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5-12-29 00:04 (Mon)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오피니언 chevron_right 오목대

[오목대] 중국의 관광 구매력 - 이경재

한국 사람들이 즐겨 찾는 중국 관광지는 대략 10여곳쯤 된다. 북경 상해 항주 소주 서안 청도 대련 만리장성 계림 황산 해난도 백두산 등이 그런 곳들이다. 최근엔 사천성의 구체구와 황룡이란 관광지가 '뜨고' 있다.구체구는 해발 3000m가 넘는 산상 7.5Km의 계곡에 폭포와 수정처럼 맑은 크고 작은 호수가 이어진 원시비경 지역이다. 티베트족 9개 마을이 있다 해서 구체구(Nine-Village Valleys)다. 황룡은 3400여개의 에머랄드 빛 석회암 연못의 비경을 자랑한다. 과장되긴 했지만 이승의 선경, '동화속 세계'로 불린다. 유네스코가 1992년 세계자연유산으로, 1997년에는 세계생물권보호구역으로 지정했다.굳이 두 관광지를 꺼낸 건 놀라운 관광객 숫자 때문이다. 구체구를 찾는 관광객이 하루 3만명에 이른다. 입장료도 1인당 6만원이니 적은 액수는 아니다. 이 곳에 관광객들이 몰리기 시작한 건 중국인들의 경우 5년 전, 한국인들은 3년 쯤 전부터라고 한다. 중국의 유명 관광지마다 이런 규모로 관광객들이 북적거린다. 경제적 효과를 헤아리면 그들이 부럽다.중국의 관광소비와 구매력은 왕성한 걸로 잘 알려져 있다. 다국적 기업들이 중국을 주목하는 것도 그들의 관광소비와 구매력 때문이다. 13억 인구의 상위 5%인 6500만 명의 소비력은 상상 이상이다. 이들은 우리나라 부자들보다 더 잘사는 사람들이다.에어버스사의 A-380은 '하늘을 나는 5성급 호텔'이라는 별칭이 붙은 최신형 비행기다. 한번에 550명의 승객을 태우고 날 수 있다. 이 비행기의 아시아 첫 비행지가 바로 중국이었다. 중국 구매력의 힘을 보여주는 상징이다.단적인 사례 하나. 4박5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은 중국 관광객 16명이 쇼핑한 액수는 4억6000만 원 어치였다. 루비 화장품 홍삼 등이 주류였고 허름한 옷차림의 한 70대 노인은 부인이 롤렉스시계를 만지작거리자 선물하겠다며 스스럼 없이 카드로 결재했다. 이들을 데리고 온 조선족 안내원이 귀뜸한 내용이다.전북의 '새만금 관광'이 중국을 겨냥하고 있다. 대규모 중국 관광객 유치 프로젝트인 중국특화벨트사업도 그 일환이다. 컨셉은 좋지만 중국이 만만한 곳은 아니다. 그들의 부(富)와 구매력을 활용할 인프라, 그것이 문제다. 우리가 아닌 그들 눈높이의 인프라 구축이 과제다. / 이경재 논설위원

  • 사회일반
  • 전북일보
  • 2011.08.16 23:02

[오목대] 훌리건의 나라 - 장세균

축구 시합도중에 갑자기 운동장에 뛰어들어 난동을 부려 경기를 방해하는 훌리건들이 있었는데 특히, 영국에서 이런 현상이 심했다. 신사의 나라라는 영국의 이미지와 흘리건의 난동은 모순의 극치였다. 이번 영국의 런던의 폭동사건도 월리엄 세익스피어를 낳았고 세계 최초의 의회정치의 산실(産室)이라는 이미지를 일시에 파괴시킨 의아한 장면이었다.영국은 지금도 전통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입헌 공화국이다.영국은 엄연히 민주 국가 이면서도 귀족이 있고 계급이 있다. 상류층, 중산층, 그리고 하류층이 있는데 계급간의 장벽이 심하다고 한다. 예를 들면 영국의 상원은 '귀족원(House of Lord)'로 불리워지고 상당수는 지금도 세습제이다. 하원(下院)의 명칭은 '평민회(House of Commmon)'로써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영국의 상류층이란 영국 욍족과 귀족을 말하고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이라는 벼슬을 가진 사람들로써 과거, 전쟁에서 무공(武功)을 세운 무인들의 후손들로써 직업이 없이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봉토(封土) 임대료로 생활한다. 중산층은 전통적으로 농부, 상공인, 기술자들을 가르키고 하류층은 노동자들을 지칭한다.재미있는것은 영어표현에도 계층간의 차이가 있다는것이다. 사용하는 영어를 보면 어느계층에 속해있는 사람인가도 알수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화장실'이라는 영어, 'Toilet'는 하류층의 언어이고 중류층은 '워싱룸 (Washing room)', 상류층은 '루 (Loo)'또는 '레버토리(Lavatory)'라는 단어를 쓴다고 한다.귀족층일수록 은유법을 즐겨써 화장실을 가고싶다고 할때도 '자연의 부름이 있다"는 뜻으로 'Call for nature'라고 말한다고 한다. 우리사회의 막말 풍조와는 대조적이다. 교육정책도 계급에따라 차별적이다. 공립학교에 한해서는 무상교육이지만 사립학교의 경우에는 다르다. 상류층은 막대한 등록금을 내는 '이튼스쿨'에 간다고 한다.1960년대에는 하류층은 대학에도 갈수도 없었다고 한다. 영국의 하류층은 신분 상승에 대한 강한 욕망이 없다고 한다.그들을 위해 주택문제와 최저 생활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번의 런던 빈민지구의 폭동사건은 그들의 계층의식에 변화가 있다는것인가/ 장세균 논설위원

