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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인 부부 정찬호 김영오씨가 극단을 만들어 첫 무대를 올린 것은 2004년 늦가을이었다. 20대에 연극을 시작했으나 잠시 외도했던 남편을 다시 불러 함께 연극판으로 다시 돌아온 지 10년. 부부가 함께 만든 극단 '재인촌 우듬지'는 창단한지 2년만에야 '지워진 정여립'을 무대에 올렸다. 연극배우 출신인 남편 정씨가 처음 희곡을 쓰고 연출을, 극단 대표이기도 한 아내 김씨가 제작과 기획을 맡은 작품. 단원들도 대부분 연극무대에 처음 서는 신인들이었다. 아마추어의 틀을 벗지 못한 단원들과 씨름하며 만들어낸 첫 작품에 대한 평은 엇갈렸다. 격려보다는 우려와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부부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새롭게 그려내는 맨바닥으로부터 더 큰 의욕과 희망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2008년 7월, 전주 한옥마을과 동문거리로 이어지는 거리에 소극장이 문을 열었다. 전용면적 60여 평, 일부 공간을 연습실로 사용하고 남은 면적에 만든 극장은 60여명 관객만 들어서도 꽉 차는 아주 작은 규모였다. 소극장 이름은 '우듬지'. '연극을 하려고 극단을 만들었지만 대관료 부담 없이 공연할 수 있는 공간'을 찾지 못했던 부부의 오랜 소망이 이어낸 결실이었다. 지난해 11월, 서울의 대학로 한 소극장에서 40일 장기공연에 나선 지역극단이 화제가 됐다. 로맨틱 코미디로 장기공연에 나선 극단은 '재인촌 우듬지'. 역시 부부의 새로운 도전이었다. 공연작품은 이미 전주 우듬지소극장에서 장기공연으로 이름을 높인 '오래전 愛'와 '아주 치명적인 두여자'. 12월초까지 이어진 서울 대학로의 장기공연이 성공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재인촌 우듬지'가 또 새로운 일을 벌인다는 소식이 들린다. 대학로에 자체 소극장을 만드는 계획이다. 사실 지역 극단의 서울공연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듬지의 대학로 공연도 문광부와 한국소극장협회가 공모한 공연장 대관 지원사업에 선정되었던 덕분이었다. 때문에 여전히 열악하기 만한 연극판의 현실만으로 보자면 우듬지의 도전은 무모하게 보인다. 그러나 돌아보면 재인촌 우듬지의 선택은 언제나 '무모한' 도전의 연속이었다. 주목을 끄는 것은 그들의 도전이 늘 실현되었다는 사실이다. 여전히 열악하기만한 지역문화판에서 서울에 소극장을 열고 전주의 우듬지소극장에서 더 새로운 소극장 운동을 벌이겠다는 우듬지의 존재는 빛난다. 그들의 새로운 도전에 박수를 보낸다.
MB정부에서 경찰청장을 지낸 조현오씨가 지난 주 징역살이에서 잠시 풀려났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2단독이 지난 2월28일 '방어권을 보장하겠다'며 조 전 청장의 보석을 허락했다. 2월20일 재판에서 법정구속 된 후 9일만이다. 보석금 7000만 원을 낸 조 전 청장은 거주지를 벗어날 수 없고, 외국에 나가려면 법원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가 2월27일 비공개로 진행된 보석 심문에서 "징역을 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명예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변호인측도 "사회적 지위를 고려하면 도주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고 방어권 보장을 위해서라도 보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경찰 총수를 지낸 사람이니, 사회적 지위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징역사는 것보다 명예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 부분은 이해하기 힘들다. 본인의 말 한 마디 때문에 세상이 어지러워졌다. 게다가 기소돼 법정구속까지 됐으니 이미 명예를 잃었지 않은가. 조 전 청장은 서울경찰청장 시절 400여명의 기동대장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바로 전날 10만원권 수표가 입금된 거액의 차명계좌가 발견돼 노 전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렸다"고 말했다. 그는 이 말 때문에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됐다. 1심은 "피고인이 지목한 계좌는 노 전 대통령의 차명계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막중한 지위를 망각하고 수백명 앞에서 행한 강연에서 경솔하게 허위사실을 공표한 책임이 있어 실형이 불가피하다"며 징역 10월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조 전 청장이 즉시 항소했기 때문에 유죄 여부는 재판부의 최종 판결을 기다려 보아야 한다. 문제는 경찰청장까지 지낸 인사가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지 않고 '고인의 명예를 훼손할 의도가 없었다'등 변명으로 일관하는 점이다. 그가 공무원 신분으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발언을 한 것 자체가 큰 허물이다. 게다가 그 발언 내용이 허위사실이고, 명예가 훼손됐다는 상대측의 반발 등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지 않은가. 법에도 인정이 있다. 재판부는 '반성하고, 피해가 복구됐고, 피해자와 합의했고…' 라며 형을 감경해 준다. 징역살이 시키는 것이 능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입 밖으로 튀어나간 말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말은 잘 생각한 뒤 똑바로 말해야 한다. 그래야 명예를 지킬 수 있다.김재호 논설위원
