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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에 하늘에서 펑펑 쏟아지는 눈(雪)은 대기 중의 구름으로부터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는 얼음의 결정이다. 눈의 모양은 내릴때의 기상조건에 따라 육각판·별·나뭇가지·육각기둥·바늘 모양 등 다양한 형태로 바뀌게 된다. 크기는 보통 0.1∼5㎜이며 큰 것은 10㎜가 넘는 것도 있다. 눈이 얼음의 결정이라고 하니까 일반 얼음과 혼동할 수도 있겠으나 눈은 수증기에서 직접 얼음으로 결정된다는 점이 다르다.눈은 겨울 풍경을 만들어 분위기나 잡게 하는 것쯤으로 가볍게 생각할 수 있지만 인간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귀한 손님이다. 눈이 오지 않으면 무엇보다 수원이 고갈돼 자연생태계에 영향을 준다. 20㎝의 적설량이 1㎝의 강우량과 같다는 점을 생각하면 눈이 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눈 많은 해는 풍년들고, 비 많은 해는 흉년든다’는 속담이 괜히 생겼겠는가.눈은 우리 생활과 깊은 관계가 있어 그에 대한 기록도 많다. 신라 벌휴이사금 9년(192) 음력 4월 경도(京都)에 석 자의 눈이 내렸고, 신문왕 3년(683) 초여름에는 한 자의 눈이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또 고려 공민왕 12년(1363ㅁ0 음력 2월에도 석 자의 눈이 내린 적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모두 33차례의 눈재해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특히 삼국시대에 13뢰나 겨울에 눈이 없었다는 무설(無雪) 기록이 남아있다는 것이 이채롭다.올해 유난히 전주지방에는 눈이 귀하다. 지난 10일 오후에야 첫 눈을 볼 수 있었으니 눈 기다리다 지친 시민들이 제법 많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전주의 첫 눈은 빠르면 11월 초순, 늦어도 12월 중·하순을 넘기지 않았는데, 올해는 아마 첫 눈이 늦기로 근래 기록을 세우지 않았나 싶다. 게다가 적설량이라야 고작 3∼4㎝ 정도에 그쳤다가 하루만에 대부분 사라져버렸으니 오랜만에 겨울 정취에 젖어보려던 시민들 아쉬움이 클 것 같다.사실 눈은 내려서 쌓여있을 때까지가 아름답지 녹기 시작하면 추한 일면도 있다. 더구나 녹았던 눈이 얼어붙으면 교통사고의 위험이 높아지고 각종 안전 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눈을 기다린다. 요즘처럼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살기가 어려울 때 더욱 그런 것 같다. 눈이 오면 온 세상이 똑같이 하얗게 되니까.
예절이란 인간관계에서 반드시 지켜야할 규범이며, 오랫동안 지켜져 오면서 관습화된 것이다.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도리라고 할 수 있다.인사는 그러한 예절중의 하나이다. 새해가 되면서 우리는 덕담인사를 많이 주고 받는다. 연초가 아니라도 만나는 이웃, 동료, 누구에게나 반갑게 그리고 마음이 담긴 인사를 해야 한다. 이 모든 고마운 이웃들 덕분에 사회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인사하는 것만 보아도 가문의 내력, 가정 교육, 그 사람의 품성까지 파악 할 수 있다. 정중하고 예의 바른 인사, 진심이 담긴 인사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강한 힘이 있다. 반가운 인사를 주고 받으면 마음까지 밝고 따뜻하게 되는 걸 느낄 수 있다.지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상대방에 따라 인사하는 예절이 상이하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무릎 밑까지 내려 절을 하였으며, 왕에게 경의를 표할 때는 무릎을 굽히거나 땅에 엎드렸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인사를 할 때 상대편의 지위나 중요성에 따라 세 가지 정도의 단계가 있었던 것 같다. 즉 최대의 경의를 표시할 때는 몸을 땅에 엎드렸고, 보통 경의를 표시할 경우는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하듯이 상반신을 굽히고, 간단한 인사는 단지 머리만을 수그렸다. 이슬람교도는 몸을 구부리고 오른손 바닥을 이마에 대는 절을 한다. 그 밖에 탈모하거나 악수로 하는 인사도 있으며 몸을 앞으로 구부리며 오른발을 뒤로 끌어당기는 우아한 궁정풍의 인사도 있다.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 하여 인사법도 시간, 상황에 따라 양식을 달리했고 단순한 인사마저도 정례, 거례, 목례, 묵례, 배례 등이 있다. 이중에서 우리가 인사한다고 할 때 일반적인 의미로 널리 쓰이는 것이 고개를 숙여서 인사하는 정례이다. 그러나 서구식 문물의 유입과 함께 남자의 경우 대부분 서구식 악수를 병행하고 있다. 이러한 인사 예절은 아니지만 요즘 부도덕한 사람으로 인사를 잘못해서 나라안이 온통 시끄럽다. 지켜야할 인사 원칙이 깨지고 민심과 상반되는 인사가 행해지면 될 일도 안되는 것이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황해도 출생으로 본관은 청도(淸道).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지리학자로 대동여지도(大動與地圖)를 집대성한 의지와 집념의 표상이다. 1804년에 출생하여 1866년에 ‘국가 기밀 누설죄’로 감옥에서 타계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그는 30여년의 각고 끝에 청구도(靑邱圖) 2첩(순조 34년)과 대동여지도 2첩(철종 12년)을 완성하여 마침내 완벽에 가까운 한국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것도 숫제 맨주먹으로.위성영상과 같은 첨단 과학기술을 동원한 실측자료를 근거로 1백년 만에 오류를 바로잡은 정밀한 한반도 산맥지도가 나와 화제다. 정부 산하 국토연구원이 위성영상 처리와 지리정보시스템(GIS) 그리고 공간분석기법과 각종 실측자료를 활용하여 한반도 산악지형을 3차원으로 재현한 산맥지도를 완성한 것이다.새로 완성된 산맥지도를 보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기존의 산맥지도가 얼마나 엉터리였는가를 알 수 있다. 현행 지리교과서나 사회과부도에는 한반도에 모두 14개의 산맥체계가 형성돼있는 것으로 수록돼 있으나 국토연구원의 연구결과 우리나라에는 총 48개의 크고작은 산맥들이 형성돼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낭림산맥과 강남·적유령·묘향·차령·노령산맥 등은 아예 실재하지 않거나 방향과 위치가 터무니 없이 잘못된 사실도 드러났다. 