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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등산객이 부쩍 늘면서 유명산의 비좁은 둥산로에서는 가볍게 넘기기 힘든 일이 자주 발생한다. 등산객의 발길을 엇갈리게 하는 동선(動線)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 오른손잡이가 대부분이다. 오른손으로 등산로의 난간등을 잡고 오르내리는 것이 편하다보니 본의아니게 우측통행을 하게 된다. 평소 습관대로 좌측통행을 하는 등산객들과 부딪칠 수 밖에 없다. 상식을 벗어난 행동과 현실 사이에 빚어지는 부조화인 셈이다.이같은 모습은 좁은 산길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접하는 일이다. 우리는 어려서 부터 배운대로 '사람은 좌측통행, 차량은 우측통행'이란 공식을 거의 세뇌 수준으로 받아들여 왔다. 공중도덕의 기본이며 핵심으로 여겨왔다.원칙과 현실 사이 괴리의 대표적 사례가 횡단보도 통행이다. 횡단보도에서는 우측보행이 원칙이다.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달려오는 차량과 보행자간의 거리가 그만큼 멀어 안전하기 때문이다. 생활 주변의 회전문이나 지하철 개찰구등도 우측통행이다.우리의 좌측통행 연원은 일제 식민시대와 연결된다. 1921년 조선총독부는 일본식 교통체계에 맞춰 좌측통행으로 바꿨다. 그에 앞서 1905년 제정된 대한제국 규정은 우측보행이었다. 일본의 좌측통행은 왼쪽에 칼을 찬 사무라이들이 마주오는 상대와 칼이 부딪치지 않도록 왼쪽으로 걷던 습관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그럴듯하다. 해방후인 1946년 미군정은 차량통행을 우측으로 변경했으나 좌측보행은 그대로 두었다. 이것이 그대로 이어져 88년동안 원칙으로 굳어진 것이다.정부는 현행 좌측통행 보행문화를 내년 7월부터 우측통행 원칙으로 전환하는 개선방안을 지난 4월 발표했다. 이에 앞서 10월 부터는 서울 전체 지하철 역사 안에서 우측보행이 시행된다고 한다. 좌측보행에 맞게 설치된 시설물도 우측보행에 맞게 정비한다.80여년된 관습을 하루 아침에 바꾸는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보도와 차도가 구분되지 않은 도로의 보행방식은 차량과 마주보고 통행하는게 안전하기 때문에 그대로 좌측보행이 지켜진다. 자칫 혼란이 가중될 것으로 우려되는 대목이다. 아무튼 철저한 준비와 계도로 혼란을 최소화하고 사고도 줄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국민의 안전이 가장 우선돼야 하기 때문이다./박인환 주필
정운찬 국무총리 후보자에 대한 검증이 본격화 되면서 병역문제가 도마위에 올라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 5명중, 1명은 병역면제를 받았다는 조사도 있다. 병역 면제자들이 너무 많이 국회에 진출해 있다. 이중에는 징집 당시 신체 허약자들도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후 몸이 건강해져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정치인이 되었다는 것이 납득이 가지않는 부분이다.아무튼 병역을 신성한 의무로 생각하기 보다는 어쩔수 없이 감내해야하는 부역(負役)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너무도 많다. 이런 의식은 조선사회의 잘못된 전통과도 연관된다. 고대 사회에서는 귀족이 전사계급(戰士階級)이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군복무는 당연지사(當然之事)였다.서양에는 아직도 이런 전통이 남아있어 지배층 자녀들의 군복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三國時代)까지는 지배층들이 군복무를 솔선수범(率先垂範)했다. 그러나 고려(高麗) 사회가 차츰 안정화되면서 고려의 지배층들은 무신(武臣) 성향을 버리고 유학을 배우는 문신(文臣)성향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숭문천무(崇文賤武)이다. 문(文)을 높이보고 무(武)를 천시하는 풍조이다.조선 시대에는 16살 이상 61세까지는 군복무의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소위 양반들은 일반 평민들이 져야 하는 군역(軍役), 즉 군복무를 싫어했다. 군복무 안하는 것을 양반의 특권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조선 초기의 인구 구성에서 양반이 10%미만이고 노비 등 천민이 40%에서 50%였던 점을 감안하면 전체 인구의 절반이 군역을 맡은셈이다.군역을 피하는 합법적인 방법도 있었다. 포(布) 2필을 바치면 군역에서 제외될수 있었고 양인(良人), 즉 평민의 신분을 포기하고 양반 가문의 노비가 되면 군역을 피할 수가 있었다. 또 각 지역에 있는 향교(鄕校)에 입학하면 군역에서 빠졌다.향교에서 유학(儒學)을 배우기 때문에 유학을 숭상하는 조선사회의 배려였다. 그러나 김안로(金安老)는 향교는 군역을 피하는 사람들의 소굴이라고까지 개탄한바있다. 또 승려(僧侶)가 되면 군역에서 제외가 되었다. 병역 의무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절대 필요하다./장세균 논설위원
창암(蒼巖) 이삼만은 1840년 9월 제주도 귀양길에 오른 추사(秋史) 김정희와 전주에서 만난다. 당시 창암은 71세의 노인이었고, 추사는 55세였다. 누가 먼저 청했는지 오르나 이 자리에는 당대 명필로 이름을 날리던 추사를 보기 위해 여러 사람이 몰렸다.창암이 쓴 글씨를 본 추사는 그 자리에서 주저없이 내뱉는다. "노인장께선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그러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렸다.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다? 이 말 속에는 "지방에서 행세깨나 하는 것 같으나 촌티를 벗지 못했다"는 의미가 숨어있지 않는가.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한 창암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이 글씨를 잘 아는지 모르지만 조선 붓의 헤지는 멋과 조선 종이의 스미는 맛은 잘 모르는 것 같더라" (유홍준의 완당평전)이와 다른 얘기도 있다. 추사가 전라감영에 들렸을 때 창암을 만나게 해 줄 것을 관찰사에게 청했다. 이에 관찰사는 창암을 만나도록 주선했다. 