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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들어 대표적인 공해가운데 하나가 소음(騷音)이다. 소음은 한마디로 사람이 일상적인 상태에서 귀로 들어서 시끄럽다고 느껴지는 소리를 말한다.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들이 하루종일 내쏟는 엔진·경적소리, 공사장이나 공장같은데서 들리는 기계소리, 철도변에서 열차가 통과할때 내는 소리등이 이에 해당한다.그 뿐이 아니다. 판촉행사를 한답시고 대형 스피커를 요란하게 틀어대는 업소, 리어카나 트럭에 확성기를 달고 아파트단지를 누비는 잡상인,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려대는 휴대폰소리도 모두 이 공해에 속한다. 여기에다 게릴라식으로 출몰하면서 대로변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종교단체의 확성기 공해는 짜증스럽다못해 울화통이 치밀게까지 한다.소음이 사람의 생리현상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지대하다. 가령 90데시빌(dB)정도의 소음은 모세혈관에 이상을 가져와 심장의 혈액 박출량(博出量)을 절반으로 줄이고 대형버스의 경적소리(1백데시빌)는 청력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입힌다고 한다. 1백30데시빌 이상에 이르면 귀뿐만 아니라 뇌나 순환기등 여러 신체장기에 독소가 되어 건강에 이상을 초래할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대화할때 큰음성이 65데시빌이고 타자기나 전화벨소리가 70데시빌임으로 비교해보면 소음의 정도를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최근 전주지방환경관리청이 전주지역 환경소음을 측정한 결과 일반 주거지역(55dB)은 물론 상업지역의 소음도가 기준치를 모두 초과한것으로 나타났다한다. 전북대병원과 송천초등학교의 경우 환자치료와 학생수업에 지장을 받을 정도이고 대부분 아파트와 주거지역등에서도 밤낮을 가리지 않는 소음공해로 주민들이 스트레스성 소화불량, 수면장애등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미국이나 유럽등 선진국에서는 소음에 대한 규제가 엄중하다. 기준을 초과하면 가차없이 벌금을 물리고 심지어 개짓는 소리까지 단속대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기나 수질오염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소음은 ‘짜증(?)을 내는 정도’에서 용케도 참아 낸다. 이제 우리도 그냥 참고 넘길때는 아니다.
해마다 5월부터 6월사이 서해안에 출몰하는 불청객이 식인(食人)상어다. 해수 온도가 16도이상을 유지하면서 난류성 해류가 형성될때 쯤 이 놈들은 어김없이 찾아 온다. 올해도 지난 3일 충남 보령시 외연도 앞바다에서 잠수부에 의해 처음 발견된 이래 군산시 어청도 앞바다(17일), 충남 태안군 격렬비열도 근해(23일)에서 각각 한 마리씩 어부들에게 잡혀 본격적인 출몰을 예고하고 있다.특히 격렬비열도 앞바다에서 그물에 걸린 놈은 몸길이가 4.5m나 되고 톱니처럼 날카로운 이빨에는 잡히기 직전 사냥했을 것으로 보이는 작은 고래의 살점마저 물려 있어 섬뜩함 마저 느끼게 한다.상어는 전세계 바다에 2백여종이 서식하고 있으며 국내 연안에도 백상아리·홍살귀상어등 40여종이 분포돼 있다. 이 중 서해안에 출몰하는 식인상어는 길이 2∼4m의 백상아리 종류로 주로 전북과 충남근해 바다밑에서 키조개나 전복류를 따는 잠수부·해녀들을 공격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들의 공격에서 벗어날 뚜렷한 방어책이 없어 어부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바닷속을 드나들고 있는 형편이다.상어는 동물의 피냄새를 알아차리는 뛰어난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어 한번 사람의 피맛을 보면 잊지 않고 그 자리에 찾아오는 습성이 있다. 해마다 비슷한 해안에서 사고가 잇따르는것도 그 때문이다. 상어는 대개 동이 틀때나 해가 진 뒤에 먹이사냥에 나서는데 잠수부나 해녀들이 키조개나 해삼 전복따위를 따러 들어가는 늦은 오후에 공격당하는 것과 일치한다.지난 59년 대천해수욕장에서 제법 깊은 물속에 들어갔던 대학생 한 명이 희생된 이래 지난해까지 서해안에서만 식인상어에 물려 모두 6명이 목숨을 잃었다. 올해 들어서는 아직 희생자가 발생하진 않았지만 엊그제 그물에 걸린 상어를 보면 이미 이 놈들이 몰려 들고 있다는 징조다.당국이 이 시기에 맞춰 잠수어업을 일시 금지시킨다니 어민들에게는 생업에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닷속 어디에서 언제 이 놈들이 공격해올지 모르는 마당에 불평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식인상어에게까지 목숨 맡길 일은 없지 않겠는가.
