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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케임브리지대 장하준 교수가 한나라당 정두언 최고위원 등이 주최한 국회 초청 특강에서 귀담아 들을만한 내용을 강의한 가운데 한반도 통일문제도 언급했다. 그에 의하면 북한의 수준을 끌어 올리지 않고는 의미있는 통일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현재, 북한의 경제 수준을 남한과 비교해 보면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은 약 200달러에 불과하지만 남한의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달러이다. 이 수치에서 나타나듯이 남한 사람들이 북한 사람보다 10배도 아닌 100배나 잘산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남한 사람이 잘 산다기보다 북한 사람이 너무 가난하다는 것이다.북한의 경제력은 인구 50만의 제주도 GDP와 맞먹는 정도에 불과하다. 이런 격차가 통일의 어두운 그림자라는 뜻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통일의 교과서 국가로 독일을 들고 있다. 그러나 서독과 동독 그리고 우리가 처한 상황은 다른점도 많다. 첫째는 동독과 서독에 비해 남·북한의 국력 차이가 너무 크다는 점이다. 통일전의 서독 1인당 국민소득은 동독에 비해 2배에 지나지 않았다.두번째는 동독과 서독은 우리처럼 동족상쟁의 전쟁을 겪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 서로간의 적대감은 우리처럼 높지 않았다는 것이다. 통일된 한반도는 상당 기간 갈등과 진통이 있을 것을 짐작케 한다. 세 번째는 동독과 서독의 분단 수준이 우리와 다르다는 점이다.독일의 경우에는 분단 당시부터 동·서독이 단일 경제권으로 취급되어 경제교류를 해왔고 1970년대 이후에는 상호 TV와 방송 청취가 가능한데다가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후에는 인적·물적 교류를 활발히 하였다. 네번째는 동독 주민들은 민주주의 경험을 해본적이 있다는 점이다. 북한의 경우는 해방후부터 민주주의 경험이 없었다. 동독 주민들은 1913년부터 1933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민주주의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긍정적으로 다른 점도 있다. 독일은 통일국가를 가져본 경험이 독일 비스마르크의 통일 이후 74년간이었지만 우리는 1200년 이상을 통일국가로 있어왔다. 그리고 독일의 통일에는 주변국들의 태도가 중요했으나 한반도 통일에는 상대적으로 주변국들의 눈치를 덜 보아도 된다는 점이다./ 장세균 논설위원
41년만에 전주에 큰 눈이 내려 설국(雪國)이 만들어졌다. 아귀 다툼하고 사는 인간 세상을 하루 밤 사이에 깨끗하게 눈으로 덮어 버린 이유는 뭣일까. 교만으로 가득차 있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일까 아니면 보기 싫은 것을 뒤덮기 위해서일까.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를 부러워만 한다.가난한 자는 부자를 부러워하고 권력을 가진자는 건강한 자를 부러워하고 건강한 자는 부자를 부러워 한다.그러나 '부러움이 부질 없는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장자(莊子)가 일깨워 준다. "저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의 크기를 말해 줄 수 없다(井蛙不可以語於海). 자신이 사는 우물이란 공간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拘於虛也). 저 여름 벌레에게는 얼음을 설명할 수 없다(夏蟲不可以語於氷). 자신이 사는 여름이라는 시간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篤於時也). 저 시골 동네 선비에게는 진정한 도를 설명할 수 없다(曲士可 以語於道). 자신이 배운 것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束於敎也)."그만그만한 공간에서 짧은 시간을 살다가면서 그저 자기 생각이 옳다고 아우성 치는 모습들이다. 우리는 공간, 시간, 지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각자가 자기의 성을 쌓고 사는 것 같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 보면 그렇지가 않다. 우물안 개구리 마냥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 가는지를 잘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호랑이 없는 세상에서 토끼가 대장 노릇 하듯 마냥 까불어대는 사람만 있다.선거가 자주 치러지다 보니까 선거 때마다 당선자 쪽으로 줄서서 호가호위 하면서 잘 먹고 사는 사람이 생겼다. 다 부질 없는 짓인데도 남들이 손가락질하고 비꼬는 것도 모른다. 자신이 한 손가락으로 남의 허물을 지적하지만 나머지 세 손가락이 정작 자신을 가르키고 있는 줄을 모른다. 자신은 잘못 없고 모두가 남의 탓이다. 그래서 세끼 밥 먹고 사람답게 살기가 힘든 것이다.다사다난 했던 경인년이 저문다.한해의 끝자락에 설 때마다 자신을 뒤돌아 보지만 아쉬움만 남는다. 맘을 비우지 못하고 채우려고 앞만 보고 달려왔기 때문이다. 영원한 것도 변하지 않은 것도 없다. 내려올 때를 조심해야 하는 것처럼 오히려 힘 있을 때 겸손해야 한다. 아니면 돈이고 권력이고 건강이고 모든게 일순간에 날아간다./ 백성일 수석논설위원