아무리 유배길이라 해도 오늘날 차관급인 병조및 형조참판을 지낸 인물이니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창암은 추사를 만나 밤을 새우며 서법과 서체를 논했고, 추사가 예를 다해 창암을 대하며 신필에 감탄하자 창암의 이름이 더욱 높아졌다는 것이다.그리고 어느덧 8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1849년 1월, 유배에서 풀려난 추사는 귀경길에 전주에 들려 창암을 찾았다. 그러나 창암은 작고한지 3년이 지난 뒤였다.그날 밤 창암의 제자를 만난 추사는 이런 말을 들었다."글씨는 한(漢)·위(魏)나라의 고전을 원전으로 삼아야지, 진(晉)나라 왕희지를 받들면 글씨가 형태만 예뻐지기 쉽다" 창암이 추사가 떠난 뒤 입버릇처럼 했다는 말이다. 이 글은 강암서예관에 소장돼 있다.이 말을 들은 추사는 깨달은 바 있어'명필창암완산이공삼만지묘(名筆蒼巖完山李公三晩之墓)'라는 묘비를 쓴다. 그리고 "어질고 위대한 서가가 누워있으니, 후생들아 감히 이 무덤을 훼손하지 말지어다"는 묘문을 남긴다. 뒤늦게 창암의 진가를 인정한 것이다.마침 창암을 기리는 휘호대회가 그의 출생지 정읍에서 열릴 예정이다. 평생 이 지역에 살며 조선 글씨의 진수를 보여준 명필의 예술혼이 새롭게 조명되었으면 한다./조상진 논설위원
지난 9월4일은 과거 일본과 중국 청나라와 불법적으로 맺었던 간도협약이 100년이 되는 날이었다. 국제법에 의하면 불법적으로 맺은 국제간의 협약이라 하드래도 100년동안에 쌍방중 어느쪽도 이의를 제기치 않으면 유효한 것으로 간주한다고 한다.이번에 우리 정부는 우리 외교권이 빼앗긴 상태에서 일본과 청(淸)나라간에 맺은 간도협약은 무효라고 주장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중국과의 외교 마찰을 의식해서인지 침묵으로 지나쳤다. 또 100년이라는 시효는 국제법상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시효가 아니기에 별문제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간도는 북간도 서간도 남간도를 총칭하는 말로써 지금의 중국 동북 삼성(三省)을 지칭한다고 보면 된다. 간도는 청나라에서도 자기 조상들의 발원지로 보았으며 우리 조선 역시도 국력이 약한 상태에서도 간도를 지키기에 혼신(渾身)의 힘을 다한 흔적이 있다. 백두산정계비가 바로 그것이다.1712년 숙종때에 백두산위에 청나라와 조선사이의 경계를 나타내는 경계비를 세웠다. 경계비에 쓰여진 '서위압록(西爲鴨綠), 동위토문(東爲土門)'이라는 글귀에서 '토문'을 중국은 두만강으로 해석하고 우리는 송화강으로 해석하는 쪽이다. 그러나 을사보호조약으로 주권이 빼긴 상태에서 일본은 만주철도 부설권을 얻는 조건으로 간도를 청나라에 귀속시켜버렸다.간도 반환문제는 북한과 남한의 일치된 주장이 전제되어야 할것이나 북한은 이미 중국과 "조중변계조약"이라는 것을 맺어 간도는 이미 중국영토임을 추인해준 꼴이다.북한과 중국은 1962년 10월12일 "조중변계조약"을 맺었다는데 그 조약에 따르면 "백두산 천지의 경계선은 백두산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마루 서남단에 위에 있는 2520고지와 2664고지 사이의 안부(鞍部)의 중심을 기점으로 동북방향 직선으로 천지를 가로질러 대안(대안)의 산마루인 2628고지와 2680고지 사이의 안부 중심까지이다. 그리고 그 서북부는 중국에 속하고 동남부는 속한다"로 되어있다고 한다 . 그래서 천지(天池)의 55%는 북한에 45%는 중국에 속한다. 아무튼 "조중변계조약"은 백두산 천지의 절반을 양보하고 간도땅도 결국 포기하는 것이었다./장세균 논설위원
TV에 '소녀시대'와 '원더걸스'가 나오면 난리법석이다.깜찍하게 생긴 미끈한 외모와 잘 빠진 몸매 때문일 것이다.S라인과 늘씬한 각선미가 한층 돋보여 팬들을 사로 잡는다.요즘은 각선미를 부각시키는 핫 팬츠나 미니스커트가 유행이다.아침 저녁으로 날씨가 서늘해 졌지만 여성들의 각선미를 향한 열정은 식지 않고 더 뜨거워지고 있다.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여성의 본능이 스커트 길이와 하이힐 높이를 더 짧게 하고 높게 했다.치마 속에 감춰진 여성의 다리가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은 1세기도 채 안되었다.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후에야 종아리를 겨우 드러낼 정도로 치마 길이가 올라왔고 그 마저도 일부 보수적인 남성들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그러나 1960년 여름 메리 퀸트라는 영국 디자이너에 의해 미니스커트가 첫선을 보였다.우리나라에서는 1967년 가수 윤복희가 처음 입었다고 알려져 있다.여성들이 각선미를 뽐내고 싶을 때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하이힐을 신는다.지금은 하이힐이 무색할 정도로 굽이 더 높은 킬힐이 유행한다.보기에도 거북하고 민망스러울 정도로 10㎝가 넘는 킬힐을 신고 다닌다.마치 곡예 걸음이나 모델들의 불안한 워킹을 보는 것 같아 아슬아슬하다.14세기 프랑스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었다고 한다.하이힐은 여기저기 널려 있는 오물을 밟지 않으려고 신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더불어 키가 작았던 루이 14세가 신으면서 유행했다고 한다.여성의 역사를 펴낸 후크스는 하이힐이 17세기 초에 스페인서 유행했다고 한다.스페인 몰인의 여자들이 신고 다닌 높은 목제의 뒷굽이 달린 구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당시 여자들이 흙탕물을 피하기 위해 굽 높은 신발을 신고 다녔다고 한다.독일의 풍속사가 에루아르트도 '풍속의 역사'에서 프랑스에서 여자들이 마른 땅과 진 땅을 가려 밟는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굽 높은 신발이 고안됐다고 했다.지금은 하이힐이 날씬한 각선미 이외에 볼록한 엉덩이,가는 허리,튀어 나온 가슴의 S라인 몸매를 돋보이게 해준다하여 여성의 필수 아이템이 되었다.그러나 하이힐이 발과 척추 건강에 치명적이다.엄지발가락의 관절이 바깥쪽으로 툭 튀어 나온 '무지외반증'과 발바닥에 염증이 생기는 '족저근막염'의 원인이 될 수 있다./백성일 수석논설위원
