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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동주(吳越同舟)

관선 단체장 시절, 단체장들에게 국회의원은 하늘같은 존재였다. 그들에게 자칫 잘못 보였다가는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몰랐다. 국회의원에게 깎듯이 할 수 밖에 없는 먹이사슬 구조 아래서 단체장은 확실한 ‘을’이었다. 1995년 기초·광역단체장을 모두 선거로 선출하면서 정치적 지형이 변했다. 그러나 선출직 단체장 시대에 들어와서도 전북지역 단체장들의 처지는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지방선거 공천권을 지역구 국회의원들이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온통 장악하고 있는 전북지역 정치 특성 때문에 선출직 후보들은 민주당 공천에 사활을 걸었다. 당연히 공천권을 쥐고 있는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밉보인 후보들은 탈락하고, 뭔가 탁월한 능력(?)을 보인 인물 대부분이 당의 공천권을 확보했다. 그들의 당선은 100%에 가까웠다. 오죽하면 지팡이만 꽂아도 당선이라는 말이 나왔을까.전북지역 역대 단체장 중에서 고창 이호종, 김제 이건식, 정읍 강광 등 무소속 몇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 민주당 쪽 공천자가 당선됐다. 무소속 출마했다가 곧바로 당에 복귀하는 단체장도 많았다. 그런데 지난 6·4지방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들이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렸다. 익산 박경철, 김제 이건식, 완주 박성일, 진안 이항로, 장수 최용득, 임실 심민, 부안 김종규 등 7명의 무소속 후보가 당선했다. 역대 지방선거 최다 무소속 단체장이 탄생했다. 민선 6기가 출범한 지 3개월이 지났다. 무소속 단체장이 대거 포진하면서 지역 국회의원들의 심기가 상당히 불편한 모양이다. 1년 중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국가예산철이 됐는데 기초·광역단체장들의 국회와 중앙부처 상경활동 등 움직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다. 도지사 움직임에도 불만인 듯한 분위기다. 국가예산 문제라면 국회의원이나 단체장이나 똑같은 마음자세로 임할 일이다. 서로 배려해야 한다. 정보를 교류하고, 도와가면서 한 푼이라도 더 확보해야 한다.하지만 오월동주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다. 과거로 보면 최규성 의원과 이건식 시장, 이강래 의원과 최진영 시장, 강동원 의원과 이환주 시장, 김춘진 의원과 이강수 군수 등이 제대로 협조하지 않으면서 긴장감이 돌았다. 요즘도 그런가.어쨌든, 국회의원들이 협조가 잘 안된다며 단체장들을 비난하거나 서운해 하는 것은 곤란하다. 국회의원은 더 이상 단체장의 갑이 아니다.

  • 오피니언
  • 김재호
  • 2014.10.06 23:02

입소문의 효과

‘다양성 영화’란 이름을 달고 개봉한 영화 한편이 놀라운 흥행성과로 화제가 되고 있다. 존 카니 감독의 음악영화 ‘비긴 어게인’이다. 이 영화는 8월 중순 국내 개봉 된 이후 한 달 만에 250만 명 관객을 돌파했고, 지난 1일엔 누적 관객 수 300만 명을 넘어섰다. ‘다양성 영화’로 국내 흥행 1위를 지키고 있던 다큐멘터리 ‘워낭소리’의 관객 수 293만 4000명(2009년)을 뛰어 넘은 기록이다. 게다가 이 영화의 OST는 국내음원 순위까지 석권한 상황이다. ‘다양성영화’는 저예산을 투입한 소규모 실험·예술 영화를 이른다. 대규모의 제작비를 들여 만드는 상업영화와 달리 소규모의 제작비가 투입되는 특성 때문에 상업영화와 대비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런 기준으로만 본다면 ‘비긴 어게인’은 다양성 영화로 분류되기에는 투자한 제작비가 너무 많다. 제작비 2500만 달러(253억 원)에 개봉관 수만도 185개나 된다. 출연배우들도 ‘캐러비안의 해적’의 키이라 나이틀리, ‘어벤져스’의 마크 러팔로, 그리고 ‘마룬5’의 보컬인 팝스타 애덤 러빈 등 할리우드의 주류스타들이다. 이 때문에 ‘다양성 영화’로서의 정체성을 의심(?) 받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요소가 성공요인이 됐다는 분석도 있다. ‘비긴 어게인’은 스타로서 명성을 잃은 음반프로듀서와 스타가수 남자친구를 잃은 싱어송라이터가 뉴욕에서 만나 함께 노래로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다. 영화를 끌어가는 힘은 음악이다. 뉴욕을 배경으로 감각을 돋보이는 영상과 세련된 음악의 조화는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하며 영화 속으로 끌어들인다. 존 카니 감독은 이미 전작 ‘원스’를 통해 음악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원스’는 제작비 15만 달러(한화 1억 5000만 원)로 제작한 저예산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2006년 당시 국내에서 독립영화 사상 처음으로 20만 명 관객을 모았다. ‘원스’에 이어지는 ‘비긴 어게인’은 특히 한국에서 압도적인 흥행성과를 올리고 있다. 알려지기로는 이 영화의 해외 매출 절반 이상이 한국에서 거둬들인 액수라고 한다. 주목되는 것이 있다. 흥행 공신으로 꼽히는 ‘입소문’ 효과다. 전문가들은 ‘비긴 어게인’을 본 관객들이 SNS와 블로그를 통해 올린 홍보 효과가 매스미디어가 쏟아내는 광고 효과에 결코 밀리지 않았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대중들이 만들어내는 마케팅의 새로운 힘이 확인된 셈이다. ‘입소문’의 효과가 흥미롭다.

  • 오피니언
  • 김은정
  • 2014.10.03 23:02

김병조와 명심보감

김병조는 1980대 인기 코미디언이었다. 배추머리를 한 그는 ‘지구를 떠나거라’ 등 숱한 유행어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지금‘명심보감’을 강의하며 대중의 또 다른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김병조에게는 ‘6·10’의 아픔이 있다. ‘6월 10일’은 1926년 6·10만세운동과 1987년 6·10민주화운동이 일어난 날이다. 1987년 이날, 군사 독재 장기 집권을 반대하며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던 민주 세력이 성난 파도처럼 일어났다. 공권력에 의해 박종철(87년 1월)·이한열(6월) 학생이 사망한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분노한 대중은 6월10일 집회, 정권 퇴진을 요구했다. 결국 노태우의 6·29선언을 받아냈다. 이런 상황에서 인기 절정의 코미디언 김병조는 노태우를 대선후보로 선출하는 6·10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코미디 한토막을 하는 영광(?)을 얻었다. 그리고 민정당 고위 인사가 요구한 원고를 코미디 말미에 읽었다. “민정당은 국민에게 정을 주는 당이고, 통일민주당은 고통을 주는 당이다.”그의 7년 인기는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김병조는 담장 위에서 선택을 강요받았다. 서슬퍼런 독재 상황에서 그는 민정당 간부의 말을 듣든, 듣지 않든 TV스크린에서 사라질 위기였다. 얼마전 전북을 찾아 명심보감을 강연한 그는 “단지 대중을 웃겨 먹고 사는 사람이 실내 정당행사에서 개그 한 토막하고, 그들의 입맛에 맞도록 짜여진 원고 한 줄 읽는 것이 뭐 그리 대수일까 싶었다”며 어리석었음을 후회했다. 그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홀어머니가 군산 구시장통에서 길거리 장사하며 자식을 키웠다. 그의 누나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겨우 인기를 얻어 효도하는 상황을 접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입장을 너그럽게 봐 줄 상황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27년. 김병조는 행복해 보인다. 예상치 못한 인생의 반전이었지만, 부친에게 배운 ‘명심보감’798구절을 학생·대중에게 전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우리 앞에는 많은 길이 있다. 그 길을 어떤 자세로 걸어 가느냐가 문제다. 김병조는 오늘도 명심보감을 강의한다. 지족상족 종신불욕(知足常足 終身不辱·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다), 안분신무욕 지기심자한.(安分身無辱 知機心自閒·분수를 알면 욕됨이 없고, 일의 실마리를 알면 마음이 여유롭다).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내지 말라고, 남을 배려하며 범사에 감사하라고 충고한다.

