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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대] 자전거 타기 - 장세균

중국에는 삼다(三多) 즉, 세 가지 많은 것이 있다고 하는데 첫째는 짝퉁이고 둘째는 인구이고 셋째는 자전거라는 것이다. 중국은 과거 한 때 5억의 인구가 자전거 한 대씩을 가지고 있었기도 했고 자전거 이용률이 무려 80%대이기도 했었다.2008년 올림픽 개최지가 베이징으로 결정되기전 까지만해도 베이징 거리의 주인공은 단연 자전거였다. 그러나 지금은 자동차에 밀려 추억의 교통수단이 되어가고 있다. 현재는 베이징 인구 1700만에 자동차 수가 무려 300만에 육박해있어 6명에 한명이 자동차를 소유한 셈이 되었다.눈부신 중국 경제성장의 징표이다. 그러나 중국 베이징시(市)가 오는 2015년까지 자전거 이용률을 현재 20%대에서 23%까지 높이겠다고 한다. 이유는 자동차에서 내뿜는 이산화탄소로 인한 환경오염과 교통체증을 줄이기 위해서 인 것이다. 특히 중국이 자전거 이용에 애착을 가지는 이유는 그들의 자연환경과도 밀착돼있다.중국의 지형은 우리와 달리 거의 힘 안들이고 페달을 밟아도 자전거가 솔솔 잘나가는 평지이다. 중국에서도 우리와 지형이 비슷한 대련과 같은 도시는 자전거 타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은 우리와 같다. 우리나라 지형처럼 언덕과 구릉이 많으면 아침 출근하는 사람이 철인경기나 출전하려고 준비하는 사람 이외에는 자전거를 기피할 수밖에 없다.자전거 타기는 유산소 운동이라 몸속의 불필요한 지방질을 제거해주니 살빼고 각선미까지 가꾸어 주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중국 여자들의 각선미가 돋보인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는 다리를 좋아하는 우리나라 여성들은 자전거를 타면 종아리에 근육이 붙는다고 싫어할지도 모르겠다. 몸의 건강보다는 우선 마른 다리를 우선으로 치기에 그렇다.행정안전부가 새로이 만든 녹색성장을 위한 마스터플랜에 의하면 전국 자전거 도로를 오는 2019년까지 2175km에 걸쳐 'ㅁ'자형 전국 순환망 및 '3 x 3 내륙 연계망'으로 나누어 구축한다고 한다. 그러나 자전거 활성화를 위해서는 대중 교통 수단인 버스와 지하철역 부근에도 자전거 주차장을 설치해 다른 교통수단으로 갈아타기 쉽도록 해야 보다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플랜이 될 것이다.

  • 사회일반
  • 전북일보
  • 2010.12.02 23:02

[오목대] 김한 행장의 리더십 - 백성일

전북은행의 문턱이 많이 낮아졌다는 얘기가 회자되고 있다. 도민 한주씩 갖기 운동으로 태어난 전북은행이 창립 41주년을 맞아 그에 걸맞는 역할을 상당부분 잘하고 있다. 그간 전북은행은 뿌리가 깊지 않아 외풍이 조금만 불어도 흔들렸다. 꼬막농사나 인생도 태풍 같은 시련을 잘 극복해야 성공할 수 있는 것처럼 전북은행도 IMF 파고를 잘 넘긴 덕에 발전을 거듭했다.시중 은행들은 비올 때 빌려 준 우산을 곧바로 회수해가는 심술쟁이 같은 근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전북은행은 날이 개서 좋아질 때까지도 회수 않고 오랫동안 기다려줘 도민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전북은행은 소매금융 전문 은행이다.그래야 승산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같은 영업전략이 주효해 총자산 8조원 달성을 눈 앞에 두고 있다.전북은행은 생존을 위한 영업을 해왔다.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10월말 현재 13.06%인 것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안전위주의 영업전략만 갖고서는 글로벌 무한 경쟁시대에 맞대응할 수 없다. 우선 자산을 늘려 규모의 경제를 이루고 사업다각화를 도모해야만 경쟁에서 살아 남을 수 있다. 특히 영업 환경이 취약한 도내서는 더 이상 성장하기엔 한계가 있다.뱀장어가 먼 바다로 나가는 것처럼 큰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지금이 전북은행 도약기다. 발전의 끈을 당기려면 보수적인 경영분위기를 공격적으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강남과 여의도에 지점을 개설했다.수도권에서 경쟁이 시작됐다. 신규 행원도 평소 보다 2배가 넘는 94명을 뽑았다. 2012년까지 자산을 15조로 늘려 1500억원의 순이익을 내는 게 목표다. 덩치를 키워 큰 이익 내서 고객·주주·지역·직원만족을 시키겠다는 포부다.취임 8개월여만에 김한 행장이 광주은행 인수를 위한 의향서를 제출함에 따라 탄력이 붙었다. 시중에선 전북은행이 광주은행을 인수하는 것은 '새우가 고래를 삼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고 말한다. 하지만 1조5000억원의 인수자금을 마련하는데는 자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수 자금 마련 보다는 광주 전남의 지역정서의 벽을 더 경계한다. 인촌(仁村)가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고 커온 그가 금융전문가로서 전북은행을 어떤 모습으로 탈바꿈시킬지 벌써부터 주목된다./ 백성일 수석논설위원