안철수 전 서울대교수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대선날 미국으로 출국했던 안 전교수가 지난 3일 측근인 송호창의원의 입을 빌려 서울 노원병 보궐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밝히면서부터다. 그의 정계 복귀는 시기만 남아 있었다. 타이밍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출마에 가장 민감한 쪽은 정치권이었지만 그 보다 호남 사람들의 관심이 컸다. 요즘 박근혜정권이 출범했지만 호남 사람들은 심드렁한 분위기다. 과거 박정희정권으로 회귀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만 무성하다. 성시경(성균관대 고시 경기고 출신)고육당(고시 육사) 따위의 비아냥만 쏟아진다.도민들이 13.2%밖에 표를 안줬지만 박 정권이 선거 때 국민대탕평을 유난히 강조해 조각 당시부터 실날같은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결과는 역시나였다. 임기 내 큰 기대를 가질 수 없다는 분위기로 돌아섰다. 선거 때 지지자들 중심으로 하는 게 인사탕평이 아니다. 그건 승자들이 전리품을 나눠 갖는 것이나 전혀 다를 바 없다. 이 같은 상황속에서 민주당은 지지자들로부터 더 멀어졌다. 선거 패배에 따른 책임 짓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5.4일 전당대회서 누가 당권을 잡느냐만 신경쓰고 있다.정부조직법을 놓고 새누리와 민주당이 다투는 걸 보면 부아가 치민다. 여야가 똑같이 국민을 실망시켜 안철수 현상이 유효하다는 걸 느낄 뿐이다. 국민들은 안철수 전 교수를 좋아하는 측면도 있지만 안철수 현상에 더 관심이 많다. 기존 정당에 큰 기대를 걸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여야의 무기력한 정치가 안 전교수의 구원 등판을 빨라지게 했다. 지금 도민들은 당권 투쟁만 일삼는 민주당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 이 사람들 한테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다는 생각들이다. 대선 패배 후 환골탈태는 커녕 친노 중심으로 기득권을 지키려는 모습에 역겨움이 난다는 것이다.도민들 가운데는 안철수 전 교수의 정계복귀 조건으로 4.24 재보궐 선거 때 서울 노원병보다 부산 영도로 가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박근혜 캠프에서 총괄본부장을 맡았던 김무성과 한판 붙어서 승리해야 큰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야 안 교수를 중심으로 한 신당창당도 빨라지고 정국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것. 도둑놈을 신고한 노회찬 전 의원이 사법살인으로 국회의원직을 잃었기 때문에 그 지역구를 안 전교수가 들어가면 안된다. 백성일 주필
"우리나라 어느 지역을 가건 이웃 마을로 놀러가던 마실길이 있고 나물 캐러 가던, 과거 보러 가던 길이 남아 있다. 자동차와 열차가 생기면서 잊히고 사라졌던 그 길을 다시 찾고, 잇고, 사람들이 걷기 시작한다면 아름답고 역사적인 새 길이 만들어질 것이다."'우리땅 걷기 모임'의 신정일 이사장은 '쓰리 고' 주창자다. 그는 "고스톱을 못 치지만 길을 '찾고 잇고 걷고', 그래서 '쓰리 고'만 하면 돈을 가장 적게 들이면서도 아름다운 길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많은 사람들이 내게 왜 걷느냐고 묻는다.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냥 빙그레 웃기만 할 때가 있다. 왜 걷는가. 길이 앞에 있기 때문에? 시간이 남기 때문에? …걷다 보면 다른 생각, 다른 이야기들이 불쑥 만들어지는 것, 그것이 산천유람의 매력이다." 신 이사장이 자신의 책 '길에서 행복해져라'에서 한 말이다. 2011년 4월 전 구간이 개통된 부안 변산 마실길은 신 이사장이 제안해 이뤄진 '쓰리 고'의 산물이다. 없어졌던 길을 찾고 닫혔던 길을 이어 만들었다. 해안 8개 코스(66㎞)와 내륙 5개 코스(74㎞) 등 모두 13개 코스(140㎞)다. 산과 들과 바다가 함께 함으로써 제주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을 합쳐 놓은 것 같은 분위기를 띤다. 새만금전시관∼고사포∼격포∼궁항∼모항∼왕포∼곰소염전의 해안코스가 백미다. 바닷가 백사장을 걷다가 갯바위를 타고 넘기도 하고 산과 들길을 따라 걷기도 한다.그런데 지난 주말 전문가 등과 함께 답사한 변산 마실길(격포∼모항간 14㎞)은 옥에 티랄까 부족한 게 많았다. 쓰레기가 널려 있었고 공중 화장실은 지저분했다. 간이 화장실도 턱 없이 부족했다. 일부 공사 구간은 차단된 채 대체 길이나 안내 표지판도 없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데 파전에 막걸리, 해삼 멍게에 소주 한잔 파는 곳도 없었다. 곳곳에서 먹거리와 지역 산품을 팔면서 주민소득과 연계하고 있는 지리산 둘레길이나 제주 올레길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해안 초소는 단장만 제대로 하면 역사와 쉼터의 훌륭한 공간이 될 법도 한데 폐가처럼 흉물로 방치돼 있었고…. 변산 마실길은 '쓰리 고'만 있었지 산천유람의 낭만을 찾기엔 보완할 게 너무 많았다. 세심하지 않으면 뻥뻥 뚫린다. 김호수 부안군수가 직접 점검해야 할 것 같다. 이경재 수석논설위원
판소리 명창들의 얘기는 흥미로운 게 많다. 그 중 순창과 관련해 내려오는 에피소드 2가지를 최근 발행된 '옥천골 순창이야기'(순창공공도서관 펴냄)에서 재미있게 읽었다. 순창은 명당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고, 지금은 명맥을 잇지 못하고 있으나 명창들도 꽤 많이 배출한 고장이다.첫번째는 서편제의 시조인 박유전 명창 얘기. 박유전은 어려서부터 애꾸눈으로 집에서 천덕꾸러기였다. 소리꾼이었던 부친은 당초 형을 명창으로 기르려고 했다. 그래서 순창군 복흥면 서마리 마재마을 집에서 김세종 명창이 사는 동계면 가작 쑥대미까지 찾아 다녔다. 한달에 한번 가는데 그때마다 부친은 선물과 음식을 장만해 박유전으로 하여금 지게 바작에 짊어지도록 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박유전은 짜증이 났다. 등에 진 짐이 무거운데다 자신의 신세가 한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형은 소리 선생이 가르쳐 주는 내용을 숙달을 못해 혼쭐이 나곤했다. 이를 지켜보다 못해 답답한 박유전이 부친에게 청했다. "아버지, 제발 소원이니 저도 김세종 명창 앞에서 소리 한번 하게 해 주세요." 그러자 부친이 "소리가 장난인 줄 아느냐?"면서 마지못해 허락했다. 형을 물리치고 김 명창 앞에 앉은 박유전은 춘향가 중 이별가 대목을 장단 하나 틀리지 않고 불렀다. 평소 형이 하던 소리를 듣고 반복해서 따라했던 것이다. 더욱이 그동안 가슴에 맺혔던 울분과 서러움을 소리에 실어 토해내니 김세종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결국 박유전은 김세종에게 배운 동편제 소리에다 한이 서린 계면조와 통성덜미소리, 새소리, 귀곡성을 혼합해 새로운 창법을 개발해 냈다. 