연말연시엔 동창회나 직장, 각종 계 등 온갖 모임이 성시를 이룬다. 그리고 모임과 식사자리엔 술이 빠지지 않는다. 우리나라 성인 한명이 한해 마신 술의 양이 소주 71.1병, 병맥주 140여 병이다. 술 소비량도 세계 3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런 걸 보면 음주가무에 특출난 한국인의 유전자를 인정한다 해도 '술 권하는 사회'에서 사는 게 아닌가 싶다.술자리엔 으례 폭탄주가 빠짐 없이 등장한다. 저자거리든 청와대든 폭탄주는 단골메뉴가 됐다. 맥주를 가득 담은 맥주잔에 위스키 잔을 떨어뜨려 맥주거품이 튀어오르는 형태가 마치 원자폭탄의 구름 같다고 해서 폭탄주로 불렸다. 지금은 맥주에 소주를 타 마시는 '소맥'이 대세다.폭탄주는 짧은 시간에 취기를 높이는 위력을 갖고 있다. 또 잔을 돌려가며 예외 없이 마셔야 한다는 것도 큰 파괴력을 갖는다. 짧은 시간에 취기를 극대화한 술을 주량에 관계 없이 마셔야 한다면 술 못마시는 사람한테는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또 주사(酒事)와 설화(說禍)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1986년의 '국회 국방위 회식사건', 1999년 진형구 대검 공안부장의 '조폐공사 파업 유도 발언', 한나라당 최연희 의원의 '여기자 성추행사건' 등이 모두 폭탄주에서 연유됐다.하지만 폭탄주를 미화하는 측도 있다. 지위 고하를 따지지 않고 누구나 똑같이 한잔씩 돌려가며 마시는 건 민주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폭탄주를 '민주지주'(民主之酒)로 부르기도 한다. 또 '중용지주'(中庸之酒)로 부르는 사람도 있다. 큰 것(맥주잔)과 작은 것(양주잔 또는 소주잔)의 조화, 부드러운 것(맥주)과 독한 것(양주나 소주)의 조화는 곧 중용을 의미하기 때문에 중용지주라는 것이다. 줄여서 '중용주'(中庸酒)로 부른다. 한국기자협회 세미나 뒷풀이 때 언론계 선배가 자신의 지론이라며 한 말이다.폭탄주는 미국의 탄광·벌목장·부두·철강공장 등의 노무자들이 즐겨 마신 '보일러 메이커 (Boiler Maker)'가 원조로 알려져 있다. '온몸을 취기로 끓게 하는 술'이란 뜻이 시사하는 것처럼 생활고를 달래려 싼 값에 빨리 취하기 위해 마시는 술이 폭탄주다. 이런 술을 정치인과 법조인, 고위 관료가 즐겨 마시고 대중화되고 있다면 뭔가 분명 잘못된 사회다./ 이경재 논설위원
중국이 연일 한국군의 군사훈련을 비판했다. 한국군이 지난 23일 대규모 합동 군사훈련을 시작하자 중국 언론은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며 더욱 비난의 수위를 높였던 것이다. 북한은 중국의 방파제이다. 북한은 중국에 있어 '순망치한(脣亡齒寒)'이다.한문의 4자 성어에 '순망치한(脣亡齒寒)'이 있는데 이 뜻은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것으로 이해관계가 서로 밀접하여 한쪽이 망하면 다른 한쪽도 보존키 어렵다는 뜻이다.즉 북한이 무너지면 중국에게도 이로울 것은 없을 것이다.1592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 때 충주에서 신립이 패배하자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평양으로 몽진을 하면서 중국 명나라에 이덕형(李德馨)을 보내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조선이 요청한 구원군 파병을 놓고 논의가 분분하였다. 명나라 조정의 대신들간에 일대 설전(舌戰)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명나라 병부상서인 석성(石星)이 '순망치한'이라는 말을 써서 파병을 설득력있게 주장했다.즉 조선은 중국에게 있어 입술과 같은 존재인데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듯 조선이라는 입술이 망하면 중국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중국 본토에서 일본 왜군과 싸우는 것보다는 조선땅에서 전쟁을 하는 것이 중국에 이롭다는 전략적 판단하에서 조선에 명군(明軍)을 파병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중국 명나라가 마음씨가 좋아 조선에 군대를 파병한 것으로 오인하고 있다.그래서 명나라가 군대를 보내 조선을 구원해 주었다는 뜻에서 감지덕지(感之德之)로 '구원군'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이웃 나라가 불쌍해서 구원군을 보낸 역사는 어디에도 없다. 국가 보위를 위해 극히 전략적 판단하에서 명나라가 조선에 파병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선조 이후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중국 명나라가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은혜를 조선에 베풀었다고 칭송해 마지 않았다.중국 명나라는 평양성을 탈환한 후 곧바로 심유경을 일본 진지에 보내 일본군이 평양 이상을 침입하지 말 것과 조선군은 평양 남쪽을 포기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협상까지도 시도했던 것이다. 북한은 중국에 '순망치한'인 것이다./ 정세균 논설위원
익산은 백제의 수도였을까? 이에 대해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었다. 천도설, 별도설, 별부설 등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 익산은 백제 말기에 사비성(부여)과 금마저(익산)라는 2개의 도성(都城)체제였다는 주장이 제기돼 흥미를 끈다. 초기 한성(서울)시대와 두번째 웅진(공주)시대, 그리고 세번째 사비시대 가운데 사비와 병존했던 수도라는 것이다.이러한 주장은 최근 원광대 숭산기념관에서 열린 '익산 역사유적지구의 세계 유산적 가치'라는 국제학술회의에서 제기되었다. 이번 회의는 익산 역사유적지구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것이다.익산은 미륵사지라는 걸출한 문화유산이 있음에도 오랫동안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경주나 부여 공주 등이 일찍부터 신라와 백제의 수도로 대접받았던데 비해 소홀한 감이 없지 않았다.그러나 익산은 1960년대 이후 한국 고대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곳으로 부상했다. 이 지역에서 출토된 청동기 문화유적을 비롯 수많은 유적과 유물이 알려지고 1980년부터 17년에 걸쳐 익산 미륵사지에 대한 발굴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역사의 현장으로 등장한 것이다.이 지역에는 미륵산성 익산토성 저토성 등과 성곽, 쌍릉, 왕궁리 사찰을 비롯 미륵사지 제석사지 사자사지 등이 유기적으로 분포돼 있다. 이들 유적들은 단순한 유적 밀집지역이 아닌 한국사에서 독특한 문화적 특징을 지닌 하나의 중심지역으로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고도(古都)로서'익산역사유적지구'를 형성한 것이다.이러한 주장이 가능한 결정적 계기는 1953년 일본 한 사찰에서 발견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 덕분이다. 중국에서 10세기에 편찬된 응험기에는 "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지(枳慕蜜地)로 천도하고 새로 정사(精舍)를 조영했다"고 나와 있다. 