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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는 엄마 등을 좋아한다

길에서 아이를 보면 한 번쯤 눈길을 주게 된다. 더구나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기 모습은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업힌 아기를 볼 수 없다. 우린 조상대대로 아기를 업어 길렀는데, 요즘에는 캥거루 모양 가슴에다 아기를 안고 다닌다. 자연스럽게 엄마와 아기의 심장이 밀착해 있으니 모자간의 애착은 더욱 짙어지리라. 보기에도 업은 것보다 안고 가는 게 아름답고 세련되어 보인다. 아빠들도 외출할 때면 아무 거리낌 없이 아기를 안고 다닌다. 세월의 변화려니 싶어 별 거부감이 없다. 그러다 집안에 아기가 태어나 요즘 육아법을 접하게 되었다. 아기가 울었다 하면 어깨에 멜빵을 걸어 안으니 아기는 쉬 달래지는 듯싶은데 엄마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게 놀라웠다. 깊은 잠을 안자는 아기면 언제 집안일을 할 것인가! 어쩐지, 애기 하나 데리고 힘들다며 만만한 친정 엄마를 출퇴근 시킨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전평론가 고미숙의 '아기를 업어야 하는 이유'를 읽고 잘못 가고 있는 육아법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의보감 육아법에 "아이에게 70~80세 할머니가 입던 헌 잠방이나 헌 웃옷을 고쳐 적삼을 만들어 입히면 진기를 길러 오래 살 수 있다."고 적혀있다. 아이들은 계절에 상관없이 이불을 걷어차고 잔다. 온몸이 불덩어리에 가깝기 때문에 체온을 조절하기 위한 자구책이다. 이렇게 양기덩어리인 아기들은 당연히 음기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아기들이 음기의 결정체인 할머니의 품을 좋아하는 건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아기를 업어 길러야 하는 이치도 같은 맥락이다. 심장은 뜨겁다. 그런데 아기를 안으면 아기의 심장과 엄마의 심장이 마주한다. 아기의 심장은 더 열이 오를 것이고 엄마의 심장도 더 뜨거워질 것이다. 그 자세를 오래 유지하면 아기도 불편하고 기의 순환이 여의치 않아 엄마의 허리에 부담을 줄 수밖에 없다. 등은 물을 주관하는 신장과 방광으로 이어지는 경맥이 지나가 시원하다고 한다. 그래 등에 업히면 심장뿐 아니라 몸의 양기가 안정된다. 또한 안고 있는 것보다 등에 업히면 시야가 넓어진다. 아기는 지나가는 사람, 움직이는 자동차, 다양한 색채를 통해 흥미진진한 세상을 공부하며 즐긴다. 또한 아기들이 업히는 걸 좋아하는 건 엄마 뱃속에서의 자세와 닮아서 아기가 편하기 때문이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안고 바라다보면 내 아이는 특별하다는 착각에 빠져 아이에게 집착하게 되고, 편견 속에 아이의 인생을 마음대로 끌고 갈 수 있다는 망상에 고리가 엮어질 수도 있다. 이 고리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엄마와 아기는 엄연한 독립체로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그러나 아기를 업으면 아기는 아기대로 엄마 등에서 새로운 세상을 구경하고 엄마는 책을 읽을 수도,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하며 음악을 들을 수도 있다. 이렇게 아기와 엄마는 삶을 이어가며 서로의 배경이 되고 윤활유로서 서로 보탬이 되는 관계로 나아가야 되리라! 엄마의 등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훈련장이자 안식처가 될 것이다.※ 수필가 이의씨는 대한문학으로 등단. 수필집'여자나이 마흔 둘 마흔 셋'을 냈다. 행촌수필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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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9.07 23:02

퇴 짜

바람이 이는지 비가 기울어진다. 간절한 그리움인 듯 새 한 마리 비 맞으며 허공에 편지를 쓰고 있다. 이내 어디선가 나타난 파랑새를 따라 회색 하늘에 스미듯 사라진다. 사라진 것들이 남긴 허공은 더 횅하다. 허전함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해거름을 밟고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형님아우 지내는 이웃의 미장이 황 씨다. 비 오는 덕에 쉬는 날이지 싶다. 별러왔던 막걸리나 한 잔 하자며 재촉이다. 주섬주섬 챙겨 입고 따라 나선다. 평생 미장일을 해 온 흔적인지 앞서가는 황 씨의 오른쪽 어깨가 더 처져 있다. 저 진액을 녹여 식솔을 건사했을 터. 구부정한 세월이 무겁게 다가온다. 낙천적인 심성만큼이나 매사 넉넉한 황 씨는 나이 40이 되어서야 장가를 갔다. 늘그막에 얻은 5남매를 키울 일이 심난하기도 하련만 늘 싱글벙글댄다. 환갑이 넘은 황 씨의 아내는 자유분방한 사람이다. 자유롭다 못해 아내의 자리마저 잊어버리고 며칠, 혹은 몇 달씩 집을 비운다. 나이 차이가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는 풍문도 있고, 감춰놓은 기둥서방이 있다는 말도 있다. 그렇든 저렇든 황 씨는 아내를 부처님, 예수님이라 부르며 그냥 산다. 무엇을 무엇이라 판단 분별을 하지 않는 황 씨야말로 어쩌면 현인인 듯싶다.오락가락 하는 비를 앞세워 시장 골목으로 들어선다. 비릿한 냄새가 마중한다. 비 오는 날 생것전에서 나는 냄새는 삶의 애환이 짙어서 좋다. 미로 같은 좁은 골목을 돌아 돼지 머리와 내장이 끓고 있는 국밥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늙은 주모의 기분에 따라 공짜국물에 든 고깃점이 달라지기에 표정을 이리저리 살핀다. 글도 삶도 허름한 내가 즐겨 찾는 이곳은 막걸리 한 병에 이천 원이다. 만 원 지폐 한 장이면 기분 좋을 만큼 취할 수 있다. 옛날부터 비 오는 날이면 고라실 영감들이 농사일 밀쳐두고 주모의 궁둥이라도 볼 요량으로 찾아와 막걸리 한 병 놓고 종일 앉아 있곤 했었다. 오가는 은근한 입담 듣는 재미는 덤이다. 눈치를 보던 황 씨가 막걸리 한 잔 따르며 머리 허연 맞선을 안주로 탁자에 올려놓는다. 오가며 당겨둔 궁둥이며 힐금힐금 봐두었던 마음새를 미장이 사십여 년 솜씨로 매끈하게도 편다. 앞니 빠진 틈새로 새나오는 분냄새 짙은 말, 못들은 척 내심 따순밥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다는 말에 딴전부리듯 나는, 잠자코 흥덩헌 국물 속 고깃점을 찾아 생각 한 입 우물거리고 있었다."함바집을 허는 여잔디 말일세, 음석 잘 맹글고 아새끼들은 다 커부러서 나갔응게, 아~ 두 사람 만나서 잘 허고 살믄 안 좋겄능가" 유난히 목소리 큰 황 씨의 진한 말에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 같다. 아랑곳없이 황 씨는 거나해진 말을 더 걸친다. "아, 이 사람아 인자는 인생이 백 살이라는디 오십 쪼까 넘어갔고 고로코롬 살랑가? 아랫도리나 실허게 잘 간수 혀서 그 여자 한번 만나보는 것은 어찐가."내친김에 당장 오라해서 만나보자는 말에 나 같은 반거충이가 괜한 사람 데려다 고생시킨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옆구리 허퉁한 내심은 솔깃하기도 하였다.그렇게 안주로 올려 진 함바집 여자의 이야기가 무르익어 가는데, 우리의 야심한 거래를 들은 듯 옆자리의 여자들이 소곤대며 희끗한 내 머리를 바라보다가 아랫도리에도 눈길을 낸다. 못 본 척, 찌그러진 양재기 들어 올려 목울대를 축이면서도 왠지 고봉밥 같은 함바집 여자가 밀창문 열고 들어설 것 같아 자꾸 눈이 쏠린다. 허나, 국밥집에 불이 꺼지도록 문을 열고 들어 온 것은 축축한 바람 한 줄기 뿐이었다.※ 수필가 배귀선씨는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솔바람소리문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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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31 23:02

명찰

창으로 빛바랜 명찰이 아른거린다. 흐릿한 사진 옆에 이름 석 자가 또렷하다. 옆 차로에 선 택시 속 승객과 운전자가 사뭇 진지하다. 승객 앞에 비치된 운전자의 이름표가 새삼 듬직해 보인다. 잠깐 타고 내리는 택시나 시내버스에서 본 신분증은 운전자를 신뢰하게 한다. 내게도 학창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명찰이 있다. 1학년이 되어 가슴에 달았던 이름표는 세상에 나를 알리는 첫 신호였다. 중학생 때 가슴에 단 사각 명찰은 엄한 교칙 때문에 날 주눅 들게 했었다. 여고 동창회에 갔었다. 삼십년, 세월의 더께는 무던히 두터웠다. 아련한 기억을 더듬어 갈래머리 친구를 떠올려보지만 이름이 막막했다. 친구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목에 건 명찰을 확인한 뒤 이름을 부르며 부둥켜안았다. 이럴 때는 이름표가 세월의 강을 건너는 징검다리가 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명찰은 모양새가 다양해진다. 신분증, 명함, 명패, 이름도 모양도 각각이다.중년이 된 남편친구들이 모처럼 우리 집 거실에 모였다. 검정교복에 함께 달았던 사각명찰의 추억까지 아우르는 친구들이다. 어느덧 머리에는 서리가 내렸고, 제각기 색깔 다른 명함을 갖고 살고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친구들은 직장인으로, 자영업자로 서툰 발걸음을 내디뎠다. 오가는 술 잔속에 미래를 걱정하는 대화가 오간다.자영업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친구가 있다. 가구 손질, 전기공사, 집수리까지 손이 닿는 것이면 어떤 일이든 야무지게 하는 재주꾼이다. 각별한 손재주에 비해 사업 확장은 늘 터덕거렸다. 매번 새로 시작한 영업은 때를 잘못 만난 듯 비상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어느 날 이사를 했다는 연락이 왔다. 아파트를 팔고 시골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려워졌나 싶어 이사한 곳을 찾아가봤다. 아니었다. 일찌감치 전원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널찍한 과수원이 있고, 부지런한 성품이라 마당 한쪽에는 땔감이 수북하고, 닭장, 토끼장 등 가축우리도 폼 나게 만들어 놨다. 타고난 손재주로 집 안 구석구석을 쓸모 있게 꾸며 놨다. 취업을 택한 친구의 삶은 풍성한 가을들판처럼 민틋했다. 서울에서 신혼살림을 하면서 높은 집값 때문에 좁게 산다며 지방 친구들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책상위에 놓인 명패가 위엄을 풍긴다. 거듭되는 직장통폐합과 구조조정의 한파도 헤쳐 낸 회사중역이다. 명함을 내미는 투박한 손이 당당하다. 친구들은 제일 성공한 친구라고 추임새를 넣어 사기를 북돋운다. 남편 차 속에도 신분증이 붙어있다. 신분증에 부착된 사진이 안개 낀 아침풍경처럼 흐릿하다. 양 손등의 다른 피부색과 함께 운전대 잡은 세월을 말해준다. 남편 역시 젊은 시절 직장생활보다 사업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아버님은 가내수공업으로 비닐우산 공장을 했었다. 부지런하고 발 빨랐던, 남편은 아버지의 신임이 두터웠다. 중학생 때부터 심부름을 하면서 사업을 하겠다는 꿈을 꾸었단다. 그러나 이것저것 손을 대다 개인택시 사업자가 되었다. 일찌감치 노후를 염두에 두고 선택한 직종이다. 그런데 시작과 달리 경제 한파에 밀려 뒤뚱거리고 있어 늘 이직을 꿈꾼다.모처럼 함께한 친구들 웃음소리가 창문을 넘는다. 제 각기 사회적 위치에 맞게 획득한 명찰은 사업장에 걸어 둔 편한 모습이다. 갑자기 서울친구가 더 나이가 들면 요양원 생활이 편하지 않겠냐고 묻는다. 벌써 퇴직 후 노년을 걱정할 나이인가보다. 서울친구가 말문을 열자 너도나도 한마디씩 보탠다. 전원생활을 하는 친구가 넌지시 자기 집 옆으로 이사하는 게 어떠냐며, 은퇴 없는 생활을 과시한다. 질세라 남편도 목소리를 높인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자리 걱정은 없단다. 갑자기 부러움을 한 몸에 받던 서울친구가 두 사람의 생활에 큰 관심을 보이는 순간 분위기가 달라진다.※ 수필가 황점숙씨는 2006년 '좋은문학'으로 등단. (사)한국편지가족 전북지회장, 전북수필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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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24 23:02