산업혁명과 과학문명에 힘입어 자본주의가 만개(滿開)함으로써 인류의 생활이 풍요로워지기는 했으나 그로인해 파생된 물질만능주의는 인간성 파괴와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를 불러와 사람살이가 되레 각박해지고 있는 느낌이다. ‘아담과 이브’나 ‘단군신앙’에서 보듯이 인간세상이 열린것은 부부라는 존재의 확인에서 출발하건데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할수록 부부의 도(道)는 정비례하여 땅에 떨어지고 걸핏하면 이혼으로 현실도피를 감행(?)하고 있으니 장차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될지 참으로 걱정이다.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혼인과 이혼에 관한 통계조사 자료에 따르면 작년한해동안 결혼건수는 33만4천쌍, 이혼건수는 12만상으로 하루 평균 9백15쌍이 결혼하고 3백29쌍이 이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단순 백분율로 환산하면 무려 36%선에 육박하는 것으로 미국의 이혼율 50%와 영국의 이혼율 40%에 크게 뒤지지 않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더구나 인구 1천명당 이혼한 부부의 비율인 ‘조이혼율’은 우리나라가 2.5건으로 대만의 2.2건과 일본의 2.0건을 앞질러 불명예스러운 아시아 1위를 기록하고 있다.사정이 이렇다보니 이혼으로 인한 사회적 폐단이 곳곳에서 발생하고 특히 연간 10만명에 이르는 아이들이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낯선 환경으로 내몰리는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서울시립아동상담소가 지난해 보호아동의 문제요인을 분석한 결과 부모의 사망으로 인해 입소한 의미의 고아는 불과 2.5%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는 부모의 이혼과 별거·재혼등으로 맡겨진 아이들이었다고 한다.경남 창원에서 시작돼 일부 시·도민들이 참여, 올해로 7년째를 맞는 가칭 ‘부부의 날’(5월 21일)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빈민층 청소년을 상대로 선도활동을 벌이던 권재도목사의 제안으로 시작된 부부의 날 제정운동은 공동대표를 맡은 권영상변호사가 국회에 청원서를 낸데 이어 민주당 김중권대표와 한나라당 이회창총재를 만나면서 더욱 구체화되고 있다. 가정해체 현상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부부의 날’까지 제정하자고 나섰겠는가를 생각하면 한없이 마음이 무거워진다.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공부하는 모습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개인의 능력보다는 학벌이 중시되는 세태를 반영이라도 하듯이 학벌중심사회가 타파되기보다는 오히려 기승을 부리면서 교육은 점점 그 모습이 변질되어가고 있다.그래서인지 사교육비 망국론까지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는 불타오르는 향학열만 가지고는 안 되는 세상이 되었다. 배우는 데에도 돈이 필요하게 되었고 차윤(車胤)과 손강(孫康)의 형설지공(螢雪之功)은 이미 진부한 고사성어가 되어버렸다.요즈음 고려대와 연세대를 비롯한 사립대학에서 기여입학제도가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다. 그동안 기여입학제도는 사회적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말문을 막았지만 이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이다.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곳보다 교육과 학문에 대한 투자가 새롭게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지금 우리 대학의 현실을 볼 때, 이대로는 더 이상 새 시대에 걸맞는 인재를 양성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교육여건과 환경, 그리고 교육시설이 대폭 확충되고 개선되어야 한다. 특히 사립대학은 설립자가 다르다는 이유하나 만으로 국가의 재정지원이 거의 바닥에 가깝고 그렇다고 재단의 전입금을 크게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사학이 안고 있는 어려움이며 문제점이라는 것은 교육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이제는 기여입학제도의 부정적인 측면보다는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측면을 검토해 볼 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사학재단을 염두에 두는 사람들은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것이 아닌가하여 염려가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철저한 제도적 보완으로 누수현상을 막으면 될 것이다.이제 국가의 경쟁력을 교육에서 찾고, 교육의 경쟁력은 대학에서 찾아야 할 시점이 되었다. 결국 대학의 질적 경쟁력이 국가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지식기반 시대에 더 이상 대학 발전을 위해 머뭇거릴 아무런 이유가 없다. 기여입학제의 도입에 대해서 그 동안 이루어진 그 숱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국이나 유럽등 외국여행을 할 때 신경쓰이는 것 중의 하나가 호텔이나 레스토랑등지에서 팁을 얼마나 줄 것이며 어떻게 줘야 할 것인가등 팁에 관한 일일 것이다. 서구에서 생활화된 팁 문화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팁이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부 학자는 그보다 더 빨라 화폐를 사용하면서 팁도 동시에 생겨났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팁의 어원은 ‘선물’을 뜻하는 라틴어 ‘Stips’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소수의 얘기로는 ‘신속한 서비스 보장(To Insure Promptness)’의 머릿글자를 따 팁(Tip)이라고 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오늘날 세계에서 팁문화를 가장 발달시킨 미국에 팁문화를 전수해 준 나라는 미국을 식민지배하던 영국이었다. 독립전쟁이후 미국인들은 팁이 영국귀족제도의 버려야 할 유산이라고 경멸하면서 한동안 일상생활에서 추방했다. 하지만 얼마인가 그같은 자존심은 사라지고 지금은 역설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팁문화가 발달된 나라가 돼 버렸다.시중든 사람에게 손님이 감사의 뜻으로 요금외에 따로 주는 돈인 팁의 사전적 의미를 왜곡시킨 나라가 우리나라가 아닌가 한다. 언제부터인가 팁이라면 유흥접객업소에서 접대하는 여성들의 서비스 대가로 지불하는 돈으로 성격이 변해버린 것이다.현재 전국의 고급 유흥주점은 2만여개가 넘고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접대부 수만도 30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이 받는 팁 수입만도 한해 3조원 이상으로 추정될 만큼 향락산업은 우리 경제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비대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소득이 있는 곳에는 누구에게나 과세한다는 세정의 공평성과 투명성에 충실(?)한 국세청이 이번달에 유흥주점 여성 접대부들에게 종합소득세를 부과하여 관심을 끌고 있다.지난해 처음 실시되면서 직업이 주변에 드러나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는데 올해도 국세청과 유흥업소 여성들간에 숨바꼭직을 벌였다는 소식이다.세수증대와 향락산업 억제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교육책이 얼마나 성과를 거둘지 관심거리이다.
