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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 유감

지난 주말 제 24회 전북 문학상(시 부문)을 받게 되었다. 문단에 등단한 지 32년만의 일이다. 1965년 대학 1학년 때 박범신, 강상기 등과 '지하수'란 문학 동인에서 활동하던 시절부터 합치면 꽤 오랜 세월이 지난 셈이다. 근래에는 1년에 3명씩 이 상을 받게 된다. 그래서인지 근자에 와서는 후배문인들이 대부분 이 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문학상이란 게 꼭 등단 순서나 선후배를 따져 주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좁은 지역에서 고만 고만한 얼굴로 형님 동생하고 지내는 처지에, 후배들이 그것도 내 또래를 지나 저 멀리 훌쩍 지나가버리자, 이젠 설령 누가 챙겨 준다고 하더라도 후배들 뒤에 서서 나도 이 상을 받겠노라고 얼굴을 내밀기가 쉽지 않은 처지가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예기치도 않는 그 예의 '전북 문학상' 통보를 받게 된 것이다. 당황스럽고 착잡해 한동안 말을 잊지 못하고 있다가 몇 주 전 전북시인상을 수상하시게 된 J선배 문인 한 분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어 몇 십 년 전, 작고하신 전북대 K 교수님께서 전북 문화상을 제자들과 한 자리에 서서 받으시던 모습이 떠오르면서 '과공비례'(過恭非禮)라고 못 이긴 체 받아들이고 말았다. 상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마는, 상을 탔다고 해서, 그것도 남보다 먼저,탔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라고 본다. 어떻게 그 상을 받게 되었느냐가 먼저 생각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받기는 받아도 별로 고맙지 않게 생각되는 상도 있고, 또 생각지도 않았는데 주변에서 챙겨주어, 받으면서도 누군가에게 좀 미안하고 그러면서도 한편 고맙기도 한 그런 상이 있기 마련이다. 한 20년 전의 일이다. 내가 근무하던 대학에 문예창작과가 생겨 내가 그 과의 학과장이 되고 또 초대 교무처장이 되어 얼마 안 되던 날이었다. 서울에 있는 어느 문예지 발행인이 찾아와 우리 과 학생의 외삼촌인가가 된다고 했다. 연구실에 꽂혀 있는 내 시들을 읽어보더니 시집을 한 권 내주겠노라고 했다. 그리고 이 정도 수준이면 제1회 문학상, 그것도 그 유명한 청록파 시인 중의 한 사람 이름의 '제 1회 문학상'을 주겠노라고 했다. 시골 학교에 있는, 그것도 문예창작과 교수인 나로서는 솔깃하지 않을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날부터 열심히 시를 썼고, 쓰면서 종종 그 약속을 확인해 가면서 일 년 후에 이전의 시와 합쳐 한 권 분량의 시가 모아지자 부푼 기대감으로 원고를 올려 보냈다. 표지에 올릴 프로필 사진도 수십 여장을 찍어 그 중에 한 장을 골라 보냈고, 시집의 제목도 '산행일기'로 정하여, 발문까지 서울 모 대학 국문과 K교수께 어렵게 부탁하여 받았다. 초고를 찍어 교정본을 마무리하여 올려 보내놓고도 다시 읽어보면 볼 때마다 고칠 데가 또 생기고 또 생겨났다. 이렇게 수정에 또 수정을 거듭하다 보니 출판사에서 난색을 표명하여 그만 인쇄에 부치고 말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시집이 집으로 배달되었는데 다시 보아도 시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시가 우선 내 마음에 들지 않는데 누가 내 시를 즐겨 읽겠는가? 도저히 그대로 시집을 세상에 내놓을 수가 없었다. 문학상에 그만 눈이 멀어 서둘러 책을 낸 게 잘 못이었다. 책 1000권을 고스란히 폐기처분하고 말았다. 하도 아쉬워 그 중 한 권은 지금도 내 서재에 꽂혀 있다. 그래서인지 이후 문학상에 대한 나의 반응은 소극적이었다. 준다고 해서 덥퍽 덥퍽 상을 받을 일이 아니다. 탈만한 사람이 상을 타면 상을 타는 사람도 상을 주는 사람도 또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즐겁고 기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 상을 받는 사람도 애써 상을 마련해 주는 사람도 뒤에 가서 욕을 먹게 된다. 주저리 주저리 훈장을 가슴에 달고 뽐내는 후진국 지도자들의 모습처럼, 각종 문학상을 휩쓸고 다니는 문학상 사냥꾼들도 있다. 요즘에 와선 신문사 신춘문예에까지 이런 풍조가 번지고 있어 연말만 되면 신문사마다 쫓아다니는 신종 신춘문예 사냥꾼 문인들도 등장하고 있다. 이번 나의 문학상도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 것인지 모를 일이다. 평생을 문학의 길에 들어 이 길을 걸어왔건만 나이가 들어 그것도 상을 하도 오랜만에 타다보니 이런 저런 생각이 들어 마냥 기뻐 할 수만 없어 무거운 마음으로 한 번 해 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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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2.01 23:02

못과 망치의 변주곡 - 이연희

며칠 전 운동 삼아 삼천천 근처를 걸었다. 걷다가 '꿈꾸는 목공방' 이라는 가게 안을 들여다보며 기웃거렸다. 원목으로 만든 침대며 책상, 장신구의 선반 등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왕 내친 김에 문을 밀고 들어갔다. 집 주소가 바뀐 지 두 해째이나 거실 벽 한 면의 허전한 구석이 그대로이다. 그 자리에 무언가를 장식하고 싶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어 왔던 터라 찬찬히 둘러볼 요량이었다. 주인 없는 가게에 인기척이 있자 삼십대로 보이는 남자가 작업실에서 나왔다. 동글납작한 얼굴에 잔뜩 먼지가 묻어있는 감색 점퍼를 입고 있었다. 뽀얀 나무먼지로 덮인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해서 흰머리처럼 보였다. 그는 아마 톱으로 나무를 자르거나 대패로 깎아내는 일을 하다 나온 모양이었다.맘에 드는 물건을 주문해 놓고 밖으로 나와 조금 더 걷기로 했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이상하게 목공방 아저씨의 톱밥먼지에 절은 수더분한 얼굴하며 유순한 눈매가 뒷전에 머물더니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아버지에게 나무며 톱, 망치, 못 등은 평생 친구이자 밥줄이었다. 중학교 때였던가. 한솥밥을 먹던 직공이 그 밥줄을 통째로 집어들고 줄행랑을 쳤다. 그 때 우리 집 형편이 곤궁해서 아버지의 상심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새 연장을 마련할 때마다 아버지 얼굴에 주름이 하나씩 더 늘었다. 이삼십 평 남짓한 공간은 잘라 맞추고 두드리는 일로 조용할 틈이 없었다. 나무먼지와 나무냄새로 인해 아버지의 모습은 안개 속에 서 있는 느티나무 같았다. 반세기동안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허리 펼 날이 없었다. 못과 망치, 날카로운 톱과 대패날은 아버지의 손에 늘 피멍과 함께 깊고 얕은 상처를 남겼다. 톱날의 우렁찬 소리가 공장 안에 그들먹해질 무렵이면 거북이 등껍질 같은 아버지의 손에서는 씩씩하고 경쾌한 못과 망치의 변주곡이 흘러 나왔다. 못과 망치의 절묘한 어울림은 어깨며 팔뚝 근육을 불끈불끈 솟구치게 했다. 굵고 가는 나무들은 자르고 맞추기, 문지르며 두드리고 깎아내기 등의 과정을 거쳐 아름다운 자개농이나 찬장, 고풍스러운 무늬가 있는 문으로 완성되었다. 그것들로 인해 우리는 허기를 면했으며 가족들의 배가 부를수록 아버지의 허리는 휘고 또 휘었다. 일상에서 아주 가끔 못을 사용해야 할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버지를 연상하면서 자신 있게 망치를 휘둘러대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못이 휘어지거나 비스듬히 박히고 더러는 톡 튀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잘못하여 못이 뽑힌 자리에는 반드시 흔적이 남아 눈엣가시가 되었다. 누군들 상처 없는 생이 있을까! 그래서인지 아버지도 가끔은 신세 한탄을 하셨다. 그러나 오랜 세월 아버지는 기꺼이 못이 되었고, 그 못은 가족에게 삶의 원동력이었다. 그것이 삐그덕거리는 의자에, 흔들리는 기둥에 중심이 되었다면 아버지는 나에게도 영원한 못이었다. 내 몸이 헐렁해지거나 느슨해져 비틀거릴 때마다 텅텅 못질에 녹슬지 않도록 윤활유까지 칠해주셨으니 말이다. 젊은 날 소음에 시달린 탓으로 귀가 어둡고 다리가 불편해 조금만 걸어도 비척거리는 아버지를 보면서 이제는 옛이야기가 되어버린 젊은 날의 아버지를 그려본다. 다시 들을 수 없는 못과 망치의 힘찬 변주곡이 무한정 그리운 날, 저 산 너머 언덕 아래에 살고 계시는 아버지를 소리쳐 불러본다. 아버지의 화답일까? 햇빛 한 줄기가 시린 어깨에 내려앉는다. 참 따숩다.* 수필가 이연희씨는 1993년 전주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수필집'풀꽃들과 만나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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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1.25 23:02