부부 행복

부부는 닮아간다고 한다. 몸은 마음을 따라가는지 마음을 나누다 보면 말씨와 생각이 비슷해지고 얼굴도 닮아 간다. 닮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부부가 닮은 다는 것은 잘 살아왔다는 뜻이다. 우리 부부는 생김새와 성격이 아주 달랐어도 오순도순 잘 살았다. 흔히들 성격이 같은 사람끼리 만나면 다투기도 잘하고 서로 잘 부딪히기 때문에 이혼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러나 성격이 다르면 이쪽이 화나면 저쪽이 참기 때문에 잘 산단다. 그래서일까, 거짓말처럼 우리는 40년이 넘게 살았어도 싸움을 하지 않고 살았다. 우리 부부는 많이 닮았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날 죽자고 약속했지만, 남편이 먼저 갔다. 남편이 병석에 있을 때의 일이다. 간호하는 내가 안쓰러운지 "여보 내가 나으면 업어줄게!" 하고서는 업어주기는커녕 잘 살아 달라는 말 한마디 없이 눈을 감은지 어언 12년이 넘었다. 우리는 잉꼬부부여서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샀다. 조카들이며 젊은 사람들이 우리처럼 살아가고자 했다. 남편은 점잖고 말이 없으며 마음씨가 너그러웠다. 조금은 야무지지 못해 내가 힘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남의 말을 존중하고 우리가 손해 보며 살자고 했다. 우리는 서로 존중했다. 내가 없을 때 어디서 음식이 들어오면 엄마 오시면 먹자고 하든지 아니면 엄마 먹을 것을 먼저 남겨놓고 먹었다. 나도 그에 못지않게 그를 우리 집 대통령으로 대우했다. 아버지 퇴근 시간이 되면 집안을 정돈하고 깍듯이 "다녀오셨습니까?"라고 인사를 하도록 가르쳤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시면 편안히 쉬도록 했다. 그뿐인가, 집안일은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하고 좋은 일만 보고했다. 우리가 평생 수없이 이사했지만 남편은 출근하고 이사를 다 하면 그때 집이 어디인지 알아서 찾아왔다. 못 하나 박지 않고 거들어 주지 않아도 나는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살았다. 좀 더 같이 오래 살았으면 좋았을 걸, 나만 혼자 살아서 이렇게 호강하고 누릴 것 다 누리며 애들의 효를 받으니 미안하다. 남편이 부인을 '여보'(如-같을 여 寶-보배 보)라고 부르는 것은 보배 같은 부인이란 뜻이고, 여자가 남편을 '당신'(當- 마땅할 당 身-몸신)이라 부르는 것은 마땅히 나는 당신과 같은 몸이라는 뜻이다. 부부의 이상은 같은 날 죽는 것이다. 사랑이 깊어 죽음까지 공유할 만큼 완전한 사랑이 있을까. 해로동혈(偕老同穴)이란 말처럼 함께 늙고 죽어 한 무덤에 묻히자고 다짐하지만, 같이 자살하지 않는 한 어려운 일이다. 동양에서는 함께 늙고 죽어 한 무덤에 묻히자는 사랑의 맹세를 많이 했다. 부부란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며 아플 때나 힘들 때, 즐거울 때나 슬플 때도 같이 사는 것이 부부다. 자라온 환경과 가풍, 타고난 성격도 다른 남녀가 고락을 함께한다는 것은 아주 본받을 만하다. 부부는 아주 조금씩 닮아 가는 법이다. 부부로 살다보면 생각하는 것, 좋아하는 것, 심지어는 말투와 얼굴까지 비슷해진다. 나는 전라도 남쪽 임실 사람이고 남편은 경상도에 가까운 무주사람이다. 먹는 것부터가 달랐다. 그곳은 바다가 먼 곳이라 생선을 많이 접하지 못해 잘 먹지 못했고, 나는 여수가 가까워 싱싱한 생선을 먹고 자랐다. 또 시집식구는 밀가루를 좋아해서 국수를 별미처럼 잘 먹었다. 가루 것을 싫어했던 나도 잘 먹게 되고, 말투와 행동, 식습관도 닮아가는 것이었다. 사랑이라는 양념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시집가서는 왜 그렇게 엄마가 보고 싶고, 고향이 그리운지 저녁이 되면 고향 하늘만 쳐다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모든 것이 낯설고 물 설며 어렵고 힘든 시집살이였다. 하지만 남편 하나 보고 시집을 와서 사랑의 약을 먹으며 사는 것이 부부가 아닌가?※ 수필가 이강애씨는 2007년 〈대한문학〉으로 등단했다.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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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17 23:02

흔들리지 않는 삶이 어디 있으랴

"컵에 담긴 물은 소금 한 숟갈을 넣으면 짠맛이 납니다. 그러나 그 소금을 호수에 넣는다고 물맛이 짜게 변하진 않습니다. 그냥 호수 그대로지요. 당신의 마음이 하늘처럼 넓고 바다같이 광대할 때 평화는 흔들릴 수 없습니다." 라는 구절이 마음에 들어 인터넷 카페에 올렸다. 그랬더니 누군가 바로 댓글을 달았다."돌멩이를 던진들 꿈쩍할까요? 그릇이 바다와 같을진대, 하지만 제 마음은 컵에 담긴 물이랍니다. 오늘도 찰랑찰랑 흔들리고 있습니다."라고, 옳은 말이다.흔들리지 않는 삶이 어디 있으랴. 나이가 들어도, 수행을 많이 한 성직자나 고승이라 할지라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는지는 몰라도, 흔들리고 부대끼며 번뇌망상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게 범부들의 삶이 아닐 까 한다. 그래서인지 시인 도종환도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흔들리며 피는 꽃」)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문제는 한 송이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중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효범 스님은 그것을 '물동이 속의 바가지'에 비유한 바 있다. 어린 시절 우리의 어머니나 누나들이 물동이에 물을 길어 머리에 이고 올 때, 물동이 속의 물이 출렁거려 이마에 쏟아지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물동이 속에 바가지를 하나 엎어놓아 물의 흔들림을 바로 잡았던 기억이 난다. 바가지가 출렁이는 물의 구심점이 되어 흔들림을 진정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7-8년 전이었던가. 태풍이 일본 열도를 몰아칠 때, 일본에서는 새로운 건축법이 소개되어 뉴스를 장식한 일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흔들리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건축법이었다. 일본은 지진으로 해마다 인명과 재산 피해가 많아 '어떻게 하면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지을 수 있을까?' 이것이 언제나 그들의 큰 관심사였다.처음에는 철근 콘크리트 내진(耐震)벽으로 건물을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고정 하중법'을 썼다. 그래도 손실을 줄일 수가 없어 그 뒤에 나온 것이 '적재 하중법'이다. 그것은 건축물 안에 있는 사람이나, 각종 물건의 무게를 잘 받쳐주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 등장한 건축법이 이른 바 흔들리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이동하중법'이란 것이다.이는 건축물에 가해지는 각종 외부의 충격을, 흔들림 속에서도, 스스로 흡수하여 건축물을 끝까지 잘 견디게 하는 건축법이다.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이것이 바로 '물동이 속의 바가지 공법'인 셈이다. '정중동(靜中動)'이 아니라 나긋나긋 흔들려 무너질 것 같으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동중정(動中靜)'의 삶의 방식인 것이다.불가(佛家)에서도 이와 같은 '동중정(動中靜)'의 삶의 방식이 있다. 외부의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아, 명경지수와 같이 맑은 마음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평상심(平常心)이 그것이다. 평상심의 '평(平)'은 너와 나, 주(主)와 객(客)의 차별이 없는 공간적 평등이요, '상(常)'은 고금(古今)과 유무(有無)의 변환에도 흔들리지 않는 시간적 평등의 경지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의 흔들림에도 물들지 않아 고요하고 맑은 마음의 상태가 유지될 때 비로소 평상심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 평등하고, 밝음과 어둠도 결국 마음 하나에서 비롯된 일시적 과정일 뿐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마음 수행법이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그 마음의 흐름과 근원을 깨달아 마음의 중심을 잡는다면, 그게 바로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 주도적 삶이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로 가는 지름길이 아닌가 한다.※ 김동수 시인은 1982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하나의 창을 위하여''그리움만이 그리움이 아니다''말하는 나무'등을 냈다. 백제예술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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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10 23:02