  • 사회일반
  • 전북일보
  • 2010.12.01 23:02

[오목대] 춤추는 'LH 수사'(修辭) - 이경재

전북 곳곳에 부안지역의 방폐장 사태를 연상케 할 만큼 형형색색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쌀값 하락이나 북한의 연평도 도발을 규탄하는 깃발이 아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를 통째로 경남에 주지 말고 분산이전하라는 깃발이다. 그런데 어째 좀 작위적이고 촌스럽다. 깃발 하단의 단체들 이름은 관변 냄새를 물씬 풍긴다. 힘 없는 사람이 허공에 대고 "나 좀 도와달라"고 울어대 것 같다.때마침 김황식 국무총리가 지난 26일 전북을 방문했다. 이걸 본 김 총리는 어떤 심정이었까. 그는 "LH 이전은 정부와 지자체가 협의해서 해결할 문제""두 지역이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중"이라고 했다. 모범답안이다.그러나 자치단체간 협의가 물 건너간 게 언제인데, 그리고 작년말부터 해온 고민을 지금도 하고 있다니 이처럼 알맹이 없는 수사(修辭)가 또 있을까. 일괄이전이란 언급이 없었으니 그나마 깃발 덕이라고 해야 할까?정운찬 전 총리는 일괄이전을 얘기했다가 경남 편 든다는 반발이 일자 번복했다. 그는 "원칙적으로 일괄이전하는 게 옳다"고 했다가 전북 민심이 들끓자 "일괄이전 검토를 시사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 발 뺐다. 2월4일 국회 답변 때 일이다.소관 부처인 국토해양부의 정종환 장관 발언은 말바꾸기의 압권이다. 그의 발언은 줄타기 하듯 전북과 경남의 구미에 맞게 춤췄다. 전북의원 면전에서는 분산배치를, 경남 의원 앞에서는 일괄이전을 언급했다. 최장수 장관을 지내려면 유연성(?)이 이쯤은 돼야 하는 모양이다.가장 화끈한 건 원희룡 한나라당 사무총장의 언급이다. 지난 15일 전북을 방문한 그는 "LH가 전북에 올 수 있도록 하겠다. (경남) 진주 쪽에서 욕해도 상관없다"고 했다. 상공인과 한나라당 당직자들 앞에서 한 발언이다.말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이다(言如其人). 때문에 말은 신중히 해야 하고 한번 뱉어낸 말은 실천에 옮겨야 한다. 신언(愼言)은 군자의 필수 요건이다. 하물며 한나라의 국무총리나 장관의 말이 어떠해야 하는 지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겠다. 진정성 없이 하는 말은 그냥 소리일 뿐이다. 그때그때 함부로 내뱉는 말을 방언(放言)이라 하는데 시정잡배들이나 하는 짓이다. LH이전이 어떻게 결과되는지 지켜볼 일이다./ 이경재 논설위원

  • 사회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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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1.30 23:02

[오목대] 통일 한국 - 장세균

북한에 의한 연평도 포격사건은 노골적인 공격이었다. 천안함 사건을 못믿겠다는 사람이 많았던 반면, 이번 연평도 피격 사건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불행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지구상에 같은 민족끼리 갈라진 경우는 중국과 한국뿐이다.그러나 우리와 달리 중국과 대만은 갈수록 내면적 밀착관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예를 든다면 중국과 대만은 그동안 각각 사용하고 있었던 로마자 표기법을 통일하기로 했다. 대만이 그동안 사용해왔던 자기들 방식을 포기하고 중국 대륙에서 사용하여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한어병음(漢語幷音) 표기방안을 따르겠다는 것이다.그리고 다시 중국과 대만은 '경제협력 기본 협정'이라는것을 체결함으로써 거대 단일시장인 '차이완(Chiwan)'이 탄생될 것으로 예상을 하게하고 있다. 이에따라 한국 IT기업들은 어떤 영향을 받을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실정이다. 오래전부터도 내면적으로는 중국인과 대만인의 결혼을 허락해 왔다.한국 통일이 어려운 과제가 되고 있는 것은 중국, 미국, 일본 등이 통일된 한국을 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지금처럼 남한과 북한의 분할된 상태에서는 북한은 중국에 있어 미국·일본으로부터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은 무상으로 북한에 전략물자를 보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한반도가 통일되어 압록강과 두만강 국경에 미군이 주둔하는 상황을 중국은 최악의 시나리오로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북한과 미국이 먼저 수교를 하고 핵을 포기한다는 북한의 한결같은 주장을 왜 미국이 받아들이지 않고 북한의 핵포기만을 먼저 내세우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가까운 일본이 한반도의 통일을 원하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다. 가까운 이웃나라가 통일이 되어 비대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가 통일되어 통일된 한국이 친(親) 중국쪽으로 가는 상황을 일본은 대재앙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우리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가 이처럼 복잡하기에 우리에게 고도의 전술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본다./ 장세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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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0.11.29 23:02

[오목대] 통일편익 - 조상진

북한군이 23일 서해 연평도에 수백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이로 인해 해병대원과 민간인 4명이 숨지고 1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연평도는 쑥대밭이 되고 1700명의 주민중 80% 이상이 피난행렬을 이뤘다.이번 사태는 6·25 전쟁 이후 북한이 처음으로 우리 영토에 무차별 포격을 가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국민들은 북한과의 대치상태가 '실제 상황'임을 실감했다. 앞으로 당분간 한반도에는 긴장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질 것이다. 다행인 것은 민심 동요가 그리 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전쟁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하다.어쨌든 이번 도발과 천안함 사건 등 일련의 사태는 우리가 왜 통일을 해야 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아울러 통일이 그리 순탄치 않을 것임을 직감케 한다. 서울대 평화연구소가 조사한 '2010 평화통일의식조사'에 의하면 '통일이 필요하다'는 의견은 59%로, 1998년의 다른 조사 93.1%에 비해 크게 낮아졌다. 최근 국가보훈처가 초중고생 6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전쟁이 나면 나라 위해 싸우겠다'는 답변도 56점에 그쳤다.동서독이 1949년에 분단돼 40년만인 1990년에 통일을 이룬데 비해 우리는 벌써 분단 65년을 맞고 있다. 그러면 통일비용은 얼마나 될까. 독일 연방건설교통부에 따르면 1991-2003년 총 통일비용은 1조 2800억 유로로 원화 약 1920조 원에 달한다. 이는 연평균 985억 유로(약 150조 원)로 서독 GDP의 4% 수준이다.이에 비해 우리의 통일비용은 연구자에 따라 500억 달러에서 5조억 달러까지 천차만별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2005년(통일시점 2015년)에 5460억 달러를, 한국은행은 2007년에 5000-9000억 달러를 내놓았다.이와 달리 현대경제연구원의 최근 연구는 흥미롭다. 통일로 얻게 되는 편익 개념을 도입, 통일편익이 2200억 달러로 통일비용 1570억 달러 보다 630억 달러가 많다는 것이다. 통일이 크게 남는 장사라는 얘기다. 또 골드만 삭스 보고서는 잠재성장능력을 고려할 경우 통일코리아의 GDP는 통일 30-40년 후 프랑스 독일 일본을 추월하고 2050년(통합시점 2012년)에는 G7 이상으로 높아진다고 추정하고 있다. 전쟁의 위협속에서도 통일한국의 미래를 준비했으면 한다./ 조상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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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1.26 23:02

