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6-05-19 17:49 (화)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기획

[에디터가 만난 전북인물] 조계현 기아타이거즈 단장 “전북야구 발전 도움 되는 일 언제든 팔 걷겠다”

군산상고는 걸출한 야구스타들을 즐비하게 배출했다. 군산이 야구도시로 명성을 쌓은 것도 군산상고가 있어서다. 특히 1972년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군산상고가 부산고에 9회말 5대4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면서 얻은역전의 명수는 오늘날까지 유효한 군산상고의 별칭이 됐다. 김봉연김준환김성환김일권 같은 대형 스타들이 1970년대 군산상고를 전국적인 야구 명문학교로 올려놓았다면, 조계현이 1980년대 황금기를 열었다. 군산상고가 가장 많은 전국대회 우승을 이룬 것도 조계현이 활약했던 1980년대 초였다. 조계현은 1981년 1학년 때 팀을 대통령기 우승으로 이끌며 이미 초고교급 선수로 이름을 알렸다. 고교 때 혹사당한 팔 때문에 대학시절(연세대) 변변한 성적을 내지 못했던 조계현은 프로에 진출한 후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전남북 연고로 출범했던 해태 타이거즈는 군산상고 출신이 주축을 이뤄 전성기를 누렸고, 해태의 마지막 전성기에도 조계현이 버티고 있었다. 선수 은퇴 후 여러 구단에서 지도자로 활동했던 조계현은 선수 때만큼의 명성을 쌓지는 못했다. 그렇게 잊혀져가던 그가 2017년부터 기아타이거즈 단장을 맡아 새로운 야구인생을 펼치고 있다. 선수시절 팔색조싸움닭 등 여러 별명을 얻을 만큼 많은 열성팬들을 몰고 다녔던 조 단장(56)을 만나 그의 야구인생을 들어보았다. -드라마 스토브리그가 요즘 안방극장을 달구고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단장이 종횡무진 활약하는 역할로 나오는 데, 실제 어떻습니까. 드라마와 현실은 다르지요. 우리나라 프로야구는 감독 중심의 야구입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경우는 오래 전부터 제너럴 야구, 즉 단장 중심으로 운영됐는 데, 우리도 최근에는 구단 야구로 가는 추세 입니다. 감독은 구성된 선수를 갖고 최고의 실력을 내도록 하고, 단장은 선수 영입부터 선수 육성 등 중장기 플랜도 세우는 임무를 맡는 게 메이저리그 형태로 말이죠. -기아타이거즈 최초로 선수 출신의 단장이 됐습니다. 어떻게 단장으로 발탁됐습니까. 또 선수 출신 단장의 강점이 있다면. 선수와 지도자 생활 대부분을 타이거즈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구단과 선수 사정을 잘 알 것으로 평가한 것 같습니다. 기아에서 지난해 미국 메이저리그 출신 감독을 영입한 만큼 감독 및 선수단과 호흡을 맞추는데 선수 출신 단장이 강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고교와 프로야구 시절 화려한 선수 생활을 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를 꼽는다면. 1982년 한일 고교야구 정기교류전에 뽑혀 일본에 갔을 때 교포 할머니께서 떡을 가져온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일본 교과서 왜곡문제로 반일 감정이 고조됐을 때인데, 꼭 이겨달라던 할머니의 말씀을 들으면서 지면 안 되겠다는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봉황기청룡기 대회를 우승한 뒤여서 피로가 누적됐으나 3차전 모두 출전해 2승 1세이브를 거뒀습니다. -고교 때와 달리 대학 시절 별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고 2때 하루 12시간씩 연습을 했어요. 봉황기 결승에서 만난 천안 북일고와 12회 연장까지 가서도 승부를 내지 못하고 다음날 다시 연장전 혈투를 벌였습니다. 죽기 살기로 던지며 전년도 패배를 설욕하고 우승을 했지만, 쇄골 골절 부상을 겪어야 했어요. 이후 운동을 거의 못해 저에게는 지옥 같은 시절이었습니다. 한물간 선수로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보다 제 스스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더 힘들었던 때였습니다. -대학시절의 공백을 딛고 어떻게 일어설 수 있었습니까. 88년 프로 입단 대신 농협 실업팀을 선택할 때 야구를 그만둘 경우 평범한 직원으로라도 남고 싶어서였습니다. 훈련 방법을 바꾸고 별별 방법을 동원하고서도 속도가 나오지 않았던 때입니다. 그렇게 5~6년 고민했던 문제가 참으로 우연치 않게 풀렸어요. 훈련을 하면서 손끝에 걸리는 감각이 특별했어요. 140킬로 중후반 속도가 나와 같은 방식으로 100개를 피칭했는데 계속 그 속도가 나왔어요. 집에 가서 많이 울었고, 설렘에 한숨도 못 잤습니다. 더는 투수 생활을 못할 줄 알았던 때였기에 그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해태 타이거즈 선수로 활약할 당시 강타자와 대결에서도 피하지 않고 배짱투구로 지금까지 많은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줬습니다. 프로야구 시절 가장 전성기로 꼽는다면. 해태 선수시절 한국시리즈에서 5번 우승했습다. 당시 선동렬이강철 등 쟁쟁한 멤버들이 활약할 때였죠. 특히 93년도 17승6패 방어율 2.15로 다승왕과 평균자책점 4위를 차지했을 때가 가장 행복한 해였습니다. -조 단장의 오늘이 있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을 꼽는다면. 야구에 입문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담임이었던 문철웅 선생님이셨습니다. 76년 대통령배 우승의 주역이었던 군산상고 김용남 선배를 보면서 목표가 생겼고, 고교 1학년 때 부동의 국가대표 1번 타자 김일권 선배가 자신이 입던 국가대표 옷을 주며 꼭 국가대표가 되라는 격려가 큰 힘이 됐어요. 