버스를 기다리며 - 송 순 녀

정초부터 쏟아지는 폭설은 십년 된 제 중고차의 발목을 묶어 놓고야말았습니다. 시외지역이라 더 많은 눈이 내리곤 하는 지형 탓에 버스로 출퇴근을 하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녁 퇴근길에 아무도 없는 빈 정류장에서 홀로 버스를 기다리는 일은 저의 인내력을 시험하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겨우 저녁 일곱 시가 지났을 뿐인데 산골의 겨울은 이미 깊은 어둠에 쌓여 있습니다. 버스가 들어오는 방향만을 향해 목을 빼고 기다리다보니 이 순간 가장 부러운 것은 따뜻한 차 안에서 여유롭게 운전하고 가는 사람입니다. 승용차 불빛이 다가오면 마음은 간절하면서도 차마 손을 들 용기가 나지 않아 애꿎은 손가락만 주머니 속에서 꼼지락거립니다. 그러면서도 다가온 승용차가 멈출 듯 그냥 미끄러져 가면 차 꽁무니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참,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들이군. 아니, 가는 길에 태우고 가면 기름이 더 들기라도 하나? 내가 먼저 손들기 전에 그치면 안 되는 거야?' 하고 투덜댑니다. 그러다가 이번엔 '왜, 버스는 안 오는 거야? 그러니까 니들이 파업을 해도 시민들이 모르는 척하는 거라고. 시간을 지키지 않은 운전자가 도대체 누군지, 내 그 얼굴을 똑똑히 봐두고 말테다.' 씩씩거리며 거친 발길로 옆에 쌓인 눈을 툭툭 차보지만 화는 좀처럼 풀리지 않습니다. 한 시간의 좌선은 거뜬한데 버스를 기다리는 일은 단 십 분을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십분. 삼십분. 오십분…. 온몸이 덜덜 떨려오고 손발이 쑤셔옵니다. 자꾸 콧물이 새어나오고 코와 입 주변이 칼로 베이는 듯 아파옵니다. 나중엔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저기 멀리서 아주 큰 불빛이 산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게 보입니다. 튕기듯 일어나 차도에 다가섭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빨간 불빛을 향해 손을 마구마구 흔들어대지만 웬걸, 큰 차는 나를 비켜 지나치고 맙니다. 직행버스였습니다. 그렇게 주머니 속에서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거나 시내버스인 줄 알고 손을 들었다가 뒤로 물러서기를 반복하는 사이 몸은 점차 굳어져가고 얼굴은 새파래져 갑니다. 이 적막한 겨울 산속에서 이대로 영영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건 아닐까? 두려운 생각이 고개를 들기도 합니다. 이렇게 추위와 공포에 떨고 있는 나를 데리려 와달라고 부탁해 볼만한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다는 사실이 가슴을 후빕니다. 그러다가 입장을 바꾸어, 누군가가 지금의 이 상황에 맞닥뜨려 있는 걸 알았다면 그를 위해 이 폭설을 뚫고 갈 용기가 있는가?'하고 자문해봅니다. 절로 고개가 흔들립니다. 각박하고 흉흉한 일들이 무시로 일어나는 세상에, 그것도 눈이 쏟아지는 인적 드문 한밤중에 낯선 사람을 선뜻 태우기란 제가 운전자라 하여도 내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제 앞을 지나친 운전자들에 대한 미움도 사라집니다. 우리 인생에 오지 않는 게 어디 버스 하나뿐이던가요. 청춘이, 꿈이, 성공이, 건강이 다 그렇지요.이제 온 몸이 아리다 못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때쯤 다시 저기 멀리서 지금까지 봐왔던 불빛과 다른 녹색불빛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가슴이 뜁니다. 아! 시내버스입니다. 진짜로 기적처럼 저 눈발을 헤치며 용감하게 버스가 오고 있습니다. 손을 들지 않았는데도 버스는 제 앞에서 멈춥니다. 정확히 한 시간 사십오 분 만에 '촤르르 끼이익~ 덜컹' 문이 열립니다. 세상에 부러울 게 없습니다. 버스는 폭설 속에서도 천리마처럼 달려 나갑니다. 한 사람뿐인 승객을 태우고 시내로 향하는 버스에게 되려 제가 미안해집니다. 버스기사를 욕하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무한한 감사와 고마움이 가슴에 찹니다. 안전하게 집 앞에 내려준 기사님께 정중히 절을 올리며 첨으로 입을 엽니다. "기사 아저씨,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조심히 살펴가세요." 오늘도 눈이 내립니다. 저는 완전무장을 하고 저녁 정류장에 서 있습니다.* 수필가 송순녀씨는 2004년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했다. 완주 송광사 입구에서 차(茶)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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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1.18 23:02

우리 모두 인간이기에

아내가 핸드폰을 들고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화면을 집었다 놓았다 하면서 옆으로 죽죽 밀어 본다. 뭐하느냐고 물었더니 요즈음 여자들이 하는 대로 자기도 한 번 해보고 있다고 대답한다. 구식 핸드폰 가지고는 안 되고 컴퓨터 기능까지 할 수 있는 스마트폰이라야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웃는다. 안타까운 마음에 하나 구입하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핸드폰이 정이 들었고 휴대하기 좋으며, 지금 휴대폰도 자기가 쓰는데 불편이 없다고 한다. 길에서나 버스정류장 등 어디를 보아도 스마트폰을 가지고 열심히 손을 놀리거나, 귀에 이어폰을 꼽고 있는 학생들뿐이다. 같은 땅을 밟고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데도 각자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낯설어 보인다. 학창시절 우리를 설레게 했던 알폰스 도데의 '어느 목동의 이야기'에 나오는 아름다운 아가씨, 스테파노와 같은 이미지는 문학작품에서나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시대보다 오늘날의 인간 정신세계는 더 나아지고 있지 않은 것 같은 데 기계문명의 발전은 어지러울 정도이다. 제발 그만 좀 발달하면 안 될까 싶을 때가 있을 정도이다. 나방은 저의 둥지를 힘들게 빠져 나와야 날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했다. 인간의 수명도 어느 한계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좋은 게 좋다고 우리는 생명의 한계를 계속 늘려만 가도 되는 것일까? 오래 사는 것만이 축복은 아닐 텐데…. 지나치게 편리함을 추구하는 기술의 발전은 우리 사회의 이면에 상대적 빈곤감과 소외감으로 인한 갈등의 벽을 쌓고 있다. 너무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 스스로 결정하는 생각의 힘도 잃어 가고 있다. 많은 친구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외롭기 때문에 둘례길 열풍과 집단 쏠림이 더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마다 풍기는 느낌과 분위기는 다르게 마련이다. 상대에 대한 이러한 아우라(Aura)를 느끼지 못하니 눈에 콩깍지가 끼지 않아 결혼이 늦어지고 있는 것은 나만의 우려는 아닐 것이다. 대선 과정에서도 SNS등으로 유포된 일부 사연들은 사고의 깊은 여과 과정을 거치지 않고 여기저기 옮겨진 결과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염려하게 했다.휴대전화와 컴퓨터를 끈 채 가공되지 않은 자연을 그대로 즐기고 싶다. 지난 해 11월 충북 옥천에서 한반도와 닮은 지형을 볼 수 있다는 둔주봉 전망대에 올랐다. 금강의 느릿한 물결이 여유롭다. 그런데 두 여인이 일행과 한참 뒤처져서 손을 잡고 오르고 있었다. 한 여인은 다리를 절며 다른 여인의 손을 지팡이 삼아 끝까지 올랐다. 좋은 심성과 배려로 아주머니의 자녀들은 잘 성장할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우리 사회의 갈등의 벽을 허물 수 있는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계사년 뱀띠해다. 편리하고 새로운 것만 찾기보다는 옛 방식의 좋은 점도 생각하면서 살았으면 한다. 매사에 너무 각을 세우지 말고 우리들 가슴의 응어리가 있다면 봄눈 녹듯 녹아내렸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 인간이기에.* 최동명 씨는 '덕진문학' 회원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전 전라북도의회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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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1.11 23:02

내가 뽑은 괘(卦)

중년의 증권브로커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남겨두고 홀연히 잠적해 버린다. 그는 아내에게 집을 나가겠다는 짧은 편지를 남겼을 뿐 구체적인 이유도 밝히지 않았다. 아내는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났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파리의 뒷골목에서 그를 찾고 보니 그는 그림 그리는 일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중년의 사내 찰스 스트릭랜드는 가슴에 일렁이는 예술혼에 이끌려 여태까지 누렸던 부귀영화를 버리고 예술 활동에 전념한다는 서머셋 모옴의 〈달과 6펜스〉의 이야기다.사람들은 누구나 꺼지지 않은 불꽃처럼 가슴을 뜨겁게 하는 꿈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쁜 일상에 그만 이를 잊고 살아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맞아, 내가 그때 그런 생각에 빠져 있었어!"라며 희미하게나마 젊은 날의 무지개를 되돌아본다. 이 이야기는 화가 고갱의 자서전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그 소설적 장치가 어떠하든 우리에게 가슴에 묻어 둔 꿈을 한번쯤 돌아보게 한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친구 서너 명과 함께 강천산에 올랐다. 정상 부근 옛 절터를 에워싸고 있는 나무들을 우러러 보면서 우리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즉 우뚝 선 나무의 줄기에다 각자의 이름을 새겨놓고 소망을 빌기로 한 것이다. 자연을 파괴하는 몰상식한 일이지만, 신라 화랑들이 돌에 서원(誓願)을 새긴 것처럼 우리들은 나무에다 새겼으니, 철부지들의 생각치고는 엉뚱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우리 친구들에게는 각기 별도의 이름이 있었다. 나는 "염우구박(廉牛求博)'이라는 우스꽝스럽고 낯선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의미만큼은 나름 심오했다. '廉牛'는 '청렴한 소'로 '소박하고 꾸밈이 없는 삶'을, '求博'은 '널리 구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제때에 상급학교에 갈 수 없을 만큼 가난했기에 '廉牛'는 당시의 적나라한 나의 모습이었고, '求博'은 무엇이든 많이 알고자 했던 나의 지적 욕망을 압축한 것으로 배움에 대한 나의 서원(誓願)을 담고 있다. 당시 함께 했던 세 친구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이름이지만, '廉牛求博'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나를 들뜨게 하였다. '廉牛求博'이란 이름은 지금까지 누구의 입을 통해서 들은 바도 없고, 사전(辭典)이나 선현의 고사에서도 본 일이 없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 내 가슴을 달궈주었던 나만의 이름이기에 늘 정겹다. 어릴 적 서원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뼘 지혜를 넓히는 데에 소홀히 했고, 언제나 바쁜 일상에 휘청거렸던 것 같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나는 조금씩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책을 읽고, 틈틈이 내 생각을 나만의 글 바구니에 담기 시작하면서 '求博'의 삶에 다가가고자 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 스스로 마음 밭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족함이 많지만, 글밭을 가꾸면서 스스로 성장의 기쁨을 누리고 싶었다. 그것이 나의 현재의 삶의 수준이나 양상을 크게 바꿔주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늘 새로운 일이었고 작은 기쁨으로 이어졌다. 내 컴퓨터 '글마당'에 한 편 한 편 늘어가는 글들은 언젠가는 나만의 향기가 담긴 책으로 변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廉牛求博! 세상 물정 몰랐던 어린 시절에 내가 뽑은 '廉牛求博'이라는 괘(卦)를 내 평생의 괘(卦)로 삼을 줄이야. 이는 내가 작명한 이름이기보다는 이제는 내가 가야할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줄곧 외길 교직의 길을 작은 사명감으로 설레면서 살아왔고, 남은 기간도 그렇게 할 것이다. 일상의 편린들에서 깊은 의미를 발견하여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 스트릭랜드가 파리의 뒷골목에서 그림에 빠졌듯이 나 또한 자그마한 서가에 갇히고 싶다.* 수필가 송일섭씨는 2010년 '수필시대'로 등단했다. 현재 장수교육지원청 교육지원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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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1.04 23:02