[오목대] 하천(河川)의 기능 - 장세균

4대강 사업을 놓고 지금도 설왕설래(說往說來)하고 있다. 물이 흐르는 강을 하천이라 할때 우리민족은 하천을 어떻게 대해 왔는가. 방랑하는 저항 시인이었던 조선때의 김시습(金時習)은 시상(詩想)이 떠오르면 그 현장에 하루고 이틀이고 먹는것도 잊은 채 않아 시(詩)를 생각했다고 한다.그리고 완벽한 시라고 생각하면 그 시를 종이에 써서 그것을 환약(丸藥)처럼 똘똘 뭉쳐서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표주박속에 담아두었다. .이것을 시환(詩丸)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장소를 이동하여 다른 산사(山寺)로 떠나갈 때면 그 시환을 미련없이 흘러가는 강물에 띄워 보내고 다시 마음속에 새로운 감정을 담아간다는 것이다.이런 모습이 그 옛날의 풍류의 멋이었는지도 모른다. 과거 우리 선조들은 강물이 우리 감정을 씻어내리는 기능까지도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래서 가슴에 맺힌 증오나 원한, 불화가 있을때는 그 내용을 종이에 써서 시환처럼 만들어 표주박속에 담아 강물에 흘러 보내기도 했던것이다. 그 당시 무당들은 불행이나 병환을 없애기 위해 부적을 똘똘 말아 표주박에 넣어 강물에 흘러보내기도 했다고 한다.이처럼 강물은 우리에게 있어 감정적인것 정신적인 것을 씻어 정화시킨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심지어 쓰레기 같은 것도 강물에 버리면 흘러가면서 썩어 삭아 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한국인의 강에 대한 전통사상이라는 주장도 있다.유럽등 다른 대륙의 강물들은 평야를 흐르기에 물의 유속(流速)이 느려서 만약 오물을 버리면 흐르지 않고 머물러 있어 버릴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연환경은 산이 많아 높은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은 자연히 유속이 빨라 무엇을 버리면 금방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더구나 유럽의 강우량도 한국의 20분의 1도 못된다. 거기다 곰팡이가 자생할수 있는 토질이 아니어서 물질이 잘 썩지도 않아 한번 버리면 그 자리에 계속 남아있어 함부로 강물에 버릴수가 없는것이 유럽 문화였다.아름다웠던 우리 강물이 오염이 된것은 산업화 과정에서 화학물질, 중금속 물질이 썩지 않는것이었는데도 강에 대한 우리 의식구조는 변함이 없어 마구 투척을 해왔던것이다. 우리 강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해야할것이다.

  • 사회일반
  • 전북일보
  • 2010.11.25 23:02

[오목대] 전북 몫 - 백성일

독재정권 시절에는 유별나게 관제데모를 많이 했다. 정통성이 약한 정권이라서 국민의 관심을 비정치적인 것으로 돌리기 위해 관 주도로 데모를 했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특수한 상황이라서 안보 관련 데모가 단골 메뉴였다. 학교나 행정 조직을 통해 강제로 사람을 동원했다.누구 하나 참가 못하겠다고 군소리도 못했다.정권안보를 위해 했던 관제 데모의 기억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을 느낀다.요즘 도내는 LH 본사 유치로 뒤늦게 지역이 후끈 달아 올랐다. 조용하고 거룩하기만 했던 전북에 격랑이 일고 있다. 거리마다 유치 플래카드가 넘실대고 시내버스와 택시 등에도 '전북 몫을 찾아야 한다'는 문귀가 나붙겨 있다. 모처럼만에 관변단체들이 밥값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황식총리의 26일 전북 방문을 앞두고 전북인의 의지를 한데 결집시키기 위해 24일 대규모 궐기대회가 예정돼 있다. 그러나 통 반장들을 참가시킨 이같은 관제데모가 얼마나 효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전북은 그간 산업화가 미진해서 지역 발전이 다른 지역에 비해 크게 뒤졌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 젊은이들이 고향산천을 등지고 타지로 떠난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새만금사업도 외곽방조제만 막았지 내부개발이 언제 끝날지 하대명년이다. 현 정권이 말로만 관심을 갖는척 하지 진정성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4대강 사업에 밀려 우선순위에서 뒤쳐졌다.지난 두 정권 때가 사실상 전북발전의 호기였지만 이를 살리지 못했다. 정치인들은 제각기 정권에 붙어서 고위직을 지낸 정도로 끝났다. 결국 지역만 낙후돼 타 지역과 격차만 벌어졌다. 지금 바깥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전북은 잠자는 것이나 다름 없다. 정치력 약화가 제일 크다. 시중에서는 김완주지사도 말로만 사즉생(死卽生)을 외칠 것이 아니라 이완구 충남지사가 세종시 건설에 반대할 때처럼 지사직을 걸고 강력한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정부도 LH 본사 유치 문제를 지역감정의 해결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망국병이 서서히 치유될 수 있다. 특히 정부가 낙후도를 고려해서 LH 본사를 전북으로 유치하면 명분과 함께 실리도 챙길 수 있다. 아무튼 인구수와 정치적 고려를 통해 LH본사 유치문제가 잘못 매듭되면 전북 도민들의 엄청난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백성일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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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1.24 23:02

[오목대] 낙엽 단상(斷想) - 이경재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리니'프랑스 시인 레미 드 구르몽의 대표적인 상징시 '낙엽'이다. 낙엽을 소재로 인생에 대한 단상을 노래하고 있다. 1892년 발표됐지만 오늘날에도 애송되는 낭만적 서정시이다.늦가을 낙엽이 뒹그는 걸 보면 사람마다 여러 상념에 잠기기 마련이다. 낭만을 떠올리는 이도 있고 추억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희망을 상징할 수도 있다. 이브 몽탕이 부른 샹송의 고전 '고엽'(枯葉)은 추억을 노래하고 있다. '나는 당신이 기억해 주길 간절히 바래요/ 우리가 함께 했던 행복한 나날들/ 그때 인생은 더없이 아름다웠고/태양도 지금보다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지요/ 낙엽들이 삽으로 무심히 치워지네요'노년에게 낙엽은 인생무상이고 삶의 유한을 선고 받은 이의 그것은 허망함일 것이다. 70년대 리칭이 주연한 홍콩 영화 '스잔나'에서 여대생 주인공이 뇌종양으로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고 낙엽 떨어지는 정원에서 노래 부르는 장면은 애잔하고 지금도 인상이 깊다. '해는 서산에 지고 쌀쌀한 바람 부네/ 날리는 오동잎 가을은 깊었네/ 꿈은 사라지고 바람에 날리는 낙엽/ 내 인생 오동잎 닮았네 …지는 해 잡을 수 없으니/ 인생은 허무한 나그네'낙엽은 중년 남자한테 비유되기도 한다. 일본에선 은퇴를 앞둔 중년 남자들이 '전국 헌신적 남편협회'를 만들어 아내 곁에서 오래 버틸 전략을 구상한다는 것인데, 아내들은 이런 남편을 '누레오 치바'라 부른다. 젖은 낙엽이란 뜻이다. 젖은 낙엽이 땅에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을 빗댄 것이다.낙엽이 쌓인 거리는 촉감이 좋다. 사각사각 소리내며 밟히기도 하고 소슬 바람에 떼굴떼굴 구르기도 한다. 낭만과 추억, 인생 무상을 연상할 수 있다. 전주시가 걷고 싶은 낙엽길 8군데를 골라 시민들한테 소개했다. 좋은 서비스다. 그런데 아파트와 거리 상가에선 매일같이 낙엽들을 쓸어내느라 곤욕을 치르고 있다. 바쁜 일상에서 늦가을 낙엽 밟는 정취라도 느낄 수 있도록 그냥 놔두면 더 좋을 텐데…./ 이경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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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1.23 23:02