  • 오피니언
  • 김재호
  • 2014.10.02 23:02

전주 사람 양반

전주한옥마을에 국내외 관광객이 많이 다녀가면서 전주에 대한 평가도 엇갈린다. 서울 등 외지에서는 전주를 갔다 오지 않으면 마치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정도로 인식하는 사람이 많다. 막걸리 한 주전자를 더 시킬 때마다 안주가 더 나오는 그 푸짐한 매력 때문에 관광객들 어깨춤이 절로 난다고 한다. 값도 별로 비싸지 않은데 평소 맛볼 수 없는 안주까지 배부르게 맛볼 수 있다고 칭찬이 자자하다. 한옥마을 구경을 마치고 돌아 갈 때는 풍년제과에 들러 초코파이 한두상자는 손에 들고 간다.보통 관광지에 가면 그 지방 특색 음식을 맛보게 돼 있다. 예로부터 맛의 고장으로 알려진 전주서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비빔밥과 콩나물국밥을 맛본다. 값이 좀 비싸다는 점도 들지만 그래도 향토색 짙은 음식을 맛봤다고 그런대로 만족해 한다.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전주의 인심까지 맛볼 수 있었다고 후한 점수를 매긴다. 전주시민들은 일상화 되었기에 느낄 수 없는 점을 외지 관광객들이 쉽게 느끼는 게 있다. 다름 아닌 ‘가맥’이다. 가게서 북어 계란말이 갑오징어 등 안주를 시켜놓고 맥주를 실컷 마시는 게 다른 지역에서는 없다. 가맥이 하나의 관광문화상품으로 자리 잡은지 오래다.전주시민들은 관광객들이 한옥마을을 많이 찾지만 걱정도 많이 한다. 이대로 계속해서 관광객이 찾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외국인도 더 늘어 날 것인가에 대한 걱정이다. 한번은 몰라도 두번 이상은 찾지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 이유는 전주한옥마을만이 갖는 정체성이 차츰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비싼 땅값이 비싼 상가 임대료를 가져와 음식 값은 물론 모든 물가가 비싸졌다는 것이다. 체험할 것도 별로 없는데 굳이 전주를 두번 다시 찾을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관광객도 늘고 있다.특히 전주사람들에 대한 외지인들의 평가를 한번쯤은 잘 새겨 들어야 할 것 같다. 외지인들이 전주사람들을 흔히 양반이라고 한다.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쉬는 고도라서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외부인의 평가를 액면 그대로 받아 들이기에는 부담스러운 대목이 있다. 그들 가운데는 전주사람들이 이 정권서 장차관 한명 안시켜줘도 불평 한마디 안할 정도로 주민들이 순해 빠져서 양반이란 단어를 써 준다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장·차관 안시켜 준다고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사는 게 나아지고 권력에 대해 아예 체념을 해버려서인지 최근에는 이런 불만의 소리마저 없다고 꼬집는다. 주민들의 의식이 이 정도니까 존재감 없는 정치인이 국회의원 해먹는 건 아닐까. 백성일 상무이사 주필

  • 오피니언
  • 백성일
  • 2014.10.01 23:02

가인(街人) 정신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1887∼1964)는 절제와 청빈의 표상이었다. 유명한 일화가 많다. 1950년대 어느 날 박봉을 참다 못한 한 판사가 사표를 들고 대법원장을 찾았다. 그에게 돌아온 대법원장의 말. “나도 죽을 먹고 있소. 조금만 참고 고생합시다.” 그 판사는 부끄러워 사표를 집어 넣어야 했다. 다른 관청은 외제차를 쓰는데 우리만 나쁜 국산을 쓰니 누가 알아주느냐는 불만에는 “나라 찾은지 얼마나 됐다고…국록을 먹는 우리 아니면 누가 우리산업을 키워주느냐”는 호통이 떨어졌다. 비싼 양복 대신 두루마기를 입었고 점심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다. 손잡이가 부러져 반 토막이 난 도장을 대법원장 재임 9년3개월 동안이나 사용했다. 가인은 또 불의에 대항하는 상징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사사오입 개헌을 비판했고 눈엣가시로 여긴 이 대통령이 사표를 요구하자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오”라고 대차게 응수했다. 독립운동과 무료변론, 서슬 퍼런 독재권력에 맞서 사법부 기틀을 세운 이가 바로 순창 출신의 가인 김병로다. 전북은 가인 김병로와 ‘검찰의 양심’ 최대교(익산) 전 서울고검장, ‘사도 법관’ 김홍섭(김제) 전 서울고법원장 등 ‘법조 3성’을 배출했다. YS-고건 총리 시절, 전주지방법원장에 부임한 경북 봉화출신의 강철구 법원장이 “전북은 법조 성지로 알려져 있는데 비석 하나 없더라”고 가시돋힌 지적을 했다. 그러자 고건 총리한테 편지를 보내 3억 지원을 요청했고 고 총리는 내무부에 지시해 당시 이승우 교부세 과장(군장대 총장)이 지역개발비 명목으로 이 돈을 전주시에 보냈다. 각 분야 인사로 동상건립추진위가 구성되고, 언론인 이치백 전북향토문화연구회 회장이 공동 상임대표를 맡아 추진했다. 전주 덕진공원에 세워진 ‘법조 3성’의 동상은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마침내 ‘가인 기념관’이 건립된다. 전북 법조인들이 ‘법조 3성’을 기리기 위해 전주 만성지구 법조타운에 세우기로 했다. 한데 더 중요한 건 법조인들의 ‘가인 정신’ 실천이다. 벤츠 검사, 막말 판사, 정권 눈치보기 등으로 국민신뢰가 떨어져 있다. “정의를 위해 굶어 죽는 것이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 수만 배 명예롭다. 법관은 최후까지 오직 정의의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1957년 12월 퇴임사). 가인의 꾸짖는 소리는 쩌렁쩌렁한데 현실은 화답할 줄을 모른다. 이경재 수석논설위원