  • 사회일반
  • 전북일보
  • 2011.08.15 23:02

[오목대] 나라꽃 무궁화 - 조상진

"골골마다 철철이 꽃이 피어도/ 우리는 무궁화를 섬기는 겨레// 무궁화 이 나라에 다시 피는데/ 소리소리 오랑캐 몰려들 온다"일제때 독립군이 부른 '무궁화'라는 노래중 일부다. 당시 독립군이 부른 노래 가사 중에는 거의 예외없이 무궁화가 들어갔다. 태극기와 더불어 무궁화는 나라를 상징하는 꽃이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일제때 무궁화는 엄청난 수난을 당했다. 진딧물이 많이 끼는 지저분한 꽃이라 비하했다. 심지어 어린 학생들에게 "무궁화를 보면 눈이 먼다"고 가르쳤다. 또 무궁화를 캐어 오는 학생들에게 상을 주기도 했고 그 자리에 사쿠라를 심도록 했다. 몇 백년씩 사는 장수식물임에도 일제 때 거의 뽑혀버려 큰 나무가 별로 없는 이유다.무궁화(無窮花)는 한자로 근화(槿花) 목근(木槿) 순화(蕣花) 반리화(울타리꽃) 등으로 불렸다. 영어로는 샤론의 장미(Rose of Sharon)다. 중국과 인도가 원산지로 세계적으로 250여 종, 국내에는 200여 종이 자란다.우리나라 무궁화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산해경(山海經)이란 지리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원 전 8~3세기에 편찬된 이 책에는 "군자의 나라에 훈화초가 있는데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君子之國 有薰花草朝生暮死)"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군자국은 우리나라를 가리키며 훈화초는 무궁화의 옛 이름이다.무궁화는 법률적으로 공식 국화(國花)로 지정되지 않았으나 그렇게 여겨져 왔다. 그리고 정부는 1963년 '태극문양을 무궁화 꽃잎에 감싸고 있는 형태'를 나라 문장으로 규정했다. 국가의 주요문서나 공무원 임명장, 훈장 등에 이를 사용하고 있다.이어 1990년에는 다양한 무궁화 품종 중에 꽃잎 중앙에 붉은 꽃심이 있는 단심계(丹心系) 홑꽃 7종을 보급품종으로 지정했다. 이후 20년 동안 공한지, 도로변 가로수나 울타리목으로 전국 3525곳에 307만 그루를 심었다.이어 산림청에서는 2008년 무궁화 메카도시로 강원도 홍천, 테마도시로 전북 완주와 충남 보령을 선정했다.무궁화 특화도시인 완주군은 8-15일 고산휴양림에서 '내 마음에 지지않는 꽃 무궁화'를 주제로 다양한 '나라꽃 무궁화 전국축제'를 열고 있다. 휴양림 일대 11만4000㎡에 무궁화 테마식물원을 조성한 것이다. 민족과 더불어 영광과 수난을 나눠온 무궁화가 선양되는 기회였으면 한다./ 조상진 논설위원

  • 사회일반
  • 전북일보
  • 2011.08.12 23:02

[오목대] 일본 편들기 - 장세균

독도문제가 뜨겁다. 전 세계 지도 제작사의 77% 정도가 동해(東海)를 일본해로 단독 표기하고 있다고 한다. 일반 외국인들은 이렇게 잘못 만들어진 세계 지도를 보며 영토에 대한 그릇된 지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미국조차 '분쟁지역에 대해서는 가장 널리 쓰이는 명칭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일본을 편들고 있는 상황이다.그렇다고 우리가 미국을 원망하면서 이를 반미(反美)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면 이것 역시도 유치한 발상일 뿐이다. 국가간의 관계란 원래가 국익(國益)의 관점에서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될수도 있기에 그렇다. 아마 미국과 일본이 우리보다 2년 먼저 맺은 '미·일 안전보장 조약'이 우리가 미국과 체결한 '한·미 상호방위 조약'보다 밀착 강도(强度)가 더 센 조약일 것이다.일본은 이 조약의 덕분으로 미국 '핵우산'의 보호 밑에 경제건설에만 주력할 수 있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독도에만 국한시켜 본다면 미국은 일본편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세계 제 2차대전 종료전에 있었던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의 미국·영국·중국 영수들의 회담과, 뒤이은 포츠담 회담도 독도에 대한 확실한 국적조항을 다루지 않았다.2차 대전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이 48개국을 상대로 '대일 평화조약'을 맺기 전에 미국은 일본·한국영토에 관한 초안 작성이 급선무였다. 1차에서 5차까지 초안은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고 분명히 명시되었으나 6차 초안에서는 갑자기 일본 영토로 둔갑되었는데 미국 정부의 일본 정치고문관 월리엄 시볼드의 일본 편들기 장난이 개입되었던것이다.다시 7차 초안에서는 독도가 한국 영토로 복귀되었다가 8차, 9차 초안에서는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기재되었다. 10차 초안에서는 유엔 총회의 결의를 들어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인정했다. 의견을 달리했던 영국과 미국은 최종적인 '영·미 합동초안'을 작성했는데 여기에 독도의 귀속문제를 정확히 언급하지 않았다.미국의 입김이 암암리에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미국이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노골적으로 편을 든 것은 아니지만 독도가 한국 영토라고 인정해주지 않은 것 자체가 은근히 일본편을 든 것이나 다름없다./ 장세균 논설위원

  • 사회일반
  • 전북일보
  • 2011.08.11 23:02

[오목대] 아침 바다 - 백성일

97년 동계U대회와 2002년 월드컵 조별 예선 경기를 치른 이후 전북에서는 별다른 국제대회가 안 열렸다. 평창이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되면서 우리나라는 스포츠에 있어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6번째 나라가 되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축구대회·세계육상선수권대회 등 국제경기가 열리면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고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효과가 나타난다. 이 때문에 국가별로 사활을 걸고 유치 경쟁에 나선다.지금 대구 달구벌이 27일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개막을 앞두고 들썩이고 있다. 대구시는 이 대회를 앞두고 몇 년 전부터 경기장을 비롯 숙박시설·컨벤션센터·도로망 구축을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해 도시 면모를 바꿨다. 건설경기 유발로 지역경제가 살아나고 대구 시민들이 글로벌 시민이 됐다는 자신감을 가지면서 도시가 활력을 되찾았다. 경기가 열리는 동안 대구는 국내외 관광객들로 넘쳐날 것이다.강원도 평창은 동계올림픽이 열리기도 전에 명성을 얻었다. 산골 평창이 전 세계 매스컴에 소개되면서 글로벌 도시가 됐다. 인천공항서 65분만에 평창에 도착할 수 있는 고속철이 깔리면 평창은 상전벽해가 된다. 평창은 그간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알펜시아를 건설하는 등 준비에 박차를 가해 겨울스포츠의 메카가 되었다. 강원도는 이제 못사는 지역이 아닌 희망이 넘쳐나는 고장이 되었다.여수(麗水)는 이제야 이름값을 하게 됐다. 내년 5월12일부터 8월12일까지 세계박람회가 열린다. 지난해 상하이엑스포를 통해 얼마나 엑스포가 지구촌인들의 큰 잔치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여수가 부에노스 아이레스, 나폴리, 시드니 같은 세계 3대 미항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예전 같으면 전국체전만 열려도 도시가 달라지는데 국제경기를 치르고 나면 상상을 초월한다. 잠자고 나니까 스타가 되었다는 말처럼 여수는 스타도시의 반열에 올랐다.전북은 새만금 도로 개통 이후에 1천만명이 다녀갔다고 호들갑을 떤다. 대부분 차타고 휑 지나 가버려 지역경제에는 큰 도움이 안 되었다. 그렇다면 전북은 무엇을 해야 할까. 세계인들이 찾을 수 있는 대형 이벤트를 개최해야 한다. 김진선 전 강원지사처럼 통 크게 밀어붙여야 한다. 정부 여당과 소통이 잘 안되는 불리한 여건에서도 그 뭔가를 찾아야 한다. 그간 전북은 너무 조용한 아침바다였다./ 백성일 주필