외할머니와 복숭아

▲ 김 금 례 큰아들 내외가 힘겨운 듯 끙끙거리며 들어왔다. 자식들이 집에 가져오는 과일을 보면 어느 계절인지 알 수가 있다. 오늘은 복숭아다. 상자속의 복숭아는 볼연지 붉게 칠한 수줍은 새색시처럼 예쁘게도 생겼다. 나는 복숭아를 좋아한다. 복숭아는 과식해도 탈이 없다. 복숭아를 보는 순간 외할머니를 만난 듯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할머니는 평생 복숭아 과수원을 가꾸면서 사셨다. 그래서 난 여름이면 복숭아를 많이 먹으면서 자랐다. 복숭아 농사는 여름 한 철이라 온 집안 식구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인다. 오늘은 애지중지 키운 딸을 시집보내는 날 같다. 새벽에 일어나 복숭아를 따서 포장하고 예쁜 상자에 넣어 동네 모정 앞에 세워둔 자동차에 실어 보내야 하루의 일손이 끝난다. 잘 가라고 손을 흔들며 어깨에 걸쳤던 수건으로 땀을 닦는다. 나는 자라면서 과수원일이 참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할머니는 바구니에 복숭아를 담아 이 집 저 집 나누어 주면서 웃음꽃을 피우셨다. 아이들이 여름 방학이 시작되면 할머니는 전화를 하셨다. "애야! 복숭아 많이 따는 날이니 아이들과 함께 와서 복숭아도 가져가거라." 애틋한 할머니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출가한 외손녀의 손자까지 챙기시는 할머니셨다. 복숭아는 비타민A와 C, 펙틴질이 풍부한 알칼리성 식품으로 면역력을 키워주며 니코틴을 해독하여 가래와 기침에 좋다. 사과산과 구연산 등 피로를 풀어주는 천연 유기산이 들어있어 간 기능 개선과 혈액순환 개선 및 피부 미용, 위장기능 개선에도 좋아 여름철 과일 중 황제라고 불리고 있다. 나는 외가 덕에 복숭아, 복숭아 잼, 주스를 많이 먹고 자라서 지금까지 건강하게 지내는지도 모른다. 나는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625도 외가에서 보냈다. 가끔 막내 이모와 다투면 외할아버지는 "차라리 핏덩이랑 싸워라." 하시면서 내편이 되어주셨다. 여름방학을 하면 책을 짊어지고 외가로 달려갔다. 모든 식구들이 과수원에서 생활하다 보니 나도 과수원에서 놀았다. 따갑게 타올랐던 태양이 서산에 기울면 식구들은 반딧불을 벗 삼아 시냇가에서 목욕을 했다. 시원했던 그 기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느 날 저녁 할머니와 함께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과수원에서 지냈던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모기장 속에서 심청전을 재미있게 읽어주셨다. 그리고 장화홍련전과 춘향전을 들려주시느라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할머니는 나에게 부채질을 해주시면서,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노래를 부르셨다. 그 때의 그 선한 눈빛이 생각난다. 세월은 가도 추억은 남는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두드린다. 노래를 부르시다가 바스락 소리가 나자, 멈추셨다. 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나를 꼭 껴안아 주시고 한참 뒤에 손전등을 켜고 기침소리를 내니 보자기를 든 사람이 도망치고 있었다. "할머니! 복숭아 도독이지요?" "아니다. 동네 청년들이 저녁에 놀다가 배가 고프니 서리하러 온 것 같구나." 도둑이 아니어서 조였던 마음이 풀렸다. 할머니 모습이 어제인 듯 떠오른다. 할머니는 소탈하시고 겸손하시며 정이 많으셨다. 세월은 훌쩍 지나갔어도 할머니에게서 받은 정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서리를 도둑이라고 한다. 언젠가 산에서 감나무와 밤나무에서 과일을 조금 따다가 도둑으로 몰려 몇 배의 값을 물어 주었다고 한다. 세상이 그만큼 야박해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과수원을 가꾸셨던 식구들이 세상을 떠나고 과수원의 과일나무들도 고목이 되어 남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때는 어제인 듯싶은데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외숙모는 평생 복숭아와 함께 살다가 돌아가신 할머니의 제사상에 복숭아캔을 올린다고 하셨다. 여름에 복숭아를 보면 인자하신 할머니의 모습이 그리움으로 밀려온다. 나도 여생을 복숭아 향기 속에서 살아가고 싶다.※ 수필가 김금례씨는'수필시대'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행촌수필문학회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수필집 '꿈의 날개를 달고'를 냈다.

  • 오피니언
  • 김원용
  • 2012.08.03 23:02

등잔불

마을에 전깃불이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 집은 등잔불을 밝히고 살았다. 안방과 부뚜막 조왕, 그리고 마루기둥에 등잔대를 만들어 성냥과 나란히 놓았었다. 대두병에는 물같이 맑은 기름이 항상 절반 이상 담겨 있었으며 기름이 달아난다고 마개를 야무지게 틀어막아 그늘진 곳에 걸어 두었었다. 행여 대두병에 성냥을 그어대면 불이 난다며 어찌나 단속을 했던지 동생과 나는 아예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 기름이 바로 휘발성이 강한 석유였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어느 날 오후, 마른장마 끝에 애타게 기다렸던 비라서 아버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빠른 손놀림으로 집안일을 대충 마치고 삽을 들고 논으로 가셨다. 초가지붕의 호박넝쿨을 타고 쏟아지는 집시랑 물이 금세 빈 항아리에 가득 차올랐다. 낙숫물의 색깔이 간장 같았다. 강아지와 닭들이 덩달아 갈팡질팡 하였다. 나는 저녁밥을 지으려고 아궁이에 짚불을 지폈고 강아지는 아궁이 옆에 젖은 몸으로 다리를 접고 앉았다. 처마 밑에서 함초롬히 비를 맞은 닭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태에 들어가 홰를 쳤다.방천 둑에 매어 놓았던 송아지랑 염소는 진즉 집으로 끌고 왔건만, 논 물꼬를 보러 가신 아버지는 땅거미가 내리도록 돌아오시지 않았다. 이 무렵 병으로 고생하시는 아버지를, 어린 동생과 나는 걱정이 되어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생각다 못해 호롱 심지를 돋우고 불을 밝혀 논으로 갈 채비를 하였다. 나는 어른들의 등잔 다루는 법을 평소 지켜본 터였다. 마당에서 늦게까지 일을 하실 때는 호롱 심지를 크게 올렸다. 그러면 끄름은 생길망정 불꽃이 커져 사방을 밝게 비췄다. 방에서는 다시 심지를 평상으로 줄이면 끄름도 나지 않고 적당히 밝아져서 공부하기에 좋았다. 기름이 떨어질 때쯤이면 심지가 타들어가 금방이라도 불이 꺼질 것 같다가도 호롱에 석유를 넣으면 거짓말같이 불이 밝아졌다. 내리던 비는 멎었다. 서쪽하늘에 금방 떠있던 초승달은 벌써 지고 없었다. 아마 칠월 초사나흘쯤이었나 싶다. 등불을 켜들고 동생과 나, 강아지까지 셋이서 강둑을 걷기 시작했다. 낮에는 강아지풀을 꺾어 코에 붙여 콧수염을 달기도 하고 클로버 꽃을 엮어 손목시계와 반지를 만들어 차기도 하며 뛰놀던 방천길, 눈을 감고도 달릴 수 있는 길이건만 그날 밤의 그 길은 왜 그리도 터덕거리고 무서웠던지.한바탕 내린 비로 하늘은 처량하리만치 맑아 초롱초롱한 별과 은하수가 작은 냇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가끔 멀리서 들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번쩍번쩍 번개가 칠 때면 둑길에 서있는 전봇대가 마치 커다란 뼈다귀처럼 휙 다가왔다. 깡충거리던 강아지도 놀랐던지 낑낑댔다. 그래도 동생과 나는 조금만 참으면 아버지를 만난다는 기대로 무서움을 삼키며 더듬더듬 걷고 있었다.논이 가까워질수록 만약에 아버지가 그곳에 계시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엉뚱한 생각으로 가슴은 두방망이질을 쳤다. 들고 있던 등불마저 휘청거렸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렀다. 그러나 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무서움과 두려움이 뒤범벅되어 동생과 나는 맹꽁이와 함께 3중창으로 울고 있었다. 그때였다. 논배미 물꼬 쪽에서 아버지의 기척이 들려왔다. 반가움과 서러움이 복받쳐 더 큰 소리로 울었다. 적막한 밤공기는 성능 좋은 마이크가 되어 허허벌판을 울음소리로 메우고 있었다. 아버지는 하던 일을 멈추고 우리 쪽으로 오셨다. 내 일생에 그때처럼 아버지가 반갑고 고마웠으며 커보였을까. 어린 마음에 최고로 여기던 신부님보다도 우리 아버지가 더 높아 보인 순간이었다. 가톨릭신자였던 아버지는 기도를 하시면서 어제 비료를 뿌렸기에 논물이 넘치지 않도록 물꼬를 조절하고 계셨던 것이다.돌아오는 길 아버지는 동생을 지게에 태우고 나는 아버지의 삼베바지를 움켜쥔 채 강아지랑 졸랑졸랑 재잘거리며 집으로 돌아 왔다.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내 작은 손으로 아버지의 삼베바지를 움켜쥐었던 그 촉감! 땀과 빗물과 논물로 얼룩진 아버지! 아버지는 방을 밝히고 마당을 밝히고 나를 밝혀주는 등잔불이었다.※ 수필가 최정순씨는 2007년 대한문학으로 등단. 행촌수필문학영호남수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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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27 23:02

