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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숲을 바라보며

4월의 숲은 완성을 향해 제 모습을 갖추어가고 있었습니다. 젖살 오른 아기 살결 같은 나무의 어린잎들은 유록(幼綠)의 피부로 숲을 가꾸고 있었습니다. 다양한 나무들은 자기 본디의 모습과 체질에 맞게 잎 피우고 색 드러내면서 넓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 나무들과 풀을 통 털어 ‘숲’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숲은 개성 있는 나무들이 모여 하나의 세계를 형성해 갑니다. 끼리끼리 또는 서로 다른 이유를 인정하면서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들 머리·허리·팔·다리와 같은 역할을 분담하면서 한 해 한 계절을 살아냅니다. 그리하여 숲의 영혼 또한 우리의 심장 같이 보이지 않는 뿌리에 두고 있는 듯합니다. 뿌리가 부실한 나무는 썩습니다. 가는 뿌리가 적은 나무는 건강한 숲을 이룰 수 없습니다. 굵은 뿌리도 중요하지만 잔뿌리의 역할도 매우 소중합니다. 사람 사는 곳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자리에 있는 사람만 중요한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가난한 이웃과 양심적인 서민들이 건재한 뒤 감투 족들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생각을 그리하다보니 바라보는 숲도 큰 나무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항꾸네(함께) 제 자리에서 제 빛을 소리 없이 드러내며 ‘완성의 숲’을 향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습니다. 비 내리는 4월 중순 밤이었습니다. 여암선생과 정종대포 집에서 백화수복을 마셨습니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앉아 격 있게 대화를 풀어나갔습니다. 그 때, 여암선생 뒤에는 커다란 거울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울 속에 알 듯 한 사람이 비쳤습니다. 눈동자 고정시켜 보니 그게 바로 나였습니다. 얼굴 양분하여 아랫부분 코와 입가주름은 포탄 맞은 땅거죽처럼 패이고 굴곡져 있었습니다. 짜증이 묻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거울 속 현실의 나와 마음 속 과거의 내가 융화를 못한 것이지요. 얼굴에 불만을 느끼며 나는 ‘이 얼굴 되기까지 무엇을 하고자 했는가?’ 하는 생각이 무섭게 가슴에 얹혔습니다. 그 순간 ‘술 안 들고 무슨 생각하느냐’는 여암선생의 걸걸한 음성에 나는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내 등 뒤 TV에서는 진도 앞 바다 〈세월호〉 침몰사건 소식만 되풀이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희생당한 어린 영혼들에게 나이 든 자로서 미안하고 무참한 마음이었습니다. 밤 시간은 깊어가고 희생당한 유족들 심장은 타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구조 활동은 거의 없이 정부의 대책회의는 이틀이 지나고, 학생들을 전원 구조했다는 거짓 방송은 유족들을 분개하게 했습니다. 국가도 정부도 군도 경찰도 검찰도 힘을 못 쓰고 있었습니다. 조국의 한계 같은 것이 뼈저리게 느껴졌습니다. “움직이면 더 위험하니 방에서 꼼짝하지 말라”는 어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학생들은 모두 물 속 저승으로 수학여행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믿지 않고 밖으로 나온 사람과 선장께서는 살아남아 세상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침몰한 〈세월호〉가 남긴 ‘4월의 진실’입니다. 세상은 그렇듯 단장의 아픔인데 숲은 4월의 하늘 아래에서 양떼의 털 같이 부클부클 연한 녹색 옷을 입고 짙어만 갑니다. 그 숲 앞에서 나는 생명의 의미와 완성되어가는 숲을 맨눈으로 실감하고 있었습니다. 4월의 숲을 바라보며 스스로 행복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슴 한 곳의 찜찜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세상 속에서 끓고 있는 ‘4월의 아픔’때문이 아닐까요.△ 수필가 김경희씨는 1985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펜클럽한국본부 전북위원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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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25 23:02

은방울

무녀가 모둠 뜀질을 하면 꽃처럼 장식한 신대 상단의 방울들이 짤랑짤랑 맑은 소리를 낸다. 한바탕 뜀질로 신명을 다한 무당은 제 자리에서 맴돌기도 하고 원을 그리기도 하며 장단에 맞추어 신대를 흔든다. 방울소리가 굿판에 흐른다. 무녀는 쉼 없이 주문을 주워섬긴다. 그녀의 얼굴엔 신을 맞은 듯 화색이 돌고 주위엔 신기가 감돈다. 신맞이를 위한 무녀의 뜀질이나 맴돎에는 별로 눈이 가질 않는다. 눈길은 방울에, 귀는 방울소리에 머문다. 대개는 노랑 방울을 쓰는데 오늘은 하얀 방울이다. 백통인지 스텐레이스인지 은인지 구별도 할 겨를도 없이 하얀 방울이 짤랑짤랑 울리면 가슴 안에서 긴 반향이 읾을 느낀다. 가슴 안에 눅눅한 바람이 스민다.어릴 적 어머니께서 가끔 말씀하셨다. “너는 방울이어야. 그것도 보얀 은방울이어야.”옆 동네에서 일을 보고 점등을 넘어오는 참이었다 한다. 점등은 동네 동남쪽에 있는 상당히 가파른 고개였다. 길 왼쪽 낮은 둑은 평평한 밭으로 이어지고, 오른쪽나지막한 언덕 위로는 비탈 벋어 오른 밭, 꼭대기는 노송이 우거진 야산이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밭은 고구마 심은 황토 이랑이 허적했다. 노송 윗가지가 보이기 시작할 지점에서였다. 오른쪽 언덕 중동에 언턱이 져 있고 그 위에 밀가루 같이 몽근 모래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모래를 헤쳐 보았다. 까만 소반이 나오고 그 소반 위에 은방울 한 쌍이 놓여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집어 들었다. 집어 들다가 꿈에서 깨고 말았다.그 은방울이 내 태몽이라 했다. “은방울, 생김새는요?”“색깔 보얗고 귀엽게 생겼재, 시방도 눈에 선히야.” “흔들어 봤어요?”“소리는 못 들었어야.” 태몽 이야길 들을 때마다 궁금한 것은 소리였다. 은방울의 진가는 생김새보다도 짤랑짤랑 맑은 소리일 테니. 그러나 어머니는 소리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바로 위가 다섯 살 터울의 누님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취학 전에는 누님의 반짇고리에서 울긋불긋한 비단 헝겊을 꺼내 벌여놓고 구경하는 게 재미있었다. 학교에 들어가서는 뜀박질, 공차기, 자치기보다 공기놀이, 오자미놀이, 팔방에 더 빠져 지냈다. 때로는 풀각시를 만드는 데 재미를 붙이기도 했다. 보는 사람이 없을 때는 제법 신명나게 춤을 추다가 인기척만 나면 숨어버리는 일도 있었다. 가까운 사람하고가 아니면 아예 입을 봉하기 일쑤였다. 소년 시절, “구멍 속 배암이 한 자가 되는지, 열 자가 되는지 어찌케 알것냐?” 어머니의 걱정을 귓바퀴에 매달고 자랐다. 그때부터 나는 구멍 속에 든 뱀이었다. 바위 사이에 또아리를 뜬 까치살모사도, 열사熱沙의 구릉 밑에서 꼬리를 흔드는 방울뱀도 아닌 그저 논두렁 구멍 속에 숨어 혀만 날름거리는 물뱀이었다. 어릴 적엔 날씨가 잔뜩 흐린 날이면 동네 옆 고래실에서 ‘우웅, 우웅’ 으스스한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어른들은 구멍 속에서 우는 구렁이 소리라 했다. 한물이 질 징후라 하기도 했다. 구렁에서 울려오는 그 소리는 은근히 사람의 심장을 옥죄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구렁도 아닌 물뱀이었다. 해를 마시는 꿈을 꾸고 낳았다는 홍길동이나, 용이 오르는 꿈을 꾸고 낳았다는 이몽룡의 태몽은 언감생심이지만, 적어도 사내의 태몽이라면 호랑이가 포효한다든가 황소가 달려드는 꿈쯤은 되어야 제격이 아닌가. 그런데 작은 소반 위에 놓인 은방울이라니. 그나마 소리 한 번 내보지 못한 방울이라니. 무당의 방울이 흔들어도, 흔들어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어떻게 신을 맞아들일 수 있겠는가. 흔들어도, 흔들어도 짤랑 소리 한 번 내보지 못한 은방울은 이제 꺼멓게 녹이 슬어버렸다.△수필가 김형진씨는 1997년 계간 〈수필〉로 등단. 수필집 〈종달새〉, 수필평론집 〈이어받음과 열어나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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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18 23:02

그네타기

봄볕이 좋은 날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 나왔나보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던 아이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이의 발걸음이 그네로 향했다. 엄마가 그네를 가만가만 밀어주니 아이는 까르르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아이의 작은 엉덩이가 그네에서 빠질까 염려스러워 엄마의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아이를 태우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반복하는 그네를 물끄러미 바라보니 얼마 전에 읽었던 신문기사가 생각났다. 세 모녀가 반 지하방에서 동반자살을 했다는 뉴스다.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니 생활고를 비관한 그들의 삶이 여실히 드러났다. 집은 비좁고 세간들은 난잡했다. 하얀 봉투 하나를 남겼는데 신문사진은 그것을 클로즈업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이다. 집주인에게 죄송하다는 인사도 남겼다. 처절한 가난 때문에 극한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던 그들이 마음에 품은 것은 미안함이었다. 고단하게 살던 그들이 차라리 누군가를 향해 분노했다면 어찌 그런 선택을 했느냐고 안타까움이라도 비추겠건만. 신문지면을 넘길 때마다 살기 힘들다는 사람이 없는 날이 있었던가.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 하기에 아등바등하며 산다.나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모습이 더 이상 어색하지도 않다. 내가 더 먹고, 더 편안히 누리려 한다. 누가 감히 남을 위해 양보하며 손해를 보려 할까. 포근한 봄볕을 고스란히 받으며 그네를 타듯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살아가는 것은 그네를 타는 일이다. 어느새 올라탄 그네에서 동아줄을 단단히 잡고 색 고운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환한 웃음을 짓는다. 그네는 올라갔다가 곧 내려오지만, 멈추지 않고 푸른 하늘을 향해 끊임없이 날아오른다. 그네는 올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려올 때도 있다. 다시 올라갈 때는 앞서보다 더 높이 날아오르려고 무릎을 구부려서 힘껏 굴러줘야 한다. 눈을 질끈 감고 자꾸 도전해야 한다. 엄마 손을 잡고 나온 아이처럼 어린 시절에는 혼자서 그네를 탈 수 없다. 몸을 잡아주고 살살 밀어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엄마나 언니, 때론 친구일 때도 있다. 점점 그네 타는 요령을 배우고 혼자서 탈 수 있어도 힘에 부친 순간에는 누군가가 그네를 밀어주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세 모녀에게는 그네를 밀어주는 이가 없었다. 왜 도와주거나 지켜봐주는 이가 없었을까. 살짝 힘을 실어주었더라면 그네 타기를 포기하지는 않았으리라. 주변에서 그네를 타고 있는 많은 이들을 돌아본다. 지쳐서 구를 힘이 없거나 오랫동안 그네타기를 멈춰서 다시 용기를 내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속도가 줄어서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이들도 있을 테고, 급기야 그네를 멈추려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들 곁에서 약한 힘으로라도 밀어주고 싶다. 환호성을 지르며 응원을 해 주고 싶다. 비록 아이의 뒤에서 잡아주는 엄마처럼 온전한 희생을 보여줄 수는 없을지라도 허공의 바람을 가르며 신나게 그네타기를 하도록 함께하고 싶다.△ 수필가 이해진씨는 〈대한문학〉으로 등단. 행촌수필문학회늘푸른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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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11 23:02