  • 사회일반
  • 전북일보
  • 2011.08.10 23:02

[오목대] 공무원 노조 VS 지방의회 - 이경재

1991년 지방자치제도가 부활될 당시엔 주민 기대가 컸다. 당시 반쪽짜리 지방자치였지만 굴절된 사안들이 바로잡히고 주민들이 주인 대접받는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관선시대의 폐해가 너무 컸던 반작용도 있다. 인사· 예산· 정책 등이 중앙정부 잣대로 좌지우지됐고 지역의 의견은 아예 무시되기 일쑤였다. 지방의 관리들은 목줄을 쥐고 있는 중앙정부만 쳐다보고 일을 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지방자치법이 새롭게 제정되면서 채택한 체제는 기관대립형이다. 기획 정책 예산 인사 등 자치단체의 업무는 집행부의 고유 업무로 못박고, 지방의회는 집행부 업무에 대해 견제하도록 기능을 조정해 놓았다. 따라서 감시 견제기능은 지방의회의 고유 업무이면서 가장 큰 권한이다. 사무조사권과 예산심의권이 대표적인 수단인데 집행부는 이 두 권한 때문에 쩔쩔 매기도 하고 지방의원을 '상전'으로 모시기도 한다.지방의회 부활 당시 지방의원들의 가장 큰 불만은 의회경시였다. 걸핏하면 이 풍조를 문제 삼았다. 무지하거나 권위주의적인 자신들은 탓하지 않고 집행부 간부들을 닥달했다. 간부 군기를 잡기 위해 고의로 단체장을 역공하는 일도 많았다. 심지어는 기자들 앞에서 도청 국장한테 재털이 심부름을 시키는 일도 있었다. 해외에 나가면 수행 공무원은 포터로 불렸다. 의원 짐을 대신 짊어지고 저자세로 수발하는 그들을 기자들이 그렇게 불렀다.격세지감. 익산시 공무원 노조가 익산시의회를 향해 눈을 치켜 떴다. 단초는 일부 시의원의 공무원 무시행태와 강압적인 태도를 노조가 지적한 데서 비롯됐다. 이를 두고 시의회가 발끈, 공무원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고 나서자 두 기관이 주먹을 쥐고 있는 상태다. 시의회는 어제도 성명을 내고 "사과하라."고 경고했지만 노조는 "고압적인 태도는 놔두고 의회입장만 내세운다."며 유감이라고 맞받았다.예나 지금이나 그놈의 태도가 문제다. 할 일이 많은데 태도를 놓고 싸우는 건 볼썽 사납다. 하지만 정치서비스를 받는 주민한테는 좋은 일이다. 집행부 견제기능이 제대로 작동될테니까 말이다. 의회-집행부가 초록관계라면 20년 전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그래서 싸움은 말리라 했지만 이런 싸움은 피 터지게 계속 하는 게 낫다./ 이경재 논설위원

  • 사회일반
  • 전북일보
  • 2011.08.09 23:02

[오목대] 씨내리, 씨받이 - 장세균

미국에서 정자기증을 통해 인공수정이 본격화 된 지 20년이 지났다. 미국 시사주간지 슬레이트는 인공수정이 합법화 된 후 매년 3만에서 5만명의 아이들이 수태되어 태어난다고 한다.남자가 자기의 정자를 수태를 위해 다른 여자에게 기증하는 사람을 순수 우리말로는 '씨내리'라 한다. 반대로 여자가 임신을 못할 경우, 대신 남자의 정자를 받아 임신해주는 여자를 우리말로는 '씨받이'라 한다. 씨내리보다는 씨받이라는 말이 많이 통용된 것을 보면 조선사회에 씨내리 보다는 씨받이가 훨씬 많았던 것 같다.우리 한국의 전통적 대리모인 '씨받이'를 주제로 한 영화가 권위있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 주연상을 타기도 했었다. 조선사회에서 장손 며느리가 아기를 못 낳을 때는 이 씨받이가 등장하는 데 대부분 씨받이를 직업적으로 하는 여인이나 가난한 집 딸, 또는 종의 딸을 들여와 합방시켜 핏줄을 잇게 하기도 했다. 씨받이와의 합방날짜가 정해지면 저녁에 장정 몇명이 여자집에 들이닥쳐 이 씨받이 여자의 눈을 가리고 자루에 넣거나 업고 가는데 그 이유는 씨받을 집이 어느 고을 어느 가문인지를 알리지 않기 위해서이다.이런식으로 해서 남자아이를 낳아주면 입마개쌀이라 하여 쌀 석섬을 보너스식으로 더 받는다고 했다. 만일 딸을 낳았을 때는 씨받이 부인이 양육해야 했는데 그 양육비조로 논밭 서너 마지기를 사주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현대에 들어와서 미국같은 나라에서는 정자를 제공했던 한 남자에게서 129명이 탄생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이제는 남녀 합방의 복잡한 절차를 생략하고 인공수정의 발달로 인해 수많은 불임부부에게 희망을 주게 되었다. 결혼은 하기 싫지만 아이는 가지고 싶은 독신녀에게는 새로운 복음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인공수정의 발달은 아기의 정체성 문제를 제공하기도 한다.예를 들면 '갑을'부부가 아기가 없자 '병'이라는 남자의 정자를 '정'이라는 여자의 난자와 인공수정을 시킨후 '하'라는 여자의 자궁에 착상시켜 10개월 후 아기를 낳았을 경우 그 아이의 법률적 부모와 생물학적 부모, 그리고 낳은 어머니가 서로 달라 정체성의 대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전통적 가족 개념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장세균 논설위원