고 최동원 선배는 저의 롤모델이었습니다. -2000년대 이후 군산상고 야구 성적이 저조 합니다. 2000년부터 10년간 전국대회 우승이 전무했으며, 최근의 가장 좋은 성적이 4년 전 전국체전 우승이 고작입니다. 그 이유를 어떻게 보는지. 야구할 수 있는 조건은 잘 갖춰져 있다고 봅니다. 시민들의 열성어린 응원이 무엇보다 큰 힘이죠. 현재 모교야구동문회 회장을 맡고 있는데, 선후배 동문들을 중심으로 군산야구위원회 발족을 준비 중입니다. 엘리트 야구와 사회인 야구를 발전시키기 위한 여러 방안들을 고민하고 있어요. 전주와 익산을 연계해 전북 야구발전의 디딤돌을 놓고 싶습니다. -기아타이거즈에 대한 전북 팬들이 많습니다. 기아타이거즈는 한 때 군산 월명야구장을 제2의 홈구장으로 사용하며 매년 4~9경기를 가졌지만, 지금은 군산경기가 없어졌습니다. 군산 경기를 재개할 계획은 없는지. 광주 홈경기를 치를 때 30% 정도가 외지에서 찾고, 그 절반 가까이가 전북 팬일 만큼 기아에 대한 전북 팬들이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시연고제 시행에 따라 전주고와 군산상고 출신 지명권이 경남 연고의 NC가 갖고 있어요. NC를 제치고 기아가 군산에서 홈경기를 갖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21년 이후 도시연고 대신 전면 드래프트제 시행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때나 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전북 야구팬들의 갈증 해소는 당분간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전북은 야구 열정이 높은 고장입니다. 전북연고 구단인 쌍방울레이더스가 SK로 넘어갈 때 지역연고지를 지키지 못한 것이 아쉽고, 10구단 창단 때 기회를 잡지 못한 것도 안타깝습니다. 앞으로 11구단, 12구단을 만들어 양대 리그로 갈 수도 있을 텐데 도민들의 열망과 의지의 결집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에 대비해 야구장 신설이나 리모델링에 대한 관심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선수시절이나 지도자 때나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죠. 단장으로서 팀을 탄탄하게 만들면서 좋은 성적을 내는 데 올인 할 것입니다. 그 다음 무엇을 할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전북도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야구는 저의 모든 것이었고, 제 인생을 풍요롭게 해줬습니다. 많은 사람과 공존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많은 경험을 갖게 한, 무한히 감사한 존재입니다. 그런 야구를 내 곁으로 오게 한 것이 고향입니다. 제 마음에는 늘 고향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전북야구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언제든 팔을 걷겠습니다. ◆ [조 단장의 선수시절 뒷이야기] 덩치만 큰 평범한 소년에서 야구 전설이 되기까지 고교 야구와 프로야구 판을 흔들었던 조계현이 처음부터 야구천재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까지 그저 덩치 큰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가 야구에 발을 디딘 것은 해체된 군산남초등학교 야구팀이 재창단되면서였다. 학교는 야구 실력 등을 따질 겨를 없이 신체적 조건을 따져 선수를 모았다. 조계현도 담임의 안내와 동기인 백인호(기아 타이거즈 3군 코치)의 추천을 받아 합류했다. 당시 코치는 모교 출신의 스마일 피처 송상복이었다. 고무신 신고 나온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처음 58명이 지원해 훈련을 시작한 1주일 뒤에는 18명만 남았다. 말 그대로 오합지졸이었다. 야구팀에 남기는 했지만, 조계현은 야구자체에 취미가 없었던 데다 소질 또한 보이지 않았다. 1루수 포지션이었는데 타격과 수비 모두 형편 없었다. 너무 못해 민폐였다. 부끄러웠단다. 4학년 여름 방학 훈련에 참가하지 않고 아예 빠졌다. 그런 그가 야구를 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최규거 당시 교장이 선수들에게 사비로 육성회비를 지원해주면서다. 5학년 때 투수로 전향하면서 그의 실력도 일취월장 했다. 6학년 때 이르러서는 게임을 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정도로 천하무적 팀이 됐다. 백인호 고장량 한경수 등이 당시 주축이었다. 조계현과 관련해 또 하나의 베일에 쌓인 이야기가 있다. 1982년 한일 고교야구 정기교류전에서 3차전 경기 마운드 책임을 그가 도맡은 것을 두고 당시 교류전 감독이 경북고 감독이어서 라이벌 팀 에이스를 혹사시킨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다. 이에 대해 조 단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승부욕이 강했던 자신이 자원해서 나선 것이란다. 별명 싸움닭이 말해주듯 그는 지는 것을 못 참는단다. 무엇이든 자신이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고 했다. 그의 승부사적 기질이 프로야구 선수와 지도자 생활을 거쳐 단장직을 맡고 있는 지금도 살아 있어 보였다. -프로야구 이력 △해태 타이거즈 입단(1988년 1차 1순위) △해태 타이거즈 (1989~1997) △삼성 라이온즈 (1998~1999) △두산 베어스 (2000~2001) △KIA 타이거즈 투수코치 (2003~2005) △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 (2006~2008) △야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2008, 베이징 올림픽 우승) △삼성 라이온즈 투수코치 (2008~2009) △두산 베어스 투수코치 (2010~2011) △LG 트윈스 수석코치 (2012~2014) △KIA 타이거즈 수석코치 (2015~2017) /김원용 에디터