엄동에 핀 동백꽃 - 정곤

눈 오는 날은 하늘로 날아가고 싶다. 바람 부는 날에는 춤을 추고 싶고, 현수막 속에 박혀 있는 글자가 되어 허공에 펄럭이고 싶다. 해묵은 마음 자락을 씻어내 볕 좋은 곳 산기슭 나뭇가지에 말리고 싶다. 세파에 얼룩지고 흠뻑 땀 배인 내 생각을 세탁기 속에 넣고 수백 번 돌려 맑은 정신이 들 때까지 탈수하고 싶어진다.엄동에 동백꽃을 본다. 그 꽃 속으로 눈이 내린다. 바짝 쪼그리고 앉아 본다. 눈이 내려 쌓여도 꼼짝을 하지 않는다. 귀찮은 내색도 전혀 하지 않는다. 고개를 흔들며 싫다고 거부하지도 않고 자연의 이치에 순응한다. 바람이 와서 가지를 흔들면 겨울 꽃이 되어 반쯤 웃는다. 그래서 겨울에 피는 동백꽃을 우리는 그렇듯 좋아 하는가 보다. 눈 오는 날 대학가 앞을 지날 때면 예쁜 목도리를 두른 학생들이 동백꽃처럼 환하게 웃는 것 같다. 그들도 동백꽃과 같이 자연의 삶과 굳은 절개와 매서운 세상을 배우리라. 동백꽃을 보고 있으면 고려의 대문호 이규보의 시 '동백화(冬栢花)'가 생각난다. "복사꽃과 오얏은 화려하지만 봄에 잠깐 피었다가 시들기에 절조가 없고, 소나무와 측백나무는 추위를 이기는 굳은 마음은 있으나 고운 안색이 없으니 동백이야말로 예쁜 꽃이면서 절개가 있다"라고 예찬했던.낮에는 홀로 비어 있던 아파트에 저녁이 되면 뿔뿔이 헤어졌던 식구들이 돌아온다. 그 시각 전주 삼익수영장 부근에는 저녁시장이 열린다. 그곳에서는 봄이면 쑥과 냉이를 손수 뜯어다가 팔고, 여름이면 복숭아 수박을 팔며, 가을에는 배추와 과일을 판다. 겨울에는 대파와 당근 그리고 미나리 등을 팔고 있다. 오늘도 그 여인은 어김없이 미나리 몇 단과 푸성귀를 시장 귀퉁이에서 좌판도 없이 앉아 물건을 팔 것이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주말농장에서였다. 그 여인은 그 곳에서 생산되는 물건을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이었다. 장뼘 만 한 밭에서 나오는 상추 등을 모아 팔았다. 그녀의 삶은 순탄하지 않아 보였다. 항상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어느 때는 시장 시멘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으면서도 정영 삶을 두려워하거나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그 여인이 시장 사람들과 맞대어 살 수 있는 것은 마음속에 아름다운 정과 삶에 대한 집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길을 걷다 그 여인이 파는 물건을 보면 나도 몰래 그 좌판 앞으로 성큼 다가가 사주고 싶어진다. 그가 파는 좌판에는 온 식구가 매달려 있는 것만 같다. 사람들이 지나간 자리에 햇살이 지나고, 식구들의 삶의 무게만큼이나 잔뜩 무거워진 어깨를 가지고 혼자서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 그녀의 어깨에는 딸의 운동복, 어머니의 헐렁한 바지, 아들의 점퍼, 병든 남편의 양말이 힘없이 걸려 있다. 온몸 가득한 인내와 힘겨운 삶이 곧 인간의 참 모습 같이 배어 있다. 지난 세월 질퍽거리는 시장에서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고 해내며 살아왔다는 그녀다. 그렇다고 남을 속이거나 많은 이윤을 붙이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더러는 가족들 생일마저도 깜박 잊어버리고 산다는 그 여인이다. 나는 시장을 가끔 간다. 그곳에 가면 치열한 삶과 생동감 넘치는 그들이 있기에 시장으로 발길이 돌려진다. 시장에 가면 그녀의 인내와 동백꽃 닮은 그의 진정한 삶이 피어나고 있는 것 같다. 비록 얼굴에는 주름 깊다 하나 그 속에는 순박한 서민들의 삶에 지문이 내재해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시장사람들의 모습에서는 싱싱한 활력이 느껴진다. 겨울동백처럼.* 수필가 정곤씨는 2012년 '수필가 비평'으로 등단했다. '덕진문학''모악에세이'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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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2.28 23:02

돌담 사이로 멈춰진 시간 - 서계숙

전북음식문화연구소를 따라 담양으로 맛 기행을 가는데 동행을 했다. 담양하면 가사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이 떠오른다. 여행을 하기 전에 그 곳에 가려면 필히 인터넷 검색을 하고 가는 습관에 담양에 가면 한국 가사문학관과 소쇄원을 가는 줄 알고 검색을 했다. 읽어 볼 틈이 없어 인쇄를 해서 관광차에서 읽어 볼 양으로 준비해 가지고 갔다. 그런데 음식기행이라서 인지 기순도 된장 명인의 집을 찾아가서 전통 장류 견학을 했다.나는 아파트에서 살고 있지만 베란다에서 된장과 간장 고추장 그리고 청국장까지 담아 어느 정도 기본은 알고 있으나 항상 음식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고 흥미가 있다. 간장을 담으려면 물과 공기와 소금 그리고 햇볕이 가장 중요한데 이곳은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집도 그런대로 아파트 베란다 환경에 별 거부 반응 없이 맛을 지켜 주었다. 그런데 이곳의 공기는 숨쉬기가 편하고 단 맛을 느낄 정도이니 얼마나 맛이 있을까. 다른 것은 별로 차이가 없으나 진장이라고 하는 간장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진장은 메주를 거르지 않고 5년을 숙성시켜서 용수를 박고 간장을 뜬다고 한다. 맛이 짜지 않고 단맛이 나서 한 번 해 보고 싶은 욕심이 있으나 아파트에서는 불가능 할 것 같기도 하다. 담양에는 관광 명소가 많다. 가마골과 담양호, 추월산, 금성산성,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죽녹원, 창평슬로시티, 명옥헌원림, 식영정, 한국가사문학관, 한벽당, 소쇄원이 담양의 대표적 명소다. 기순도 명인의 집에서 나와 16세기 초에 형성된 고씨들의 집성촌인 창평 삼지천 마을의 돌담길을 거닐어 보았다. 3600m에 이른 돌담길을 걷고 있노라니 처녀시절 살았던 친정집이 떠오른다. 우리 집은 집터가 300여 평 되어서 뒷길을 잇달아 두른 돌담에 나뭇가지를 얹어 고정시키고 여름이면 호박넝쿨을 올려 돌담에 생기를 돌게 하였던 우리 어머니 생각이 떠오른다. 이 골목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나오실 것 같은 착각이 인다. 그리고 그 골목길을 휘파람을 불며 나의 정신세계를 혼란시켰던 어떤 건장하고 늠름한 청년도 생각이 난다. 그 때 그 청년하고 40년 가까이 한 집에 살고 있다. 마을 앞엔 추수를 끝낸 들녘에 소먹이 뭉치가 하얀 비닐로 싸여 공룡 알처럼 너부러져 있고 세 곳에서 물길이 모인다는 뜻의 삼지 내 마을은 풍족한 곡창지대임을 한 눈으로 보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100여 년 되어간다는 고택들을 둘러보니 넉넉한 크기의 곳간이 있었고 그 곳간에 가득한 쌀로 엿과 한과를 만들어 그 전통을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는 듯하다. 에스라인의 돌담길을 느릿한 발걸음으로 걷다 보니 마음마저 한가로운 정서에 젖어 들게 한다.음식 맛 기행이란 타이틀답게 이 고장에서 유명한 떡갈비로 점심을 즐겼다. 메뉴는 떡갈비와 죽순무침이 나온다. 부안 사는 회원이 가져온 뽕주와 기순도 명인의 집에서 준 대나무잎 술이 곁들여 나온다. 박물관을 구경하고 죽림원으로 향했다. 음이온 발생으로 풍부한 산소를 방출해서 심신 안정 효과가 있고 뇌에서는 알파파의 활동을 증가시켜 스트레스해소와 신체 정신적인 이완운동 심신의 안정 효과가 있다는 죽녹원에 들어서니 사극에서 봄직한 장면들이 연출된다.호젓한 대나무 숲을 친구와 나란히 걸어보는 즐거움과 진흙으로 곱게 다져진 길이 땅에서 나오는 기를 흠뻑 취할 수 있는 것 같아서 몸도 마음도 즐겁기만 하다. 옛 것의 소중함을 알고 길이 보존한 보기 드문 슬로시티 마을에서 옛 정취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우리 선조들의 살아 쉼 쉬는 고택에서 평온한 마음이 함께 한다.* 수필가 서계숙씨는 '순수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민들레의 비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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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2.21 23:02