  • 사회일반
  • 전북일보
  • 2011.08.08 23:02

[오목대] 남원 광한루원- 조상진

영원한'사랑의 지침서'인 춘향가는 서울서 내려온 이도령이 남원의 경치를 구경하는데서 시작한다. 나귀 안장에 올라 방자에게 묻는 것이다."이 애 방자야.""예.""너희 고을에 볼만한 경치가 있겠느냐?""소인의 고을에 별반 경치 없사오나 광한루라 하는데가 삼남 제일의 누각이라 하옵니다.""광한루가 있다면 오작교도 있겠구나.""오작교도 있거니와 누 옆에 영주각과 승사각이 좋사옵니다.""이 애, 그러면 남원이 곧 신선 사는 데로구나. 오늘 광한루 구경 가자."(정정렬 바디)여기서 광한루(廣寒樓·보물 제281호)는 삼남(三南), 즉 충청 전라 경상도에서 제일 가는 누각으로 묘사되고 있다.이어 이도령은 광한루에서 좋은 경치를 완상하며 술 두석잔 마신다. 곧 취흥이 올라 춘향 만날 시를 짓는다. '다리 이름이 오작이니 신선이 놀던 다리요(橋名烏鵲仙人橋)/ 누각 이름 광한이니 옥경루인가 하노라(樓號廣寒玉京樓)./ 묻노니 전생의 직녀가 그 누군고(借問前生誰織女)/ 알겠노라! 오늘의 견우는 나로구나(知應今日我牽牛).'여기서 옥경루는 하늘나라의 옥황상제가 산다는 누각이다.춘향가는 숙종(재위 1674-1720) 즉위 초 얘기다. 그러나 광한루는 춘향가의 배경이 되기 훨씬 전부터 절경으로 이름이 높았다. 당초 광한루는 1419년 황희 정승이 남원으로 유배돼 왔을 때 광통루(廣通樓)란 작은 누각을 지어 산수를 즐겼던 곳이다. 이후 세조 때 정인지가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를 본 따 광한루라 부르게 된 것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탄 것을 1638년 다시 지었다.광한루에는 내노라하는 시인 묵객들의 한시 80여 편이 걸려 있어 조선 최고의 사교장이었음 말해준다. 광한루 앞에는 연못이 있고 신선이 사는 곳으로 알려진 3개의 섬이 있다. 봉래(蓬萊) 방장(方丈), 두 섬에는 각각 백일홍과 대나무를 심고 영주(瀛州) 섬에는 완월정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연못은 전라관찰사 정철이 확장한 것으로 은하수를 상징한다. 3000여 마리의 토종 및 비단잉어가 관광객의 눈길을 끈다.요즘 광한루원은 TV드라마 '공주의 남자'촬영지로 각광 받고 있다. 또 남원시는 수문장 이벤트, 사랑의 언약판, 신관사또 부임행차 등 다양한 행사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풍류와 넉넉한 여유 공간으로 재인식되었으면 한다./ 조상진 논설위원

  • 사회일반
  • 전북일보
  • 2011.08.05 23:02

[오목대] 식사와 교육 - 장세균

미국의 교육학자였던 캔텔은 그 나라의 식사패턴과 교육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독일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많이 먹는 대식가들인데 독일의 학교는 대량의 지식을 축적시키고 그 지식들이 똑같이 동등한 가치가 있다고 가르친다. 못다 가르친 부분은 주석(註釋)을 달아 지식을 더 첨부시킨다.프랑스 사람들은 미식가(美食家)로 알려져 있다. 음식 맛을 식별하는 예민한 미각으로 식도락(食道樂)을 즐긴다. 그들은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도 충분한 시간을 갖는다. 까다롭게 주문을 하고 그 요리를 천천히 씹으면서 맛볼 것은 다 맛보는 것이다.이런 식의 식사는 당연히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되었다. 프랑스 학교는 많은 지식을 가르치기 보다는 생각하는 법, 발상(發想)법, 사상의 깊이를 이해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많이 아는 것보다 명철하게 생각하는 것을 중요시한다.영국인의 식사는 유럽의 많은 나라 가운데서도 거칠고 맛없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영국 사람들은 음식 맛을 즐기기 위해 먹기보다는 몸과 마음을 튼튼하게 하는 방편으로 먹기 때문에 영양분이 있는 음식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몸을 튼튼히 하는 교육을 강조하게 되고 스포츠가 중요한 교육의 목적이 된다.대체적으로 영국의 식사문화를 계승한 미국도 음식맛에 중점을 크게 두지 않는다. 필요한 칼로리를 섭취하는 것이 식사라고 본다. 다만 영국의 식사보다는 음식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점이 다르다. 미국의 학교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많은 선택과목을 주어 학생 스스로가 칼로리 음식을 선택해서 먹듯이 공부도 그렇게 하게 한다. 적정한 칼로리가 필요하듯 공부의 양도 많지 않다.한국인의 식사패턴은 일회(一回) 완결형이다. 중국이나 서양의 식사처럼 주스가 나오고 그 다음에 수프, 야채가 나오고 고기가 나오는 식이 아니라 모든 음식을 한꺼번에 한 상에다 차린다.한국 학교는 학생들에게 모든 것을 한꺼번에 가르쳐야 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지식교육에서부터 인성교육, 도덕교육까지 모든 것을 포함시킨다. 한국의 식사는 잡식성이다. 갖가지 채소, 생선, 육류까지다. 한국의 학교 교육 역시도 수강 과목수가 세계에서 제일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세균 논설위원

  • 사회일반
  • 전북일보
  • 2011.08.04 23:02

[오목대] 딴나라당 사람들 - 백성일

20여년간 한나라당은 전북에서 찬밥 신세였다. 노태우·김영삼 정권 때나 현재 이명박 정권 때도 집권 여당이지만 야당이나 다를바 없다. 지역정서의 높은 장벽에 가로막혀 한나라당으로는 선출직 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신한국당으로 강현욱 전지사가 군산서 국회의원이 됐고 이덕용 부안애향운동본부장이 부안서 도의원 된 것 말고는 없다. 도당 사무처장을 지낸 김경안씨나 이계숙씨는 비례대표로 도의원을 했거나 하고 있다.그간 지역에서 한나라 당적으로 출마한 후보들은 거의가 한 자릿수 득표에 그쳤다. 민주당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 했다. 다행스럽게 지난해 도지사 선거에서 정운천씨가 18.2%라는 득표율을 기록했다. 마의 두 자릿수를 넘었다. MB도 대선 때 한 자릿수에 그쳤다. 도내서 한나라당 후보로 두 자릿수 득표를 한 것은 기적이다. 그 만큼 전북에서 한나라당으로 표얻기가 어렵다.정운천씨가 놀랍게도 표를 많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민주당 일당 독주에 식상한 사람들이 그에게 표를 줬기 때문이다. 지난 18대 총선에서 전주에서 태기표 전 정무부지사, 전희재 전 행정부지사가 출마했으나 한 자릿수에 그쳤다. 이 정도 학·경력이면 두 자릿수가 가능할 것으로 점쳤다. 그러나 결과는 아니었다. 이처럼 전북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표를 얻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나 다름 없다.내년 양대 선거를 앞두고 또 지역주의 선거를 걱정하는 소리가 나온다. 이제는 지역감정 불식을 위해 한나라당 후보에도 표를 줄 때가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나라 전북도당과 당협을 이끄는 면모를 보면 아니올시다다. 물론 당협위원장 등은 아니라고 반발할 수 있다. '자신들이 척박한 토양속에서 그나마 당을 지키고 대통령을 만들었다'고 자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도민들이 느끼는 감정은 그게 아니다. 도내서 한나라당 한답시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 갖고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 보고 누가 표를 찍겠느냐는 것이다. 유·불리만 따져 이합집산하는 정치꾼들 정도로 보고 있다. 박근혜 전대표가 대선 주자 중 선두 주자로 달리자 마치 부나비 마냥 몰려 들고 있다. 지역주의를 경계하는 일부 도민들은 "한나라당 중앙당에서 전북을 포기하는 사석작전을 쓸게 아니라 지역에서 표를 모을 수 있는 인물부터 찾아서 내놓는게 더 급하다"고 일침을 놓는다./ 백성일 주필