[오목대] 사역원(司譯院) - 장세균

영어는 이미 세계 에스페란토어이다. 그러나 우리말과 문법구조가 너무 다른 것이 문제다. 우리말에는 조사(助辭)가 있으나 영어에는 없다. 또 영어의 관계대명사가 우리말에는 없다. 거기다 어순(語順)조차도 우리말과 정반대이다. 아무튼 산에서 도(道)를 닦듯이 해야만 영어를 극복할 수 있다.이제 영어를 모르고서는 취직하기도 어렵게 되어있다. 과거 조선시대에도 국가 운영을 위해 외국어 교육이 강력히 시행되었다. 특히 조선은 중국을 의식해야 했기 때문에 중국어의 중요성은 지금의 영어 정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가깝게는 여진족이나 몽골 그리고 일본이 있기에 주변국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역관(譯官)을 국가에서 양성했다.조선시대 동북아의 공용어는 중국어였다. 그 당시 고위 공직자들도 중국말을 공부했다고 한다. '사역원'이란 바로 외국어의 통역과 번역을 담당하는 국가부서였다. 조선 초기 사역원의 교수들은 조선에 귀화한 외국인이 많았다. 지금으로 말하면 원어민 강사와도 같은 것이었으리라.요즈음 영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토플이나 토익·텝스 관련 서적이 인기라면 조선시대 외국어 공부를 한 학생들에게는 '노걸대(老乞大)' 와 '박통사(朴通事)'가 베스트셀러 교과서였다고 한다. '노걸대'는 '참된 중국인'이라는 뜻인데 고려 상인이 압록강을 건너 중국 북경까지 가는 길과 산동지방을 여행하는 과정에서 겪은 일들을 중국인과 대화하는 형식으로 만든 책이다.여행자에게 필요한 중국어 표현과 일반 지식들을 알려주는 책인데 그 내용이 뛰어났기 때문에 몽골어·일본어로도 번역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교재인 '박통사'는 중국 북경생활에 필요한 갖가지 지식을 서술한 책으로 의례적인 표현이나 사설체가 다수 포함된 것이 특징이다.조선시대 역관들이 구사하는 중국어는 '북경어'였는데 혹시 중국 남쪽에서 조선으로 표류해온 중국인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아 서로 글로써 필담(筆談)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중국어는 북경어와 홍콩에서 쓰는 광동어(廣東語)가 외국어 만큼이나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사역원내에서는 오로지 외국어만 쓰도록 했다고 하는데 외국어는 머리로 하는것이 아니라 암기가 중요했기에 그랬으리라./ 장세균 논설위원

  • 사회일반
  • 전북일보
  • 2010.11.22 23:02

[오목대] 관음(觀音)신앙 - 조상진

지난 주 세계 정상들의 모임인 '2010 G20 서울 정상회의'리셉션이 열린 곳은 국립중앙박물관이었다. 또 같은 시각 영부인들은 삼성의 사설박물관인 리움(Leeum)에 모여 만찬을 가졌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가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때 마침 중앙박물관에서는 '700년만의 해후'라는 부제가 붙은 고려불화대전이 열리고 있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 등 세계 정상들이 이 불화를 어떤 심미안으로 감상했는지 모르겠으나 이날 가장 관심을 끈 작품은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였다. '물방물 관음'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 작품은 전시된 108편의 고려 불화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언제 일본으로 건너갔는지 알 수 없지만 센소지(淺草寺)가 소장한 것으로, 일본 현지에서도 공개되지 않아 일본 학자들 조차 보기 어려웠다고 한다.화려한 색채와 호화로운 금니, 흐르는듯 유려하면서도 힘있는 선묘 등 고려인의 놀라운 미의식을 보여준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못지 않다는 평가도 따랐다. 이는 고려 때 관음신앙이 무르익었음을 뜻하는 것이다.그러면 관음보살은 무엇이고 어떻게 우리나라에 건너왔을까. 관음은 인도 불교가 중국으로 전파될 당시 산스크리트어 아바로키테슈바라(Avalokitesvara)를 한자로 번역한 것이다. 광세음(光世音) 관세음(觀世音) 관자재(觀自在)와 같은 말이다. 또 보살(bodhisattva)은 세간과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성자(聖者)다. 따라서 관음보살은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이다. 난파 화재 암살 도둑 등 재난에 처했을 때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면 그 순간 재해가 소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인들에게 가장 쉽고 친숙하게 다가왔을 것이다.화엄경에 의하면 관음보살은 인도의 남쪽에 있는 보타낙가산(普陀洛迦山·Potalaka)에 머문다고 알려져 있다. 이 신앙은 특히 해난(海難)과 관계가 깊다. 인도 남부에서 중국 주산군도 보타산을 거쳐 우리나라와 일본 동남아시아 등으로 해로(海路)를 따라 퍼져갔다. 이 중 중국 영파의 보타산은 세계적인 관음성지로 꼽히며 우리나라는 3대 관음성지인 양양 낙산사,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를 비롯 33곳을 성지로 지정했다.인류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관세음보살!/ 조상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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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1.19 23:02