기억에 남는 책 - 김 현 준

요즘 아이들은 책을 많이 볼 수 있어서 좋겠다. 학습 참고서, 문제집, 문학서적 등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든지 읽을 수 있다. 무엇이라도 검색해 볼 수 있는 인터넷도 있다. 컴퓨터가 없는 학생은 학교에서 사 준다고 하니 참 좋은 세상이다. 공부를 다시 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원없이 해보고 싶다. 내가 공부하던 1960년대는 책이 너무 귀하여 책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겼다. 있는 집 아이들은'전과'나'수련장'을 사서 공부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 학생들은 참고서를 살 형편이 못 되어 교과서만 가지고 공부했다. 부모님들은 교과서를 열심히 익히고 선생님 말씀만 잘 들으면 된다고 믿었다. 사실 그 생각이 옳을 수도 있었다.어쩌다 만화책 한 권이라도 빌려본다면 운이 좋은 날이었다. 만화가 김종래의 '엄마 찾아 삼만 리'같은 책은 인기 최고였다. 내용을 훤히 알고 있으면서 또 읽고 눈물을 짜고 그랬다. 중학생 때 읽은 알렉산더 뒤마의'몽테크리스토 백작'은 지금도 가슴을 설레게 한다. 처음엔 '암굴왕'이라는 제목을 달았는데, 시골 소년에게 큰 꿈을 심어주었다. 고교 시절엔 안현필의 '메들리 삼위일체 강의'가 그렇게 갖고 싶었다. 그러나 수업료와 하숙비, 생활비 등이 만만찮게 들어가는 형편에 욕심을 내지 못하였다. 민중서관에서 발행한 '영어사전'을 대학생 때 헌책방에서 구입했으나, 얼마 쓰지 못하고 서울 성동역 부근의 막걸리 집에 잡혀먹었으니 그때부터 볼 장 다 보았다. 지금이야 그럴 일이 없지만, 예전엔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술집에서 책이나 학생증을 잡혀주었다. 그렇다고 없던 돈이 갑자기 생길 리 만무하니 잡혀두면 그것으로 끝이었다.대학 1학년 때 골탕 먹은 책이 있다. 강모 교수님이 원서강독 시간에 교재로 '민주주의와 교육'을 선정하였다. 존 듀이의 저서로 당시 교육학의 필독도서였다. 책값이 꽤 비쌌고 헌책도 구하기 어려워 베껴 적는 수밖에 없었다. 복사기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 학기 동안 겨우 50여 쪽 배우면서 애를 먹었다. 돌아보니 학생 시절에 문학과 철학 서적을 두루 섭렵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나는 가끔 시내에 나가 서점을 둘러본다. 가급적 신간서적은 구입하지 않는다. 있는 책도 버리고 있는데, 굳이 비싼 돈 들이고 싶지 않아 헌책방을 순례한다.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일전에 수필집 두 권을 5천 원에 샀다. 이제는 갖고 싶은 책은 별로 없다. 도서관에서 빌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그동안 써서 모은 글을 엮은 수필집 몇 권을 갖고 싶다. 작품성이야 떨어지면 어떻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으면 어떠리. 나의 생각과 경험을 글로 남겨 가족과 친지들에게 나눠주고 싶다. 가능하다면 어느 정도 인정받는, 수준 있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가을의 끝자락에 겨울이 매달려온다. 겨울도 독서하기 좋은 계절이다. '쉴 곳을 찾아 세상을 뒤지고 찾아 헤맸더니,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이 없더라.'는 이탈리아 움베르토 에코 교수의 말이 생각난다. 오늘은 시립 도서관에서 빌려온 독일 작가 라이너 랑너의 '남극의 대결, 아문젠과 스콧'을 읽었다. 최초의 남극 탐험에 성공한 아문젠의 업적도 중요하지만, 두 번째로 남극점을 밟고 돌아오다 전원 동사한 스콧의 탐험대에게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콧구멍이 새카매지도록 호롱불 심지를 돋우며 책을 읽던 어린 시절의 긴 겨울밤이 그립다.※ 수필가 김현준 씨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수필집 '이젠 꼴찌가 좋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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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2.14 23:02

초등학교에서 - 서애옥

아침, 저녁으로 제법 몸을 웅크리게 하는 늦가을이다.홍시 몇 개 남은 감나무에서 까치 서 너 마리가 푸른 하늘도 함께 쪼아 먹고 있는 오후. 가까이 있는 초등학교에서 학예회 행사가 있어 집을 나섰다.교문을 들어서기가 바쁘게 행사를 위해 분장을 한 아이들의 얼굴이 온통 함박웃음이다.시골 학교 대부분의 현실이 그러하듯 전교생 수가 우리들이 다녔던 초등학교 시절 한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적은 숫자다. 그럼에도 일 년간 배운 교과 과정들로 잘 짜진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함께 흥얼거리기도 하고 맞장구를 치기도 하면서 아이들과 하나 되는 시간이었다.행사를 마치고 다과회에서 마주한 학부형들은 제각기 자신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듯 추억여행을 떠나느라 여념이 없다.그 시절 운동회와 빠지지 않는 고급 음식 자장면의 기억이며, 한나절씩 걸어가던 소풍이며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참 많이 달라진 현실에 감탄을 금할 수 없어 한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난 오후의 교정에서 공기놀이며 고무줄 놀이를 하던 우리들의 시대와는 달리 아이들은 학원 가기가 바쁘다.하지만 여긴 시골 학교라는 지역 여건 탓에 학원으로 향하는 발걸음 보다 방과 후 수업으로 이어진다. 바이올린이며 태권도, 아이들이 즐겨 부르는 오카리나, 교정 한쪽에 마련된 나비골프장엔 열심히 골프채를 휘두르는 아이들 모습도 쉽게 눈에 뛴다. 그뿐이랴 맞벌이며 농촌 실정에 맞춰 저녁 늦게까지 엄마품 온종일 돌봄 교실도 있어 학부형들이 한결 수월하다. 그 때문인지 한때 도시로 떠났던 아이들이 돌아오기도 하고, 더러는 가끔 도시에 거주하는 지인들에게서 부러움을 사기도 하지만 학교를 방문할 때 마다 교문을 들어서면 참 넓은 운동장이 쓸쓸해 보이긴 여전하다.면 소재지를 다 돌아다녀도 초등학교 하나 가득 채우지 못하는 아이들.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리는 마을도 몇 없는 요즘이다. 그래서인지 이미 도시로 나가 생활하는 아들에게도 초등학교는 고향으로 느껴지나 보다.일주일마다 내려오는 아이에게서 그래도 '우리학교'라는 애칭이 스스럼없이 나오고 이미 많은 친구를 사귀었음에도 여전히 초등학교를 함께 다닌 열 명남짓의 제 동갑내기와는 더 살뜰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운동장에서 마주한 학예회를 마친 아이들의 표정이 한껏 부풀어 있다. 서로 자신들이 잘 했노라 으스대기도 하고, 무대 위에선 쑥스러워 내 눈길을 피하던 녀석은 여전히 제 엄마 꽁무니에 숨어 미소만 짓는다. 수고했다고, 정말 잘했다는 내 칭찬 한마디에 한 녀석이 대꾸를 한다. 작아도 더 많은 혜택을 보고 있으니 스스로가 행복하단다. 어디에 나가서도 지지 않을 것이며, 얼마만큼의 세월이 흘러도 제 친구를 잊지 않을 것이며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도 한다. 아이의 당찬 대답에 가슴이 뿌듯해진다.오랜 세월이 지나 각자의 위치에서 되돌아 볼 수 있는 오늘 하루가 이들에겐 얼마나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선생님들의 열정에 시골에선 쉽게 접할 수 없는 여러 교육들을 받은 이 아이들은 분명 스스로가 받은 만큼 또 누군가에게 베풀지 않겠는가. 올바른 삶을 살아가려는 이 아이들의 찬란한 도전 정신에 박수를 보낸다.그리고 가끔씩 그들과 부대낄 수 있어 즐겁다. 잃어버려서는 안 될 많은 것들을 일깨워 주는 아이들이 고맙기 그지없다.아이들의 말처럼 '행복 만땅'이 된 하루다.* 수필가 서애옥 씨는 1992년 '표현'으로 등단. 현재 '표현'동인과 사단법인 한국 편지가족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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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1.30 23:02

싸이, 고맙네!

내 인생에 경천동지할 일이 일어났습니다. 서호련이가 말춤을 춘 것입니다. 일생 노래방 한 번 가보지 않고 춤 한 번 춰 보지 못한, 아는 노래라고는 '반달'이나 '옹달샘'뿐인 서호련이가…. 그러니 춤 같은 것을 추어 봤겠습니까? 지난 8월 필리핀의 지우 '우르스 헤바이센'의 예순살 생일 겸, 필리핀 새사도교회 40주년 기념축제에 참석했습니다. 그 분은 스위스 분으로 필리핀 통운회사 사장이고 스위스 상공회의소 부회장이며 교회에서는 동남아시아 대 교구장이기도 합니다. 내가 역사적인 말춤을 춘 것은 일요일 오후에 있었던 그분의 생일 파티에서 였습니다. 그분의 집은 외국인 전용 주거지역 안에 있는데 이곳은 또 별천지입니다. 흡사 미국이나 유럽에 온 느낌입니다. 생일 파티는 이 단지 스포츠센터에서 베풀어 졌습니다. 풀장 가장자리에 준비된 뷔페식탁에 100여명의 하객이 자리를 잡았고 무대에서는 경쾌한 경음악이 연주되고 있었습니다. 주빈의 인사말씀이 끝나고 오케스트라, 군무 등의 축하공연이 끝나자 천둥 벼락같은 록밴드의 음악소리와 함께 젊은이들이 우르르 무대 위로 올라갑니다. 남녀노소가 뒤엉킨 무대와 그라운드는 문자 그대로 열광로입니다. 좌석에 앉아 있는 점잖은 사람들은 연신 폭소입니다. 갑자기 '아데 상'이 무대 위로 뛰어 올라 갑니다. '아데'는 독일인 흉부외과의사로 도쿄를 맡고 있는 사제입니다. 얼마나 춤을 잘 추기에 저렇게 서슴없이 나가는고 했더니 그는 껑충 껑충 뛰면서 두 팔만 올려대는 것입니다. 가히 독일 병정입니다. 교구장 내외분도 그 육중한 거구를 흔들어 대면서 맨 앞 테이블에 앉아 있는 우리 내외에게 손짓을 합니다. "비숍, 어서 나와, 한 시간만 흔들면 10년이 젊어지는 거야." 드디어 내가 일어섰습니다. 좌석의 눈길이 모두 나에게 쏠렸습니다. 좌석에서는 비숍 서, 비숍 서 하고 연호를 합니다. 그 이상 버틸 만한 형편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나가서 잡은 포즈가 유명한 '싸이'의 말 춤이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싸이의 말 춤이 초창기여서 그 춤을 눈 여겨 보지 아니했던 터라 그냥 승마하는 자세쯤으로 생각하고 두 손을 맞잡고 허리를 꾸부리고 아데 마냥 껑충 껑충 뛰었습니다. 그랬더니 민다나오 사도께서 옆으로 다가와 두 손목을 포개고 함께 뛰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니 그것이 진짜 같았습니다. 그분이 싸이의 말 춤을 보았던 게 틀림없습니다. 나도 얼른 따라서 다시 손목을 포개고 우 아래로 흔들어 댔습니다. 무엇보다 말춤은 쉽습니다. 싸이의 말대로 품격있게 차려입고 유치하게 춤추기입니다. 사람들은 엉거주춤 꾸부리고 앉아서 바지에 무엇을 싸는 것 같은 나의 모습에 폭소를 했을 것입니다. 강남스타일의 글로벌 인기비결은 따라하기 쉬운 단순한 동작으로 나도 따라해 볼까라는 호기심을 자극한다는 것입니다. 고난도 댄스에 압도되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말 타기를 연상케 하는 싸이의 춤은 모처럼 해 볼만 하다는 자신감을 준다는 것입니다. 엉덩이를 뺀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전진하는 자세는 배설하는 모습도 연상 시킵니다. 이러한 동작들은 자신의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남을 웃기는 자기조롱의 유머라고도 한다는데, 나를 두고 한 말 같기도 합니다. 그날의 나의 춤은 '오빤 남원 스타일!' 그럴듯 합니다. 여하튼 노인네들도 스스럼 없이 춤을 추게 한 싸이가 고맙습니다.다음날 우리는 교구장 댁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나름대로 어제 그 춤판에 대하여 자평을 했습니다. "변화가 빠른 요 세상, 기업이건 정치건, 그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 교회라고 할지라도 내일의 주역인 젊은이들을 우리가 지향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내려면 이같은 어울림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수필가 서호련 씨는 올 6월 문예지'한국작가'를 통해 등단. 새사도교회 초대 한국주교를 지냈으며 남원세무사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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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1.23 23:02