이로써 지난 1903년 일본인 지질학자 고토분지로(小 文)가 제작하여 그동안 학계와 교육계 등에서 무비판적으로 사용해온 산맥지도는 휴지조각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됐다.한데 놀라운 것은 이번에 완성된 3D 산맥지도가 조선시대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의 산줄기 체계와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다. 국토연구원이 “대동여지도와 새 산맥지도는 구체적으로 백두대간 산줄기의 세세한 방향과 갈래는 물론, 개마고원 지역과 평안북도·전라남북도 지역의 산줄기들이 자로 잰듯 거의 일치한다”고 밝혔을 정도니 대동여지도의 역사적 가치가 새삼 돋보인다.요즘처럼 자동차나 등산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과학적인 조사장비가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수로 그렇게 정밀한 지도를 만들었는지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전국 각지를 세번씩이나 답사를 하고 백두산을 여덟번씩이나 오르내린 그의 불굴의 정신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언어는 사회적 산물이다. 따라서 사회적인 배경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사회·문화적 배경이 서로 충돌하고 있는 접경 지역에서의 언어는 어떤 모습일까.나제통문을 지나야 하는 무풍지역은 전라도와 충청도 그리고 경상도가 접한, 언어적으로도 경제지역으로 구분된다. 즉 전북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충청도와 경상도 말투가 섞여 있어서 그 정체성에서 결코 단순하지 않은 곳이 바로 무풍이다.그런데 그런 접경이 국내가 아니고 국외라면 어떤 모습일까. 그 중 대표적인 지역이 미국 로스엔젤레스인데 ‘서울시 나성구’라고 불릴 만큼 한국인들이 많이 산다. 이들은 미국땅에서 한국말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들 한국사람은 전적으로 한국말이 모국어라고 할 수 있는 이민 1세대와 한국말을 먼저 배웠지만 미국말을 하면서 사회생활을 하는 1.5세대 그리고 영어를 먼저 접하며 자라고 있는 이민 2세대로 나눌 수 있다.이들 이민세대 중에서 언어 문제로 갈등을 많이 겪는 이들은 1.5세대이다. 이들은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지만 영어를 구사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미국적 사고방식 때문에 갈등을 겪게 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거칠게 묘사된 표현들에 대한 거부감이다.‘송송’썬다, ‘살짝’익힌다 등의 표현과 ‘데친다, 삶다’의 차이 등이 이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또한 ‘너무 센 불’도 아니고 ‘너무 약한 불도 아닌 불’로 하는 요리와 ‘무르게 익힌’요리를 안내하는 책자를 들고서 1.5세대는 어쩔줄 몰라 한다. 물론 이런 문제는 한국적인 정서로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일 것이다.이런 한국적인 그 중에서도 전라도적인 정서를 가득 담은 표현이 바로 ‘거시기’이다. 영화 ‘황산벌’에서 “거시기할 때까지 머시기허자”는 대사는 이러한 정서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하지만 한국어와 영어의 접경을 넘나들어야 하는 이들에게 그러한 표현은 난해하기 이를 데 없다. 직장 등의 일상이 명료하고 투명한 성격을 갖는 이들 1.5세대가 용기를 내어 접하는 한국 관련 정보가 애매모호하다는 점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외국에 사는 한국인이 감동할 수 있어야 외국인이 한국을 가까이 하게 된다. 문화의 전령사인 이들 교민의 충고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는 일제식민지로 수탈당하고 6·265전쟁 중에 황폐해진 산을 약 40년에 걸쳐 녹화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세계적으로도 국토는 녹화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이처럼 국토녹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난방 및 취사용으로 쓰던 나무 땔감을 석탄이나 석유·가스 등으로 전환한 정부의 연료정책이 주효한 때문으로 볼 수 있다.우리의 산림면적은 남한만 따져 볼때 전체 면적의 65%인 6백43만㏊에 이른다. 이같은 숲이 1년동안 우리 국민에게 주는 공익적 가치는 50조원으로, 국민 1인당 1백60만원의 혜택을 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숲의 대표적 공익기능이라면 대기정화 및 수원(水源)함양 기능을 비롯 목재 등 임산물을 얻을 수 있는 점을 꼽을 수 잇따. 그러나 이같은 경제적 이득도 크지만 숲이 제공하는 정신 문화적 가치는 실로 엄청나다. 우리에게 정서적 안정과 휴식공간을 제공해주는 가치는 계량할 수가 없다.울창한 숲속에 들어가면 자연의 위엄을 새삼 실감한다. 아름드리 몸통은 하늘을 떠받들고 있고, 대지에 깊이 박힌 뿌리에서는 쉼없이 물을 퍼올린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드문드문 비치는 햇살은 흡사 어떤 계시처럼 신비감 조차 느끼게 한다.인간들은 이같은 숲을 생명과 풍요의 원천으로 믿었기 때문에 경배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프랑스의 수목학자이며 문필가인 ‘자크 부로스’는 그의 저서 ‘나무의 신화’에서 ‘나무들도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역설했다. 아직도 우리나라 일부 마을에서 당산 노거수(老巨樹)에 제(祭)를 올리고 정성껏 보호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보여진다.‘숲 해설’은 이러한 숲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한 작업이다. 숲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효율적인 탐방활동을 도와주는 것이다. 숲 해설은 1889년부터 미국 록키산맥에서 안내활동을 한 ‘에노스 밀스’가 창시자이다. 그동안 국내에서 일부 애호가들이 자체적으로 펼치던 ‘숲 해설’활동이 엊그제 국무회의에서 숲 해설가의 공인자격을 인증하는 법률안이 의결됨으로써 앞으로 숲과 관련된 각종 프로그램이 본격 개발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주 5일근무제 및 웰빙 붐을 타고 숲을 찾는 사람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동안 각종 개발로 수난받은 숲을 아끼고 보존하는 일이야 말로 잊고 지냈던 숲의 고마움을 다시 깨닫는 첫걸음이라 여겨진다.
