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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69. 드루와 전킨 선교사가 남긴 유산

일제강점기 망국의 설움에 젖은 선조들의 손을 잡아준 벽안의 사람들이 있다. 그중, 미국인 드루(A, D, Drew, 한국이름 유대모, 1859-1924년)와 전킨(W. M. Junkin, 한국이름 전위렴, 1865-1908년)은 선교사로 들어와 의료와 교육 활동으로 지역의 근대화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군산은 조선시대에도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으며 뱃길을 이용한 물자수송의 주요 거점이었지만, 1899년 개항하기 전까지는 작은 고을이었다. 당시 외국인들이 한국에 들어온 경로는 주로 배로 닿을 수 있는 곳이었고, 그들이 군산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한 것은 제물포인 인천과 부산에서 뱃길로 들어오기 쉬운 호남의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배 안에서 군산을 처음 바라본 초창기 개척 선교사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땅 이구나라고 감탄을 하며 군산에 상륙하여 호남에서 선교를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1893년부터 선교사 레이놀드를 필두로 하여 군산을 통해 들어온 선교사들은 군산에서 전주로 이어지는 지역을 따라 선교답사를 했다. 당시 선교사들을 통역하며 한국어를 가르친 정해원은 전주 은송리에 26불을 주고 집 두 채를 매입하여 선교사를 맞이하였으며, 장터와 거리에 나가 전도를 하여 호남에서 복음을 전도한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다. 1894년 인천에서 배를 타고 군산에 들어와 선교 활동을 한 드루는 이듬해 합류한 전킨과 함께 본격적으로 선교를 시작했다. 군산과 전주는 그들의 종파인 남장로교 호남선교의 시작지점이었고, 특히 의료와 교육 선교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의 선교활동은 레이놀즈 선교사가 주도하였으며 교육 선교는 전킨이, 의료 선교는 드루가 주관하였다. 그러던 중,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하여 서울로 잠시 돌아갔다가, 1896년 전킨과 드루의 가족이 군산으로 이주하면서 군산 선교부가 정식 개설되었다. 두 선교사 가족은 군산 수덕산 기슭에 초가집 두 채를 얻어 사람들을 선교했으며, 이러한 활동으로 전북과 충남 지역에 많은 교회가 설립되었다. 드루는 미국에서 약학과와 의학부를 졸업한 선교사로, 가난해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다. 기록에 의하면, 드루는 1896년 한 해 동안 2700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약 600건의 간단한 시술을 했다고 한다. 어려운 사람들을 정성을 다해 돌보아주며 선교 활동을 하던 중 남장로교 선교부가 군산에서의 철수를 결정하며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드루의 반대로 오늘날 구암동인 궁멀(거북이 마을, 궁말)로 거처를 옮기며 군산에서의 활동이 이어졌다. 궁멀로 간 드루는 배를 마련하여 고군산과 금강을 따라 김제, 강경, 익산까지 찾아가 전도하면서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다. 그곳에서 궁멀교회와 훗날 일제가 구암병원으로 부르도록 한 야소병원이 시작되었다. 예수의 한자어 야소(耶蘇)를 딴 야소병원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으나 1940년대 문을 닫았고, 구암병원의 이름은 한국인 의사들에 의해 1980년대까지 유지되었다. 내가 누워있으면 조선인이 죽어간다는 말을 하며 무리한 탓에 몸이 쇠약해진 드루는 미국 선교부의 명에 따라 치료차 1901년 귀국했으나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드루가 펼친 사랑은 이 땅에 오롯이 남아있다. 전킨은 판사의 아들이자 신학을 전공한 미국인으로 부인 메리 전킨(한국명 전마리아)과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 부부선교사는 군산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 어린 세 아들을 풍토병으로 잃는 아픔 속에서도 영명학교를 세우며 지역에 커다란 유산을 남겼다. 교육을 통한 선교는 메리 전킨과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자택과 예배당에서 성경과 일반 교과를 가르치면서 시작됐다. 학생이 늘어나자 1902년 선교부 옆에 작은 집을 짓고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들을 나누어 가르쳤다. 그것이 1919년 3월 5일 호남 최초로 3.1 독립운동을 시작한 영명학교의 시작이었다. 메리 전킨을 중심으로 시작된 영명여학교는 멜볼딘(메리볼딘)여학교로 불렸다. 멜볼딘여학교은 3.5 만세운동이후 일제의 탄압 속에서 신사참배에 대한 강요가 심해지자 1937년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폐교했다가 이후 영광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이 된다. 전킨은 남학교 교장에 취임했고, 영명남학교는 1909년 안락소학교와 영명중학교로 확대되었다가 같은 이유로 폐교되었지만, 해방 후 복교되어 군산제일고등학교가 되었다. 과로로 쇠약해진 전킨도 선교부로부터 전주로 사역지를 옮기고, 20리 반경 안에서만 활동하도록 명령받았다. 하지만 전주서문교회를 맡고, 고아원을 설립하는 등 강행군을 펼치다가, 1907년 성탄절에 폐렴이 걸려 1908년 1월 2일 향년 43세로 별세했다. 