'이름'이란 단어는 '이르다(謂)'나 '말하다'는 뜻을 가진 옛말 '닐다'에서 출발해 '닐홈― 일홈― 이름'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사람의 경우 주로 성(姓)에 붙은 개인명만을 이름이라고 하지만 넓게는 성을 포함해 사람이나 사물을 부르거나 가리키는 모든 명칭을 지칭한다.이름은 누구에게나 중요하지만 우리 조상들의 경우 더욱 각별했다. 유가(儒家)에서 이르는'이름이 곧 몸이요, 몸이 곧 이름'이라는 '명체불리(名體不離)'도 이름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문중마다 항렬을 정해놓고 그 항렬에 따라 이름을 지어야 했으며, 이름을 잘 짓기 위해 작명소나 철학관을 찾는 관습은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다.이름은 사람에게만 중요한게 아니다. 기업은 창업때나 신제품을 시장에 내놓을 때 이른바 '브랜드 네이밍(Brand naming)'이라는 '이름짓기'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어떤 이름을 쓰느냐에 따라 소비자들의 사랑을 오래 받느냐, 아니면 소비자들의 기억속에 미처 자리잡기도 전에 사라지느냐는 명운(命運)이 갈리기 때문이다. 생명이 긴 제품 브랜드는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기업에게 엄청난 부가가치를 안겨준다.브랜드 네이밍은 제품의 차별화 뿐 아니라 홍보의 전제조건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홍보를 전제로 해야 하는 네이밍에서는 읽기 쉽고, 듣기 쉽고, 말하기 쉽고, 외우기 쉬어야 한다는 것을 고려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특히 최근 국제화 시대를 맞이 이같은 원칙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세계 최장의 방조제를 낀 새만금사업은 이같은 추세와 달리 정작 투자 주체인 외국인들에게 어필하지 못하는 네이밍 실패사례로 꼽힌다. '새만금'의 어원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만경평야의 '만(萬)',김제평야의 '김(金)'자를 따 새 옥토를 조성한다는 의미로 새만금이라는 명칭이 채택됐다. 그러나 이런 의미와 달리 영문발음이 외국인들이 부르기 어렵고 어색하다는 사실이 흠으로 지적되고 있다. 글로벌시대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작명(作名)이었던 셈이다. 이같은 지적에 따라 새만금 별칭(닉네임) 공모가 11일 까지 진행되고 있다. 대상에게는 상금 1000만원등 상금도 적잖다. 사업 성격도 제대로 부각되면서 외국인들이 부르기 쉽고 친근한 새로운 새만금의 닉네임 탄생을 기대해 본다./박인환 주필
18세기에 발견됐다가 사라져버린 신라 문무왕릉비 조각이 200여년만에 수도 검침원에 의해 주택가 수돗가에서 재발견됐다는 뉴스는 흥미롭다. 이는 1940년대에 이집트의 어느 사막 동굴에서 "도마 복음서"를 발견한 어느 양치기 소년을 연상케도 한다.1796년에 문무왕릉의 비석 조각들이 경주사람에 의해 발견됐다가 행방불명이 된 후 1961년에는 비석의 하단부만 발견되고 이번에는 상단부가 발견됨으로써 문무왕비는 사실상 다 찾은셈이라고 한다. 그 비문에는 문무왕의 조상 즉, 신라 김씨의 가계(家系)에 대한 것이 적혀있다고 한다.현재 한국의 270개 성씨중에 김씨가 약 4분의 1이며, 김씨는 다시 120개 본관으로 나누어지지만 대부분 신라, 김알지(金閼智)계와 가야(伽倻)의 김수로왕계에서 분파(分派)됐다고 한다.중국사서(史書)에서는 김알지보다 200년 앞서서 중국 한(漢)나라에 김씨 성을 가진 제후가 있었는데 바로"김일제"라는 사람인데 그는 원래 흉노족 왕, 휴도의 왕자이었으나 한나라에 정복된 후 한무제(漢武帝)의 눈에 들어 제후에 임명되고 김(金)씨라는 성(姓)을 하사받은 것이다. 김일제의 후손들이 번창하다가 나중에 왕망(王莽)의 반란에 가담한 죄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피해 한반도로 피신해와 신라의 지배세력이 되었는데 김일제의 7대손, "김성한"이 신라김씨의 시조 "김알지"이며 김일제의 동생 "김윤"의 5대손 "김탕"이 가야, 김수로왕이 되었다는 것이 학계 일부의 주장이다.박혁거세에 대한 새로운 주장도 있다.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운곳은 "서라벌"인데 이곳은 경주가 서울이라는 것이다. 또 서울에서 초기 신라의 박(朴)씨 집단이 청주와 보은을 거쳐 상주(尙州)로 왔다가 경주(慶州)월성으로 남하했다고 한다.또 박씨 집단은 북방계의 오환족(烏丸族)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는데 박혁거세의 "거세(居世)"는 오환족이 사용했던 '거수(居帥)"와 똑같이 부족장(部族長)의 칭호라고 한다. 몽고과학원의 베수미야바하르 교수는 박혁거세를 흉노족(匈奴族)으로 보았다고 한다. 이상은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의 저자인 김성호박사의 주장이기도 하다. 우리고대사를 다시보자/장세균 논설위원
"나는 모든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개인 가족 집단 조직 지역사회 전체사회와 함께 한다. 나는 언제나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저들의 인권과 권익을 지키며, 사회의 불의와 부정을 거부하고, 개인이익보다 공공이익을 앞세운다.… "(사회복지사 선서문)우리 주변에는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 선천적 장애를 가졌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한 사람, 생계가 어렵거나 중한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그들이다. 또 가정폭력 피해자, 알코올 중독자, 부랑인·노숙자, 독거노인 등도 따뜻한 손길을 필요로 한다.이들이 사회복귀를 위해 맨 처음 만나는 사람이 사회복지사다. 이들은 클라이언트(대상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며 사회안전망의 최전선을 지키는 파수꾼이다. 일선 자치단체나 복지단체가 설립·운영하는 사회복지관, 복지시설 등이 주된 일터다.이런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자격요건이 없었다. 그러다 1970년 제정된 사회복지사업법에 의해 '사회복지사업종사자 자격증'제도가 처음 도입되었다. 1982년에는 이름이 사회복지사(社會福祉士·social worker)로 변경되었다. 클라이언트를 상담·대변·옹호하는 성격이 변호사의 사(士)와 유사하다는 의견에 따른 것이다.2003년부터는 국가시험이 실시돼 1급의 경우 이를 통과해야 자격증이 주어진다. 하지만 2급의 경우 대학 관련학과나 사이버 대학, 평생교육원 등에서 일정 과목만 이수하면 자격을 주고 있다.사회복지사는 한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복지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나는데다 경제불황과 실업난이 겹쳐 취업에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같은 결과, 지난 6월말 현재 등록된 사회복지사는 32만185명에 이른다. 이들중 사회복지 전담공무원은 1만 명에 불과하다. 또 6만여 명이 사회복지관과 각종 복지시설에 종사하고 있다. 공급과잉으로 20%만 현직에서 활동하는 셈이다.그러다 보니 고강도 업무와 저임금, 신분불안 등 이들이 처한 현실은 팍팍하기 이를데 없다. 서서히'번 아웃(burn out)'되고 있는 것이다. 의욕을 갖고 출발했지만 결국 소진됐다는 뜻이다.7일은 사회복지의 날이다. 이들이 선서대로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편에서 일할 수 있는'복지'가 마련되었으면 한다./조상진 논설위원