도당국과 도립국악원 단원들의 감정대립이 가파르게 심화되고 있다. 강경일변도의 대응을 주고 받는 가운데 타협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서로 상대방의 몰락을 바랄 뿐 같이 살 수 있는 길은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이제 분규의 원인에 대한 논란은 사라지고 상대방의 반응에 대한 신경질적인 성토만이 뒤따를 뿐이다.급기야는 도립국악원 해체라는 극한적 처방까지 들먹이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어쩌다가 이런 파국의 상황으로까지 내몰리게 되었단 말인가? 예향의 자존심을 어렵사리 지켜오던 도립국악원을 ‘공중분해’하겠다니? 타 지역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워하던 전통음악의 보금자리가 이처럼 무참하게 헌신짝 취급을 당하게 되다니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사건의 발달은 민간위탁의 실효성에 관한 논의에서 시작되었다. 한 측은 탄력성이 떨어지는 현행제재로는 효율적인 운영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민간위탁을 서둘렀고, 다른 한편에서는 위탁대상의 자격미비와 절차의 불투명성 등의 문제점을 내세워 시기상조론을 폈다. 모두 지역의 전통음악을 바람직한 모습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충정어린 고뇌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현상황에 대한 진단과 그 처방이 상이했을 뿐이다.그런데 이제는 그 목적이 사라져버렸다. 몇 번에 걸친 감정적 옥신가신으로 무엇을 위해 다루게 되었는가를 잊어버리게 된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보남ㄹ의 전도가 이렇게 삽 시간에 일어날 수 있따니 놀라운 일이다. 애초부터 그런 목적의식마저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이다.모두 오기의 소산이라 소산이라 할 수 있다. 남에게 자기 싫어하는 마음, 상대방에 대한 배려의 마음보다 자기만을 내세우는 오만한 기운, 전세가 불리한 상황에서 오기는 역전의 발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만큼의 희생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하다. 더구나 힘을 가진 사람의 오기는 자신은 물론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다. 공공의 일을 오기로 밀어 부쳐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무쪼록 공멸을 자초할 오기의 대응만은 서로 피해가길 간절히 바란다.
자유당 시절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낚시를 하다가 방귀를 뀌었다. 옆에서 모시던 각료 한 분이 듣기에 민망했던지 한마디 거들었다.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그 유명한 ‘방귀 아부학(阿附學)’의 내력이다.중국 고전에 한 아첨꾼의 방귀이야기가 나온다. 생전에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심판을 받으러 나갔는데 바로 그때 염라대왕이 방포일성(放砲一聲)을 터뜨렸다. 이 아첨꾼이 기회를 놓칠세라 재빨리 ‘방귀찬송’ 한 수를 지어 바쳤다.‘금빛 엉덩이로 보배같은 향기 피우셨네. 그 소리 관현악같고 그 냄새 난향이어라. 신하된 몸 그 아래서 그 소리와 향기에 몸둘곳을 모르겠네…’염라대왕이 듣고는 흐뭇해 하더니 그의 명을 10년간 연장해 주었다. 10년후 수명이 다 한 그가 거들먹거리며 염라대왕앞에 다시 나가자 염라대왕이 옛날 생각이 났던지 씽긋 웃더라고 한다. 아부나 아첨은 명계(冥界)에서도 통한다는 뜻일까?이승만 대통령때에는 ‘지당(至當) 장관’ ‘낙루(落淚)장관’등 지나친 아부로 노인네의 총기를 흐리게 하는 각료들이 세인의 입줄에 오르 내렸다. ‘인(人)의 장막’을 친 장본인이 그들이다. 그런가 하면 박정희(朴正熙)대통령 시절에는 스스로를 둔마(鈍馬)로 낮추면서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짐한 장관도 있었다. 흔히 곡학아세(曲學阿世)의 대명사처럼 불리웠던 그는 훗날 건강을 해쳐 불운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아부나 아첨하는 정치인은 어느 정권때나 있는 모양이다. 얼마전에도 민주당에서 자민련으로 당적을 옮긴 어느 의원이 ‘한 마리 연어가 되어…’어쩌고 하면서 대통령에 충성맹세를 해 세간의 화제가 되더니 한 야당의원은 또 자기 당총재를 ‘왕이 될 사람’이라고 아첨하는 발언을 해 사람들을 웃긴바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새로 법무장관에 임명된 안동수(安東洙)장관의 취임전 소감자료가 언론에 공개돼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가문의 영광인 중책을 맡기시고…’ ‘대통령님 성은에 감사하오며…’는 아무래도 지나친 과공(過恭)인 것 같다. 하긴 정치인의 정치적 수사(修辭)쯤으로 가볍게 넘기면 그만일 수도 있지만 국민들 시선이 그리 곱지만은 않은 시점인지라 그만 비례(非禮)가 되고만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삼국시대 백제(百濟) 30대 임금인 무왕(武王:600∼641년 재위)은 뛰어난 정략가였다. 그는 쇠락해 가는 국운을 되살리기 위해 왕실의 권위를 확고히 다지는 한편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신라 서쪽 변방을 빈번히 침공했다. 고구려의 남진(南進)을 막기 위해서는 수(隋)나라에 조공을 바치면서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수나라가 망하고 새로 당나라가 서자 무왕은 재빨리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함으로써 두 나라간의 유대를 돈독히 이어갔다. 그리고 당(唐)의 힘을 빌어 신라 정벌계획까지 세웠다. 결과적으로 이 계획은 무산됐지만 그는 지금으로 말하면 주변 강국과의 균형 유지를 위해 힘쓴 등거리 줄타기 외교의 명수였던 셈이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의자왕(義慈王)대에 이르러 끝내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명망하고 말았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만 하다.삼국유사 제2권 기이편(紀異篇)에 실려 널리 알려진 ‘서동왕자와 선화공주 이야기’는 바로 무왕의 즉위에 얽힌 설화이다. 가난하고 비천한 백제 청년 서동(薯童)이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를 탐내 ‘서동요(書童謠)’를 지어 퍼뜨렸고 왕실에서 쫓겨난 공주를 백제로 데려와 혼인한 후 왕위에 올랐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대부분 설화가 그렇듯이 훗날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한 것과 관련해 사찰연기설화(寺刹緣起說話)와도 맥이 닿는다.지금 익산시 석왕동에 있는 쌍릉(사적 87호)은 일찌기 고려사(高麗史) 세종지리지등 각종 문헌에 무왕 부부의 무덤이라고 기록돼 있다. 쌍릉의 높이나 크기가 부여(扶餘)능산리 오아릉과 같은 형식이어서 이를 무왕 부부의 능으로 보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고고학적으로 이를 증명할만한 근거는 찾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그동안 굴꾼들이 하도 헤집고 다녀 변변한 유물 하나도 없이 현재는 사발형 토기등 일부 유물만 남아있을 정도라는 것이다.익산시가 드디어 이 쌍릉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할 계획이라 한다. 늦었지만 이 능이 무왕 부부능으로 확인된다면 우리 백제문화의 진수(眞髓)하나를 더 얻게되는 셈이다.