  • 사회일반
  • 전북일보
  • 2011.08.03 23:02

[오목대] 홍 대표의 호남 배제 - 이경재

한나라당 지도부의 호남 발언을 되새기면 허허롭다. 지난 2008년 9월 지역 민생탐방 차 전북에 들렀던 박희태 대표는 "호남벌에서 언제 금배지를 한번 수확할까 하면서 왔다. 태산도 오르고 또 오르면 언젠가는 오를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구애작전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다.그로부터 꼭 1년 뒤, 정몽준 대표는 대표 취임 후 첫 지방방문 행선지로 호남을 택했다. 그는 광주지역 당직자 간담회에서 "우리가 호남에서 사랑 받으려면 이곳 말처럼 '징하게' 보여줘야 한다."고 언급했다.2008년 4월 MB 측근으로 당내 소장파 그룹을 이끌었던 정두언 최고위원은 쓴소리를 날렸다. "당이 선거때만 와서 지지를 호소할 게 아니라 평소에 노력을 더해야 한다. (지지층이 적은 호남지역에) 장기적 안목에서 투자해야 하는데 그렇게들 안하더라."고 털어놓았다.호남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기반이 그만큼 취약하다는 역설이다. 한나라당 사람들은 호남에서 한나라당 당원으로 일하는 것은 만주벌판에서 독립운동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한다. 지도부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욕을 다져왔다.그런 탓일까. 변화의 조짐도 있었다. 지난해 도지사 선거때 정운천 한나라당 후보가 얻은 18.2%의 지지율은 한나라당 사람들한테는 하나의 '희망'이었다. 석패율제가 시행되면 내년 4.11총선에서 적어도 3∼4석은 건질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그래서 한나라당 사람들은 지금 신발끈을 매만지고 있는 중이다.그런데 느닷없이 '호남배제론'이 튀어 나왔다. 홍준표 대표는 호남과 충청에 안배하던 지명직 최고위원 두자리를 모두 충청에 주겠다고 공언했다. 표가 나오지 않는 호남을 포기하겠다는 뜻을 이처럼 노골적으로 드러낸 정치인도 아마 없을 것이다.전국을 챙겨야 할 집권 여당 대표의 생각 치고는 너무 계산적이다. 당 차원에서도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최고위원회의에 호남이 배제되는 건 작은 문제가 아니다. 정강정책에도 어긋나는 독선이다. 한나라당의 정강정책은 '이제 구각을 깨고…지역주의에 안주하지 않는 전국정당으로 거듭 태어난다'고 적고 있지 않던가.홍 대표의 발언은 어르고 달래도 모자랄 판에 찬물을 끼얹고, 이제 막 틔우려던 싹을 짓뭉갠 꼴이나 마찬가지이다. 재고해야 옳다./ 이경재 논설위원

  • 사회일반
  • 전북일보
  • 2011.08.02 23:02

[오목대] 지명과 역사 - 장세균

지금까지는 개인의 주소를 지번(地番)으로 표시했으나 이제부터는 도로명 위주로 표기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불교의 일부 단체 ,그리고 우리땅 이름 지키기 모임 등은 여기에 반발하고 있다.지명은 그 지역에 얽힌 역사를 압축적으로 표현해 주기도 한다. 그래서 지명은 한마디로 살아 숨쉬는 향토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리의 이정표나 관공서 서류에는 모두가 한글로만 표기되어 있어 지명의 역사를 알 수가 없게 되었다.한자가 오랫동안 추방되다보니 우리말의 어원도 모르고 우리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여기에다 영어가 범람하다보니 '동사무소'라는 명칭이 어느날 갑자기 '주민센터'로 둔갑되어 국적 불명의 혼합어가 되었다. 한글세대 공무원들의 어쭙잖은 발상이라고 본다.미국의 지명을 보면 인디언의 말과 관련이 깊다. 뒤늦게나마 기독교적 양심의 발로로 인디언 언어를 붙여주는 아량을 베풀었던것 같다. 서쪽에 있는 오레곤(OREGON)주는 인디언말로는 '콜럼비아 강'을 뜻한다. 아이다호(IDAHO)주라는 이름은 인디언말인 'E Dah Hoe'에서 나왔다. 와이오밍(WYOMING)주의 이름은 Sioux 인디언말의 '대평원'을 뜻한다. 네브라스카(NEBRASKA)주의 이름은 Oto 인디언 말로 '잔잔한 물결'이라는 뜻이다. 그 지역 인디언 부족의 말을 붙여준 것이다.전주의 경우, 팔달로(八達路)는 공수내다리 부근에서 싸전다리를 지나 충경로 사거리 금암광장까지의 길을 말한다. 동서남북으로 길이 잘뚫렸다는 뜻의 사통팔달(四通八達)을 줄여서 붙여진 것이다. 진북로(鎭北路)라는 이름은 전주의 기운이 북쪽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진북이라고 붙여진 것이다. 태조로(太祖路)는 한옥마을 중심도로인데 태조 이성계에서 비롯된 이름이다.'어진(御眞)길'은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는 경기전과 관계가 있는 도로이름이다. 향교(鄕校)길은 전주 향교가 있는 도로 이름이다. 서원로(書院路)는 신흥학교 뒷산너머에 있는 화산서원에서 유래된 말이다. 관선길은 관선암(觀善菴)과 관련이 있다. 순수 한글 지명이 아닌 다른 지명은 반드시 한자와 병기(倂記)해 주면 쉽사리 지명의 뜻을 이해할 것이다./ 장세균 논설위원