우리는 하루에 수 없는 이미지, 정보, 소식을 듣는다. 너무 많아서 대충 흘려 버린다.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면, 귀에 들리거나 눈에 보여도 정신에는 접수하지 않는다. 이미 광고는 사실 보다 과장되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안 보거나 대충 본다. 정보가 너무 많다 보니까 이제 아무리 전달하려고 노력해도 정신에 도달하지 않는다.정보 사회의 역설은 정보가 너무 많아 대부분의 정보가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정보가 쓰레기가 되어 사라져버린다. 버리기 위해서 만들어내는 셈이다. 쓰레기가 되지 않는 방법을 찾아내지 않는다면 아무리 광고를 내보내도 쓸모가 없다.지역도 마찬가지 상황에 처해있다. 모든 지역이 사람들이나 기업의 관심을 끄는 데 커다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렇지만 너무 많고 비슷하다 보니 사람들이 별 관심이 없다. 역사가 있는 곳들은 대부분 예향이라고 하고, 서해안에 있으면 서해안 거점이라고 하고, 산골에 있으면 청정지역이라고 하고, 평야에 있으면 풍요로운 지역이라고 한다. 전라북도나 시군들도 거의 마찬가지이다.특히 전북의 장소마케팅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동계올림픽의 경우 강원도의 술수로 결국 평창으로 넘어갔고 이에 대해 전북도민이 억울해 하지만, 국민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 이미지적으로 강원도가 전북보다 동계올림픽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원도로 결정된 과정의 문제점들에 관심이 없다.광주와 같은 호남이라는 하나의 장소로 인식되어 나타나는 문제도 있다. 광주가 이미 문화중심도시를 하는데, 전주도 왜 또 문화중심도시를 하느냐는 생각도 있다. 전남이 대체에너지에 적극 나서니까 전북이 이전부터 나섰더라도 같은 권역이니 한 곳에서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북은 농도고 아무래도 전통적인 곳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어 첨단에는 약할 것 같은 이미지가 있다. 알려진 기업이 부족하다가 보니까 기업하기에도 불편할 것 같은 이미지도 있다.머리 속에 있는 이미지를 바꾸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체계적인 노력을 하면 바꿀 수 있다. 그 것이 장소마케팅이다. 사실에 기반하여 전북에 가장 유리하면서 설득하기 좋은 것을 골라서 잘 정리해서 각인시켜야 한다. 전라북도도 보다 적극적으로 장소이미지 정립과 마케팅에 힘써야겠다.
오늘은 24절기 중 끝에서 두번째이자 양력 새해들어 첫번째 절기인 소한(小寒)이다. 연중 밤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동지(冬至)와 절기 뜻풀이로만 보아서는 겨울중에서도 가장 춥다는 대한(大寒) 사이에 끼어 있다. 그러나 대한보다 소한이 훨씬 더 춥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고, 동장군이 맹위를 떨치는 시기도 이 때가 절정을 이룬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24절기가 실제 기후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은, 중국 주(주)왕조가 득세할 때 화북(華北)지방의 기상상태를 기준으로 절기 이름을 붙여놓았기 때문으로 해석된다.어쨌거나 소중한 절기중에서 가장 으스스한 느낌을 준다. ‘소한 추위는 꾸어다 가라도 한다’‘소한 얼음 대한에 녹는다’‘대한이 소한집에 놀러갔다가 얼어 죽었다’는 속담이 말해주듯 어느 해고 소한은 꼭 이름값을 했다. 장독대에서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이때 쯤이요, 술에 취해 밤길 걷다가 동사하는 것도 소한 추위가 엄습해오는 요즘이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소한 추위가 닥치면 칼바람을 피해 꿈쩍않고 집안에 눌러 앉아 난리 피하듯 추위를 피하며 살았다.작년 한해 우리나라 수출 실적은 전년 대비 31.2%가 증가한 2천5백42억2천만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무역수지 흑자도 2백97억5천만달러를 올려 전년보다 두배 이상의 실적을 거뒀다. 이 수치대로라면 호황까지는 아니더라도 국민들이 그럭저럭 먹고는 살 수 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돈방석을 깔로 앉은 대기업과 일부 부유층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살기 힘들다고 푸념을 한다. 실제로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민의 10.4%가 최저 생계비도 벌지 못하는 빈곤층으로 분류돼 있다. 당연히 노숙자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국가환란사태 이후 2001년을 고비로 감소세를 보이던 노숙자 수가 작년부터 다시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이들중 상당수는 오랜 노숙생활로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자력갱생이 어려운 상태라고 한다. 시민단체의 비공식 집계에 따르면 한해에 거리에서 죽어가는 노숙자 수는 무려 3백50명이나 된다. 우리나라 빈곤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사회불평등 구조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고려할 때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올 소한 추위에는 또 몇이나 희생될지 가슴이 답답하다.