여기서 무광왕은 무왕으로, 639년 이전에 천도가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사찰 이외에 궁성의 협소함, 나성(羅城), 시가지 형성 등 의문점도 없지 않다.그러면 익산 역사유적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오를 수 있을까?전문가들은 지난 해 6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는 등 가치로서는 충분하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더 많은 발굴과 연구, 홍보 등이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한때 '화려했던 백제의 꿈'이 국제적으로도 인증 받았으면 좋겠다./ 조상진 논설위원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구촌의 평화를 '핵무기 공포에 의한 평화'라고 한다. 소위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들은 핵무기의 위력을 너무도 잘 알기에 전면전을 서로 피하는것이다. 핵 보유국들의 핵무기는 전(全) 지구를 20번 이상 초토화 시킬 수 있는 파괴력이라고 한다.강대국들의 핵 전쟁이 지구의 아마겟돈 일 것이다. 핵무기는 세 가지가 있다. 우라늄 폭탄, 플루토늄 폭탄, 그리고 수소폭탄이다. 우라늄과 플루토늄은 핵이 분열할 때 발생하는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이고 수소폭탄은 수소원자의 핵 융합과정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이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탄은 우라늄 원자탄이었고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탄은 플루토늄 원자탄이었다.그리고 수소폭탄이 사용된 적은 없지만 1950년대에 미국과 러시아는 실험 이후에 다량의 수소폭탄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북한의 핵 이야기 뒤에는 '우라늄'이 단골 메뉴이다. 우라늄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92개의 원소 가운데 가장 무거운 원소이다. 우라늄의 원자번호는 92번인데 이는 원자핵 속에 양성자의 숫자가 92개라는 뜻이다.우라늄은 양성자와 중성자를 합한 질량의 수가 234개인 것과 235개인 것, 그리고 238개인 것, 세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우라늄 235이다. 이 우라늄이 핵무기에 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38개의 우라늄이 자연계에 있는 모든 우라늄의 99%를 차지하고 있다. 핵무기에 사용될 수 있는 우라늄 235는 자연계 모든 우라늄에서 약 0.7% 정도에 불과하다.원자탄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라늄 238에서 우라늄 235를 추출해내야 하는데 이 과정을 '농축(濃縮)'이라고 한다. 흔히 듣게되는 '원심분리법(遠心分離法)'이란 우라늄 동위원소간의 미세한 질량의 차이를 이용하는 방법이다.'원심 분리기'란 1분에 수만회(回)를 회전하는 '초(超) 정밀기기'이다. 우라늄 원석을 원심 분리기에 넣고 고속으로 회전시키면 원심력에 의해 무게가 많이 나가는 238이 바깥으로 모이고 무게가 가벼운 235가 안쪽에 몰리게 된다. 이러한 과정의 반복을 통해서 '고농축 우라늄'을 추출한다. 이것이 원자탄의 원료가 되는 것이다./ 장세균 논설위원
예전 겨울 날씨는 3한 4온이 잘 지켜졌다.문고리가 쩍쩍 얼어 붙을 정도로 날씨가 추웠고 눈도 많이 내렸다.가죽장갑이나 귀마개는 필수품이었다.귀나 손발이 얼어 동상 걸린 환자가 많았다.어른들은 농한기라 할일이 없어 그럭저럭 지냈지만 아이들은 냇가가 꽁꽁 얼어 붙거나 눈 많이 오면 스케이트나 썰매 타는 것이 일이었다.말이 스케이트지 요즘 같이 가죽 신발에 칼날이 붙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발을 본 떠서 나무로 스케이트를 만들었다.발 모양의 스케이트는 판자대기 양쪽에 못 박아 신발을 고무줄로 동여 매서 타는 것이었다.칼날 대신에 굵은 철사를 댔다.썰매도 마찬가지였다.각 집마다 빨랫줄이나 잎 담배 말릴 때 썼던 철사 줄이 바로 스케이트를 만드는 재료였다.초등학생들은 스케이트나 썰매를 못만들어 형들로부터 내림식으로 만드는 법을 배웠다.전주 근교에서는 60년대 후반서 70년대 초반부터 덕진 연못이나 봉동 마그네 다리 삼례 다리 그리고 관촌 오원천 등지에서 현대식 스케이트를 탔다.실내 빙상경기장이 없어 추운 냇가에서 스케이트를 탔다.도시 사람들이나 제대로 된 스케이트를 탔지 시골 아이들은 언감생심이었다.감기에 걸려 콜록콜록 심한 기침을 하면서도 썰매와 나무로 만든 스케이트 타는 것이 그래도 신났다.요즘은 빙상 경기장이 있어 연중 스케이트를 탄다.근력과 유연성 그리고 순발력을 키울 수 있는 운동이라서 동호인들이 많다.예전과 달리 스키와 보드 타는 매니어들도 많아졌다.무주리조트는 접근성이 좋은데다 동계 U대회를 개최한 관계로 코스가 다양해 전국적으로 유명하다.그러나 가까이에 무주리조트가 있지만 리프트권이나 스키 렌탈비 등이 만만치 않아 도내 이용객은 그리 많지 않다.스키와 보드는 겨울 스포츠의 총아다.청소년들이 끼를 맘껏 발산하면서 도전과 응전정신을 배울 수 있다.설원을 무한 질주하면서 느낄 수 있는 그 짜릿함은 그 무엇과 비할 바가 못된다.방학동안 방안에 처박혀 컴퓨터게임이나 하는 아이들과는 본질이 다르다.스케일이 크고 담력 있는 아이로 키우려면 스키장으로 보내면 된다.온실속의 화초마냥 나약하게 키우면 안된다.도교육청이나 자치단체도 스키캠프를 많이 열어야 한다.백성일수석논설위원/ 백성일 수석논설위원