  • 사회일반
  • 전북일보
  • 2011.08.01 23:02

[오목대] 죽부인(竹夫人) - 조상진

"무더운 여름 평상에서 죽부인(竹夫人)을 두고 수족(手足)을 쉰다. 그 가볍고 시원함을 취하는 것이다." 이는 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에 나오는 대목이다.죽부인은 매끈하게 다듬은 대나무를 원통형으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여름 침구다. 요즘처럼 무더운 날씨에 끌어 안고 자거나 다리 사이에 끼우고 자면 무섭게 달려드는 삼복더위도 저만치 물리칠 수 있다. 찬 성질을 가진 대나무로 만든데다 안이 텅 비어 있어 통풍이 잘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풀을 먹인 삼베 홑이불을 씌우면 더욱 그만이다.죽부인은 중국 당나라 때 더운 남방지역에서 널리 퍼져 한·중·일 삼국에 보편화되었다. 당나라 때는 무릎에 끼는 도구라는 뜻으로 죽협슬이라 불렀다. 그러다 송나라 때는 끌어 안고 자는 부인으로 의인화 해 죽부인이라 한 것이다.부인이다 보니 아버지가 쓰던 죽부인을 아들이 쓰지 않았다. 또 스승이 쓰던 죽부인을 제자가 쓰는 것도 금기시했다. 남성 위주의 독특한 풍습인 셈이다. 그렇지만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여인네들도 여름철에 이를 애용하게 되었다. 이 경우 '죽남인'이라 부른다.세간에는 죽부인과 관련된 여러 일화가 전한다. 그 중 하나가 5형제 얘기다. 옛날 노부부가 5형제를 두었는데 아직도 아버지의 혈기가 왕성했던 모양이다. 무더운 여름 밤에도 부인과 꼭 잠자리를 같이했다. 이를 본 5형제는 "저러다 또 아이가 만들어지면 큰일이다. 우리가 업어 키우고 똥·오줌까지 치워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지"라고 궁리를 했다.그 끝에 가짜부인을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을 아버지에게 드렸다. 아버지는 5형제가 만들어준 죽통을 안고 자보니 사람을 껴안고 자는 것보다 시원하고 잠이 절로 왔다. 덕분에 5형제는 효도를 하고 여섯째 동생이 생기지 않아 짐을 덜었다는 것이다.하지만 여름내내 손 때가 타도록 애용하던 죽부인도 찬바람이 나면 언제 그랬냐는듯 한쪽에 쳐박아 버린다. 그래서 옛 문인들은 변덕스러운 세태나 권력의 비정함을 이에 빗대기도 했다. 고려말엽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이색의 아버지 이곡(李穀)이 지은 소설 '죽부인전'이 대표적이다. 여성의 절개를 대나무에 비유하여 당시 퇴폐해 가는 고려 사회를 풍자한 것이다.요즘은 에어컨과 선풍기가 너무 흔하다. 하지만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 죽부인과 더불어 여름을 나 보면 어떨까./ 조상진 논설위원

  • 사회일반
  • 전북일보
  • 2011.07.29 23:02

[오목대] 울릉도·독도 - 장세균

일본 야당인 자민당 의원 4명이 8월1일 울릉도를 방문한다고 하여 우리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고 있다. 이는 독도를 영토분쟁화시켜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가기 위한 그들 전략의 일환이라는 주장도 있다. 지금까지의 일본 독도 망언은 언어 수사(修辭)의 수준에서 끝났으나 이제는 직접 행동으로까지 나서는 모양새이다.외교통상부는 주한 일본 대사관을 통해 방한을 추진중인 일본 자민당 의원들에게 안전문제 등을 내세워 울릉도 방문을 자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방문을 추진중인 4명의 의원들은 강경파로 '신도 요시타카'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대장을 지낸 '구리바야시 다다미치'의 외손자이고 '사토 미사하시' 참의원은 자위대 출신이며 '가쓰에이' 중의원은 경찰 간부 출신이라고 한다.이명박 대통령은 이들의 입국을 금지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울릉도는 한때 우산국(于山國) 으로 신라 지증왕 13년에 이찬, 이사부(異斯夫)의 정벌 아래 신라에 귀속하여 토산물을 신라에 바쳤다. 그후 고려가 개국한 후에도 이런 조공관계가 계속되어 토산물을 고려에 바쳤다. 고려말부터는 해안사람들을 울릉도로 이주시켜 생활하도록 유도했다.조선 개국후, 세종때에는 여러차례 관원을 울릉도에 파견하여 관리하였다. 그러나 왜구의 잦은 노략질로 울릉도뿐만 아니라 큰 섬들에 대해서 사람을 살지 못하도록 하는 공도(空島) 정책을 조정에서 추진하였다.조선후기 숙종 때에 일개 노젓는 수병(水兵)이었던 안용복은 울릉도와 독도에서 해산물을 독점했던 일본인들에게 붙들려 갔으나 일본에서 울릉도·독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고 당당히 주장하여 그 당시 일본 에도막부로터 앞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침범치 않겠다는 서계(書契), 즉 공문서까지 받아오는 쾌거를 올렸다.조선은 가끔씩 관리를 울릉도에 파견함으로써 그런대로 영토관리를 했으나 1800년 쯤부터는 울릉도·독도 관리를 소홀히했다. 이런 해이된 상태에서 일본인 254명이 울릉도에 거주했다는 것이다. 일본이 이런 사실만을 빗대어 울릉도도 자기 영토라고 억지로 우길지도 모를 일이다./ 장세균 논설위원

  • 사회일반
  • 전북일보
  • 2011.07.28 23:02

[오목대] 속죄양 - 백성일

예나 지금이나 조직에서 부(副)자는 별로다. 자치단체에서 부는 장(長)을 보좌하는 역할에 그칠 뿐 독자적인 컬러를 낼 수 없다. 행정부지사는 중앙에서 파견한 공무원이지만 일처리 때마다 지사 눈치를 살핀다.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실질적 의미에서 볼 때는 지사가 임명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정무부지사는 지사의 판단에 따라 여건만 맞으면 그 누구라도 임명할 수 있다.정무부지사는 정무에 관한 사항을 맡는다. 말이 정무지 사실 일 하려고 하면 엄청나게 힘든 자리다. 중앙 정부와 가교 역할을 해야 하고 도내 국회의원·도의원 그리고 언론사도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한마디로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들이라서 이 사람들 비위 맞추려면 애 간장 녹는다. 기자들도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라서 까다롭기는 마찬가지다. 평소 접대를 자주해야 하는 자리라서 아예 쓸개와 간장을 떼놓고 다녀야 할 지경이다.김완주지사가 취임초 경제를 살리겠다면서 삼성 출신 김재명씨를 정무부지사로 임명했다. 다음으로 매일경제 편집국장 출신인 한명규씨를, 그리고 쌍용 출신 송완용씨를 임명했다. 연임하면서는 전주문화방송 보도국장 출신인 박종문씨를 기용했다. 정무부지사는 지사를 대신해서 술상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자칫 건강이 망가질 수 있다. 그 만큼 쉬운 자리가 아니지만 정치에 꿈 있는 사람들은 경력 관리를 위해 이 자리를 넘본다. 그런 면에서 장세환 국회의원은 성공한 케이스다.박부지사가 25일자로 사표를 냈다. 언론사에 30년 정도 근무하면서 쌓아온 인맥 덕으로 1년 정도 정무부지사를 했지만 LH문제로 어려웠다. 서울과 전주를 밥 먹듯이 오가면서 열심히 챙겼지만 정무부지사라는 역할의 한계 때문에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실패로 끝난 LH문제에 대해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책임을 지고자 한다"고 사퇴의 변을 밝혔다.결국 박부지사가 속죄양(Scapegoat)이 되고 말았다. 사즉생(死卽生)을 외치며 도민들을 구렁텅이로 빠뜨린 김완주지사는 멀쩡하고 박정무만 자리를 떠나게 됐다. 그렇다고 LH후유증이 가라앉을 것 같지는 않다. LH후속대책에 관해 정부측의 속시원한 답변이 없어 이래저래 도민들만 속앓이 하고 있다./ 백성일 주필