모악산에서 본 찌르레기 부부 새

봄이란 계절 앞에 전해오는 꽃소식은 언제나 반갑다. 그러나 이제껏 머물다간 긴 겨울과의 이별은 아쉬움을 남긴다. 물러가는 겨울과 찾아오는 봄.그리고 다시 오는 여름과 가을, 春·夏·秋·冬 어느 한 계절도 거꾸로 오지를 않는다. 변하지 않는 자연의 섭리(攝理)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어느덧 맺힌 꽃봉오리를 보니 봄이 다시 찾아오는 모양이다. 봄이 오면 나는 따스한 봄바람을 안고 가끔 주변의 산을 혼자 오를 때가 많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산을 오르는 혼잡함을 피해 조용히 사색(思索)하며 혼자 오르기를 좋아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지난 3월 초순 모악산에 올랐다. 만물이 소생하는 듯 추운 겨울 내내 메말랐던 나뭇가지에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새들의 울음소리도 한결 맑아지는 듯 들렸다. 나는 남달리 모악산에 대한 애정(愛情)이 많다. 그것은 내가 어렸을 적 살았던 집이 모악산 가까이 있었고, 때로는 그 산에 올라 흐르는 계곡 물 속에서 고기도 잡고 가재도 잡으면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그리운 옛 추억이 지금도 아련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모악산을 오르는 좁다란 오솔길도 많았지만 지금은 훌쩍 커버린 나무들로 그 좁다란 산길은 모두 다 사라지고 즐비한 음식점들만이 군무(群舞)를 하는 듯 줄지어 있으니 흘러간 세월에 변해버린 환경은 어쩔 수 없는가 싶다. 그러기에 나는 모악산을 오를 때면 그 때에 내가 알고 있었던 옛길이 항상 생각이 난다.이런저런 생각을 더듬으며 따스한 봄볕이 비치는 대원사 절 집 앞을 지나다가 찌르레기 새 두 마리가 빨간 맹감나무 열매를 열심히 쪼아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조용한 산중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새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나는 혼자서 무슨 큰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무척 반가웠다. 그 새는 마치 바람결에 타고 온 신선하고 해맑은 미소처럼 보였다. 행운이랄까? 한 손만 쭉 뻗어도 금방 잡힐 듯 가까이 있었다. 정신없이 맹감나무 열매를 쪼아먹는 것을 보니 지난 겨울 내내 굶주렸던 모양이다. 맵시 있는 잿빛 날개의 색깔도 거칠어 보였고, 윤기가 없어 보였으며, 몸통의 날렵한 모습도 조금은 메말라 보였다. 그래도 그 새들의 모습이 어찌나 청순하고 사랑스럽게 보이던지 나는 오르던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한참을 눈여겨보았다. 사랑을 속삭이는 듯 정답게 조잘거리는 모습이 마치 한 쌍의 부부 새처럼 다정스럽게 보였다. 얼마간 정신없이 열매를 쪼아 먹던 새들은 배가 불렀던 모양인지 빨간 열매가 많이 남았는데도 어디론지 훌쩍 날아가 버린다. 미련 없이 떠나버린 새들의 뒷모습이 참으로 예뻐 보였다. 얼마 전에 읽었던 시(詩) 한 구절이 생각났다.산새도 들새도 풀씨가 고소하다고 주머니에 넣지 않고 토끼도 다람쥐도도토리 맛있다고 바구니에 담지 않아 (이화주의 동시‘산새도 들새도’) 날아가 버린 새들의 뒷모습에 아쉬움이 남았지만, 나는 그 부부 새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도록 빌었다. 우리 인간 세상도 저 날아간 새들처럼 정답게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면서 한 세상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기와 질투가 없고 미움과 증오가 없는 새들처럼 언제나 배부르면 욕심 없이 돌아설 줄 아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새들은 나에게 행복한 모습이 진정 어떤 것인가를 순간적으로 보여주는 듯하였고, 배부르면 욕심 없이 돌아설 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을 가르쳐 주는 것 같았다. 이제 봄이 더 무르익으면 또 더 많은 새들을 보겠지만, 나는 그 정다운 부부 찌르레기 새를 보면서 일상에서 찌든 마음이 한 순간에 사라지고 싱그럽고 청순해지는 마음으로 가득 차 하루 내내 무척 즐거웠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 새들의 다정한 모습이 머릿속에 남아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수필가 황만택씨는 2008년 〈수필시대〉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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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04 23:02

새내기 여고생의 각오

2014년 봄은 내 인생의 봄날이다. 오십 중반을 넘어 방송통신고등학교 학생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얀 칼라에 까만 교복을 입고 고등학교에 가는 친구가 얼마나 부러웠던가. 뒷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난 멍하니 바라보곤 했었다. 그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때로는 먼 길로 돌아서 다니기도 했다. 어쩌다 학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일단 뒤로 물러설 때가 많았다.하지만 결혼을 하고 자식을 키우면서도 배움에 대한 미련은 또 하나의 자식이 되어 커가기만 했다. 그런 나머지 이것저것 관심을 갖다보니, 학력이 요구되지 않는 분야의 자격증은 여러 개 얻었다. 글쓰기를 좋아하다보니 등단을 하고 수필집 〈엄마는 거짓말쟁이〉를 내놓기도 했다. 그동안 고등학교를 나와야할 텐데 생각했었다. 그럴 때마다 아이 넷을 키우며 내 자신이 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남들의 시선이 부끄러웠다. 일삼아 고등교육도 못 받은 사람으로 밝혀지는 것이 창피해서였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는 나를 이기지 못했다. 이렇게 고비마다 망설이고 미루던 중, 중학교 동창이 뒤늦게 방송통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한 사실을 알았고, 더욱이 70세 어르신이 손녀 또래들과 나란히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연을 어느 수필가의 감동적인 글에서 읽고, 나는 그동안 자제해왔던 충동감이 되살아나 견딜 수가 없었다. 큰 맘 먹고 입학을 하고보니 지난날의 망설임이 모두 기우에 불과했다. 입학전형서류를 가지고 전주여자고등학교를 찾던 날, 설렘과 두려움으로 가슴은 쿵쾅쿵쾅 얼마나 뛰었던가!입학하던 날, 입학생을 대표해서 입학선서를 읽게 되는 영광도 안았다. 평소 바쁜 남편과 서울에서 공부하느라 틈 없는 큰딸까지 꽃바구니를 안겨주며 축하해주었다. 초등학교 입학식보다 하객이 많을 줄 알았는데 남편과 딸만 눈에 들어왔다. 입학식 날, 그때 내 기분은 40년 전의 사춘기 시절로 돌아가 풍선처럼 부풀었다. 교실로 돌아온 학생들 중 절반 이상이 기성세대로 보였다. 그들도 나처럼 고등학교 진학을 못한 것에 대한 아픔 때문에 용기를 내어 왔을 것이다. 입학식 전날 밤, 교실에서 재잘대는 여고생의 모습을 상상했는데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말이 없었고 서먹서먹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대다수의 얼굴에서 당찬 용기와 각오를 보았다. 어디선가 할아버지의 말씀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여자가 많이 배우면 남자의 머리 위로 올라가고 결국 집안을 망친다.’는 터무니없는 소리가 새삼스럽게 떠올라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나의 배움을 막았던 할아버지와 울며불며 대응했지만 설득을 못하고 포기해야 했다. 결코 할아버지의 완고함을 아버지도 설득하지 못하고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못난 애비를 용서해 달라.’고 하셨다. 난 지금, 저승에 계신 아버지께 죄송스러울 뿐이다.시작이 반이라고 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도 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꿈을 실현하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어렵게 용기를 내어 공부를 시작했으니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오랜 세월 가슴속에서 시소타기를 해왔던 나약함은 이미 버렸다. 내가 이루고 싶은 꿈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다. 분발해서 대학진학도 해야겠다. 이미 〈엄마는 거짓말쟁이〉라는 수필집을 내놓기는 했지만 문학 세계에서 더 품격 높은 수필을 쓸 수 있는 역량을 기르고 싶다. 인생은 짧다고 하지만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에는 지금도 늦지 않다. 어쩌면 가장 빠른 나이인지도 모른다. 50대 중반을 넘어선 이 새내기 여고생은 당차게 공부를 할 것이다.△수필가 정성려씨는 대한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엄마는 거짓말쟁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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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28 23:02