두번째는 장재백 명창 얘기. 남원 주생리 내동 출신으로 순창 임동리 장구목에서 살았던 장재백은 조선 8도 명창대회에서 장원을 했다. 그러자 판소리를 좋아했던 흥선대원군이 그에게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장재백 명창은 자신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이렇게 답했다. "우리 같은 천인계급인 광대들도 사후에 봉분(封墳)을 지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 후 조정에서는 소리꾼들도 봉분을 지을 수 있도록 했다. 장 명창이 그들의 신분을 양인(良人)으로 격상시키는 신분 해방운동을 한 셈이다. 이같은 스토리텔링은 일부 과장되거나 오류가 있을 수 있으나 지역문화를 풍성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조상진 논설위원
전주는 전통문화의 생활화, 산업화, 세계화를 주도할 수 있는 도시로 꼽힌다. 전주가 지닌 문화적 정체성 덕분이다. 외국인들이 전주를 다시 방문하고 싶은 곳 1위로 꼽는 이유도, 전주한옥마을에 잃어버린 한국적 정서를 찾고 싶어 하는 관광객들이 몰리는 이유도 이런 특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전주를 전통문화체험교육의 도시로 만들어야한다는 제안이 다시 부상하고 있다. 사실 이 제안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전주전통문화도시조성위원회가 발의했던 '전통문화체험교육관' 건립은 단적인 증거다. 당시 조성위원회를 이끌고 있던 이종민 전북대 교수는 "전주가 '전통문화중심도시'를 내세우며 국가가 할 일을 대신하겠다고 나섰을 때 다짐한 가장 중요한 명분 또한 한민족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기 위한 한국전통문화체험교육의 중심지가 되겠다"는 것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실제 전통문화체험교육관 건립은 정부와 약속했던 5대 핵심사업이었다. 그러나 전주시가 3개 문화관 건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아쉬움은 그래서 크다. 세계화의 구호가 여전히 대세인 시대, 문화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하는 지금 같은 때일수록 전통문화는 더욱 중요하다. 그 민족의 고유한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핵심적 근거이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우리의 전통문화는 민족정체성의 표상이자 자긍심의 동력이었다.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민족적 정체성을 갖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전통문화를 체득하게 하는 일이 우선이다. 새롭게 우리사회의 구성원이 된 다문화 가정이나 자신들의 뿌리를 알고 싶어 하는 해외동포 자녀들에게도 전통문화 체험교육은 꼭 필요하다. 전주에 전통문화체험교육관을 만들자는 제안에 귀를 기울여야하는 이유는 그래서다. 물론 전주에는 이미 많은 체험교육시설이 있다. 문제는 그 시설들의 규모가 너무 작아 급증하고 있는 체험교육 수요를 충족시켜줄 수 없다는데 있다. 실제 한옥마을을 찾았던 수학여행단이나 기업 연수 단체들 중에는 체험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예가 적지 않다.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를 내세우는 안동에는 국학진흥원과 연계된 국학문화회관이 있다. 대규모 숙박시설이지만, 수학여행단이나 일반 단체의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는 시설을 함께 갖추었다. 물론 활용도가 높다. 전주는 안동과 또 다르다. 2-3년 사이 전주를 찾아오는 관광객 수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그만큼 체험교육 수요도 차고 남지 않겠는가.
옛 소련이 인류 최초로 인공위성 스프트닉 1호 발사에 성공한 것은 1957년이었다. 이에 냉전 라이벌 미국도 우주개발에 공격적으로 나섰고, 달 착륙에 먼저 성공했다. 암스트롱은 1969년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후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유인 우주왕복선 시대까지 연 그동안의 우주개발 경쟁은 미국과 러시아 양자대결이었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우주개발주체가 다변화됐다. 유럽연합과 중국, 일본, 인도, 이스라엘, 브라질 등 신흥 우주강국들이 등장했다. 대한민국도 지난 1월30일 과학위성 나로호 발사에 성공하며 우주시대에 합류했다. 미국은 2001년 우주 탄생의 비밀을 밝히고 우주 전체의 지도를 작성하기 위해 극초단파 탐사선 SMAP를 발사했고, 2006년엔 명왕성 탐사선 뉴호라이즌호, 2007년엔 화성탐사선 피닉스호를 발사하는 등 다양한 우주 개발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미국은 2025년 달 유인기지를 건설하고, 2030년 유인 화성탐사를 계획하고 있다. 러시아도 2000년대 들어 매년 16개 전후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만큼 적극적인 우주개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러시아 기업 'ISS-Reschetnev'는 세계 위성 제조시장 점유율 1위이고, 러시아의 연간 로켓 발사 횟수도 매년 1위다. 2010년에는 무려 31번이나 쏘아 올렸다. 이는 세계 로켓 발사의 42%에 달한다. 1974년 출발한 유럽우주국(ESA)도 1998년부터 2003년까지 113번이나 위성을 발사하는 등 세계 상업위성 발사 시장의 50%를 점유하고 있다. ESA는 태양탐사선인 '솔라오비터'를 2017년까지 발사하고, 2025년엔 화성 유인탐사선을 발사할 계획이다. 중국은 2003년 10월 세계 세 번째로 유인우주선 '선저우 5호'를 발사, 우주개발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이밖에 일본과 인도, 이스라엘, 브라질 등의 우주개발 계획도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흐름이라면 우주 여행도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최근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2013년도 상반기 국가연구개발사업 예비타당성 조사 대상사업 선정을 위한 기술성 평가'에서 전북이 신청한 '항공 우주산업용 초고강도 복합재 개발사업'에 대해 적합 판정을 내렸다는 소식이다. 전주기계탄소기술원이 국내 최초로 시작한 탄소섬유기술이 우주개발의 핵심기술이 될 날도 멀지 않았다. 김재호 논설위원