  • 오피니언
  • 이경재
  • 2014.09.30 23:02

서울 장학숙 딜레마

한때 장학숙 건립이 뜨겁게 유행한 적이 있다. 서울의 높은 전세와 하숙비를 고려하여 열악한 지역의 인재들을 지원하겠다는 가상한 취지로 입안된 것이다. 이들이 장차 국가지도자가 되어 그 지역 발전에 큰 기여를 해주리라는 계산이 그 저변에 있다. 이를 통해 교육에 한 맺힌 지역민들의 표를 얻겠다는 저의도 물론 깔려있는 정책이다.그 덕분에 많은 지역의 인재들이 서울의 모모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 덕에 지역의 대학은 더 열악해지고 더불어 인구 및 인재의 서울쏠림은 심화일로에 있다. 지역을 살리겠다는 정책이 오히려 그 지역을 소외시키고 중앙-지방의 차이만 더 조장하고 있다. 지역대학생들의 열등의식만 잔뜩 조장한 채 지역의 푼돈으로 서울 경제를 살찌우고 지역의 인재마저 빼앗기는 꼴이 되고 말았다..잘난 인재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특혜를 별로 고마워하지 않는다. 당연한 특권으로 향유할 뿐이다. 그들이 그것을 은혜로 여겨 지역을 위해 노력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먹이로 훈련시킨 강아지가 먹이 없이도 주인을 위해 봉사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자기 몸 추스르기도 버거워 이 지역과의 인연을 애써 감추려는 이 지역출신 중앙고위층들을 보라!더구나 이제 소수 인재들에 기대어 지역발전을 꾀하는 시절은 지났다. 지역 스스로 내부 역량을 키워가지 못하면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 기다리는 꼴 되기 십상이다. 오려고도 하지 않는 한양낭군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기다림은 새만금 30년으로 족하다!그 예산과 노력, 지역의 대학을 살리는데 모아주는 것이 더 생산적이다. 현재 지방대학은 쇠락의 위기에 처해있다. 문제는 이러한 대학의 쇠락이 바로 지방의 붕괴로 이어지고 다시 이것이 대학의 부실화를 재촉하는 것으로 확대재생산 된다는 점이다. 현존 장학숙 사업은 이런 악순화의 고리를 더욱 튼튼하게 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그런 차원에서 이런 제안을 하고 싶다. 이 지역 대학 소재 도시에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 인재들을 위한 장학숙을 지으라고. 인재육성장학금도 이 지역출신보다는 이 지역 대학에 다니는 인재들, 특히 외국인학생들을 위한 것으로 바꿔가라고. 이를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하고 지역의 대학을 살릴 뿐 아니라 세계와 소통하는 길도 열어가라고. 변덕스러운 개인에 기대지 말고 지속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해가라고. 지역이나 지역대학의 위기가 중앙-지방의 구조적 모순과 함께 얽혀있는 것이니.이종민 객원논설위원

  • 오피니언
  • 기고
  • 2014.09.29 23:02

두 번 째 데뷔

올 가을 한국 연극계의 화제작으로 주목받은 작품이 있다. 지난 9월 21일까지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됐던 중진작가 이강백의 즐거운 복희다. 외진 호숫가 펜션에 살고 있는 여섯 명 주인이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벌이는 마케팅의 실체를 은유와 상징으로 그려낸 이 작품은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 허구와 진실의 경계를 통해 우리시대의 민낯을 들춰낸다.이 작품은 시대를 반영하는 주제로도 그렇고, 작품의 완결성이나 배우들의 연기력, 무대공간의 특성으로 평단과 언론의 호평을 부족하지 않게 받았다. 거장의 신작다운 결실이다.사실 이 작품은 남산예술센터의 2014 공동제작 작품 공모 당선작이다. 대개의 공모전이 신인이나 젊은 작가들의 전유물로 인식되는 문화적 환경으로 볼 때 중진, 그것도 한국을 대표하는 거장이 응모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공모에서 떨어지면 감내해야 할 부담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이다. 이강백도 이런 부담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던 듯하다. 한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공모전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전주 출신인 이강백은 19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등단작 〈다섯〉을 공연했던 극장이 바로 남산예술센터다. 그는 자신이 쓴 희곡이 무대에서 연극으로 공연되는 것을 처음 봤던 그때, 평생 연극을 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 했다. 지난해 오랫동안 몸담았던 서울예대에서 정년퇴임하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도 그때의 마음을 회복하고 싶다는 것이었단다. 그의 공모전 투고는 그런 소망으로 이뤄진 듯하다.7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극작가로 살아오면서 한국 연극을 성장시켜온 그는 우화와 비유가 주를 이루는 수많은 대표작으로 알레고리의 대가라는 별칭을 얻었다. 강한 것과 약한 것,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대립 속에서 현실에서 소외되고 잊혀지는 것들을 자신만의 특별한 형식으로 담아온 그의 족적은 빛난다.지난 주말, 공연 막바지에 즐거운 복희를 보았다. 끝도 없는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이 빚어내는 비극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선과 악, 허구와 진실의 경계다. 세월호의 비극이 여전히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지금, 즐거운 복희가 던지는 시대적 메시지는 역시 울림이 컸다.작가는 이 무대로 다시 데뷔했다고 했다던가. 그의 새로운 시작이 더 기대된다.

  • 오피니언
  • 김은정
  • 2014.09.26 23:02

강암 탄생 101주년 특별전

미술품 경매회사인 A-옥션은 지난해 11월 19일 서예가 강암 송성용의 작품 석 점을 경매에 부쳤다. 이날 경매에 나온 송성용의 작품은 기대 이상의 고가에 낙찰됐다. 경매 전부터 큰 관심을 모았던 전주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 현판 글씨(72×512㎝)가 5000만 원에 팔렸다. 또 추정가 80만~160만 원으로 제시된 66.5×69㎝ 크기의 풍죽도는 80만 원, 추정가 1000만 원~2000만 원으로 나온 107×34㎝ 짜리 백납도 8폭 병풍은 1100만 원에 낙찰됐다. ‘호남제일문’의 낙찰자는 전주사람이고, 단독 응찰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같은 낙찰가는 A-옥션이 이전에 진행한 강암 작품 거래를 훨씬 웃도는 것이었다. 작품을 많이 생산한 것으로 알려진 강암의 작품은 그동안 대개 30만~460만 원 선에서 낙찰됐다고 알려진다. 지역 서단의 자존심으로 알려지는 강암의 작품 가격 치고는 사실 양에 차지 않는 선이다.강암 선생은 1913년에 태어나 1999년에 작고했다. 김제 백산 출신인 그는 부친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 1882-1956)으로부터 한학과 서예를 배웠고, 일제시대에는 창씨개명과 단발을 거부하며 선비정신을 지켰다고 한다. 광복 이후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등 서예의 5체와 사군자, 소나무, 연, 파초 등을 소재로 한 문인화의 대가로 꼽혔다. 전북도립미술관은 강암 선생 탄생 101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시회를 기획, 지난 18일부터 강암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도립미술관의 4개 전시실을 5개 부분으로 나눠 서예, 문인화 등 135점의 작품을 선보이며, 오는 10월12일까지 계속된다. 그런데 왜 100주년을 기념하지 않고, 101주년 특별전을 여는지 모를 일이다. 다만 이현령비현령처럼 도립미술관측은 이번 강암특별전의 주제를 ‘101주년의 새로운 탄생-강암은 정신이다’로 정한 뒤 ‘이번 전시는 숫자 단위를 꽉 채운 100보다는 새롭게 시작하는 101에 무게 중심을 두고 강암이 추구했던 정신의 부활에 의미를 담았다’고 해석을 붙였다. 어쨌든 전북 최고 명필로 꼽히는 서예가의 소중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됐으니 관람객들로서는 반가운 일이다.또 세계소리축제 기간에 함께 열리는 세계서예 전북비엔날레도 소리문화의전당 등 전주 일원에서 열린다. 초가을을 맞아 전주 서단이 가을 들녘만큼이나 풍성하다.