좋은 거울

매일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본다. 거울을 바라보며 일신우일신, 일소일소(日新又日新, 一笑一少)를 되뇌며 빙그레 웃는다. 매일 반복하지만 새로워지는 것 같지도 않고 젊어지는 느낌도 없다. 거울을 바라보며 겉모양은 물론 마음속까지 환하게 비춰주는 거울이 있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은 물론 일가친척 웃어른, 친구들이 사실대로 꾸밈없이 마음까지 비춰주는 좋은 거울이 되어 주었다. 요즘엔 공장에서 만든 거울도 제각각이고 사람들은 본 대로 느낀 대로 비춰 주지 않고 밝은 면만 보여주려 한다. 어린 시절 읽었던 백설공주 이야기가 생각난다. 왕비가 거울을 바라보며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고 물으면 거울은 백설공주가 예쁘다고 거짓 없이 대답한다. 요즘 거울은 거짓말을 잘하는 것 같다. 안방에 있는 거울과 욕실에 있는 거울, 서재에 있는 거울이 제각각이다. 욕실에 있는 거울은 얼굴이 조금 뽀얗게 보인다. 그런데 서재에 있는 거울을 보면 얼굴이 야윈 느낌이 든다. 스마트폰으로 다운받은 거울은 얼굴의 잡티나 주름살이 선명하게 보여 많이 늙어 보인다. 겉모양만 비춰주는 공장에서 만든 거울이야 조금씩 다른들 별로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우리의 겉모양과 마음까지 비춰주는 거울이 되어준 가족이나 선생님, 친구들이 바르게 비춰주지 않는 사회가 걱정이다. 좋은 거울들이 사라져 간다. 직장이나 사회에서 동료나 친구지간에도 서로가 좋은 거울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말만 한다. 명심보감(明心寶鑑) 한 구절이 생각난다. 도오선자는 시오적이오 도오악자는 시오사니라.(“道吾善者는 是吾賊이요 道吾惡者는 是吾師”) 나를 착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내게 해로운 사람이고 나의 잘못을 말해주는 사람은 나의 스승이라는 뜻이다.가정에서 손자손녀나 아들 며느리에게도 좋은 거울 노릇을 할 수가 없는 세태다. 칭찬만 해야 한다고 한다. 칭찬은 물론 좋은 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지 않던가? 칭찬을 해주면 해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 기분은 좋다. 그러나 칭찬을 우선해야 하겠지만 사실을 바르게 말해주고 앞으로 잘 하도록 가르쳐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의 어린 시절에는 학교에서 선생님께 매를 맞고 혼난 사실은 부모님이 알까봐 전전 긍긍했다. 부모님이 아시면 선생님한테 혼난 것보다 더 크게 혼났다. 동네 친구들과 모정에서 장난치며 놀다 동네 어르신에게 친구들과 함께 크게 혼난 적이 있다. 억울하고 분해서 아버지께 일렀다. 아버지는 그 어른이 너희들 바르게 크라고 나무랐지 너희들이 미워서 그랬겠냐면서 다독여주셨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선생님은 물론 동네어르신이나 이웃집 아저씨들까지도 좋은 거울노릇을 할 수 있도록 가정에서 부모님들이 잘 가르쳤다. 그러나 요즘은 학교 선생님들도 학생들에게 좋은 거울 노릇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학생들이 잘못한 일이 있어 나무래도 학부모들이 학교를 찾아와 항의하기도 하고, 심지어 선생님들께 폭행까지 하는 일들이 벌어지니 선생님들도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사람들이 많은 식당에서 어린아이들이 위험하게 뛰어다니고 장난을 치며 버릇없이 굴어도 누구 하나 따끔하게 훈계하는 사람이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일가친척들과 선생님, 이웃집아저씨들까지도 좋은 거울이 되어주고 친구 간에는 막걸릿잔을 기울이며 스스럼없이 서로에게 충고를 아끼지 않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수필가 최기춘 씨는 2008년 〈대한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머슴들에게 영혼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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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21 23:02

획일적 사고의 일방통행

옛날식 말이 부쩍 떠오른다. ‘밥 먹고 할 일 없는 사람이 쓸모없이 노닥거린다.’는 말의 실태를 요즘 인터넷이나 페이스 북이나 트위터, SNS에서 자주 목격하기 때문이다. 그곳에 화려하고 건조하게 만연하는 말과 영상의 덤핑을 보라. 오래 곱씹고 새기고 감동할 새도 없이 온갖 말과 갖가지 영상과 상황이 몰래 버린 오폐수처럼 흘러들어버린다. 며칠만 지나도 폐기물이 산더미로 쌓인다.네이버는 정보의 바다라고 하던가. 이따금 찾아볼 때가 있다. 내가 익히 아는 것이 네이버 상에 틀린 경우와 아나마나한 것이 즐비함을 목격한다. 명색이 책을 발간하는 사람이 잘못된 네이버의 정보를 오자誤字나 오류정보까지 그대로 베껴먹은 경우도 발견한다. 그런데 누구나 과오를 저지르고도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몰라서도 알아서도 야료를 눈감는 세상이다.나는 편지를 대신하는 것 외엔, 기계치라는 핑계를 대고 쓸데없이 시간낭비 되는 일엔 기기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비밀스런 직업도 없고 그럴 정도의 위인이 아니나 내 신상명세가 요리조리 까발려지고, 머리나 가슴에 새길 것 없는 일회용 말에 놀아나는 것이 싫어서다. 또 내가 잘 아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를 잘 알고 있다는 건 감시받는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첩보나 간첩 이야기에 넌더리나서인지도 모른다.드디어 미국인 에드워드 스노든이, 인터넷과 E메일과 문자메시지가 감시사회를 가능케 함을 폭로하고 증명했다. 덴마크와 스웨덴, 노르웨이 등에서 스노든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디지털혁명시대에 생활하는 현대인은, 자기도 모른 채 감시받는 수인囚人 또는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을 자각시킨 사건이다.미래학자 니코 멜레의 말처럼 ‘디지털 농노’가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이미 현대경제의 노예로 살아 보았기 때문이다. 디지털기계는 멀리 있는 사람과 소통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극히 개인이기주의자의 외로움을 방사하는 도구로 전락되고 있다. 자기는 자기인생극의 주인공인데, 관객이나 청자가 필요한 것이리라.“미니홈피=내가 이렇게 감수성이 많다. 페이스북=내가 이렇게 잘 살고 있다. 블로그=내가 이렇게 전문적이다. 인스타그람=내가 이렇게 잘 먹고 다닌다. 카카오스토리=내자랑+애자랑+개자랑.” 이런 판이다. 말하자면 자기자랑이요 자기과시다. 자기 맘에 들지 않는 댓글이 달리면 즉시 설교나 폭언, 절교다. 정반합 모두 소통과 대화의 일면임을 모르는 것이다. 인간학이 없는 외로운 인간이 11억 명이란다.허공에 떠서 시간을 말아먹는 이 디지털공간에선 예의와 인격은 깜깜하니, 서글프고 씁쓸하고 덧없다. 맘대로 남의 시간 빼앗으며 온갖 너스레를 보내놓고 자랑스러워한다. 직접 만나서 마음과 사랑을 말하고 정을 쌓는 대신에 여기저기서 주워 모은 말의 화살을 쏘아대며 요지경으로 노는 것이다. 허공의 벽에 대고 혼자 외치고 설치며 인정머리 없는 놀이를 하는 것이다.△시인 겸 수필가 김용옥 씨는 1988년 월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누구의 밥숟가락이냐〉, 수필집〈살아야 하는 슬픈 이유〉, 화시집'빛·마하·생성'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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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14 23:02

이산가족의 눈물

나는 눈시울이 젖어지는 것을 느끼며 이 글을 쓴다. 돌이킬 수 없는 세월에 대한 회한과 내 삶의 잔고가 보이는 세대라서 그런지 조그만 감동에도 눈물샘이 공연한 수고를 한다. 이산가족의 아픔과 러시아 소치의 우리 선수들이 보여준 감동이다. 인고의 세월을 보내며 흘렸던 눈물이 아니었던가.길이나 시장에서 어린이를 잃어버리고 참담한 심정으로 정신없이 찾아 다녔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사라진 아이를 찾기 위해 직장을 그만 두고 온 재산을 다 쓰면서 오토바이로 전국의 구석을 몇 번 째 누비고 다니는 부모도 있다. 자식이 배곯게 하지 않으려고 몰래 물로 배를 채운다. 자식 대신 기꺼이 죽을 수도 있는 것이 부모다. 새끼를 위한 희생은 동물이라고 다르지 않다. 이반투르게네프의 〈참새〉에서 나온 글이다. 보금자리에서 떨어진 어린 새끼 참새를 향하여 개가 닥아갔을 때 돌연 곁에 있는 나무 위에서, 어미 참새가 개의 코앞으로 마치 돌멩이처럼 날아 내려왔다. 그리고는 전신을 벌벌 떨면서 가엾게도 절망적인 부르짖음을 외치고, 흰 이빨이 들어나 보이는 개의 입을 향해 두 세 번 날면서 덤벼들었다. 우리는 고독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쓴다. 어린나이에 부모를 잃은 어린이고 늙어 배우자를 여윈 홀아비가 고독이다. 세상에 두고 온 자기 아들 딸이 학교점심 시간에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것을 죽은 부모가 본다면 그 영혼은 통탄하면서 신을 원망할 것이다. 가장 먼저 해야할 복지의 대상이 굶은 어린이여야 한다. 부모들이 가장 절실히 여기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혈육의 정이고 천륜이다.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전쟁을 한다지만 전쟁의 비참함-모든 것이 파괴되고 부모 자식이, 남편 아내가 죽거나 생이별 하는,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철사 줄로 꽁꽁 묶여 뒤돌아보고 다시 돌아보며 절며절며 고개 넘던 한 많은 미아리 고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던 아내 자식들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헤아려 보자. 그 아픔이 오늘날 이산가족의 눈물이요 한이다. 금강산 호텔에서 상봉을 마치고 버스가 출발할 때 버스 창문에 앙상하고 주름진 손들이 얽혀 떨어질 줄을 모른다. 정은 손에서 손으로 흐른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나 혈육은 가까이 있어서 손잡고 싶을 때 잡을 수 있어야 한다. 누구냐! 피와 살로 얽어 논 혈연의 정을 끊어 놓은 자가? 한 맺혀 죽지도 못하고 기다린 사람들이다. 세계가 다 소통하는 21C 대명천지에 무슨 권리로 오도가도 못하게 하는가? 평화와 공존을 위한 인류의 아름다운 제전이 러시아 소치에서 한창일 때다. 거기에 동참하지도 못하고 음흉스럽게 웅크리고 앉아만 있더니 올림픽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사일을 쏘아 대는구나. 세계인이 열광하는 한 마당, 젊음의 열정과 환희, 인간의 아름다움을 느껴보지도 못하는 북한의 동포들을 생각하면 또 다른 눈물이 흐른다.아, 정녕 통큰 결단으로 우리의 동포들이 자유스럽게 오갈 수는 없는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한 민족으로서 인류의 평화와 공존번영에 기여하는 세계인의 축복받는 나라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수필가 최동명씨는 2013년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 전북수필과비평작가회의, 덕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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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07 23:02