옛날 궁궐에는 왕이나 왕자 이외의 남성은 기거할 수 없었으므로 남성을 상실한 사람을 뽑아 궁안의 모든 일을 돌보게 하였으니 그들이 내시다. 내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절대 권력자인 왕의 측근으로 있으면서 때로는 정사에 깊숙히 개입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특수한 신분이었다.권력에 눈이 어두워 어린 자식을 거세하여 궁중에 들여보내는 일도 있었다 한다. 약삭빠른 장사치들은 어리숙한 거세 희망자에게 거세를 하여주고 적출한 것을 말려 보관했다가 증거로 제출해야 할 경우가 생겨 다시 찾아오면 엄청난 값을 받고 되팔았다는 우스개 이야기도 있다. 또한 거세하지 않고 내시 생활을 하다가 들통나서 처형당한 일도 있었다.환관은 궁중에서 잡일을 담당하는 자인데, 생리적으로 고자인 자들을 통칭하던 말이다. 하지만 내시는 관직명이다. 전근대적 사회에서는 벼슬에 나아가야 통치계층에 속하였기 때문에 신분적으로 내시는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래서 내시 벼슬을 얻기 위해서 거세까지 감수하며 그렇게 혈안이 되었던 모양이다. 관직이나 벼슬이 단어적으로 닭과 관련있음이 퍽 흥미롭다. 벼슬이란 닭이나 꿩같은 조류의 이마 위에 달린 살조각이다. 흔히 말할 때는 벼슬이라 하고 적을 때는 볏이라고 한다.닭의 볏 모양은 관리들이 관을 쓴 모습과 유사하다 하여 닭은 입신출세와 부귀공명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조선시대 학문과 벼슬에 뜻을 둔 사람은 서재에 닭의 그림을 걸어 두었다. 닭의 볏 모습과 비슷한 맨드라미도 함께 그려졌다.하지만 오늘날 닭은 볏보다는 닭고기와 달걀같은 상품의 의미가 더 강하다. 닭고기의 최대생산공장 하림이 바로 우리 고장 전북에 있다. 을유년 닭의 해가 우리 도민들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닭이 우니 새해의 복이 오고, 개가 짖으니 지난 해의 재앙이 사라진다'는 덕담을 던져본다. 어찌된 일인지 지난해에는 도내 현안사업중 시원스럽게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었던 답답한 해였다. 그렇다고 누구하나 책임지는 사람마저 없었으니 더욱 더 우울했었다. 올해엔 전북이 복 좀 많이 받았으면 좋겠다.
인류가 역법(曆法)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달력은 관측 대상에 따라 크게 태양력(太陽曆)과 태음력(太陰曆)으로 나뉜다. 태양의 운행이 기준이 된 태양력은 고대 이집트가 기원으로 BC 18세기경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수차례의 개정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태양력은 1년 평균 길이를 365.2425일로 하는 그레고리력으로 1582년에 만들어진 것이다.달의 삭망(朔望)을 관찰하여 만든 태음력은 달의 움직임에 따라 한달 평균 길이(1삭망월)를 29.53059일로 잡고 있다. 대부분의 고대력은 태음력에서 출발한 것으로 지금도 동양권 일부 국가에서는 태양력과 태음력을 함께 쓰고 있다. 현재는 터키 이란 아라비아 이집트 등 이슬람지역에서 순태음력을 사용하고 있다.해마다 이맘때면 양력과 음력 가운데 어느 것을 따라야 하는지 혼란을 겪게 된다. 우리가 쓰는 태양력으로는 분명히 묵은 해가 가고 새로운 해를 맞았는데 주변 분위기는 영 어정쩡하다. 게다가 신정 휴일은 딱 하루뿐이어서 해바뀜이 전혀 실감나지 않고, 3일연휴가 끼어 있는 구정이 진짜 새해가 시작되는 날처럼 생각된다.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송구영신(送舊迎新)은 언제 해야 되는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흐릿하게 지낸다. 양력으로는 이미 닭띠 해, 을유(乙酉)년이 시작됐는데 음력으로는 아직도 엄연히 원숭이 해, 갑신(甲申)년이니 그럴만도 하다. 어찌보면 연중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양력 1월달이 신정과 구정 사이에 끼어 제일 대충대충 넘어가는 것 같다.새해부터는 담배를 끊겠다. 술을 끊겠다 또는 건강을 위해 운동을 시작하겠다, 영어회화를 시작하겠다 등등 각자 나름대로 다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초지일관하여 당초 결심을 지켜나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찌어찌 하다 보면 파계를 하게 되고, 한번 마음이 흐트러지면 구정때 다시 시작해야지 아니면 내년에 다시… 하면서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만다.그러나 인간이 달력을 만들었다는 것 외에 신정이나 구정이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뜨는 태양은 새로운 태양이 아니라 똑같은 태양이다. 어떤 특별한 날을 기준으로 계획을 세우면 스스로 무너지기가 쉽다. 누구에게나 중요한 것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허상의 덫’이 아니라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는 나의 항심(恒心)이다.
을유(乙酉)년 새해가 밝았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새 것은 묵은 데서 나오기 마련이다. 우리가 지난해를 돌아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교수신문은 지난해의 한국을 ‘당동벌이(黨同伐異)’로 규정하였다. 같은 파끼리는 한 패가 되고 다른 파는 배척한다는 뜻을 가진 고사성어로, 직역하면 “같은 무리와는 당을 만들고 다른 자는 공격한다”는 뜻이다. 출전은 ‘후한서(後漢書)’의 ‘당고열전(黨錮列傳)’ 서문이다.또한 크리스마스 다음날 일어난 진도 9의 강진(强震)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인간이 자연 앞에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옷깃을 여미게 하는 그리고 삶의 덧없음을 깨우쳐 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이렇게 지난해를 돌아보지만 기실 새해의 시작이란 게 본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문명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모두가 평범한 시간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너무 요란을 덜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새해의 첫날을 차분하게 맞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을유년 일 년을 생각해 보면서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인도의 간디가 바로 그 이다. 