인 연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날까. 불교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고, 일천 겁 정도 마음을 모아야 같은 나라에서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알고 지내는 사이라면 몇 천 겁의 마음이 모아져야 할까. 만남이란 참으로 소중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남편이 퇴직을 하고 1년 여를 아무 일 없이 보냈다. 땅은 샀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그러다 농업전문대학에 입학을 했다. 교수들 중에 고등학교 대학교 선배들이 많아 도움이 많이 된다고 했다. 그 중 한 분은 ROTC까지 선배였다. 남편이 그 선생님을 특히 따랐는데 선생님도 남편의 이력이 특별해서 호기심이 있었다고 했다. 이렇게 만남이 시작되엇다. 선생님은 그 때부터 밭의 토질검사부터 시작해, 작물시험장장 농촌연구소소장 농사짓는 사람들을 소개해줬다. 농사지으면서 알고 지내야 할 많은 사람들을 소개 해줘 남편에게 큰 힘이 되었다. 시설보조금을 받게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농장 컨설팅을 맡아 주었다. 덕분에 남편은 시행착오 한 번 없이 본궤도에 올라설 수 있었다. 새댁이 첫아이 키울 때 애기가 울기만 해도 잠만 안 자도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하듯, 남편은 포도잎이 마르기만 해도 포도송이에 점만 하나 생겨도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직접 포도밭으로 오셨고, 혼자 해결할 수 없는 것은 동료교수들이나 연구소 선후배들에게까지 연락해 원인과 치료법을 알려주었다. 수업이 없는 날은 밭으로 출근하기도 했다.틈틈이 토질검사를 해 필요한 미량원소들을 주도록 했다. 포도나무들은 잘 자랐고 맛있는 포도가 탐스럽게 달렸다. 알이 크고 씨가 없고 당도가 높아 인기가 많았다. 농사친구 하나 없는 남편이 바로 법인에 들어가고 판로까지 걱정 없었던 것도 모두 선생님 덕분이었다.내년 2월 말로 선생님이 정년퇴직을 한다. 퇴직선물을 해 드리고 싶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선생님 내외분을 모시고 티베트여행을 계획했다. 마침 선생님도 그곳은 가보지 않았단다. 티베트는 시간이 되고 돈이 된다고 갈수 있는 곳이 아니다. 입국허가증을 받아야 하기에 다 된듯하다가 날짜가 연기되기도 했다. 더구나 고산병 때문에 망설여지기도 했다. 특히 사모님은 주치의에게 오지여행 자제 요청을 받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선생님 부부를 모시고 여행을 할 수 있었다.선생님 정년만 생각했는데 올해가 사모님 회갑이라는 것을 여행 중에 알았다. 출발 날짜에 어려움이 있더니 이런 숨은 뜻이 있었던 모양이다. 라싸에서 부랴부랴 케이크를 준비하느라 열차시간에 빠듯했고, 6인1실의 칭짱열차 침대칸에서 그 상자가 커서 발도 제대로 뻗지 못하는 어려움도 있었다.음력 9월 2일, 열차 안에서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고 케이크를 옆 실 옆 실까지 나눠 먹으며 많은 사람들과 사모님의 회갑을 축하했다. 선생님 퇴직기념여행이 사모님 회갑여행이 된 듯 했다. 우연히 제 날짜에 사모님 회갑까지 할 수 있어 기쁘고 감사했다. 사모님 얼굴이 환해졌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또 배웠다며 내 손을 잡는다. 손이 따뜻하다. 5000고지의 칭짱열차 안에서 회갑을 맞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좋은 만남은 좋은 일을 만들어 준다. 선생님 덕분에 아들이 3차까지의 면접시험을 무난히 치르고 좋은 직장에 취직을 했다. 그리고 올해 초 과장 진급시험에 합격을 했다. 선생님이 당신 일처럼 좋아했다. 가이드는 인연이 있는 사람만이 티베트에 올 수 있다고 했다. 어디 티베트뿐 이겠는가. 사람이든 상황이든 일이든 사물이든 인연이 있어야 만난다. 신들의 땅 티베트에서 선생님과의 인연을 공고히 하려 했는데, 고산병 때문에 고생 많이 했다. 선생님 얼굴이 붓고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코피로, 나는 몸 둘 바를 모르고 선생님은 그걸 숨기려 애쓰고. 나도 환자여서 주사까지 맞으며 다녔다. 이런 고생들이 애틋함으로 오래도록 서로의 마음에 남아 있을 것 같다.넉넉잡아 사람이 100년 산다고 하고 지구상 인구를 60억 잡을 때 내가 어떤 이와 만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아마 무한대분의 1이 아닐까. 인연이란 불가능의 숫자에서 만들어진, 무엇으로 환산할 수 없는 특별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만남이 얼마나 귀중한가 다시 생각해 본다. 앞으로 어떤 사람과 어떤 만남이 있을까 기대된다.* 수필가 윤복순씨는 익산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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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1.16 23:02

청자의 눈물

경각산이 구름옷을 허리에 걸쳤다. 창문으로 찬바람이 으스스 한기를 몰아 드는 것이 겨울이 오려나 보다. 하늘빛이 파랗고 한가로이 떠 있는 뭉게구름은 오늘 부안 나들이를 하는 우리 부부처럼 여유롭다. 오랜만에 찾은 채석강은 여전히 수만 권의 책을 쌓아 올린 것 같은 층층이 그 신비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싱싱한 전어들은 우리를 위해 횟감이 되어 솔숲이 우거진 고사포 해수욕장까지 따라왔다. 전어 회와 함께 못 먹는 소주를 반 잔이나 곁들이니 애주가가 따로 없었다. 가을 하늘은 하얀 구름의 재롱에 외롭지 않고, 내 시야 가득한 바다는 갈매기들과 함께 파도치며 노래를 하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에 있는 청자박물관에 들렀다. 비색의 청자 찻잔 형태로 지어졌다는 3층 건물은 매우 깔끔했다. 2층 청자 명품실에서천 년 전 고려의 상감청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행운인 듯했다. 해설사는 우리가 서 있던 그 자리가 도요지였다는 것,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이 국립중앙박물관과 이화여자대학교 등 국내 유명박물관에도 소장되어 있다고 했다. 비색청자는 무늬를 넣되 물감을 사용하지 않아서 푸른빛이 나는 아름다운 청자를 말한다. 비취색이란 물총새 등 쪽의 파란 깃털 색을 말하는데, 수컷의 파란색은 비색이고 암컷의 파란색은 취색이라고 한다. 그 둘을 합해서 비취색이라 한다니 청자의 푸른빛은 물총새 수컷의 색깔이라고 봐야겠다. 아름다운 비색에 취해 전시실을 거닐고 있는데 청자로 만든 바둑판이 보였다. 바둑판의 몸통 4면이 정교한 조각으로 새겨져 영롱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 옆 칸엔 둥근 술통 모양의 야외 의자가 역시 아름답게 앉아 있었다. 선조의 멋스러움을 상상하며 천 년 전의 풍류를 느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300여 명의 우리나라 도공들을 납치해갔다. 우리 조국에서 천대받던 ‘팔 산’이란 도공도 포로가 되었다. 연봉 백미 350석(2억 원 상당)의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칼을 찬 무사 급으로 대접을 받았다고 하니 천민이었던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일본 도자기 발전에 온 힘을 다한 그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다.’라는 죄명으로 매도할 반역자인가? 고국과 가족을 그리워하면서 한을 빚어냈고, 중국의 디자인을 접목하여 피를 칠하듯이 그려냈으리라. 그건 아픔이요, 절규요, 죽도록 보고 싶은 그리움의 승화였을 것이다. 분업으로 기계처럼 대량 생산까지 했으니 도둑질한 기술로 일본은 우리보다 10배 이상의 효과를 보며 전 세계의 도자기 시장을 누비게 되었다. 그랬으면 됐지 이제 또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어린애같이 떼를 쓴단 말인가. 신사(紳士)로 자랐다면 신사(神社)참배는 그만하고, 남의 땅을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망발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진정 성숙한 나라라면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말고 잘못을 솔직하게 사과하면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가도록 가르쳐야 할 것이 아닌가? 지금 우리는 고려청자의 비밀을 현대 과학으로도 겨우 90% 정도밖엔 재현하지 못한단다. 이는 도공들을 업신여겼던 사회 풍토가 소중한 문화를 계승하는데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살림에 도움도 되지 않고 기술도 어려운 그 길을 누가 걸으려 하겠는가? 이제부터라도 인간문화재들이 선조의 정신을 이어받아 전통예술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선 경제적인 뒷받침과 획기적인 대우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차창 밖으로 농부들의 가을걷이가 한창이었다. 서산머리의 붉은 노을은 내일을 약속하고 떠나는 해님을 보내며 아쉬워하고 있었다. * 수필가 양영아씨는 전북수필문학회·영호남수필문학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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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1.09 23:02