과중한 사교육비 부담이 가정경제를 짓누르면서 갖가지 사회문제를 야기시키더니 급기야 유엔인권기구가 한국정부에 ‘공교육의 정상화’를 권고하는 부끄러운 상황이 벌어졌다.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가 최근 우리나라의 교육현상에 대해 “공립학교의 낮은 교육수준이 학부모들로 하여금 사교육으로 자녀들의 교육을 보충하도록 강요하고 있으며 이로인해 특히 저소득계층에 과도한 재정부담을 안겨주고 있다”고 지적하고 “한국정부는 높은 수준의 경제발전에 걸맞도록 교육제도를 강화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권고하고 나선 것이다.이처럼 유엔인권기구가 특정국가의 교육제도에 관해 언급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일뿐아니라 공교육제도의 강화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까지 제시했다는 점에서 우리 교육이 얼마나 심각한 지경으로 내몰리고 있는지 짐작할만 하다. 사실 유엔인권기구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교육현실이 이미 정상궤도를 일탈하여 위기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는데 동의하지 않을 국민은 흔치 않을 것이다. 또 이같은 위기상황이 단견적인 교육정책과 학부모들의 과욕에서 비롯됐다는 점도 부인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여기서 우리는 평범한 진리 하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무리 훌륭한 교육정책이라도 학부모와 학생들이 옳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는 것을. 내 자녀의 적성과 능력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자녀만은 특별해야 하고 남에게 절대 뒤떨어져서는 안된다는 일류지향형 학부모들이 판을 치는 한 우리 교육의 미래는 일그러질 수밖에 없다.최근 단국대 이해명교수가 전국 중고생 3천3백49명을 대상으로 ‘학업성적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조사한 결과 지능이 46.91%로 가장 높고 학교환경과 노력이 각각 9.70%와 6.99%에 달한 반면 과외수업은 불과 0.22%에 그쳤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학부모들이 효과가 미미한 과외에 돈을 쏟아붓지 않고 ‘내 자녀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 나설때 한국교육은 되살아 날 수 있다고 감히 장담할 수 있다.
신록이 짙어 가는 산등성이를 따라 정상에 올라 산 아래를 굽어보면서 힘차게 외치면 이 산골 저 산골을 넘나들어 다시 돌아오는 반향, 이른바 메아리다. 이처럼 메아리가 신기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메아리는 반드시 처음 그대로 다시 되돌아온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5월은 가정의 달이다. 우리네 삶 속에서도 이러한 사랑의 메아리가 넘쳐 났으면 하는 마음이다. 골짜기가 깊은 산일수록 메아리는 그 울림이 우렁차듯이 사람들도 그 삶을 깊이 음미할수록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진실된 삶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 그 메아리는 조금도 꾸밈없이 본래의 모습 그대로 다시 돌아온다.그래서인지 고운 소리는 곱게, 거친 소리는 거칠게 되돌려 주는 것이 바로 산의 메아리라면 선을 베푸는 사람에게는 선을, 악을 행한 사람에게는 악을 되돌려 주는 것이 우리네 삶의 메아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세상살이는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실어 보내면 감사와 보답으로 돌아오고 원한과 미움을 보내면 칼날 같은 아픔이 되어 되돌아오기도 한다.하지만 무작정 주기만 하는 사랑은 아름다울지는 몰라도 어쩌면 아프고 슬픈 사랑이다. 혼자만의 짝사랑이 아닌 주었을 때 되돌아오는 사랑이야말로 귀하고 값진 사랑이 아닐까. 부모들이 자식에게 베푼 사랑이 다시 자신들에게 되돌아오지 않아도 견딜 수 있는 것은 그 자식이 부모가 되었을 때 다시 그 자식들에게 자신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아낌없이 베풀기 때문일 것이다.사랑도 받아본 사람만이 주는 법을 안다고 한다. 인정이 메마르고 살기 힘든 세상이라 말하지만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평생을 남에게 베풀기만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들의 베품은 베푼만큼 되돌려 받으려는 것도 아니며 그걸 생색내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지 않는다고 애태우는 일도 없다.심장병으로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온정의 손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가난하게 살면서 모은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내놓는 사람들을 볼 때 우리 사회의 아름다운 메아리가 들리는 것 같다. 우리 사회에 사랑의 메아리가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시간이 걸릴 뿐 세월이 흐르면 언젠가는 그 메아리는 다시 계속될 것이다.