[오목대] 조선의 기록문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수탈해간 '조선왕실의궤(朝鮮王室儀軌)' 등 문화재급 도서 1205권이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이토 히로부미가 일제 강점기에 가져간 규장각 도서도 모두 돌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토'는 개인적으로도 조선 총독부 통감시절에 일본에 빼돌린 청자만 해도 1천점이 넘었다.일본이 1903년부터 조선의 금세공품, 청자, 도자기, 탑 사리함, 고문서 ,그림, 서예 등, 특히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등을 포함하여 약탈해간 문화재가 약 10만점이 넘는다고 한다. 이런 주장은 2001년 2월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지가 일본의 우리 문화재 약탈에 대한 기사를 실으면서 밝혀진 것이다.'조선왕실의궤'란 조선왕조 왕실의 혼사, 장례나 잔치 등의 주요 의식과 행사의 준비과정을 상세히 적고 그림으로까지 만든 문서다. 조선은 1392년 건국때부터 '의궤(儀軌)'를 만들었지만 불행히도 임진왜란으로 모두 소실되어 버렸고 현재 전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선조 34년에 만들어진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장례에 대한 것이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경국대전(經國大典)은 조선시대 모든 법령의 기본이 되는 중요한 법전(法典)이다. 이 경국대전을 모법으로 하고 '속(續) 대전(大典)'과 '대전통편(大典通編)'을 한 줄기로 삼고 만들어진 것이 '대전회통(大典會通)'이다. 이 '대전회통'은 고종의 왕명에 따라 영의정 조두순과 좌의정 김병학 등이 편찬한 조선의 마지막 법전이기도 하다.그 다음으로 눈여겨 볼 기록인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는 조선시대 왕의 비서실에 해당하던 승정원에서 왕의 명(命)이나 출납(出納), 행정사무 등을 매일 기록하는 일기로서 국보 제 303호로 지정되어 있다. 2001년에는 세계 기록문화유산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 일기속에 1623년 인조 1년부터 1894년 고종 31년, 음력 6월까지의 기록이 보전되어 있다.'조선왕조실록'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는 국가 기록 보물이다. 조선왕조의 실상이 그래도 잘 조명 될 수 있는 것은 위의 기록들이 지금까지 남아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기보다는 역사속의 기록문화를 잘 보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장세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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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1.18 23:02

[오목대] 무기(無己) - 백성일

'등태산 소천하(登泰山 小天下)' 공자가 태산에 올라가서 외쳤던 말이다.세상은 어디서 바라 보느냐에 따라 세상의 크기가 달라진다.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커진다.G20 정상회의가 성공리에 끝났다.변방에 있던 우리가 세계의 중심국가 반열에 오른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선진국 문턱에 들어선 느낌이다.선진국가 건설은 공정한 기회가 보장되는 공정한 사회가 이뤄질 때 가능하다.요즘처럼 '공정'이란 말이 널리 회자 된 적이 없다.MB가 8.15 경축사에서 공정한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창하면서 새로운 화두가 되었다.그간 우리는 앞만 바라다 보는 성장 일변도의 사회였다.옆이나 뒤를 제대로 돌아 볼 여유가 없었다.변칙과 반칙이 관행이란 이름으로 통했고 물질 위주의 그릇된 가치체계가 쌓여지면서 특혜와 특권이란 말이 난무했다.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그릇된 풍토가 팽배했다.외교부장관이 자기 딸을 특채하거나 일부 자치단체장들이 친 인척을 특채한 인사 비리가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공정한 인사란 채용 승진 보직에 있어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가 부여되고 인사 규칙에 따라 반칙 없이 경쟁하는 것이다.그러나 제한적으로 운용되어야 할 특채의 남발,비공개 심의로 인한 공정한 선발 기회 훼손,심지어 측근과 친인척을 고려한 응모자격 부여 등 반칙을 통한 불공정한 인사가 다분했다.법을 집행하는 공직자는 남 달라야 한다.국가의 녹을 받는 공직자들은 선공후사(先公後私)라는 말이 있듯 공정성을 확보해야 한다.나의 사사로움을 버리고 판단하여야 한다.원불교에서는 주관적 판단이나 견해를 버리는 것을 무기(無己)라고 한다.장자의 추수편에는 나의 마음을 완전히 소멸시킨 리더의 모습을 대인무기(大人無己)라 했다.크게 완성된 사람은 나를 버린 사람이다.장자의 무기는 성격,고집, 욕심 등을 부수고 부수다 보면 참 나를 발견한다는 뜻이다.공자도 오직 인자(仁者)라야 사랑할 줄 알고 미워할 줄도 안다고 했다.상선(上善)상덕(常德)인덕(仁德) 등도 무기와 같은 개념이다.공정한 사회는 공직자들의 부정 부패가 없어질 때 만들어진다.그래야 사회가 건강해진다.백성일수석논설위원/ 백성일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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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1.17 23:02

[오목대] 결혼식 문화 - 이경재

신랑 아버지가 주례를 서고 신부 아버지가 사회를 본 이색 결혼식이 있었다. 주례와 사회자는 식장에 들어설 때 서로 손잡고 입장했다. 신랑은 주례사 도중 자신을 칭찬하는 말이 나오자 입에 손을 갖다 대면서 (자기 아버지한테) '제발 좀 그만 하시라'는 액션을 보냈다. 신랑 신부가 양가 부모한테 인사할 때엔 주례는 단상에서 내려와 절을 받고 다시 단상에 올라 식을 진행했다. 사회자는 젊을 때부터 친구들 결혼식 사회를 단골로 맡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간간이 폭소가 터져나왔고 하객들은 재밌다는 반응을 보였다. 작년 가을 두 명사의 자녀결혼식 풍경인데 주례는 도내 대학 총장, 사회자는 충북대 교수였다.결혼시즌이다. 결혼식은 제3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남녀가 부부관계를 맺는 의식이다. 당사자의 결합을 뜻하는 중요한 행위이다. 사회적으로는 사회의 기초 구성단위인 가정을 이루는 단서가 된다. 그래서 철학자 칸트는 결혼식을 '두 사람이 부부가 되는 증표'라고 했다. 하객들 앞에서 "이 남자는 내 신랑이오, 저 여자는 내 신부"라는 걸 천하에 표방하는 의식이라는 것이다.그런데 요즘 결혼식장은 저자거리를 방불케 한다. 예식장 공간구조도 그렇고 혼주와 하객 간의 오붓한 맛도 느낄 수 없다. 신랑 신부한테 덕담은 커녕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식권 한장 받아들고 밥만 먹고 오는 게 결혼식이다. 그러니 삭막하다. 의례적이고 재미도 없다.하객들에게 결혼식은 '고통'이다. 교통 지·정체에다 주차난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휴일 한 두군데라면 나은 경우다. 지난 토요일에는 열한군데에 부조금만 75만원이 들어갔다는 사람도 있다. 결혼식은 축의금 전달하는 이벤트 행사장이 된 지 오래다. "이런 게 아닌데…" 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다.재밌고 여유 있는 결혼식은 불가능한 걸까. 서울의 구청들이 공공건물을 예식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인테리어를 호텔 수준으로 갖춰 시민들한테 개방한다. 넓은 주차공간에다 접근성이 뛰어나 이용자가 많다. 시민이 낸 세금을 시민한테 돌려주는 것이니 반발도 없다. 당연한 서비스다. 하지 않는 게 문제다. 전주시가 서울시를 벤치마킹해서 결혼 예식문화를 바꿔나가면 어떨까. 여유 있고 재미 있도록 말이다./ 이경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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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1.16 23:02