화무십일홍 인불백일호(花無十日紅 人不百日好) 권불십년(權不十年). 달이 차면 기운다. 임기내 기세등등했던 MB도 한 시민으로 돌아갔다. 광주사태를 일으켜 무고한 백성의 생명을 수없이 앗아간 전두환 노태우도 성공한 쿠테타를 일의켰지만 역사의 단죄를 받았다. 12.12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은 한때 영구집권을 획책했으나 백담사로 쫓겨가는 신세가 됐다. 지금은 전재산이 29만원밖에 없는 독재자로 낙인 찍힌채 살아간다.권력자 주변에는 호가호위(狐假虎威) 하는 사람이 많다. 집안 단속을 잘 한다 해도 각종 이권과 인사에 개입해 말썽을 빚은 사례가 많았다. 대통령 하나에 힘이 쏠려 있어 항상 주변에 부나방들이 몰려들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직·간접으로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가 1만개가 넘는다. 과거 같으면 이 자리를 꿰차기 위해 죽기살기식으로 선거운동을 해 전리품처럼 나눠 가졌다. 그래서 꿀맛 본 사람들이 많았다.세상 모든 것이 영원한게 없다. 임기제 자리는 더 그렇다. 막상 그 자리에 앉으면 생각을 달리해버린다.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초심을 잃기 때문이다. 예쁜 꽃일수록 꽃잎이 지고나면 추하다. 목련이 필 때는 얼마나 화사한가. 시들 때 목련은 추잡하기 그지없다. 꽃은 그 붉음이 열흘을 넘기지 못하다는 말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도내서도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겁없이 사는 사람이 있다. 단체장 주변에서 무슨 큰 힘이라도 있는 양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주변서 손가락질 하는줄도 모르고 목에다 잔뜩 힘만 주고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25조원을 들여 4대강 사업을 밀어부쳐 국민들로부터 불신을 사온 MB도 자신에 대한 평가를 역사에 맡긴다며 권좌에서 내려왔다. 대통령도 국민들로부터 존경 받지 못하고 돌아오면 초라한 판인데 하물며 지방에서 무슨 문고리 권력이라도 잡고 있는 양 착각한채 세상을 사는 한심한 몰골들이 있다. 민선이라해서 마냥 무소불위의 힘을 쓰는 자리라고 생각하면 그건 착각이다.이쯤해서 고려말 나옹선사의 시 한수가 생각난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예나 지금이나 정직하고 깨끗하게 사는 게 최상이다. 인사청문회와 MB의 귀환을 보면서 새삼 권불5년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백성일 주필
김능환(62) 전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의 청빈한 삶이 새삼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작년 대법관 퇴임 당시 재산은 2억원이었다. 고위 공직, 공권력의 핵심이면서도 30평짜리 아파트 한 채가 전부다. 형편이 어려운 직원 변호사 비용으로 1000만원을 보태주기도 했다. 퇴임 후 억대 연봉이 보장된 대형 로펌의 유혹도 뿌리쳤다. 국무총리 후보로도 거론됐지만 "대법관 출신이 행정부에서 요직을 맡는다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공개적으로 거절했다. 현대판 청백리의 표상이자 이 시대의 진정한 선비다. 부인 김문경씨는 채소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남편이 공직을 그만 둔 뒤에야 비로소 남편 퇴직금으로 가게를 열었다. 뭔가 해보고 싶었고 사람들과 만나고 싶어 가게를 열었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도 청빈한 공직자들이 많았다. 선조때 무훈을 세워 받은 상금을 부하와 똑같이 나눈 장필무(張弼武), 냇가에서 지방관리를 업어서 건넨 영조때의 판서 이문원(李文源), 향시 합격자 명단에 자기 아들이 들어가 있자 아들 이름을 지워 버리고 발표한 세종 때의 함길도 관찰사 정갑손(鄭甲孫) 등의 감동적인 일화가 있다. 성종 때 덕천군수를 지낸 양관(梁灌)이란 자에 대한 모함이 있자 임기를 끝내고 집에 돌아가는 그를 급습해 조사했더니 짐 보따리에 '소학(小學)' '두시(杜詩)' 등 책 몇권만 나왔다는 일화도 있다('청백리 열전'). 황희 맹사성 유성룡 이원익 이항복 등 청빈했던 재상도 17명에 이른다. 예나 지금이나 지도층 인사에게 필요한 건 도덕성이다. 그런데 국정을 운영할 리더들이 한결같이 탐욕적이다. 병역면제, 부동산투기, 위장전입, 논문표절, 세금탈루, 편법증여, 급여 부당수령 등등. 몇몇을 빼곤 예비 재상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진자리 피하기 명수인지, 재산축적의 달인들인지 신기할 따름이다. 병역비리, 부동산투기, 위장전입은 대한민국 재상이 되기 위한 3대 필수조건처럼 돼버렸다. 박근혜 정부가 어제 국무총리와 장관도 없이 출범했다. 장관 인사청문회가 27일부터 3월6일까지 열린다. 국무총리나 장관은 전문성만으로는 안된다. 도덕성에 흠결이 없어야 한다. 정치적 상징성이 크고 국민 신뢰가 중요한 탓이다. 신뢰가 없으면 영(令)도 제대로 설 수 없다. 청문회의 핵심은 검증이다. 늦었을 망정 쫀쫀히 검증해야 한다. 이경재 수석논설위원