갑오년의 다짐

갑오년의 눈부신 햇살이 솟아올랐다. 금년은 말띠로 청마의 해라한다. 이 세상에 푸른 말이 있을까? 그렇다고 청마는 용처럼 상상의 동물인가?.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청마(靑馬)는 노마(老馬)에 대비한 말이다. 청마는 날렵하고, 씩씩하고, 활기찬 젊은 말이다. 다시 돌아오는 갑오(甲午)년까지 60년 동안에, 말띠의 해는 5번 온다. 이른바 갑오(甲午), 병오(丙午), 무오(戊午), 경오(庚午), 임오년(壬午)년은 말띠의 해로 12년마다 돌아온다. 그 중에서 첫 번째 말띠의 해가 갑오년이다. 그런 의미에서 금년을 청마의 해라고 하지 않았는가 싶다. 내 생애에 두 번째로 갑오년을 맞는다. 첫 번째는 1954년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그때는 6.25전쟁 휴전 즉후, 국민소득 60불대로 전 국민이 끼니조차 걱정할 빈곤한 시절이었다. 우리나라는 무역이 1조원, 수출액 5천억불, 국민소득 2만 4천불로 세계에서 8대 무역강국, 12대 경제대국으로 잘살게 된, 갑오년을 다시 맞이하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든다. 갑오년은 역사적으로 엄청난 변혁이 일어났다. 120년 전, 1894년 갑오년에 는 고종황제께서 양반과 상민의 신분을 차별한 반상(班常)의 철폐를 비롯하여, 관혼상제, 과거제도, 문물제도를 개혁하는 혁명적인 갑오경장을 선포한 해다. 또한 관료사회의 부패와 수탈에 울분을 터뜨린 동학란이 일어난 해이다. 고부군수 조병갑이 과도한 수세를 징수한 반발로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旗幟)를 들고 봉기한 동학군을 관군이 진압을 못하니, 조정의 훈구파는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여 청군이 들어왔고, 개화파는 일본에 요청하여, 일본에서 10만의 군사를 파병하였다. 마침내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일본군사는 물러가지 않고 조선에 주둔하며 침략의 발판을 굳혀갔다. 이 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청국과 맺은 협정에 삼팔선이 등장한다. 조선팔도를 삼팔선이남(4도)은 일본이 지배하고, 이북(4도)은 청국이 지배하는 것을 묵인하는 은밀한 청일협정의 선이, 바로 조선분단의 시초인 운명의 삼팔선이었다. 말의 해를 맞이하여 말을 조심하고, 신중히 하라는 고사명언(故事名言)을 생각해 보았다. 고사(故事)에 삼사일언(三思一言)하라했다. 말을 할 때는 세 번 생각하고, 말을 해야 실수를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상대방과 말을 주고받으면서 말(馬)과 관련된 대화의 기본 예의로 말꼬리 잡지 마라. 말허리 자르지 마라. 말머리 돌리지 마라.는 전해오는 가르침을, 새해의 화두(話頭)로 삼고 일상에서 실천할 것을 다짐했다. 내 생애에 두 번째 맞는 갑오년에는 무엇인가 국가적인 큰 변혁이 올 것 같다. 기초의회를 폐지하고, 소규모 시. 군을 통합하는 개혁이 된다거나, 북한이 내부로부터 붕괴하여, 통일의 문이 열리는 개벽(開闢)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럴수록 선현(先賢)의 지혜로운 법문대로 행동하고, 바른 대화법을 실천해야하지 않겠는가. 아무쪼록 가족 건강하고 안락한 한해가 되기를 법신불(法身佛)전에 축원 드리며 새해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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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28 23:02

러시아의 작은 영웅 빅토르 안

나는 자칭 스포츠 마니아다. 요즘 밤낮이 뒤바뀐 채 제22회 소치 동계올림픽에 푹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대회 땐 아픈 허리 때문에 목발에 몸을 의지하며 전국 경기장을 돌며 관람한 기억이 생생하다. 값비싼 입장권을 구입하고 휴가를 냈었다.동계올림픽 개막 전부터 불운한 예감이 감지되고 있었다. 근래 우리 빙상경기의 주목을 받는 여자피겨선수 김연아, 스피드스케이팅의 이상화, 모태범, 이승훈 등 4명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고 있었다. 쇼트트랙의 최강국인데도 쇼트트랙 선수들에겐 매스컴에서 홀대하는 느낌이었다. 목표는 금메달 4개 이상, 종합순위 10위 이내. 종전 동계 올림픽대회 때보다 구체적이지 못하고 목표치가 낮아 무슨 변고가 있구나!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쇼트트랙이 침몰하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부딪치고 넘어지는 반복되는 레이스, 왜? 작전을 바꾸지 않고 매번 뒤따라 달리다 추월하는 작전만 시종일관 고수하는지 답답하기만 하였다. 코치진이 어련히 알아서 하였겠지만 결과는 굴욕의 참패였다. 운동경기란 지는 해가 있으면 뜨는 해가 있듯이, 비운의 스타가 있으면 그에 대신하여 어부지리 행운의 스타가 탄생하기도 한다. 어느 대회보다 이변이 다수 속출하였다. 흑해 연안 휴양도시 소치의 따뜻한 날씨 탓에 연약해진 빙질의 탓 등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주최국 러시아를 제외하곤 참가국 대부분 비슷한 여건 속에 경기가 치러진다.빅토르 안 선수가 월등한 기량으로 1,000m를 우승한 뒤 경기장 차디찬 빙판에 엎드려 감격의 눈물을 흘릴 때, 러시아 국기를 들고 세러머니를 할 때는 만감이 교차 되었다. 우리나라는 노메달. 태극기가 게양되었다면 얼마나 감격스러울까?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부문 최초의 금메달과 동메달을 러시아에 선사한 그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터 영웅의 칭호를 받으며 비운의 스타로 거듭났다. 앞으로 몇 개나 더 많은 메달을 제2의 조국 러시아에 바칠까? 부러움 뒤에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왜 한국의 안현수가 러시아의 빅토르 안이 되었을까?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 국민들은 의아해 한다. 3년 전 러시아로 귀화한 사실을 매스컴은 매국노라 폄하하며 짧게 보도했었다. 약관 안현수 선수는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에서 3개의 금메달과 1개의 동메달을 제1의 조국, 대한민국에 바쳤다. 세계 7위를 달성 하는데 최고 수훈자였다. 그는 각종 국제대회에서 46개의 금메달을 조국에 바친 작은 영웅이었다. 그러나 그의 조국 대한민국은 처참하게 그를 짓밟아 버렸고 부패한 스포츠계의 희생양이 되었다. 미국이나 선진 유럽을 택할 수도 있었겠지만, 굳이 한때 우리의 적이었던 러시아를 택한 이유는 뭘까? 곰곰이 곱씹어 봐야 할 일이다. 우리 한민족은 정이 많은 민족이기에 혈연, 지연, 학연에 집착함이 어느 민족보다 강한 민족이다. 오래전 40대 중반, 해외여행을 하면서 내 나라가 싫고 정권이, 정부가 하는 일들이 하도 가소로워 이민을 심각하게 고민한 시절이 있었다.우리나라는 영재교육 시설이 빈약하다. 각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까지는 본인과 가족의 희생이 뒤 따른다. 어느 경지에 오르면 창피 하게도 그제야 대한의 아들딸이라며 국가가 야단법석을 떤다. 잘못된 교육정책, 나라를 병들게 하는 고질적이고 암적인 망국의 병폐이다.학연, 지연, 혈연, 아무리 문화적 유산이라 하지만 스포츠에선 절대 배제 되어야 한다. 스포츠맨십이 무엇 인가? 정정당당이다. 스포츠 스타는 일당천의 외교관 이상이다.모든 일에 과정도 중요하지만 스포츠에선 결과를 더 중시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의 어리석은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되겠다. 러시아를 제2조국으로 선택한 안현수 선수를 다시 품으려는 것은 안선수에 대한 모독이다. 빅토르 안이 다시 안현수는 될 수 없다. 되어선 안 된다. 이번 일을 한국 스포츠 발전에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조국을 버린 아픔을 이기고 상처를 잘 치유하여 대성을 빈다. 목구멍이 씁쓸하다.△수필가 김재환씨는 월간 〈수필과비평〉으로 등단. 문인협회 진안지부 회장, 전북수필과비평작가회 회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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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21 23:02

슬픈 테러리스트의 진실

인터넷에서 슬픈 테러리스트의 진실이라는 영상물을 보았다. 지난해 3월 28일, 안중근 의사 사망일에 즈음하여 일본 朝日TV방송이 제작한 45분짜리 안중근 관련 프로그램이었다. 갑자기 이 프로그램이 인터넷 유튜브를 타고 들불처럼 번지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중국이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하얼빈역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일본은 안중근은 테러리스트에 불과하다며 연일 역사를 왜곡하는 언행을 일삼고 있다. 이에 분노한 누리꾼들이 역사의식을 바로 세우자는 충정에서 이 영상을 띄운 듯싶다. 프로그램은 안중근의 어린 시절과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된 배경, 그리고 중국 하얼빈역에서 일본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하고, 뤼순감옥에서 최후를 맞는 이야기를 토크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구성했다. 거기에 안중근의 인간미를 조명하고자 형무소장과 감방을 지키던 간수와의 따뜻한 인간관계를 감성적으로 터치한 인간다큐 프로그램이었다. 가슴이 휑했다. 한참 동안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방송프로그램을 보고 이렇게 감동해보기는 처음이었다. 더구나 안중근 의사가 그토록 미워하고, 죽음을 당한 일본인들이 만든 프로그램을 보고 블랙홀에 빠진 것처럼 홀린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리들의 작은 영웅 안중근의 삶이 너무나 애처로웠기 때문이다. 30살이라는 나이에 일본 총리대신의 가슴에 총탄을 날리고, 의연하게 대한독립만세를 부를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에게는 아내와 두 아들이 있었다. 양반집 가문의 귀한 아들이었다. 그런데 왜, 무엇 때문에 낯선 광야에 몸을 던졌을까. 동영상을 보는 내내 가슴이 저려왔다. 아니 그의 삶에 온통 매료되어 푹 빠지고 말았다. 참으로 인간적이고, 평화주의자였던 안중근, 봄바람처럼 온화했던 그가 일본 침략자들의 죄목 15가지를 조목조목 지적할 때의 당당함과 재판에 임할 때의 그의 의연함에 전율을 느꼈다. 그래서였는지, 뤼순감옥의 일본인 형무소장마저도 안중근에 매료되어 그가 집필하고 있던 〈동양평화론〉을 완성하도록 경보국에 사형집행을 15일간만 연장해 달라는 서찰을 보냈었다. 또한 마지막 형장에 입고 갈 한복을 만들도록 아내에게 부탁했었다. 나를 감동시킨 것은 또 있다. 자신을 감시하던 일본군 간수 치바 형사와의 관계다. 안중근의 삶과 인간성에 깊은 감명을 받아 안중근 씨,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당신에게 사과하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라 말하고, 그가 죽은 뒤에 일본으로 돌아가 안중근이 써준 유묵 爲國獻身 軍人本分을 새긴 비석을 세우고, 그의 부인과 함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의 명복을 비는 합장을 했다니 얼마나 감동적인 이야기인가. 청년 안중근은 끝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차디찬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31살. 지금까지 한 사람을 이토록 사랑하고, 그의 삶에 감동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세상을 향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대한독립과 세계평화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짧은 생애, 그의 삶 절반을 독립운동에 쓰고 간 사람, 청년 안중근의 삶이 이 아침에 왜 나를 슬프게 하는지 모르겠다.△수필가 백봉기씨는 2010년 〈한국산문〉 〈현대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여자가 밥을 살 때까지〉 〈탁류의 혼을 불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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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14 23:02