1895년, 일본인들에 의해 살해된 명성황후 시해 사건 전모와 시해사건에 관련된 범인들의 후손들이 110년 만에 한국을 찾아 사죄하는 모습을 담은 특집 뉴스가 지난달 24일 밤, 아사히 TV를 통해 일본 전역에 방송되었다고 한다. 일본 자민당 60년 집권의 종식과 더불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방송은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다.외교 관계에 있는 이웃나라 왕비를 무참히 난자(亂刺) 살해한 일본은 세계 역사에도 없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국력이 쇠약미미(衰弱微微)했던 조선은 그런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 1894년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전리품으로 중국의 요동반도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극동(極東)에서 남하정책을 펴던 러시아가 일본의 팽창을 두려워하여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다시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이것을 "삼국(三國)간섭"이라고 한다.일본은 할수없이 국제압력에 굴복, 요동반도를 중국에 반환했다. 이런 상황에서 청나라의 후원을 기대할수 없게 되자 고종(高宗)이 의지할 곳은 러시아뿐이라고 판단했다. 이것을 "인아거일책(引我拒日策)"즉 아라사를 가까이 하고 일본을 멀리한다는 것인데 여기에서 아라사란 러시아를 말한다. 박정양, 이범진, 이완용, 등을 등용하여 친러내각을 출범시켰다.일제는 명치유신(明治維新)이후 30년간 조선의 정복을 주장하는 정한론(征韓論)을 펴왔고 조선에서 러시아에게 주도권을 뺏길것을 염려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와 한판 전쟁을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친(親) 러시아 중심인물이라고 생각된 민비를 제거하기로만 일본은 결정하였다.민비 시해에 참가한 병력은 일본인 30명, 경찰 10여명, 조선군 훈련대, 일본수비대로 구성되었다. 1895년 8월 20일 동쪽 곤녕전에는 고종과 왕세자가 있었고 서쪽 옥호루(玉壺樓)에는 명성황후가 있었는데 이때 궁녀 3명과 함께 시해되었다. 이때 흉도(胸徒)들은 명성황후의 시체를 숲속으로 운반한 뒤 장작더미위에 올려놓고 불을 질렀다고 한다.이런 처참한 광경은 미국 공사관의 보고와 영국 공사관의 보고에 적시되어있다. 다시한번 국력이 약한 민족의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장세균 논설위원
미국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면 행복해진다'고 했다. 웃음은 유효기간이 없는 최고의 보약이다. 많이 웃으면 몸 속의 650개 신체근육 가운데 300개 가까이가 움직인다.웃음은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행복호르몬을 솟게 하는 샘이다. 스트레스는 라틴어의 Strictus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팽팽한, 좁은'이라는 뜻이다. 사고의 틀이 팽팽하고 좁아지니까 막히는 것이다. 이 때 웃음은 긴장을 풀어주고 좁은 길을 뻥 뚫어준다.웃음이 건강에 효과가 있다는 실증적 연구는 많다. 2005년 미 메릴랜드대 연구진은 혈관 연관성을 파헤쳤다.연구진이 피험자에게 코미디 영화를 보여준 뒤 혈류량을 측정하자 평균 22%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혈류량이 늘면 심혈관이 튼튼해진다.웃음이 만병통치약에 가깝다는 얘기다. 반면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영화를 본 피험자는 혈류량이 35% 가량 줄었다.긍정적 사고와 웃음이 주는 의학적 효능도 많이 알려져 있다. 웃지 않는 사람들이 암에 잘 걸린다는 이야기도 어쩌면 암세포로부터 우리 몸을 방어하는 인체 면역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비유일 것이다. 현대의 각박한 사회 구조속에 웃음과 긍정의 마음보다 근심과 걱정의 바다속에 잠겨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실제로 걱정이 지나치면 일찍 죽을 위험성이 증가한다고 알려져 있다.그간 우리 사회는 웃음을 천시해왔다.뭐,우리 뿐이었겠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을 고상한 장르로 희극을 천한 장르로 구분해서 설명했다. 우리 사회에는 오랫동안 가부장제와 군사문화로 인한 엄숙주의가 팽배했다. 괜히 웃는 사람은 '실 없는 사람'이고 '속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곤했다.하지만 요즘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유머 감각이 좋은 사람을 능력자로 꼽는다.우리나라 성인들은 하루 평균 열번,한 번에 8.6초를 웃는다고 한다. 하루 90초 ,팔십 평생에 달랑 30일만 웃는다는 얘기다. 그러나 근심 걱정은 하루 3시간 6분. 일평생 10년 이상 고민만 하다 죽는 셈이다. 일소일소 일노일로(一笑一少 一怒一老)라 했다. 웃으면 젊어지고 화내면 늙는다는 말이다. 억지로라도 웃으면 인상이 바꿔진다. 얼굴 모습이 바꿔지면 운명이 달라진다. 웃을 일 없어도 일부러 웃으면 어떨까./백성일 수석논설위원