간디에게 한 소년과 그 어머니가 찾아 왔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부탁했다. 우리 아이가 사탕을 좋아 하니 한 말씀 해 주시면 그 버릇을 고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간디는 보름 뒤에 다시 오라고 하고선 돌려보냈다. 보름 뒤에 찾아 온 그 아들에게 간디는 ‘사탕을 먹지 말라’고 충고해 주었다고 한다. ‘보름 전, 처음 왔을 때 그 말씀을 해 주셨으면 다시 오지 않아도 될 것을 왜 이제야 하십니까’하고 그 어머니가 물었다. 간디가 말했다. ‘그 때는 나도 사탕을 먹고 있었거든요.’ 간디는 또 경전을 쓰라는 주위 사람들의 청에 이렇게 답했다. ‘세상에는 이미 좋은 말이 다 나왔다. 실행하는 사람이 적어서 그렇다.’‘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한 간디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 준다. 우리가 일 년동안 열심히 살아서 얻으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 바라던 바를 얻었다고 한들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나를 너무 부자가 되게도 마옵시고 가난하게도 마옵소서. 내가 부자가 되면 오만해질 것이고 가난하면 추해질까 두럽습니다.’라는 기도문은 영혼을 정결하게 하는 금언(金言)으로 새겨볼 만하다. 비록 가진 것은 부족하더라도 영적(靈的)으로 부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제 곧 갑신년이 지나가고 을유년이 온다. 원숭이의 해가 가고 닭의 해가 밝아오고 있다. 지난 1년이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당동벌이(黨同伐異)라는 4자 성어가 올해의 4자성어로 선택되었다고 한다. 편을 들어서 다른 사람들을 내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만큼 한국사회에서 내부적으로 많은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IMF 위기 이후 지속 되어온 사회적 변혁의 결과로 보인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격변기를 맞이하고 있어 아직 이러한 격변이 정리되지 못해 새로운 질서를 탄생하기 위한 진통으로 보인다.올해를 반성하고 내년을 맞이하는 행사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개인들은 개인들 나름대로 모임은 모임 나름대로 그리고 지방자치단체는 지방자치단체 나름대로 각종 행사를 통해 1년을 정리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제야의 타종을 하고 전북지역에서도 여러 곳에서 제야의 행사를 하고 있다.한 해의 마지막 밤을 제석(除夕)또는 세제(歲除)나 제야(除夜)라고 한다. 제야라는 말은 밤을 없앤다라는 뜻이다. 즉, 밤을 지새우면 뜬눈으로 세운다는 뜻이다. 이날 제야의 종을 33번 친다. 올해가 지나가는 마지막 시간, 새해가 오는 첫 시간인 밤 12시에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을 33번 치는 것은 조선 시대에 이른 새벽 사대문 개방과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타종, 즉 파루를 33번 친 데서 연유한 것이다. 통행금지가 없이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새해가 밝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제야라는 말은 마지막 밤을 밤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하여 생긴 것이다.어른들에게 묵은 세배를 드리기도 한다. 이 날 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따라서 잠을 자는 사람에게 쌀가루로 희게 칠해 놀리기도 했다. 그래서 밤새워 불을 밝히고 밤새 여러 가지 이야기나 놀이를 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습은 조선시대에도 행해졌던 것들이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제석에 여기저기 불을 켜 놓은 것은 불의 신성한 힘을 빌어 정화하고 벽사해서 새해를 맞자는 데서 온 것으로 여겨진다. 잠을 자지 못하게 하는 것은 가는 해를 되돌아보고 새해를 깨끗한 마음으로 맞이하기 위한 근신의 뜻이 담겨져 있다.독자 모든 분들도 지난 1년을 돌아보고, 새해를 깨끗한 마음으로 더욱 건강하고 즐겁게 지내기를 기원한다.
지난 1900년 이후 1백여년간 1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대지진은 모두 스무차레나 된다. 이란이 5건으로 가장 많고 중국이 3건 이탈리아와 터키가 각각 2건 그리고 일본과 파키스탄 칠레 모르코 페루과테말라 아르메니아 인도가 각 1건씩 기록하고 있다. 이중 사망자 수가 가장 적은 지진은 1968년 8월의 이란 지진으로 1만1천6백명이 사망했고, 사상 최대 규모의 지진으로 기록된 1976년 7월의 중국 탕샨 지진에서는 무려 24만2천명이 희생됐다.크리스마스 다음날 아침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인근 해역에서 발생한 진도 9의 대지진과 지진해일은 또 하나의 불행한 지진 신기록을 작성했다. 이번 대재앙으로 사망하거나 실종된 피해자가 전세계 80개국에 걸쳐 발생했고, 직접 사망자가 발생한 나라만도 진앙지인 인도네시아를 비롯 태국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인도 말레이시아 몰디브 소말리아 등 9개국에 달했다. 사망자 수는 어제 오전 현재 2만3천2백명을 넘어섰는데, 피해지역이 워낙 광범위해 지금 상황에서는 정확한 희생자수를 파악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다.이번 지진 피해가 상상외로 컸던 것은 충돌한 지각판이 무려 1천㎞가 떨어진 서남아시아 스리랑카 해변에서 1만1천여명이 숨지고, 인도의 동남 해안에서도 해일에 휩쓸려 6천6백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수마트라 섬에서 6천㎞나 덜어진 아프리카 동부 소말리아에서도 수백명이 날벼락을 맞았고, 에티오피아 지부티 탄자니아 등 아프리카 동부 연안국가와 예멘 오만 등 인도양 주변 반도국가들까지 해안지역 가옥이 침수돼 대피하는 소동을 볼이기도 했다.지나친 비유일지는 모르나 희대의 지진사태를 보며서 구약성서 창세기편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떠오르는 것은 웬일일까. 물론 희생자들은 죄인이고 생존자들은 구원을 받았다는 종교적 신념에서의 비유가 아니라, 자연(또는 하나님) 앞에 인간은 얼마나 보잘것 없는 존재인가 새삼 느낄 수 있었다는 말이다. 선한 일만 하면서 오순도순 살아도 세월이 아까울 판에 어찌하여 날만 새면 도처에서 싸움판을 벌이는지 모르겠다. 세밑이라 그런지 마음이 더 착잡하다.