장독대 뒤편 쌀이 담긴 조그만 단지 '철륭'을 모신다. 터신(土地神) 단지다. …단지 속의 쌀을 햅쌀로 바꾸어 넣는데 여기서 꺼낸 묵은 쌀은 밥이나 떡을 해 먹는 게 아니라 장독대 언저리 깨끗한 곳을 파고 정하게 묻었다."아깝게 왜 파묻어? 쌀을." 효원이 어머니 연일 정씨(延日鄭씨) 부인이 하는 일을 보고 옆에서 물었다. "큰일 날 소리, 이것은 그냥 쌀이 아니라 신체(神體)다." "신체?" "신의 몸이라 그런 말이지…" (최명희의 '혼불' 6권 245쪽)최명희는 쌀을 신체라 했고 우리 고장의 시인 이병초는 "쌀은 내 목숨"이라고 했다. 쌀은 가뭄과 장마, 거센 폭풍우와 뙤약볕을 이겨낸 산물이다. 쌀 '미(米)'를 파자하면 '팔(八)+팔(八)'이 되고 이를 합치면 88이 된 데서 나이 88세 별칭을 미수(米壽)라 했다. 쌀 한톨이 생산되기까지에는 여든 여덟번의 손끝 정성이 가야 한다는 속설이 여기에서 나왔다.신체와 목숨으로 여긴 쌀, 여든 여덟번의 정성을 들이고서야 수확할 수 있었던 쌀이 천덕꾸러기 신세가 돼버렸다. 우리나라 1인당 연간 쌀소비량은 74㎏이다. 10년 전에 비해 20kg이나 감소했다. 1인당 하루 쌀 소비량도 202g에 불과하다. 밥 한공기에 소비되는 쌀이 130g 안팎이니 우리 국민들은 하루 두 공기도 먹지 않는 셈이다.올해 전국 쌀 생산량은 429만5천413톤. 지난해보다 12.6%가 줄었다. 생산량 감소에도 불구하고 가격마저 하락했다. 곡창 중의 곡창인 김제지역의 쌀 한가마(80kg) 값이 12만원 선에도 못 미치고 있다. 생산비도 못건진다면 농업으로서 가치는 이미 상실한 것이나 마찬가지다.지금 30년만의 최악의 흉작과 가격하락이라는 이중고에 농민들의 시름이 깊다. 농민단체들이 자치단체 청사 앞에 벼를 야적하고 성난 농심을 표출시키고 있다. 그런데 자치단체나 정부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북의 연평도 폭침 때문에 대북지원 쌀마저 막혀있으니 설상가상이다.농자는 천하지대본 (天下之大本)이요, 농업은 사업지수(四業之首)라고 했다. 천하의 근본이라는 농사를 짓기 꺼려하고, 농(農)·학(學)·상(商)·공(工)의 네 가지 직업 중 으뜸이라는 농업을 포기해야 할 실정이니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 농사를 지어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 그것이 문제로다./ 이경재 논설위원
지식경제부 기술표준원이 조사한 한국 남자의 평균 신장은 174cm이고 여자는 160.5cm로 나타났다. 일본인 남자 평균키인 170.7cm보다 약 3cm가 더 크고 한국 여자는 일본 여자 평균 키인 158cm보다 약 3cm가 더 큰 셈이다. 한국인의 평균 키가 서양의 이탈리아인 평균 키보다 약간 큰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한국인의 평균 키는 독일사람 평균 키보다 약간 작을뿐이다. 그리고 한국인의 평균 신장은 2003년부터 정지 상태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인의 평균 신장은 동양인으로는 훌륭한 키라고 할수있다. 일본 에도시대 말기의 국학자인 '요시다 쇼닌'은 우리 조선인을 부정적으로 표현했으면서도 조선인의 풍채만은 아주 휼륭하다고 칭찬하였다.확실히 조선 시대에도 한국인의 평균 키는 일본인보다 컷던 모양이다. 과거 한반도 고대인들의 평균 키가 얼마인지는 확실한 연구가 없지만 그러나 발굴된 유골로 보아서는 155cm는 넘었던 것 같다. 이 정도의 신장은 매우 적은 것으로 생각 할수도 있지만 세계를 지배했던 고대 로마병사들의 평균 키가 겨우 160cm였다는 주장도 있는 것을 보면 그리 적은 키는 아니다.사람의 키는 반드시 영양분을 많이 섭취한다고 커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자연환경과 신장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기도 한다. 북쪽 사람들 즉, 스칸디나비아 반도 사람들의 키가 큰 것은 체온의 방열(放熱)을 극소화하기 위해 체표(體表)가 줄어든 결과란 것이다.단위 체중당 체표 면적을 줄이려면 키가 길어질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추울수록 세로로 길어지고 더울수록 가로로 퍼진다는 이론이다. 들판에서 발을 많이 쓰는 민족일수록 다리가 길러지고 산속에서 비탈을 오르내리며 사는 민족일수록 다리가 짧고 근육이 붙는 무다리가 되기도 한다. 또 육식을 주로 하는 민족은 그것을 소화하는 창자의 길이는 3m만 되어도 충분하지만 초식(草食)을 주로 하는 민족은 섬유질을 계속 소화시켜야 하므로 창자가 7m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장신(長身)보다는 단신(短身)이 수명도 길고 건강 확률이 높다는 주장도 있다. 로마 클럽의 발표에 의하면 가장 이상적인 키는 15ocm에 체중이 50kg이라는것이다. 작은 키 때문에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장세균 논설위원
서정주와 고은은 비슷한 점이 많은 시인이다. 천재적인 기질이 그렇거니와, 출생지가 전북이라는 점, 불교에 귀의했다는 점, 비교적 장수한 점, 노벨상 후보에 단골로 오른 점 등이 그러하다.물론 다른 점도 있다. 서정주가 체제 순응적이었다면 고은은 반체제적 성격이 강했다고나 할까. 고은은 서정주를 '(시에 있어) 하나의 정부(政府)'라 칭송했다. 그러한 칭송은 후배들이 다시 고은에게 붙여줬다. 그렇지만 서정주 말년에 둘 관계는 서먹했다.어쨌든 이들은 모두 한국문학을 비옥하게 했고, 젊은 시절 기행(奇行) 역시 독보적이었다. 서정주는 18살에 톨스토이즘을 실현한다며 넝마주의로 떠돌았다. 6·25 때는 이명(耳鳴)과 정신이상으로 힘든 세월을 보냈다.고은은 한 수 더 뜬다. 18살에 6·25의 충격으로 아예 머리를 깎고 입산을 했다. 30살 때는 자살 목적으로 제주행 배를 탔으나 술이 너무 취해 실패했다. 이후 제주도에서 고등공민학교 교장 노릇을 하면서 잠 안자고 술마시기, 공동묘지에서 잠자기, 긴 바지 잘라 반 바지 해 입기, 까마귀 잡아 구워먹기, 반주로 4홉 소주 마시기, 모든 말을 '이'발음으로 하기, 한라산 헤매다 조난되기 등 온갖 광태를 부렸다. 이후에도 취중 키스, 취중 구타 등이 이어졌다. 또 만작(晩酌)을 넘어 새벽 술(曉酌) 마시기를 하고 자살 기도 끝에 30여 시간만에 깨어난 적도 있었다.이러한 광기(狂氣)와 한때의 정치 관여를 마땅치 않게 여기는 이들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는 시대에 대한 저항과 내심에 끓어 오르는 천재성이 폭발한 것이 아닐까 싶다.마침 고향에서 별로 대접받지 못하던 고은 시인에 대한 심포지엄이 지난주 군산에서 열렸다. 심포지엄에는 문학평론가 염무웅 영남대 명예교수가 '실존의 모험, 대지의 서사'를, 도종환 시인이 '유목의 정신, 백척간두의 삶'을 발표했다. 먼저 염 교수는 "고은의 문학은 이제 한반도의 모성적 대지 전체를 그 실물 크기에서 언어화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높이 평가했다. 이어 도종환 시인은 "그의 시는 거대한 산과 같다"며 "완성하고 다시 시작하는 부정의 정신"을 핵심으로 꼽았다.문화유적이 현장에 있어야 빛을 발하듯, 고향에서 보물같은 이들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었으면 한다./ 조상진 논설위원