‘동구밖 과수원 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하얀 꽃 이파리 눈송이 처럼 날리네/ 향긋한 꽃 냄새가 실바람 타고 솔솔/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 보며 쌩긋/ 아카시아 꽃 하얗게 핀 먼 옛날의 과수원 길’청장년층들에게 어릴적 추억을 되살리게 해주는 동요 ‘과수원 길’의 가사다.30∼40년전만 해도 시골 과수원 언저리에는 아카시아 나무가 무성했다. 요즘처럼 흰꽃이 활짝 필 무렵이면 그 꽃을 따서 송이째 잎에 넣어 꿀을 빨았고, 그늘에서 쉴때나 걸어가면서 ‘가위 바위 보’를 이긴 사람이 잎을 하나씩 따내는 놀이도 했다.봄의 늦둥이 꽃이자 초여름을 알리는 전령사인 아카시아 꽃이 흐드러지게 피였다. 가까이서 보면 금세 터져서 흩어질 것 같은 영락없는 팝콘의 모양인데 멀리 떨어져 보면 마치 초록색 화선지에 흰 물감을 꾹꾹 찍어낸 듯한 그림같은 풍경이다.아카시아 나무는 1890년경 일본인이 중국으로 부터 들여와 인천지역에 처음 심은 것으로 알려진 귀화식물이다.아카시아 나무가 우리의 산림에 유익한가 해로운가에 대한 평가는 학자에 따라 다르다. 6·25전쟁 이후 황폐해졌던 산을 신속하게 조림하기에는 더 없이 좋았던 수종이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아카시아의 억센 생명력이 오히려 다른 나무의 생장을 방해해 산림에 피해를 주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하지만 아카시아 나무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밀원수(蜜源樹)로 한해 꿀 생산량의 50% 이상을 차지하면서 양봉업자들의 소득을 높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아카시아 꽃은 양봉업자들만 기다려지는 꽃이 아니다. 이 꽃이 필 무렵이면 나무밑의 풀이 부쩍 자라나 웬만한 불씨에도 산불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산불방지를 위해 입산을 통제하던 등산로도 이때쯤 개방된다. 한마디로 임업 관계자나 등산 애호가들에게는 ‘희망의 꽃’인 셈이다.아침 출근길 차창으로 스며드는 향긋한 아카시아 꽃 향기를 맡으면서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하는 것도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소시민들에게 다소간의 위안거리가 될 듯 싶은 좋은 절기이다.
동학농민혁명의 핵심 정신은“사람을 하늘처럼 공경하라”(事人如天)는 말로 집약될 수 있다.양반 상놈의 계급구조나 성차별문화로 한쪽이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평등 이념으로의 의미가 중시될 것이다. 인명살상이나 적군에 대한 인권유린이 자행되는 전시(戰時)와 같은 때에는 생명을 보전하기 위한 평화와 인권존중에 비중을 두고 풀이를 할 것이다. 오늘날처럼 사람이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해가고 있는 상태에서는 생명사상의 주요 가치로 인용될 수 있다.농민혁명이 지니는 현대적 의미는 이처럼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될 수 있다. 오는 5월 31일 농민군의 전주성 점령을 기념하여 열리는‘동학농민혁명 국제학술대회’는 바로 그러한 의미들을 국제적 차원에서 규명하기 위한 것이라 짐작된다. 이는 동아시아 평화·인권 국제위원회가 공동주최자로 참여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 변화의 획기적 전기로서의 역사적 의미에 촛점을 맞추고 있으면서 당시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중국과 한반도에서의 인권유린에 주목하고 있는 점에서도 이런 취지의 기획의도는 확인할 수 있다.특히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백여 년 전부터 꾸준하게 진행된 일본의 역사왜곡을 그에 못지 않은 끈기와 인내로 고발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조들이 자행한 농민군에 대한 대대적 토벌을 국제법을 무시한 대규모 인권유린의 가장 극적인 예로 간주한다. 그래서 그들은 참회와 사죄의 마음으로 인권유린의 형장들을 답사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모두가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는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으로 뭉똥그릴 수 있겠다. 농민혁명의 현대적 의미는 바로 이러한 것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념을 위한 기념이 아니라‘사인여천’의 숭고한 이념을 오늘에 올곧게 계승하기 위한 노력들 말이다.
경찰이 지난 3월부터 교통법규 위반자들에 대한 신고보상금제를 실시하고 ‘안전띠’착용을 의무화 하자 교통사고 발생률이 현저히 감소하고 있다한다. 경찰 통계에 따르면 올들어 1월부터 4월까지의 사고 발생건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0.6%나 줄어들었다는 것이다.선진국 반열에 드는 OECD 가입 국가 가운데 교통사고 사망율 최고의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비록 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통계지만 교통사고가 감소 추세를 보인다는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자동차를 손수 운전하는 사람이라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승객이나 거리에서의 교통 무질서를 보면 우리의 교통문화가 언제나 바로 잡힐가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여전하기 때문이다.사실 지금 경찰이 단속을 강화하고 있는 안전띠만 해도 그동안 운전자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드물었다. 자동차 선진국 사람들은 차에 오르면 으례 매는 것이 안전띠지만 우리는 그저 장식품이거니 생각하는 운전자들이 적지 않았다. 대형 사고가 났을때 안전띠를 맨 경우와 매지 않은 경우의 피해 정도를 그렇게 홍보해도 그때만 잠시 호들갑을 떨 뿐 언제 그랫느냐는듯 외면해 버리는 것이 대부분 운전자들의 습성이었다.지금 운전자들의 안전띠 착용률은 눈에 띠게 늘고 있다. 적발되면 3만원 범칙금 통고서를 받아야 하니 그럴만도 하다. 대형 관광버스 승객들도 고속도로에서의 착용이 의무화되자 관광길에 나선 부녀자들이 버스안에서 술에 취해 뛰고 흔드는 추태(?)를 보지 않게돼 다행이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엊그제 강원도 미시령에서 일어난 대형버스 추락사고 현장에서 안전띠의 위력이 여실히 증명된 점이 반갑다. 