1897년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면서 인류는 빛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자연의 빛으로 살아오던 인간들에게 인공의 빛은 축복이었다. 조명 기술의 발전은 사람들에게 생활 전 영역에서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했다.그러나 인구증가와 도시화에 따라 늘어나기 시작한 인공조명은 밤하늘 별을 헤아리는 낭만을 깨뜨리게 했다. 인류 건강과 자연 생태계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해 인공조명이 지구에서 가장 빠르게 번지는 신(新) 공해로 부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명'빛(光) 공해'를 물, 공기에 이어'제 3의 공해'로 지적했다.현재 인공조명은 1970년대에 비해 3배나 증가했다. 이제 전세계 인구 3분의 2는 거주지에서 별을 관찰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국내 도시의 경우 맑은 날 볼 수 있는 별의 숫자는 고작 10개 미만, 인공조명이 없을 때 관측가능한 별의 숫자가 2000개 정도인데 비하면 사실상 별은 사라진 셈이다.생태계 교란도 심각하다. 미국 코네티킷대 연구팀 조사 결과 대도시 거주 여성들은 시골 거주 여성들에 비해 유방암 발병률이 최대 78%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야간 불빛이 인체 숙면 호르몬이자 항암능력을 갖춘 멜라토닌의 분비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대도시 첨탑과 고층빌딩 불빛은 야간이동을 하는 철새들의 이동경로를 바꿔 놓는다. 회유성 어종인 연어와 청어가 북태평양의 인공불빛 때문에 이동을 하지 않는다. 밤낮없이 울어대는 대도시 매미 또한 같은 이유다. 야간 조명이 비치는 논은 벼 수확량이 감소하고, 불빛에 민감한 들깨의 경우는 아예 결실도 없이 성장만 지속한다.최근 빛 공해가 심각한 환경문제로 대두되면서 '빛 공해 방지법'을 제정하는 나라가 늘고 있다. 도시의 조도를 낮추고 가로등을 비롯 조명 불빛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규제 등을 담고 있다. 이탈리아는 국가적으로 빛 공해 추방운동을 벌이고, 매년 10월4일을 '빛 공해 인식의 날'로 정할 정도다.우리나라도'빛 공해 방지법'제정을 위한 공청회가 지난주 국회에서 열렸다. 빛 공해는 빛을 적절하게 사용하지 않아 생긴 공해다. 에너지 절약과 환경 생태계 보호 차원에서도 법 제정이 필요하다. 약간의 어두움은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불편이다./박인환 주필
20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이자 철학자인 시몬드 보부아르가 발표한 "제2의 성(性)"이라는 책은 지금도 여성 해방운동의 교과서로 불리운다. 이 책속에서 보부아르는 유명한 말을 했는데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키워지는것이다". "성경(聖經)의 이념도 남성의 여성 장악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그녀의 이런 선언은 당시의 사회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녀의 반 전통적인 의식은 장 폴사르트르라는 철학자와 계약결혼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결혼을 시작하여 처음에는 2년간의 시한부 계약결혼을 했으나 80년 4월에 샤르트르가 죽을때까지 계속했기 때문에 평생 계약결혼이 된 셈이다.보부아르의 주장의 골자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고 문화 사회적 영향에서 생겨난 결과라는 것이다. 그녀의 주장이 높이 평가받았던 이유는 맹목적 남성비판을 넘어서 처음으로 생물학적 ,정신 분석학적, 신학, 철학, 사회학 등 폭넓은 이론을 바탕으로 남녀의 사회적 조건과 차별의 원인을 명쾌하게 분석하여 여성 권리 주장의 당위성을 밝혔다는데 있다고 한다.그녀의 주장은 종교계와 남성에겐 도전이었고 여성에겐 자아(自我)를 일깨우는 촉매제였다는 주장도 많다."제2의 성"은 출간 1주일만에 2만부가 팔렸다고 하며 바티칸 교황청은 이책을 금서목록(禁書目錄)에 올렸고, 유명한 실존주의 작가인 알베르 카뮈는 "프랑스의 수컷을 조롱했다"는 내용의 글까지 발표하게 만들었다고 한다.그러나 오늘날의 뇌 과학은 보부아르의 주장에 수정을 가하게 만들고 있다. 지금껏 남녀의 차이는 보부아르 주장과도 비슷하게 사회적 학습에 의해 달라진다는것 이 정설처럼 되어있지만 남녀차이를 만드는 비밀은 바로 뇌에 있다는 것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는것이다.일반적으로 여자의 뇌와 남자의 뇌의 크기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뇌의 크기가 지능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지라도 기능면에서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오늘의 뇌 과학은 남녀의 차이 즉 기능의 차이를 말하는것일뿐 남녀의 능력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조물주는 남녀에게 각각의 다른 기능을 통한 다른 능력을 부여한 것이다./장세균 논설위원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남서쪽으로 50㎞쯤 가다보면 고군산(古群山)군도에 닿는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크고 작은 섬들이 어깨동무하듯 모여 있다. 행정구역상 옥도(沃島)면에 속하며 선유도를 중심으로 신시도 야미도 무녀도 장자도 등 10개의 유인도와 20여개의 무인도를 아우른다.이곳은 고려시대 이래 해운교역상 중요한 위치였다. 여송(麗宋) 무역로의 기항지로서, 몽고 일본, 멀리 대식국(아라비아) 상인까지 드나들었다. 당시는 만경현 소속이었다.조선시대 들어 태조 6년(1397)에는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선유도에 수군부대 만호영을 두었다. 그에 앞서 1380년 최무선이 진포(현 군산시) 일대에서 왜선 500척을 무찌른 쾌거는 유명하다. 하지만 왜구들은 수군이 있는 선유도를 우회해 금강하구지역을 노략질하곤 했다. 그래서 세종때 선유도에 있던 군산진을 진포로 옮기고 군산도(島)는 옛 고(古)자를 붙여 고군산이라 칭했다.이어 선조 2년(1569)에는 김영아문이란 관청을 설치하고 수군절제사가 상주했다. 이 수군절제사는 임피군창(軍倉) 만경 김제 부안 무장 고창 영광 등 8개 군현을 관할했다.이곳 선유도는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임진왜란 당시인 선조 30년(1597) 9월 21일 위도를 거쳐 선유도를 찾아 12일간 머무른 것이다. 