김제는 옛부터 이름난 고승(高僧)이 많이 난 곳이다. 그 중에서도 만경읍이 특히 그랬다. 미륵신앙과 관련된 진표율사(718-?)·부설거사(647-699)·진묵대사(1562-1633)가 그 분들이다. 이들은 부처님의 뜻을 이적(異蹟)으로 나타내 보이며 민중의 희망으로 떠오른 스님들이다.그리고 최근세에는 한국 불교계의 대선사이자 최고의 학승이었던 탄허(呑虛 1913-1983)스님이 유명하다. 스님 역시 만경읍 출신이다. 스님은 유·불·선에 달통했으며 원효·의상 이래 최대의 불사로 꼽히는 '화엄경'을 우리 말로 번역했다. 한자 100만 자에 이르는 불경의 정수 '화엄경'원본 80권과 대의(大義)와 해석이 담긴 '화엄경론' 40권, '화엄경소초' 150권을 하나로 합쳐 '신화엄경합론'이란 제목으로 발간했다. 6만2500자 분량이다. 이 방대한 작업을 위해 새벽 2시에 일어나 17년간 매일 원고지 100장씩 번역하는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또 조계종 초대 중앙역경원장으로 '8만대장경' 번역에도 공을 세웠다.스님은 불교 뿐 아니라 유교·도교·주역 등에도 막힘이 없었다. 해방 후 함석헌과 양주동 박사에게 장자를 가르친 적이 있다. 자칭 국보(國寶)라고 했던 양 박사는 1주일간 장자 강의를 듣고 10살 어린 탄허에게 오체투지로 절을 올렸다.이와 함께 스님은 예지력이 뛰어났다. 월정사에서 수행하던 1949년, 개미들이 서로 싸워 법당과 사자암 뜰에 수백 마리씩 죽어 있었다. 이를 본 스님은 6·25 전쟁이 터질 것을 알고 상좌들을 미리 부산으로 피난시켰다. 1968년에는 울진ㆍ삼척 무장공비 침투 한 달 전에 이를 예감하고 장서와 번역 원고들을 강원 삼척 영은사로 옮겨 화를 면했다. 월남에서 미국이 물러나게 될 것과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를 예견하기도 했다.스님은 일본 침몰설과 서해안 융기설, 그리고 남북의 통일 등 한반도의 융성을 예언했다. 서해인반조(西海人半朝·서해안 사람들이 조정의 반절을 차지한다)라는 예언도 남겼다. 또한 종교인으로는 드물게 정치인의 자질과 역할,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25일은 스님 탄신 100주년이다. 조계종과 오대산 월정사를 중심으로 지난 해 부터 내년까지 각종 행사가 벌어지고 있다. 혼돈의 시대에 그의 가르침이 등불이 되었으면 한다. 조상진 논설위원
문화공간을 통해 도시를 살리는 도시재생프로젝트가 여전히 대세다. 세계의 수많은 도시들이 산업화와 근대화과정, 정치 경제 중심의 개발사업과 도시재편이 가져온 도심 공동화와 슬럼화, 인구유출의 악순환 치유에 나섰기 때문이다. 독일 베를린은 일찌감치 부터 기존 공간의 리모델링을 통해 도시재생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성공시킨 도시로 꼽힌다. 그 중의 하나. 관광객들이라면 누구나 흥미로울 아주 작고 오래된 공간이 있다. 베를린 크레우츠버그에 있는 '발하우스 콘서트홀'(Ballhaus Naunystrasse)이다. 발하우스의 전신은 사교댄스장. 19세기 베를린의 대표적인 사교댄스장이었던 건물을 1983년에 복원해 공연장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양식은 역시 원형 그대로 남겨두었다. 덕분에 발하우스는 화려하게 리모델링된 재생공간들과는 달리 낡고 비좁은 구조가 특징이다. 건물 자체의 구조적 한계로 인해 비밀통로와도 같은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 불편함이 크지만, 삐걱거리는 계단 사이로 실험음악가들이 설치해놓은 파이프 연주기계나 지하의 소박하고 작은 바(bar), 꾸미지 않고도 낭만적인 분위기의 야외정원은 특별하다. 무도장을 바꾼 음악당은 객석이라고 해봐야 100여석이 전부. 규모는 작지만 베를린안의 자유로운 예술가 그룹의 창작무대로, 국제예술 무대로 활발하게 활용되고 있다. 공간의 규모와 관계없이 오랫동안 전문적인 운영체제를 지켜온 것도 발하우스의 특징인데, 베를린 이주문화를 대표하는 연극, 음악회와 댄스, 퍼포먼스와 설치, 클래식과 현대음악 콘서트 등 다양한 프로그램은 수익면에서도 성공적인 사례를 남기고 있다. 전체 운영비의 3분의 1정도를 이들 프로젝트 운영으로 충당할 수 있을 정도다. 특히 2007년 진행한 뮤직 페스티벌 'interface07'은 각종 사운드디자인과 비주얼아트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는 베를린과 로스앤젤레스의 문화교류를 이끌어냈다. 얼마 전부터 전주 한옥마을과 인접한 동문거리 일대가 새롭게 변신하고 있다. 낡은 건물 지하에 소극장이 들어서고, 낡고 오래되어 쓸모없어 보이던 비좁은 건물들에 친근하고 아름다운 디자인의 옷을 입은 다양한 공간들이 들어서고 있다. 무조건 부수고 새로 짓는 개발논리의 성찬에 더 이상 마음 두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반가운 일이다. 이제 더 중요한 과제가 생겼다. 그 공간들의 활용 가치를 높이는 일이다. 물론 지역주민들의 관심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위그선은 바다 위 1∼5m 고도에서 시속 200㎞에 달하는 고속 선박을 말한다. 러시아가 1960년대부터 군사용으로 소형 위그선을 개발했다고 하지만 현재 미국과 독일 등 기술 선진국에서도 상용화할 만한 위그선을 만들지는 못했다. 초고속에 따른 안전이 담보되지 못했기 때문이다.'바다의 KTX'로 불리는 위그선은 수면 1∼5m 공중에서 날기 때문에 연료 소비도 일반 선박 대비 3분의 1도 안된다. 위그선은 국내 시장만 1조원을 웃돌 것으로 잠정 예상되는 대형 기술이다. 정부는 물론 충남과 경남 등 해안을 끼고 있는 자치단체들이 앞다퉈 위그선에 관심을 갖는 이유다. 3년 전 군산에도 윙십중공업이 위그선을 제작하겠다며 입주했다. 윙십중공업은 세계 최초로 50인승 위그선을 만들어 상용화하겠다고 밝혔다. 윙쉽중공업이 50인승급 위그선을 만들어 군산에서 진수식을 가진 것이 지난 2011년 10월이었다. 50인승 위그선을 제작해 진수한 것은 세계 최초라고 했다. 다른 지역은 5∼8인승에 불과하다. 지난해 7월 경남 사천 앞바다에서 추락한 위그선도 소형이다. 윙쉽의 50인승급 위그선 기술력은 최고 수준인 셈이다. 이런 가운데 오션익스프레스는 지난 2011년 2월 위그선을 이용한 여객운송 사업 면허(조건부)를 내고 군산에서 제주를 오가는 사업 구상을 밝혔다. 그러나 위그선 사업은 이상하게 돌아갔다. 윙쉽중공업측은 자본력 부족을 내세워 도민들이 투자해 줄 것을 바랐다. 50인승 위그선이 제대로 수면에 떠서 안전하게 비행에 성공했는지 여부는 제대로 밝히지 않은 채 기술력만 내세웠다. 도민들은 신기술에 대한 투자 전문가도 아니다. 기술력만 알려졌을 뿐 해당 기술이 적용돼 생산된 제품의 완성도에 대한 정보나 완제품을 직접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투자하기란 난감한 일이다. 군산∼제주간 위그선 사업자가 선정되고 취항에 따른 행정 업무가 진행됐지만 실패했다. 정작 안전성이 담보된 위그선이 없는데다 위그선이 이수·착수할 계류시설 조차 만들어지지 않았다. 영국 로이드 선급으로부터 안전인증도 획득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여객선박으로 등록도 안됐다. 군산항만청은 최근 오션익스프레스가 위그선 취항을 위해 취득했던 해상여객운송사업면허를 반납함에 따라 이 면허를 취소했다. 위그선은 성공해야 할 좋은 사업 아이템이다. 하지만 고속 비행에 따른 선체와 여객의 안전성이 인증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헛물을 켜도 너무 켰다.
