방에 파견하는 사업(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문예회관 공연예술 기획, 제작 컨설팅)을 대폭 확장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는, 지역의 문화 자산을 기반으로 한 브랜드 공연, 축제, 창작 콘텐츠를 발굴하는 중장기 전략을 배양시켜, 문화로 자생할 자양분을 만들어줘야 할 것이다. 셋째, 청년 예술인 지원을 생활 기반, 창작 공간, 멘토링, 네트워크 구축과 같은 지역 기반 체계로 전환시켜야 한다. 무엇보다 지역문화위원회는 중앙 위원회와 동반성장 할 수 있는 양방향 소통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지역의 주요 어젠다와 의견이 위원회를 통해 중앙에 전달되고, 중앙 정책이 지역에 맞게 조정을 통해 지원되는 구조가 마련될 때 비로소 우리 문화정책은 지속 가능한 생태계 형태를 갖추게 된다. 지금처럼 중앙이 정책을 설계하면 지역이‘실행’만 하는 방식으로는 지역문화의 다양성과 자율성을 온전히 구현해내지 못한다. 정책자문위원회가 순수예술 창작정책을, 대중문화교류위원회가 문화산업, 교류 정책을 맡았다면, 이제 남은 미션은 ‘지역문화 정책’을 책임질 위원회다. K-컬처를 세계속으로 더욱더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중앙의 성과만으로는 부족하다. 지역에서 피어나는 문화의 다양성과 창작 역량이 함께 성장할 때 비로소 한국 문화는 지속 가능한 구조를 갖게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위원회가 아니라, 더 촘촘한 문화생태계다. 그 시작은 지역문화위원회 설치에서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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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24 18:29

[문화마주보기]로컬, 영화제, 영화, 그림책, 사람이 만난다

들녘은 가을걷이가 마무리되어 간다. 가을 내내 이어진 축제들도 사람들 이목을 끄느라 요란시끌을 가라앉히고 차분해지고 있다. 그 가을 행사 가운데 색다른 영화제에 주목한다. 지난 11월 14~15일 순창에서 열린 제2회 순창어린이청소년영화제다. ‘지구를 쉬게 해주세요’라는 주제로 열린 영화제는 순창지역 여섯 개 초등학교에서 지구와 인류의 모습을 생각하며 만든 영화가 상영되었다. ‘내 친구가 타임머신을 타고 사라진 날(유등초)’, ‘이상한 나라의 숨바꼭질(풍산초)’. ‘케이팝 지구 어벤저스(옥천초)’, ‘내 친구 플라스틱 좀비(동산초)’ 여섯 개의 영화는, 친구들이 앞으로 살아갈 지구와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 고민을, 스스로에게 이웃 어른들에게 슬쩍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제는 ‘우리영화만들자협동조합(우영자)’이 지역 안팎 영화 친구들과 함께 품 모아 여는 작은 영화제이다. 2019년 순창으로 이주한 여균동 감독과 김영연 대표가 중심이 되어 지역 어린이 청소년들과 차근차근 영화를 만들어 온 과정의 매듭이기도 하다. 이번 영화제 폐막작으로는 올해 순창청소년영화캠프를 통해 만들어진 작품 <같이 걷는 중>이 상영되었고, 마지막 일정은 <초등학교 영화캠프 현실과 대안>이라는 주제로 열린 시네포럼이었다. 여균동 감독이 순창으로 내려와 이듬해 책마을해리와 만났다. 어린이청소년들과 2012년부터 출판캠프를 통해 책을 만들어오던 책마을해리는, 우리 지역에서 영화로 함께하려는 시도가 반갑고 고마웠다. 몇 년 사이 그의 <우영자>와 책마을해리는 보름 동안 영화학교를 열어, 청소년 영화 <그해 여름>을 함께 만들기도 했다. 청소년영화캠프를 통해 청소년들이 영화와 스스럼없이 어울린 과정을 담은 단행본 《씨네틴즈, 영화로 이야기해요》도 품 보태 출간했다. 오디션부터 상영회까지 영화캠프의 모든 과정을 담고, 친구들의 고민이 잔뜩 담긴 시나리오도 몇 편, 시나리오 작가부터 촬영, 음향, 조명, 편집 감독 들의 인터뷰도 담았다. 영화제작자로서 역할을 하려면 어떤 준비를 하면 되는지, 청소년들에게 진로 길잡이 역할도 하는 책으로다. 재작년부터는 책마을해리와 그림책 출간 프로젝트를 함께 이어오고 있다. ‘시나리오 그림책’ 시리즈로 영화와 그림책을 사랑하는 독자와 만나고 있다. 시나리오 작업이 어려운 초중등 친구들에게, 등장인물은 많고, 지문은 적고 대사는 많은 장면 장면을 영화의 장면으로 확장할 수 있게 안내하는 그림책이다. 이제까지 《비밀의 정원》, 《초록눈 호랑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에 이어, 최근 《그녀의 꿈은 밀라노에 가는 거였다》가 출간되었다. 여균동 감독이 누군가와 그려내고 싶은 영화, 어린이와 청소년에서 실버 세대로, 경계에 선 이주민들로, 청년으로, 삶의 한 구비를 건너가는 중년 세대로 확장하고 있다. 시나리오 그림책도 그 확장을 차근차근 담아내고 있다. 영화를 마치고 올해 가을걷이 끝낸 헛헛한 마음의 여균동 감독이 이 시나리오 그림책을 가지고 지역의 독자와 만난다. 영화와 견줘 이야기 나누는 그림책이니, 영화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도 반가운 일이다. 오래전부터 밀라노 여행을 꿈꾸며 설레는 주인공의 일상을 나누며 우리를 설레게 하는 어떤 존재를 잃은, 꿈을 잃은 우리에게 그 사그라든 불씨를 다시 피워내게 하는 자리가 되어줄 것이다. 11월 29일 토요일 늦은 2시, 일곱 책방이 나란나란 자리한 고창서점마을에서다. 이대건 고창 책마을 해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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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17 18:43