  • 기획
  • 김원용
  • 2020.01.19 16:14

[카드뉴스] '선배 갑질' 논란

  • 기획
  • 신재용
  • 2020.01.15 17:31

[뚜벅뚜벅 전북여행] 전주한옥마을 경기전,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볼 수 있는 곳'

겨울 같지 않은 겨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십여 년 전만 해도 11월 중순이면 첫눈이 내리고 연말연초에는 강추위로 해넘이 해맞이도 중무장하고 봤지만, 몇 해 전부터 겨울이 실종되고 늦가을 같은 풍경이 낯설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날 찾은 경기전은 입구는 낙엽이 뒹구는 만추의 풍경 같았는데요. 날이 포근해 경기전을 산책하는 관광객도 평소보다 많았던 것 같습니다. 경기전은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봉안한 사당으로 한옥마을을 찾는 연간 1천여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필수 코스입니다. 하마비, 홍살문, 외신문, 내신문을 거쳐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정전이 있으며 그 외 사당 부속건물과 전주 이씨 시조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전주사고, 조선 8대 왕으로 재위 13개월 만에 사망한 예종의 탯줄을 담은 태실, 경기전의 역사와 임금의 초상들을 볼 수 있는 어진 박물관 등이 있습니다. 경기전에는 퓨전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꽤 많이 보이는데요. 서울의 고궁들이 한복을 입으면 무료입장인 것과 달리 경기전은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인 `한복 데이`에만 무료입장이 가능하다는 것 참고하세요.​ 어른(만 25세 ~ 만 64세 이하) : 개인 3000 단체 2500 (전주 시민 1000, 800) 청소년 (만 13세~만 24세 이하) 군인(하사 이하 군인과 의무경찰) : 개인 2000 단체 1500(전주 시민 800, 600) 어린이(만 7세~만 12세 이하) : 개인 1000 단체 500(전주 시민 500, 300) 무료입장 : 만 7세 이하, 만 65세 이상, 국가유공자 및 장애인 등록증 소지자​ 3월~5월, 9월~10월 : 09시 ~ 19시 동절기(11월~2월) : 09시 ~ 18시 하절기(6월~8월) : 09시 ~ 20시​ 1월 1일, 추석, 설날, 3.1절, 광복절​ 주차장은 한옥마을 공용주차장 이용​ 쉬는 날은 없음, 어진 박물관(월요일)​ 애완견 동반 금지, 음식물 반입금지 경기전 정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지켜보니 절반 정도는 한복을 입고 들어가는데요. 서울 경복궁에서 시작한 한복 코스프레는 경기전이 있는 전주 한옥마을도 예외가 아닙니다. 한복 외에도 7, 80년대 교복을 입거나 30년대 모던걸이나 모던보이 복장으로 찾은 관람객도 뜻밖에 많았는데요. 저도 한복으로 갈아입고 올 걸 그랬나요? 왠지 한복을 입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풍경입니다.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아무래도 한복이 쑥스럽습니다. 대부분 자유로운 복장으로 관람하는데요. 무엇인가 특색 있는 복장으로 멋진 추억을 남기고자 하는 젊은 친구들 사이에 한복과 모던걸, 모던보이 복장은 이제 전주 한옥마을의 새로운 트렌드로 정착돼가고 있습니다. 경기전 정전正殿입니다.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인 어진眞展을 모신 건물로 비록 임금의 초상화가 걸려있음에도 임금의 집무실인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처럼 정전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요. 왕의 신위를 모신 종묘의 중심 건물을 정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정전에 봉안된 태조 이성계의 어진입니다. 1987년 보물 제931호로 지정되었다가 2012년 국보 제317호로 승격되었는데요, 1410년 경복궁 창건 당시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어진이 낡아 원본을 1872년 그대로 모사한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태조 어진이자 원본적 성격을 갖춰 국보로 승격된 것입니다. 그런데 태조 어진은 어진 박물관에도 봉안되어 있는데요, 모두 모사본으로 진본은 매년 어진 박물관 개관일인 11월 6일 어진 박물관에 전시합니다. 예종의 태실과 조선왕조 실록을 보관한 전주사고 이제 태조 어진도 알현했으니 경기전 내부를 돌아다녀 보는데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인증 사진 찍는 포토존은 바로 대숲이었습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서도 작품이 되는 신비로운 공간입니다. 앞에 서나 뒤에 서나 경기전 포토존 최고 명당이군요. 최소한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줄을 좀 서야 합니다. 겨울 풍경 같나요? 산책하는 동안 따사로운 햇볕이 숲 사이로 내려앉아 온기가 가득한데요. 마치 만추의 경기전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한 떼의 비둘기가 비상하는 날갯짓에 찬바람이 이는데요. 이러한 풍경도 누군가가 먹이를 주기 때문에 가능하겠죠. 조선 8대 왕 예종의 탯줄을 담은 태실과 비석으로 전북 민속자료 제26호입니다. 왕가에서는 왕의 자손이 태어나면 그 태를 소중히 여겨 석실을 만들고 보존했는데요. 