벌써 계사년 50일이 훌쩍 지나갔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이 실감난다. 지난해 대선서 상실감을 맞본 도민들이 앞으로 무슨 기대를 갖고 살아야할지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시간이 약인 것 같다. 원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에 잊고 산다. 도민들이 박근혜 당선인에 13.2%라는 표를 안기면서 그가 선거 때 약속한 지역균형발전과 고른 인재등용이 이뤄질 것으로 내심 기대를 걸었다.그러나 결과는 아니올씨다였다. MB정권때와 똑같은 판박이 인사가 되고 말았다. MB도 조각 때 서울 출신인 유인촌을 짜맞추는식으로 전북으로 분류했지만 유 장관은 무늬만 전북이었다. 진영 복지부장관 후보자의 본적이 고창이지만 현직 판사로 있을 때 본인이 기재한 '법조인대관' 본적란에는 서울로 돼 있다. 서울 용산에서 3선한 진 장관 후보자도 유인촌 장관과 같은 케이스다.전북은 조각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됐다. 승자독식주의가 판치지만 박 당선인이 공약으로 내건 사항과는 거리가 멀다. 전북 출신이 고위직에 발탁 안된 것은 능력 유무 보다는 박 당선인과 연결할 정치적 고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도민들은 박 당선인이 원칙주의자라서 선거 때 약속한 인사대탕평이 어느정도는 지켜질 것으로 생각했다. 지역감정을 해소시킬 적임자로 자처했고 본인 스스로가 국민행복시대를 열 국민대통합을 부르짖었기 때문이다.사실 전북은 지난 5년간 철저하게 소외됐다. 도의회가 전국서 가장 먼저 4대강사업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차별 받았다. MB는 겨우 신항만 착공과 새만금 산업용지 70% 확대 등 도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없는 사항만 해줬다. 자신에게 9%밖에 표를 안줬다해서 전북을 외면했다. 지난 5년간 정권이 전북을 외면한 바람에 전북은 무력증에 빠졌고 희망의 싹마저 꺾였다. LH를 경남 진주로 빼앗기면서 더 상실감만 커졌다.봄기운이 스며들지만 아직 전북의 봄은 먼 나라 이야기 같다. 칼 자루 쥔쪽이 전북을 배려하지 않는 한 전북은 희망이 없다. 그렇다고 자력갱생할 길도 마땅치 않다. 이 같은 상황에서 자존심까지 굽혀가며 지역정서를 새누리당 쪽으로 바꿀 수는 없지 않은가. 박 당선인이 성공한 대통령이 되도록 지켜 볼 수 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로 발전해 가는 정치제도인 만큼 도민들도 감성이 아닌 이성적으로 박 정권을 접근해야 할 것 같다. 백성일 주필
현대 미술의 대명사 피카소(Pablo Picasso). 그의 그림은 난해해서 이해하기 힘들다. 그의 전위적인 그림을 본 한 관람객이 이상한 그림에 화가 나서 피카소에게 쫓아가 물었다. "미술이 뭐냐?" 이에 대해 피카소는 이렇게 답했다. "미술은 돈입니다."그런가 하면 풍자작가 에프라임 키숀은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에 모두가 당했다."고 비웃었다. 그의 그림이 '사기'라는 것이다. 피카소 자신도 "나는 단지 나의 시대를 이해하고 동시대 사람들이 지닌 허영과 어리석음, 욕망으로부터 모든 것을 끄집어낸 한낱 어릿광대일 뿐이다."는 유언을 남겼다.피카소에 대한 독설은 여전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에도 그의 작품에 열광한다. 이유는 뭘까. 높은 명성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가치는 상식의 틀을 깬 파격과 창조의 힘이 아닐까 싶다. 그는 500년 동안 내려오던 원근법을 무너뜨렸다. 그 자리에 여러 시점을 한꺼번에 담았다. 소위 큐비즘(입체주의)이 그것이다. '아비뇽의 아가씨들'과 '게르니카'가 대표적이다.큐비즘의 정점에서 그는 끊임없이 변신을 시도하며 세계미술을 주도했다. 수많은 여인 위에 군림했던 것도 화제였다.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화가인 샤갈(Marc Chagall). 그는 현대미술에서 보기 드문 감성으로 사랑받는 작가다. 어렸을 적, 고향 러시아에서의 기억을 통해 꽃과 동물, 시골풍경, 신부와 여인 등을 자주 그렸다. '색채의 마술사'답게 그의 작품은 몽환적이다. 고향은 물론 소박한 동화의 세계와 하늘을 나는 연인들이란 주제를 즐겨 다뤘다. 자유로운 공상과 풍부한 색채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맑게 씻어준다. 두 거장은 92세와 98세까지 수를 누렸다.뒤늦었지만 '나의 샤갈, 당신의 피카소'전을 놓칠 수 없어 지난 토요일 전북도립미술관을 찾았다. 1주일 연장을 했는데도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아쉬운 것은 제목으로 내세운 두 거장의 작품이 전체 128점 중 20여 점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다행히 마네, 세잔, 몬드리안, 뒤샹, 그리고 전후 유럽미술과 팝아트 등으로 그 부족함을 채웠다. 어쨌든 과대포장된 측면이 없지 않으나 시골 미술관에서 이같은 기획을 했다는 점은 높이 살만하다.더불어 모악산의 정경과 경각산의 행글라이더, 안온한 구이호반까지 볼 수 있어 더욱 좋았다. 조상진 논설위원
"다음 인사 때는 꼭 사무관 승진시켜 줄테니 이번에는 양보해 달라." 이철규 임실군수(2001년 4월∼2004년 5월)가 사무관 승진을 앞둔 노모 계장을 불러 하소연했다. 계장은 마지못해 수용했다. 상대 계장은 이번에 승진하지 못하면 사무관 맛도 못 보고 퇴직할 처지였다. 그런데 문제가 터졌다. 이 군수에 대한 상대 계장의 금품 인사로비 사실을 자신의 부인이 언론과 검찰에 제보한 것이다. 수사가 확대되자 노모 계장은 자살했다. 이때 사무관 승진에 3000만원, 6급 승진에 2000만원 하는 이른바 승진 단가가 세상에 드러났다. 관가에선 인사 뇌물을 가장 안전한 뇌물로 친다. 상하 수직관계라는 조직의 특성상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누락되더라도 다음을 기다리며 인사권자의 처분에 맡길 수 밖에 없다. 목줄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잘릴 각오를 하지 않는 한 발설할 수도 없다. 인사권자는 터무니 없는 사람한테는 돈을 받지 않는다. 돈을 받았으면 실행한다. 인사가 뜻대로 안되면 받은 돈은 돌려준다. 그래야 탈이 안난다. 관가에 나도는 '뇌물의 정석'이다. 선출직들은 뇌물 유혹을 떨치기가 힘들다. 선거를 치를려면 많은 돈이 필요한 탓이다. 계약업무나 기업체 등에서 조달하는 것은 위험이 따른다. 장부 하나면 굴비처럼 줄줄이 엮이고 만다. 그래서 인사뇌물이 '안정빵'이다. 가진 재산이 없다면 뇌물의 유혹에서 더욱 벗어나기가 힘들다. 뇌물을 인사권자가 직접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행동대장'이 따로 있다. 인사 부서의 누군가가 돈을 받아 전달하기도 하고 선거캠프 출신이 외곽에서 악역을 맡기도 한다. 어쨌건 법을 떠나 부하 직원한테 인사를 미끼로 뇌물을 받아 먹는 건 찌질한 짓이다. 각설하고, 강완묵 임실군수한테 궁금한 게 있다. 작년 3월 공직자윤리위가 공개한 강 군수의 재산은 마이너스 2207만원이었다. 그런데 대법원 소송 때 선임한 변호사는 21명이나 된다. 변호사 비용은 어떻게 조달했는지, 또 무일푼의 정치인이 비용은 어디에서 조달해 선거를 치렀는지 궁금하기 이를 데 없다. 남의 돈으로 치른 송사, 선거 모두 짐이다. 임실에서는 인사 때마다 잡음이 일고 공갈 협박이 나돈다. 최근의 인사를 놓고도 잡음이 가시지 않는다. 강 군수가 팔장만 끼고 있을 상황은 아닌 것 같다.이경재 수석논설위원