일본의 '간 나오토 (菅直人)' 총리의 '한반도 유사시 일본 자위대 출동 운운' 발언은 실언(失言)으로만 넘길 일은 아닐 것 같다. 원래 실언 속에 진심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 힘을 가진 자는 힘을 쓰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어렵다.일본의 국방 예산은 미국 다음으로 전 세계에서 두 번째이다. 그들의 경제력이 국방력을 뒷받침하고 있다. 과거 1882년 조선 고종때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중국의 청나라 군대가 한반도에 개입하고 일본도 개입하여 제물포 조약을 강제로 맺게했고 배상금도 받아갔다. 과거 역사의 쓰라린 경험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개인간의 노름에서 돈을 따는 사람이 있으면 잃는 사람이 있어 희비(喜悲)가 교차한다. 한 사람의 행복이 다른 사람에게는 불행이다. 이런 상관관계가 국가와 국가간에도 적용되는 경우가 바로 한국과 일본이었다. 1950년에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300만명 이상의 인명을 앗아간 민족 최대의 비극이었다. 그 전쟁의 후유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6·25의 비극은 현해탄 바다 건너 일본에게는 희소식이었다. 마치, 이는 베트남 전쟁이 한국 경제에는 많은 도움을 준 것과도 비슷하다. 일본은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으로 전락하자 전국 90개 도시가 완전 초토화되었던 것이며 전쟁 이재민이 무려 800만명이었다고 한다.하루에 정부에서 주는 쌀 배급량, 300g으로 연명을 해야했고 쌀이 부족하면 대두, 소두나 고구마를 배급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일본에 군수품 공장을 설립하고 막대한 무기를 생산하기 위해 엄청난 자본을 투자했다고 한다. 이런 군수공장들이 결국 나중에는 일본 중화학 공업과 최첨단 공업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은 상식일 것이다. 이런 군수공장들은 일본의 실업상태를 해결하는 역할도 한 것이었다.그리고 일본 자동차 메이커의 상징인 도요타 회사도 연간 생산량이 300대에 불과하던 것이 6·25 전쟁의 특수(特需)로 엄청난 재미를 보았다는 것이며 일본의 '소니(SONY)도 단파 수신기를 만드는 보잘것 없는 영세기업에서 6·25 전쟁에서 무전기 생산을 함으로써 돈더미위에 올랐다고 한다. 즉, 우리의 불행이 그들의 행복이었던 셈이다./ 장세균 논설위원
요즘 전주 서민들이 더 뿔났다. 시내버스가 파업해 아침 저녁으로 버스 기다리느라 승강장에서 추위에 덜덜 떨고 있기 때문이다. 겨울에 찬 바람 맞고 버스를 기다릴때는 왠지 부아가 치민다. 성미가 급한 사람은 기다려도 차가 오지 않으면 택시를 잡아 타는 바람에 부담만 는다. 전세버스를 대체 투입했지만 불편은 여전하다. 서민들은 어디다 하소연도 못하고 경제적 약자라서 약만 오른다. 겨우 내뱉는 말이라곤 개XX들이라고 볼멘소리를 한다.시내버스 파업으로 서민들만 괴롭다. 가진 사람들은 시내버스 파업에 따른 불편이 어떠한지 관심도 없다. 오불관언이다. 하루 14~16시간 꼬박 일해도 월급으로 150만원 밖에 받지 못하는 조합원들이 기습 파업을 벌였지만 사측에서 끄덕도 안해 여론만 악화되고 있다. 전주시내 5개 시내버스 회사들이 연간 시로부터 자그만치 100억원의 보조금을 받는다. 여기에다 2005년부터 경전철 도입을 위해 손실 보조금으로 해마다 15억원씩을 받았다. 그렇다면 운전사들도 먹고 살게는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자가용이 보급되기 전만해도 운수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승객이 넘쳐 났다. 돈 세는 맛으로 사업했다고 한다. 부자 가운데 운수업 사장들이 많았다. 현금이 많아 위세가 당당했다. 차 한대만 굴리면 차 한대 늘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정도로 돈 버는게 쉬웠다. 전주시내 버스는 출 퇴근 때마다 항상 콩나물 버스였다. 비좁은 공간에다 마구 승객을 짐짝 넣듯이 태우고 다녔다. 태워 주는 것 만으로도 감사했다. 서비스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이번 파업은 어느 정도 예상 됐었다. 쥐꼬리만한 월급 갖고서는 살 수 없다는 조합원들의 현실 인식이 비등점에 올라와 있었다. 문제는 시가 너무 업체 편에서 행정을 해왔기 때문이다. 5개 버스업체 대표들로 구성된 시내버스공동관리위원회가 요구만 하면 모든 걸 수용해줬다. 그간 시민과 각계 전문가가 포함되지 않아 누구 한테도 간섭 받지 않았다. 시가 특히 1억 들여 시내버스 경영진단 용역을 실시한 것은 보조금을 주기 위해 근거 자료를 만든 것 밖에 안된다.아무튼 시 보조금이 눈먼 돈이 아니라면 시의회에서 사용 내역을 샅샅히 파헤쳐서 그 결과를 공개토록 해야 한다./ 백성일 수석논설위원
우리나라처럼 지방에 살면서도 지역신문을 읽지 않고 서울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의존하는 경우를 미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플로리다에 사는 사람이 그 지역의 신문을 보지 않고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를 읽는 경우는 거의 없다. 두 신문도 대부분 뉴욕이나 워싱턴 내에서 소화된다.전국지와 지방지로 이분화하지도 않는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LA타임스처럼 영향력이 큰 권위지와 일반 지역신문으로 구분하는 정도다. 굳이 전국지를 가린다면 USA투데이와 경제신문인 월스트리트저널 두개 신문뿐이다. 두 신문의 점유율은 전체 신문시장(5600만부)의 3%에 불과하다.지방자치제도가 일찌감치 도입된 선진국에서 제대로 대접 받는 건 전국지가 아니라 지역신문이다. 지방정부와 지방의회가 조세징수·지역개발·정책수립권한을 갖고 지역마다 차별적인 정책들을 추진하는데 이런 정책정보를 지역신문을 보지 않고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말로만 하는 지방분권, 지방자치가 아니라 실질적인 지방자치를 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지방분권이 잘 돼 있는 독일은 400여개 일간지중 90% 이상이 지역신문이고 노르웨이와 영국도 지역신문 점유율이 각각 72%와 67%에 이른다. 중앙집권화된 프랑스마저도 지역신문 점유율이 70%대에 이를 정도다. 지역신문이 위기에 처했을 때 별도의 입법과 정책을 통해 지원했던 나라들이다. 일본만 해도 이미 1950년대에 불공정거래법을 고시해 지역신문이 생존할 수 있도록 했다. 지역신문이 예뻐서가 아니라 여론의 다양성 확보가 중요하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들이다.반면 우리나라는 조·중·동이 전체 신문시장의 75%를 차지한다. 지역신문의 점유율은 10% 안팎이다. 이런 구조라면 여론의 독과점 폐해가 심각하고 그 피해는 독자에게 돌아간다고 언론학자들은 경고한다.전북에는 14개 지역신문이 등록돼 있다. 숟가락 두개 꽂으면 딱 들어맞을 밥그릇에 14개가 들락거리니 항상 배고플 수 밖에 없다. 지난주 전북일보와 전북CBS방송이 주최한 한 프로그램에서는 지역신문살리기의 현실적 방책들이 나왔다. 독자구독료 지원조례 제정, 광고 등 자치단체의 신문지원 차별화, 신규 인허가의 엄격한 심사 등이 그것이다. 맞는 말이긴 한데 실행이 문제로다./ 이경재 논설위원