  • 오피니언
  • 김재호
  • 2014.09.25 23:02

호텔 없는 전주

전북에는 부족한 게 너무 많다. 도청 소재지인 전주에 번듯한 호텔이 없다는 게 가장 자존심 상한다. 전통문화도시인 전주가 한류의 원류로 소개돼 평일에도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주말에는 한옥마을에 차 댈 곳이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다. 지난해는 한옥마을에 500만이 다녀갔고 올해는 700만이 찾을 전망이다. 한옥마을에 관광객이 물밀듯이 몰려들지만 최고급 호텔 등 숙박시설과 전통의 정취를 자아내는 상가가 보잘 것 없어 경유관광지로 전락하고 있다.요즘 호텔은 숙박기능만 하지 않는다. 각종 회의를 열 수 있는 컨벤션 기능은 물론 비즈니스 그리고 쇼핑 레저 휴식 등을 종합적으로 취할 수 있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발전해 가고 있다. 각 도시가 그래서 경쟁적으로 최고급 호텔을 유치하려고 안간힘을 쏟는다. 전주는 어떤가. 도청 앞에 호텔부지로 떼어 놓은 땅이 팔리지 않자 급기야 주상복합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건축허가를 내줬다. 도청 앞에 초고층 42층 주상복합 아파트가 신축 중에 있다. 부산 해운대도 아닌 이곳에 초고층 아파트가 우뚝 솟아 도청사부터 조망권을 가린다. 시민들은 한치 앞을 못 내다보는 근시안적 행정에 불만이 많다.52년 만에 수원에서 전주로 이전해온 농촌진흥청은 개청 이후 각종 국제회의를 열어야 하지만 전주에 대규모 컨벤션센터나 호텔이 없어 애를 먹고 있다. 수원에는 이 같은 시설이 충족돼 불편이 없었지만 전주에는 큰 호텔이 없어 행사 장소를 제주나 인접 광주 대전으로 옮겨야 할 상황이라는 것. 문제는 혁신도시만 덩그러니 조성했을 뿐 그에 앞서 수용태세를 전혀 갖춰 놓지 않아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 그 만큼 전북도와 전주시의 대비가 철저하지 못했다. 지금도 이 같은 상황인데 언제 이 문제가 해소될지 기약이 없다. 원래 전북도는 이 같은 상황이 도래될 것을 예견, 전주 종합경기장 자리에 전시 컨벤션센터를 짓는 조건으로 도유재산인 종합경기장을 전주시에 무상 양여했다. 송하진 시장 시절에 종합경기장의 일정부지를 롯데쇼핑에 제공, 호텔과 쇼핑몰 영화관을 짓도록 하고 롯데쇼핑은 월드컵경기장 주변에 1종육상경기장과 야구장 등 대체시설을 짓는다는 계획을 마련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김승수 시장이 선거 때 자신을 도와준 로드숍 업주들의 이익 대변을 위해 쇼핑몰이 들어서는 걸 반대하고 있다. 전주시민 68%가 찬성하는 종합경기장 개발 건을 김 시장이 좌고우면 하는 건 바람직스럽지 않다. 김완주 전지사와 함께 도에 있을 당시 전주시에 무상 양여한 종합경기장을 이제 와서 김시장이 반대하는 건 모순된 행동으로 전주 발전에 결코 도움이 안 된다. 백성일 상무이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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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성일
  • 2014.09.24 23:02

서남대 사태

남원 서남대 설립자인 이홍하(75)씨는 광주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부업으로 목욕탕을 운영해 많은 돈을 벌었다. 광주 시내에 땅을 사 1981년 여상을 설립했다. 이후 10여년 사이에 광양 한려대와 보건대 등 6개 대학을 세웠다. 1991년 4년제 종합대학으로 개교한 서남대도 그 중의 하나다. 교과부 감사 결과 교비를 빼내 학교를 설립하는 식이었다. 이씨는 결국 등록금과 국고보조금 횡령(1004억원) 등의 혐의로 2012년 11월 구속됐다. 교육부는 지금 관선이사 8명을 파견해 서남대를 관리하고 있다. 서남대가 존폐 기로에 서 있다. 의사출신인 새누리당 박인숙 의원(서울 송파 갑)은 지난 6월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이홍하는 교육계의 유병언”이라고 비판하고 서남대 폐교를 요구했다. 폐교될지, 존치될지 서남대 사태는 정치권과 지역사회의 핫 이슈다. 이런 틈을 타 목포대와 순천대가 의대 유치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목포대는 1990년 3월 의대설립을 교과부에 건의한 뒤 100만명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유치활동을 펼치고 있다. 새정치연합의 중진인 박지원 의원(전남 목포)이 중심에 있다. 순천대 역시 2012년 12월 의대설립추진위를 결성하고 서명운동을 벌이면서 의대 유치경쟁에 뛰어들었다. 박근혜 정부 실세인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전남 순천 곡성)은 7.30 보궐선거 때 순천대 의대 유치를 선거공약으로 내건 바 있다. 서남대 사태를 보는 심정은 착잡하다. 설립자 이씨의 ‘막장 사학’ 운영과 지역의 이익이 상충하기 때문이다. 학생과 교직원들의 입장이 있고, 정치논리에 휩싸여 있는 점도 그 이유다. 대학은 지역발전의 중요한 인자(因子)다. 서남대의 핵심은 의대다. 폐교 수순을 밟은 뒤 의대가 전남의 대학에 유치된다면 남원으로선 이런 낭패가 없다. 남원시의회와 서남대 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위(공동대표 이병채·김상근)가 서남대 정상화를 촉구하고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서남대 의대 협력병원인 예수병원도 이 문제를 주시하고 있다. 서남대 사태를 다룰 기관은 교육부와 국회다. 그런데 전북 국회의원이 농림축산수산 분야에는 3명씩이나 몰려 있으면서도 교육 관련 상임위에는 단 한명도 없다. 지역이익의 관점이 소홀히 다뤄지지 않을까 걱정된다. 또 지역사회 역시 너무 조용하다. 이런 식이라면 눈 뜨고 당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경재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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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경재
  • 2014.09.23 23:02