이듬해 고인을 기리는 뜻에서 전주여학교는 그의 이름을 따 기전여중학교로 개명하고 메리 전킨이 초대 교장을 역임했다. 전킨의 유족은 전주서문교회에 종을 기증하였고 종탑 안에 종은 그의 행적과 더불어 지금도 남아 큰 울림을 건네고 있다. 두 선교사를 기리기 위해 그들의 첫 도착지인 옛 군산세관 앞과 활동지였던 수덕산에는 기념비와 작은 공간이 세워졌고, 전킨의 유언에 따라 구암동산에 묻혔다가 전주선교사묘역에 잠든 전킨의 묘비 아래에는 풍토병으로 세상을 떠난 세 아들의 작은 묘석도 자리 잡고 있다. 연말이 되니 우리 지역에서 숭고한 삶을 산 그들의 발자취에 마음이 닿는다. 그 선한 영향을 이어 추운 겨울 소외된 이웃들에게 따스한 손길을 나눠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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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26 15:49

[뚜벅뚜벅 전북여행] 소풍 다니던 옛길, 완주 운문골 마실길 “잣나무와 편백 향기를 맡으며 걷는 둘레길”

미처 맞이할 준비도 못 했는데 첫눈이 뿌리고 지나갔습니다. 이미 겨울이 당도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나 봅니다. 그래서 그런지 햇볕은 따스한데 바람 끝에는 날이 바짝 섰습니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제법 차갑게 느껴집니다. 바람을 이기는 방법은 걷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완주 운문골 둘레길을 다녀왔습니다. 초겨울의 분위기를 느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운문골 마실길은 경천면에 있는 경천저수지와 고산면에 있는 대아저수지를 연결하는 둘레길입니다. 출발은 완주군 경천면 소재지에 있는 생활체육공원에서 했습니다. 생활체육공원은 주민들이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생활체육공원을 뒤로하고 서쪽 구룡교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구룡교는 구룡천을 가로질러 놓여있습니다. 구룡교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구룡천은 시리도록 맑고 푸릅니다. 완주에서 시작된 맑은 물은 만경강의 마중물이 되어 도도하게 흐르는 강을 이룹니다. 운문골 마실길은 시작과 끝 부분에 물길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두 물길은 고산면에서 만나 만경강의 세를 키우게 됩니다. 다리를 건너면 왼쪽에는 경천애인 농촌사랑학교(농촌인성학교)가 있습니다. 이곳은 경천면 사람들의 정성이 담긴 체험장입니다. 경천애인에서는 학교, 회사, 지자체, 개인 등을 대상으로 체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농사철에는 농산물 수확 체험을 할 수 있고, 상시 체험이 가능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답니다. 이곳에서는 숙박과 식사를 할 수 있고 강당 시설도 갖추고 있어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경천애인 농촌사랑학교 맞은편에 있는 산 아래에는 안산이라는 표지판이 있는데요. 안산(案山)이라는 것은 집이나 묘지의 앞에 있는 작은 산을 말합니다. 집이나 묘지의 뒤를 감싸고 있는 산이 주산(主山)이고요. 즉 이 산은 경천면의 안산을 의미합니다. 안산의 이름은 옥녀봉인데요. 개울을 건너 정상에 오를 수 있습니다. 정상에 서면 경천면 소재지는 물론 경천저수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또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봉수대의 남은 형태를 보면 조선시대 봉수대가 아닌 가야시대 봉수대를 닮았습니다. 경천애인 농촌사랑학교를 지나 마을길로 들어서면 운문골 마실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둘레길이 지나는 마을에는 집들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습니다. 조용하기 그지없습니다. 경천면은 전통적으로 대추가 유명한 지역인데 요즘은 감 재배가 점차 늘어가고 있습니다. 길가에 늘어선 감나무는 수확을 끝낸 상태라 텅 빈 모습입니다.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목련 한 그루 풍성한 모습으로 벌써 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마을 끝 부분에 에덴힐펜션이 있습니다. 물놀이장과 캠핑장을 갖춘 곳입니다. 이곳부터 숲길이 시작됩니다. 오르막 길가에는 편백 가로수가 심겨 있습니다. 아직은 키가 작은 나무들이지만 머지않아 멋진 그늘을 만들어줄 것입니다. 경사로를 조금 오르면 사방댐이 나옵니다. 옥빛 색깔의 물 위에 드리워진 반영이 예쁩니다. 사방댐을 지나면서 계곡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에 귀가 즐겁습니다. 사방댐 위쪽 계곡 옆에는 지난번 왔을 때 없었던 집이 한 채 들어섰네요. 그 앞산에는 특별한 바위가 보입니다. 마을 주민 이야기로는 평소에는 물이 보이지 않지만, 비가 오면 바위 위에서 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려 장관을 이룬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낙수 바위라 부릅니다. 예전에는 바위 위에 절이 있었는데 불타 없어져 지금은 볼 수 없습니다. 어느 지점에서 시멘트 길이 흙길로 바뀝니다. 이곳은 길가에 심은 편백도 제법 키가 크네요. 