북한에 의한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에 해병대와 해군 지원율이 높아졌다는 희보(喜報)가 있다. 군대를 안가기 위해 생이빨까지 뽑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오히려 사지(死地)를 무서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해병대를, 그것도 가장 힘든 '수색병과(兵科)'를 지원하는 젊은이가 많아졌다는 것이다.이런 현상을 두고 조직을 위한 생존본능의 발로라고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체제 생존을 위한 생존본능에 발동이 걸린 것이다. 인간에게는 욕망의 다섯 단계가 있는데 첫째는 생존의 단계, 두 번째는 안전의 단계이다. 생존의 단계는 단체나 조직의 생존도 해당된다.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에게도 생존본능이라는 것이 있다. 동물의 생존본능은 인간이 감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예지능력까지도 구비하게 만들었다. 바닷물이 한꺼번에 밀어닥치는 '쓰나미'에 인간은 속수무책이지만 동물은 미리 '쓰나미'현상을 감지하고 도망을 간다.지진 발생을 미리 아는 것도 가축들이다. 중국의 '당산 지진'도 그 지역의 돼지들이 미리 알고 괴성을 지르는 등 평소의 모습들이 아니었다. 개미는 홍수날 것을 미리 알고 자기 집을 높은 언덕으로 옮기는 작업을 한다. 동물이 어미뱃속에서 태어나자마자 어미젖을 입으로 빤다든가 병아리가 달갈 껍질을 깨뜨리고 나오는 것도 생존본능의 한 표현이다.쥐가 고양이를 보면 무서워 도망치는 것도 일종의 생존본능의 발로이다. 독일의 저널리스트인 마르쿠스 베네만은 지식과 지혜는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했다. 동물의 생존본능이 인간처럼 지혜를 낳게 했다는것이다. 예를 든다면 '군대개미'는 자신들보다 몇 배나 큰 전갈을 만나면 협공작전으로 전갈을 죽인다는 것이다. 솔개는 불이 붙은 나무조각을 집어서 마른풀에다 떨어트려 불을 내고서는 뛰쳐나오는 쥐와 도마뱀을 낚아챈다는 것이다. 북방 족제비는 자신보다 빠른 토끼를 잡기위해 미친척도 한다는 것이다.연평도 사건을 통해서 오히려 젊은이들의 안보의식이 훨씬 강화되었다면 전화위복이다. 과거 페르샤 전쟁에서 아테네가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아테네 민주체제의 생존을 위한 아테네 시민들의 용감한 투혼(鬪魂) 때문이었다./ 장세균 논설위원
진묵대사(震默大師·1562-1633)는 한국 불교사상 가장 신비로운 스님중 한 분이다. 수많은 기행(奇行)과 이적(異跡)을 보였으며 석가모니 부처의 화신으로 일컬어졌다.그 중 몇 가지만 보자. 먼저 어혼환생(魚魂還生)의 얘기. 진묵이 탁발하러 다니던중 천변을 지나게 되었다. 마침 물고기를 가마솥에 끓이고 있던 사람들이 스님을 골려주기 위해 "한 그릇 드시고 가라"고 권했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법도를 뻔히 알면서. 그러자 스님은 두 손으로 펄펄 끓는 가마솥을 번쩍 들어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리고 상류로 올라가 변을 보니 입으로 들어갔던 물고기들이 펄펄 살아서 헤엄쳐 내려왔다.또 하나, 해인사 대장각의 불을 끈 얘기. 완주 봉서사(또는 모악산 수왕사)에 있을 때다. 점심 공양할 상추를 씻고 있던 스님이 갑자기 물을 떠서 공중에 뿌리기 시작했다. 다른 스님들은 공양이 늦어진다며 타박했다. 그러자 스님은 "지금 해인사 장경각에 불이 나 끄고 있다"고 답했다. 한달 뒤 해인사에서 한 스님이 들려 "장경각에 불이 났는데 갑자기 비바람이 몰려와 불이 꺼졌다"고 알려줬다. 불이 꺼진 후 자세히 보니 상추 부스러기가 떨어져 있었다.마지막 하나, 능엄삼매(凌嚴三昧) 얘기. 진묵이 변산반도 월명암에 있을 때다. 시자(侍者)가 속가 일로 산중을 내려가면서 스님의 다음 날 공양을 지어 놓았다. 시자가 떠날 때 스님은 바람에 창문이 닫히지 않도록 손가락을 문지방에 얹고 능엄경을 읽고 있었다. 이튿날 돌아 와 보니 공양은 그대로 있고 스님도 그 자세 그대로였다. 다만 스님의 손가락이 바람에 열렸다 닫혔다 하는 창문 때문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스님에게 인사하자 "왜 제사를 안 모시고 벌써 왔느냐"고 하는 것이었다.이같은 일화는 전북지역 곳곳에 스며있다.또 좋아하는 곡차를 동이째 마시고 읊었다는 오도송(悟道誦)도 유명하다. "하늘 덮고 산을 베고 땅위에 누었다가/ 구름 병풍에 달빛 등불삼아 바닷술을 마신다./ 맘껏 취하여 비틀비틀 무애 춤을 추려다/ 어허, 소매 길어 곤륜산에 걸리겠네."김제 만경출신인 스님의 일화는 기축옥사와 임진·병자 양란 속에 시달린 호남 민중의 한과 염원이 담겨 있다. 증산교·원불교와도 연결된다.지난 주 완주에서 열린 학술대회를 계기로 스님의 행적과 사상이 재조명되었으면 한다./ 조상진 논설위원
북한이 핵무기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에 대해 여러 분석이 나오고 있다. 첫째로 1970년대부터 북한의 경제가 남한의 경제보다 뒤떨어지기 시작하면서 김일성은 북한이 남한에 의해 흡수 통일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남한의 발전된 경제력은 곧바로 남한 군사장비의 현대화로 이어질 것이며 남북간의 재래식 군사전력에 많은 차이가 날 것으로 김일성은 보았다는 것이다.