좋은 일

좋은 일을 하면 즐겁다. 생수처럼 맑은 마음으로 봉사와 친절성이 잠재되어 있다. 다른 사람이 좋은 일을 하는 것을 보아도 고마워진다.  태풍에 흩어진 거리 낙엽을 치워주는 사람을 보거나 버스 속에서 몸이 불편한 사람에 자리를 양보해 주는 것을 볼 때도 좋은 마음으로 보인다. 좁은 주차장에 주차하려는 차량을 보면 손짓으로 정지 신호를 해주어 운전자가 고마움에 고개를 끄덕이는 친절성에 서로가 기뻐한다. 좋은 일에는 나름대로 의식이 서려있고 그것이 습관으로 되어 좋은 이웃과 사회로 번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문화 시대로 나라 안에 찾아드는 외국인이 많아 졌다. 그 분들을 거리에서 만나면 무엇이 불편할까 도와주고 싶어진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손과 몸짓으로 따뜻하게 대해주면 우리 국민이 친절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 말을 들을 때면 스스로 자랑스럽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는 더욱 밝아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인도에서는 걸인에게 지폐를 주면 고맙다는 말 대신 당신은 나로 하여금 아름다운 마음을 갖게 된다는 말을 해 준다고 들었다.  가족이나 친구의 병문안으로 병원에 들어서면 환자들이 수혈 바늘을 살에 꼽고 누워있다. 그 혈액은 누구의 몸에서 구해오는 것일까 어렵게 생각된다. 남을 위해 헌혈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헌혈을 하는 사람 중에는 한번뿐만 아니라 수 십 번 몇 백번까지 한 사람이 있다. 헌혈을 한번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고희를 넘긴 지금에야 봉사하는 일로 생각하니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다. 지금이라도 받아 준다면 하고 싶다. 매월 13일은 헌혈의 날로 정해져 있다. 관심이 없는 사람은 잘 모른다. 나처럼 헌혈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수 없이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헌혈봉사 회장을 역임한 서재균씨는 57세인데도 29년 동안 400회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감히 상상도 못한 일이다. 그분은 지속적으로 사랑의 헌혈에 뜻을 밝혀 69세까지 500회까지도 참여하고 싶다고 하였다. 이 같이 헌혈로 봉사해주는 사람이 있어 응급환자들이 걱정 없이 수술을 할 수 있지 않은가! 그가 처음 헌혈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예비군 훈련장에서 훈련을 하고 오후에 쉬고 있어서라고 했다. 그 후 몸이 아픈 사람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여 계속 헌혈을 했다고 했다.  좋은 일에는 순금에 전류가 통하듯이 열을 받지 않는다. 무쇠는 전류가 순조롭게 흐르지 못해 중간에 열을 내게 된다. 긍정의 마음은 순금처럼 순하게 살아가게 된다.  꽃이 인간보다 아름다울 수는 있지만 내적인 아름다움을 능가 할 수 없다. 꽃의 향기는 감미롭지만 감화는 주지를 못한다. 인덕을 갖춘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생각지 않고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구하는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이리고등학교 2학년 이영준 군은 친구들과 물놀이를 하다가 급류에 휩쓸려가는 초등학생 2명을 구한 뒤에 자신이 미처 나오지 못해 숨진 사연이 있었다(2012.8.16).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은 이 군이야말로 어떤 향기보다 아름답고 가슴 찡한 사연이 아니겠는가! 돌발 사고에 남을 먼저 배려한다는 것은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군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용기를 생각하니 그런 일이 전에도 있었다. 신준섭 장만기 정인성 세 사람(전주고)은 변산 해수욕장에서 어린이 10명을 구출한 후 나오지 못해 바다에서 숨졌다(1997.7.21). 살신성인의 표상이다. 전주에는 얼굴 없는 천사가 있다. 매년 년 말이면 일 년 내내 모은 돈을 이웃돕기 성금으로 수 천만 원을 내놓고 이름을 알리지 않는다. 그 말을 매스컴에서 들으면 너무도 훌륭한 분이 전주에 있어 자랑스럽다.  우리 모두 좋은 일에 앞서가는 사회로 거듭 나면 모두 행복한 삶으로 이어갈 것이다. * 수필가 황춘택씨는 2007년 대한문학으로 등단. 현 행촌수필 문학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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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1.02 23:02

아름다운 그늘

그늘에 선다. 어릴 적, 뒷산 솔숲은 놀이터였다. 그곳엔 자연 그대로의 놀이감이 지천이었다. 산새들 노랫소리 맞춰 고무줄놀이, 팔강을 하다보면 옷은 땀으로 흥건했다. 솔바람은 소리 없이 내려와 젖은 옷을 말려주었고, 놀이에 빠진 우리는 밥 짓는 연기가 언덕을 넘어올 때쯤에야 허기를 느끼곤 했다. 햇살처럼 여물어가던 어느 날,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서 놀고 있을 때 아버지는 굵은 동아줄을 들고 우리들 곁으로 다가 오셨다. 평소 과묵하셨으나 자식 사랑이 남달랐던 아버지가 소나무에 그네를 매다는 동안 친구들은 부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친구들과 달리 아버지의 갑작스런 등장에 내 가슴은 두근거려 눈을 뜰 수 없었다. 몇 번의 손길이 오가고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때쯤 그네가 완성되었다. 큰 소나무 같은 너른 그늘을 간직한 아버지. 평생 자식들을 위해 삭아짐을 마다하지 않은 삶이었다. 노동을 팔아 어린 딸들을 위해 골랐을 꽃무늬 원피스. 그네를 탈 때면 항상 그 옷을 입고 언니와 그네를 탔다. 꿈이 그네에 실려 구름을 향해 치올랐고, 아버지처럼 자상한 햇볕도 우리와 함께 그네를 탔다. 하늘에 닿을 것 같았던 쪽빛 꿈. 그때의 그림들은 내 가슴 속에 액자처럼 남아 먼 길 갈 때 꺼내 볼 수 있는 시집이 되었다.여남은 살 무렵, 솔숲과 그네를 남겨둔 채 읍내로 이사를 했다. 어린 내게 읍내는 크고 화려한 도시였다. 전학 가 처음 만났던 친구들과 선생님에 대한 느낌은 차가운 벽을 기대고 선 느낌이었다. 낯선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내성적인 성격 때문이었는데 이후 잦은 전학은 성격을 바꿔 놓았다. 하지만 어디를 가든 마음은 항상 솔숲에 있었다.1930년대. 힘겨운 시대에 태어난 아버지는 결혼할 당시, 말 그대로 숟가락 한 개 달랑 들고 어머니를 만났다 했다. 힘든 시절, 올망졸망 태어난 육남매는 일 나가신 아버지가 언제 오실까, 마루에서 대문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버지에 대한 반가움보다는 손에 들려진 것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 주위를 빙 둘러 탱자나무가 둘러쳐져 있었고 대문 옆 살구나무 복숭아나무가 간식거리를 주었지만 아버지의 땀이 묻은 알사탕이 더 좋았다. 점점 자라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아버지의 어깨는 더 무거워졌고 알사탕을 먹는 횟수는 차츰 줄어만 갔다. 읍내로 이사를 왔으나 여전히 사는 것은 힘들었다. 가까운 정미소에서 방아 찧는 날이면 어머니는 멥재를 담아오셨다. 땔감이 부족한 때라서 왕겨로 불을 땔 요량이었는데 가져온 왕겨에 습기가 차 있으면 불을 붙이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경험이 부족한 나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되고서야 불을 지필 수 있었는데 중요한 것은 풀무질이었다. 조금만 세게 돌려도 구멍이 나 불이 모아지지 않았고 약한 바람에는 연기만 났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안 보는 척 나를 보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살아가는 법을 알게 하려는 어머니의 교육 방법이었지 싶다.그때의 내 나이만큼 자란 아들의 손을 잡고 가까운 공원에 간다. 아들은 그곳에 있는 그네를 밀어달라고 조른다. 순간, 나는 아들에게 아버지처럼 넉넉한 마음의 그네를 만들어준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본다. 삭을 대로 삭아져 곰삭으면 부모님의 그림자만큼 깊어질까. 지금도 자식을 위해 피골이 상접한 삭정이까지도 태워 불을 지펴 주려는 아버지. 허리가 휜 아버지를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빈 가지 같은 몸이지만 자식을 품어 주는 아버지 그늘이 깊다.* 수필가 전오영씨는 부안 솔바람소리문학회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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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0.26 23:02

꽃그늘

꽃그늘이다. 그것도 오전에 내린 비에 나부시 떨군 꽃잎들로 주위가 온통 꽃물 들었다. 시동을 끄고 뒷좌석 돌아보니 아이는 주섬주섬 가지고 내려야 할 짐들을 챙기고 있다. 무거우니 엄마가 들고 갈게, 용돈은 챙겼니. 습관처럼 혀끝에 얹히는 말들을 어금니로 눌러 삼켰다. 제 소지품을 매고 안고 아이가 차문을 열자 잘 지내렴, 토요일에 보자. 되도록 짧게 배웅한다. 아이도 다녀올게요. 수식 없는 인사를 차문에 물려 놓고 기숙사를 향한 계단으로 올라간다. 한 계단 두 계단 아이의 걸음이 옮겨지는 각도에 따라 고개를 기울이며 눈으로 쫓는다. 아이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눈배웅하고 차에서 내렸다. 습기 찬 바람이 안겨든다. 녹녹히 젖은 아스팔트. 수놓인 꽃잎에 이끌려 백일홍나무 아래로 들어선다. 제가 안은 품만큼 바닥을 물들여 놓고도 가지 끝마다 꽃차례 붉게 밝히고 있다. 줄기를 긁으면 나무가 간지럼을 타는 것처럼 흔들려서 간지러운 이름을 가진 나무. 환한 아름다움이다. 나를 향한 어머니의 미소처럼.젊은 날을 오뉴월 볕 아래 사셨던 어머니는 어느 한 날이라도 꽃그늘 아래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던가. 주변을 둘러봐도 찾을 수 없는 기억의 편린. 그런 기억 한 조각 없다는 것이 아득해질 때가 있다. 꽃이 세 번 피었다 지면 쌀밥 먹을 때가 된다하여 배롱나무를 쌀밥나무라 불렀던 어머니. 햇볕을 피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신 스스로 그늘을 만들어야 했으므로. 검게 그을린 가난한 허리에 여름내 벗겨지던 허물들.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그 허물이 만들어낸 그늘 아래서 우리는 더디게 자랐다. 어스름 밝히는 가로등 아래 한 점 꽃잎, 어머니의 숨결인 양 바람을 탄다. 아이가 밝힌 건물의 사각 불빛 바라보며 운동장의 우레탄 트랙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아이는 입학 당시의 의욕과는 달리 한 학기가 다 지나도록 새로운 생활을 힘들어 했다. 하루를 기숙사 창에 기운 달을 보고 시작해서 늦은 밤 머리 위로 뜬 달 보며 끝낸다는 아이의 힘없는 중얼거림에 목이 막혔다. 일요일 오후 볕을 두 손 가득 받는 아이를 바라보는 심정은 이민이라도 가고 싶었다. 이 땅에서 수험생 부모로 사는 사람치고 욱하고 치받는 마음 한 번 가져보지 않은 부모가 몇 이나 될까. 나는 보상심리처럼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대신해주고 싶어 감쌌다. 과유불급이라고 그럴수록 아이는 더 심약해져가는 것 같았고 나는 조바심쳤다. 옛말에 귀한 아이일수록 매를 들라 일렀고, 적당한 비바람은 나무의 성장에 필수 조건임을 안다. 익히 알면서도 자식 앞에서 이성적이 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시행착오를 거치며 나는 아이를 위해 냉정해지기로 했다. 먼저 수시로 안부를 묻던 전화를 줄여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모른 척했다. 아이가 당황하고 섭섭해 하는 눈길을 보낼 때마다 애써 외면했다. 덤으로 집안일이나 소소한 고민거리를 의논하는 등 자립심과 배려심을 끌어내기 위해 필요할 때면 언제고 붙잡아주고 해결해주던 넝쿨손을 하나 둘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손만 뻗으면 닫는 곳에 있던 버팀목이 거두어 질 때마다 아이는 엄마를 낯설어하고 흔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곁가지를 만들어 스스로를 지탱할 것이다. 흔들리는 만큼 뿌리를 뻗어 땅을 움켜잡으며 내가 어머니 그늘의 깊이를 더듬어보는 것처럼 알게 되리라. 가지와 허공 그 경계가 백지 한 장 차이도 없는 하나의 공간이듯 실패와 깨달음 또한 하나임을. * 수필가 라환희씨는 부안 솔바람소리문학회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북수채화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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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0.19 23:02