운문골 마실길은 임도를 이용해 만든 길이라서 편하게 걸을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차 한 대 정도가 자유롭게 다닐 정도 넓은 길이라서 동행한 사람들과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길입니다. 마을 어른들 얘기를 들어보면 어른들이 어릴 적에는 이 길을 소로(小路)길이라고 불렀답니다. 사람들이 걸어서 오갔던 좁은 오솔길이었습니다. 걸어서 대아저수지가 있는 곳으로 소풍을 갔고 길이었고, 고산면에 일을 보러 다녔던 지름길이었습니다. 산에 나무하러 매일 오르내렸던 희로애락을 간직한 길이었습니다. 그런 길이 이제는 넓어지고 운동을 하기 위해 다니는 둘레길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왼쪽에 집 한 채가 보입니다. 예전에도 보았던 아담한 집입니다. 집 옆에는 편백이 줄지어 자라고 있습니다. 편백를 키우고 있나 봅니다. 그 집을 지나면 길가에 우뚝 선 키가 큰 잣나무가 맞이합니다. 잣나무 숲 근처에 왔음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유난히 큰 잣나무 앞에서 왼쪽 숲길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잣나무 숲을 지나 편백 숲으로 돌아 나오는 경천 편백숲 길입니다. 운문골 마실길과 위쪽에서 다시 만납니다. 변화를 주고 싶다면 운문골 마실길에서 잠시 벗어나 경천 편백숲 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입구에 있는 잣나무 숲에는 별도의 시설물은 없습니다. 잣나무 숲길을 걷는다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숲길은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지 않아 어느 구간은 조금 불편함도 있습니다. 잣나무 숲 짧은 구간을 지나면 참나무류가 군락을 이루는 지역을 지납니다. 이미 나무들은 잎을 떨구고 겨울 채비를 마쳤습니다. 길 위에는 나뭇잎들이 쌓여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저마다 소리로 연주를 합니다. 숲에서만 들을 수 있는 자연의 소리입니다. 길은 거의 등산로 수준에 가깝습니다. 낮은 고개를 넘어야 편백 숲으로 갈 수 있습니다. 돌계단 길도 지나고 나무계단 길도 지납니다. 산 고개에 오르면 전체 경천 편백숲 길의 절반 정도 왔습니다.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입니다. 내리막길은 미끄러우므로 더 조심스럽습니다. 조금 내려가면 편백 숲이 보입니다. 길도 편안해졌습니다. 마침 벌목작업을 하고 있어 부분적으로 방해를 받기는 했지만 걷기에는 무리가 없었습니다. 편백숲을 지나면서 기분이 더 상쾌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굳이 피톤치드를 거론하지 않아도 몸에서 먼저 반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편백숲 아래에는 군데군데 의자가 준비되어 있어 편하게 쉴 수 있도록 했습니다. 햇빛이 잘 드는 자리에 앉아 뜨거운 차를 한 잔 마시며 잠시 생각을 정리해 봅니다. 편백 숲 속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지는 느낌입니다. 잣나무 숲 구간은 걸으며 힐링을 하는 구간이라면 편백숲 공간은 잠시 쉬면서 마음의 위로를 받는 곳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편백숲을 나와 다시 운문골 둘레길로 들어섰습니다. 완만했던 경사가 점점 더 심해집니다. 고개가 가까워져서 그런가 봅니다. 고개 바로 아래에서 왼쪽으로 봉수대산으로 가는 길이 갈라집니다. 봉수대산도 산 이름으로 보아 봉수대가 있던 산입니다. 고개를 지나면서 길은 다시 완만한 내리막길로 바뀌었습니다. 멀리 대아저수지 앞에 있는 운암산이 보입니다. 길 위에는 낙엽이 수북하게 쌓였습니다. 반대편과 비교하면 낙엽수가 많아 비교될 정도로 낙엽이 많습니다, 이 시기의 운문골 마실길은 낙엽을 밟으며 초겨울의 정취를 느끼며 걷는 길입니다. 내리막길을 몇 구비 돌아 내려가면 운암산이 가까이 보입니다. 목적지에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의미입니다. 운암산 위에는 흰색으로 보이는 수조가 있는데요. 진안 용담댐에서 22km 정도 길이의 도수로 압력을 조정해주는 역할을 하는 수조입니다. 수조가 있는 곳에서 물이 낙하하면서 수력 발전을 할 때 발생하는 압력을 조정합니다. 용담댐에서 도수로를 통해 공급된 물이 발전하고 나면 고산정수장에서 정수해서 광역 상수도로 활용됩니다. 조금 더 내려가면 고산면 소향리 운문계곡입니다. 둘레길 이름은 이곳 운문골에서 왔습니다. 지금은 계곡 위쪽에 소향저수지가 생기면서 계곡이 짧아졌지만 그래도 여름에는 피서지로 인기가 높은 곳입니다. 운문골 마실길의 종점인 전통문화센터까지 가기 위해서는 도로를 따라 조금 더 가야 합니다. 계곡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 걷는 길입니다. 계곡 풍경도 보고, 마을 풍경을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마을을 빠져나오면 길 건너에 전통문화센터가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한옥 숙박체험과 민속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전통문화센터 뒤쪽으로 보이는 댐이 대아저수지입니다. 도로를 따라 걸어 댐이 있는 곳으로 가면 대아저수지 풍경이 보입니다. 전통문화센터 바로 옆에는 실내놀이 체험장인 놀토피아가 있습니다. 운문골 마실길은 임도를 따라 걷는 길이라서 편안하게 걷는 길이면서 중간에 가벼운 산행을 즐길 수 있는 잣나무, 편백 숲길을 추가로 선택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둘레길입니다. 두 개의 둘레길이 접하고 있어 낙엽이 진 숲길과 진한 녹음으로 우거진 숲길을 함께 즐겨보았습니다. 서로 비교되는 길을 걸으며 계절의 변화를 또렷이 느낀 시간이었습니다. /글사진 = 김왕중(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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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23 18:17