나의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다. 또 어머니의 아들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우리 부모의 아들이다. 우리 부모는 딸 둘에 아들 둘을 낳으시고, 딸아들 순으로 질서 있게 전부 열 명을 낳으셨다. 그중에서도 나는 막둥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내 위의 누나는 다섯 살 때 세상을 떠났다. 내가 두 살 때 저 세상으로 갔으니까 나는 그 누나를 잘 모른다. 단 한 사람 살아계시는 내 형님은 나와 다섯 살 차이다. 그 형님은 바로 밑의 동생인 그 누나를 잘 안다. 그래서 형님은 우리가 10남매라 하고 나는 9남매라고 한다.아버지는 내가 아홉 살이던 초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다. 나는 9년간 함께 살았지만 내가 3살 때부터 일을 기억하고 있으니 정확하게는 6년간 같이 산 셈이다. 어머니는 26년간 함께 살았다. 그래서 어머니에 대해서는 생생한 기억들이 참 많다. 그런데 오늘은 아버지가 더 그리워진다. 아버지가 내가 대학교에 들어갈 열아홉 살 때까지만 사셨더라도 내가 대학에 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한 맺힌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말라리아라는 병으로 시달렸다. 오후가 되어 몸에 열이 나고 덜덜 떨리기 시작하면 어머니가 더 걱정을 하셨다. 말라리아는 그 시절 많이 유행했던 병이다. 어머니는 그 병을 낫게 하려고 나에게 깅계랍(키니네)이라는 약을 먹이려고 하시고 나는 그 약이 너무 써서 안 먹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러면 배추김치 잎에다 싸서 주시기도 하고 약 먹은 다음에 설탕가루를 얼른 입에다 수저로 떠 넣으셨다. 초등학교 2학년 때다. 이른 아침 동이 트기 전에 따라오라고 하셨다. 학질을 낫게 해주시려고 그런 줄로 짐작을 했다. 이삿짐 뒤 강아지 따라가듯 졸래졸래 따라 갔더니 앞 냇가 징검다리를 건너 청년등이라는 야산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 산에는 큰 무덤과 비석이 있었다. 대낮에도 혼자 그 앞을 지나려면 간이 콩알만 해지고 오싹오싹해져서 달음질 쳐서 지나다니던 곳이다. 아버지는 나더러 그 무덤 옆 잔디에다 머리를 대고 재주를 한 바퀴 넘으면 학질이 떨어진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내가 머리를 대고 막 한 바퀴를 구르자마자, 아버지는 "귀신 나온다!"라고 외치면서 도망치듯 달음박질로 뛰어가셨다. 나는 너무도 무서워서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아버지는 거친 손마디로 내 눈물을 닦아주시고 나를 등에 업고 징검다리를 건너 집으로 갔다. 학질이라는 병이 놀라게 하면 낫는다는 속설을 믿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아버지는 다음해 겨울 위장병이 생겼다. 약도 쓰고 체를 내린다는 사람이 배를 주무르기도 했지만 낫지 않았다. 어머니와 안방을 쓰지 못하고 사랑채에서 혼자 밥도 제대로 못 드시고 무릎을 세우고 앉거나 누워 계셨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우리 집에 좀도둑이 들었다. 사랑채에 아픈 아버지만 계신다는 것을 안 좀도둑이 사랑채 앞에서 훔칠 물건을 찾는 것을 본 아버지는 기침을 해서 돌려보내셨다. 다음날 아침 그 얘기를 들은 우리 가족은 그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알 것 없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그가 누구란 걸 아시면서도 끝내 알려주지 않고 다음해 이승을 떠나셨다. 아버지는 말씀이 적고 퍽 조용한 분이셨다. 나도 아버지를 닮아 말이 많지 않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그런데 경찰관 생활 37년간 하면서 나이 이순을 넘기자 여자들 앞에서 수줍음도 타지 않고 말도 잘하고 노래도 잘 부른다. 이런 성격은 어머니를 닮았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더 많이 닮고 싶어했던 것은 아버지가 더 사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나를 낳고 비록 일찍 가셨지만, 내가 그 분을 많이 닮게 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그래서 눈물이 난다.※ 전북경찰청 경정으로 정년 퇴직한 수필가 이수홍 씨는 2007년 '대한문학'으로 등단해 수필집'노래하는 산수유 '(2008),'춤추는 산수유'(2010)에 이어 '북창구 치는 산수유나무'(2012)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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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20 23:02

죽록원을 다녀와서

죽취일(竹醉日)에 마술을 걸었다. 음력 5월 13일. 이날은 대나무가 정신을 잃을 만큼 취하는 날이란다. 이날에 옮겨 심으면 뿌리를 잘 내린다는데, 이날이 아니어도 옮겨 심고서 종이에 '음력 5월 13일 죽취일' 이라고 써 붙이면 효과가 있다. 대나무를 옮겨 심기에 두 번이나 실패했다. 두번 째까지 실패하겠다 싶어 처방을 써 붙였다. 처음과 두 번째는 일반 대나무였고, 세 번째가 오죽이었다. 오히려 잘되었다 싶었다. 신선한 곳에서만 뿌리를 내린다는 말처럼 몸살이 심했다. 병이 들어 약물 신세를 지기도 했지만, 새순이 벌어졌다. 성급한 마음처럼 순죽(筍竹)이 나와 마디기 쑥쑥 커졌지만, 내 키 정도에서 그치고 말았다. 연둣빛 잎이나 줄기가 같은 색이어서 마음을 졸이기도 했다. 까마귀처럼 검은색을 띈다 해서 오죽이라는데 처음부터 검은색을 띄는 게 아니라 몇 개월이 지나면서 서서히 검은색으로 변해있었다.사군자 그림이 안방에 있었다. 오랫동안 자게 장롱의 그림을 보면서 또는 사군자의 매화, 국화, 난은 쳐봤는데 대나무를 칠 때부터 붓을 놓았던 옛 생각 때문인지 대나무에 애착이 갔다. 베란다에 매화, 난, 대나무가 있음에 괜히 들떴고, 가을이 되어 국화꽃 화분이라도 들여 놓으면 사군자의 구색을 갖춘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어쩌면 애써 구색을 갖추었는지도 모른다.사시사철 대나무, 읊조리던 것처럼 청정한 댓잎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을이 지나 겨울이 되면서 흡사 대나무가 죽은 것처럼 마른 잎이 되어갔다. 베란다에서 자라는 환경 탓에 짙푸른 댓잎 숲을 이루지도 못한다. 온상속의 화초처럼 대나무의 기질을 맛볼 수가 없다. 촉촉이 비를 맞은 우죽(雨竹)일 때의 모습도 볼 수 없다. 대나무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지도 않아 풍죽(風竹)도 없고 대나무의 속성을 잃어버리진 않았을까 염려되었다. 마음 속에서 우는 바람 소리의 여운은 아직도 가슴 한 곳에 여전하고, 눈에는 바람에 흔들리고 가슴엔 스산한 바람 한자락 자리하고 있는데 묵은 댓잎 뿐이다. 달빛이 스미는 밤이면 희부연 '亞' 모양의 창문에 비친 댓잎 그림자는 그럴싸하니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한 줄기씩 훑기도 하고 한 잎씩 뜯어내자니 한움큼이 되었다. 상서로운 기운이 맴돌았던 나무를 기른다는 것은 하찮은 졸부로서는 흉내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정성을 기울일 따름이다.죽록원을 몇 차례 다녀왔다. 대나무숲은 바라만 보아도 기운이 서린다. 대숲으로 난 길을 걷노라면 하늘빛이 새어 들 수 없어서인지 한 여름에도 싸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겨울 눈이 내린 대숲은 한기로 등줄기가 오싹하면서도 때 묻지 않은 사람들만 발자국을 내야 할 것 같은 세계에 온 듯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하얀색과 녹색의 어울림은 신비의 세계를 열어준다.5월의 대숲은 죽순의 속삭임으로 수런거린다. 여기저기에서 고깔모자 쓰고 고개를 내밀고 대숲의 빈 자리를 채우고 있다. 이제 막 겹겹이 두른 테가 벗겨지고 이슬 걷힌 맑은 순록의 표면에 생채기를 내고 낙서를 한 사람들 참 못할 짓이다. 갓난아기 속살에 문신을 하라지. 허공을 찌르듯이 솟은 키에 비해 깊이 뿌리내리지 않아도 바람에 넘어지지 않는 것은 비움 때문이란다. 사람들 마음을 비우는 법을 알려주려고 마디마다 비움으로 채웠는데, 대통밥을 앞에 두고서는 빈 마음을 배울 수가 없었다. 대나무가 지닌 속성과 사람이 지닌 속성이 다르니, 대나무의 속성을 담기 원하는 마음으로 온갖 생활도구를 만들어 쓰고, 대통 속에 밥을 지어먹나 보다. 밥 한 끼로는 인간의 속성이 아랑곳하지 않을 터. 속됨만 키울 뿐이다. 오히려 속살이 쪄서 비움의 의미가 무색해지지는 않을까. '어떤 시인은 백초는 다 심어도 대는 심지않겠단다. 구슬픈 가락을 내는 피리를 만들기에, 화살을 만들어 쏘면 돌아오지 않기에, 여읜 임을 그리느라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붓대를 만들기에.''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많은 손길을 담아 분죽(盆竹)을 키운 지 몇 해. 다음 해엔 더 푸른 댓잎을 보기 위해 두루두루 거름을 묻는다.※ 수필가 장효근씨는 1998년 '수필과비평'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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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06 23:02

그냥 좋은 비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또렷한 기억은 없으나 노곤했던 봄날에 단잠을 잔 것처럼 잠이 잠을 취하게 했던 지난밤이었다. 잠속의 꿈, 꿈속의 잠이었으니 쌓인 피로를 한 방에 날려버린 기분이었다. 거뜬한 몸으로 일어나 창밖 풍경과 마주했다. 밤새 비님이 살짝 다녀가신 모양이다. 비에 젖은 나뭇잎이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간밤의 이상야릇한 기운이 바로 비 때문 이었구나 생각했다. 언제부터인가 비 내리는 날을 좋아하게 되었다. 아마도 열 살을 갓 넘겼던 그 때부터 비를 좋아했던 게 아니었나 싶다. 파란 비닐우산이나 누런 지(종이)우산을 받고 등하교를 하던 날은 괜스레 설레고 기분 좋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비 내리기 전, 시큰둥한 하늘의 낯꽃 또한 싫지 않았다. 검회색 구름이 점점 더 드리워지면 하늘보다 더 낮은 자세로 창가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렇게 앉아서 이런저런 상념으로 긴 시간을 보냈다. 시커먼 구름이 성난 짐승이나 험상궂은 형상으로 다가올 때면 겁에 질려 후다닥 커튼을 내려야 했다. 천둥 번개가 하늘을 두 동강이라도 낼 것처럼 으르렁거릴 적에는 지난 시간의 허물을 반성하고 용서를 구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 삼키려 덤빌 때는 그를 잠깐 원망도 했다. 그럼에도 비가 내리면 낭만을 찾고 여유를 즐기려는 분위기의 여왕이 되곤 했다. 종종, 비를 몰고 오는 습한 바람이 좋아 온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나뭇가지가 춤을 추고 풀들이 돌아누웠다가 우르르 일어서는 들녘에서 나는, 나무가 되고 풀을 닮아 같이 눕고 함께 일어서서 등뼈를 곧추세웠다. 세찬 바람에 부러지지 않고 휘어지는 잔가지의 아픔이나 풀들의 멀미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직 그들만의 유연함에 우우우~ 탄성을 질렀다. 강함의 본때를 보여주는 그들의 인생철학에 박수를 보냈다.후드득 - 빗줄기가 강가를 건너 올 때면 재빨리 둥구나무 아래로 달려갔다. 나무 아래 넓적한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거나 늙은 나무 몸통에 몸을 기대고 서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맥없이 그랬다. 내 발치에 빗물이 흐를 즈음이면 내 몸에도 한기가 스미어 오돌돌 떨면서 집으로 향했다. 풋내 나는 이십대, 깜냥에는 그런 게 낭만을 즐기는 것이라고 여겼다. 때 맞춰 울고 싶은 날에는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터이니 펑펑 울 수 있어 좋았던 비. 울음소리마저 아니 그 설움의 덩어리조차도 기꺼이 감싸 안아 주었던 고마운 비. 뿐인가, 울 수 있는 행복을 누리고 난 다음의 가벼움이라니.지금도 나는, 저만큼에서부터 퀴퀴한 흙내음과 함께 산을 넘고 실개천을 가로질러 오는 비가 그냥 좋다. 그래서인지 비 내리는 밤에는 긴 시간 포근한 잠속에 빠져들기도 한다. 이따금 비와 더불어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도 있다. 필경 그들은, 비를 보면서 내 생각을 했음이니 또한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요즘, 온 국토가 가뭄에 메말라가고 있다. 마치 일상에 절어 사는 나의 일상처럼 건조하고 팍팍하다.하늘을 올려다본다. 오늘은 시원한 빗줄기 보기를 소원한다. 그들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빗소리와 함께 따스한 안부를 건네야겠다고 생각하니 불현듯 솟구치는 그리움이 언덕을 넘는다.※ 수필가 이연희 씨는 1995년 '수필과 비평' 신인상으로 등단, 수필집'인도 가는 길','풀꽃들과 만나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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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29 23:02