내 인생의 가을은

선선한 가을이다. 가을이라는 어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가을하다'라고 풀이되어 있다. 더 깊이 들어가니 '가을하다'는 농작물 따위를 거둬들이거나 한데 모은다는 뜻이다. 어느새 가을이 왔는가 보다. 지긋지긋하던 가뭄과 태풍을 이겨낸 벼이삭은 황금빛으로 넘실거리고, 골목길 담장너머 감나무에는 대봉시가 주렁주렁 열렸다. 나는 가을이 되면 단풍나무 숲길을 따라 걷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추석 이튿날 아내와 딸과 사위, 외손녀와 함께 가까운 강천산을 찾았다. 순창군 팔덕면 백암마을 장인장모 묘소를 찾아 성묘 를 하고 손녀들에게는 추억거리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강천사 매표소에 다다르니 '명절연휴에는 입장료 무료'라며 친절하게 안내까지 해주었다. 강천산은 예로부터 옥천골이라 불릴 만큼 깊은 계곡과 맑은 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곳이다. 높이 583.7m의 강천산은 생김새가 용이 꼬리를 치며 승천하는 모습과 닮았다고 하여 용천산(龍天山)이라고도 한다. 늦가을이면 만산홍엽이 절경이다. 순창 강천산군립공원은 사방이 울긋불긋하여 가을정취와 낭만을 느끼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봄여름가을겨울, 사시사철 풍경이 아름답다. 내가 단풍 숲을 걷고 싶어 하는 이유는 값싼 감상주의나 분위기에 빠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색에 잠기고 싶기 때문이다. 단풍 숲은 꽃처럼 향기를 발산하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사색의 향기가 흐른다. 그래서 나는 사색의 향기에 묻혀 조용히 내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다. 강천산 산책길을 유유자적 걷노라니, 중국 산문의 대가이며 탁월한 시인, 한유의 '불평즉명(不平則鳴)'이 생각난다. 한유는 '소리 없는 풀과 나무도 바람이 흔들면 울게 되고, 소리 없는 물도 바람이 움직이면 운다.'라고 했다. 봄은 새가 울고, 여름은 우레가 울며, 가을은 벌레가 울고, 겨울에는 바람이 운다. 가을날 풀벌레가 짝을 찾아 사랑의 세레나데를 읊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푸석해진 풀잎이 이제 막 눕기 시작하는 밭 언덕배기에는 늙은 호박들이 잠시 낮잠을 즐기고, 시원스럽게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총총히 어우러진 도린결 억새들도 춤을 추는 듯하다. 하얗게 피어오른 억새꽃을 보니, 백발이 되신 어머님 모습이 떠오른다. 이렇게 가을이 깊어지면 농촌에서는 발바닥이 닳도록 논밭을 오가야 한다. 어머님은 새벽부터 밤중까지 텃밭에서부터 이 밭 저 밭 온 밭을 더듬고, 아버님은 마을 끝머리에서부터 집안 마당까지 볏짐을 나르느라 앉아서 담배피울 시간도 아까웠다. 하루해는 너무도 짧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을 어른들은 틈만 나면 지게막대기로 장단을 맞추며 육자배기에 흥타령을 주고받았고, 흥이 오르면 수제비· 두부김치를 나눠먹으며 밤새도록 풍물을 즐겼다. 내 고장 진안 사옥마을에서는 가을걷이가 끝나면 젊은이들은 개울을 막고 물고기를 잡아, 얼큰한 매운탕과 어죽을 끓여먹기도 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이런 풍경들이 내마음속에는 오롯이 남아있다. 오늘의 고통은 내일의 힘이 된다. 밤이 오면 아침이 찾아오듯이, 가을과 겨울이 지나면 또다시 봄은 찾아오리라. 먼 훗날 다가 올 내 인생의 가을은 어떤 모습일까. 얼마나 아름다운 빛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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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0.12 23:02

외로움에 멍드는 아이들

잭 갠토스의 '조이 열쇠를 삼키다'는 외로움에 멍든 아이의 심리를 그려낸 동화이다. 유치원생 조이는 집을 나가버린 부모를 기다리며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 괴팍한 할머니는 조이에게 날마다 창가에 서서 엄마가 지나가는지 지켜보라고 했다. 기다림에 지친 조이가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엄마가 돌아왔다.하지만 조이는 주변 사람들과 정상적인 소통을 할 수 없는 주의력결핍 장애아가 되어 있었고 엄마 얼굴도 못 알아보았다. 학교 선생님의 질문에는 매번 "다음에 대답하면 안 될까요?" 라고 말하면서 딴 짓을 일삼고, 수업 시간에는 자기 목에 걸고 다니는 집열쇠를 꿀꺽 삼켰다 꺼내는 낚시장난을 심심풀이로 했다. 어느 날 가위로 친구의 코를 자르는 실수를 저지르자 조이는 학교에서 정학을 당했다. 학교 가는 대신 전문 치료기관의 도움과 지극한 엄마사랑으로 치료를 받은 조이는 점점 나아졌다. 예상보다 빨리 학교로 돌아온 조이는 엄마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희망을 품고, 제 스스로 책을 골라서 책상 앞에 앉았다. 3년 전에 우리 학원에 왔던 욱이(가명)도 조이와 비슷한 행동을 했다. 엄마랑 같이 왔던 첫날엔 순진하게 보이던 아이가, 이튿날 저 혼자 왔을 때 보여준 행동은 나를 당황케 했다. 내가 하는 말은 뭐든 도리질을 하고, 저 혼자 후후후 웃다가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학원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혼을 좀 내줄까 했더니 금방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저녁에 전화를 걸어 들어본 욱이네 속사정은 딱했다. 엄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욱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혼자 있단다. 매일 밤 9시 무렵에야 퇴근하는 엄마를 기다리며, 냉장고에서 간식을 찾아 먹고 TV를 보거나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방학이라서 학교에 가지 않으니 하루 종일 아이 혼자 집에 둘 수 없어 한 달간 외갓집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근처에 우리 학원이 있기에 들어와 등록을 하게 된 것이라 했다. 어린아이에게 엄마는 우주이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끊임없이 엄마의 사랑을 먹고 자라는 그 어린 것들은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시도 때도 없이 엄마를 부른다. 기뻐도 엄마, 속상해도 엄마, 엄마, 엄마……. 엄마가 전부인 아이들이 숨 쉬듯 엄마를 찾을 때 엄마가 곁에 없다면 얼마나 두렵겠는가. 먹이를 구하러 간 어미새를 기다리는 아기새처럼, 어서 엄마 오기를 기다리는 그 간절함을 어른들은 제대로 이해해주고 있는 것일까? 아이가 눈이 빠지게 엄마를 기다리다가 지쳐 잠들 무렵에야 퇴근하고, 다음날 아이가 눈 뜨고 보면 출근 준비에 바쁜 엄마. 늘 엄마사랑에 갈증을 느끼던 아이는 결국 엄마의 관심을 끌 방법을 찾느라 말썽을 피우기 시작한다. 이런 아이들을 떼어놓고 일터에 나가는 엄마들의 마음은 또 오죽할까? 매순간 떠오르는 아이 걱정에 엄마도 아이 못지않게 불안할 것이다.엄마사랑에 목마른 아이들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문제아로 자라고, 갈수록 그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현대사회가 물질만능주의라는 고속열차를 타고 질주하는 동안 발생한 가여운 피해자들인 것이다. 이 아이들을 치유하는 명약 중의 명약이 '엄마의 지극한 사랑'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을 터, 이 아이들에게 엄마 사랑을 듬뿍 맛보게 해주는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일까? 젊고 유능한 여성들이 아이 기르기 어렵다고 결혼도 미루고, 출산을 피하려 드는 현실을 언제까지 이대로 둘 것인가? 출산율 저하를 걱정하는 우리나라 대한민국, 출산율 저하보다 더 심각하고 시급한 것이 외로움에 멍들어가는 아이들을 치유하는 일일 것이다.※ 수필가 김양순 씨는'대한문학'으로 등단했다. 현재 논술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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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0.05 23:02

달밤에

언덕길에 차를 세우고 바라보는 달이 유난히 밝다. 자정을 갓 넘긴 포근한 밤이다. 늦여름의 잔영이 남아 있던 얼마 전만 해도 달빛에 몸을 적시면 서늘해지곤 했었다. 그러나 오늘 밤 달은 불에 달군 듯 붉은 기운을 품고 있다. 달은 가끔 지나는 구름에 몸을 숨겼다 나와 나를 지긋이 바라본다. 한가롭게 달과 눈이 마주치자 생각 주머니가 열린다. 달을 바라보며 기억의 소실점에 이르자 그곳에는 어린 시절의 내가 서 있다. 고운 달빛을 맞으며 언덕길을 걸어가는 소녀가 보인다. 머리는 양 갈래로 따고 군데군데 때가 낀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다. 한 손에는 동냥 통을, 나머지 손은 보따리를 들고 언덕을 절뚝거리며 걸어간다. 소녀 뒤로 고만고만한 또래의 아이들 대여섯이 따른다. 이윽고 냇가에 이르자 소녀는 동냥 통을 내려놓는다. 달빛이 투영되어 반짝거리는 냇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 물을 마신다. 뒤따르던 아이들이 까치발을 하고 살금살금 다가가 소녀를 밀어 냇가에 빠뜨린다. 물에 빠진 소녀가 허우적거리며 발버둥을 치자 아이들이 깔깔대며 웃는다. 겁먹은 소녀는 급히 물가로 나가 울음을 터트린다. 절름발이 소녀가 있었다. 나이는 몇 살 위였지만 몸이 부실하여 넘어지면 자주 울었다. 소녀는 마을 외딴곳의 허름한 토담집에 동생과 함께 살았다. 소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세 살 때 도시로 돈 벌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돌았다. 소녀는 마을로 매일 동냥하러 다녔다. 친구들과 나는 그녀를 자주 놀렸다. 전주로 이사를 나오고 몇 년 뒤 가보니 소녀가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은 그녀가 섬유공장에 취직했다느니,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한다느니 하는 근거 없는 소문만 전했다. 몇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녀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가끔 귀몽歸夢을 꾸다 깨어나면 그 끝자락엔 그녀가 울면서 서 있었다. 달빛에 젖은 대나무를 바람이 훑고 지나간다. 널찍한 이파리 매단 칡덩굴이 여린 대무나의 몸을 감고 있다. 어둠 속에선 대나무와 칡넝쿨은 한 몸처럼 보였다. 소녀는 대나무처럼 여렸고 코흘리개 우리는 칡덩굴처럼 그녀를 감고 오르며 괴롭혔다. 엉엉 소리 내어 울던 소녀의 얼굴이 가슴에 와 박힌다. 그 아이도 지금은 지천명을 훌쩍 넘겨 눈매가 부드러워졌겠지. 달은 커다란 벽시계의 오후 시침처럼 서편으로 기운다. 내 삶의 시침도 저 정도쯤 지나고 있을까? 돌아보면 언제부터였는지 딱 꼬집을 순 없지만 사람관계가 뻑뻑해진 느낌이 들곤 한다. 세월 따라 걷다 보니 세상엔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나 공자가 아니어도 머리에 서리가 내리고 입가에 팔자 주름이 깊게 팰 때쯤이면 나름 철학자나 사상가가 되나보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라는 말에는 공감하면서도 때로는 사람에게 등 돌려 멀어지는 나를 합리화하곤 한다. 이제 자화상을 그릴 만큼의 겹겹 나이테가 쌓여 삶의 기둥이 굵어졌는데도 삶의 깊이와 넓이는 자꾸만 작아져 가는 것 같다. 가끔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리움을 잊어버렸다는 말을 듣는다.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한때 가슴 깊이 간직했던 아름다운 추억들이 희미해지긴 마찬가지이다. 육체가 쇠해지면 정신도 기력을 잃어간다. 그동안 가속이 붙은 삶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관성에 의해 흘러가곤 했다.매일 최고치를 경신하던 더위도 스러지고 어느덧 풀숲에선 귀뚜라미가 울고 있다. 이제 곧 들녘의 사과색이 붉어지고 고추잠자리가 하늘을 덮으면, 우리 앞에는 또 다른 계절이 서 있을 것이다.※ 수필가 박경숙씨는 2010년 '대한문학'으로 등단했다. 순수필 동인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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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9.28 23:02