[오목대] 눈물의 애국가 - 장세균

지난번 서울에서 G20 정상회담이 열렸다. 특히 우리에겐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눈길을 끌었다. 독일과 한국 사이에는 애달픈 과거사가 놓여있다. 해방후 우리는 사상적 갈등과 '보릿고개'라는 가난을 겪었다.지금, 우리의 번영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땅에서 솟은 것도 아니다. 오로지 기성세대들의 땀과 눈물의 결정체이다. 1960년대초 남한의 일인당 GNP는 불과 80달러에 지나지 않아 북한에 뒤져있었다. 그 당시, 가난을 피해 1966년에서 1976년 사이에 독일로 건너간 한국 간호사가 1만 30명, 광부로 간 사람이 1963년에서 1978년까지 7800명이었다.박정희 전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한 때가 1964년이었다. 그는 경제개발을 위해 차관을 얻고자 독일을 직접 방문한 것이다. 방문 기간 중 독일 루르지역 함보른 탄광의 한 공회당에서 작업복에 석탄가루가 묻은 300여명의 한국 광부와 50여명의 한국 간호사들이 박 대통령을 환영키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박 대통령이 나타나 태극기가 걸린 단상에 오르자 브라스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했다. 박 대통령이 선창하자 다같이 합창이 이루어졌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그러나 마지막 구절인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에 이르러서는 울음소리가 가사를 대신해 버렸다. 참석한 모두가 울어버린 것이다.박 대통령은 연설을 시작했다. " 여려분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니 감개무량 합니다.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남의 나라땅 밑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여기저기서 흐느끼기 시작했다.그러자 박 대통령은 준비된 원고를 밀쳐버리고 즉흥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광원 여러분, 간호사 여러분,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결국 박 대통령은 목이 메어 연설을 마무리 못했다.환영식이 끝나고 돌아오는 차속에서 눈물을 글썽이는 박 대통령에게 에르하르트 독일 경제장관이 충고를 했다. "울지 마시오. 잘사는 나라를 만드시오. 먼저 제철공장을 짓고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자동차를 생산하시오." 이상의 내용은 그 당시 박대통령을 수행했던 백영훈 박사의 증언이기도 하다./ 장세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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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1.15 23:02

[오목대] 국창 권삼득(權三得) - 조상진

권삼득(權三得·1771-1841)은 판소리 명창 중 최고참급이다. 흔히 고창의 신재효를 판소리의 중시조 쯤으로 잡고 있는데 그 보다 40여 년 먼저 태어나 활동했던 것이다. 또한 판소리를 최초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정노식의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에 소개된 남녀 명창 88명중에서도 첫번째에 올라 있다.그런 만큼 그에게는 출처불명의 전설적인 얘기가 따라 다닌다. 그는 어린 시절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술과 소리에만 빠져들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광대는 양반 가문의 수치인지라 집안 어른들이 모여 멍석말이로 죽이려 했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소리 한 대목만 부르고 죽기를 청했다. 이를 허락하자 그는 춘향가 십장가(十杖歌)를 불렀는데 모두가 감동했다. 결국 족보에서만 빼고 쫓겨났다. 하지만 어느 연구자가 권씨 집안의 족보를 확인해 보니 버젓이 올라 있더라고 한다. 집안 또한 크게 벼슬을 한 것은 아니고 부친이 시골에서 시문도 짓고 때로 관청에 드나들며 청원서를 내는 정도였다고 한다.또 그의 묘지가 있는 완주군 용지면 구억리에는 묘 옆에 '소리구멍'이라 불리는 작은 구멍이 있는데 비오는 밤이면 노래소리가 들려 온다는 것이다. 소리꾼들이 지금도 그의 소리를 들으려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판소리 8명창 중 하나로, 12살 때부터 가장 오래된 명창으로 알려진 하한담(河漢潭)·최선달로 부터 판소리를 배웠다고 한다.그리고 그의 소리제(制:음악적 특징)는 덜렁제(설렁제, 드렁조)로 전해져 오고, 지금도 판소리 곳곳에서 쓰이고 있다. 높은 소리로 호령하다가 금방 짜부러지는 하강창법으로 호탕하고 씩씩한 느낌을 준다. 흥보가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이나 춘향가 '군노사령이 춘향 잡으로 가는 대목' 등이 대표적이다. 신재효는 '광대가'에서 이를 "천층절벽에서 떨어지는 만장폭포"에 비유했다. 그래서 그를 가중호걸(歌中豪傑)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그의 외가인 남원 주천면 지리산 기슭 육모정 뒤에 구룡폭포가 있는데 여기서 폭포득공을 했다는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비가비(양반출신 광대) 명창으로 사람, 새, 짐승의 세가지 소리를 터득(三得)했다는 그를 추모하는 전국국악대제전이 13일 열린다. 봉동읍 완주종합복지관에서 올해 11번째 열리는 이 대회가 국악발전에 이바지했으면 싶다./ 조상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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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1.12 23:02