예종의 태실은 선조 11년인 1578년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태실 마을 뒷산에 세웠다가 1928년 조선총독부가 태 항아리를 가져가면서 파괴되었던 것을 1970년 경기전으로 옮겨 보전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보전기적비가 서 있는 좌측 건물이 전주사고史庫입니다. 임진왜란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에는 한양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 등 네 곳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사고가 있었는데요, 전란이 발생하면서 성주, 청주, 서울이 차례로 함락되면서 세 곳의 사고에 보관했던 실록이 모두 불타버렸고 전주사고에 있는 실록만 살아남았는데요. 오늘날까지 조선왕조 실록이 전해지는 것은 전주사고의 참봉 유신과 오희길 그리고 태인의 유생 안의와 손홍록 등 네 명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으로 상륙한 왜군이 서울까지 함락한 것은 20여 일 만인 5월 2일이었는데요.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막고 경상도에서는 의병이 막아 전라도로 진출하지 못한 왜군이 전주성에 들이닥치면 경기전도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아 태조의 어진과 실록을 피신시킨 것입니다. 결국, 실록과 태조의 어진이 없는 전주사고와 경기전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습니다. 이후 1614년 경기전은 중건되었지만 사고는 복원되지 않았고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은 내장산으로 피신했다가 해주를 거쳐 강화도와 묘향산으로 계속 피신했는데요. 유일하게 남은 실록은 이후 4본을 더 만들어 한양 춘추관과 강화 정족산, 봉화 태백산, 무주 적상산, 평창 오대산 등 다섯 곳으로 분산해 보관되었습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본관은 전주 이씨인데요. 시조의 위패를 모신 조경묘는 전북 유형문화재 제16호입니다. 태조의 출생지는 함경북도 영흥으로 태조의 4대 조인 이안사때 전주를 떠나 강원도 삼척을 거쳐 함경도까지 갔다는데 시조 때부터 5대조까지는 전주의 호족으로 위세를 떨쳤으며 태조 역시 조선을 건국하기 전 남해에 출몰한 왜구를 진압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주에 들러 전주 이씨 잔치를 벌일 정도로 전주에 대한 애착이 강했습니다. 태조의 어진을 비롯해 역대 임금들의 어진을 보존하고 있는 어진 박물관입니다. 경기전과 달리 매주 월요일은 휴관일이니 참고하세요. 어진 박물관의 태조어진입니다. 매년 개관 기념일인 11월 6일부터 일정 기간 진본을 전시하는데요. 아무래도 유일하게 남은 태조어진이 국보이다 보니 화재나 도난으로부터 안전한 수장고에 보관했겠죠. 지하 1층에는 다른 임금들의 어진도 전시되었는데요.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명의 임금 중 현재 남아있는 어진은 태조와 영조, 철종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거의 모든 왕의 초상화가 있었지만, 여러 차례 전란으로 소실되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어진은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이안했다가 보관한 창고가 1954년 화재가 발생하면서 상당수가 불에 타버렸다고 합니다. 어진 박물관에는 어진실외에도 역사실과 가마실 등이 있어 어진의 제작 과정과 제례 등에 대해 알 수 있으니 경기전을 관람할 때 어진 박물관도 같이 관람하면 더 즐거운 문화산책이 되는데요. 이제는 경기전의 부속건물을 만나보겠습니다. 경기전은 옛날에는 1년에 여섯 번이나 제례를 지냈다는데요, 1978년 이후 1년에 한 차례 음력 9월 9일 중양절에 제례를 지냅니다. 중양절이란 삼짇날 제비가 다시 강남으로 돌아가는 날로 가을 하늘 높이 떠나가는 철새를 보며 한 해의 수확을 마무리하는 절기로 중일 명절이라고 합니다. 즉 3월 3일(삼짇날), 5월 5일(단오), 7월 7일(칠석), 9월 9일(중양절)과 같이 홀수가 겹치는 날이 중일 명절입니다. 제례를 지내려면 여러 시설이 필요한데요. 제사 음식을 만드는 조병청, 제사상 차리는 일을 담당하는 전사관이 일하는 전사청, 음식을 만드는 방앗간인 용실, 임금의 음식을 만드는 데 쓰이는 물을 조달하는 어정, 제향 때 쓰는 각종 그릇을 보관한 제기고, 경기전을 지키는 수문장이 근무하는 경덕헌, 경기전 제사에 관한 일을 맡은 낮은 직급의 벼슬아치가 일을 보는 수복청 등 많은 부속건물이 있어 곳곳이 사진 찍기 좋은 명소가 되었습니다. 전북의 겨울 명소로 경기전을 소개하면서도 왠지 겨울 같지 않은 풍경에 죄송스러운데요, 겨울이 겨울답지 않은 것은 그냥 흘겨 버릴만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의 실제 배경인 노르웨이는 눈 대신 비가 내리고 낮 기온이 20도에 육박한 여름 날씨를 보이지만, 같은 위도상의 아메리카 극지방은 평년보다 20도가 낮은 극한의 겨울을 보내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전형적인 겨울 날씨인 삼한사온은 옛말이 되었고 이제는 삼한사미(三寒四微 3일은 춥고 4일은 미세먼지 가득하고)로 날만 따뜻해지면 미세먼지가 가득한 겨울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경기전만큼은 사계절 언제 가도 좋은 전주의 명소인데요. 이왕이면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예쁜 한복이나 모던 복장을 하고 경기전을 거닐고 싶다는 욕심을 내봅니다. /글사진 = 심인섭(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 기획
  • 기고
  • 2020.01.14 15:40

[카드뉴스] 너도나도 카페 운영?