회담이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논의하는 것이다. 특히 여럿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협의 또는 협상이라고 한다.우리는 근현대사에서 많은 회담들을 들어 왔다. 얄타, 포츠담, 카이로회담, 한일회담, 제네바회담, G7회담, 남북적십자회담 및 정상회담, 6자회담 등등이 그것이다. 최근 정치권에서 모처럼 4자회담이 성사되어 멋진 협의나 협상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했으나 물건너 간듯한 발언이 서슴없이 튀쳐나오고 있어 실망스럽다.무슨 장난도 아니고 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의 내용도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민주정치와 생활이라는 단원에서 대화와 타협을 민주정치의 필수적인 과정으로 써놓고 있다. 대화와 타협을 위해서 서로의 입장과 주장을 밝히고 상대를 이해토록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즉, 모두의 의견이 존중되는 해결방안을 찾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표결은 대화와 타협이 원활히 되지 않을 경우 예외적인 경우에 그것도 보조적으로 사용되는 수단이다. 표결은 다수결로 이뤄지지만 사전에 충분한 토론이 이뤄져야 하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토론없는 표결은 의미가 없다. 우리 정치권의 현실은 이런 교과서적인 이야기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 우리사회가 권위주의 시대를 벗어나 민주주의 시대에 접어들었지만, 대립과 갈등을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해결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 양보하는 것은 지는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걸핏하면 힘의 논리나 극단적인 행동에 의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합의는 각자의 주장을 조금씩 양보하고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가능하다. 어느 한 집단이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한다면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다.초등학교 책에 나온 타협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 상대방의 의견에 경의를 표시하고 결코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잘못은 기분 좋게 인정하고 온순하게 이야기한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마음껏 이야기하게 하고 진심으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경청해야 한다. 우리 정치권에는 꿈같은 이야기같다.
우리 속담에 사위는 백년지객이라는 말이 있다. 딸을 데리고 살기 때문에 언제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어려운 존재라는 뜻이다. 또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 속담도 있다. 사위를 사랑하는 마음은 장인보다 장모가 더하다는 말이지만, 이또한 사위에게 딸을 잘 보살펴 달라는 장모의 간곡한 바람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그러나 이는 딸을 시집보내는 입장에서 본 속담이고, 아들을 장가보내는 시댁측에서 본 속담은 아주 시니컬하다. 처가를 비교할데가 없어 뒷간에 비교하여 멀수록 좋다고 하는가 하면, 겉보리 서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안한다며 처가를 무슨 원수지간이나 되는 것처럼 묘수한 속담도 있다. 물론 유교문화가 깊게 뿌리내린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속담이겠지만 그래도 듣기가 좀 거북하다.사실 장가를 간다는 말은 장인의 집에 간다는 뜻으로 처가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찌보면 아내를 맞는 것을 자랑삼아 한 말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남자쪽에서는 여자쪽을 깎아내려야 체면이 서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미개했던 시대의 남존여비 풍조가 얼마나 많은 불평등과 비극을 양산해 냈을지 얼추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역시 세상은 억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연히 바뀌는 것 같다. 사회구조와 생활패턴이 다양화되면서 이제 처가살이 싫다는 말은 옛날 속담속에서나 찾아봐야 할 듯 싶다. 결혼정보회사 (주)듀오가 전국의 20∼30대 미혼남성 5백4명을 대상으로 ‘처가살이에 대한 의식’을 조사한 결과, 41.1%인 2백7명이 찬성하고 반대인 37.5%인 1백89명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연령대별로는 20대 찬성비율이 46.7%로 30대의 34.6%보다 높아 신세대일수록 처가살이에 대한 거부반응이 적은 것으로 조사됐다.처가살이에 찬성하는 이유로는 ‘딸도 자식이므로 부모를 모시는 게 당연하다’가 34.3%로 가장많았고 ‘아내의 편의를 위해’가 22.2%, ‘자녀양육 부담 감소’가 15.5%, ‘생활비 절감’이 15%로 뒤를 이었다. 특히 이중 첫번째 찬성이유는 놀랄만한 의식변화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하기야 양성평등시대가 도래해호주제도도 폐지하겠다는 마당에 딸 아들 구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마는, 미상불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이러다가 고구려시대의 데릴사위제가 다시부활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경제적인 가치가 최우선시 되는 작금의 세태 속에서 별반 이상할 것이 없는 풍속중 하나가 바로 성탄절의 모습이다. 본래의 의미는 빛이 바래고 이제는 상혼(商魂)이 가득한 절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비단 성탄절뿐 아니라 우리가 일년동안 기념하는 상당수 절기들이 그러하니 성탄절만을 딱이 꼬집어 말하는 것도 그렇다. 아쉬운 것은 에덴동산의 선악과처럼 우리 인간이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할 것으로 구분된 의미마저도 경제적인 가치로 저울질 되고 있다는 점이다.성탄절에 떠오르는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동방박사다. 이역만리 페르시아 땅에서 별을 관찰하던 박사 세 사람이 별빛을 따라 베들레헴이란 동네의 마굿간을 찾아 예수께 경배를 드렸다는 이야기가 그 핵심이다. 그 이야기대로라면 동방박사는 세 사람인데 성경 그 어느 곳을 찾아보아도 ‘세 사람’이란 구절은 찾을 수 없다. 한 술 더떠서 뒤늦게 동방박사를 쫓아간 사람이 있고 그 이름은 ‘알타반’이며 도착해 보니 십자가에 달리시는 현장에서 예수를 만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물론 이런 이야기에는 그럴듯한 교훈적인 내용까지 곁들여져 있기 마련이다.그런 이야기는 널리 퍼지지만 정작 성경에 있는 예수 탄생과 관련된 사건이 주목 받지 못한다. 시몬과 안나라는 인물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아기 예수가 누구인지 첫눈에 알아 본 사람들이다. 성경은 이들이 성전에 있는 경건한 사람으로 묘사한다.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며 성전에 머물렀던 시몬은 송가(頌歌)를 부른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이들이 기다린 예수 탄생은 동방박사처럼 요란하지 않았다. 경건한 생활을 하는 그리고 소박하다 못해 무능해 보이기까지 한 이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성탄절의 의미를 찾는다면 사실 요란을 떨 일이 아니다. 이 천년 전의 예수는 말 그대로 ‘말구유’에 태어났고 당시 소외된 계층이었던 목동들의 방문을 받았다. 그리고 당시 통치자의 2세 이하 유아살해 사건으로 이집트 땅으로 급히 피난을 떠나야만 했다.인류 구속의 의미는 기쁨이겠지만 그 구속의 결과는 ‘나눔과 베품’으로 드러나야 옳지 않겠는가.