꿀비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꿀비였다. 몸이 새털구름처럼 가벼웠다. 시원한 꿀 차를 한 대접 마신 것 같다. 창문을 열자 구수한 흙냄새를 따라 고구마 밭의 아우성이 들려왔다. 냉수 한 잔 마신 후 주섬주섬 옷가지를 걸치고 재래시장으로 갔다. 제법 이른 시간인데도 시장은 이미 파장 분위기였다. 고구마 순 있느냐는 말에 비가 오는 날에는 찾는 손님이 많다며 너무 늦었다고만 했다. 그래도 그냥 돌아올 수는 없었다. 운 좋게도 시장 깊숙한 곳에서 고구마 순과 몇 가지 종묘를 살 수 있었다.심기 전에 물에 적셔놓을 생각으로 화장실에 가 수도를 틀고 막 순을 집어 드는데 물끄러미 보고 있던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고구마 순이네요""예, 오후에 심을 건데 물 주려고요.""아닌디, 거 고구마는 선인장처럼 꽂아 놓으면 뿌리가 나요. 심기 전에 하루 정도 그늘에 놓았다가 심으면 땅에서 물을 쭉 빨아들이지요.""그래요?" 멋쩍게 웃으며 봉지에 다시 담아 사무실로 왔다.?자꾸만 검은 봉지에 눈이 갔다. 오는 사람마다 궁금해 했다. "예, 이 주 전에 고구마를 심었는데 엊그제 가보니 몇 개만 살고 다 타 죽었어요. 어찌나 허탈한지. 농부의 마음을 알 것 같더라고요. 다시 심으려고요." "밭이 어디요?""여산요.""왜 굳이 그 먼 여산에?""실은 여산에 납골묘지가 있거든요. 한쪽에 빙 둘러 매실, 감나무 등을 심었는데, 가운데 빈 곳이 있어 땅을 일궜어요. 그래야 산소를 한 번이라도 더 가보지요."몸은 책상 앞에 있지만, 마음은 고구마 밭에 가 있었다. 일과는 이미 뒤엉켜버렸다. 신문을 펼쳤지만, 눈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창문에 흐르는 작은 빗줄기가 밭고랑의 작은 물줄기 같았다. 빗소리가 밭에서 들리는 환호성으로 들리는가 싶더니 나중에는 노랫소리로 들렸다. 빗소리가 이리 아름답게 들린 적이 있었던가. 단비보다 더한 꿀비였다.정오가 가까워지자 하늘이 개기 시작했다. 해갈에는 턱없이 부족한 비였다. 초조함에 속이 바싹바싹 타 들어가 비온 뒤의 맑고 윤기 있는 세상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일과가 끝나기도 전에 밭으로 달려갔다. 순을 다시 심었다. 비는 그쳤지만, 적당히 구름이 드리우고 있어 다행이었다. 고구마 순을 다 심고 나자, 물만 주면 산다는 말이 떠올라 아랫마을민가까지 가서 물을 길어다 흥건히 주었다.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일 마치기가 무섭게 고구마 밭으로 달려갔다. 내 정성을 아는지 달님은 폭삭 주저앉아 목숨만 겨우 유지하는 고구마 순을 또렷이 비춰주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서둘러 달려가지만 도착하면 이미 저녁도 지난 밤중이었다. 매번 민가에 들어가 살쾡이처럼 살금살금 수도에 다가가 꼭지를 틀었다. 쏴아! 물 받는 소리가 잠든 마당을 깨우지만 주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기척이 없었다. "농작물은 발걸음 소리를 먹고 산다우." 며칠 전 주인 양반의 속말이 울릴 뿐이었다.※ 수필가 전성권씨는 2011년 〈문예연구〉로 수필 당선. 〈순수필〉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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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22 23:02

수업을 접다

초등학교 5학년생 아이들 넷을 향해 말했다. "父母有疾(부모유질)이어든 憂而謨趨(우이모추)하라, 이 말은 부모가 편찮으시면 걱정하면서 빨리 낫도록 도와드려야 한다는 뜻이야. 자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을까?"한 녀석이 턱주가리를 치켜 올리면서 되물었다. "왜 걱정을 해야 돼요?"다른 녀석들도 금세 고개를 주억거린다. 웃고 까불고 장난치고 바람개비처럼 팔랑거리는 녀석들답다. 이 녀석들은 당최 심각해지질 않는다."아니, 부모가 아픈 데 걱정이 안 돼?"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서로 쳐다보다 내 얼굴을 바라보다 하며 어리둥절해 한다. 나는 일말의 기대를 걸고 다시 묻는다."그거 걱정할 문제 아닌가?"아이들은 표정도 없고 말도 없다. 잠시 후 한 녀석이 이제 질문의 요지를 알겠다는 듯 시원스레 쏟아낸다."병원에 가면 되잖아요!""맞아요, 맞아요. 병원에 가면 돼요."아하!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지? 하는 표정으로 이젠 이구동성으로 합창이다."야, 인석들아. 병원에 가는 것은 가는 것이고, 가족이 아프면 걱정이 안 되느냐고?"아이들은 다시 난감한 듯 대답이 없는데, 한 녀석이 돌연 뾰루통해져서 사뭇 도전적 어조로 외친다. "엄마는 걱정 안 해요. 혼만 내요.""맞아요, 맞아요. 아무리 아파도 과외는 가야 해요.""맞아요, 맞아요. 정말 나빠요."녀석들은 마치 규탄대회라도 열 듯한 기세다. 맥이 탁 빠진다. 이 녀석들에게 내가 뭘 가르치려고 했던 거지? 내가 한자 몇 자 익혔다고 폼잡고 싶었나. 컵에 물을 천천히 가득 따라 아주 꼭꼭 씹어서 마신다. 다 마실 때까지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먹을 게 턱없이 부족했던 내 어린 시절, 과외는 사치였다. 그저 아프지 않고 맘껏 뛰어 놀고 먹을 것 있을 때 배터지게 먹으면 그만이었다. 우리 부모들의 최대의 희망사항은 아프지 않고 튼튼하게 커줬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공부까지 잘 하면야 더할 나위 없지만. 내 열두 살은 그렇게 갔고 나는 아직도 '열두 살의 아이'란 당연히 그럴 거라 짐작만 하고 있었다. 그때의 나와 같은 생각과 욕망과 놀이 속에 존재하는 아이들로만 이 아이들을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아이들의 열두 살은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아픈 것도 먹는 것도 공부에 지장이 없어야 하는 거다. 벌써 이들을 만난 지 반년인데 나는 이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의 이 아이들을, 만나지 못했던 거다. 저 팔랑개비 같은 녀석들을 옥죄는 것은 그 넘의 공부, 공부다. 내가 가르치려 했던 것 또한 저들에겐 또 하나의 구속이었겠다. 감옥이고 형벌이었겠다.공짜로 한자 교실을 열면서 나는 제법 자유인 흉내를 냈다."오고 싶으면 오고, 오기 싫으면 오지 않아도 돼."선심을 있는 대로 베풀었지, 내 멋에 겨워서. 사실 아이들은 부모에 의해 끌려왔고 거부할 수 없었을 뿐인데.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업을 접고 말았다. 진심으로 그들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속으로만 간절히 부탁했다. "얘들아! 부디 건강하게 자라다오."*수필가 강병기(공도한의원 원장)씨는 '에세이스트'로 수필(2007)평론(2009)부문에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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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15 23:02

울리지 않는 전화벨

퇴직과 함께 미루던 디스크 수술을 받고 좋아하는 산행을 자제하였다. 겨울입네, 하여 웅크리고 살다보니 몸도 마음도 무겁고 답답하였다. 봄맞이 대청소나 할까 하는데 눈길이 한 곳에 멈칫 섰다. 낯선 손님 둘이 눈에 띈다. 그 중 하나가 검정 우산이다. 아무리 친해보려 애써도 마음이 가지 않고 서먹하다. 볼 때마다 아쉽고 찝찝하다. 그것은 기억하고 싶은 분으로부터 받은 선물로 그에 대한 애정과 많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주신 분의 정이 묻어나는 것 같아 오래도록 나만이 만져주고 싶은 우산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분명히 있어야할 자리가 비어있었다. 어딘가 있겠지 하면서 찾아봤지만 허사였다. 밤인지라 한잔 하다 보니 아마 청색이 검정으로 보여 '이거겠지' 하고 집어 갔는가싶다. 체념하고 주인에게 말했더니 역시 그런 일이 종종 있다면서 주인 없는 저거라도 들고 가란다. 나는 들고 오며 혹시나 하고 전화번호를 남겨놓았다. 그러나 지금껏 무소식이다.또 한 친구는 등산화다. 등산을 좋아하다보니 자주 신을 것 같아 이번엔 좀 좋은 것으로 준비해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색깔이며 디자인이 아무리 보아도 내 맘에 꼭 들었다. 나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살 때는 많은 돈이 무겁게도 느껴졌지만 신어보니 잘했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 정도로 아깝지 않았다. 나는 아이마냥 좋아라 '쿵쿵' 굴러보고 뛰어도 보았다. 가끔씩 신어볼라치면 그렇게 가볍고 편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며칠 후 모처럼 산행을 마치고 휘파람을 불면서 돌아와 시내에서 꽤 잘한다는 음식점에 들러 주린 배를 실컷 채우고 나오니 있어야할 신발이 없다. 아, 이럴 수가! 실망이다. 둘러보니 내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게 하나 있어 들여다보니 누군가 한 짝씩 바꿔 신고 간 것이다. 비슷하여 신어보니 발이 편하니까 무심결에 '이것이 내 것이로구나' 하고 기분 좋게 신고 간 것일 게다. 그러나 나로선 가끔씩 만져보던 모습이 멋 적게 떠올라 더욱 씁쓸하였다. 사랑땜을 못한 터라 잘 먹고도 뒷맛은 참으로 개운치 않았다. 나는 혹시나 하고 밥값을 치른 후 전화번호를 남겼지만 오늘까지 역시 무소식이다. 상표나 디자인이 확연히 다른데 뱃심 좋게 모른척하고 짝 신발을 신고 다닐 수도 없고 버리자니 그동안 든 정이 아깝다. 누군지도 모를 야속한 사람을 원망하다 체념하다 세상 탓을 해본다. 우산이나 운동화 욕심이 나서 가져간 것은 물론 아닐 게다. 순간의 착오요, 실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다. 나중에라도 바뀐 것을 알았으면 합당한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무소식이다. '뭘 그 게나 그 게지, 내 것도 새것인 걸, 다 그럴 수 있지' 하면서 그만둔 것일까? 대충대충 적당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고잔잔한 푸념일 수 있다. 다 자기 마음대로다. 남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다. 더 이상 언급하면 우스운 사람이 되는 세상이다. 이는 자신의 교양과 인격을 버리는 행위인 동시에 시민의식의 부재로 이것이 바로 후진성이다. 누구나 실수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런 실수를 통하여 더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 수 있지 않나싶어 아쉽다. 잘 먹고 산다해서 선진국은 아니지 않는가? 어느 외국인이 우리를 나밖에 모르는 한국인이라고 폄하하였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시대정신은 배려하는 마음이라고 한 말이 의미 있게 들린다. 멈칫 옷깃을 사리는 낯선 우산과 서로 등 돌린 짝 신발을 바라본다. '그럴 수 있지요, 참 고맙습니다' 나는 이런 대답을 준비하고 기다려보지만 무심한 전화벨은 울리지를 않는다. 반가운 벨소리가 우리 모두에게 들리는 날이 바로 선진국으로 가는 날일 것인데 . 청소를 마치고 나니 마음이 가뿐하다. 하늘이 더욱 푸르게 보인다. 내일 모래는 완도 상황봉 산행이다, 지금쯤 새봄맞이에 바쁠 남녘의 일손과 기지개 켜는 봄뜰의 수줍은 몸짓이 눈에 선하여 가슴이 설렌다.※ 시인 겸 수필가 류준식씨는 초등학교 교장을 정년 퇴임. 매월당 문학상, 릴케문학대상 등을 수상. 시집'고향은 부른다', 시조집 '어디 너뿐이랴', 수필집 '아리의 눈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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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08 23:02