[문화마주보기]첫눈

첫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남녀합반인 우리 교실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첫눈은 시시하게 내리다가 말다 그치고마는 것인데 그해 첫눈은 유리창을 가득 메우며 쏟아졌다.고1이었던 우리. 나는 옥이를 바래다주기 위해서 나섰다. 가시내는 벽골제와 명금산이 가깝게 보이는 동네에 살았다. 손목에 차는 노란 고무줄로 참새 꽁지같이 묶은 뒷머리에 눈송이가 붙들렸다가 떨어지곤 했다. 우산이 없어 스케치북으로 머리를 가려주었다. 그래도 눈송이가 달려들어 옥이의 흰 목덜미를 빨아먹었다. 쌓인 눈 위에 다시 펑펑 눈송이가 쏟아지는, 스케치북이 감당을 못하는 함박눈에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냥 눈 맞음서 걷자.” 옥이는 내 어깨에 묻은 눈을 털어주며 입술을 빛냈다. 눈썹이며 볼이며 턱선의 맺음새가 붓으로 그린 것처럼 고왔다. 교문에서 나와 화호 초등학교 담장을 끼고 걸으면 정자동으로 넘어가는 낮은 언덕이 있고 거기를 지나면 방앗간을 낀 작은 삼거리가 나왔다. 우리는 김제 쪽으로 가지 않고 느티나무들이 서 있는 정자 앞 농로, 명금산으로 가는 지름길에 들어섰다. 눈발은 그칠 낌새를 지운 듯 펑펑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신발이 푹푹 빠졌다. 옥이의 자주색 책가방을 내가 들고 얼마나 걸었을까. 눅눅해진 스케치북으로 머리를 가렸고 내게 바짝 붙었지만 감청색 코트를 눈발에 맡기다시피 한 옥이가 턱을 떨고 있었다. 곧 꽁꽁 언 눈사람이 될 것 같았다. 안 되겠다, 무슨 수를 내야겠다. 주위를 둘러보니 초가집 같은 짚벼눌 두 동이 있었다. 그 앞으로 다가섰다. 짚다발을 빼내려고 용을 썼다. 한 개만 빠지면 여러 개가 쉽게 빠질 터, 그러면 우리는 짚벼눌 속 안방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 짚다발은 빠지지 않았다. 어른들이 짚다발끼리 밀착시켜 얼마나 아금박스럽게 쌓아 올렸는지 고1짜리에게 짚다발은 숫제 악다구니를 썼다. 엊그제 친구들은 잘도 빼내던데 도대체 왜 이러냐, 기를 쓰며 실갱이를 벌였지만 짚다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발은 함박눈으로 바뀌는 중이었다. 그때 옥이가 옆의 짚벼눌을 가리켰다. 짚다발을 빼간 흔적이 눈에 덮이고 있었다. 그 앞에 가서 짚벼눌 어개지지 않게 짚다발 여남은 개를 뺐다. 우리는 짚벼눌 속 안방에 들었다. 서로 눈을 털어주며 손을 맞잡기도 하며 앞니 드러내고 맘껏 웃었다. 붓으로 그린 듯한 옥이 얼굴이 발갛게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짚벼눌 바깥을 죄다 지워버린 함박눈이 펑펑 짚벼눌 안방을 덥히고 있었다. 키도 작고 못생긴 데다 손이 야물기는커녕 짚다발로 못 빼는 순 엉터리를 아끼는 옥이. 얼굴에 눈송이 녹은 물이 빛났다. 이마며 콧등, 희디흰 목덜미에 맺힌 물기를 나는 손수건으로 찍어냈다. 좁아터진 짚벼눌 안방에서 옥이가 내 팔을 꼬옥 끼고 가만가만 숨길을 열어주었다. “이 길을 걸어 집에 갈 때먼 꼭 니가 따라오는 것 같었어야… 뒤돌아보면 너는 없고, 몇 걸음 띠다가 뒤돌아보면 너는 또 없고… 그래서 아예 뒤로 걸었어야… 하늘엔 초저녁 별이 드문드문 떠 있고. 맞어, 그때보톰 너는 내 별이었어야. 오늘은 첫눈이고…” 새끼염소의 혀처럼 말랑거리는 옥이 목소리가 내 심장에 또록또록 박히고 있었던가. 나를 바라보는 가시내 눈망울 속에 뭔가가 일렁였던가. 집에 가기 싫은, 이 짚벼눌 속 안방에 오래오래 갇히고만 싶은 우리를 응원하듯 함박눈이 펑펑펑 쏟아졌다. 옥이 목선이 더 가늘어졌다. 이병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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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10 18:31