‘지천년 견오백(紙千年 絹五白).’ 비단은 5백년을 가지만 한지는 1천년을 간다는 말이다. 귀한 비단보다는 한지의 가치를 높이 인정해주는 표현이다. 한지의 우수성은 이미 중국 송(宋)나라때 부터 소문나 있었다. 사대부들은 당시 고려지에 글쓰는 것을 소원했고, 여염집에서는 제사때 고려지로 지방쓰는 것을 조상에 대한 최대의 정성으로 알았다.한지중에서도 전주한지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품이었다. 전주가 한지의 본향(本鄕)이었던 셈이다. 조선조 초기 전주 조지소(造紙所)가 생산한 전주한지는 왕실에 진상됐고, 명(明)·청(淸)나라에 공물로도 바쳐졌다.99번의 정성스러운 손길을 거쳐 만들 수 잇는 전주한지는 그야말로 우리 지역의 자랑스러운 문화상품이었던 셈이다.전주한지가 이처럼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전주지역의 깨끗한 물과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가 풍부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투철한 장인정신이 더해진데다 지역의 예술적 특성인 서화가 발달하면서 질좋은 한지의 수요를 다양하게 만들었다.이같은 전주한지가 중국산 저가 수입품과 기계화 한지등에 밀려 소비가 크게 줄면서 명맥마저 끊길 위험에 처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와중에 강원도가 한지에 눈을 돌려 한지테마파크를 조성하는 등 지역특화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는 것은 남을 탓하기 이전에 우리의 책임이 크다고 본다.지난 1999년부터 해마다 ‘전주 종이축제’를 열고 갖가지 행사를 개최하는 것도 쇠락해가는 전주한지를 살리기위한 민관(民官)차원의 자주책인 셈이다. 한지를 지역전통산업으로 육성 발전시키기 위한 전략과 체계적인 지원책 마련을 위한 밑거름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최근 군산 호원대 박태영교수팀과 남원 지리산한지가 공동으로 35∼40수 굵기가 한지사(韓紙絲) 개발에 국내 최초로 성공했다는 낭보다. 세계적으로도 2002년 일본에 이어 두번째라고 한다. 한지사로 베는 내구성과 염색성등이 일반 면제품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아 내의를 비롯 이불, 벽지, 커튼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이 가능하다고 한다. 게다가 다른 직물에 비해 청량감과 제습, 탈취기능이 뛰어나고 분해가 쉬운 친환경적인 천연소재라는 점도 장점이다. 웰빙시대를 맞아 한지의 또 다른 특성을 활용한 개가가 아닐 수 없다.
지난 22일은 24절기 중의 하나인 동지였다. 일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태양신 또는 양기가 점차 부활하는 날이기도 하다. 따라서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지난해의 끝이고 새로운 해의 시작으로 간주한 경우가 있었다. 주(周)나라에서는 동지를 새해의 시작을 삼았다. 새해를 위해 천지신명과 조상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우리나라에서 설날 행하던 풍습과 비슷하다. 서양에서는 태양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는 날로 생각하였고 따라서 새로 부활하는 태양신을 향해 제사를 올렸다고 전해진다.한국에서는 동지에는 동지팥죽을 먹었는데 그 이유는 빨간 색이 귀신들을 쫓아내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핼로윈데이도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져 귀신들이 지하에서 나와서 마음껏 돌아다닌다고 믿어 시작한 의례로부터 발달한 것이다. 귀신들에게 겁을 주고 놀려서 지하로 다시 쫓아내기 위해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무서운 가면과 복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으로부터 유래했다고 한다.크리스마스도 원래는 로마의 동짓날이었다. 농경을 주로 하던 로마인들은 12월 21일부터 31일까지를 농경신을 모시며 성대한 잔치를 벌이며 새해로의 변화를 축하하였는데, 그중 25일은 동지가 지난 다음 태양이 소생하는 날이라 하여 가장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이날의 농경신과 더불어 빛의 신을 모시는 날이었다. 밤이 길어져 힘이 강해진 귀신들을 쫓아내기 위해 빨간 색들이 사용되었다. 로마에서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로마 전역에서 잔치를 벌이던 날을 예수의 생일과 결합시킨 것이다. 고대 로마인들이 12월25일에 농경신을 모시고 나무가지로 생명의 부활을 뜻하기 위해 신전들을 장식하였는 데 이러한 풍습이 산타할아버지와 크리스마스 트리로 전해진 것이라 한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 가장 성스러운 날을 성탄절로 삼아 기독교가 무난하게 로마 에 정착하도록 노력한 결과로 보인다. 중세까지도 크리스마스 행사는 교회 의식과 더불어 농경신을 모시는 가장행렬과 함께 행해졌다. 농경신들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면서 순수한 기독교의 성일(聖日)이 된 것이다. 크리스마스라는 말 자체는 Christ(그리스도)와 Mas(미사, 축일)의 두 단어가 합하여 이루어진 말이다. 그리스도는 예언자, 선지자 등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예수를 지칭한다.