문화와 관광

개를 데리고 새벽산책을 해본 사람은 안다. 참 성가시다는 것을. 따라 오는 것이 아니라 이끌고 간다. 먹을 게 없나 두리번거리고 영역 표시하느라 가다 서다를 계속한다. 주객이 전도되어 개 뒤꽁무니 쫓다가 산책 기분 망쳐버리기 십상이다. 문화와 관광의 관계를 이에 비유하기도 한다. 문화가 관광을 이끌어야 하는데 끌려 다니기 일쑤라는 것이다. 느리고 더딘 속성 때문에 다른 것과 만나면 꼭 이런 수모를 당한다. 문화공보부 시절에 문화는 공보의 수단이었을 뿐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문화부라 칭한 적도 있지만 그것도 잠시 돈도 못 벌고 힘도 없어 곧바로 관광과 체육을 업어야 했다. 이름 하여 문화체육관광부. 이것이 문화의 속성이요 한계라면 한계다. 문화가 돈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돈을 목적으로 하면 문화답지 못해 결국 돈도 놓치게 된다. 문화가 돈벌이를 목표로 하는 관광과 묶이는 것을 경계하는 까닭이다. 문화재단은 이러한 문화의 속성과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공공의 예산으로 꾸려가는 곳이다. 그 목적이 돈을 벌자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잘 쓰자는 데 있다. 기금 확보가 중요하고 전문성과 독립성을 갖추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래야 건강한 문화가 가능하며 이를 통해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도 기여하게 된다.돈 버는 것이 중요한 관광은 문화재단의 일이 아니다. 돈이 되기 때문에 공공예산 지원 없이도 가능하다. 수많은 관광회사나 여행사를 보라! 관광정책을 종합적으로 체계화하려면 관광공사를 세워 이끌어가게 하면 된다. 문화재단은 느리고 더딘 문화를 전문성을 갖추어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일을 해야 한다.문화는 분명 관광의 강력한 원동력이다. 그러나 관광을 목표로 하는 순간 문화의 건강성을 잃어 결국 관광자원이 되지도 못한다. 전주한옥마을이 각광을 받게 된 것도 그곳의 독특하고 건강한 문화 덕분이다. 요즘 위기를 운위하는 것도 돈벌이에 그 문화가 묻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시정되지 않으면 관광의 열기도 이내 식어버릴 것이다. 제대로 된 문화만이 관광자원도 되고 산업도 된다. 돈의 유혹에 넘어가면 허접 쓰레기로 전락하여 돈도 자원도 되지 못한다.사람과 개의 습성이 다르듯 문화는 문화의 길이 있고 관광은 관광의 전략이 있다. 잘못 섞으면 시너지는커녕 괜한 갈등만 조장할 수 있다. 진정 돈과 사람을 모으겠다면 재단이 아니라 공사에서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종민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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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9.22 23:02

오하라미술관의 힘

구라시키(倉敷)는 일본 오카야마 현에 있는 작은 도시다. 바다에 직접 접해 있진 않지만 작은 강을 끼고 있어 예부터 해안교통의 요지로 번성했다. 곡물의 집산지이기도 했던 이곳에는 자연히 돈과 사람이 몰리면서 물류유통의 중심지가 됐으며 상업이 발전하면서 거상들의 저택과 큰 창고들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도심을 통과해 흐르는 작은 운하와 회벽, 검은색 지붕의 주택과 창고거리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 도시의 큰 자산이 됐다. 일본정부는 이곳을 국가 중요전통건조물군 보존지구로 지정하고 구라시키미관지구(美觀地區)라 이름 붙였다. 해마다 30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 올 정도로 이름난 관광지가 된 구라시키미관지구에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또 하나의 공간이 있다. 일본 최초의 사설미술관인 오하라미술관이다. 1930년에 문을 연 오하라미술관은 일본 최초의 서양식 근대미술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미술관의 품새가 예사롭지 않다. 로댕, 고갱, 엘 그레코, 마네와 모네, 마티스, 르누아르, 피카소, 칸딘스키를 비롯해 세계미술사를 관통하는 작가들의 걸작이 이 작은 미술관에 모여 있다. 소장품만도 3500여점. 그 질적 수준은 물론이고 양적으로도 유럽의 이름난 대형미술관과 견줄 수 있을 정도다. 인구 47만 명의 크지 않은 도시, 이 작은 미술관이 일본 근대미술의 가장 중요한 미술관으로 꼽히는 이유다. 오하라미술관을 세운 사람은 구라시키에서 부를 축적한 기업가 오하라 마고사부로(大原孫三郞)다. 오하라에게는 화가인 친구가 있었다. 당대 재능을 인정받았던 고지마 토라지로(兒島虎次郞)다. 오하라 집안의 후원으로 공부했던 고지마는 오하라와 벗하면서 예술적 영감을 교류했다. 오하라는 고지마를 통해 유럽의 숱한 걸작들을 수집하고 자신 또한 일본의 작가들과 교류하며 근현대 작품을 수집했다. 두 사람의 우정과 서로에게 보내는 신뢰는 각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지마는 48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오하라미술관은 고지마가 세상을 떠난 바로 이듬해에 건립됐다. 오하라의 슬픔은 참으로 컸던 것 같다. 오하라 미술관 전시실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작품은 ‘기모노를 입은 벨기에 소녀’다. 이 그림은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세계적 거장 그 누구의 작품도 아닌 친구 고지마 토라지오의 대표작이다. 미술관의 가장 상징적 공간에 고지마의 작품이 놓인 배경은 의미심장하다. 그만큼 감동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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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은정
  • 2014.09.19 23:02

과유불급

기원전 211년 진시황제가 전국을 순행하던 중에 객사했다. 이 후 정국에 대해 사마천은 ‘사기’에서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가 시황제의 유서를 위조, 장자 부소가 자살하게 만든 후 부소의 동생 호해를 황제로 만들었다고 소개한다. 이 후 환관 조고는 이사를 함정에 빠뜨려 죽이고, 지록위마하며 2대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국정을 농단했다. 결국 첫 통일 중국은 5년만에 망했다.이사는 젊었을 때 하급관리였다. 화장실에서 인분을 먹다가 인기척에 놀라 달아나는 쥐들을 자주 목격한 이사는 화장실에서 똥을 먹고 사는 지저분한 쥐와 곡식 창고에서 여유있게 인간의 곡식을 먹으며 사는 쥐의 처지를 놓고 고민했다. 큰 꿈을 품게 된 이사는 관직을 그만 두고 순자 밑에서 한비자와 동문수학하며 화려한 삶을 꿈꿨다. 그는 진나라에 가 왕의 책사가 됐고, 중국 천하 통일에 큰 역할을 했다. 말단 관리였던 이사는 재상까지 올라 돈과 명예, 권력을 모두 거머쥐었다. 하지만 이사는 몸이 찢겨 참형되는 최후를 맞았다.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한신도 젊은 시절 별볼일 없었다. 칼을 차고 폼을 냈지만, 하릴없이 놀고 먹는 모습이었다. 이같은 한신을 앝잡아 본 동네 불량배들이 싸움을 걸었다. 한신은 장도를 뽑아 자신을 둘러싼 청년들에게 휘두르는 대신 무릎 꿇고 엎드려 상대방의 가랑이를 기었다. 비웃음을 산 한신은 겁쟁이로 찍혀 살았지만, 기원전 209년 항량이 조카 항우와 함께 군사를 일으킨 뒤 회수를 넘어 하비성에 진을 쳤을 때 항량의 휘하에 들어가 장부의 큰 뜻을 펼치고자 했다. 하지만 항씨는 한신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했다. 훗날 한신은 유방 휘하로 옮겨가 역발산 기개세의 주인공 항우를 격파하는 등 한나라 창업 일등공신이 됐다. 하지만 세력이 커진 한신을 유방이 경계하면서 양측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금이 생겼고, 결국 유방에 의해 제거됐다. 한신은 가랑이 사이를 기면서 동네 불량배의 의심을 피했지만, 권력의 의심만은 피하지 못했다. 복잡한 인간사회에는 끝없는 야욕이 있고, 제 욕심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싸운다. 그 주변에는 사악한 음모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이사와 한신같은 지략가도 그 음모와 함정을 벗어나지 못했다.과유불급이다. 더 큰 욕심과 경쟁은 정신과 생명을 위협한다. 결과물도 화려하거나 영원하지 않다. 그저 남가일몽일 뿐이니, 적당히 그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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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14.09.18 23:02