명량해전에서 크게 승리한후 이 사실을 임금에게 보고하기 위해 장계를 작성하며 휴식을 취했다. 난중일기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9월 21일 새벽에 나서서 고군산도에 이르니 호남순찰사 박홍로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서 배를 타고 옥구로 갔다는 것이다./ 10월 초1일 아들을 보내서 저의 모친도 보고 집안 사람들의 생사도 알아보게 하였다.… 아산(牙山)집이 적에게 분탕질 당해 잿더미가 되어 남은 것이 없다고 한다./ 10월 초3일 새벽에 배를 띄워서 법성포로 돌아왔다."또 신시도에는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이 글을 읽던 월영대가 있었다.군산시는 최근 이순신 장군이 머물던 선유도 진영 복원사업을 서두르고 있다. 11월께 학술세미나를 갖고 용역을 맡길 것이라고 한다. 고군산군도는 탄력을 받고 있는 새만금사업과 함께 머지않아 국제해양관광단지로 탈바꿈될 예정이다. 이에 발맞춰 선인들의 숨결을 되살리는 것도 괜찮을듯 싶다./조상진 논설위원
서거(逝去)하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살아생전에 많은 오해를 받었다. 그중의 하나가 그분은 지역감정의 최대 피해자요 동시에 지역감정의 최대 수혜자(受惠者)라는 것이다. 지역감정의 최대 피해자라는 말은 맞지만 지역감정의 수혜자라는 것은 사리(事理)에 어긋난다.지역감정의 수혜자라는 표현은 주로 영남 사람들 입에서 나왔다. 김 전 대통령이 호남에서 종교 교주처럼 절대적 지지를 받아 정치적 위기를 벗어났다는 것을 빗댄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만약 영남인이었다면 대권 4수(修)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마도 그분이 영남인이었다면 그분의 인격으로 그런 험난한 고생 없이 오래전부터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호남인의 판단이다.지역감정의 수혜자라고 하는 것은 억지주장이다. 우리의 지역의식은 옛날부터 남달랐는지도 모른다. 우리 조상들은 고향에 대해서 뿌리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벼슬을 하러 객지에 나갔다고도 벼슬이 끝나면 고향으로 귀향(歸鄕)하고 장사꾼도 객지에서 명절이면 고향을 찾는다.우리나라의 옛 노래 중, 상당부분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가사로 엮어져 있다. 심지어 고향에서 죽지 않고 객지(客地)에서 죽는 것을 불행한일로 보고 "객사(客死)할 놈"이 욕이 된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고향에서 죽어 가까운 혈족(血族)옆에 눕기를 원했다. 서양 사람들이 죽으면 끝이라는 생사단절(生死斷絶)의 문화라면 우리 조상들은 죽어도 후손(後孫)에 살아있는 생사연결형(生死連結形) 문화라고나 해야 할것이다.그러니 자기 고향에 대한 애착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서양 사람들의 생업(生業)은 유목적, 상업적이어서, 이지역 저 지역에 떠돌아다니며 살았기에 고향이라는 절대적 애착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몬순지대의 벼농사는 생업 중에서도 가장 노동 집약적 이면서 토지 정착적이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서 산다는 것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그러나 지역의식이 자기 고향에 대한 애착 수준을 넘어 다른 지역에 대한 배타의식, 심지어 적대의식(敵對意識)로까지 갔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이제 우리는 농업국가가 아니다. 지역감정은 퇴물(退物)이 되어야한다./장세균 논설위원
인동초는 졌으나 길가에 코스모스는 활짝 피었다. 아침 저녁으로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제법 쌀쌀하다. 귀뚜라미 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힌다. 점심 먹고 소슬바람 맞으며 정자에서 잠깐 시들기에는 제격이다.청량감이 넘쳐난다. 홑이불이 생각난다. 한낮에는 뙤약볕이 내려 쪼이지만 더위도 한풀 꺾인 기세다. 가을의 문턱에 들어 선다는 입추와 말복도 지났다. 계절의 변화가 실감난다.한들 한들 길가에 나부끼는 코스모스. 한번 씨를 뿌려 놓으면 해마다 알아서 꽃이 핀다. 꽃이 지면 그 자리에 씨가 떨어져 이듬해에도 꽃을 피운다. 개화기도 길다. 7월에 꽃을 피워 뜨거운 태양 볕을 견대내고 늦가을 까지 나부낀다. 생명력이 이렇게 강하건만 겉으로는 한없이 여린 모습을 내비친다. 더위에 지친 심신을 신선한 바람으로 달래 주는 가을에 어울리는 꽃이다.코스모스는 서로 다른 각색의 꽃들이 한데 어울릴 때라야 제대로 된 맛이 난다. 한 송이로는 고작 가냘프고 연약한 들꽃에 지나지 않는다. 빨간 것은 검붉을 만큼 빨갛고, 노란 것은 밀감껍질처럼 짙게 노랗고, 햐얀 것은 파스텔이 묻어날 것 같이 하얄때, 그리고 그 선명한 색깔들이 잘 섞여 있을 적에야 코스모스답다. 조화와 질서를 뜻하는 희랍어 코스모스(Kosmos)를 제 이름으로 얻은 것도 각색의 꽃들이 어울려 빚어내는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70년대 이후 귀향길의 설렘을 잘 표현하기로는 나훈아가 불렀던 '고향역'만한 것이 없다. "코스모스 피어 있는 정든 고향역"으로 시작하는 노랫말이 다가온다. 김상희가 불렀던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도 감흥을 돋군다.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중략/길어진 한숨이 이슬에 맺혀서 찬바람 미워서 꽃속에 숨었네"라는 노랫말이 가을의 정취를 풍겨나게 한다.코스모스는 '소녀의 순정'이라는 꽃말을 갖고 있는데 비오는 날 수줍은듯 피어 있는 자태가 정말 소녀의 발그스레한 볼같아 보인다. 이름 있는 꽃들은 대개 전설이나 설화가 있게 마련이지만 코스모스는 그렇지 못하다.다만 신이 가장 먼저 습작으로 만든 꽃이 코스모스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화합과 통합을 시대정신으로 남기고 홀연히 떠난 DJ의 삶이 사즉생 (死卽生)으로 다가선다. 자신을 죽이려했던 원수까지 사랑했던 그의 삶이 벌써 코스모스로 활짝 피어난 느낌이다./백성일 수석논설위원