[카드뉴스] 펫코노미 시장이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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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재용
  • 2019.12.23 17:50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효행록에 담긴 지소(紙所)의 흔적과 효자 이야기

이달 10일 전주시민 기록관이 개관하면서 제7회 전주 기록물 수집 공모전에 출품된 작품들을 보이는 수장고에 전시하고 있다. 이 출품작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김종선 씨가 출품한 선조 효행록(1848년)이다. 이 효행록은 그림과 문서로 기록되어 있는데, 앞부분은 효행 사실을 그림으로 그려 놓았고 더불어 전주의 지소(紙所)가 표시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또한 선조의 선영 가는 길을 서울 서대문부터 경기도 고양(일산)까지 지명으로 표시하였고, 뒷부분은 효행 내용을 4언절구로 기록하여 사료적 가치가 높다. △전주천에서 장어를 잡아 위독한 아버지를 살린 효자이야기 효행도에 담긴 내용을 분석해보면 찬바람이 매서운 겨울, 승암산 아래 전주천을 따라 장어를 잡기 위해 오르내리는 효자 김수철이 보인다. 승암산 자락을 타고 조금 올라간 곳에 붉은 글씨로紙所가 찍혀있고, 인근에 초가집 3채와 기와집 4채가 보인다. 고덕산 아래 남고진 모습이 아주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다. 그렇다면 효행도에서 왜 지소를 소재로 그림을 그렸냐 하는 점이 궁금해진다. 효자 김수철은 승암산 아래 좁은 목(병암)에서 아버지의 병을 치료할 장어를 잡게 된다. 이때 지소와 관련 있는 인물들이 우연히 지나가다 이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즉 그림을 보면 지소에서 근무하는 아이와 승려, 부남면 도윤(지금의 면장에 해당), 이렇게 세 사람이 그 광경을 증명이라도 하듯 지켜보고 있다. 또 김수철은 아버지 흥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전주천을 오르내리는데, 3일 후 대성동 지역에서 이 씨 성을 가진 자가 두 마리의 장어를 팔고 있었다. 이 아이는 옷을 걸치지도 않는 것으로 보아 혹 하늘에서 내려온 인물이 아닌가 추정되며 효자 김수철은 거금 1전을 주고 장어를 사서 아버지에게 드린다. 위독한 병에 걸려 당장이라도 돌아가실 수 있는 아버지를 아들이 어렵게 구한 장어로 구완하여 한 달을 더 살게 했다는 내용이다. 이 그림 속에는 남고진 산성과 승암산 그리고 전주의 지소가 기록되어 있어 매우 의미가 있고, 특히 전해오는 전주의 효자이야기 중 장어를 소재로 하는 내용은 이 효행도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전주 지소(紙所)의 흔적을 찾아서 전주 지소(紙所: 전주부에서 종이를 만드는 곳)에서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사람 3명이 모두 그려져 있는데, 지소를 관리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부남면의 도윤(都尹: 현 면장)인 이통원(李通元)과 지소승(紙所僧) 월연(月連) 그리고 지소청직(紙所廳直) 민육월남(閔六月男)이 그려져 있다. 1872년 전주부지도를 보면 부남면에는 지소가 없으며 어은골에는 나타나고 있다. 전주부의 부남면은 향교가 있는 교리를 포함해서 옛 교동사무가 있는 방축리 그리고 지금의 완산동(은송리, 곤지리) 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남원 쪽으로 반석역을 지나 객사동, 죽음리, 은석리, 봉산리 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이런 내용을 근거로 조심스럽게 추정해보면 지소는 부남면에 속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지소로 적합한 자리는 주변에 닥나무가 많아야 하고, 철분이 없는 맑은 물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전북대 소장 전주부지도를 살펴보면 효행도와 마찬가지로 신원(상관면사소)에서 물줄기가 흘러오다 굽어지는 지점에 지소가 있다. 이 지점을 추정해 본다면 여러 정황으로 보아 색장동으로 볼 수 있다. 이 마을에 사는 90세 어르신 이완근씨에게 물어보니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전주천에서 종이를 많이 떴으며, 우리 색장동 마을 앞에서도 종이를 떴다고 하였다. 이 어른이 말하는 곳은 색장동 방앗간 지점으로 예전에는 이곳에 물레방아가 있었고 이후 방앗간으로 변하여 지금은 개조하여 멋진 찻집으로 변했다고 한다. 색장동정미소 뒷 칸을 보니 은석동에서 보를 막아 이곳으로 오는 물줄기가 있어 예전에 이곳이 동네였으며 지소가 있었음을 가능케 한다. 전북대에서 소장한 지도를 보면 상관면 지역에 만마관이 건재하고 있으며 신원(新院:지금의 신리) 바로 밑으로 지소가 표시되어 있다. 지소 있는 바로 왼쪽 산은 승암산으로 지소가 있는 곳은 색장동지역으로 생각되며 차 후 기초조사를 해 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임실과 남원에서 오는 사람들은 색장동의 색장치를 넘어 신원-갓바위-문수골-은행다리를 넘어 서울로 가는 코스이다. 즉 지름길이다. 