커피 나오셨습니다

우리말은 경어법이 발달한 언어이다. 공손하게 존대어를 쓰다보면 행동거지가 조신해지고 마음도 따라 점잖게 예의를 차리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깍듯해서 좋은 존댓말일지라도 지나친 공대어는 듣기 거북하다. 더구나 존댓말이 사람에게 쓰이지 않고 사물에 사용되는 것은 옳지 않다.약국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귀에 거슬리는 말들이 꼬리를 잇는다.“그냥 털어 드시면 되는 약이시구요. 약값은 2500원 되세요.”라든가 “약은 만 오백 원 나오셨습니다.” 또는 “이 파스는 얇아서 잘 붙으세요. 1900원, 2600원 하셔서요. 4500원 되세요. 아대(보호대)가 좀 비싸세요.” 등 과잉된 공대어를 듣고 있으려니 심기가 거북하다. 손님을 높이는 건지, 약을 높이는 건지, 약값을 높이는 건지. 들은 대로 적어둔 것인데 지금 보아도 너무하다. 어쩌다 백화점에 가면 존댓말에 놀랄 일이 많다. “고객님, 오늘 나온 신상(新商)이신데요. 색상도 고급이시구요. 디자인도 멋지세요.” 공손함이 넘치니, 참!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뿐이 아니다. “이 구두는요. 다른 매장에는 안 계세요. 가격이 좀 쌔시긴 하지만 무지외반증이 계신 고객님들께 인기가 많으세요.” 등 구두점 젊은 남성의 공대어도 하늘 높은 줄 모른다. 곳곳에 존댓말 서비스가 넘쳐나지만, 당연히 사람이 받아야 할 존대가 잘못 쓰이고 있다. 은행에 가면 통장이나 도장까지 우대를 받으며, 커피집에선 “고객님, 000커피 나오셨습니다.”라고 하니 커피가 한껏 존대를 받는 것이다.나는 아버지께 존댓말을 쓰게 된 사연이 애처롭다. 초등학교에서 버젓이 존댓말과 낮춤말을 배우는데도 4학년이 될 때까지 부모님께 존댓말을 쓰지 못했다. 아버지께선 우리 형제자매들을 앉혀놓고 부모의 체면도 있고,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이란 소릴 들을까 싶다며 앞으로는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께 존댓말을 쓰라고 이르셨다. 그러나 시험문제로는 척척 맞추는 존댓말이 말만 하려면 입이 떨어지지 않아 너무나 힘들었다. 언어도 길들이기 나름이다. 요새는 어른이 아이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쓰기도 한다. 아이를 존중하는 의미도 있겠으나 어른이 본을 보여 어릴 적부터 존댓말을 익히고 습관들이기 위해 그럴 것이다. 그러나 서너 살 아이에게 “아들! 엄마가 큰소리로 말해서 화났어요? 그랬어요? 미안해요.”라며 아이를 달래는 걸 보고 있으면 껄끄럽고도 민망하다. 부부끼리는 너냐 나냐 반말을 하면서 자식에겐 깍듯이 높임말을 쓰는 가정도 보았다. 외국인들이 우리말을 배울 때 까다로운 것이 높임말이라고 한다. 외국인 며느리가 시부모님게 ‘밥 먹으셨어요?’라든가 ‘내가 잘 하실게요.’ 등은 차라리 애교스럽다. 조카가 한창 말을 배울 때 “고모, 연우가 그림 그렸다요.” 또는 “아까 인사 했다요.”하며 말끝에 ‘요’를 붙일 때마다 제 엄마가 바로 잡아주려고 애를 썼다. 난 아이가 그렇게 말하는 게 귀여워 고쳐주고 싶은 생각은커녕 나도 따라 하고 싶었다. 그러나 TV에 나와서 우리나라를 ‘저희나라’라고 하거나, 자기 남편을 ‘저희 남편’이라고 하는 걸 보면 속이 탄다. 우리말, 우리글, 우리민족 등 낮출 대상이 아닌데도 낮추는 것 또한 존댓말이 지나친 탓이다.존댓말을 쓴다는 것은 경의를 나타내는 것이며, 상대에 대한 예우를 함으로써 자신의 품위를 갖추게 된다. 말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나타내는 도구이기에 아무렇게나 사용한다면 자신은 물론 상대의 품격까지 떨어뜨리게 된다. 그러므로 존대어를 적절히 쓰는 것이야말로 언어로 인격을 다듬는 일이며 세상을 반듯하게 꾸려가는 길이 될 것이다.△수필가 김춘자씨는 1998년 〈지구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꿈꾸는 달항아리〉 〈썰마의 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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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07 23:02

안항(雁行)

손가락이 자꾸 아둔해 지고 어께가 시리다. 나는 앉은뱅이책상을 밀치고 보일러 눈금을 한 칸 높였다. 눈송이가 창 너머 맞은편 쓰레기 분리대에 소담하고, 박새 두 마리가 향나무가지 속으로 날아든다. 나는 한참동안 눈을 바라보다가 눈주름의 뜻 없는 물기를 까닭 없이 닦았다. 겨울방학이었다. 얼굴도 모른 독지가가 보내준 앉은뱅이책상을 챙겨 들었다. 눈은 내리고 버스는 빈 들을 달렸다. 다시 갈아 탄 버스는 시내를 벗어나 들판을 무질러 후미진 마을을 거쳐 마을길을 돌고 멎다가 달리기를 반복했다. 군계(郡界)를 벗어난 막 버스가 눈보라 들판 어디쯤에서 벙거지 한 분을 태웠다. 맏형 또래였다. 버스는 해안 초입에 이르러 엔진이 멎고 하차하는 서넛 속에 나도 끼어 내렸다. 눈앞에 남짓 집으로 가는 길이 이십 여리 남짓 놓였다. 어쩐다. 벙거지가 선뜻 눈발 속으로 들어섰다. 주춤하다 나도 나섰다. 나는 고2였다. 산굽이를 돌아들자 눈은 멎고 구름 틈으로 쏟아지는 달빛 폭포를 가르며 기러기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등성을 넘었다. 형설 표 책상 아닌가.어찌 아세요.그게, 저벙거지가 책상을 들어주었다. 잿백이로 이사든 들녘 집 학생이든가.예에.할 마님은 아무개 댁이고.입이 얼어 대답이 쉽지 않는데 눈길은 몹시 팍팍하고, 춥고, 배가 고팠다. 손가락이 먹먹했으나 쓰러지면 안 된다.나도 소년 때 들녘의 꼴머슴이었다네. 육 ? 이오 전란 통에뜬금없이 6?25라니. 얼어붙은 머릿속이 새삼스레 오그라들었다. 넷째 고모가 들추어준 내 3살 때의 6?25는 몽둥이가 판을 치는 세상이었다. 아버지의 행방을 집요하게 추궁했다던가. 안방 문짝이 박살나고 후려갈긴 간장독에서 검은 홍수가 쏟아지던 앞마당의 기억이 희미하다. 벙거지가 언 손을 후후 불었다.산토깽이가 마당으로 들었어. 그 해 겨울에.잡기는커녕 노마님이 시래기를 던져주었다 한다. 몽둥이패를 따라 나서는 집안 청년 몇을 만류하며 버선발로 고샅을 좇던 노마님이 선하다며 벙거지는 나를 보았다. 까막눈의 청년들은 그저 몰려다니며 패고 두들기는 모진 시국이었다고 한다. 행랑채 문구멍으로 숨어 듣던, 달빛 벙벙한 눈밭에 번진, 노마님의 맨 울음이 귀에 쟁쟁하다고도 했다. 벙거지는 산굽이 하나를 더 돌아야한다며 책상을 건네줬다. 지서 들리면 나를 찾더라고.매운 산바람 한 줄기가 더 이상은 말을 아끼라는 듯 검은 털벙거지를 벗길 뻔 했다. 언 달은 푸른 밤하늘 틈을 비집어 숨바꼭질을 하고 책상을 출썩이는 손가락은 감각이 없다. 윙윙 울던 전신주가 마지막으로 물러선 언덕배기 저만큼 낮은 흙담집 추녀 끝의 자부룩한 불빛 속에 시래기가 어른거린듯하다. 할머니의 기척인 모양이다.노마님의 먹물 깊은 큰 아드님이 내 까막눈을 틔워 줬네. 꼴머슴인 나를 아들처럼 대접했어, 사람은 평등하다며.벙거지가 헤어지며 남긴 끝말을 곱씹다가 자칫 미끄러질 뻔했다. 문득 서너 살인 나를 지게에 걸머지고 천자문을 외우던 멀고 희미한 스틸 한 컷이 휘적휘적 잔등으로 접어드는 벙거지의 뒷모습에 겹쳤다. 꼴을 배려 나서는 지게를 향해 업고 가라고 때를 쓰던 내가 보인다. 나는 잔등을 돌아드는 굽은 그 등을 향해 하마터면 성〔兄〕- 하고 부를 뻔했다. 반세기가 가까워지는 눈 오는 밤길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눈만 오면 아둔해지는 손가락을 주무르며 창밖을 넘겨본다. 눈보라가 아득하더니 어느새 어스름이 유리창을 넘어와 낡은 빠진 책상을 덮는다. 흐린 형설표를 덮어준다.△ 수필가 박영학씨는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가람시조문학회장과 원광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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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24 23:02