그래서 북한은 재래식 군사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핵무기 개발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분석을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2000년 10월에 울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북한의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을 만난 자리에서 북한이 왜 핵개발을 하느냐고 묻자 김정일의 대답이 "남한과의 경제력이 갈수록 커져 군사력 면에서 남한이 훨씬 강해질 것이 두려워 군사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둘째로 북한이 핵무기 보유에 강한 집착을 가지는 시기를 과거 구(舊 ) 소련이 해체되고 서독이 동독을 흡수 통일하는 과정과 동시에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이 연이어 무너지기 시작하는 장면들을 목격하면서부터 라는 분석이 있다. 이 때 김일성은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이은 붕괴로 북한의 위치가 예전과는 다르다는 위기감을 가졌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세 번째는 2001년 10월 8일 미국의 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개시와 2003년 3월 20일 미국 주도로 이루어진 대 이라크 군사공격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2002년 미국 부시 대통령은 북한과 이란·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기도 했다.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집착하는 네 번째 동기는 바로 이라크 사담 후세인의 축출이라고 보는 것이다. 김정일로서는 이라크 다음의 미국의 목표는 북한일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북한 관리들이 2003년 6월 미의회 대표단이 북한을 방북했을 때도 핵무기를 제조하는 것은 정확히 사담 후세인의 신세가 되지않기 위해서라고 밝힌 바도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북한의 핵무기 확보는 일본의 핵무장을 가져올 명분을 일본에게 던져주는 최악의 시나리오 일 수도 있다. 일본의 핵무장은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최악의 상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 LH 본사 유치에 대한 일련의 행태를 보면 답답하다. 경남 국회의원들은 치고 빠지는 전략을 교묘하게 구사, 이미 진주 유치를 기정사실화 해버렸다. 박희태국회의장,김무성한나라당 원내대표,고흥길정책위의장 등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렸다. 전북에서 강력하게 항의하자 그런 일 없다는 듯이 분산 배치가 원칙이라는 말만 되풀이 한다.도내에서 조차 LH 본사 유치를 놓고 설왕설래 한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굳이 억지춘향이 격으로 관제데모 할 필요가 있느냐부터 시작해서 이미 게임 끝난 걸 갖고서 지사가 면피하기 위해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서 상경집회를 갖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지금껏 정부 말만 순진하게 믿고 분산배치를 주장해온 전북은 강경 일변도로 나갈 수 밖에 없다.그러나 뒷북을 치다 보니까 태산명동에 서일필(泰山鳴動 鼠一匹)처럼 돼 가고 있다. 비대위원들이 망언을 규탄하기 위해 국회의장실을 찾았지만 만나지도 못해 국회 앞에서 시위만 하고 되돌아왔다. 결국 중앙언론이나 정치권으로부터 주목도 받지 못했다. 문제는 그간 정치권에서 몇몇 국회의원들만 간헐적으로 나섰을 뿐 민주당 대표를 지낸 중진의원들이 소홀한 탓이 크다. 다행히도 그제 이재오특임장관과의 간담회에는 전북 출신 의원들이 모두 자리를 함께해 의지를 다졌다.전북 정치권은 권력이 한나라당으로 넘어간 이후 세력이 약해졌다. 수적으로 열세인데다 도내 민주당서도 세갈래로 나눠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당권을 놓고 정동영의원과 정세균의원측이 각개약진해 미묘한 기류가 형성됐다. 정치력 약화로 구심점 역할을 못하면서 이 정권들어 되는 일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다. 오히려 정치적으로 고도(孤島)가 돼 패배주의만 팽배해졌다.전북은 지금 새만금사업 못지 않게 LH 본사 유치가 절실하다. 새만금사업은 미래를 준비하는 사업이지만 LH본사 유치는 혁신도시 건설 사업과 직결돼 있어 더욱 그렇다. LH 본사가 유치되지 않으면 혁신도시건설사업은 앙꼬 없는 찐빵이다. 그제처럼 국회의원이 전원 참석해서 목소리를 결집한 것처럼 공격적인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정동영·정세균 전 민주당 대표는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앞장서야 한다. 그래야 전북도 살리고 두 사람도 살 수 있다./ 백성일 수석논설위원
"농협 간부라는 사람들이 정치 한다고 왔다 갔다 하면서 이권에 개입하고…. 농민들 다 죽어가는데 말이야." "농협이 금융하고 뭐해서 돈을 몇 조씩 벌잖아. 농협이 번 돈을 농민에게 돌려줘라 이거야."꼭 2년 전인 2008년 12월4일 서울 가락동 시장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상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농협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냈다. 큰 돈을 벌면서도 정작 주인인 농민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세종증권 인수와 자회사 매각 과정이 비리로 얼룩진 것을 개탄하면서 "농협은 오로지 농민을 위해 전력해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농협은 지금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조합원에 봉사하기 보다는 정부와 조합원 사이에서 조합 임직원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조직으로 변질됐다는 뼈아픈 질타도 있고, MB의 지적처럼 협동조합 본연의 역할인 경제사업보다는 신용사업에 치중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농협중앙회 인력 2만3000여명중 신용사업 부문이 71%인 1만6000여명에 이르는 등 인력구조만 봐도 알 수 있다. 