이 지도가 그려질 당시는 창암 이삼만도 공기골에 살면서 직접 만마관(萬馬關)편액을 써서 붙였다고 전하는데, 아마 이곳을 지나면 매우 운치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색장동에는 반일운동을 했던 이거두리 묘소가 위치하고 있다. △후세에 전하고자 형 김수철의 효행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효행록> 효행도에 나타나는 효자 김해김씨 김수철(金守哲)은 효자동 바우배기에 살았는데, 그의 효행사실을 후세에 묻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동생 김우철이 글을 짓는다. 족보를 보면 김수철은 자가 재수(再守)이고 또 다르게는 인여라 불렀으며 호는 경향정이다. 그는 선흥의 장남으로 신사년 8월 27일 생이다. 그는 향년 47세에 운명하였는데 묘소는 임실군 관촌면 신흥사 부근에 자리하고 있다. 자료를 보면 김수철은 부친이 8년 동안 지병이 있어 백초를 다 시험했지만 1812년(壬申) 겨울에 병의 증세가 점점 악화되고 이질에 걸렸다. 이에 의원은 마땅히 특효약은 장어뿐이라고 하면서 이를 추천하였다. 효자 김수철은 장어를 구하기 위해 계곡을 따라 위아래로 왔다 갔다 했으며, 하천의 연에도 배를 든든히 하고 지켰다. 또 삼일 동안 자면서 하늘에 기도를 했더니 승암산 아래 병암을 지나는데 한 자가 넘는 장어가 눈 위에서 꿈틀거리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장어탕을 끊여 진상하니 이때는 섣달이었다. 그 후 삼일이 지나 또 병암(승암사 부근)을 지나는데 도로변 인가에서 발가벗은 어린아이가 눈 위에 서 있고 손에는 하나의 간지대가 있는데 간지대 끝에 매달려 있는 것이 두 마리 장어였다. 이 장어를 1전을 주고 사서 그 날 탕을 끊여 아버지께 진상을 하니 병세가 점점 차도가 있어 한 달을 더 살게 되었다. 이런 효행을 조정에서 듣고 정려를 내렸고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 후예들에게 보이고자 한다는 내용이다. 김수철의 동생 우철은 1848년(무신) 섣달에 추모하는 마음으로 글을 지어 남겼다. 전주에도 효행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있다. 부모님이 고기가 먹고 싶어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니 떨어졌다는 이야기며, 또 겨울에 수박을 찾아 헤맸다는 수박동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장어를 구하는 효행사실은 기록상으로 볼 때 처음이지 않은가 사료된다. 효행의 중요성이 점점 희박해지는 이 시대에도 귀감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전주의 지소 자리도 복원되기를 희망해 본다. (끝) /김진돈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전라북도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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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19 17:26

[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타다'가 가련하다

타다의 문제를 접하다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는 것을 보고 관점의 차이겠거니 하면서 스스로를 달래보기도 했다. 그러나 관점의 차이가 아니었다. 결국은 무지하기 때문이다. 무지가 어떻게 타다의 문제까지 연결되는가. 우리가 보통 안다고 말할 때의 앎은 어떤 것에 대하여 지식을 갖는 것이라고 하나, 그것으로는 앎을 다 설명하지 못한다. 앎은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 치는 일이다. 앎은 지식이 아니라 오히려 발버둥이다. 이 발버둥은 어디를 향하는가. 아직 이해되지 않은 곳,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을 향한다. 이 발버둥을 통해서 앎은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한다. 즉 미래를 여는 것이다. 미래를 향하는 사람들은 항상 아는 것에 멈추지 않고, 아는 것을 근거로 해서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 친 사람들이다. 아는 자는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 치고, 모르는 자는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주물러 자기 성을 쌓는다. 아는 자는 미래를 열지만, 무지한 자는 멈춰 서서 과거의 것들을 지킨다. 제대로 훈련된 지식인이라면, 미래를 여는 정방향에 서서 발버둥을 친다. 훈련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으면 자기가 쌓은 성 밖으로 감히 나서지 못한다. 성을 나서지 않고 성 밖의 변화에 반응하려는 삶은 힘이 든다. 그런 사람들은 이 힘든 과정을 억지로 견디면서, 그것을 열심히 사는 것으로 포장하거나 심지어는 자신을 헌신하는 자로 각색한다. 어쨌든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에 아는 사람이 있는 나라는 효율적이었고, 거기서 무지가 판을 치면 비효율적이었다. 이치는 복잡하지 않고 간단하다. 효율적인 일이 계속 이어지면 흥하고, 비효율이 계속 이어지면 망한다. 아는 자, 즉 발버둥을 칠 줄 아는 사람들은 어떤 물건을 현상적인 차원에서 감각되는 것, 그것으로만 보지 않는다. 발버둥을 쳐서 감각을 넘어서는 차원으로까지 인식을 확대할 줄 안다. 시간을 돌려 조선 시대로 가보자. 어디선가 조총이 새로 발명되어 조선에까지 들어왔다. 물론 조총도 앎의 발버둥을 칠 줄 아는 누군가가 만들었다. 앎의 발버둥은 발명할 때 한 번만 행사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후로도 사용의 과정에서 계속될 기회가 생긴다. 앎의 발버둥을 치는 사람에게 조총은 보이고 만져지는 현상적 차원의 것이 다가 아니다. 