새 학기면 생각나는 책가방

텔레비전에 젊은 엄마가 나와 책가방이 십만원 넘는다니 너무한다고 말했다. 나는 젊은 엄마가 여태 까지 책가방이 십만원 넘는다는 걸 몰랐다니 오히려 그것이 놀랍다. 벌써 손자놈이 4학년과 3학년에 올라간다. 새해가 되었으니 당연히 올라갈 것이다. 헌데 손자가 학교에 입학한다고 해서 가방을 사줄까 하고 백화점에서 비싼 걸 사줄 형편도 못되는지라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다. 손자가 원하는 캐릭터는 그래도 중간 정도라고 한다. 나는 가방을 사주는 대신 돈을 이체해주면서 며느리더러 가방 사는데 보태라고 했다.농촌에서 책가방 하나가 십만원이 넘는다고 하면 믿겠는가? 하지만 할미노릇은 해야겠고 재정은 부족하고 별수 없이 보태주는데 그쳤다. 나는 이미 삼년전에 가방이 십만원 넘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아이들옷이나 장난감이나 무조건 사주는 대신 제 엄마한테 취향을 물어서 사주어야 한다. 물론 옷 같은 것은 절대 사주지 않고, 제철 과일을 정보화마을에서 배달시켜주는 것을 즐겨한다. 가방이나 필통은 아이들이 취향과 요즘 유행하는 선호도에 따라 달라진다.더구나 텔레비전에서는 십만원짜리가 아닌 최고가 64만원짜리 가방을 화면으로 비춘다. 거긴 40만원이 넘는 것이 보통이다. 이게 말이나 되는가 말이다. 64만원이면 근로자들의 한 달 월급이다. 어떤 아이들이 그런 가방을 짊어지고 다니는지는 모르지만 씁쓸하다.예전의 우리들은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친구들이 없었다. 농촌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우리학교에서 가방 든 아이를 보지 못하였다. 중학교나 가야 가방을 사주었다. 우린 거의 보자기에 책을 말아서 허리에 두르고 다니거나 들고 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뛰어가다가 풀러져 내리던 책보에서 책과 필통 지우개가 주르륵 쏟아지기가 일쑤였다.어떤 아이들은 필통도 없었다. 언니 오빠들이 도시로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면서 동생들의 선물은 비싼 지우개나, 필통을 사오는 것도 아주 큰 선물이었다. 진작부터 농촌의 아이들도 메이커의 문구를 사서 쓰고 있다. 내가 사는 면소지에는 유명 문구가 들어온 것이 내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때이다. 그것도 큰놈이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다. 그러니까 26년 전이다.산골에서 전주까지 완행버스가 다녔기 때문에 전주 풍남문 근처에 문구 도매점에 가서 노트나 지우개 연필 등을 여러 권, 여러 타스로 사다 두고 주었다. 메이커의 문구는 비싸기만 했다. 아이들이 중학교에 들어가고 고등학교에 가면서부터는 가방도 내가 직접 사다주는 것은 끝이 났다. 제각기 알아서 사야했기 때문에 돈만 주면 되는 것이엇다. 그렇게 문구점과 멀어졌다가 손자 녀석이 초등학교에 입학한다기에 가방을 사려다가 비싼 가방 값에 놀라 나자빠졌다. 새 학기가 다가오면 방송에서도 너무 비싸다고 하면서 특집으로 꾸민다. 비싼 가방을 화면으로 비추면서 말이다.우리들의 옛날은 책보를 허리에 매달고 산으로 들로 논두렁으로 뛰어다니던 날도 있었다. 봄이면 나물을 캐서 책보에 같이 싸가지고 가기도 했고 돌아보니 50년 전 일이다. 내가 아이들을 초등학교 보낼 때만 해도 손으로 돌리는 연필깎기가 아주 비싼 값이었다. 그거면 최고였다.책가방들이 이젠 고급화 되다가 사치품이 되어간다. 어른들이 명품가방을 선호하듯이 아이들이 명품 책가방에 눈독을 들인 것이다. 누구 탓인가? 그 부모들 탓이다. 서로 내 아이만은 좋은 것을 가져야 한다는 시기심 때문이다.보자기에 책을 싸가지고 다녔던 아이들은 지금은 거의 5,60대 어른이 되어서 늙어간다. 지금의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늙어가면서는 무얼 추억하며 살까? 문득 앞으로 50년 후가 궁금해진다.△수필가 김여화씨는 수필집 〈아낙에 핀 물망초〉 〈행복의 언덕에서〉 등을 냈다. 임실문협 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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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17 23:02

버팀목 같은 친구

친구란 멀리 떨어져 살아도 마음에 항상 담겨 있다. 그리움이 따르지 않는 친구는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친구를 갖는다는 것은 인생을 수놓는 것이나 같다. 우리는 좋은 친구가 있기를 바라지만 스스로 누군가의 친구가 되었을 때 더 행복하다. 내 곁에 친구는 얼마나 있을까! 누군가에 가깝고 편안한 존재 인지 또는 노력하고 있는지 더듬어 보아진다. 고의를 넘기면서 친구란 의미를 생각하니 나를 지켜준 그 동안의 친구들이 고맙고 삶의 버팀목으로 여겨진다. 농촌 마을에 태어나 어린 시절 앞 내가에서 발가벗은 몸으로 물고기를 손안에 잡으면 팔딱거리는 모습을 보며 좋아해 주던 그때의 친구가 아련히 떠오른다.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내 인생의 잔뿌리로 자양분을 올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세월의 흐름에 학창시절 여름 햇볕 아래 비포장 길을 걸었다. 얼굴과 등에 흐르는 땀방울을 없애려고 길가 나무 밑이나 처마 밑 그늘에 앉아 계절의 풍광 이야기로 피곤함을 풀어주던 길동무가 잊혀 지지 않고 있다. 학년이 바뀌어 새 친구가 옆 자리에 다가오면 반갑고 친해지면서 공부도 열심히 하여 도움이 되었다. 그 친구와 경쟁하듯 외웠던 세계 여러 나라의 수도가 매스컴에서 시사 정보나 기상예보가 있으면 더듬거리지 않고 이해할 수 있어 고마울 때가 있다. 그 친구들이 오랜만에 동창회에서 만나면 학창시절의 옛 추억이 떠오르고 그 동안 사회 각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여 민주 역사 발전에 기여해준 것이 자랑으로 내 인생의 튼튼한 줄기를 만들어 주고 있다.인간은 육체를 가진 이상 애정이 언제나 필요하다. 그러므로 삶의 마지막 날까지 변하지 않는 것이 우정이다.직장에 근무할 때도 아침 밝은 인상으로 인사를 나누며 자리에 앉아 하루 일과를 윤기 나도록 도와준 동료가 있어 퇴직 후에도 빛 고운 열매로 반짝이고 있다. 근무지를 옮겨 다니면 혹시나 서로가 무관심 속에 세월을 보낼까 걱정했지만 그 시절 같은 것을 함께 즐기며 업무를 도와준 동료가 마음에 자리하고 있다. 그 시절 봉사의 정신이 남아있어 지금도 젊음으로 살아가게 하고 있다. 노후생활은 어린학창시절부터 직장생활 가정생활이 종합된 제2의 인생으로 글로벌 시대에 적응하며 삶을 살아가게 하고 있다. 이 인생이 끝나면 버팀목 같은 친구는 잎이 모두 떨어지는 것이겠지요. 그러므로 참다운 우정은 삶의 마지막 날까지 싱싱하고 젊음으로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들길이나 산길을 거닐다가 청초하게 피어 있는 들꽃과 마주하면 아름다움에 빠져 옛 친구의 모습과 추억이 되살아나 자연의 설레 임 속에 빠진다. 친구는 언제나 은은한 향기로 몸과 마음을 적시어 살아가고 있다. 그런 사람을 만나 함께 살아 갈 때 행복해 진다. 내가 사랑할 사람이 없고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을 때 나의 존재와 생활은 무의미한 가치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친구가 없는 인생은 사막과 같고 샘물이 말라버린 샘터와 같다. 친구는 자주 만나지 않아도 영혼의 그림자처럼 함께 할 수 있어 좋다. 생에 빛과 향기를 주고 가치와 희망으로 기쁨을 주는 것이 친구다. 나의 행복 조건 중에 버팀목 같은 친구가 있어 애정의 향기를 발산할 때 진정 아름다운 삶이라 믿어진다.△ 수필가 황춘택씨는 2007년 대한문학으로 등단. 현재 '행촌수필'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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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10 23:02