또 '엉뚱한 짓'도 많이 해왔다.1956년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설립된 농업은행과 1958년 발족된 농업협동조합을 합친 새 통합농협이 1961년 발족됐으니 농협은 내년이면 출범 50주년을 맞는다. 적은 나이도 아니다. 1175개 일선 조합과 조합 연합체인 중앙회로 구성된 농협은 임직원 수만 9만7000여명에 이르는 등 그동안 거대 조직으로 발전했다. 헌데 지천명(知天命) 연륜인 데도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나이를 헛 먹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MB의 발언 이후 농협은 고강도 개혁을 추진했다. 농협중앙회를 농협연합회-금융지주-경제지주회사로 각각 독립법인화함으로써 '농업인을 위한 조직'으로 탈바꿈시킨 게 핵심이다. 두 지주회사가 얻은 수익으로 농업인의 생산·판매활동 지원을 강화하는 한편 농업인은 생산에 전념하고 유통과 판매는 농협이 전담함으로써 협동조합 고유기능을 살린다는 것이다.이런 내용의 농협법 개정안이 지난해 12월 국회 상임위에 제출됐지만 1년째 낮잠을 자고 있다. 지금 칼을 대지 않으면 기회를 놓친다는 목소리가 많다. 그런데도 국회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는 것이다. 혹시 후원회 계좌에 돈이 덜 들어와 그러는 것인가./ 이경재 논설위원
국가 위기를 위기로 의식하지 못하고 막연히 잘 되겠지 하는 것이 안보 불감증 일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북정책이 주적 개념을 흐리게 하여 안보의식이 해이해졌다는 지적도 있다. 오히려 '햇볕정책'이 먼저 북한의 옷을 벗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남한이 먼저 옷을 벗어야 할 지 모른다는 지적도 있다.이번,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에 대한 남한의 반응도 제각각이다. 북한 도발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요구하면서도 확전만은 안된다는 주장이 많은가 하면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은 남한쪽에서 빌미를 제공했다는 주장이 북한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이번 연평도 사건은 우리 군대에 대한 자성의 계기도 주었다. 현재 군 지휘부들은 베트남전이 끝난 뒤 임관돼 전투경험이 없다는 단점도 지적받았다. 또 평시체제가 60년 이상 지속되다보니 군이 행정적 조직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는 지적도 눈에 띈다.우리 속담에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고 하듯이 북한이 오래전부터 우리 군의 사격훈련에 대해 협박성 발언을 해왔지만 설마 민간인이 거주하는 섬을 공격할 줄을 몰랐다는 안이한 의식이 질타를 받았다. 또 싸우는 것이 두렵다는 사병들이 많다고 한다.북한의 연평도 포격이 있자 실제 상황임에도 많은 병사들은 응전(應戰)태세를 갖출 생각은 없이 진짜 전쟁이 나면 어쩌나 하고 두려워했다는 것이며 설마 전쟁이 나겠어 하고 반신반의(半信半疑)했다고도 한다. 어떤 병장은 전쟁이 나더라도 제대한 후에나 났으면 했다고 한다. 지난 2일에는 국회 국토해양위에서 4대강 사업을 놓고 몸싸움이 벌어졌다.임진왜란이 일어나 피란을 가서도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사이에 삿대질까지 하며 의견충돌이 끊이지 않자 이항복이 초연히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이렇게 싸움 잘하는 동인들로 하여금 동해(東海)를 막게하고 서인들로 하여금 서해(西海)를 막게했으면 왜놈들이 이렇게 이땅에 발을 붙였겠습니까. 이제야 이것을 제가 깨달았으니 원통합니다." 이항복이 살아서 오늘의 우리 연평도 반응을 본다면 무어라 말했을까 궁금하다./ 장세균 논설위원
이탈리아에 "천천히 걷는 사람이 숨차지 않고 먼 곳까지 갈 수 있다"는 격언이 있다. 느림을 찬미한 말이다. 또 한용운의 시에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는 대목이 나온다. 스피드가 미덕인 시대인지라 역설처럼 들린다. 하지만 둘은 통하는 말이다. 노자(老子) 풍으로 말하자면 빠르고 바쁜 것은 느림과 비움을 얻기 위한 것일테니까.지난 50여 년동안 개발과 성장을 위해 바쁘게 살아온 한국인들은 유난히 '빨리 빨리'를 강조했다. 남과 비교하기를 좋아하고 1등만이 대접받는 사회였다. 속도와 효율, 경쟁이 최고의 선(善)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살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가 되었다.그 반작용이랄까. 요즘은 오히려 느림과 한국적인 것이 더 각광을 받는다. 빨리 달리는 마라톤 보다 천천히 가는 걷기가 대세고 자전거 타기 열풍도 드세다. 예전에는 거들떠 보지 않았던 한옥값이 천정부지다.어쩌면 느림에서 여유와 나눔, 더불어 사는 지혜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느리게 산다는 것은 게으름과 다르다. 부지런해야 느리게 살 수 있다. 느림(slow)은 단순히 빠름(fast)의 반대가 아니라 환경과 자연, 시간을 존중하고 우리 자신을 귀하게 여기며 느긋하게 사는 것을 뜻한다. 이문재 시인의 말을 빌면 "느림이 곧 미래로 가는 문"이다.그런 뜻에서 전주 한옥마을이 슬로 시티(Slow City)로 지정된 것은 의미가 크다. 한옥마을은 세계에서 133번째, 국내에서 7번째로 지정되었다. 인구 5만 명 이상의 도시 중에서는 세계 최초다.슬로시티는 1999년 이탈리아의 몇몇 시장들이 뜻을 모아 발족한 국민행복 운동의 일종이다. 느리고 조용히 살아가는 공동체의 국제적 네트워크인 셈이다. 이 운동은 ▲철저한 자연생태 보호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 ▲천천히 만들어진 슬로푸드 농법 ▲지역특산품 공예품 지킴이 ▲지역민이 중심이 된 참여 등을 지향한다.우리나라에서는 2007년에 전남 완도의 청산도, 담양 창평 삼지내마을, 신안 증도, 장흥 유치면과 장평면, 경남 하동 악양(평사리)이, 그리고 2009년에 충남 예산이 가입되었다. 전주 한옥마을은 국내 최대 규모의 한옥 700여 채와 골목길, 비빔밥, 한지, 판소리 등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반면 급격한 상업화 등 숙제도 안고 있다./ 조상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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