얼시구 시구 들어간다/절시구 시구 들어간다/작년에 왔던 각설이가/죽지도 않고 또 왔네/요놈의 소리가 요래도요/천냥을 주고 배운 소리/한푼 벌기가 땀이 난다/품 품 품바가 잘도 헌다.거지행세를 하자며 돼지멱따는 소리를 빌려서라도 한 곡조 뽑아야 하는 각설이타령이다. 깨진 쪽박이나 찌그러진 양재기를 두드리며 한바탕 어우러지는 거지들의 ‘초대받지 않은 축제’는 구경거리라고 하기에는 처연하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억지 놀음을 하는데 무슨 신명이 나겠는가. 그들은 생일이 따로 없다. 동네에 초상이 나거나 환갑·돌집이 있는 날이 바로 생일이다. 그들에게는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고 오직 오늘만 있을 뿐이다. 당장 배고픈 고통만 면하면 그만인 것이다.그러나 그들이라고 처음부터 거지족보를 갖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인생살이 어찌어찌하다보니 거지로 살아가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사람은 누구나 거지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때문에 거지를 사람이 아닌 거지로 보아서는 안된다. 세상에 속고 지쳐서 그리 된 것이지 처음부터 빈 뱃속이나 채우자고 살던 사람들은 아닌 것이다.거지 중에서도 ‘왕’자가 붙는 거지가 있다. 거지집단의 리더인 셈이다. 거지왕 그 까짓게 별 대수겠는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볼 일은 아니다. 아는 것이 많거나 주먹이 세거나 하다못해 배짱이라도 두둑해야 거지왕 노릇을 할 수 있다. 나름대로 자기집단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자기 희생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막사는 익생들이 무엇이 두려워 두목으로 모시겠는가. 전설의 거지왕 김춘삼의 일대기를 아는 사람이라면 거지집단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17대 국회에서 처음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성남 출신 이상락 전 의원이 별명이 ‘거지대왕’이다.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그는 구로공단에서 공원으로 일하다 1980년 경기도 성남으로 이사와 목수·노점상·포장마차꾼 등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 그는 자기 앞가림 조차 어려운 가운데서도 빈민운동에 온 몸을 던졌다. 당시에 자신을 따르던 거지들이 붙여준 별명이 거지대왕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자신의 학력은 고졸이라고 내뱉은 말이 씨가 돼 결국 허위학력기재혐의로 의원직을 잃고 1년의 실형까지 살게 됐다. 차라리 학력 콤플렉스를 털어버리고 나는 거지대왕이라고 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텐데 못내 아쉬운 생각이 든다.
장난이란 원래가 나이가 적은 아이들의 놀음놀이다. 어찌보면 어리석은 놀이인 셈이다. 거기에서 실없이 하는 짓이나 못된 희롱으로까지 그 의미가 파생되었다. 또한 장난에는 재미가 내재되어 있으며 부담감이 없어 즐거움을 주지만, 큰 사고를 일으키기도 하고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기도 한다.'장난으로 한 일이 아이를 배게까지 한다'는 말까지 있으니, 별 뜻 없이 시작한 일이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장난에 수식어가 덧붙여지면서 흙장난, 글장난, 물장난, 불장난, 말장난 등의 말들이 사용되기도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각별히 주의해야할 것이 있다면 바로 말장난이다. 말은 의사의 전달의 도구이지만 말을 내뱉은 사람에게 결과가 되돌아온다. 지혜로운 자라면, 말의 결과를 미리 알고서 말을 할 것이다. 말을 잘못 다스려 살아가면서 적을 만들고 그로부터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다.사람들은 타인들에게 수 없는 말장난을 아무 거리낌없이 늘어 놓기에 세상이 매우 복잡하기도 하다. 스스로는 재미로 하는 말이지만 상대방은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급기야 불란을 자초하기도 한다. 말장난이 도를 지나쳤음을 깨닫고 수습하려할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후회감이 느껴지면 이미 말의 결과가 심한 후유증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말 실수를 한 경우에는 벌어진 현상이 자업 자득임을 인정하고, 조기에 수습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쓸데없는 자존심이나 과거에 얽매여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후회가 덧붙여질 뿐이다.말과 행동은 일치해야 말장난이 되지 않는다. 언행이 일치되지 않으면 맥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래서 선현들은 언행일치를 그렇게 강조해왔다. 요즘 정치권에는 말장난으로 국민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 듯하다. 정치인들 스스로 상대의 말을 말장난이라고 지칭하며 험담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입으로 무슨 일을 못하랴. 말장난은 그만두었으면 한다. 더군다나 행동 또한 말장난에 못지 않게 가관이니 어울리긴 어울리는 편이다.
사람은 운명적으로 탄생과 결혼 그리고 죽음이라는 세가지 큰 사건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가지 사건을 ‘인간3대지사’라고 한다. 이 중에서도 탄생과 죽음은 인간 의지와 무관하게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불가항력적으로 받아들이지만, 결혼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스스로의 운명과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것이어서 심사숙고를 거듭한 끝에 결정을 한다.결혼이란 ‘불완전한 두 개체가 만나 하나의 성숙한 그리고 완전한 개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라는 전제를 인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혼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의 전주곡이 될 수도 있다. 가장 가까 우면서도 먼 사이, 먼 것 같으면서도 가까운사이, 가장 이해관계가 많으면서도 가장 이해관계가 없는 사이가 부부이기 때문에, 상대를 위해 항상 빈공간을 마련해놓지 않으면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위험한 사이가 된다는 말이다.우리나라 이혼율도 이제 장난이 아니다. 통계청 자료(1년간 총 이혼건수÷총결혼건수)를 단순 비교하여 우리나라 이혼율이 세계 최고수준인 47.4%를 기혹했다고 허풍을 떤 발표가 있었으나 이는 계산법이 잘못된 것이고, 혼인경력자의 총 이혼회수를 총 혼인회수로 나눈 9.3%가 제대로 산정한 이혼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요즘 신세대 부부 이혼율이 27%에 육박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도 이제 이혼선진국에 진입하는 것이 아닌가 은근히 걱정이 된다.쇼펜하우어는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고 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어떻든 결혼은 하고 볼 일이다. 만일 좋은 아내를 얻는다면 두배로 축복을 받을 것이고, 반대로 나쁜 아내를 만난다면 철학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또 키에르케고르는 “결혼은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한다. 그렇다면 하고 후회하는 것이 안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대철인들이 갈파한 결혼관인데도 결혼에 대한 관점은 분분하다.바야흐로 결혼시즌이다. 혼기를 맞은 청춘남녀들이 제짝을 찾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면서 꿈에 부풀어 있다. 그러나 꿈만 꾸다가 현실을 놓치게 되면 머지않아 빈 껍데기만 남게 된다. 결혼 자체가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책임도 더 커진다는 말이다. 혼례식을 치른 이땅의 신혼부부들은 결혼의 참된 의미를 되새겨 부디 ‘축 결혼’이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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