  • 기획
  • 신재용
  • 2020.01.14 15:20

주거재생 전문가 조준배 전주시 주거재생 총괄계획가 "주거재생은 주민들의 삶의 질 높여 살기 좋은 동네 만드는 일"

도시는 성장을 멈추는 그때부터 쇠퇴의 위기가 찾아온다. 오래된 도시들이 안고 있는 구도심 쇠퇴의 본질적인 문제가 거기 있다. 특히 언제부터인가 이 오래된 도시들의 구도심 경계는 주민들의 삶의 질까지 획정하는 기준이 됐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도시들이 재생을 내세워 도시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이유다. 여전히 개발에 의존하며 재개발에 얽매어 있는 대한민국의 오래된 도시들이 가야할 바람직한 길은 어떤 것일까. 오래전, 인터뷰로 만났던 도시건축가 김진애씨는 그 길을 찾으려면 공공의 역할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했다. 시민들에게 언젠가는 개발될 수 있다는 헛꿈을 불어놓지 말고 살기 좋은 동네를 위해 도서관이나 커뮤니케이션과 같은 생활서비스 공간을 마련하는데 투자해야 한다는 그의 조언은 그때만 해도 멀리 있어 보였지만 지금은 도시재생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쇠퇴의 위기를 넘어 여전히 소멸위험도시의 대열에 놓여 있는 수많은 대한민국 중소도시들이 있다. 인구 늘리기나 기업 유치 등 온갖 방법을 찾아 도시의 규모를 키워 어떻게든 생존해보겠다는 그들의 고군분투는 계속되고 있지만 인구 늘리기는 공허하고 기업유치는 더 이상 지속가능한 성장의 통로가 되지 못하는 현실은 안타깝다. 그 답을 찾기 위해 20년 가깝게 주거 재생이란 다소 낯선 분야에서 도시를 연구하며 정책을 만들고 현장에서 실행해온 연구자가 있다. 스스로 현장주의자 임을 내세우는 주거재생전문가 조준배 유진 도시건축연구소 지역도시연구본부장(57)이다. 그는 2010년 경북 영주의 디자인관리단 단장을 맡아 도심재생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 공공건축 밀 공공디자인 관리시스템을 구축, 우리나라의 가장 모범적인 공공건축물의 도시로 재생시켰다. 도시를 읽고 만드는 일을 현장으로부터 이어온 결실이다. 그가 지난해 7월, 전주시의 주거재생 총괄계획가(총괄단장)로 위촉됐다. 주거재생 분야의 총괄계획가는 전국에서도 처음이다. 그만큼 낯설고 실험적이지만 그동안 그가 걸어온 궤적을 보면 지역다움을 내세워온 전주의 선택은 주목을 끈다. 지난 연말, 그를 만났다. 4개월 남짓, 그가 읽어낸 전주는 어떤 도시인지 궁금했다. 그는 쉽게 답하지 않았으나 전주를 잠재력과 가능성의 도시로 꼽는 데는 주저하지 않았다. -지난해 영주를 다녀왔습니다. 공공건축물로 대한민국의 가장 핫한 도시가 된 이유를 알겠더군요. 주민들의 삶이 많이 바뀌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007년에 제가 일했던 건축도시공간연구소(국책연구기관)가 전국 소도시를 대상으로 도심재생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만들 도시를 공모 했습니다. 10개 도시를 가려 공문을 보냈는데 영주에서만 답이 왔었어요. 영주는 2009년에 완성된 마스터플랜을 곧바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공공건축가 제도를 도입하고 이듬해에 시장 직속의 디자인관리단을 만들었지요. 그곳 단장을 맡게 되면서 공공건축과 공공디자인의 관리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전국에서는 처음으로 지역건축 디자인 기준을 마련하고 시 경관과 디자인 조례를 제정했고요. 공공건축의 관리 시스템을 정착시키기 위한 업무도 확충했는데 시스템의 변화가 가져온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작은 도시 영주의 변화가 부러웠습니다. 그만큼 전주의 변화가 기대됩니다.(웃음) 지금 하시는 일을 듣고 싶습니다. 전주시의 주거재생 사업을 총괄하는 역할입니다. 이를테면 오래된 동네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재생하는 역할이지요. 서울도시주택공사에서 일할 때 주거재생 모델을 만드는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정확하게는 주거재생사업 모델을 만드는 일이었어요. 실제 실행 가능한 모델을 만드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당시 서울은 뉴타운 사업에 이어진 정비 사업들이 잘 안 풀리는 상황이었어요. 개발시대의 방식으로는 한계가 명확했습니다. 다시 원도심으로 돌아가는, 이른바 재생사업이 부상했지요. 그때 제가 영주의 프로젝트를 막 마무리한 시점이었는데 그 인연으로 도시재생의 조직과 사업을 만드는 도시재생기획처장을 맡게 됐습니다. 그때 만든 모델이 지금의 뉴딜사업 원형이 됐습니다. 오늘의 뉴딜 주거지원형 우리 동네 사업 등이 모두 그 모델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뉴딜 사업은 전국적으로 확산됐지만 서울과 중소도시는 여건이 서로 다르지 않습니까. 그 자체를 적용하는데 한계가 적지 않을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서울시의 문제 해결을 위한 재생 모델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이니 당연히 문제는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은 사업성과 개발압력의 강도가 다르니 지방의 중소도시에서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지방도시를 위한 구체적인 모델이 절실해진 것이죠. -중소도시를 위한 다른 모델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다른 방식으로 실행하는 모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뉴딜처럼 작게 하는 것이 아니고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정비 사업인데 뉴딜 안에서의 정비 사업을 지방도시에 적용하기는 한계가 커서 집수리가 우선순위의 핵심 사업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빈집을 수리하고 그 빈집을 활용하는 다양한 방식이 실행되어 주거환경을 바꾸는 것이지요. -전주의 주거재생도 그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겠군요. 