보이고 만져지는 차원을 넘어서서 구조적인 차원까지 이해의 전선을 확장한다. 현상적 이해를 넘어 구조적 이해에 도달한다. 조총 이전의 것이면서 조총에 비견되는 것은 활이다. 조총은 활보다 사거리가 멀고 파괴력이 크다는 사실에만 머물지 않는다. 기능적으로는 그렇게 보이지만, 조총을 주력으로 구성할 전투의 양식이나 대오의 형성이나 훈련의 방식 등은 활이 구성하는 그것들과는 전혀 달라진다. 총체적으로 전쟁의 구조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럼 그 구조는 어떻게 해서 달라지는가. 바로 재료가 달라지고, 제조법이 달라지고, 작동 메커니즘이 달라지면서 다른 구조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조총은 활과 다른 구조로 확장되면서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든다. 이것이 구조적인 차원에서 이해한다는 뜻이다. 보이고 만져지는 현상적 차원에 대해서 앎의 발버둥이 쳐져야만 아직 알려지지 않은 구조의 차원으로 넘어갈 수 있다. 무지하면, 이런 인식 차원의 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보이고 만져지는 단계의 현상적 인식에 갇혀 있으면 조총과 활의 차이는 크지 않다. 활에 화살을 걸어 쏠 준비를 하는 것에 익숙해 있는 사람에게는 조총에 화약을 쑤셔 넣어 쏠 준비를 하는 것이 오히려 번거롭게 보일 뿐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조총이 무슨 대단한 신무기냐? 별것도 아니면서 수선스럽기만 하다. 차라리 활이 더 편하다. 조선 시대에도 조총이 들어온 초기에 이런 흐름이 있었다. 이것이 현상적 인식에 머무르는 무지한 방식이다. 구조에 대한 인식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현상적인 단계의 기능에 파묻힌 인식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기능만 보일 뿐이다. 기능만 보면 기능적인 차이로만 그 혁신의 가치를 매기고, 혁신을 별 것 아닌 것으로 과소평가한다. 과소평가하면, 적응이 늦고, 적응이 늦으면 뒤처진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보면 활과 조총은 전혀 다른 물건이다. 무엇인가를 발사하여 사람을 죽이는 기능은 같지만, 각각이 펼치는 구조적인 변화와 맥락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기능적인 차이를 넘어서서 구조와 맥락의 차이를 아는 정도가 되면, 조총에 적응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장전하기에 들어가는 시간을 전술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고안할 것이다. 즉 열을 지어 서서 앞줄에서 발사를 마치면, 그 시간에 화약을 채우던 뒷 줄에서 이어서 사격을 하는 방식으로 전혀 다른 전투 대오를 개발하는 것이다. 전장의 또 다른 세계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조총과 활을 너무 긴 시간 같은 차원에 놓고 비교하며 물고 늘어지다가는 전장의 새로운 세계를 열 수 없다. 조총과 활이 기능적으로는 유사하지만, 구조적으로 전혀 다른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다. 미래를 여는 자와 과거에 닫힌 자 사이의 차이다. 타다와 택시는 기능적으로 보면 유사하게 보일 수도 있다. 구조적으로 보면 전혀 다른 두 가지이다. 작동 시스템이 다르고 운영 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조총과 활의 차이와 유사하다. 타다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들이다. 택시보다 별로 혁신적이지도 않다. 조총이 새로 등장했을 때, 활에 익숙한 사람들이 조총에 대해서 하는 말과 똑같다. 타다는 택시가 아니다. 자동차는 마차가 아니고, 택시는 인력거가 아닌 것과 같다. 심각한 일은 타다를 허용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단순히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우리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새로 등장한 것을 환영하기보다는 이미 있는 것들을 지키는 일에 더 익숙하도록 훈련되어 있고, 미래를 여는 일보다는 과거를 지키는 일에 더 익숙하도록 훈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끔찍한 올가미나 덫에 갇힌 형국이다. 우리는 새로운 것들을 환영하거나 미래를 여는 시도를 하는 것보다 이미 있는 것을 보호하고 과거를 따지는 일에 몰두해야 진실한 삶을 사는 것 같은 생각이 들도록 훈련되어 있다. 이는 질문보다는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것과 연관이 있다. 대답은 이미 있는 이론과 지식을 그대로 담아 두었다가 누가 요구할 때 그대로 뱉어내는 일이다. 이때 승부는 누가 더 빨리 뱉어내는가, 누가 더 많이 뱉어내는가, 누가 더 원래 모습 그대로 뱉어내는가에 좌우된다. 대답에 빠지면, 원래 모습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원래 모습은 시제로 과거에 해당한다. 그래서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들이 채우는 사회는 모든 문제가 과거 논쟁으로 빠지고, 과거를 파헤치는 일에 빠져 있어야 진실한 삶을 사는 느낌이 들게 되어있다. 질문은 궁금증과 호기심이 튀어나오는 일인데, 이 궁금증과 호기심은 본질적으로 아직 해석되지 않은 세계 즉 미래를 향한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질문하는 힘은 매우 약하고 대답하는 능력은 매우 강하다. 이 말의 의미는 간단하다. 