  • 사회일반
  • 전북일보
  • 2011.07.27 23:02

[오목대] 공직자와 골프 - 이경재

"골프가 특권층의 스포츠가 돼선 안된다. 누구나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누구나 골프를 즐길 수 있도록 대중(퍼블릭) 골프장을 많이 짓게 했다. 그러면서 농민들도 즐길 수 있는 운동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반면 골프를 즐겼던 김영삼 대통령은 재임 시절 골프에 인색했다. "임기 동안 골프를 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공직자들의 골프를 금지시켰다. 골프 친 공직자들은 사정기관의 밥이 됐다.골프채를 잡아본 적이 없는 대통령은 골프대중화를 이끌었고, 골프를 잘 아는 대통령은 골프를 경원시했다. 골프 역기능, 이른바 댓가성과 연대성을 잘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노무현 대통령은 "골프 좀 치겠다."며 아예 골프치는 걸 공개했다. 그리고는 많은 '골프 사건'들이 터졌다. 이해찬 국무총리가 대표적이다. 이 총리는 2006년 3.1일절에 골프를 했다가 보름만에 낙마했다. 그해 1년 전 '식목일 산불 골프'를 쳤다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근신하겠다."고 국민한테 사과해 놓고도 골프를 치다 화를 입었다. 함께 골프 친 이기우 교육부 차관도 사표를 냈다.한나라당 소속 정치인들도 그해 '수해골프'를 쳤다가 화를 입었다. 피해가 극심했던 강원 정선지구의 복구작업이 한창이던 때에 강원랜드 골프장에서 한가롭게 골프를 쳤으니 국민 비난이 빗발친 건 당연한 일이다.전주시와 전북도청 공무원들이 골프를 치고 그린 피 문제로 감사를 받은 일도 있다. 골프로 공직자들이 화를 입는 '사건'은 잊을만 하면 도지는 단골메뉴가 됐다. 최근에는 임실군 소유 법인회원권 사용자에 대한 감사원 감사 결과, 평일 근무시간에 골프를 친 공무원 8명(임실군청 5명, 전북도청 3명)이 적발됐다. 확인중이니 아직은 새발의 피일 수 있다.익산시는 아예 감사원의 법인회원권 사용자명단 제출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이한수 시장의 동의가 있지 않고서는 가능치 않은 일이다. 평일에 골프 친 공직자들을 비호한다는 욕을 먹을 망정, 비공개 하는 것이 더 남는 장사라는 판단이 섰다는 뜻이겠다.기초자치단체가 감사원의 요구를 깔아뭉갤 정도라면 그럴만한 인물들이 명단에 들어있을 것임은 불보듯 뻔하다. 회원권 사용자중엔 중앙부처와 감사원 직원이 포함돼 있다는 소문이 지역에 파다하다. / 이경재 논설위원

  • 사회일반
  • 전북일보
  • 2011.07.26 23:02

[오목대] 문신(文身) - 장세균

일반적으로 몸에 문신이 있으면 조직 폭력배로 인식을 해왔다. 몸에 문신을 긍정적으로 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문화가 변하면서 연예인들까지 문신을 하는 경향이 많아졌다. 특히 미국의 프로 레슬러들은 몸에다 갖가지 문신을 하고 링에 등장하는데 관중석 팬으로부터 열광적 환호를 받기도 한다.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서는 금기(禁忌)의 영역을 좁히거나 파괴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간다. 그래서 문신 즉 ,영어로는 '타튜(Tattoo)'가 이제는 개인의 '자기 표현방식'의 하나라는 인식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또 다른 표현으로 문신은 신체의 '자기 결정권의 회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문신도 엄연히 패션의 하나라는 주장도 나온다.우리에게 있어 문신의 역사는 오래이다. 조선의 성종(成宗)때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섹스 스캔들의 여주인공은 그 유명한 어을우동(於乙宇同)이었다. 그 스캔들 내용이 성종실록에 나오는 것이다. 어을우동의 팔뚝에는 대여섯 명의 남자 이름이 문신되어 있는데 문신을 남긴 목적은 남자가 어을우동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표시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사랑의 증거를 남기는 애정문신이다.또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전쟁터에 나가는 남편의 등에다 부인이 울면서 문신을 새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문신이 나쁜 마귀(魔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효과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도 문신은 마귀를 아낸다고 보았다.특히 우리나라에서는 형벌문신(刑罰文身)이 발달했었다고 한다. 조선조에서는 도둑질하다 들킨 도범(盜犯)에게는 처음인 초범자에게는 오른팔에 '도(盜)'자를 문신하고 두 번째 저지르는 재범(再犯)일 때는 왼팔에다 '도(盜)'자를 문신하여 평생 전과자임을 나타냈다. 고려때는 도범에게 팔에다 문신을 하지 않고 얼굴에다 문신을 한 것에 비하면 범죄자의 인권을 많이 보호해 준 셈이라고나 해야할 것이다.우리말에 '경을 친다'는 말은 바로 신체에다 문신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은 문신이 일반화 되어 눈썹이 많지않은 성근 눈썹을 위해 인위적인 눈썹문신도 있다. 특히 외모를 중시하는 한국의 풍토에서 미용문신은 성형기술과 함께 비약적 발전을 할 것으로 내다보여 진다./ 장세균 논설위원