흑백 사진 한 장. 저고리 고름이 찢겨 드러난 젖가슴을 가리는 일도 잊은 엄마와 맑은 눈망울의 아이가 거기 있다. 시간을 거슬러 만난 사고 현장은 참혹하다. 1966년 6월 6일 진안에서 전주를 잇는 곰티재에서 버스가 추락한 직후의 광경이다. 버스는 71명이나 되는 승객을 싣고 달리다 1백 미터가 넘는 골짜기에 추락했다. 15명이 사망하고 54명이 부상당했으며 버스는 산산 조각이 나서 흩어졌다.1977년 11월 11일 한 도시의 운명을 바꾼 이리역 폭발사고. 최악의 참사였던 이 폭발사고로 59명이 사망했으며 1158명이 부상을 당했고 1647세대 7800명이 집을 잃었다.도로 한복판에서 쫓기고 쫓는 자. 쫓기는 사람은 학생이고, 쫓는 사람은 전투경찰이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만난 현장은 숨가쁘다. 1980년 민주화 투쟁의 치열한 시위현장, 계엄령이 내려진 엄혹한 시대상황에서도 두려움에 떨지 않고 나섰던 청년들의 함성이 거기 있다.오늘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90년대 초입에도 슬픈 기억이 있다. 1993년 10월 10일, 292명의 목숨을 앗아간 부안 위도 서해훼리호 침몰 사건. 오열하는 유족들의 통곡이 서럽다.1950년 전쟁의 포화 속에서 창간한 전북일보가 최근에 펴낸 사진집 '기억'의 장면들이다. 1950년대부터 2009년을 잇는 60년 현대사에 놓인 풍경들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기억을 깨운다. 한국전쟁의 포연이 가시지 않은 50년대, 궁핍했던 60년대, 산업화에 눈떴던 70년대, 민주항쟁의 80년대, 변방으로 밀려난 90년대, 가능성과 희망의 2000년대까지 전북의 기억은 영욕의 궤적위에 고스란히 놓여있다.잊고 싶거나 잊고 싶지 않은 순간을 되살리는 사진의 힘은 크다. 사진가 정주하교수는 '사진은 자화(自話)하는 역사'라고 말한다. 무엇을 표현하든 우리에게 사실로서 각인되며 그 자체로써 역사를 담보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정교수의 말처럼 사진은 현재와 과거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며 결코, 우리의 삶에서 유리된 적이 없다.전북의 현대사 60년을 촘촘히 꿰어놓은 400여장의 사진 역시 역사가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운다. 역사는 기록으로 말한다. 아무리 자랑스러운 역사라하더라도 기록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정당한 역사로 서지 못한다. 사진으로 남은 '기억'이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전북의 역사'여야 하는 이유 또한 거기 있다.
'아이비 리그(Ivy League)'는 미국 동북부에 있는 최고 수준의 학문적 명성을 가진 하버드와 예일 등 대학 집단을 말한다. 아이비 리그처럼 나라마다, 지역마다 최고의 교육기관이 있고, 그 수준은 국가 경쟁력에 크게 작용한다. 우리나라에는 언제부턴가 이름이 붙여진 'SKY'가 있다. 이명박 대통령 때문에 나온 '고소영'의 첫 번째에 K대가 등장할 만큼 SKY는 유명세 만큼이나 부정적 이미지도 있다. '명문' 이미지에 '특권'이 덧칠된 탓이다. 하지만 지방은 물론 서울과 수도권 입시생들 조차 SKY는 못가도 수도권 삼류대학에라도 가기 위해 기를 쓴다. 그래서 나온 말이 '인 서울'이다. 맹모삼천(孟母三遷)이라는 말이 있다. 맹자 어머니 뿐 아니라 세상 모든 부모는 당연히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고 싶어 한다. 교육 여건이 좋다고 소문난 서울과 수도권 대학으로 보내고 싶어 안달이 난 사회 분위기가 증명해 준다. 인구 통계상으로 예견된 대학 학생수 감소 시기는 2018년이다. 2015년 무렵부터 대학은 진통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벌써 서울 수도권에서 벗어난 지방의 상당수 대학들은 이미 퇴출 통보를 받았거나, 떨고 있다. 2018년이 다가올수록 소위 '인서울'의 위력은 더욱 커질 것이다. 서울 수도권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모두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그래서 우리 사회가 늘 말하는 측면의 좋은 직장에서 일하며 양질의 삶을 누리고 있을까. 사실 꼭 그렇지는 않다. 그럴 확률이 높을 수는 있겠지만, SKY에도 분명 꼬리가 있고, 졸업후 백수도 많은 것이 사회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보험 드는 심정으로 인서울을 고집하는 경우도 적잖을 것이다. '학연'의 끈이라도 잡아 두는 것이 현명하겠다는 생각일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 끈 붙잡기가 더 힘들어졌다. '인서울'하려고 공부 열심히 하고, 그래서 인서울에 성공했지만 지방 출신의 서울유학생들은 하늘 찌를 듯 비싼 방값 때문에 유학생활이 만만찮다. 겨우 잠만 잘 수 있는 비좁은 고시텔 방값이 최하 40여만원이고, 웬만한 방은 80만원에 달한다. 장학숙 들어가기는 낙타 바늘구멍이고, 정부가 방값 지원에 나섰지만 새발의 피다. 등록금과 방값부터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니, 부모 허리가 휘고, 개천에서 용나기도 힘들게 됐다. 왜 꼭 서울인가. 이제 지방에서 희망을 찾아보기를 권한다. 김재호 논설위원
총리를 비롯 장관들의 인사청문회가 공직 사회 분위기를 바꿔 놓았다. 국회에서 열리는 인사청문회는 엄격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고위공직자 출신들은 부동산 투기, 위장 전입, 병역비리 그리고 불법 증여로 인한 탈세 의혹 등 국회에서 쳐 놓은 조밀한 그물코에 걸리게 돼 있다. 왠만한 사람이면 8·90년대에 재산 모으려고 부동산 투기를 했다. 지금 잣대로 들여다 보니까 그렇지 그 당시에는 별 게 아닌 것처럼 여겼다.고시 합격해서 고위직에 오른 공직자가 월급 모아서 큰재산 모으기란 여간 쉽지 않다. 아이들 가르치랴 품위 유지하랴 쓰는 돈이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로부터 재산을 넘겨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지금까지 월급쟁이 한 사람이 돈 모은 건 부동산 투기를 안하고는 안됐다. 주식투자해서 벌었거나 맞벌이해서 안써서 모았다고 하지만 큰 돈은 부동산 투기해서 번 돈이다.그 사람의 인생괘적을 살피려면 재산형성 과정을 보면 그만이다. 거짓말 할 수 없다. 