우리에게는 과거에 갇히기 쉬운 경향이 있고, 미래를 열기에는 매우 어려운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 갇힌다는 뜻이 제도적으로는 규제에 갇히는 것으로 나타날 뿐이다. 새로 등장하는 것에 적극적이었던 때가 있었다. 산업화 시기였다. 산업화를 지내고 나서 민주화를 거치며 지금까지는 다시 과거에 갇혀버렸다. 과거에 갇힌 관료들은 규제를 앞세운다. 모든 새로움은 규제에 갇혀 싹을 틔우지 못하고 고사한다. 드론이 그랬다. 규제를 앞세운 한국의 드론 산업은 처음에는 기술력이 중국보다 앞섰지만, 이제는 존재감이 없어졌고, 규제를 적용하기 전에 먼저 허용을 선택한 중국의 드론 산업은 후발주자로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제패하였다. 여기서 발생했어야 할 이익을 놓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전적으로 국가의 책임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배운 바가 없다. 대통령이 나서서 아무리 인공지능 국가전략을 발표해도 인공지능의 토대인 데이터를 모으는 일이 규제에 갇혀 순조롭지 않다면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크다. 데이터를 모으지 못하면 4차 산업혁명은 없다. 당연한 일 아닌가. 생명공학은 어떤가. 수많은 규제에 갇혀 새로운 시도는 아예 엄두를 못 낸다. 새로운 기술력으로 가능해진 원격의료도 불가능하다. 이 혁명의 시기에 혁명의 흐름에 맞춰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4차 산업 혁명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가 공유 경제이다. 타다의 문제는 단순히 타다에 한정되지 않는다. 새로운 형태의 공유 경제를 경험하느냐 못하느냐와 직결된다. 이런 경험의 정도가 점점 쌓이면서 4차 산업 혁명의 적응 능력을 기르는 데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타다의 금지는 이 적응 능력의 축적을 금지하는 것과 같다. 2년 전에 워싱턴에 갈 일이 있었다. 가기 전부터 나는 우버를 타볼 계획을 세웠다. 우버을 타면서 전혀 새로운 삶의 방식 속으로 진입한 느낌을 받았다. 그 편리함도 매우 만족스러웠지만, 소비자의 선택이 매우 강한 주도권을 행사하며 작동되는 매우 특별한 느낌도 받았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타다 논쟁에서 가장 우스운 일은 소비자(이용자)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왜 소비자에게는 묻지 않는가. 고정된 제도의 틀만 다루다 보니,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소비자를 고려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진실은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소비자에게서 확인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경험과 이용의 주체는 소비자이다. 나중에는 결국 소비자가 결정한다. 문명의 흐름에 맞는 새 일을 시도하는 일 자체도 어려운데, 과거에 갇힌 규제로 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들을 더 어렵게 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의 국가는 철저하게 과거에 갇혔다. 격려는 못 할망정 방해는 말아야 한다. 다른 나라들과 경쟁해야 할 사람들을 규제와 싸우게 하여 진을 빼는 일은 말아야 한다. 새로운 일을 꿈꾸는 사람이 허가권을 가진 관청을 떠올리기만 해도 우선 가슴이 답답해진다면, 이는 발전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최대의 격려는 허용하는 일이다. 국가의 발전은 규제에 있지 않고 허용에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미래는 규제할 수 없다』는 구태언의 책 제목이 절규처럼 들려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국가를 관리하는 관료들이나 정치인들은 한 번 읽어봤으면 하는 시 한 토막을 적는다. 얼마 전에 새로 번지가 생긴 땅에/한 채의 집을 지은 나는/세 식구의 가장으로서/나의 하늘과/별과/구름과/시에게 이르노니/너희 마음대로/떴다 지고/흐르다 멈추고/왔다 가거라!(이창기 즐거운 소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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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17 20:06

방윤혁 한국탄소융합기술원장 “실용화 기술 개발해 기업 돕겠다”

한국탄소융합기술원은 신산업 창출에 기여할 목적으로 2003년 설립된 국내 유일 탄소전문 연구기관이다. 국내외 협력 네트워크를 통한 탄소융복합 소재부품 기술 개발과 탄소산업 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기업역량강화 지원을 한다. 현재 일상생활에서 탄소섬유를 사용하는 제품이 많아지고 있다. 골프채와 낚싯대 같은 스포츠용품을 비롯해 탄소발열벤치 등 탄소제품은 실생활에서부터 항공우주 분야까지 응용분야가 무궁무진하다. 무한한 미래 가치가 예상되는 탄소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한 도내 핵심기지인 한국탄소융합기술원의 방윤혁 원장을 만났다. 다음은 방 원장과의 일문일답. -원장 취임 1년 반 째를 맞았습니다. 그동안 활동하며 느낀 소감이 있다면. 지난해 7월까지 효성에서 탄소산업 사업본부장을 했다. 전주는 2007년부터 인연을 맺었다. 10여 년 동안 지역과 함께 탄소산업 생태계 구축을 위해 노력했다. 30년 가량 기업에서 연구를 했고, 1년 반 정도 공공기관장으로 생활했다. 