[오목대] 물레방아 - 장세균

전주 한옥 보존지구에는 물레방아가 하나 있다. 이 물레방아는 한옥 보존지구의 정취에 안성맞춤이다. 특히 이곳을 찾는 어린 아이들에게는 신기한 대상이다. 이 물레방아는 물의 힘으로 돌아가지는 않고 전기의 힘으로 돌아가기에 정확한 표현으로는 '전기 방아'라고나 해야겠다.그러나 엄연히 물이 방아위로 흐르기에 물레방아의 분위기는 띠운다. 네덜란드에는 풍차(風車)가 있으면 우리에게는 수차(水車) 즉, 물레방아가 있었던 것이다. 네덜란드에서는 국민운동으로 풍차발전(風車發電)을 동력화(動力化)하고 있다는데 우리는 대중가요의 노랫말 속에나 남아있다. 그러나 아직도 전국에는 152개의 물레방아가 남아있다는 조사도 있다.우리나라 말 가운데 어미(語尾)가 '…레'로 끝나는 말은 의례 '윤(輪)'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예를 든다면 '수레' '둥굴레' '둘레' '두레' '코뚜레' 등등이다. 물레방아의 물레도 물로 돌리는 바퀴라는 뜻 일 것이다. 물레방아도 두가지가 있다는데 하나는 '동채물레'로서 물이 떨어지는 낙차(落差)로 물레를 돌리는 방아와 또 다른 하나는 '밀채물레'로서 물이 흐르는 속도의 힘으로 물레를 돌리는 방아가 그것이다.우리나라의 자연환경은 산이 많고 물의 유속(流速)이 빨라 물레방아의 적지(適地)로 발달한 것이다. 신문이나 라디오가 없었던 옛날에는 부인네들이 이 물레방앗간에서 정보들을 교환했었던 것이다. 또 물레방앗간은 그 옛날의 여인숙으로서 그 마을을 지나가는 등짐, 봇짐장수, 소금장수, 새우젓 장수 등 잡상인이 묵고 가는 중요한 생활 공간이기도 하였다.또 물레방앗간에서 아이를 얻으면 사내아이일 확률이 많으며 앞으로도 사내아이를 많이 낳는다는 미신 때문에 아들을 꼭 얻고 싶은 부부가 와서 동침하는 장소이기도 했다고 한다. 어쩐지 내리찧는 방아가 남자의 고추를 연상시키는데서 이런 풍속이 나왔는지는 모르겠다.이처럼 물레방아는 우리의 다양한 민속이 얽혀 있기도 하다. 도심(都心) 속의 물레방아는 바쁘게 돌아가는 우리 생활속에서 느긋함마저 느끼게 해주는 청량제이기도 하다. 도심속의 평범한 분수대보다는 오히려 물레방아가 훨씬 한국적 전통미를 살리는 것이 아닐까 한다./ 장세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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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1.11 23:02

[오목대] 선거 브로커 - 백성일

선거 때 사람의 맘을 사로 잡기 위해 돈질을 한다.돈 주면 일시적으로 마음을 묶어 놓을 수 있어 그런 짓을 한다.단방약과 같다.선거 때 그래서 돈을 쓴다.부자들이 많이 사는 서울 강남에서도 돈 선거가 통한다는 것.선거 한번 치르려면 예상보다 뭉칫 돈이 들어간다.거액의 선거 자금을 자신의 돈으로 충당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남의 힘을 빌리게 돼 있다.때문에 남의 돈 갖고 정치 하는데서 사단이 벌어진다.아직까지 우리 정치는 고비용 저효율 구조다.선거가 돈 잡아 먹는 블랙홀과 같기 때문이다.선거에 나설려면 평상시에도 애경사에 얼굴을 내밀어야 한다.애경사 참석은 기본이며 친밀도에 따라 부조금도 달라진다.농촌서는 이를 무시했다가는 큰 코 닥친다.그 만큼 입소문이 무섭다.표를 주건 안주건 애경사 관리는 통과의례다.얼굴 알리면서 표심을 잡는데는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우리 민주주의는 그 시작부터가 궁핍한 살림에서 출발했다.못 배우고 못 먹고 못 입은 그야말로 빈곤으로부터 시작되었다.그렇다보니 빈곤의 잔재가 지금도 남아 있다.예전의 막걸리나 고무신 선거에서 비롯된 부정심리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단속이 강화돼도 돈 씀씀이는 커졌다.홍보비가 많고 선거꾼을 중심으로 돈 뭉치가 오가다 보니까 돈 선거가 고개를 쳐들고 있다.선거 때 돈 주고 받는 것이 불법인줄 알면서도 이 같은 짓을 한다.선거 때만 되면 브로커들이 부나비 마냥 선거판을 누비고 다니기 때문이다.꿀단지를 향해 꿀벌들이 모여 드는 것처럼 말이다.선거는 이들의 생계 수단이 되다시피했다.당락은 고사하고 우선 자기 호주머니부터 챙긴다.후보자는 이들의 교언영색에 미혹되기 십상이다.후보는 사람을 많이 만나므로 멍해진다.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비용 상한액을 공시하지만 이보다 2~3배는 더 쓴다.선거가 막바지에 다달으면 물불 안가리고 검은 돈도 쓴다.선거 브로커들이 후보로 하여금 돈 쓰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그렇다.모 교육감 후보 형제가 브로커들의 농간에 발목 잡혀 구속되었다.이 후보는 비교적 소신이 뚜렷하고 토론회에서도 나름대로 자신의 교육철학을 분명하게 밝혀온 사람이라서 충격이 크다.백로가 까마귀 떼 속에서 놀다가 당한 꼴이 됐다.백성일수석논설위원/ 백성일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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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1.10 23:02

[오목대] 체벌금지 논란 - 이경재

교육의 존엄성과 엄정성을 엿보게 하는 고담(古談) 한 토막. 어느 세자사(世子師=왕자를 가르치는 스승)가 잘못을 저지른 왕자의 팔다리를 입으로 물어뜯었다. 체벌을 한 것이다. 당시 법도로는 왕자에게 매질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를 개로 비하한 뒤 물어뜯는 방식으로 체벌을 가했다. 보다 못한 왕비가 세자사의 의자 밑에 대못을 박아두었다. 퇴청 길에 의자에 앉다가 엉덩이에 대못이 박혀 피가 흘렀지만 세자사는 안색 하나 변치 않고 집에 돌아갔다. 아무리 왕자일 망정 잘못을 저지르면 체벌을 면할 수 없고, 왕비의 권위로도 훈장의 교권을 침해하지 않는 교육의 엄정성과 존엄성을 보여주는 예화다. 지금 같으면 법정으로 옮겨가고도 남았을 일이다.체벌금지 논란이 분분하다. 지난 1일부터 서울 지역의 모든 초중고에서 체벌이 전면 금지됐다. 교육적 목적의 체벌까지도 해서는 안된다. 문제 학생이 발생할 경우 교사들은 교실 뒤에 서 있게 할 수 있고, 정도가 심해 다른 학생에게 피해를 준다고 판단되면 성찰교실로 보내 전문상담원의 상담을 받게 해야 한다. 체벌한 교사는 징계에 처해진다. 전북교육청도 내년부터 체벌을 전면 금지할 예정이어서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문제는 체벌만 없어지면 이상적인 학교가 될까 하는 것이다. 서울시교육청처럼 획일적인 전면금지로는 부작용이 따를 수 밖에 없다. 학생들은 체벌하면 신고를 하고, 교사는 학생이 말썽을 부리면 규정대로 처리하려 들 텐데 교육은 이런 게 아니지 않은가. 시정잡배들의 집단도 아닌 학교현장에서 매사를 '법 대로' 하려 든다면 끔찍한 일이다. 학생의 인권은 분명 중요하지만 의무를 다할 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또 잘못을 보고도 못본체하거나 생활지도를 포기하려는 교사도 늘고 대체처벌도 허술하기 짝이 없다. 교육현실이 자꾸 획일화되는 건 더 안타까운 일이다.비교육적 체벌과 폭행을 없애자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교육적 벌마저 없애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의견수렴과 다양한 검토가 필요하다. 특히 학교현장의 목소리를 많이 들어야 한다. 체벌금지는 교육감 한 개인의 철학으로 실행시킬 문제는 아니다. 남이 장에 가니까 구럭지고 성급하게 따라 나설 사안도 아니다./ 이경재 논설위원