전북대 총장 선거

서울공화국시대가 활짝 열리면서 지방대학들이 더 맥을 못추고 있다. 우수한 자원은 말할 것 없고 그렇지 않은 학생들까지 덩달아서‘인 서울’만 노리기 때문이다. 2017년부터는 대학 학령인구 저하로 대학이 반토막 날 위기에 처해 있다. 대학마다 학생 정원 확보로 아우성이다. 이미 학생 모집이 안 돼 문 닫아야 할 경우가 생겼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전북대는 그간 강도 높은 구조개혁과 구성원들의 뼈를 깎는 노력에 힘입어 확실하게 학교 위상을 높여놨다. 전북하면 떠오르는 부정적 이미지가 낙후인데 전북대가 이를 극복하고 지역거점대학 가운데서도 가장 경쟁력이 있는 대학으로 솟은 건 자랑이다. 서거석 총장 취임전만해도 40위권으로 축 처져 있던 대학이 지금은 10위권 정도에 랭크될 정도로 발전했다.미국 실리콘밸리를 예로 들 것도 없이 대학은 지역발전의 중심축이다. 그간 전북이 낙후를 거듭했지만 그나마 전북대가 꾸준하게 경쟁력을 확보해 놓아 미래가 어둡게만 보이지 않는다. 한때 일부 교수들이 연구비 비리로 사법처리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상당수 도민들은 전북대가 잘 돼야 지역이 발전해 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전북대는 그냥 대학이 아니다. 도민들의 정성어린 성금이 보태져서 만들어진 거점국립대학이라서 더 기대치가 크다. 하지만 최근 지역발전을 선도해야할 전북대가 총장선거로 내홍을 겪어 도민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전북대는 교수 몇몇 사람이 좌지우지할 대학이 아니다. 총장선거는 법에 명시된 대로 하면 그만이다. 법적 구속력이 없는 직선제는 또 다른 분란을 만들기 때문에 구성원들이 처음부터 아예 관심을 안 갖는 게 상책이다.교직원 중에는 간선제도 문제가 있다고 여기겠지만 그래도 법적 구속력을 갖는 제도인 만큼 따르는 게 순리다. 현재 동창회나 도민들이 전북대 총장 선거에 비상한 관심을 갖는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전북대가 갖는 위상도 위상이지만 그간 각고의 노력을 통해 쌓아 올린 학교 명성이 행여 총장 직선제로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해서 걱정을 한다. 지금 우리는 가치관의 혼돈 속에 빠져 있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어느 쪽이 바른 길인지를 놓고 헷갈려 있다. 설령 주변 상황이 혼돈스러워도 전북대를 발전시킬 인물을 총장으로 선출해야 한다. 대학이 세상을 바르게 이끌어야지 거꾸로 바깥에서 대학을 걱정하면 안된다. 백성일 상무이사 주필

  • 오피니언
  • 백성일
  • 2014.09.17 23:02

6차산업

서울대 농대를 졸업한 뒤 농협중앙회 신용부문 대표와 농협대 교수를 지낸 현의송(72)씨는 6차 산업화야말로 우리 농촌의 희망이라고 강조한다. 2005년 일본 농촌을 배낭여행으로 둘러보면서 농업·농촌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6차 산업에서 찾았다. 그리고는 ‘6차 산업을 디자인하라’는 책을 냈다. 책에는 ‘그린투어리즘의 메카 우키하’, ‘전통문화 유산을 상품화한 시라가와 사람들’, ‘농업디즈니랜드, 사이보쿠’, ‘돼지고기의 명품 가고시마 흑돈(黑豚)’, ‘테마와 감동으로 고객 사로잡는 이카노사토 종합농장’ 등 성공 사례들이 즐비하다. 또 ‘식문화를 창조하는 우마지무라 농협’, ‘지역을 활성화한 기노사토농협 파머스마켓’ 등의 사례처럼 농협이 혁신 주체가 돼 지역을 활성화시키고 있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요즘 ‘6차 산업’이 각광 받고 있다. 6차 산업은 1차 산업인 농림수산업과 2차 산업인 제조·가공업, 3차 산업인 서비스업을 결합시킨 산업을 일컫는다. 사실 농사 짓는 것만으로는 힘들고 수지도 맞지 않는다. 하지만 가공하거나 직매장을 통한 직거래로 2차 산업화를 하면 부가가치가 높아진다. 나아가 어메니티(쾌적함·농촌다움)를 활용한 그린투어리즘과 체험, 식당운영 등 3차 산업으로 연계시키면 소득도 나아지고 재미도 쏠쏠하다. 6차 산업은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한국농촌경제연구원장으로 활동하던 당시 주창한 개념이다. 1차×2차×3차 산업이 결합된 6차 산업화를 할 때 비로소 농촌과 농업에도 희망이 있다고 본 것이다. 6차 산업은 박근혜 정부의 국정과제이자 전북의 핵심 농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6차 산업은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성과가 저절로 담보되지는 않는다. 인프라와 기술, 정직과 신뢰, 고객과의 소통, 틈새시장 개척, 홍보와 마켓팅 등 어느 것 하나 손쉬운 게 없다.농업·농촌정책의 본산인 농촌진흥청이 어제 전북혁신도시에서 신청사 개청식을 갖고 한국 농생명식품산업의 실리콘밸리를 다짐했다. 전북도의 농업정책도 사람 찾는 농촌, 제값 받는 농업, 보람 찾는 농민 등 이른바 ‘3락(三樂) 농정’이다. 이 기회에 농업·농촌정책을 주도면밀하게 디자인할 필요가 있다. 구호나 말로 하는 건 전시행정 밖에 안된다. ·이경재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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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경재
  • 2014.09.16 23:02

'슬픔은 힘이 되고'