전주출신 불세출의 프로 바둑기사 이창호(李昌鎬) 9단에는 여러 별명이 따라 붙는다. 희노애락을 모르는듯 무덤덤한 대국태도로 돌부처라는 별명이 붙었다. 아무리 판세가 불리해도 무리하지 않고 때를 기다린다 하여 강태공이라고도 불린다. 무엇보다 과분하지 않은 별명은 끝내기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인해 붙여진 신산(神算)이다. 이밖에 바둑의 국보(國寶), 무협지식으로 흑도(黑道), 외계인, 삼중(三重)허리등 많은 별명이 있다.11세 어린 나이에 입단한 이창호는 14세때인 1989년 KBS바둑왕전에서 국내 첫 타이틀을 따내며 세계 최연소 타이틀 보유 기록을 세웠다. 17세 때인 1992년에는 동양증권배를 차지하면서 세계를 제패했다. 1990년대는 이창호의 전성기 였으며, 이는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당시 국내는 물론 국제 기전에서도 적수가 없을 정도였다. 명실상부 세계 바둑계의 전설이 돼있었던 것이다.전성기의 화려한 기록들이 이를 입증한다. 1990년 41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으며, 연간 최다관왕(13관왕, 1994년), 연간 최다승(90승 19패,1993년). 연간 최고승률(88%, 1988년)등은 당분간 깨지기 힘든 기록들이다.세월앞에 장사는 없는 법인가. 올해 34세인 이창호의 최근 잇단 부진이 여간 심상치 않다. 지난 6월 중국에서 열린 춘란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결승에서 중국의 창하오에게 0대2로 패하면서 우승을 넘겨줬다. 2005년 삼성화재배 준우승을 시작으로 4년동안 메인 세계대회에서 한 차례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하고 무려 7차례나 준우승에 머무르면서 분루를 삼켜야 했다. 지난주(20일)에는 국내대회인 물가정보배에서 그동안 4번 맞대결해 한번도 진적이 없는 신예 김지석 4단에게 0대2로 패해 타이틀을 내주었다. 현재 이창호가 공식 보유한 국내외 타이틀은 4개이지만 3개 대회는 이미 중단됐거나 연내 개최가 불투명한 점을 감안하면 달랑 하나만 남는다. 입단 이후 최대의 위기인 셈이다.이창호의 부진을 두고 여러 설(說)들이 많다. 체력적 부담이라든지 젊은 도전자들의 등장이 원인이라는 분석이 그것이다. 이창호가 정말로 하락세에 접어든 것인지, 아니면 돌부처 특유의 뚝심으로 보란듯이 재기해 고향 팬들을 즐겁게해줄 수 있을지 관심있게 지켜볼 일이다./박인환 주필
대통령의 자서전은 의미가 크다. 한 나라를 움직인 최고 지도자로서, 그가 남긴 정치적 결단이나 정책, 인간적 고뇌 등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나아가 역사적 기록물이기도 하다.서구에는 이러한 자서전이 넘쳐난다. 베스트 셀러로 큰 인기를 얻는 경우도 많다.영국 총리를 지낸 처칠이'제2차세계대전 회고록'을 써 195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얘기는 유명하다.현직에서는'실패한 대통령'이었으나 퇴임후 더 빛을 발한 카터 미국 대통령이 쓴 '아름다운 노년'은 스테디 셀러로 인기가 높다.또 클린턴 대통령의'마이 라이프(My Life)'는 2004년 출간도 되기 전에 1000만 달러의 인세를 받았다. 예약 주문만 200만 부로 논픽션 사상 최고 기록이다. 그의 부인 힐러리 국무장관이 한해 앞서 발간한 '살아있는 역사'역시 선인세 800만 달러를 받았다.오바마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내 아버지로 부터의 꿈(1995)'과 '담대한 희망(2006)'이란 자서전을 출간했다. 이 책은 그가 대통령이 되는데 디딤돌이 되었다.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2001년 "푸틴은 어떤 사람인가"로 시작되는 독특한 문답식 자서전을 출간했다. 여기에는 러시아 현대사에 관한 생생한 기록이 담겨있다.우리의 경우는 어떨까.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6·25 전쟁 전인 1949년 서정주 시인에게 자신의 자서전을 쓰도록 했다. 틈틈이 만나 자신의 생애를 일러 주었다. 하지만 출간된 책을 받아 본 이 대통령은 판매금지를 시켰다. 3인칭의 문장으로, 자신의 문체인'나 이승만은…'으로 시작된 자서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김영삼 대통령은 3권의 회고록을 냈다. 하나회 청산이나 금융실명제, 정상외교의 뒷이야기 등을 담았다. 하지만 자화자찬과 변명이 많아 기대에 못미친다는 지적을 받았다.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 자신의 인생과 대통령직의 경험을 집필중이었으나 비극적 서거로 끝을 맺지 못했다.18일 서거한 김대중 대통령은 2005년 편찬위원회를 구성해 자서전 편찬작업을 해왔다. 5천여장에 이르는 초고가 완성되었지만 감수를 끝내지 못했다고 한다. 50년 동안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 있던 거목이었던 만큼 언제 어떤 내용으로 출간될지 기대가 크다./조상진 논설위원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한 집안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독립운동을 하다보니 가지고 있던 재산마저도 탕진해야 했고 만주, 중국등, 타국(他國)을 전전(轉轉)하다보니 가정을 돌볼수 없어 자녀들마저 학교교육을 받지못해 사회 낙오자 되기가 십상이었다. 이런 어려움은 손자 손녀들 세대까지 이어져 가난이 대물림 된것이다.그래서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유행했었다. 지금도 최저 생계비에도 못미치는 최하위 생활을 하는 독립유공자 가족들이 너무도 많다. 8. 15 광복절 64주년을 보낸 지금도 그들의 시련은 계속되고 있다. 이런 반면에 친일파 (親日派) 후손들 대부분의 생활은 유복했다."친일파 반민족 행위자 재산 조사위원회"가 과거 일본인 소유지로써 마땅히 국유재산으로 귀속되어야할 땅을 위계(僞計)로 개인 소유지로 불법 등기한 20여필지의 땅을 찾게 해주었다고 한다. "친일파 반민족 행위자 재산 조사위원회"는 2006년 7월 출범한 이래 3년간 친일파 106명이 일제 강점기에 취득한 1199 필지, 시가로 약 1617억원에 해당하는 땅을 국가 재산으로 귀속 시킨것이었다.지금도 국가 귀속 결정이 내려진 친일파 땅의 90%이상이 환수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반발과 저항이 심한지도 모른다. 과거 청산을 놓고 우리와 비슷한 프랑스는 제2차 세계 대전당시 독일 나치에 협력한 협력자 약 35만명 가운데 12만명이 재판에 회부되고 그중 약 3만8천명이 금고 이상의 실형선고를 받았다. 6천명 이상이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약 5만명이 공민권을 박탈당했다.과거 청산의 하이라이트는 1차 세계대전의 프랑스의 국민 영웅이었던 패텡 원수였는데 그는 독일 점령기, 짧은 기간에 허수아비 정부를 맡았다는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드골 대통령에 의해 종신형으로 감형된채 감옥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케 했다. 루이 16세를 과감히 길로틴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프랑스 국민다운 처리 방식었는지도 모른다.그러나 우리는 이땅의 친일파 단 한명도 처벌한적이 없다.수많은 유명인사들의 친일행각이 여과(濾過)된 적이 없는 우리에게 '친일 반민족 행위자 재산 조사위원회'의 역할은 컸다고 본다 ./장세균 논설위원