월출동령에 돋는 달과 상현 낮달

'일락서산(日落西山)에 해 지고 월출동령(月出東嶺)에 달 돋는다'는 만고의 진리이다. 해는 서쪽에서 지고 달은 동쪽에서 뜬다는 사실을 뉘라서 아니라 하랴.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은 오직 이것뿐인 듯이 이 상투어는 흥부가. 새타령. 제비가, 양산도, 쾌지나칭칭나네, 옹헤야, 자진농부가 등 온갖 민요나 잡가나 판소리에 등장한다. 불확실한 우리네 인생에서 이 이상 확실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그렇다고 우리가 서산에 해지고 동령에 달뜨는 현상을 항상 보는 것은 아니다. 일락서산이야 그렇다 치고 월출동령을 얼마나 보았는가. 우리나라의 경우 해가 하지에는 5시 15분, 동지에는 7시 40분경에 뜬다. 그 6개월에 2시간 25분 정도이니, 그 차이가 하루 채 1분도 되지 않는다. 이렇게 해는 거의 제 시간을 정해 놓고 제자리에서 뜨지만, 정월 초하룻날만 해도 해맞이를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비가 오거나 구름이 잔뜩 끼면 늦게야 중천에서 뜨는 해를 본다. 달은 어떤가. 달은 날마다 50분씩 늦게 뜬다. 초승달은 음력 3일경 해가 진 후 서쪽 하늘에서 볼 수 있다. 음력 7일이 되면, 초승달에서 점점 차올라 오른쪽 반이 보이는 상현달이 나타난다. 상현달은 한낮에 떠서 해가 지고 난 후 남쪽 하늘에서 볼 수 있다. 음력 15일 뜨는 보름달은 태양이 지고 난 뒤 동쪽에서 떠올라 자정쯤에 정남쪽에 위치한다. 음력 23일쯤의 하현달은 자정쯤에 떠서 한낮에 지기 때문에, 해가 뜬 이후로는 관측하기 어렵다. 음력 27일경의 그믐달은 새벽에 떠서 해가 뜨기 전까지 동쪽 하늘에서 관측이 가능하다.그러므로 우리는 월출동령을 거의 체험하지 못한다. '그냥 동령에서 떴겠지'하고 짐작하는 것이다. 그밖에는 '아니, 언제 달이 떠 있네' 하는 정도이다. 상현 무렵의 '낮에 나온 반달'도 있다. 월출동령은 거의 보름달이나 그 즈음의 현상이다. 보름달은 기다림에 반하지 않고 빛깔도 환하게 동창에 떠오른다. 이것이 '월출동령'이고 달이 떠오르는 정상적인 방법이다. 누군들 월출동령 하는 보름달에 환호하지 않으랴. 달이나 달맞이노래는 거의가 보름달에 관한 것이다. 대부분의 달은 '밝은 달'이다. 김영랑은 '아흐레 어린 달이 부름도 없이 홀로 났네'('빛깔 환히')라고 상현달을 안쓰러워했다. 누가 애타게 부르지도 않고 누가 반갑게 맞이하지도 않는데 그냥 홀로 나온다. 윤극영의 반달은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서쪽 나라로 간다. 돛대가 있어야 바람을 받으며 삿대가 있어야 방향을 찾아 배를 젓는데 그조차도 없이 반달은 항해를 계속한다. 그렇게 주위에 별도 뜨지 않아 의지가지없이 미아처럼 홀로 희미한 모양으로 낮 하늘을 항해하고 있다. 시인 말고 누가 쳐다보기라도 하는가.보름달만 달이 아니다. 호박꽃도 꽃이다. 다만 천체운행의 법칙이랑 DNA가 이들을 생산했을 따름이다. 이들의 탓이 아니다. 가난하고 소외받는 민중을 위하는 정당이 왜 종북이라고 뭇매를 맞는지 모르겠다.※ 오하근 원광대 명예교수는 1981년 현대문학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김소월 시의 성상징 연구''한국 현대시 해석의 오류''전북현대문학'등의 저서가 있다. 목정문화상, 김환태평론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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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01 23:02

통 성냥

때늦은 태풍이 온 시가지를 뒤흔들었다. 추석을 비켜가는 사이에 밀렸던 잔무를 대강 마치고 나는 역전 근처 은행을 찾았다. 예상대로 추석연휴 끝의 은행은 사뭇 붐비었다. 다소 지루한 기다림 속에 나는 문득 '다 먹어도 나이는 먹지 말라'던 친정어머니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떠올렸다.일을 보는 동안에도 가을을 재촉하는지 비는 그칠 줄 몰랐다. 은행 문을 바삐 빠져 나오려는 순간, 웬 할머니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역'을 물었다. 금방 나온 집을 모르겠단다. 나는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바로 집 근처 슈퍼를 들렀는데 '얼마 전에 이사 든 골목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전화도 없고 동(洞) 이름도 몰랐다. 나는 암담했다.나는 무작정 할머니의 길을 더듬어 볼 작정이었다. 두 사람을 가리기에는 턱없이 작은 우산 속에서 노인과 나는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였다. 아무리 헤매어도 노인의 기억은 내 손을 덥석 잡던 은행 앞만 맴돌았다. 여전히 비는 지분거리고 어둠까지 스멀스멀 기어오고 있었다.할머니의 맨발이 나의 한기를 재촉했다. 길가 슈퍼에 들러 새 양말을 신겼다. 거스름 대신 두 켤레는 가슴에 안겨주었다. 노인은 '고맙다'며 두 손을 모았다. 치마폭에서 성냥갑이 부스스 떨어진 것은 그때였다. '요즘 세상에 웬 성냥일까?'나는 할머니를 분식집에 앉혔다. 칼국수를 기다리는 동안 자초지종 끝에 큰아들이 개인택시 기사라는 것을 알았다. "왜 혼자 사세요.""-----"나는 더 묻지 않았다. 노인은 '다 먹어도 나이를 먹지 말라'고 혼자 중얼 거렸다. 친정어머니도 똑같은 말을 자주 했었다. 오랜 당뇨병이 지겹지도 않는지 '네 아버지 건강이 전 같지 않다'며 눈물짓던 어머니다.휴대전화와 씨름한 끝에 택시회사와 연결이 되었다. 국수물이 끓을 무렵 젊은 아들 내외가 분식집으로 들어섰다. 할머니의 집은 슈퍼 바로 뒤쪽 두 번째 작은 골목이었다.골목 어귀에 들어서자 할머니는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앞장서서 내 손을 이끈다. 돌아서는 나를 애원하듯 놓아주지 않았다. 들어선 집은 부엌도 없는 남의 집 문간 단칸방이었다. 눅눅한 습기가 온 방에 가득하고 구석에 쌓아둔 누더기 홑이불자락 곁에 낡고 덕지덕지 때가 낀 휴대용 가스렌지가 놓여있었다. 찻물을 끓이려는지 렌지에 성냥을 그어댔다. 눅눅한 성냥은 이미 성냥이 아니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나는 그만 화가 치밀었다. 할머니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아들과 함께 살지 웬 궁상이세요."할머니는 말없이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장승처럼 서 있던 며느리가 끼어들었다."방이 모자라서 따로 살 수 밖에 없어요."나는 며느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네 자식 방은 있겠지' 나는 속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문득 현대판 고려장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가스라이터도 켤 줄 모르는 여든 하고도 두 살의 할머니에게 며느리가 넷이고 사위가 둘인들 무슨 소용일까. 할머니는 '오늘의 이 고마움을 나머지 자식들에게 말해 두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다시 찾아오겠다.'는 못 지킬 약속을 나도 모르게 남긴 채 어두워진 골목을 빠져 나왔다. 상가의 불빛에 비친 빗줄기가 제법 번들거린다. 비속을 천천히 걸었다. 딸 뿐인 친정부모와 맏며느리의 무게가 내 어깨에 겹친다. 다 먹어도 먹지 말아야할 나이가 내게도 찾아오기는 올 것이다. 나는 빗발치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맑게 갠 아침 해를 빨리 맞고 싶었다.※ 수필가 신경자씨는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에 당선. 문광부의 문학작가파견사업 마동시립도서관 강사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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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5.25 23:02