때로 슬픔은 힘이 되기도 한다. 지난 봄과 여름,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슬픔으로 안아야 했다. 그 덕에 자본과 야합한 정치권력의 비인간적 횡포를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신자유주의를 앞세운 천민자본주의의 민낯, 그것에 영합한 식기(識妓-지식을 파는 기생, 혹은 識寄-기생하는 지식인)들의 뻔뻔스러운 백마비마의 억지 논리를 참아낼 수 있는 근기도 길렀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듯한 일베와 어버이 무리들의 폭거에도 절망하지 않는 저력까지 공유하게 되었다. 그 지극한 슬픔 덕분에. 그 슬픔이 진양 장단이나 계면조로 풀어지기도 하고 춤이나 풍물의 신명으로 승화되기도 한다. 북이나 장구의 장단이 독려의 응원가가 되어주고 아쟁이나 해금의 흐느낌이 격려의 박수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한으로 맺힌 것들을 신명으로 풀어내며 이 풍진 세상의 희망가로 이어진다. 이것이 바로 전통음악의 뿌리이자 힘이리라!지난 주말 서울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는 이렇듯 희망을 되살리는 마력을 지닌 우리전통음악 한마당이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 스물 셋의 이름으로 펼쳐졌다. 김무길, 김광숙, 이태백, 안숙선, 김일륜, 동남풍 등 이 시대 최고의 명인들이 모여 한풀이 신명의 씻김굿을 고향을 잃은 서울 사람들에게 선사했다. 출연자 모두 이 지역의 자랑이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장인들!고수는 특별한 연출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진정성만 갖추면 그 숨길 수 없는 내공이 무감각한 영혼들마저 뒤흔들어버린다. 세월호에, 정부의 무능과 국가의 뻔뻔함에, 굳어져버린 마음들이 거문고, 아쟁, 가야금 산조에 꿈틀거리더니 독감으로 청을 낮춘 안숙선명창의 춘향가 한 대목에 탄성과 환호로 피어났다. 신명의 끝을 보여주겠다! 동남풍의 숨을 멎게 하는 가락은 결국 모든 이들의 마음을 일으켜 세우고 말았다. 이 감동의 탄식은 전주다움이 듬뿍 담긴 뒤풀이로 이어졌다. 칭찬과 감사의 인사말이 막걸리 향기와 어우러지면서 서울의 밤은 저물고, 피곤 가득한 뿌듯함 가라앉히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서울 시장과 교육감까지 참여하여 이 지역과의 소통과 교류를 다짐하기도 했으니 슬픔은 기어이 힘이 되고 만 셈이다.그렇게 변방이 중앙을 감동시켰다. 가장자리의 천덕꾸러기 전통이 오늘의 감동을 통해 미래로 우뚝 서고 슬픔의 아픔이 그에 힘입어 감격의 신명으로 승화되는 놀라운 연금술, 이를 마련한 모든 이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종민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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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 2014.09.15 23:02

라스트포원

2000년대 초반, 힙합 대열에 혜성처럼 등장한 비보이가 있다. 전주 출신 비보이그룹 ‘라스트포원(Last For One)’이다. 재기발랄함과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춤으로 무장한 라스트포원은 2002년 거리로 나온 이후 각종 대회를 휩쓸면서 주목을 모았다. 2005년에는 비보이들의 꿈인 독일‘배틀 오브 더 이어(Battle of the Year)’에서 우승하면서 정상에 섰다. 그 대회에서 라스트포원 멤버들은 ‘아티스트’라고 쓰인 네임카드를 받았다. ‘우리도 아티스트’라는 자긍심을 그때 갖게 됐다. 비보이를 예술가로 대접하는 국가에 대한 경외감도 생겼다. 춤으로 세상과 소통해온 이들의 이야기는 영화(플래닛 비보이)로 제작되면서 더 널리 알려졌다. 라스트포원은 모든 비보이들의 우상이 되었지만 2009년, 전속되어 있던 기획사가 파산하면서 현실은 고단해졌고, 미래는 암울했다. 불안한 하루하루를 맨손으로 버티면서 갈등과 고뇌는 깊어졌다. 그러나 연습실이 없어 더부살이로 전전하면서도 춤으로 세상과 소통하겠다는 의지와 꿈을 버리지 않았다. 이들이 만든 춤과 음악은 아주 서서히 생명을 얻기 시작했다. 떠났던 멤버가 다시 돌아오고 비보이 춤만으로도 행복해하는 멤버가 새 자리를 채웠다. 어느사이에 20대와 30대가 된 라스트포원의 여덟 명 비보이들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시대를 읽어내는 춤, 희망과 위안을 주는 춤을 만들어 대중들을 만나고 싶었다. 라스트포원의 리더인 조성국은 ‘이제 길이 조금씩 보인다’고 했다. 그런데 추석 연휴, 비보가 전해졌다. 멤버 최선우의 사망 소식이었다. 그는 지난 7일 고향집을 찾았다가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라스트포원 주니어로 활동하다 군 입대를 한 그는 지난 봄, 제대하자마자 라스트포원에 합류했다. ‘3년 동안 춤을 출 수 없는 일상이 너무 힘들었다’는 그는 춤에 일상을 걸었다. 20대 후반, 춤을 추기에는 적지 않은 나이지만 비트가 강하고 빠른 음악을 즐겼던 춤에 관객들은 열광했다. 춤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싶었던 그가 무대로 관객을 다시 만난 지 5개월. 오랜 기다림으로 만난 무대는 생애만큼이나 짧았다. 사실 그의 이름은 낯설다. 스타들의 온갖 일상에 매스컴이 주목하는 시대지만 무대에서 빛났던 한 비보이의 사망소식은 지인의 블로그로 간신히 만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영원한 라스트포원, 그의 명복을 빈다.

  • 오피니언
  • 김은정
  • 2014.09.12 23:02

지리산흑돈 거리

남원시 인월면 소재지에서 88고속도로 지리산나들목 쪽으로 가다보면 오른편에 시골 치고는 제법 큰 건물과 간판이 눈에 띈다. 남원흑돈클러스터사업단과 고원흑돈이다. 1층에는 버크셔클럽이란 식당과 정육 등 가공제품 판매 코너가 자리잡고 있다. 남원흑돈클러스터사업단이 운영하는 버크셔클럽의 주요 메뉴는 물론 흑돈이다. 흑돈명품한마리 메뉴는 삼겹살과 목살, 뒷다리살 등 6개 부위가 모듬으로 나오는데 그 맛이 일품이다. 지리산흑돈 고기는 일반 삼겹살처럼 노릇노릇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쇠고기 정도 익었을 때 먹어도 된다. 비계 맛이 고소하기 이를 데 없다. ‘퍽퍽살’인 뒷다리살은 넓고 얇게 썰어 나오는데, 부드럽다. 부위 부위마다 시중의 일반 돼지고기, 흑돼지 고기 맛과는 차원이 다르다. 풍부한 육즙, 부드러우면서 쫄깃함이 살아 있는 살코기, 마치 설탕을 친 듯한 단맛까지 그대로 배어 나오기 때문이다. 남원흑돈클러스터사업단 관계자는 “지리산흑돈은 육종전문가인 박화춘 박사가 개발한 100% 순종 버크셔만의 경쟁력”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시중의 일반 흑돈은 잡종 흑돼지다. 품질 편차가 너무 크고 지리산흑돈에 비해 품질이 크게 떨어진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버크셔 순종을 육종했다는 지리산흑돈과 잡종흑돈, 토종흑돈, 똥돼지, 토종흑돼지 등 털이 검은 돼지를 둘러싼 진실이 뭔가 의문스러워진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토종 흑돼지는 없다. 자료에 의하면 1910년 무렵까지 토종흑돼지가 있었지만, 이 무렵부터 일제가 버크셔 등 외국종을 들여와 개량에 나섰고, 해방 이후에는 대부분 잡종 흑돼지가 됐다. 토종흑돼지는 체중이 75㎏에 불과, 경제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또 육종학상으로, 제아무리 좋은 품종이라도 육종관리가 안된 채 3년이 넘으면 고유 특성이 떨어지게 돼 있다. 전문가의 철저한 육종관리가 계속돼야 고급 품질이 유지된다. 결국 지리산흑돈을 제외한 국내 검은 털 흑돼지는 모두 잡종이라고 보는 게 맞다. 2004년 남원흑돈클러스터사업단을 출범시킬 당시 박화춘 박사는 이 잡종 흑돼지로는 사업에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선택한 것이 바로 버크셔다. 그는 미국에서 들여온 버크셔를 육종, 한국 유일의 100% 순종 버크셔를 시장에 내놓았다. 전북이 만든 최고의 상품이다. 남원이나 전주 도심에 ‘지리산흑돈 거리’가 생겨 관광객이 북적거릴 날도 머지 않아 보인다.