버스가 계곡에 쳐박혔어도 승객 14명이 가벼운 상처만 입었을 뿐 중상자나 사망자가 한명도 없었다한다. 승객 대부분이 안전띠를 착용한 덕택이었다.교통문화를 바로 세우는 일이 경찰 단속의 힘만으로 되는 일은 물론 아니다. 내가 지켜서 편리하면 남도 편안한 것이 교통질서다. 안전띠 하나라도 제대로 맬줄 아는 운전의식이 자리잡는다면 ‘사고 공화국’의 운명을 벗어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세계 최대의 환락도시인 미국의 라스베이가스가 탄생한 것은 바로 이웃에 자리잡은 후버댐 덕분이다. 1946년 벤자민 시걸이라는 한 마피아 청년이 이 댐의 물을 네바다 사막 한 가운데로 끌어들여 지상낙원을 만들겠다는 공상(空想)과 같은 집념으로 6백만 달러를 투자해 플라밍고 호텔을 지은것이 그 효시다. 도박과 범죄 성(性)의 도시 라스베이가스는 그 후 새로운 아메리칸드림을 미국인과 전세계인들에게 심어준 환상의 도시로 발전한 것이다. 네바다주와 아리조나주 사이를 흐르는 콜로라도강을 막아 세운 후버댐은 1930년 착공, 36년에 완공된 당시 미국 최대의 토목사업이었다. 댐 높이가 2백21m로 70층 건물 높이와 맞먹으며 길이 4백11m, 저수량 3백36만t 규모로 수력발전과 관개용으로 이용된다. 이댐을 축조하며 부서진 바위가 9백만t으로 만리장성을 쌓을 수 있는 양이며 여기 쓰인 콘크리트만 7백만t으로 LA∼마이애미까지 왕복 2차선을 놓을 수 있는 양이라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만하게 한다. 1920년대말 미국을 휩쓴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당시 후버대통령의 야심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추진된 이 댐공사는 그러나 사업초반 심각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환경론자들의 반대가 완강했던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생태계 파괴 경관 훼손등의 이유로 막대한 사업비가 투자되는 이 사업에 대한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후버대통령의 강력한 정책의지로 댐은 축조됐고 65년이 지난 오늘날 후버댐은 세계 최대의 인공호수 레이크미드를 끼고 윈드셔핑 낚시등 레저 산업의 중심지로 발돋움 하고 있다. 특히 화려한 불빛을 발사하는 전기탑, 풍력발전소의 장관은 일품이다.난데없이 후버댐 이야기를 꺼내는것은 토론회까지 마치고도 또다시 평가위로 넘어간 새만금사업 때문이다. 자연환경과 갯벌보존이라는 환경론자들의 주장은 백번 옳다. 후버댐 축조를 반대한 미국의 당시 환경론자들의 주장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어떤가. 물론 새만금과 후버댐의 경우가 똑같을수는 없다. 하지만 새만금사업도 완공되면 국내 최대의 관광명소로 부상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결코 빈말이 아니다.
지난달 1일부터 국내 통신업체들이 발신자 전화번호표시(CID·Caller ID) 시범서비스를 실시하면서 전화풍속도가 바뀌고 사생활 침해 논란이 일고 있다고 한다. 전화를 받는 사람이 상대방 번호를 확인할 수 있어 인사말도 없이 곧바로 퉁명스럽게 ‘왜 전화했느냐’고 묻는 바람에 머슥해지기도 하고 밤늦은 시간에 실수로 전화번호를 잘못 눌렀다가 장난전화로 오해를 받아 혼쭐이 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또 상가집에 간다며 부인을 속이고 엉뚱한 곳에 갔다가 상가집 번호가 찍히도록 전화를 걸어보라는 요구를 받고 들통이 나는가 하면 향락·퇴폐업소를 찾는 손님들이 업소전화 사용을 꺼리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이와함께 발신자의 사생활이 침해될 수 있다는 지적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물건을 사기위해 상점에 전화를 하는 경우 본인의 뜻과는 무관하게 번호가 고스란히 상점에 남게돼 불미스런 일에 이용될 가능성이 높은데도 아직 법적 보호장치가 마련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특히 개인정보보호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지 고작 1년밖에 되지 않는데다 발신자번호표시를 통해 새롭게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검토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주장이다.그러나 장난전화나 협박전화 때문에 밤잠 못이루며 전전긍긍, 수시로 전화번호를 바꾸거나 아예 코드를 빼놓고 필요할때만 연결시켜 사용하던 가입자들 입장에서 보면 정말 크게 환영할 일이다. 전화공해에 시달리던 휴대전화 이용자들 또한 이 제도시행에 전적으로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시행초기니만큼 기술적·제도적 문제점과 허점이 노출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수도 있다. 관할 전화국의 교환기가 전(全)전자 교환기가 아니거나 사설 구내 교환기를 사용하는 곳, 또는 공중전화등에서 전화를 걸 경우 발신자번호가 제대로 찍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벌써부터 무용론을 들고 나오거나 부정적인 면만 부각시키려 드는것은 올바른 처사라고 볼 수가 없다. 미흡한 부분은 얼마든지 보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장난전화로 겪는 짜증이야 감수한다 하더라도 극도의 공포감을 주는 얼굴없는 스토커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것은 당사자가 아니면 그 고통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나름대로 늘 곁에 간직하고 지켜면서 살아가고픈 말들이 있다. 개인에게는 좌우명이 있다. 그런가하면 가정에는 가훈이 있고 회사에는 사훈이 있다. 또 학교에는 교훈이 있고 학급에는 급훈이 있다. 이렇듯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라면 거의 꼭 지켜주기를 원하는 실천 목들이 넘쳐나고 있다. 때로는 액자나 현판에 걸어 놓거나 돌에 새겨 놓은 그 실천 덕목들을 보면 외우기도 힘든 판인데 실천하기는 더더욱 힘들어 보인다.세상에는 수많은 명언과 명구들이 있다. 그 중의 하나를 좌우명으로 삼거나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사람들의 좌우명을 대신 빌리기도 한다.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초지일관(初志一貫), 대도무문(大道無門)같은 말은 주위에 흔하다.