연둣빛 계절

공원에서 잡힌 방아깨비가 몸살 나겠다. 동네 꼬마 둘이 마주앉아 한시도 그냥 두지 않는다. 앞뒤 다리를 일직선으로 잡아 당겼다가 벌리기도 하고, 뒷다리를 붙들고 마주보며 방아를 찧게도 한다. 악동들의 손에 잡힌 초록의 방아깨비 날개 위로 유년의 뜰이 도미노가 되어 번져간다. 어머니 걸음 좇아 방죽골 밭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의 약수터는 나의 쉼터였다. 한 모금의 옥수가 땀을 식혀 주던 곳이다. 그 옆으로 누워있는 다랑이 논들의 물꼬마다 벌여 놓은 백중음식에 개구리들은 잔칫날을 맞았다.뾰족뾰족 고개를 내미는 나락 모가지에 농심이 여무는 날, 어머니를 따라 방죽골 밭에 갔다. 아담한 방죽 가장 자리를 빙 둘러 보랏빛 붓꽃들이 청초했다. 방죽물이 무서워 한 송이도 꺾지 못한 나는 애매한 옥수수만 줄기차게 꺾었다. 그러다 무심코 돌아본 우리 동네가 엄지손톱만 했다. 산꼭대기에 걸려있는 낮달이 한낮의 더위에 졸고 있는 사이, 바지런한 어머니는 삽시간에 옥수수를 광주리에 채웠다. 머리 위의 옥수수가 광주리 밖으로 미끄러질 듯 간들간들 거리는데도 어머니는 두 손을 놓은 채 태연히 걸었다. 나는 어머니의 쪽머리를 놓칠세라 종종거리지만 얼마가지 못해 숨이 찼다.노을이 멀어지는 등 뒤로 따라온 하루살이를 쫓다보니 어느새 동네에서는 저녁연기가 한창이다. 귀로의 고달픈 등을 어루만지는 바람과 함께 고삐 풀린 황소도 어슬렁어슬렁 집을 찾아 들었다. 풀벌레가 수런대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마른 쑥으로 모깃불을 지폈다. 마당을 맴도는 매캐한 연기에 나는 그예 눈물을 흘렸다. 긴 꼬리를 물고 오르는 연기를 무심코 따라가다 문득 멈춘 초가지붕에 박꽃이 앞을 다투어 피고 있었다. 밤의 정적 때문이었을까. 달밤에 피어서 더욱 빛이 하얀 박꽃이 신비스런 감성으로 젖어왔다. 멍석에 누운 우리들이 은하수의 전설로 빠져들 때쯤 어머니는 김이 오르는 옥수수 소쿠리를 들고 나왔다. '노랑, 하양, 보라, 어쩜 이리도 결이 가지런할까?'어머니의 잇속처럼 총총히 여문 옥수수를 뜯는 사이, 길을 잘못 든 반딧불이가 사립문을 밀고 들어왔다. 깜빡이는 반딧불 너머로 때마침 별똥별이 떨어졌다. 그 순간을 놓칠세라 야무진 소원을 빌었다. 우리들의 머리엔 어느새 밤이슬이 촉촉했다.여우비가 지나간 들머리에 무지개가 선연하던 말거리재, 그 너머 파랑새를 쫓던 꿈이 마냥 머무르던 곳. 생각할수록 아버지의 푸나무 짐 위에 꽂혀있던 앵두만큼 새콤달콤했던 시절이었다. 가재를 잡던 동무들도 어느 도시의 중년이 되어 박꽃 피던 시절을 그리워하겠지. 산들바람 사이로 언뜻언뜻 떠오르는 상고머리는 이제 희어지기가 바쁘겠다.문득 어머니의 모습이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내 가슴에는 아직도 그 시절 어머니의 곱던 모습이 생생하다. 인생사 잠깐이니 두루두루 빈 마음으로 살라고 하시던 말씀 또한 또렷하다. 그러나 나이 들수록 질겨지는 욕망의 끈에 매달려 아등바등 살아가는 내 모습에 스스로 놀라곤 한다. 그 시절 어머니의 나이쯤 되면 마냥 좋을 줄만 알았는데 그 나이를 지나친 지금도 노상 복닥거리고 산다. 바래지고, 세어지고, 무디어져 마음이 허허로울 때면 연둣빛 싱그럽던 시절, 밤하늘의 별만큼 꿈이 많던 그 시절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와 눈앞에 선다.공원에서 방아깨비를 못살게 굴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수필가 이양선씨는 2010년 〈수필과 비평〉에서 신인상을 받고 2011년 〈계간수필〉로도 추천을 완료했다. 2008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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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5.18 23:02

사나이 우는 마음

제 아버지께서는 어쩌다 막걸리 한잔? 을 마셨다 하면 동네가 떠나가도록 노래를 부르며 들어오시곤 하였습니다. 그럴 때면 어머니께서는 차마 대문 밖으로 나서지 못하고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마당가를 서성거리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싶으면 "아이고, 동네 챙피해서 못살것다. 술을 쳐먹을라면 곱게 쳐드실 일이지 동네 우세는 다시키고. 야야, 막내야. 니가 얼릉 좀 나가 보거라."'칫, 엄니가 창피스러우면 나도 창피스러운 것인디. 어리다고 왜 나만 시켜쌓는대. 나도 알 것은 다 아는 나인디.'뒤따라오는 누렁이에게 맥없이 화풀이를 해대며 어둑한 고샅길을 걸어 나오면 아버지의 희미한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비틀비틀 팔자걸음에 분명 앞으로 걸어오는 듯 한데 뒷걸음을 치시고, 다시 앞으로 걷다가 또 옆으로, 다시 또 뒷걸음. 분명 걸어오는 것은 맞는데 도통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빙빙 돌고만 계셨습니다. 그러다가는 금방이라도 넘어질듯 비틀거리다가 용케 몸을 가누시며"싸~랑에 약~한것~이 싸나이 마~음, 울~~지를~~말어~라~~~~~."목청껏 울부짖으시다가, "아~~~아~~~아~~~아~~"에 이르러서는 목이 갈라져 쿨룩거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는 한 손으로는 광덕이네 담벼락을 짚으면서 요샛말로 오바이트를 하셨습니다. 동네 개들은 왈왈 짖어대고 고샅에서 광덕이도 나오고 길자도 나오고 오늘따라 하필이면 보름달은 밝고. 정말로 쪽팔려 죽을 맛이었습니다.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했던가요. 담벼락을 짚고 구토를 하시던 아버지는 지금 이 세상에 계시지 않으십니다. 이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누구인지, 정확한 제목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는 않습니다. 정말이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왜 아버지께서 이 노래를 그렇게 울부짖듯 부르셔야 했는지를. 그리고 그때는 진정 몰랐습니다. '사나이 우는 마음' 이 어떠한 것인지를.이제 저도 무람하게도 어른이 되어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만한 나이가 되었습니다. 비록 반쪽짜리 부모 노릇으로나마 한 아이를 키우며 가장의 눈물, 사나이의 눈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데서 흘러나오는가도 알게 되었습니다.평생 농부이셨던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다면 지금은 백번이라도 술 마중을 나갈 터인데. 그 옛날처럼 '착하게 살아라. 베풀며 살아라. 지는 게 이기는 거란다.' 이르며 연신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어머니께서 살아 계시다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착하고 어질며 베풀 줄 아는 참사람으로 잘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나이만 먹은 거짓 어른이 되어 제 스스로 마음을 곧추세우며 어루만지며 다독이며 살려하니 가슴으로 피눈물을 흘릴 때 가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 슬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세상살이가 서러울수록 어른노릇 부모노릇이 너무 힘들어 부모님 무덤가에라도 찾아가 온갖 설움을 맘 놓고 쏟아내며 통곡하고 싶을 때 도 많이 있습니다.저녁 예불을 하러 가는 길에 꽃샘바람이 매섭습니다. 아직도 날이 선 차가운 바람에 금방이라도 코피가 터질 것만 같습니다. 법당에 오르다 말고 뒤를 돌아봅니다. 저 멀리 푸른 보리가 넘실거리는 들녘이 한 눈에 들여 다 보입니다. 저녁연기가 피어오르는 고향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분들이 새삼 부럽게만 느껴집니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데 그렇다면 이미 저는 진 사람입니다. 아마 저도 늙는 가 봅니다. 어쩌자고 저 들녘이 아닌 절간에서 보리(菩提)를 찾으려 하는 것인지 아마도 오늘은 쉬이 기도가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수필가 송순녀씨는 2004년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했다. 완주 송광사에서 차(茶)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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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5.11 23:02

금 강

틈나면 자주 가 보던 금강변이 망가졌다. 흙먼지 뒤집어 쓴 트럭들이 웅포 긴 다리 밑을 부지런히 오간다. 덕지덕지 피곤에 쌓인 덤프트럭 기사들의 얼굴이 역역하다. 밤낮 없이 파고 나르는 강행군이 남루했었다. 그게 그의 끼니였으나 파고들면 강은 절규하고 흙탕물을 게워내며 쿨럭이는 것을 나는 오래 지켜보았다. 금강이 가까이에서 망가진 모습을 나는 오래 지켜보았다. 감은 눈에 떠오른 비단강둑을 오래오래 지켜본다. 생각에 지친 나를 위무하던 강이다. 번잡한 생각을 도닥이며 키워주고도 그런 내색은 모르는 강이었다. 조약돌을 집어 던지면 수면에 코를 박던 물수제비를 띄워주며 '심심하냐.'고 묻고 깡충깡충 튕겨주다 잦아들던 강이다. 갈잎 배를 띄우면 묵묵히 흘러 빨래하는 아낙 곁을 주춤거리다 방망이 끝에 튀는 땟물을 싣고 가던 강이다. 혼자 가다 심심하면 구비 도는 여울 곁에서 휘어지게 진양조로 한 곡을 뽑고 흘러가다 섭섭하면 여울져 맴 돌아 들던 강이다. 흐름뿐이랴. 넘치면서 쌓이고 쌓이면서 갈리어 무게를 덜고 그 무게의 틈에 모래무지를 길러 함께 사는 지혜를 가르치던 강이다. 강마을 사람들은 잊은 지 오랜 흰 돛배의 새우젓을 이야기한다. 포구 마을 너머로 지는 석양을 등에 진 발길에서 흘러내린 그물자락의 노을이 지등(紙燈)처럼 옛 나루를 밝혀든다. 군산포를 거슬러 강바람을 가르며 갱갱이포(강경)에 이르는 길고 먼 옛 굽이의 소금 배에는 생선과 함께 쌀이 실려 나가고 실려 오던 밥의 이야기가 주절댄다. 흐른다고 다 눈물이랴. 백제 유민 6만이 노예로 실려 갈 때에도 금강은 울면서 울지 않으면서 삼킨 눈물은 넘쳐 황산들의 너른 벼를 알게 모르게 키웠다. 그 강이, 그렇게 천년을 흘러 만년을 이을 그 강이, 울면서 울지 않던 그 금강이 누더기로 뜯기고 할퀴었다. 흐른다고 다 강이랴. 곧장 흘러 바다로 가는 그런 강은 강이 아니다. 구비 돌아 아우르며 끼고도는 푸른 들에는 풀을 뜯고 이삭을 쪼고 뽀뿌라 그늘 아래 웃음이 깃들어야 한다. 멱 감으며 등을 밀다 주춤주춤 손 흔드는 한낮이 길게 누어 흘러야 한다. 강에 기댄 목숨들이 거덜 나는 데 하느님은 말이 없다. 요단강도 파헤치자고 덤벼들 저 굴삭기 앞에 내 기도는 응답이 없다. 십자가는 말이 없다. 파지마라, 자르지 마라, 매달리며 응석 부리고 떼를 쓰며 기댄 기도가 민망하였다.공양미 3백석을 마련하여 눈먼 세상을 수술하고 싶었다. 엇 그제는 누런 모래 둔이 사라졌다. 어제는 두루미가 옛 나루 구비에서 전세방을 뺐다. 강둑에 쌓이던 초록의 장한 노래의 음표가 오늘은 물결의 오선지를 떠난다. 내일은 다함없던 흙탕물의 함성이 도란도란 강톱에 쌓아올린 이야기도 쓸어버릴 것이다. 죽음이 강을 거덜 내 버렸다. 마저 죽기를 기다려 수륙재를 준비해야하나. '원 왕생'(願 往生)을 외우며 극락을 비는 내 무딘 독경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어른이 된 소년의 꿈이 어머니의 강을 윤간해 버렸다. 저 큰 삽의 뚱한 표정이, 덤덤한 무감각이, 참으로 보기 흉하다. 조금 남은 맑은 물을 손으로 찍어본다. 차다. 내가 조금 젖어있을 때 강은 더 깊이 젖어 밑으로만 나를 대신하여 흐르며 위로하고 '하늘의 새끼 구름을 바라보라'고 다독여주었다. 울면서 낮게 외우던 강의 긴 '옴' 소리를 나는 듣는다. 저 때의 냉이 꽃은, 강둑의 어린 칡소는 다 안다. 끌러가던 백제유민의 아픈 눈물을 기억한다. 한 번 더 비단물결을 헤적여 찍어 강의 남은 체온을 재어본다. 아직 살아 있다. 곡신(谷神)이 성나기 전에 차떼기 하듯 삼백 석을 마련하고 싶다. 눈먼 소년의 눈을 수술하여 주기 위해 삼백 석을 마련해야겠다. 물위에 '삼백 석!'을 쓰고 어음으로 달아 놓는다. 물결이 어음을 들고 세차게 달려간다. 풀기 없는 내 문장이 메아리를 못 지어 구만리 하늘을 에둘러 맴 돌더라도 강가에 나아가 강물에 어음 쓰는 필법을 터득하고 말겠다. 굽이치는 필법은 살아있음이 아니냐. 살아있음은 아름다움이 아니냐. 나는 벌떡 일어나 강가로 내닫는다. 맹렬한 삶의 의욕에 넘친다. 오늘도 강가에 나아가 젖지 말자, 젖지 말자, 하면서 흠뻑 젖어 돌아온다. 망가진 대지의 자궁을 안쓰럽게 바라보면 나약하나 나의 기도는 한없이 길어질 것이다. 비단강(錦江)의 비단 물결은 눈을 뜨고 보여야 한다.*수필가 박영학씨는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현재 가람시조문학회장과 원광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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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5.04 23:02