할머니 멋져, 최고야!

동생이 생긴 뒤로 네 살짜리 큰손주의 일상이 자꾸 엇나가고 있다. 밥도 제대로 안먹고 잠자는 시간도 제멋대로다. 지난밤에도 새벽 3시가 넘도록 잠을 안자고 애니메이션 프로만 보려 했다. 텔레비전에 한 번 빠져들면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보려고 한다. 시청 시간도 너무 길고 또 비스듬히 누워서 보는 시청자세도 문제다. 이러다 시력장애라도 올까 염려스럽다. 자꾸 말려보지만 그때마다 울며 떼를 쓰는 바람에 제대로 제지하지도 못한다. 아이가 하자는 대로 너무 방임한 탓이겠기에 크게 후회도 해본다. 흔히 조부모 손에서 크는 아이들이 버릇없다고들 하는데, 우리 손자들은 그런 소리를 들어서는 안되겠다.텔레비젼을 끄고 억지로 재우려는 할미와 실랑이를 벌이다 이제껏 잘 참아오던 할미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할미의 큰소리에 아이는 더 큰 소리로 울어대니 급한대로 할아비가 대타로 나설 수밖에. 보챌 때마다 할미의 최후의 무기는 업어서 재우는 것이다. 할미의 등에는 무슨 수면제라도 묻었는지 업으면 채 5분도 안돼 잠이 들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그마저 여의치 않다. 유난히 더위를 많이 타는 할미는 더워서 아이를 업어줄 수 없다고 한다. 내친 김에 할미는 그동안 쌓인 아이의 부모에 대한 불만까지 쏟아 놓는다. 할아비가 업어주며 달래자 못이기는 척 울음을 그친다. 겨우 잠을 재우고 나니 4시도 훌쩍 넘어 이번엔 내 잠이 달아나 버렸다. 온갖 잡념이 꼬리를 물어 잠을 놓친채 날이 밝았다. 아이의 부모들은 이런 소동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졌겠구나!아침이 되자 할미는 아이에게 다짐을 한다. "오늘 밤부터는 네 엄마한테 가서 자거라.""싫어, 안 가."마치 그런 말이 나올 줄 알고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의 대답이 어찌나 신속하고 단호한지 놀랍다. 이유야 물어보나마나다. 엄마가 동생을 안고 자는 그 옆에 같이 있기가 싫은 것이다. 감성이 예민한 아이들의 전형적인 행동양상이 아니겠는가?오늘도 10시가 넘도록 늦잠을 잤으니 유치원 버스는 당연히 놓치고 말았다. 아이의 감기 기운이 아직 남아 있어 병원에 들렀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아이의 성장 상태가 궁금해졌다. 키 93센티미터와 몸무게 13킬로그램이다. 기준표를 보니 발육상태는 거의 정상 수준이다. 아주 더디지만 그래도 크긴 크는가 보다. 이제는 손톱 발톱을 깎아줘도 울지 않고 가만히 있고, 화장실 갈 줄도 안다. '가위 바위 보'도 잘하고 귀찮을 정도로 술래잡기를 하자고 조르기도 한다. 아이는 지금 신체적 성장 못지않게 정서적으로도 큰 변환기를 치르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이렇게 많이 자랐지만 그때는 모르던 걱정꺼리도 덩달아 생긴 것 같다. 할미는 요즈음 들어 부쩍 아들을 분가시켜야겠다는 말을 자주 들먹인다. 여름만 되면 더위 때문에 고생하는데다 당뇨까지 점점 심해지는지 늘 피곤해 한다. 노년에 손자들까지 돌보느라 시집살이한다고 푸념이 늘어간다. 나이 들고 결혼해서도 부모 품을 떠나려하지 않는 소위 '캥거루족'이 늘어나는 추세라는데 바로 우리집을 두고 하는 말이지 뭔가? 아들 내외는 분가 이야기만 나오면 아예 입을 봉해 버리고 대꾸가 없다. 그들이 믿는 구석은 손자를 끔찍이 아끼는 부모들이 차마 손자들을 내쫓지는 못하리라는 계산인 듯하다. 이런저런 걱정으로 우울한 하루를 보내는데 시계를 보니 어느덧 큰아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올 시간이네! 얼른 마당으로 나가 기다리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는 안 나타나고, 뜻밖에도 바람결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의심하였다."할머니 멋져, 최고야!"눈치 빠른 아이의 넉살이다. 할머니와 손주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연신 깔깔대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지난 밤 잠도 못자고 시달려 잔뜩 화났던 할미가 어느새 아이가 걱정됐는지 직접 유치원에 가서 아이를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그렇지! 아들이나 며느리는 못마땅해도 손자한테는 한없이 약한 할머니의 깊숙이 숨겨둔 마음을 그만 들키고 말았다. 필시 오늘 밤에도 아이는 안방에서 잠꼬대를 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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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9.21 23:02

산 딸 기 - 김 규 희

신혼 초부터 나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아빠 엄마라고 불렀다. 시아버지는 내 이름을 불러주고 주변에는 며느리가 아닌 딸이라고 소개하곤 했다. 나는 그게 싫지 않았다. 그런 아빠가 휄 체어에 겨우 의지하는 지금이다. 볼이 움푹 팬 아빠는 퀭한 눈으로 요양원 뜰에 눈을 주었다. "아빠, 저게 뭔지 알아?""산 ? 딸 ? 기."소리는 폐 속 깊이 남겨둔 채 공기만을 내뿜는다."따 드릴까?"아빠는 하얀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지나치게 농익어 금방 으깨질 것 같은 검붉은 알은 그냥 두고 붉은 빛이 투명한 큰 놈 너덧을 따서 손바닥에 올렸다. 산딸기 하나를 집는 손끝이 바르르 떨린다. 아빠의 손가락은 겨울 나뭇가지마냥 앙상하다. 마치 느린 영상 보기를 클릭한 듯하다.2년전 아빠는 폐암선고를 받았다. 3~6개월이 시한이라고 했다. 그런 아빠가 지금껏 잘 버틴 건 기적에 가깝다고 한다. 이주쯤 전이었을까. 엄마는 '아빠 수발이 힘들다'고 하소연이다. 몇 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겨우 왼 손발에 의지하여 거동하는 엄마다. 그런 몸으로 맞벌이를 하는 우리부부를 대신하여 아빠수발을 도맡았으니.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사는 아빠에게 엄마는 우둔한 왼손발로 겨우 밥, 국, 반찬, 물을 하나씩 하나씩, 차례차례로, 한 끼 식사를 위해 주방과 방을 수차례 왕복 한다. 엄마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리라. 우리부부는 장고 끝에 아빠를 요양병원에 입원시켰다.산딸기를 오물거리는 할아버지의 깡마른 두 다리를 작은 녀석이 주물려 준다. 분명 아빠도 내 남편의 어린 시절을 기억할 것이다.딸기 넝쿨에는 연둣빛 덜 익은 알이 빼꼼히 매달려 있다. 어느 덧 초등학교 졸업반과 중학교 신입생이 된 내 아이들의 상큼한 모습을 참 많이도 닮았다. 아빠는 힘 없는 눈길로 당신 손자들을 어른다. 할아버지의 그 깊은 눈길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 둘이 할아버지의 다리를 주무른다. "다리에 이렇게 살이 없어서 어떻게 걸으실 수 있겠어요. 식사 잘 하시고 빨리 건강해지셔야 잘 걷고 우리 집에 빨리 갈 수 있잖아요."둘째아이의 목소리가 촉촉하다고 느낀 건 내 생각일까. 연둣빛 덜 익은 산딸기 같다. 그 곁에 큰 녀석이 듬직하게 서 있다. 주홍빛 맵시를 자랑하는 붉은 딸기처럼. 신혼 무렵 아빠는 강인하고 위풍당당했다. 빨갛게 농익은 자태를 자신만만하게 뽐내는 큰 녀석처럼 아빠는 항상 우뚝했다. 제 할아버지를 닮은 아들 둘이 나는 좋다.요즘 남편은 아침저녁으로 요양병원을 찾아간다. '아버지의 큰소리가 그립다'며 한숨을 짓는 남편이다. '자식이 효도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리지 않는다(子慾孝而 親不待)'는 '한씨외전'(韓氏外傳)의 풍수지탄(風樹之嘆) 싯구가 자꾸 떠오른다고 푸념을 한다."아빠 맛, 있 ? 어요?""셔.근데 맛있구나."아빠의 목소리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맥이 없다. 어떤 시인은 죽음을 두고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썼다던가.잎새 한 장을 담벼락에 그려 넣던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 새〉 속의 노 화가를 그려 본다. 스러져 가는 아빠를 어찌할 수 없이 바라만 보는 나는 그저 마지막 그 날까지 아빠가 꽃대를 단단하게 잡고 있기를 간절히 빌 뿐이다.※ 수필가 김규희씨는 2001년 '지구문학'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현재 왕신여자중 교사(현 이일여중 파견)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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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9.14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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