그러나, 현실에서는 범람하리만큼 많은 가훈, 교훈, 사훈 등의 어느 것에 장단을 맞추며 살아갈 지 혼란스러운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경우 가훈은 가장이, 교훈은 학교장이, 사훈은 사장이 만들어서 그 구성원이나 아랫사람들에게 지켜주기를 바라는 것들이고, 자신들의 뜻에 따라주기를 바라는 요구조건이다.따라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권고이거나 강요에 지나지 않을 수가 있다. 스스로 지키고자 하는 자발적인 지표가 아니고 피동적으로 부여된 과제 같은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지키고자 하는 의지보다 지켜야 한다는 당위성을 권장 받거나 요구받은 덕목일 뿐이다.그래서인지 교훈은 학교를 졸업하면 잊어버리기 십상이고 급훈은 학년이 바뀌면 무의미해진다. 회사를 벗어나면 곧 사훈을 잊기 일쑤이다. 각종 슬로건이나 캐치프레이즈는 시한부의 한계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물론 나름대로 좌우명이나 신념을 갖고 사는 일은 필요하고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것은 각 개인의 양심적 판단에 따라서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지 요구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권장이나 설득은 별로 실효성이 없는 것이다. 자기가 체험을 통해, 또는 어떤 계기나 사연을 가지고 스스로 설정하는 좌우명이 좋을 것이다.
하루가 지구의 자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면 한달은 달의 운동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시간의 단위다. 달의 만월(滿月)에서 다음 만월까지의 기간인 한달은 정확히 말하면 29.53059일이다.1년을 12달로 잡으면 한해는 약 3백54일이 된다. 따라서 지구가 태양을 한번 도는 1년인 365.2422일과는 약 11일의 차이가 있다. 이런 차이를 그대로 두면 계절의 변화에 맞지 않는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만든 것이 윤달(閏月)이다.또 농사일에 절대적인 계절의 변화를 알기위해 따로 만든 것이 태양의 움직임에 맞춘 24절기다. 24절기는 양력의 상순에 들어가는 입춘(立春)·청명(淸明)과 같은 12절기와 하수운에 들어가는 우수(雨水)·춘분(春分)같은 12중기(中氣)로 나뉜다. 음력은 29일인 달이 많기 때문에 때로는 절기나 중기가 하나만 들어있는 달이 생길 수 있게된다.윤달은 이 24절기와 관계가 있다. 윤달은 19년에 일곱번 둔다. 이런 19년 7윤법(閏法)은 동서양 모두 오래전 부터 알고 있었다. 윤달은 중기가 없는 달을 그앞달의 윤달로 정한다. 이것이 무중치윤법(無中置閏法)이다. 올해의 경우 윤4월에는 망종(芒種)이라는 절기 하나만 들어있다.윤달은 지구와 달이 태양을 도는 공전속도가 가장 더딘 여름에 주로 생긴다. 하지(夏至)께 윤달이 들 확률이 가장 높다. 겨울에는 좀처럼 윤달이 될 수 없다. ‘윤동짓달에 빚을 갚겠다’는 속담이 생긴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윤달은 ‘공달’ ‘덤달’ ‘여벌달’등으로도 불린다. 거저 생긴 달인 만큼 아무런 액운도 없는 것이라고 믿어왔다.오는 23일부터 윤4월이 시작된다. 윤달에 수의(壽衣)를 장만하면 무병장수한다는 속담에 따라 수의를 구입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조상묘를 돌보기 위한 예약도 크게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반면 예식장을 비롯한 결혼업계는 울상을 짓고 있다고 한다.그러나 1백50여년전 우리 세시풍속을 집대성해놓은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마지막 부분 ‘윤달’에는 ‘결혼하기에 좋고 수의 만드는 데도 좋다’고 적혀있다. 평소 꺼리던 일을 해도 괜찮다는 것이지 경사를 치르지 말라는 뜻이 아닌데도 결혼을 기피하는것을 보면 민간에 전해오는 속설의 위력(?)을 실감나게 한다.
일등지상주의가 팽배해 있는 마당에 ‘지는 법’을 가르친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봄 가뭄에 단비처럼 반가운 신선한 충격의 진원지는 ‘지는 아이로 키우기 운동’을 벌이고 있는 한국수양부모협회이다. 이 운동이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그 정신이 우리 사회를 찌들게 하는 갖가지 병리현상의 본질에 대한 통찰과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심각한 뒤틀림의 본질적인 원인은 다양한 삶의 양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 있다. 획일적 기준으로 한 줄 서기를 강요하고 그에 따른 경쟁만을 강조하며 부추긴다. 그 경쟁에서 이겨야만 삶의 의미를 보장받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러니 공동체 사회의 밑거름이라 할 수 있는 양보의 마음의 소중하게 평가받을 리 없다. 원칙이라는 것도 헌신짝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웃을 짓밟을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그것이 보편 이념으로 통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식교육에 한이 맺힌 부모들에 의해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지는 삶’이란 엄밀하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의해 실패나 패배로 판정 받는 삶을 의미한다. 자기 스스로의 기준에 의하면 ‘이기는 삶’일 수 있다. 독창적인 사고방식으로 인해 지진아 판정을 받았던 많은 천재들의 삶이 그 전형적 예라 할 수 있다. ‘지는 연습을 많이 한 아이들이 진정으로 이기는 아이로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이 말 역시 ‘성공’이데올로기에 오염되어 있는 듯 하여 안타깝기는 하지만 말이다.중요한 것은 삶이 ‘이기고 지는’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지는 법’을 가르치는 운동도 궁극적으로는 이에 대한 깨우침을 그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세속적 기준에 의한 성공이나 실패와 무관하게 자신의 가치척도에 따라 최선을 다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해야 한다. 살벌한 교육현장이나 혼탁한 정치권의 파행도 맹목적인 승리 지상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에야 본연의 제 모습을 찾게 될 것이다.