맞습니다. 주거재생은 궁극적으로 주민들의 삶과 환경을 바꾸는데 목표가 있습니다. 단순히 하드웨어만 바꾸는 것으로는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도시에서 재생을 내세운 다양한 사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주거재생 사업도 그 연장선에 있는 것이겠지요. 물론입니다. 원래 재생의 취지는 장소(공간) 중심으로 다양한 사업을 연계해 지속적으로 추진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는 사업들을 묶고 통합하는 기능을 할 수가 없습니다. 행정 안에서도 서로 다른 부서에서 각각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시스템을 통합하지 않는 한 업무 영역을 묶어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패키지 추진방식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한계는 중앙정부 차원에서도 똑같이 겪고 있는 문제입니다. -지방도시라고해서 그것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진 않겠군요. 가장 큰 어려움입니다. 전주시의 경우도 그 시스템을 먼저 고민했습니다. 다행히 주거재생 총괄의 역할을 중심에 세워 지금까지는 잘 되지 않았던 행정 부서간 사업의 통합을 묶어내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사업을 연계시키고 하나로 묶어내는 일들을 가능하게 하다 보니 업무 추진이 많이 유연해졌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겠습니다. 듣다보니 생활SOC 사업의 경우는 주거재생과 긴밀한 관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입니다. 사실 생활SOC 사업은 단순히 서비스 시설을 짓는데 에만 집중해서는 절대 안 되는 사업입니다. 생활권의 균형이 함께 이뤄져야 지속성의 가치가 보장되거든요. -그러고 보니 정권이 바뀔 때마다 도시정책이 바뀌는데 그 이유가 있습니까. 역사적으로 보면 정권마다 정책이 바뀌는데 그게 재미있습니다. 이번 정권에서 하드웨어 사업을 내세웠다면 그 다음 정권에서는 반드시 소프트 사업을 중심에 놓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두 개의 틀이 어김없이 순환된다는 겁니다. 이유가 있지요. 소프트사업을 하면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거든요. 예산은 엄청나게 들였는데, 성과는 없으니 그 다음 정권은 다시 하드웨어에 치중하게 되는 겁니다. 이를테면 이명박 정부의 하드웨어 정책에 반해 박근혜 정부에서는 도시재생을 소프트웨어 쪽에 방점을 두었습니다. 공공과 주민역량강화만 한 겁니다. 그런데 1차 선도 사업이 끝나고 나니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거든요. 우리가 5년 동안 고생해서 이룬 것이 뭐지? 주민들과 좀 친해졌고, 공동체도 만들어졌는데 그 다음은? 그것하려고 우리가 그렇게 고생을 했나?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문재인 정부에서는 다시 하드웨어가 같이 가야 한다 해서 전국적으로 확산이 되었는데, 이제 또 성과 때문에 빨리 짓고 빠져버리니 운영 문제에 부딪치게 되는 겁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같이 가야하는 이유가 분명해진 것이죠. -전주의 주거재생 방향성이 더 궁금해집니다. 전주는 행정 업무의 통합이 가능해졌으니 주거재생의 틀이 좀 더 새롭게 바뀔 수 있습니다. 핵심 축은 두 가지 입니다. 행정협의회를 만들어 연관 사업을 통합하는 것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민간 플랫폼을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이 두 개의 조직을 통합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큰 목표입니다. -사업의 다양성이 존중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같은 목표를 향한 사업의 연계는 꼭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처럼 사업의 단위가 큰 것들을 긴 시간에 추진하는 것 보다는 작은 사업을 짧은 시간에 실행해 성과를 내고 그 과정에서 주민들이 자신감을 갖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렇게 되면 수동적 자세가 아니라 내가 하는 사업에 참여한다는 주체적인 생각을 갖게 되거든요. 그 다음에는 아마 주민들 스스로가 우리 동네에 필요한 사업을 발굴하고 확장해나가는 일이 가능해지게 될 겁니다. 지금 저희가 하려고 하는 것은 작은 사업들을 확장하는 일, 또 한편으로는 확장된 사업들을 연계하고 디자인해주는 일입니다. 점적으로 유연하게 접근해서 진행하자는 것이 큰 원칙중의 하나입니다. -가장 먼저 이루어질 사업이 궁금합니다. 아마도 집수리 사업이 될 것 같은데, 계획대로라면 연말까지(2019) 집수리 조례를 만들고, 내년(2020)에는 골목길 사업을 시행해 골목길 정비사업과 집수리 사업을 함께 추진하는 것입니다. 그동안에는 그것이 각각 따로 갔지만 함께 가면 골목길과 집수리가 훨씬 효율적인 방식으로 진행돼 동네의 변화가 보다 새롭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집수리 조례는 어떤 것인가요. 핵심은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민이 집수리를 하기위해 서로 다른 행정 부서를 다니면서 신청해야 하는데 이 과정을 간편화해 행정이 바쁘게 움직이는 쪽으로 바꾸자는 겁니다. 