[문화마주보기]인공과 지능의 영화

세상에 없던 것이 나타나면 우리는 이름과 의미를 부여하기 마련이다. 사진이 발명되었을 때 사람들이 느낀 감정은 신기함이었다. 영화의 탄생도 마찬가지였다. 인공지능(이하 AI)의 출현 또한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했다. 유흥, 지식 전달, 심리 치료까지 다방면에서 “효율성”을 내세우고 있다. 사진은 ‘시간 속의 인간 역사 경험’과 같은 유일무한 장치로 자리매김 했지만 AI가 무엇이 될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AI영화가 제작비 0원으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동으로” 영화를 만들어낸다고 언론에서 주목한다. 이 말에는 몇가지 모순이 있다. 하나, AI영화는 자동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아이디어, 지시 언어, 이를 구현할 프로그램이라는 토대가 있어야 한다. 기반 조건을 갖추기 위해선 이미지 데이터 확보를 위한 시간, 비용, 인간 노동이 들어간다. 둘, 영화는 창작의 영역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픈 인간의 표현욕구에 의해 시작되는 활동이다. 즉, AI(타율)와 영화(자율)는 주체성의 차이가 명확해 등가관계가 아님에도 상반된 단어를 붙여쓴다. 상용되는 ‘AI영화’는 인공지능을 소재로 한 영화이거나,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하여 제작된 영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현재의 단계에서는 AI활용영화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만든 영화와 AI영화는 무엇이 다른가? 현재 AI영화가 하는 것은 ‘창작’이 아니라 ‘조립’이다. 인간이 창조하고 만들어둔 다양한 이미지를 보유하고 있다 요청이 들어오면 그에 맞게 재조립하는 거다. 창작은 인간의 고민이라는 정신을 물성화시킨 결과이고, AI(활용)영화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조립하는 것이다. 전자는 과정에서 추출되는 무언가가 결과물이 되는 것이고, 후자는 결과물 간의 재조립이다. AI는 인공성의 시대를 열고 있다. 숏폼에는 조잡한 인공 이미지가 대중화됐고 영상의 완성도보다는 이야기 전개에 집착하며 배속보기가 유행하기도 한다. 몇가지 의문이 든다. 아름답지 않은 이미지도 예술이 될 수 있나? 이야기 자체가 영화를 뜻하진 않는데, 이야기만 남은 영상은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인간 경험이 실종된 창작물은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AI영화가 진정한 혁신이자 창조라면 왜 기존 영화 문법을 복제하는가. 근본적인 논의도 필요하다. AI 영상의 차이점은 실재와 가공의 ‘이미지’에 있다. 촬영 원본이 없는 인공적인 이미지로만 구성되었을 때, 그것은 애니메이션에 가깝지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영화는 실재 움직임의 이미지를 구성한 것이고, 애니메이션은 정지된 이미지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단계에선 AI는 영화 제작 기간과 비용을 줄여주는 효용성 높은 "도구"이지, 그 자체를 영화라고는 부를 수 없다. 그것이 영화가 되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구체성을 가지고 실재적 이미지와의 어떻게 연결되어 구현될지를 증명해야 한다. 우리는 기술이 촉발한 경제적 속도에 취해 이미지의 사용 윤리와 미학에 대한 연구를 경시하고 있다. 많은 것을 누리지만 어떤 과정이 응축되어 있는지 드러나지 않는 상태다. 물론, 모든 것이 의미를 지닐 필요도 없다. 혼란 속에서 예술의 존재는 더 빛이 날 것이다. 다만, 타인의 고유 저작물을 공정하게 쓸 수 있는, 새로운 제작방식에 필요한 용어와 정책에 대한 논의는 인간의 지능과 기준으로 필요하다. 문성경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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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03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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