특히 공직자들의 지난 생활상을 한눈에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간혹 부모 도움 받지 않고 재산을 늘려온 사람도 있지만 거의가 부동산 투기로 번 것 들이다. 공직자가 재산 상속 받지 않고 큰재산을 갖는 것은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전에 개발정보를 입수해서 땅을 사놓으면 그날부터 큰 돈이 쥐어졌기 때문이다.고위공직자들은 개발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맘만 먹으면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공직자가 돈 많이 갖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돈 없는 것도 문제다. 재산이 마이너스인 사람이 단체장을 하는 것은 경계대상이다. 친인척들 한테 도움을 받는다고 하지만 액면 그대로 믿을 게 못된다. 돈 없으면 다른 생각할 수 있다. 부정과 연루될 가능성이 높다. 선출직 단체장은 그래서 재산상태를 봐야 한다.우리 사회가 도덕성을 높히 요구하는 사회로 가는 것은 바람직스럽다. 특히 고위직으로 가려면 노블리스 오블리주와 같은 사회적 책임감이 요구된다. 인사청문회가 업무수행 능력과 자질을 파악하는 자리 보단 때로는 당리당략에 따라 여론몰이식으로 운영된 측면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긍정적인 측면이 많다. 앞으로 선진국으로 진입하려면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야 맞다. 당사자들은 억울하다고 볼멘소리를 하겠지만 이 정도는 참고 견뎌내야 국가와 사회가 건강해진다. 백성일주필
전주완주 통합의 열쇠는 완주군민들이 쥐고 있다. 아무리 통합 당위성이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완주 군민들의 생각이 "이건 아니다."로 굳어지면 통합은 물 건너 가는 것이다. 작년 6월 청주시는 주민투표 없이 청주시의회의의 만장일치 의결로 청주 청원 통합 안건을 결정했지만 청원군은 주민투표를 실시해야 했다. 완주군처럼 찬반이 대립했기 때문이다. 청원군은 작년 6월 27일 청주시·청원군의 통합 주민투표를 실시한 결과 투표율 36.75%, 찬성률 79%로 통합을 확정했다. 2004년부터 시행된 주민투표법에 따라 기초자치단체가 통합을 결정한 첫 사례다. 청주시와 청원군은 인구 83만 명의 통합시로 2014년 7월1일 공식 출범한다. 전주완주도 오는 6월 주민투표를 통해 통합을 결정한다. 전주는 신라시대 이후 천년고도를 자랑하며 단일 지명을 유지했지만 일제 강점기인 1935년 전주와 완주로 나뉘었다. 다시 하나로 합쳐 역사적 정통성과 자긍심을 찾고 경쟁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크지만 78년이라는 세월은 이에 못지 않게 두 지역 간의 간극을 벌려 놓았다. 지금도 완주군민들은 통합반대 기류가 강하다. 본지가 최근 7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더니 통합반대(43.5%)가 찬성(39.7%) 보다 높았다. 통합가능성을 묻는 질문에도 긍정적인 응답 비율은 51.2%에 그쳤다. 가능성을 묻는 질문인 데도 겨우 턱걸이를 하고 있다. 반대이유에 대해선 '특별히 좋아질 것이 없기 때문(32.5%)'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통합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는다는 얘기다. '세금증가(20.9%)'와 '농촌 농업투자 감소(17.3%)', '완주군 소외(12.8%)' '혐오시설 집중(11.7%)' 등 반대사유도 갖가지다. 통합을 이룰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소통이고 소통은 역지사지(易地思之)해야 진정성을 갖는다. 과연 두 자치단체나 의회, 이해 관련 시민사회단체들은 진정으로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사안을 바라보고 이해하려 했는지 궁금하기 이를 데 없다. 당위성이나 기대효과만을, 또는 막연한 불안감과 소외감만을 부각시키며 몰아부치지는 않았는지 성찰할 일이다. 2009년 통합 무산 때에도 '소통 부족으로 인한 공감대 미형성'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었다. 전철을 밟아선 안될 일이다. 넉달 밖에 남지 않았다. 이경재 수석논설위원
며칠 전 어느 모임에서 전통쌀엿을 선물 받았다. 값도 과하지 않고 포장도 예쁜데다 흔하지 않은 전통쌀엿이어서 명절 선물로는 제격이겠다 싶었다. 전통쌀엿은 전국적으로 이름난 곳이 꽤 있다. 임실 삼계마을과 순창 구미마을도 그들 중 하나다. 대부분 전통음식의 대가 끊긴 여건으로 보자면 전통쌀엿의 계승과 부흥은 특별하다. 마을 단위로 생산되는 전통쌀엿의 대물림은 전통음식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영향이기도 하지만 '엿만들기'가 농촌마을의 농한기 부업으로는 썩 괜찮은 품목이기 때문이다. 삼계마을과 구미마을은 행정구역상 임실과 순창으로 나뉘지만 지리적으로는 서로 어깨를 기대고 있는 이웃이다. 이 마을은 모두 전통쌀엿의 역사가 깊다. '임실삼계전통쌀엿'은 그 맛으로 이름이 높아 대표적인 전통쌀엿 생산지가 됐고, '순창동계쌀엿'은 그 명성은 덜하지만 재래식 방식을 고집하며 쌀엿을 만드는 전통의 연륜으로 이름을 지켜왔다. 엿도 산업화되면서 생산방식의 표준화를 외면할 수 없게 되었지만, 이 두마을의 '전통쌀엿'은 같은 대물림 방식을 지키면서도 그 특성이 조금씩 달랐다. 대량생산이 아쉬운 '삼계엿'이 전통방식을 고집하면서도 좀 더 세련된 방법으로 엿만드는 과정에 편리함을 조화시켜가고 있다면 소규모 생산에 자족하는 '동계엿'은 재래식 방식을 그대로 전수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물론 전통쌀엿은 마을 주민들이 품앗이로 만들어내는 농가단위의 부업수준을 넘어선지 이미 오래다. 임실 삼계마을은 10여 년 전부터 이런 상황을 맞아 주민들이 생산방식과 기구개발에 적극 나섰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전통쌀엿의 제조방식이 변질되는 것을 주민들 스스로 경계해 2000년, '삼계전통쌀엿보존회'를 만들었다. 전통방식을 스스로 지키겠다는 다짐과 자정의 의지였다. '동계쌀엿' 역시 그 특성은 소박함에 있었다. 팔기 위해 모양새를 내세우거나 맛에 변화를 가하지 않아 잰 듯 한 품새를 갖추지 못하고 들쭉날쭉 키도 다르고 굵기도 달랐다.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외양에만 있다면 '동계엿'은 '하품'의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겠지만 '있는 그대로의 전통을 그대로 담아낸' 특성으로 본다면 단연 '상품'이었다. '전통쌀엿'이 내세우는 미덕은 맛도 색깔도 다른 '전통제조방식'에 있다. 늘어나는 수요만큼 생산의 규모화가 필요해졌지만, 끝내 '전통방식'을 지켜가야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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