또 하나는 사람 중심으로 되어 있던 주거복지를 집 중심으로 바꾸는 내용입니다. 지원체제를 집(공간) 중심으로 바꾸게 되면 도시는 집수리 이력 데이터베이스를 가질 수 있어 보다 체계적인 정책을 만들고 실행할 수 있게 됩니다. -방향과 방법이 좋다 해도 결국은 주민들이 동의하고 함께 가는 것이 필요할 텐데요. 사실 우리나라의 오래된 도시들이 갖고 있는 고민은 거의 같습니다. 주민들의 인식도 비슷하고요. 전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거재생은 빈집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오는 것도 필요하지만 비워질 곳은 비워져 숨통을 틔우고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공공의 편의시설이 많아질 때 살기 좋은 동네가 되거든요. 개발시대에는 새집이 들어와 부동산 격차로 돈을 벌게 되고 그 환경이 내 집 값을 높여 주었지만 인구가 줄어드는 시대에서는 전혀 다른 환경이 만들어집니다. 살기 좋은 동네가 부동산 가치도 높아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주민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어떤 환경을 갖고 있는 곳이 좋은 동네일까요.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동네가 아닐까요. 쉴 수 있는 동네.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힐링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자꾸 바깥으로 나가잖아요.(웃음) 동네 안에서 다양한 공공의 서비스가 이루어진다면 자연스럽게 주민들의 삶의 질은 높아지겠죠. - 지역다움은 중요한 가치입니다. 전주는 어떤 도시입니까. 그런 거대담론에는 익숙지 않아서......(웃음) 저는 다움은 한계에서 찾아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전주다움은 전주의 한계에서 오는 것이겠지요. 이를테면 전주가 갖고 있는 역량의 한계, 물리적 한계, 기술의 한계 등등 온갖 한계가 전주를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 한계가 지역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게 하는 힘이거든요. 전주는 날 것이 아직 많습니다. 그 날 것의 가치를 잘 발현했으면 좋겠어요. ■ [조준배 단장은] 현장 지키며 도시의 주거재생을 연구하고 실행해온 전문가 전남 여수가 고향이지만 중학교 3학년 이후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연세대 건축공학과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좋은(?) 건축설계가를 꿈꾸었다. 군대를 다녀오자마자 곧바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 5년제 건축학교인 국립건축파리6대학 건축학과에 입학해 설계 전공으로 학위를 받았다. 학구열은 배움의 과정을 거기서 멈추지 않게 했다. 건축학교에서 공부하면서도 프랑스 국립 파리1대학 건축학과에서 건축이론과 미학을 전공했으며 예술철학전공 박사과정을 함께 거치면서 건축전문 연구학위(C.E.E.A.)를 얻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가방 끈만 길게 만든 과정이었지만 프랑스에서의 10년이 그에게 가져다준 것은 학문적 소양과 지식의 섭렵만이 아니라 도시를 읽고 이해하는 바탕이었다. 2001년에 귀국해서는 당초의 뜻대로 설계사무소에서 일했다. 그즈음 전국적으로 마을만들기가 시작되었다. 자연스럽게 몇 개의 작업에 참여하면서 도시가 무엇인지, 도시의 미래는 또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궁금해졌다. 때마침 국토연구원부설 건축도시공간연구소의 연구위원 채용공고가 났다. 박사과정 수료 자격으로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들과 겨루어(?) 합격했다. 돌이켜보면 운이 닿았던 그때의 선택이 삶의 길을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되었다. 현장과 분리되지 않은 실행 연구를 하면서 월급도 받고 본격적인 도시 공부를 할 수 있었으니 그는 일석이조, 자신에게는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정책연구가 과제였지만 그의 연구 바탕은 늘 현장에 있었다. 덕분에 그가 연구하고 만들었던 도시 정책은 현장에서 실험되고 성과가 되어 다시 보편적인 정책으로 재편되었다. 2010년부터는 영주시 디자인관리단 단장을 맡아 지금은 전국적인 모델이 된 작은 도시 영주를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일을 이끌었다. 도시 안에서도 주민들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일에 남다른 관심을 쏟아온 그는 서울주택공사 재생본부 재생사업기획처장으로 일하면서 오래된 도시의 주거지 재생 모델을 연구하고 실행했다. 짧지 않은 동안의 정책연구, 현장 실행의 경험과 지적 기반은 그를 국내 주거 재생 전문가로 우뚝 서게 했다. 크고 작은 도시의 지역재생을 돕고 이끌고 있는 그를 전주시는 지난해 7월, 주거재생 총괄계획가로 위촉했다. 지금은 유진 도시건축연구소 지역도시연구본부 본부장으로 일하면서 오래된 도시 전주의 가치 있는 주거재생을 위해 현장을 살피고 주민들을 만나며 동네에 딱 맞는 주거 정책을 만들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20.01.09 17:53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70. 실상사 철불의 손