  • 오피니언
  • 김재호
  • 2014.09.11 23:02

기부문화의 진화

아이스 버킷 챌린지가 열풍을 몰고 왔다. 확산의 힘은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에 있다. 아이스 버킷 챌린지는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루게릭병(근위축성측색경화증)에 대한 관심과 후원을 모아내기 위해 시작된 사회운동이다. 참여자는 얼음물을 뒤집어 쓰거나 후원을 하게 되는데, 이후 24시간 안에 다시 대상자 3명을 지명해 참여하게 하는 릴레이방식으로 운동을 확산하고 이어간다. 얼음물을 뒤집어 쓰지 못하는 경우엔 100달러를 대신 기부하도록 되어 있다. 기부문화의 진화다.올 여름부터 급격히 퍼지기 시작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아이스 버킷 챌린지는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게이츠, 애플 CEO 티모시 쿡, 페이스 북 CEO 마크 주커버그를 비롯, 스티븐 스필버그, 리오넬 메시, 레이디 가가 등 각 분야 세계적 명사들이 참여하면서 확산의 가속도가 붙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대상자로 지목받아 얼음물을 뒤집어 쓰는 대신 100달러를 기부하는 방식으로 답했으며 러시아 푸틴 대통령도 지목을 받았다고 한다.우리나라에서도 지역과 계층, 분야를 가리지 않고 아이스 버킷 운동이 이어지고 있다. 정치인과 연예인들의 아이스 버킷 참여가 늘어나면서 인터넷에는 그들의 동영상과 사진이 연일 중계되고 있다.유행처럼 번지다보니 부작용도 없진 않은데, 경우에 따라서는 취지가 가려지고 홍보 수단으로만 이용된다는 반론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이 가져온 기부문화의 성과는 놀랍다.아이스 버킷 챌린지를 처음 시작한 미국의 ALS(근위축성 측삭경화증루게릭병) 협회는 지난 8월 29일까지 기부금 1억 90만 달러를 모금했다고 밝혔다. 행사를 시작한지 한달 만이다. 이 협회의 지난해 같은 기간 모금액은 280만 달러였다니 놀라운 변화다. 한국루게릭병협회 역시 아이스 버킷 운동이 본격화된 지난달 이후 기부액이 2억원을 넘었다고 밝혔다.이 운동이 퍼져나가면서, 좋은 취지로 시작되었지만 루게릭병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환자를 후원하는 본질보다 홍보수단으로 전락하거나 유명인들의 인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의 변질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돌아보면 이 운동 만큼 짧은 시간에 기부문화를 대중화시킨 사례는 거의 없다. 사실 릴레이 방식의 캠페인은 그동안에도 여러 분야에서 시도되어왔다. 그러나 아이스버킷 챌린지의 독특한 방식은 기부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주면서도 기부를 독려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성공한 사례다. 의미있는 일을 서로에게 권할 수 있다면 건강한 사회다. 아이스 버킷 챌린지의 확산을 아직은 반가운 마음으로 주목하는 이유다.

  • 오피니언
  • 김은정
  • 2014.09.05 23:02

익산시의 약속

정부는 1994년 도·농 통합 작업을 강력히 진행했다. 인접 시·군을 합쳐 통합시로 만들었다. 1995년 지방자치단체 출범을 앞둔 포석이었다. 전북은 통합 대상인 전주시-완주군, 이리시-익산군, 군산시-옥구군, 김제시-김제군, 정주시-정읍군, 남원시-남원군 중에서 전주-완주만 통합에 실패했다. 전주-완주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제자리 걸음이다. 그동안 세 번의 통합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단체장과 국회의원 등 정치적 이익 집단들이 통합 반대를 선동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통합 작업은 도지사와 전주시장, 완주군수가 통합 찬성 입장을 밝힌 상태에서 진행됐지만 결국 반대 세력에 눌렸다. 이를 놓고 단체장, 조합장, 국회의원 등 정치적 이해 관계를 가진 세력이 물밑에서 반대 여론을 조종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1994년 정부가 시·군 통합을 밀어붙여 대부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관선 단체장들 때문이었다. 정부는 행정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는 관선 단체장들을 내세워 통합을 관철시켰다. 남원과 김제는 별다른 걸림돌이 없었다. 정주시와 정읍군은 조금 달랐다. 하지만 전통성, 역사성을 중시하고 이름을 ‘정읍’으로 정하면서 통합에 성공했다. 군산시-옥구군, 이리시-익산군은 진통이 있었다. 도·농 통합이 공식 거론되기 전, 옥구군은 군산시내에 있던 군청사를 대야면으로 이전하기 위해 신청사를 신축하고 있었다. 당연히 반대 여론이 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합에 성공한 것은 군산시 구성원들의 큰 양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군청사 입주가 불발된 대야는 특별한 발전이 없는 상황이다.익산군은 함열을 중심으로 가장 독립적인 곳이었다. 때문에 주민 반발이 가장 거셌다. 당시 익산군수는 주민들로부터 멱살을 잡히는 등 온갖 수모를 당했다. 그러면서 통합 서류에 서명했다. 당연히 당시 주민 정서를 고려해 통합시 이름을 익산시로 하고, 통합시 청사를 북부권(함열)으로 이전하는 약속도 끌어냈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하지만 사실상 지켜진 약속은 없다. 군청과 함께 관계 기관들이 모두 빠져나갔을 뿐이다. 갈수록 실망 뿐이다. 지난달 27일 익산시의회는 익산시가 제출한 시청 9개 부서 함열 이전 관련 예산을 모두 삭감했다. 통합 농촌지역이 이런 불이익을 받는다면 완주군이 전주시와 통합할 이유가 있을까. 통합 반대자들을 누가 탓할까.

  • 오피니언
  • 김재호
  • 2014.09.04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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