사회적으로 대접받는 직업군(群)을 꼽을때 항상 상위 그룹에 랭크되는 직종이 대학교수이다. 시대가 바뀌고 직업에 대한 가치관에 변화 바람이 일어도 대학교수의 학문적 권위와 지성의 깊이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은 드물다. 그만큼 대학교수들은 인격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사회적 신망과 존경의 표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몇년전 한 현직 대학교수가 출간하여 화제가 됐던 ‘교수들의 행진’이라는 풍자소설을 보면 교수들의 다른 모습이 너무나 민망하다. 그는 이 소설에서 ‘거지와 교수의 다섯가지 공통점’이라는 사례를 들어 교수사회의 위선과 교만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다. 그가 예로 든 다섯가지 공통점은 이렇다.첫째 항상 손에 무엇을 들고 다닌다. 둘째 출·퇴근시간이 일정하지 않다. 셋째 수입도 일정하지 않다. 넷째 얻어 먹기만 하고 대접할줄은 모른다. 다섯째 되기가 어렵지 한번되고 나면 밥은 먹고 산다. 대단히 실례되는 말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항상 손에 무엇을 들고 다니는 것’과 ‘되기가 어렵다’는 점은 정곡을 찌른듯 하다.실제로 대학 사회에서 교수 되기는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힘들다. 학맥(學脈) 인맥(人脈)에다가 상당한 재력이 없으면 명함 내밀기조차 어렵다. 각고의 노력끝에 박사학위를 받고도 시간강사자리 하나 얻지 못해 실업자 신세를 못 면하는 교수 지망생들이 얼마나 많은가.그렇게 어렵게 오른 자리이기에 ‘한 번 교수는 영원한 교수’프리미엄을 얻는가 보지만 학문적 성취도와는 별개다. 새로운 학문과 신지식을 연구하고 전수하는 일이야말로 교수의 본분이다. 엊그제 김대중(金大中)대통령도 지적했듯이 10년∼20년전 만든 낡은 노트 한 권 들고 다니며 ‘지식의 장삿꾼(?)’ 노릇이나 한대서야 누구라서 그런 교수에 대해 존경심이 울어 나겠는가. 실력없는 교수는 대학사회에서 퇴출돼야 한다는 대통령의 지적까지 나오는 마당이다. 그동안 그야말로 우수마발(牛秀馬渤)로 목에 힘이나 줘왔던 교수들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게 생겼다.
경제난으로 인해 국민들이 체감하는 삶의 고통을 지수(指數)화 한 것이 ‘고통지수(Misery index)’이다. 일반적으로 실업률과 물가상승률을 더한데서 실질 국내총생산(GDP)증가율을 뺀 수치를 말하는데 조사방법에 따라 부도율과 건설경기 등을 포함시키기도 한다.한마디로 우리가 생활하는데 경제적으로 얼마나 힘들고 불편한지를 특정 시점과 비교해서 수치화 한것으로 물론 지수가 높을수록 고통도 크다.LG경제연구원이 지난해 1분기에 발표한 이 지수에 따르면 외환위기 직후인 98년에 7.4였던 것이 99년에는 0.0, 지난해에는 마이너스 1.0으로 계속 낮아져 경제사정이 좋아지고 있다는 분서이었다. 특히 지역간 경제격차도 줄어 들어 1분기 고통지수가 가장 높았던 부산(2.8)과 가장 낮은 충남(-3.9)의 격차가 6.7배로 99년 격차 8.3보다 완화됐다는 것이었다. 정부가 외환위기를 극복했다고 호언했던 시기와 맞아 떨어지는 셈이다.그러나 삼성경제연구소는 올해 ‘트렌드 10’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올해에는 정치권이 장기적 국가전략 보다는 내년의 대통령선거 준비에 역량을 집중하면서 민생을 등한시 해 경제상황이 악화하는등 국민의 고통지수가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고했었다. 설마 했지만 엊그제 현대경제연구원의 ‘지역별 경제적고통지수와 정책과제’라는 보고서를 보면 이에측은 적중하는듯이 보인다. 감소추세를 보이던 고통지수가 올해 평균 7.36을 기록하여 지난해보다 1.46포인트 오른 것으로 조사됐다는 것이다.도내의 고통지수만 해도 지난해 4.51에서 올해는 6.98로 높아져 부산·인천·광주·서울·대구·경남에 이어 일곱번째로 살기 힘든 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소비자물가상승, 건설경기 침체, 공공요금인상등 국민생활안정에 악재가 이어지고 지역간 격차까지 심화되는 마당에 정치권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 고통지수는 묻고 있는 것 같다.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노력은 정책당국 못지않게 정치권의 책임도 크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여(與)든 야(野)든 지금 한창 시끌벅적한 대권(大權)놀음을 자제하고 민생을 챙기는데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국민의 분노와 좌절감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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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해군 제2정비창 군산조선소가 ‘최적지’
[사설] 소리만 요란한 전북 AI, 실질적 성과 아쉽다
[전북칼럼] 살얼음길 걷듯, 조심조심 안전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