기업에서는 철저한 이윤을 추구하는 효율성이 강조되지만 공공기관은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는 공공성이 강조된다. (탄소기술원이) 아직 많이 부족하다. 내부 역량을 높여 산업 생태계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탄소산업과 인연을 맺은 계기가 궁금합니다. 부산대학교 학사, 석사, 박사 과정에서 섬유공학을 전공했어요. 박사논문 주제가 탄소섬유용 PAN계 프리커서의 열처리에 관한 연구였습니다. 한일합섬에서 주임연구원으로 재직하며 섬유연구개발을 시작했고, 한화케미컬을 거쳐 효성에서 탄소섬유 관련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2007년 효성과 한국탄소융합기술원이 공동으로 개발한 탄소섬유(탄섬)을 국내 최초이자 세계 3번째로 출시하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전임 원장 낙마 뒤 어수선한 조직을 꾸려왔는데, 조직을 다독이기 위해 어려웠던 점이나 강조한 점이 있었다면. 원장 취임 직후 핵심가치로 고객지향, 소통과 협력, 공정과 투명을 강조했습니다. 내부 역량강화를 경영방침으로 운영하고 있어요. 투명한 인사구매 시스템 도입, 경영시스템 체계화와 고도화, 직무 중심 조직문화 정착, 직급 단순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현재 탄소기술원이 가장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일을 소개해주십시오. 탄소라는 산업 자체가 아직 생태계 초기단계입니다. 전북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산업 자체가 취약한 데, 산업이 취약하다는 것은 기업이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 전북에 하나 있는 효성섬유 공장을 만드는데 13년이 걸렸어요. 산업이 발전하기 위해 수요가 있어야 합니다. 소재 산업은 국제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앞으로 탄소기술원이 해야 할 일은 국내외 수요처를 발굴하고 기업에 기술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수요 확대를 위한 실용화 기술을 개발하고, 기술을 필요로 하는 기업에게 이전해 신규 기업이 탄생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탄소산업 경쟁이 치열합니다. 탄소기술원이 나아갈 방향이라면. 설립 근거에 나오듯 탄소기술원은 기술원의 연구역량과 경영역량을 통하여 지역 및 국가 산업의 고도화와 신산업 창출에 기여하기 위해 설립됐습니다. 이를 위해 산업계 관계자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실용화 연구와 기업지원에 중점을 둬야 합니다. 이때 조직은 직무 중심으로 구성원 간 소통하고 협력해야 하고, 의사결정은 시스템에 맞춰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뤄져야 합니다. 글로벌 트랜드 반영과 정부 산업 육성 정책을 바탕으로 기업에서 원하는 실용화 기술을 확보할 예정입니다. -탄소산업이 일반인에게는 어렵게 느껴지는 데요. 현재 일상 생활 속 탄소섬유를 사용하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관심을 기울이면 눈에 보이는 탄소 소재를 활용한 제품이 많습니다. 전북도민은 겨울에 따뜻하게 버스를 기다릴 수 있는 탄소발열벤치가 다수 버스정류장에 설치돼 있습니다. -탄소기술원 조직 비대해지면서 국가기관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의견 많습니다. 탄소법 통과가 우선적으로 진행돼야 합니다. 꼭 통과가 되길 바라며, 탄소법이 통과된 이후 기술원의 역할이 주어진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얼마 전 큰 상을 수상했는데 어떤 내용인가요. 지난 10일 서울에서 열린 벤처기업인의 밤 행사에서 창업기업들 성공적 정착과 성장을 위해 노력한 공을 인정받아 중소벤처기업부장관상을 수상했습니다. 기술원은 현재 예비창업인과 창업 3~7년차 창업기업들 지원에 힘쓰고 있고, 앞으로도 창업기업의 꾸준한 성장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산업 생태계를 만들고 키우기 위해서는 open innovation으로 산학연이 서로 힘을 합쳐 노력해야 합니다. 인재가 있는 곳으로 산업이 형성되기 때문에 지역에 우수한 전문 인재를 확보하고 육성하는 인재경영에 노력하고자 합니다. 또 탄소산업은 융복합산업 한 부분으로 이 산업의 파이를 키우고 확대시킬 때 성장 가능성이 높아짐으로 이를 위한 노력도 다할 것입니다. △방윤혁 한국탄소융합기술원장은 지난해 6월 취임한 방윤혁(55) 한국탄소융합기술원장은 탄소섬유를 전공한 박사 출신으로 논문 45편, 탄소관련 특허 44건을 등록했다. 부산 출신으로 부산남고를 졸업하고 부산대에서 섬유공학 학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일합섬 섬유연구개발 연구원으로 산업계에 들어선 뒤 부산대 교수, 한화케미컬 연구원, 효성 탄소섬유 전주공장장, 효성 탄소재료 사업본부장 등을 지냈다. 국내 탄소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미래창조과학부장관 표창, 산업자원부장관 표창, 대통령 표창, 대한민국 기술대상 국무총리상, 전북도지사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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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인
  • 2019.12.15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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