겨울 속의 새봄

겨울 속에서 봄을 캔다. 지난번의 혹독한 추위와 폭설의 자취가 산그늘에 희끗희끗 남아 있다. 화분 갈이를 하려고 흙을 담으러 내려왔다가 밭두둑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냉이를 발견했다. 두껍게 쌓였던 눈 속에서도 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흙을 털자 뿌리는 하얀 맨살을 드러냈다. 추위를 이겨낸 냉이가 향긋한 봄 냄새를 풍긴다.눈이 쌓이고 땅이 얼게 되면 모두 출퇴근 차량 운행에 긴장해야 한다. 도시인들은 단 하루도 백설 속에서 마음을 비울 시간조차 없다. 길이 막혀서 소동이 일고 교통사고가 여기저기에서 터지기 일쑤다. 그래도, 그리움의 정령들이 춤추는 듯 눈 내리는 하늘을 볼 때 아! 하는 그 첫 느낌은 놓치지 말일이다.물탱크에서 내려오던 호스가 얼었었다. 폭설이 연이어 내렸던 그 겨울, 처마 밑의 고드름은 옛사람의 고향이었다. 날이 풀어져야 호스는 녹았다. 마당 가운데 있던 수도에서 물을 받아다 집안의 물독에 담아두고 사용해야 했다. 춥고 불편했던 일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러나 그 순백의 향연을 어찌 생활의 불편 때문에 투덜대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오랜만에 보는 눈꽃들의 세상 나들이가 아닌가. 기쁘게 축제를 벌이자고 눈발은 나를 꼬드겼다. 생활의 번거로움과 분주함도 이 고요한 순백의 평화에 스르르 잠겨들 수밖에 없었다.백설은 순백의 나라를 연출한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렸던 백설의 하강이었던가. 그래서 내려올 때 그토록 살풀이하듯 윤무(輪舞)를 즐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쌓인 눈은 사랑의 덩어리였다. 사랑으로 하나 되고 사랑의 힘을 확인한 적설(積雪)은 새 삶을 꿈꾼다. 가을이면 돌아가야 할 사연을 안고 왔던 푸른 잎처럼 적설도 본래로 돌아가야 하리라. 햇볕을 받아 녹으면 땅을 적시고 땅속으로 스며들어 생명수로 흘러야 한다. 만나는 풍광을 감격의 눈물로 맞이한다. 계곡을 따라 흐르며 숲의 정령들과의 은밀한 랑데부도 즐기리라. 시냇물이 되어 멋진 바위와도 만나고, 청아하게 흐르는 소리를 내며 달빛을 적시리라. 드디어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되어 사공의 뱃노래에 한 숨 돌리기도 하겠지. 때로는 벼랑에서 천둥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폭포수가 되어 아름다운 곡예(曲藝)도 펼친다. 바다에 이르기까지 물은 귀향가(歸鄕 歌)를 읊조리리라. 거실 가득 들어온 햇살이 포근하다. 잠시의 향연은 언제나 찬란했다. 묵묵히 기다렸던 태양의 따사로움은 또 얼마나 고마운가. 눈의 잔치는 뒤풀이를 아쉬워하는 듯하다. 그렇다. 축제는 늘 그렇게 왔다 가는 것이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름다운 것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그리고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란다. 육신으로는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갈구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끝없는 인간의 욕심은 엄연한 생명의 순환법칙까지도 마음대로 조종하고 싶어 한다. 얼마 전, 신문이나 TV 뉴스에서는 인간복제 이야기로 떠들썩했던 적이 있었다.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질서를 잃어 가면서 눈앞의 시급한 문제들만 해결하려는 욕심에 사로잡힌다면 엄청난 혼란을 일으킬 것은 뻔한 일이다. 인간성의 회복이 시급한 현대에 더욱 타락의 길을 재촉하는 과학기술이 된다면 인류의 발전을 꾀하는 과학이 앞으로 큰 재앙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연일 눈이 내리던 어느 날, 아! 이 적설이 녹지 않으면 어쩌랴!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것은 마치 생명이 태어나기만 하고 돌아가지 않으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상상해 보라. 순리대로 순환되고 있는 생명의 법칙이 얼마나 은혜로운가. 순리에 역행하려는 인간만이 괴로울 뿐이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차원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잃어버린 에덴의 동산을 회복하여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하리라. 생명나무를 찾을 수 있는 밝은 혜안이 필요할 것 같다. 육신으로는 단 한 번뿐인 생이다. 천수를 다할 때까지 서로에게 아쉬움을 남기지 않는 삶을 영위했으면 좋으련만. 사람이 무덤으로 돌아갈 때 생의 찬미를 부르며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백설의 귀향(歸鄕)처럼.잔설 속에서 캐낸 냉잇국이 새봄의 서곡이 되어 내 안에서 감돌아 흐른다.* 수필가 조윤수씨는 2003년 〈수필과비평〉으로 등단. 〈바람의 커튼〉 〈나도 샤갈처럼 미친(及) 글을 쓰고 싶다〉 〈명창정궤를 위하여〉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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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03 23:02

흰지팡이 여행

흰 지팡이가 눈에 들어온다. 시각장애가 있는 내 아들 이삭이의 것이다. 아이는 학교에 갈 때 흰 지팡이를 가방에 꼭 넣어 가지고 다닌다. 나는 가방에 든 흰 지팡이를 볼 때마다 늘 마음이 쓰인다. 언젠가는 저 흰 지팡이를 아이의 손에 들게 하여 세상 밖으로 내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삭이가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던 사고 전, 여섯 해에 대한 기억이 가끔 가물거린다. 그때도 첫아이였던 아이를 혼자 떼어놓는 일은 초보엄마인 내게 참으로 힘든 과제였다. 아이가 여섯 살 때 유치원에서 여름 캠프 신청서를 보내왔다. 난생 처음 1박2일 동안 아이와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게 불안하여 신청서에 서명을 하지 못하고 며칠을 망설였다. 캠프 당일 날, 버스에 올라 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아이의 동그란 두 눈동자와 마주쳤다. 불안해하는 내 마음을 혹여 눈치라도 챈 것일까?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생긋 웃더니 걱정 말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다음날 캠프에서 돌아오는 아이를 마중하러 나갔다. 버스가 도착하자 개선장군처럼 내리는 아이들 틈에 이삭이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이의 맑은 눈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이렇게 무사히 돌아와 주어 정말 고마워. 이제 너를 믿을게.그날 이후로 늘 잡고 다니던 아이의 손을 조금씩 놓기로 작정했다. 그랬다. 비로소 나는 아이가 세상과 더 가까워지고 홀로 설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엄마가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해 겨울, 교통사고로 시각을 잃은 아이는 더 이상 세상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일반학교에 갈 수가 없어 익산에 있는 전북 맹아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아이의 가방 속에서 흰 지팡이를 처음 발견하던 날, 나는 가슴이 탁 막히고 먹먹한 마음이 들었다. 전래동화 효녀심청에서 지팡이를 들고 구부정하게 걷는 심청이 아버지의 측은한 모습마저 떠올라 우울하기만 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걸까? 학교행사에 갔다가 우연히 교감 선생님을 만나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행훈련을 하는 이삭이의 모습을 찍은 핸드폰 동영상을 내게 보여 주었다. 익숙한 학교공간에서만 지팡이로 보행을 하고 다닐 거라 생각했던 내 생각과 달리 아이는 위험한 차가 쌩쌩 다니는 길옆을 걷고 있었다. 그것도 오로지 지팡이 하나만을 의지한 채. 하지만 아이는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이려는 듯 차분하고 진지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아이는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조용히 익혀가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엄마인 내 마음이 아이를 밖으로 내보내지 못할 뿐이었다. 그런 아이를 보며 흰 지팡이에 대한 생각을 달리 하게 되었다. 지체장애인이나 노인의 보행에 쓰이고 있는 지팡이와 다르게 시각장애인만이 흰색으로 사용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이 지팡이를 들고 걸으면 시각장애인이라는 걸 알고 비장애인들도 그들을 돕거나 배려할 수 있는 것이다. 흰 지팡이를 든 내 아이를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말아야겠다. 내 아이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그들에게 흰 지팡이의 의미를 알려야겠다. 내가 언제까지나 지팡이를 든 아이의 뒤를 계속 따라 다닐 순 없기에. 과연 엄마의 손을 놓고 길을 떠나는 내 아이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다보며 흰 지팡이 여행을 시작한 아이를 위해 정성과 사랑을 담아 간절한 기도를 드린다.* 수필가 노서운씨는 군산 이삭 어린이집 원장, 군산대 평생교육원 전담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수필집 〈상처와 함께 자라는 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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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27 23:02

재탕(再湯)

12월 초 어느 날이었다. 외출했다가 돌아왔을 때 아내는 전날 밤새도록 달이고 짜낸 닭발목과 쇠물팍을 큰 용기에 넣고 물을 채우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런 모습을 본 일이 없어서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버리기가 아까워 재탕을 해본단다. 그러면서 우족을 재탕할 때처럼 불 위에 올려놓고 달이고 있었다. 예부터 전라도 지역에서는 쇠무릎지기를 쇠물팍이라 부르고, 쇠물팍감주는 여인들이 무릎이 아플 때 특효가 있다고 전해져 왔다. 그래서 아내도 내가 가을에 캐다가 말린 쇠물팍으로 가끔 감주를 해 복용했다. 그러나 뇌졸중증세로 한번 의식을 잃은 후로는 항상 입맛이 없다면서 먹는 것이 시원치 않아, 감주를 끌일 때 닭발목을 넣으면 부족한 영양보충이 될 거라는 생각에 닭발목을 사용했다. 벼멸구 모양과 비슷한 쇠물팍의 익은 이삭은 사람 옷에 더덕더덕 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아, 서서 일일이 손으로 떼어내야 한다. 쇠물팍이 사람 왕래가 잦은 곳에서만 집단으로 발견되는 이유다. 나는 늦가을 김장이 끝나면 길가나 텅 빈 밭둑에서 쇠물팍을 캔다. 채소가 심겨져 있는 밭둑에서 캐려면 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김장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다가 실기했다. 갑자기 몰려오는 폭설과 한파 때문에 땅이 얼고 추워서 캘 수 없었다. 그래서 올 가을에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잔득 벼르고 있었다. 그런데 3년 전 봄부터 나는 풀을 만지면 온몸에 이상이 생겼다. 두릅과 고사리를 꺾으러 다녀온 뒤부터 생긴 일이었는데 몸에 두드러기가 일어났다. 노쇠 현상으로 피부가 약해진데다 풀독 때문이라는 진단을 받고, 주사를 맞으며 처방해준 약을 발라야 했다. 5월만 되면 풀독 알레르기 때문에 연중행사처럼 피부과에 다녔다. 그때부터 아내는 내가 쇠물팍을 캐러 다니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아내가 물리치료를 위해 외출한 틈을 타, 나는 배낭 속에 호미와 전정가위만을 집어넣고 길을 나섰다. 가을에 쇠물팍의 대는 갈색으로 변하고, 마디는 상처로 피가 난 소의 무릎처럼 굵고 붉었다. 그런데 이상기후로 늦게까지 파란 잎을 달고 버티던 쇠물팍이 갑자기 쏟아진 첫눈에 그냥 고꾸라져버렸다. 주위에 넘어져 있는 쪽이나 도깨비바늘의 대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평소 산책을 하면서 쇠물팍을 눈여겨 두었기에 망정이지, 이상 기후 때문에 찾아내는데 어려움을 겪을 번했다. 쇠물팍은 다년생이기 때문에 줄기가 큰 것을 캐면 뿌리도 굵어 캐기가 힘들었지만, 큰 뿌리를 캐낼 때의 재미도 쏠쏠했다. 큰 뿌리일수록 뿌리 사이에 낀 이물질을 제거하기가 수월치 않았지만, 아내가 돌아오기 전에 손질을 해서 물이 빠지도록 소쿠리에 담아놓았다. 늦게 돌아온 아내는 상상도 못한 쇠물팍을 보고 놀라워했지만 속으로는 좋아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밤이 되자 내 몸에는 이상증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군데군데가 가려웠다. 손가락으로 긁어서 여기저기가 울긋불긋해졌다. 나는 일체 내색을 하지 않고 비치한 피부약을 아내 몰래 복용하고 참으며 가만히 자리에 누웠다. 약의 효과 때문인지 어려움 없이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어제 밤에 복용한 것이 피부약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확인한 결과 내가 복용한 것은 기침 때문에 사다 놓은 감기약이었다. 피부약과 감기약을 같은 장소에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깜박하고, 눈에 뜨이는 대로 복용해서 생긴 어이없는 해프닝이었지만, 여하튼 감기약을 복용하고 피부질환이 깨끗해졌으니 분명히 위약효과(placebo effect)라는 생각이 들어 혼자 배꼽을 쥐었다.다음날 나는 재래시장으로 가서 닭발목 5kg을 사왔다. 아내는 대추와 생강 등 몇 가지 첨가제를 넣고 밤새껏 고운 뒤 짜내더니 다시 물을 붓고 재탕을 했다. 그 재탕한 추출물을 나에게 보여주면서 싱글벙글했다. 내 눈으로 보기에도 원탕과 다름이 없었다. 원탕은 냉장고에 보관하고 재탕부터 복용하겠다고 말하는 아내의 태도가 넉넉해 보였다. 날씨관계도 있었지만 풀독 알레르기를 무릅쓰고 캐온 쇠물팍을 소중히 여기려는 아내의 정성어린 마음이었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과거의 추억을 되새기고 아쉬워하며 살 수도 없는 일이지만, 자기의 과거를 망각하며 살아갈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아내는 나의 지난날의 소중한 추억을 뒤적거리고 불을 지피며 재탕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었다.* 수필가 이희근씨는 2009년 계간 '문학사랑' 수필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수필집〈산에 올라가 봐야〉 〈사랑의 유통기한〉〈아름다운 만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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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20 23:02