봄 마중

잔설이 흩뿌려지고 삭풍이 불어도 정녕 봄은 오는가 보다. 입춘 전후가 되면 그는 어김없이 고개를 내밀고 보아달라고 눈짓을 한다. 신의를 꼭 지키고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 군자 같은 풍모다. 나는 그와 만날 때 한없는 설렘과 기쁨과 감격으로 생명의 환희를 만끽한다. 20여 년이 넘었건만 한 해도 거른 적 없이 때맞춰 가까운 우리 집 거실에서 봄 마중을 하게 만든다.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그는 화사한 봄차림으로 나에게 생기를 돋게 하고 우중충했던 겨울옷을 벗게 해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늘 푸른 모습으로 사시사철 내 곁에 있다. 그것은 그이가 남겨준 보물이다.남겨준 이의 애틋한 정과 그리움이 더해져 아침에 눈을 뜨면 맨 먼저 인사를 건넨다. 새해가 오고 1월이 가고 2월이 되면 나는 더 눈[目]을 맞추려고 일어나자마자 베란다 문을 열고 쳐다본다. 입춘이 가까이 오면 배가 불러오다 어느 날 갑자기 고개를 쑥 내민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목을 빼고 기다린다. 사람이나 기계도 실수를 하고 고장이 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보물은 20년을 훨씬 넘도록 한 번도 고장이 나거나 실수를 한 적이 없다. 날짜도 어기지 않는다. 이름은 그저 붙여지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꼭 이름값을 한다.꽃 중의 꽃 군자란! 멀리 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일찍 봄 마중을 시켜주는 이 군자란을 나는 자식 다음으로 아낀다. 후일 쓸쓸해 할 나를 위해 정성들여 만들어 준 남편의 사랑이 묻은 이 화분은 잔설이 녹기도 전 화사한 봄빛으로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생명의 경이와 신비를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준다.작년에는 며느리가 만들어준 감자 순이 올라온 유리접시와 함께 봄맞이를 했었다. 이제 며칠 지나면 설 명절이다. 올해는 며늘애가 또 어떤 봄을 가지고 올지 기다려진다. 며느리 희정이는 센스가 있다. 내가 꽃 화분을 좋아하는 걸 알고 전주에 올 때는 꼭 작은 꽃 화분 하나씩을 들고 온다. 멀리 가지 않아도 봄 마중을 하게 만들어 준 남편과 며느리에게 고마움을 전한다.맹자는 고자상에서 '사람은 자기 몸에 대해서는 어느 것이나 다 사랑한다. 어느 것이나 다 똑같이 사랑하면 기르는 것도 똑같이 한다. 잘 기르고 잘못 기름을 상고(살펴봄)하는 것이 어찌 다른 것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모든 생명이 있는 것은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고 잘 가꾸어야 한다는 애정과 도리를 가르쳤다. 요즘 생명경시 풍조는 끔찍한 일들을 연출한다. 부모는 자식을 버리고 자식은 부모를 모욕하며 내치고, 인륜의 끝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무서운 세상이다.뒤쪽 창문을 열어보니 작년 가을에 파종한 텃밭의 마늘 싹도 겨우내 움츠리고 있더니 봄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기지개를 켜며 파릇한 몸짓으로 곧 주인에게 성찬을 차려 주겠다고 미소를 짓는다.만물이 소생하는 이 봄에 따뜻한 연민의 정과 생명에 대한 감사한 마음으로 봄을 마중하려고 한다.*수필가 공순혜씨는 2008년 〈대한문학〉 으로 등단했다. 수필집 「아침 햇살 가득 번지던 그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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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4.27 23:02

진정한 삶과 행복 - 오정민

오늘따라 봄비가 다녀 간 자리엔 백목련이 더욱 곱다. 한평생 공도를 위해 공변된 삶을 누리다 입적한 그 어른의 자취 그 모습처럼.사람은 누구나 부모의 인연 따라서 몸을 받고 천지의 기운을 받아 생명을 유지한다.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한평생을 살다 세상과 인연이 다하면 빌려 쓰던 몸은 네 가지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흩어져 자연으로 돌아가고 마음은 생전의 지은 바에 따라 다시 태어나 고통의 굴레에서 살게 된다. 그러니 생명이 붙어 있는 한 괴로움의 바다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인간이요 보통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이다.옛날 어느 고을 욕심이 많은 만석궁의 집에 머슴이 들어 와 살게 된다. 주인이 심부름을 시키면 한 번도 제대로 해오는 일이 없다. 그래서 주인은 이웃집이나 장날 심부름을 시킬 때에는 걱정이 앞선다. 하루는 주인의 궁리 끝에 머슴을 불러 "네 이름을 멍텅구리라고 지었으니 심부름을 갈 때면 이 멍텅구리 방망이를 반드시 차고 가야하느니라. 알겠느냐?" 비록 바보라고는 하지만 좋은 이름 두고 하필 멍텅구리라고 지어주다니 이럴 수가 있을까, 그렇다고 불평이나 불만을 터뜨리면 항명이니 어찌할 도리 없이 상전의 말을 따라야만 했다. 주인은 심부름을 시킬 때마다 '멍텅구리방망이'라 쓴 방망이 끝에 어디에 살며 심부름 내역까지 상세히 적어 허리춤에 매달아주곤 했다. 어느 날 주인은 머슴을 불러 앉히고 유언을 당부한다."내가 너에게 오늘날까지 잘 해준 것도 없지만 이제 가야할 때가 되었나보다. 그러니 너는 종전처럼 안방마님 모시고 집안일을 알뜰히 잘 보살펴 드리거라" "으디로 가시는디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구나", "가시면 은지 오시는디유?", "그것도 모르겠구나", "을매나 지시는 디유?", "이 놈아,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는데 머물 날을 어찌 알겠느냐?", "참, 쥔 만님두 답답하시구먼유, 이 놈의 방맹이는 내가 찰게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쥔 만님 당신이나 차시구료"했다고 한다.한자에는 욕(慾)자와 욕(欲)자가 있다. 이 두 글자는 똑같은 발음이지만 그 뜻은 사뭇 다르다. 마음 심(心)자 부수가 들어가느냐 안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큰 차이를 보인다. 욕(慾)자는 '욕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후자의 욕(欲)자는 '하고자 함'을 뜻한다. 하루아침에 변심하여 사람을 헤치고 살해하는 경우는 지나친 명예욕이나 물욕 때문이다. 그러니 욕(慾)은 지나친 욕심 때문에 패가망신할 뿐만 아니라 사회, 국가를 멍들게 한다. 그러나 욕(欲)은 '하고자함'이다. 자신을 닦아서 우리 모두를 빛내주는 요인이 된다. 은반의 여왕 '김연아' 선수나 미식축구왕 '하인스 워드'선수나 월드스타 가수 '비'와 같은 경우다. 그뿐이겠는가 지체가 부자유한 몸인데도 세계적인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이희아 양 같은 경우는 전 세계 장애우들에게 큰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동시에 민인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지 않은가. 어리석은 생각과 망령된 욕심이 범벅이 되어 우리사회를 괴로움의 바다로 만들어가고 자신과 세상을 활활 타게 하느냐 아니면 나보다 세상을 이롭게 하는 동시에 문명한 세상을 만들고 인류의 빛이 되게하느냐 하는 욕구의 방향은 모두 이 마음을 어떻게 선용하느냐에 달려 있다.현대인들은 많은 돈, 높은 권력과 지위, 명예 같은 것들에 목매어 살아가고 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자존심과 자존감을 높여 주며 그것을 통해 인생의 진정한 목표가 될 행복, 자아성취, 건강, 웃음, 사랑들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하루하루는 참으로 소중한 가치가 있다. 어떻게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살아 갈 것인가. 하루에 한 번 쯤이라도 칠흑 같은 어두운 방에서 1분만이라도 명상에 잠겨보아라. 마음의 눈으로 가슴의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자.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라고. 진정한 삶과 행복이란 감정과 일이 기쁨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지혜,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혜의 열쇠는 각자의 마음속에 달려있음을 알자.*수필가 오정민씨는 월간수필문학(수필)과 한국문예사조(시)로 등단. 수필집 <다북찬 임의 향기>와 시집<붙박이별이 되어>가 있다. 현 원광효도마을 자원봉사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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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4.13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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