우리의 신체 중 타인과 접촉이 가장 많은 곳은 손이다. 반갑다 악수를 하고, 손짓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손찌검이라는 단어도 있지만, 힘에 부칠 때 따스하게 잡아주는 손이야말로 그 자체가 위로이고 위안이다. 손을 말하는 특별한 명칭 중에는 부처님의 손을 뜻하는 수인(手印)이 있다. 부처님을 형상화한 불상을 살펴보면 다양한 손 모양을 볼 수 있는데, 어떤 의미를 지닌 불상인지 그 존명(尊名)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바로 그 수인이다. 수인은 고대인도의 제사의례에서 손동작인 무드라(mudra)에서 깨달음과 덕행 등을 연꽃이 피어나는 모습으로 표현한 데서 유래가 되었다고도 한다. 각각의 손 모양에 따라 의미가 부여되다 보니 여러 종류의 불상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수인이 된 것이다. 이렇듯 불상에서 손이 지닌 의미가 깊은데 남원 실상사 철불의 손은 본래의 철로 된 손이 아닌 나무로 만든 손이 끼워져 있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수인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실상사는 당나라에서 유학한 홍척스님이 828년 신라 흥덕왕 대에 창건한 우리나라 최초의 선종사찰이다. 지리산을 지척에 두고 산이 아닌 완만한 들에 자리한 것이 특별하고, 수도 경주가 아닌 남원에 대형 철불이 조성된 것도 획기적이다. 실상사는 실상사가 번창하면 나라도 융성하고 실상사가 쇠락하면 국운도 쇠퇴한다는 말에 따라 왕실의 후광을 받고 번창한 사찰이다. 액운을 막고 모자란 기운을 보충하는 의미로 설립하는 사찰을 비보사찰(裨補寺刹)이라 하는데, 실상사야말로 신라 말 기울어가던 국운을 바로 세우려던 염원으로 창건된 비보사찰이자 호국사찰이다. 풍수지리에서 실상사가 자리 잡은 터는 지리산과 덕유산의 기운이 모이는 곳으로 천왕봉을 마주하는 곳에 자리하여 지리산을 넘어 일본이 영산이라 여기는 후지산으로 대륙의 정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 형세로 알려져 있다. 그런 까닭에 실상사는 이후 왜적의 표적이 되고 세조 때 큰불이 나 폐허가 되는 굴곡을 겪었지만, 억불정책이 만연했던 조선 때에도 임금인 숙종의 지원으로 중창된 기록이 남아있다. 실상사 비보의 흔적은 보광전에 있는 종에도 있다.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에 일본 지도를 새겨 종을 칠 때마다 일본 지도를 후려쳐 일본 땅의 기운을 교란시키는 의도로 1694년에 만들었다 한다. 일제가 우리 국토 곳곳에 쇠말뚝을 막아 민족의 정기를 말살시키려 했다면, 실상사는 쇠로 만든 종과 철불 등으로 일본의 지운을 차단했던 것이다. 그 특별한 의미를 지닌 실상사 철불은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이란 정식명칭을 지닌 보물 제41호로 높이 269cm 최대 너비 203cm인 대형 불상이다. 840년에서 860년 사이로 추정되는 시기 실상사 2대 조사인 수철스님 때 엄청난 양인 철 4천근으로 조성한 철불이다. 신라 말 초대형 철불이 남원에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왕실의 후원을 받은 이유도 있었지만, 대규모의 제철산지가 있는 남원 지역의 특성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인근에 철이 많이 나고 지리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만수천을 끼고 있어 물과 땔감이 풍부해 철을 조달하고 제련하기 수월했으며, 실상사가 번창하면서 조성된 것으로 보아 대형 철불을 제작하는데 필요한 인력의 수급도 원활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상사 철불은 넓적한 얼굴에 육계라 불리는 상투 모양의 머리를 하고 있다. 세상사를 비춘다는 눈썹 사이의 흰 점인 백호가 뚜렷하고, 옆으로 긴 두 눈에 비해 코와 인중이 짧고 작고 두툼한 입술이 또렷하다. 목에는 가로의 세 줄기 주름인 삼도(三道)가 보이고 넓은 어깨부터 내려오는 법의(法衣)의 주름이 유려하게 흐른다. 부처님의 세계를 의미하는 오른손은 올려 있고 중생계를 뜻하는 왼손은 내려져 있는데, 세월의 풍파 속에서 훼손된 그 손뿐 만이 아니라 등과 다리의 일부가 나무로 되어있다. 약사전에 모셔져 약사불로 알려졌지만, 원래 봉안처도 건물지의 규모와 철정이 가장 많이 발견된 위치로 보아 현재의 보광전 아래 금당지로 추정된다. 1987년 철불의 해체 수리과정에서 철제의 손과 『묘법연화경』을 비롯한 다수의 부장품이 철불 몸통에서 발견되었다. 복장에서 발견된 수인이 두 손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아미타불의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이라 아미타불일 수 있고, 시기적으로 중창과정에서 수인이 교체된 노사나불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어찌 되었건, 발견된 철불의 손은 현재 철불이 모셔진 약사전 안에 연꽃과 함께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철물로 손을 복원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철불이니 철로 된 손이라 맞겠지요. 그런데 기술적인 어려움도 있지만 복원한다는 게 자칫 훼손이 될 수도 있어서 쉽지 않은 일이예요. 하지만, 부처님 손이 나무로 되어있으니 손을 잡으면 철손보다 나무손이 더 따스할 것 같지 않나요.라며 이야기하는 실상사 수지행자의 얼굴이 환하다. 또한, 절망의 나날을 보내는 사람들이 이곳에 와 위로를 받고 희망을 찾는다는 말을 전했다. 불상의 손이 처음 모습으로 복원 되지 못했더라도 그 여러 시간의 흔적이 더해 특별한 의미를 건네며 남겨져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철불과 한 몸을 이룬 나무의 손은 이미 우리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위안의 손이 되었으니 말이다. 새해에 다가오는 액을 막고, 복을 받으며 운을 트이게 하려거든 남원 산내면에 자리한 실상사를 찾아 철불을 만나는 것도 좋겠다. 그리고 영험한 기운이 서려 있는 지리산의 정기도 한껏 품고 한 해를 살아갈 지혜와 힘을 얻어 보자.

  • 기획
  • 기고
  • 2020.01.09 16:05
기획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