국민들은 때가 아닐 때 골프채를 휘두르는 정치인에게 잔인하다. 2006년 3월 이해찬 전 총리가 3.1절에 골프를 쳤다. 이 전 총리는 철도 파업이 한창일 때 부산의 한 골프장에서 지역 기업인들과 골프를 친 사실이 밝혀져 결국 사퇴했다. 정치인에게 골프는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인 운동이지만 이 때문에 낙마한 정치인도 많다. 최근 경남기관장 4명이 접대골프를 쳐 물의를 빚었다. 골프는 멋진 운동이지만 잘못하면 마가 따른다. 대중화가 이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국민정서에 반하기 때문이다.골프가 너무 재밌는게 흠이라는 사람도 있다. 골프엔 심판이 없다. 자신과의 영원한 싸움이라는 것도 자신이 곧 심판인 때문이다. 플레이를 하면서 의심 받는 일이나 스코어를 속이는 일은 인격을 부정 받는 짓이다. 옆에서 거드는 캐디의 잘못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릴 줄 아는 관용도 필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샷할 때 볼을 보지 않으면 모두가 허사다. OB가 나거나 볼을 잃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누구나 라운딩 전에는 순리에 따라 샷 할 것을 다짐하지만 막상 코스에 들어가면 욕심을 부린다. 러프에 들어간 볼을 무리하게 쳐내려다가는 오히려 더 깊은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은 골프에서도 통용된다. 순리를 무시한 과욕과 성급함이 주는 폐해는 골프라고 예외일 수 없다. 골프는 숱한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좋은 스코어를 낼 수 있어 인생 여정에 비유한다."절대로 남의 스코어를 계산하지 말라"는 말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내기를 많이 해서인지 동반자의 스코어에 상당히 민감하다. 라운딩을 하다 보면 간혹 티격태격 말타툼이 일어 나는 것을 보는데 대부분이 타수 계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동반자의 스코어를 계산하지 말라는 것은 단지 분쟁을 피하자는 목적이 아니다. 자신의 플레이에 더 집중하고 동반자를 믿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골프는 기다림의 운동이다.지름 42㎜ 남짓한 작은 공을 채로 쳐서 물 언덕 모래 무덤을 지나 직경 108㎜의 작은 구멍에 넣는 것이라 힘과 기술 이외에도 미세한 조정력이 요구된다. 상대방이 툭 내던진 말 한마디에 경기를 망쳐버릴 수 있는 것이 바로 골프다. 제주 야생마 양용은이 타이거 우즈를 잡았다. 양용은이 희망의 다리를 놓았다. 그의 골프 인생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백성일 수석논설위원
전남 고흥반도 남쪽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 쪽빛 바다에 떠있는 섬 나로도(羅老島)에 전 국민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내나로도와 외나로도 두 개의 섬 가운데 외나로도에 세워진 나로 우주센터에서 내일 오후 러시아와 공동개발한 한국 최초의 우주발사체인'나로호(KSLV―Ⅰ)'발사가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아름답고 깨끗해 '오래된 비단'에 비유해 이름 붙여진 나로도가 1995년 이후 적조(赤潮) 첫 발생해역이라는 달갑잖은 '타이틀'이 붙여진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제주해협을 통해 들어와 남해안을 거쳐 동해로 빠져나가는 난류대가 나로도 앞바다에서 영양염류가 많은 해수와 만나면서 적조가 발생하기 때문에 붙은 불명예다.우주센터는 안전을 고려해 바닷가 근처나 인적이 드문 외딴 곳에 건설한다. 로켓을 발사할 때 폭발음과 엄청난 화염이 발생하는데다 발사 직후 추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섬인 나로도가 우주센터로 선정된 이유다. 실제 96년 발사된 중국의 '창청 3호'가 주택지역에 떨어져 많은 민간인 피해를 내기도 했다.지난 6월 외나로도에 우주센터가 완공됨으로써 우리는 세계에서 우주센터를 보유한 13번째 나라가 됐다. 내일 나로호 발사에 성공하면 우리나라는 10번째로 스페이스클럽에 가입하는 국가가 된다. 자국(自國)의 발사기지에서 자국의 로켓으로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국가로 인정받는 셈이다.로켓을 개발해 처음 발사할 경우 성공률은 27% 정도에 그치고 있다. 실제 자국 발사기지에서 자력으로 인공위성 발사에 단번에 성공한 국가는 구 소련, 프랑스, 이스라엘등 3개국에 불과하다. 우주 선진국이라 불리는 미국과 일본, 영국 등도 1차 발사에서는 실패했다.내일 발사될 나로호는 2단(상단부) 로켓은 우리가 자체 개발하고, 1단(하단부) 로켓은 러시아가 기술협력을 하고 있다. 아직은 우리의 순수한 기술로만 모든 것을 소화할 수 없는 기술적 한계 때문에 러시아를 파트너로 선택한 것이다.나로호는 그동안 여섯 차례 발사를 연기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러시아쪽 1단 로켓에서 기술적 문제가 발견된다는 이유다. 하지만 이번에는 태극마크도 선명한 나로호가 어제 발사대로 이동해 사실상 발사준비에 돌입했다. 나로호의 발사 성공으로 우주 대장정을 향한 기술개발에 더욱 탄력을 받길 기대한다./박인환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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