  • 사회일반
  • 전북일보
  • 2011.07.25 23:02

[오목대] 봉동 생강 - 조상진

완주군 봉동일대는 예로부터 생강 산지로 유명하다.이곳 생강은 다른 지역 생강에 비해 뿌리가 크고 섬유질이 없는 게 특징이다. 더욱이 글루코스(포도당) 함량이 높아 매운 맛이 덜한데다 향긋해 임금님께 진상하는 특산품이었다. 저장 방법도 독특하다. 온돌 아래 지하 저장고에 저장함으로써 생강의 부패를 방지하고 신선도를 유지시킨 것이다.봉동 생강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얘기가 전한다. 하나는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만석(申萬石)이라는 사람이 중국에 사신으로 건너가 봉성현(鳳城懸)이라는 곳에서 생강뿌리를 얻어 돌아 왔다. 이것을 지금의 전남 나주와 황해도 봉산에 심었으나 재배에 실패했다. 그러자 지명에 봉(鳳)자가 있는 이곳 봉상(鳳翔)에 내려 와 심은 결과 재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또 하나는 200년 전 일이다. 1820년에 전라감사로 부임한 이서구(李書九)는 풍수지리에 밝아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관내 순시를 위해 봉동읍에 들렸다. 이곳 봉실산(鳳實山)의 산세와 지형을 두루 살핀 후 들판을 보더니 "이 근처에서 장차 향기로운 풀(香草)이 자라 사람에게 큰 복을 줄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뒤 과연 향내나는 풀이 자라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바로 봉동의 생강이라는 것이다. 조선 초기의 기록에 완주지역 토산품으로 석류 울금 봉밀과 함께 생강을 꼽은 것으로 보아 두번째 얘기는 과장된듯 하다.일제 때 신문(동아일보 1934년 8월 15일)에도 봉동 생강은 '조선에서 유일! 삼례 생강'으로 소개되었다. 당시 봉동면을 중심으로 고산 삼례 용진에서 재배자들이 조합을 조직해 100정보에서 3000석(石)을 생산했다.이 생강조합은 자유당 때도 이어졌다. 한달 남짓 농림부장관을 지내 최단명(1954.5.6-6.29)에 그쳤던 율소리 출신 윤건중씨가 조합을 활성화시킨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농업을 잘 아는 농민출신을 장관에 임명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윤씨를 장관으로 임명했는데 윤씨는 독일 유학을 다녀와 독일식 협동조합 운동을 벌였다.국내 최대 생강 집산지를 끼고 있는 봉상생강조합이 15일 (주)대상 청정원과 공동사업협약(MOU)를 체결했다. 연간 120톤(6억 원 상당)의 생강을 구매키로 한 것이다. 농민들은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해 좋고, 기업은 좋은 품질의 생강을 구입해 상생의 해법이 아닌가 싶다./ 조상진 논설위원

  • 사회일반
  • 전북일보
  • 2011.07.22 23:02

[오목대] 한국과 홍수(洪水) - 장세균

긴 장마가 끝나고 불볕더위가 시작되었다. 장마 때마다 홍수 피해는 우리나라의 연중행사이다. 북한에서는 홍수 때문에 그들의 집단체조인 아리랑 공연이 취소되었다고 한다. 중국은 10년 이래 최악의 홍수로 701명이 사망했고 태국은 이번의 홍수로 101명이 사망하고 360만명이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우리나라의 홍수는 여름철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 때문에 장마와 폭우를 동반하는 2~3개의 태풍으로 인한 집중호우로 발생한다. 과거 전통적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는 홍수와 가뭄은 하늘이 내린 천벌로 보았다. 특히 오랜 가뭄은 농경국가인 우리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직했으면 임금이 머리를 풀고 하늘을 향해 비 내리기를 기원하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냈겠는가. 조선조 500년 동안 기우제를 지낸 횟수가 모두 1142회 였다고 하니 일년 평균 2회가 넘는다.가뭄 못지않게 무서운 재난이 홍수였다. 홍수를 바라보는 한국인의 정서는 유럽과 다르다. 유럽의 자연은 유순하고 규칙있게 변화하기에 인간의 의지로 다스릴 수 있었다. 유럽의 자연은 인간이 충분히 정복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일반적으로 지중해 인근의 강우량은 한국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했고, 유럽의 중심부에 있는 알프스의 눈이 녹아 흐르기에 수량은 풍부하지만 비바람 때문에 피해를 입지는 않는다.그와 반면에 한국의 자연은 인간이 다스리기에 억셌다. 그래서 산천(山川) 앞에 겸허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마음은 산에 들어갈 때는 대소변을 받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들어갔다고 한다. 또 산중에서는 큰 소리로 말한다거나 부정탈 말은 산신령을 노하게 한다하여 조심했다고 한다. 만일 냇가에서 돼지나 개를 잡아 피를 흘려서 부정을 타면 그 응징으로 폭우을 내린다고 생각했다.폭우로 홍수가 나면 고을의 원님은 누가 부정을 타게했는지를 조사하여 처벌까지 하려고했다 한다. 치산치수(治山治水)를 잘하는 것이 임금의 덕목이었기에 그랬던 것이다. 홍수와 같은 천재(天災)를 지금으로 말하면 인재(人災)로 생각하여 도덕적 성찰을 했었던 것 같다. 어찌보면 홍수 피해는 미리 대비치 않는 안이한 태도에서 나온 인재이기도 하다./ 장세균 논설위원

  • 사회일반
  • 전북일보
  • 2011.07.21 23:02

[오목대] 탁족(濯足) - 백성일

전국적으로 명성을 날렸던 부안 변산해수욕장이 새만금사업이 시작되면서부터 해류의 변동이 생겨 퇴적토가 쌓이고 있다. 이 때문에 예전의 명성은 오간데가 없어졌다. 심지어 모래를 갖다가 뿌려 놓아야할 상황까지 이르렀다. 물도 깨끗하지 않고 숙박시설이나 상가 등도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것같이 폐허처럼 변했다. 대신 격포나 고창 구시포 쪽으로 해수욕객이 옮겨 갔다.그러나 지리산 뱀사골, 무주 구천동, 진안 운일암반일암,장수 방화동 계곡, 진안 풍혈냉천, 순창 강천사 등은 피서지로 각광 받는다. 다음주부터 초·중·고에서 일제히 방학에 들어가면 이곳으로들 떠날 것이다. 이제는 피서가 하나의 생활 풍속도가 됐다. 하루 이틀이라도 가족과 함께 휴가를 안갔다 오면 신간 편하게 여름 넘기기가 힘들다. 호주머니 사정이 안좋아도 빚을 내서라도 휴가는 갔다와야 하는 연례행사가 돼버렸다.또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방학철에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 만큼 삶의 질을 높이는데 신경 쓰고 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란 말이 있지만 피서 가는데는 상관이 없다. 소득과 취향에 따라 피서법이 제각각이지만 그래도 산과 계곡이나 해수욕장을 찾는게 일반적인 피서법이다. 그러나 예전 선비들의 피서는 달랐다. 요산요수(樂山樂水)를 찾는 사람들이라 탁족(濯足)을 했다. 선비들은 몸을 노출하는 것을 꺼렸으므로 발만 물에다 담갔다. 탁족이란 말은 원래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서 나온 말이다.초나라 충신 굴원이 간신의 모함을 받고 쫓겨나 강가를 거닐며 비관하고 있을 때 마침 지나던 어부가 그의 형편을 물으며 다음과 같은 시 구절을 남긴데서 유래했다. 창랑의 물이 맑거든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내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맹자(孟子) 이루장(離婁章) 상(上)에도 이 말이 인용됐다.여기서 말하는 탁족의 의미는 물의 맑음과 흐림이 그러하듯 인간의 행복과 불행이 스스로 처신과 수양 방법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옛날 선비들은 지금처럼 에어컨과 선풍기를 갖고 몸을 식히는 것에 비해 탁족을 즐기면서 등배자(藤褙子)토수(吐手)죽부인(竹夫人)목침(木枕) 지모(紙帽) 등으로 여름을 났다./ 백성일 주필

  • 사회일반
  • 전북일보
  • 2011.07.20 23:02
오피니언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