김치 소통

요즘은 누가 외식을 하자고 해도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갓 버무린 김장 김치에 뜨끈뜨끈한 밥만 있으면 만족스런 식탁이었다. 내가 사는 마을에선 해마다 겨울 입구에 들면 김장도 작은 축제 같다. 젊은이는 드물고 노인들이 많은 마을이지만, 이때만큼은 유독 활기가 넘친다. 뒷짐 지고 한담이나 나누던 노인들도 적극적으로 합세한다. 트럭에서 배추를 내릴 때부터 골목이 시끄럽다. 올해는 배추 값이 아주 싸다는 둥, 운봉까지 가서 배추를 가져왔더니 배추 값보다 기름 값이 더 나간다는 둥. 잠시만 바깥에 나가도 오늘은 어떤 집에서 김장을 하는지 대번에 알 수 있다. 어제는 앞집, 오늘은 옆집.이 즈음이면 택배 차량도 골목에 자주 보인다. 어머니들의 손맛이 자식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이웃집에 맛보라며 두어 포기씩 배달하는 일은 주로 남자들 몫이다. 쌀집 통장님이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김치를 들고 오신다.맛 있을랑가 모르겄어, 잉? 쪼깨 짭짤헌 것도 같은디.앞집 개인택시 양반도 이날엔 직접 팔을 걷고 나선다. 일의 절차며 방법을 터득한 듯 확신에 찬 목소리가 담을 넘어온다. 앞집에서 가져온 김치를 보면서 고마움과 난감함을 동시에 느낀다. 주인양반 목소리만큼 우렁찬 포기김치가 커다란 통에 뚜껑이 닫히지 않을 정도로 담겨 있다. 작년에도 올해에도 그랬다. 무어 특별히 잘 해 드린 것도 없고, 되레 사람들 왕래와 연주 연습이 있을 때마다 한바탕씩 소란을 피워 미안한 마음뿐인데. 더욱이 잘 담근 김치를 그저 듬뿍 주고 싶어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가득 찬 그분의 표정! 작년엔 우리 집 감나무에서 딴 대봉시를 그 통에 가득 담아드렸다. 그런데 올해엔 감나무를 옮겼더니 말라 죽어 버렸다. 유난히 크고 달다고 이웃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던 감이었건만. 이 맛있는 김치 대신 드릴 귀한 게 뭐가 있나하다가 생각해 낸 게 그래 내가 직접 김장을 해 보자. 그래서 내가 담근 김치로 보답하자였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이 나이 들어 난생 처음 김장을 해 보았다. 직장 생활로 버겁다느니, 몸이 아프다느니, 식구가 단출하다느니 해서 굳이 고생해가면서 김장을 해야 하느냐며 외면해 왔던 게 사실이다. 어머니 생전엔 당신께서, 그 후부터는 큰언니가 아주 맛있는 김치를 늘 보급해 주어 따로 김장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고 한 번도 안 해본 김장을 내가 어찌 순순히 할 수 있겠는가? 믿는 바가 있었다. 언니가 김장할 때 적극적으로 끼어들기다. 이웃들의 김장 일이 한참이면, 잠시 대문 밖을 나갔던 남편이 얼굴이 상기되어 들어올 때가 있다. 길 건너 집에서 김장 김치에 삶은 돼지고기를 안주 삼아 동네 남자들끼리 막걸리 한 잔 하고 왔다고 말한다. 갈무리 할 일도 많고 어수선할 텐데, 그 와중에서도 조촐하나마 가장 맛난 것으로 대접하고자 하는 지극함이라니.우연하게도 우리 동네에 예술인들이 많이 살아서 간간이 모이곤 한다. 지난주에는 가장 연배가 있는 강 선생님이 당신 집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김장했으니까. 걍 거그다 밥이나 먹자고.점심을 맛있게 먹고 돌아올 때 우리들 손에 또 선물이 쥐어졌다. 김치 두어 포기와 선생님네 논에서 지어왔다는 쌀 한 봉지씩. 뭔가 굉장한 선물을 받은 듯 가슴이 뿌듯했다.수없는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한 끼도 거르지 않고 먹어 온 김치! 얼핏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제각기 맛이 다르다. 비슷하면서 조금씩 다른 맛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밥상을 오래 지켜 왔다. 비결은, 정성과 사랑이었다. 그것을 만드는 손길에 어린 마음이 김치의 역사와 문화를 만들었으리라.김장 철. 여러 집에서 가져온 김치로 행복한 식탁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정치나 사회 문화 판에서 뭐 좀 한다는 주도층들, 그들에게 김치를 담그는 주부들만큼의 진심과 정성만 있어도, 우리들 눈에 혐오스러운 존재로 비쳐지진 않을 것이라고.* 수필가 겸 소설가인 김저운 씨는 중등 국어교사를 그만두고, 요즘은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에세이집 〈그대에게 가는 길엔 언제나 바람이 불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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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13 23:02

명퇴복 유감

저녁 먹을 즈음, 대리운전 문자 3통에 애경사를 알리는 문자도 있다. 주말 산행의 확인문자까지. 피할 길 없다. 산행에 동참한다. 나오니 좋긴 좋다. 고추에 된장, 멸치에 고추장 안주로 마시는 막걸리는 정상 확인의 묘한 성취감이 있다. 잔 들고 바라보니, 어라 부부동반 선후배들의 아웃도어에는 안주 색깔들이 골고루 들어있다. 아들이 입다 만 내 북면(노스페이스)차림에 비해 언제부터인지 거의 패션쇼다. 친구가 걸친 고상한 컬러에 세련된 디자인의 저 정도 바람막이는 거의 동남아 3박 4일 여행 깜인데. 바람막이로 대표되는 아웃도어 상의는 목까지 올라오는 딱단추를 닫으면 눈비도 비집고 들어오지 못한다. 소위 한계에 도전하는 옷들이다. 히말라야에서 입는다는 이건 구김도 안 간다. 오래 입어도 세탁할 일이 없다. 하여, 머시마부터 할배까지 안 입은 사람이 없다. 하긴 아웃도어가 경제를 살린다니, 내 관여할 일은 아니지만. 옷은 연령층을 넘어 그 사람의 품성과 능력을 나타낸다. 게으른 학생은 입고 잔 추리닝 그대로 학교에 가고, 날씬한 여성은 아디다스 차림으로 백화점에 가도 된다. 그럼 아저씨들은? 등산복 바지차림으로 직장에 간다. 뻔뻔스럽다. 모두 편함을 추구하면서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는 옷차림이다. 이제 산타할아버지 의상도 아웃도어로 바뀐 광고가 나와도 되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발가락 양말과 함께 개량한복을 피한다. 나이 들어 보이니까. 아니, 목이 쑥 빠지거나 맑고 깨끗한 심성이 받쳐줘야 되는 옷이니까. 양복은 거추장스럽고, 뭘 입나 고민이다. 청바지를 간신히 소화해 운동화를 신자니 키가 안 된다. 그렇다고 키높이 깔창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고 컨버스 차림으로는 옷태가 안 난다. 한옥마을이나 영화의 거리를 채우는 젊은 친구들의 야상재킷은 자신이 없고 그러다보니 나 역시 아웃도어차림이 제일 만만하다. 잘생긴 후배가 턱선이 무너지면 고소하다. 쪼잔한 남자의 질투다. 더한 것은 김광석 노래를 잘 부르는 이 친구가 주야장천 바람막이를 입고 다닌다는 것. 그래라. 다행이다. 락을 버리고 팝을 버리고 노래방에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노래 뒤 트로트를 부르면서 우리는 아웃도어차림으로 만나고 있다.이런이런, 나이 먹으면 중후한 신사가 될 줄 알았다. 근데, 이게 뭔가. 다행히 양복 권하는 사회는 아니어서 넥타이는 안 매도 좋은 시절을 살고 있는데. 그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선배 명퇴자들은 하나같이 아웃도어를 입는다. 울긋불긋한 차림에 비닐봉다리도 스스럼없이 막 들고 다닌다. 이 남자들 모두 도련님이고 엄친아인 시절이 있었을 텐데. 친구들아! 이번 동창들 송년회에 아웃도어는 제발 입고 나오지 말라. 당할 때 당할망정 명퇴복은 벗어버리자. 담배 사러 갈 때와 모악산 정상 막걸리 마시러 갈 때 외에는 입지 말도록 하자. 야상재킷으로 밀리터리룩을 소화하는 조영남 아저씨 차림은 못해도, 조금 불편한 옷차림으로 모이자. 어떻게? 후트티는 좀 그렇고 코트에 머플러다. 가방을 들으면 더 좋다. 거기 꼭 넣을 게 없다면 새해 달력이라도 몇 점 들고 와서 나누어 주시라. 아 참, 총무는 아웃도어 금지라고 문자에 첨언하라.* 신귀백씨는 영화평론가. 평론집 〈영화사용법〉이 있다. 고 박배엽 시인의 삶을 조명한 장편 다큐 '미안해 전해줘'감독으로 직접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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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06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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