  • 사회일반
  • 전북일보
  • 2010.11.09 23:02

[오목대] 자연과 사고 - 장세균

우리 생활속에서 무엇을 잘 모르거나 알기는 알아도 애매할때는 자신이 없는 대답으로 "잘 모릅니다"라고 대꾸하기 마련이다. 또 지나가는 행인이 길을 물으면 가급적 단정적 표현을 피하고 "이 길로 가면 될 줄 압니다만…"하고 말한다. 길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이나 사리를 잘 알아도 가급적 애매한 표현을 즐긴다.그래서 우리말에 안개 전치사가 매우 발달해 있다. 예를 든다면 "잘은 모르지만…" "틀릴지 모르지만…" "아닌게 아니라…" "자신은 없습니다만…" "꼭 그렇다는것은 아니지만…" "옳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만…"등등 많다.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고 안개처럼 흐려버린다.우리는 어떤 것을 분명하게 아는 것보다 애매하게 알고 있는 편이 심리적으로는 안정감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막에 사는 사람들이나 사막 문화의 영향을 받고 사는 사람들은 애매한 상황을 정신적으로 거부하는 잠재의식이 있다는데 사물이나 사리(事理)나 모든 것을 분명하게 하려고 하는 사고방식을 사막적 사고라고 한다. 그리고 반대로 애매한 부분을 남겨놓아 완충적 가치를 남겨 놓으려는 사고를 삼림적(森林的)사고라고 한다.우리 한국인의 사고는 삼림적 사고요, 유럽인의 사고는 사막적 사고이다. 유럽의 자연환경이 사막은 아니지만 그들의 의식구조나 행동방식을 규제한 것이 바로 기독교요, 기독교는 유태교를 모태로 하고 있고 유태교는 순수한 사막적 사고와 행동의 기반이다. 그래서 유럽인의 의식구조는 사막적 사고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그러나 삼림은 나무가 우거지고 시야가 막히고 습기가 감돌며 안개가 그 형상을 흐려놓기도 한다. 그래서 선명한 형상을 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러한 자연환경은 논리적이고 합리적 사고를 거부하기가 쉽게 만들지만 사막은 가린 것 없이 시야가 확 트였으며 넓고 거기에다 대기가 건조하여 안개나 이슬이 없다. 모든 것은 선명하게 시야에 노출되어 있다. 시간과 공간이 숨김없이 그대로 냉혹하게 드러나 있다. 그래서 명확한 사고를 하기가 쉬운 것이 사막적 사고이다.그래서 서양인은 논리적 토론을 통해서 합리적 결론을 도출해 내는데 능숙하다. 그러나 삼림적 사고의 우리에게는 이것이 부족하다./ 장세균 논설위원

  • 사회일반
  • 전북일보
  • 2010.11.08 23:02

[오목대] 조선왕조와 전주 - 조상진

전주가 조선왕조의 탯자리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전주에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나중에 全州府로 개칭)를 두었고, 이러한 격상된 지위는 500년동안 이어졌다. 어향(御鄕)이라는 특수한 지위를 인정한 셈이다.오늘날 전주시가 지향하는 전통문화중심도시의 뿌리도 결국 이러한 조선시대 문화를 현대화 및 산업화하자는 발상이다.하지만 창업주 이성계의 초년부터 전주와 밀접한 관계는 아니었다. 이미 고조부때 전주를 떠나 삼척으로 옮겼다가 다시 함경도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이후 100여 년간 그곳에 살면서 원(元)나라의 벼슬까지 세습했다.그러다 이성계가 고려에 내투(來投·와서 항복함)해 활동하면서 원래의 본향을 찾게 된다. 고려의 권문세가 못지않은 집안이라는 것을 내세울 필요가 있어서다.태조는 개국하자 전주지역 청소년 26명을 특별선발해 입궐토록 했다. 이들은 태조의 동생이 통솔하면서 태조를 시위토록 했다. 이후 태종때인 1410년 전주에 진전을 지어 태조 어진(초상화)을 봉안했다. 세종은 전주사고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토록 했고 태조어진을 모신 진전을 경기전으로 개칭했다.그 뒤 영조와 고종이 전주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영조는 전주이씨의 시조인 이한의 묘가 건지산에 있다는 구전을 바탕으로 묘역을 찾다 실체가 없자 이 일대에 푯말을 박고 사냥과 땔감 채취를 금했다. 이어 조경묘를 창건해 이한의 위패를 모셨다. 또 불에 탄 전주부성을 개축해 남문을 풍남문, 서문을 패서문이라 했다. 여기서 풍패(豊沛)는 한나라 고조의 고향 지명으로 왕조의 본향을 가리킨다.그리고 고종은 쓰러져 가는 왕조를 생각해서인지 선조들의 숨결이 남아있는 전주에 애착을 보였다. 조경단을 쌓아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상지임을 나타냈고 오목대와 이목대에 친필을 내려 비와 비각을 짓게했다.올해 국립전주박물관과 전주역사박물관은 이와 관련된 기념전과 학술행사를 대대적으로 가졌다. 또 4일은 태조어진을 전주에 봉안한지 6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을 기념해 6일 경기전에서 어진박물관을 개관하고 봉안 600주년 기념대제를 연다. 봉안행렬을 재현하고 왕가의 산책, 수문장 교대의식 등도 갖는다. 전통문화의 도시 전주의 뿌리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까 싶다./ 조상진 논설위원

  • 사회일반
  • 전북일보
  • 2010.11.05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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